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명산탐방

북천 전적지-묘봉-천봉산

문장대 2020. 10. 30. 16:58

 

- 문장대 이종하의 10월29일(목) 천봉산(상주) 등산기-

* 북천 전적지-묘봉-천봉산(상주)-연원1리 안양마을

 

 

 

 

 

천봉산 정상까지 기록

 

 

 

완주한 경로 사진

 

 

 

북천전적지

 

상주 북천전적지와 이마트 사이 대형 무료주차장

 

북천전적지와 이마트 사이 주차장의 들머리 이정표

 

 

북천전적지 대형 무료주차장에서 이마트 뒤로 오르는 계단 등산로 입구

 

2키로 미터 올라 영암각 갈림길 안부에서 연원마을길로 호기심으로 내려가다가 길이 막혀 뒤돌아 오기도 힘들어 치고 올라 천봉산 능산 만나 정상 힘들게 도착

 

영암각 반대쪽으로 호기심으로 - 옛날 친구들 다니던길

처음에는 길이 좋은 수레길이더니 마지막엔 가시둥치와 벌목으로 길이 막힘-개고생하며 정상방향으로 치고 오름- 고생끝에 능선 등산로 합류함

 

 

 

천봉산을 어제와 오늘 연속 오름- 천봉산 서쪽 루트를 살펴보려고

 

 

대형 평상이 설치된 천봉산 서쪽 첫 봉우리 -이정표 등장- 곧장 가는 세천 먹거리촌으로 가지 않고 좌측 9시방향 능선으로 내려갑니다. 2번째 내려감

120미터 봉우리 지나 급경사 내려가면 나무에 파랑천이 이상하게 걸려있다. 태풍에 걸린같음

여기서 200미터 내려가다가 묘지 있는곳에서 좌측 11시 방향으로 내려감 --어제는 1시방향으로

 

 

 

천봉산 서쪽 루트 2째 봉우리 301봉 - 이곳 아래 묘지 보여 이정표 역할 301봉에서 5미터 내려가 11시 방향으로 하산 -- 하루 전에는 우측 1시 방향으로 하산. 11시 방향이 더 좋은길 등장

 

비교적 급경사를 200미터 내려오면 쉼터 바위 등장

 

다시 100미터 내려오면 갈림길 등장 -- 11시 방향은 고생길 - 약간 우측인 1시 방향으로 내려감

11시 방향은 죽은 나무로 막음

 

 

 

 

 

 

 

 

사람이 많이 안다녀 고생하며 내려와 도로 합류- 도로 합류 500미터전 양갈래 길에서 능선으로 안내려오고 좌측 낮은 곳으로 내려와 알바를 200미터 하고 고생좀 함 -능선으로 직진했어야 함

 

도로 따라 2키로 미터 걸어갑니다. 버스는 놓치고 택시는 안타고 ㅎㅎ

 

도로 옆 마을회관 지나고

 

도로옆 해와달-커피,피자점도 지나고

 

 

 

안양마을에서 2키로 미터 내려오며 느티나무카페-해와달카폐 -해가마을-흥암서원 입구 지나 이곳 연원1,리마을 입구 연원교 도착-입구사진 - 해와달은 전에는 산모퉁이 오막살이 간판임

 

 

명승지 소개

 

 

봉강-연원사이고개 물넘어고개 300미터전 정자와 선돌

 

 

도로변에 당산(堂山)을 만나는데, 당목(堂木) 한 그루와 선돌이 이색적이고, 정자는 정화루(丼和樓)라 했다. 선돌은 높이 60cm에 평면 원형으로 만든 석단(石壇)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데, 크기는 높이 74cm, 34cm 정도이다. 여너물은 오대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서쪽 마을은 아래 여너물, 동쪽 마을은 웃 여너물이라고 하고, 가운데 마을은 그냥 여너물이라고 부른다. 전하기로는 옛날 이곳에 우물이 있었으며, 이 우물에 연꽃이 피어서 연우물이라고 불리던 것이 변음되어 여너물로 불린다고 한다. 지금은 작은 저수지만 있다

[출처] 상주 연원 하곡서당(霞谷書堂)|작성자 kkhn54

 

 

 

 

 

물넘어 고개 가기전 우측 마을로 진입하면 오랜 전통의 하곡 서당 존재

 

외서면 봉강리로 넘어가는 고개 우측의 민가 몇 채가 있는 웃 여너물 북쪽 천봉산(天峰山, 435.8m) 서쪽 자락에,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 목사의 재임(1552~1554) 기간에 세운, 하곡서당(霞谷書堂)은 남향(南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앞은 야트막한 산이 뱀처럼 길게 남쪽을 감싸고 있어, 아늑하고 온화한 곳으로 여느 서당과는 건물의 모습이 다르다. 신잠은 신숙주의 증손이다. 상주 사람의 교육을 위해 재직시 18개의 서당을 상주 관내 곳곳 새운 목민관임.

[출처] 상주 연원 하곡서당(霞谷書堂) kkhn54

 

본관은 고령()이며 는 영천()·아차산인(), 자는 원량()이다. 영의정 숙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예조참판() 주()이며 아버지는 예조참판 종호()이다.

1513년(
중종 8) 진사()가 되고 1519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나 그 해에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그 후 20여 년 간 양주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였다. 1543년(중종 38) 재등용되어 사옹원주부(簿)·태인현감()·간성군수() 등을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상주목사(使)에 임명되어 재직 중 죽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다 한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 불렸으며, 특히 묵죽()과 포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저서에 《영천집()》, 그림에 《설중기려도()》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잠 [申潛] (두산백과)

 

 

 

 

 

 

 

 

 

 

 

북천교 지나

 

북천교 옆 7-8주공아파트 지나 상산초등 근방 자택도착

 

 

 



경로 ▶북천 전적지 -천봉산-연원리 안양마을

 

어제는 천봉산 서쪽인 물넘어 고개(연원-봉강 사이 고개)에서 출발하여 다소 험한 능선을 타고 356봉과 천봉산를 다녀왔다.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지만 희미한 등산로를 신경쓰며 창의적으로 다녀와야 했다. 마지막에 약간의 알바를 해서 조금 고생은 했지만 그정도는 고생이 아니다. 오늘은 반대쪽이고 정상 등산로인 북천전적지에서 출발했다. 모든 등산인은 거의 이곳 북천전적지와 이마트가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출발한다. 이 등산로는 상주시민의 생명연장 등산로이다. 이정표는 물론 테크계단, 정자 등이 있고 운동기구도 있는 등산코스이다. 등산로도 평지가 많고 확실하여 금상첨화이다. 자택에서 출발하여 많은 등산인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자산-중봉(묘봉)을 지나 영암각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곳 갈림길을 통하여 연원마을 주민과 학생들이 상주만산에 있는 중학교와 버스를 타기위해 오르내렸는데 상주로 오는 지름길이다. 중학교 친구들과 은사님이 60-70년대 이전 매일 이곳을 오르내리는 중요한 길이었다.

 

이곳 갈림길에서 잠시 망서리다가 중학교때 친구들이 다니던 곳이라 길이 어떤가 궁금해서 다소 빤빤한 넓은길이 보여 진입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길이 좋고 묘지도 보이더니 300미터 진입하니 잡목과 가시가 길을 막는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더 이상 연원마을로 갈 수 없다. 뒤돌아 가기도 힘들고 해서 묘지 2곳을 거쳐 그냥 치고 올랐는데 벌목을 방치해서 너무힘들었다. 곧 능선을 만나고 올랐더니 능선등산로를 만났다. 의자 2개 있는곳이고 내가 올라온 곳을 나무로 막았다. 누군가 나처럼 그쪽으로 갔다가 고생한 모양이다. 오르는 도중 좌측 능선이 보여 어제 내려간 길이라 생각되니 오늘도 또 그곳으로 하산하리라 맘먹었다. 오고가며 만난 등산인들에게 문의하니 그곳 길은 아무도 모르고 이구동성으로 그쪽으로 가지마라고 건의한다. 그러겠다고 답했지만 어제 내려간 길이니 또 내려갈 생각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봉산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다. 사방을 조망하니 역시 지상 찬국이다. 내가 내려갈 연원마을 곳곳 평화롭게 조망된다.

 

천봉산에서 조금 쉬다가 서쪽 방향 200미터 내려가니 천봉산 이후 첫봉우리에 평상이 설치된 곳에 이정표도 있다. 여기 이정표는 세천으로 가는 이정표이다. 빤빤한 세천가는 정상 등산로를 버리고 좌측으로 희미한 하산로를 택하여 120미터 내려갔다. 어제 내려오던 길이니 낯설지 않고 안심이다. 나무에 걸쳐진 푸른천을 오늘도 보고 급경사를 하산하니 묘지 2곳이 등장한다. 이곳이 또 갈림길이다. 어제는 우측 1시방향으로 갔는데 오늘은 좌측 11시 방향으로 내려갔다. 약간 희미한 길이 이어지더니 차츰 길이 좋아진다. 묘지도 보인다. 점점 좋아지는 하산로를 내려가며 기분이 좋았다. 주변 보리사절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웅장하다. 한참 내려오니 거의 평지가 보일 무렵 양갈래 길이 등장한다. 좌측길을 택하여 고랑으로 내려갔다. 여기서부터 알바의 시작이다. 똑바로 능선으로 가야했는데 조금 낮은 계곡 방향으로 길이 보이길래 내려갔더니 길이 슬며시 없어지고 도랑이다. 도랑은 길이 없어져서 언덕으로 건너뛰어 오르니 벌목 지대다. 좋은 길을 두고 내려와 후회막심이다. 벌목지를 힘들게 내려오니 오래된 밭으로 황무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배수관도 보인다.

 

길이 안보여 우왕좌왕 하다가 검은 배수관을 따라가니 아카시아 잡목이 우거져 얼굴을 찌로고 강타하여 고생막심이다. 어제도 200미터 알바하여 고생하다가 임도를 만났는데 오늘도 또 마지막 하산 시점에 고생이다. 투덜거리며 험한 비탐길을 이리저리 내려가니 논이 나타나고 파랑천으로 맷돼지 피해를 막기위해 1미터 높이로 막아 놓았다. 더 이상 다른곳으로 내려 갈곳이 없으니 다리를 번쩍들어 파랑천을 눌러서 겅충 넘었다. 휴!하며 논뚝따라 저 멀리 보이는 농로를 향해 빙빙돌아 간다. 나중에 오룩스 맵을 살펴보니 좌측에 길이 있는 줄도 모르고 역으로 간셈이다. 농로로 내려가다가 도로에 도착하여 살펴보니 도로 옆 산에서 오르면 큰고생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있을 같다. 그곳으로 천봉산 등정을 나중에 다시한번 도전 해볼 생각이다. 도로에 도착하니 하수도 공사중이고 택시가 지나간다. 택시타고 귀가하려다가 참고 3-4키로 미터의 거리를 도보로 가면서 체력을 중진시키고 나의 등산거리를 늘일 작정을 했다. 맨날 5-7키로 미터의 거리를 다녔으니 오늘은 도로길이지만 10키로미터를 걸을 작정으로 마음먹고 시도했다.

 

지방도이고 이면도로이지만 많은 차들이 쌩쌩거리며 지나가서 위험하다. 하지만 미리 피하고 조심해서 걷고 걸으니 점점 북천 전적지가 가까워진다. 이길은 흥암서원과 남장사 - 연수암 가는길이며 요새 3일간 다니던 길이다. 그리고 이길은 평소 산책길이다. 조금 무리한 거리를 걸었으나 멋진 가을 단풍을 구경하였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출발지인 자택에 도착했다. 오늘 마지막에 알바를 하여 조금 아쉽지만 즐거운 등산을 했다고 생각한다. 알바도 등산의 일부가 아닌가!!! 등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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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잠 선생님의 추가 자료

 

- 다음은 조선 명종-중종때 신잠(1491년-1554년)에 대하여 소개해봅니다.

신잠은 상주에서 군수하다가 이곳에서 병사한 목민관입니다. 구리시에 묘역 존재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은 초등학교격인 서당이 있고, 중등굥육기관인 향교가 있다. 상주는 조선시대에 비교적 큰 고을이어서 교육기관이 발달했다. 조선 중기 신잠은 상주군수로 재직하면서 관애 17서당을 신설했다. 함창 향교와 상주 신봉 향교는 중등 교육을 했고, 도남서원, 옥동서원, 임호서원 , 흥암서원 등 여러서원에서 역시 교육을 담당했고, 유명한 조선의 의료시설 존애원도 교육을 실시했다. 우선 신잠의 약력에 대해서 알아본다.

신잠()[1491~1554]의 본관은 고령(), 자는 원량(), 호는 영천자() 또는 아차산인()이라고 하며 아차산에 은거할 때 시와 서화에 몰두했다. 시·서·화 의 삼절()로도 유명하다. 또한 20여 년의 유배 생활을 끝냈을 때 신잠의 재능을 아까워한 임금의 배려로 태인 현감과 상주 목사를 지냈다. 그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같이 따랐으며 조정에서는 청백리()의 칭호를 내렸다. 그의묘는 구리시에 존재한다.

1749년(영조 25)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찬술한『상산지(商山誌)』「청대본」에는 모두 24개소가 등재되어 서당별로 위치와 창건년대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그 중에 17개 서당은 신잠 목사 재임중에 창설하였다고 한다. 청대본에 수록한 서당은, 하곡(霞谷) ‧ 노동(魯東) ‧ 도곡(道谷) ‧ 석문(石門) ‧ 수양(首陽) ‧ 수선(修善) ‧ 용문(龍門) ‧ 영빈(潁濱) ‧ 매악(梅嶽) ‧ 오산(梧山) ‧ 고봉(孤峰) ‧ 봉성(鳳城) ‧ 백화(白華) ‧ 봉암(鳳巖) ‧ 송암(松巖) ‧ 지천(智川) ‧ 죽림(竹林) 등 16개 서당은 신잠 목사 재임 중에 설립하였다고 하고, 뒤이어 벽익(闢翼) ‧ 반계(磻溪) ‧ 지산(芝山) ‧ 수계소(修稧所) ‧ 존애원(存愛院) ‧ 향약사(鄕約社) ‧ 향약당(鄕約堂)을 수록하였다.

 

 

 

위의 서당 중 도곡서당, 죽림서당, 봉암서당, 지천서당은 답사한 바있고. 하곡서당은 오늘 답사했습니다.

 

 


1786년(정조 10)에 조목수(趙沐洙)가 간행한『상산지』「구당본 초책(草冊)」과 1832년(순조 32)에 간행한『상주목읍지(尙州牧邑誌)』에는 서당에 관한 기록이 없다.
『상주목읍지』가 간행되고 39년이 지난 1928년 일제강점기에 간행한『상산지』증보판의「3.학교조 서당목(三.學校條書堂目)」에는 청대본 그대로를 수록하고 8개 서당을 증보하였다.『상산지 증보판』에 추가 수록된 서당은, 운수(雲樹) ‧ 삼봉(三峰) ‧ 미산(薇山) ‧ 동강(東岡) ‧ 기산(箕山) ‧ 청림(靑林) ‧ 반암(盤巖) ‧ 무봉(舞鳳) 등 8개 서당이다.
상산지에 수록되지 않은 전통서당으로 현재에 까지 남아있는 서당으로 외서면 이천리에 이천서당(伊川書堂)이 있다. 금중현 논문,「상주의 국채보상운동 의연사실」, 2016,『경상북도 상주시 국채보상운동 조사연구 보고서』, 2016.12.15. pp27~60. 에 의하면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 당시 상주의 국채보상소가 이 마을에 설치되었고 이 마을의 이호서당(伊湖書堂)에서 의연금을 출연한 바 있다. 두 서당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호서당은 오늘의 이천서당의 전신으로 본다.

 

금중현 선생님의 빛마당 카페에서 퍼온글입니다.

 

상주 이안 구미리의 죽림서당-신잠이 새운 서당

 

도곡서당

상주시 서곡동 도림사 옆의 도곡서당-상주목사 재임시 신잠에 의해 지어진 17개서당 중 하나 - 신잠 군수 대단합니다. 상주고을 곳곳에 교욱기관을 지은 멋진 목민관입니다.

 

봉암서당-화동선교리 존재-2번째로가서 촬영했네요. 원통산은 오늘 들머리를 모르는데다 체력 저하로 못갔습니다. 오르려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귀가

봉암마을 가는 길이 농로이고 차들이 길을 막아서 이리저리 가야하고 그곳 가기가 다소 힘드니 참고바랍니다.

청리면 청상2리에 새로개수한 수선서당이 청상저수지 앞에 있습니다.

 

앞으로 신잠이 지은 서당 17개중 14곳 미답지 서당을 답사해서 올리겠습니다.

신잠은신숙주의 증손자이고 한명회의 외증손이다. 태인면사무소에 그의 목형이 전시되어잇다.

신잠은 18개의 서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으니 그 서당은 다음과 같다.
1.수선서당(修善書堂)청리
2.백화서당(白華書堂)중모
3.도곡서당(道谷書堂)읍
4.용문서당(龍門書堂)공성
5.하곡서당(霞谷書堂)내서
6.석문서당(石門書堂)사벌
7.수양서당(首陽書堂)외남
8.노동서당(魯東書堂)읍
9.영빈서당(瀛濱書堂)영순
10.매악서당(梅嶽書堂)사벌
11.오산서당(梧山書堂)중동
12.고봉서당(孤峰書堂)낙동
13.봉성서당(鳳城書堂)단밀
14.봉암서당(鳳巖書堂)화서
15.송암서당(松岩書堂)외서
16.지천서당(智川書堂)읍
17.죽림서당(竹林書堂)화서 1개 서당은 불명.
고을 사람이 상주 옥성(玉成)서원에 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