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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과 기축옥사

문장대 2023. 4. 19. 23:59

조선시대 동인과 서인과의 당파 싸움에서 서인이 득세하게된 사건의 하나이다.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논하기 전에 정여립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 잘난 미남이라고한 정여립 초상

 

 

* 출생 - 사망 : 1546년(명종 1) ~ 1589년(선조 22), 성장과정, 정치계 근무 과정, 낙향배경

정여립의 자는 인백, 본관은 동래, 출생은 전주, 경사와 제자백가에 능통 1570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여립의 태생 설화에서는 고려 중반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 정중부 태몽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어릴때 자기집의 여종이 자기의 잘못을 알렸다고 살해한 무서운 아이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여립이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 새를 잡아다가 찢어 죽인 것을 여종이 정여립의 아버지에게 알렸고 이후 아버지에게 혼난 정여립이 앙심을 품고 여종이 자는 틈을 타 배를 갈라 죽인 다음 다음날 "이 아이가 나의 잘못을 일러바쳤기에 내가 죽였다."고 태연하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15세 때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때 아전들이 군수보다도 더 어려워했다 한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었으며,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었고, 1570년(선조 2) 식년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수찬의 벼슬까지 지냈다. 너무 명석한 정여립을 당시 유명한 학자 이이()와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일세의 이목을 끌었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편에 반부()하여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방약무인한 성격은 벼슬에 나간 후에도 후에도 그대로여서 어전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왕을 노려보았다는 야사도 있다. 당연하지만 왕이 '고개를 들거나 '내 얼굴을 보라'는 말이 있기 전까지는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런 미친 짓을 했다면 카더라식 야사가 돌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정여립의 목이 날아간 자초지종이 쓰여졌을 것이다. 정여립의 행동이 맘에 안드니 당시 임금들도 좋아할리 있을가? 무서운 성격을 본 임금 선조가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또 자기가 서인이면서 서인을 공격하는 편에 앞장서게 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이와의 문제로 서인의 미움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선조의 눈밖에 나서 동인의 역천()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정여립이 이퇴계를 찾아와서 제자가 되길 원했으나 한여름에도 의관을 갖추고 너무 완벽한 모습을 전해들은 이퇴계는 전주에서 천리길을 찾아온 정여립을 아예 만나 주지도 않고 되돌려 보냈다. 이이를 배반하고 퇴계 문하에서 살고 싶었던 그는 철저히 퇴계 문인들로 부터 초반부터 외면 당하였다. 이런 연유로 퇴계의 수 많은 문인들은 후에 기축옥사에 연루되지 않아 동인 계열이었지만 모두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동인 사이에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다. 특히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 정여립 모반의 근거되는 과정(정여립 일파로서는 억울한 과정)

 

그는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했을 때는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응하여 대동계를 동원,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모사()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혜택을 받은 전주부윤 남언경은 끝까지 정여립은 역모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고 억울한 누명을 받은 분이라고 주장한 사실은 정여립의 역모가 간신들의 모함과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지키고 반대파인 동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꾸며진 역모사건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역모를 주장 했다면 왜적이 우리나라 해안을 침범하고 분탕질 할 때 망하도록 그냥 두지 뭐하려고 왜적을 몰살시켰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이 역모사건은 억울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 그리고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미리 예측한 고변이었다는 점이 꾸며진 역모사건이라고 보는 분도 많다. 이런점은 1521년에 일어난 신사무옥과 같다. 1589년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기준으로 당시 80년전 일어난기묘사화와 78년전 일어난 신사무옥은 참으로 기막힌 사건이지만 1589년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사건도 좀 미지근한 역모사건이다. 그렇다면 특출한 정치가 정여립은 억울하게 죽었고 우리나라 역사로 봐서는 홍경래, 전봉준, 이인좌와 같이 안타까운 인물이 천하의 역적으로 치부된 사건이다. 이 4사람이 일으킨 난은 현재 사극이나 여러 비슷한 역사의 단편극으로 자주 방영되었고 소설가들이 이들의 사건을 작품으로 만들어 역사소설로 많은 국민들이 독서하고 있다. 그리고 민간에서도 이들의 난을 일으킨 배경과 과정을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 많이 회자되고 있다. 하여튼 정여립은 영국의 크롬웰 같은 분이라고 어떤 분은 말한다. 

* 정여립의 모반사건(1589년-선조22년) 전개

전라북도 진안 죽도에서 서실을 운영하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예대회를 열고 자기 나름대로 멋지게 살아가는 정여립은 전주부윤의 요구로 왜적을 퇴치한 경력이 있는 정여립은 황해도에 아주 부유한 여자를 알게되어 많은 돈을 얻어 잘 살고 있는 임금으로 봐서는 눈에 가시처럼 보여진 같다. 대동계를 조직하고 전국으로 확대하며 신분을 제한하지 않고 나라의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부윤 남연경의 요청으로 관군이 왜구의 침입을 번번이 막지 못하고 실패하자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야간 기습으로 왜적을 소탕하였다. 안악의 변승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이 모사에 가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5년전이었다. 이이, 박순, 성혼 등 서인을 배반한 정여립은 그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지만 너무 잘 살고 있었다. 마치 파당을 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성공하여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선조임금으로 봐서는 서인을 배반하고 자기를 배신하며 낙향한 정여립이 안그래도 너무 똑똑하고 미워죽겠는데 때마침 황해도의 여러 수령들에게 고변이 들어왔다. 1589년 정여립 일당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고변이 황해도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혔다. 한편, 그는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허무하게 자살하고 말았다. 당시 조정은 참으로 이상했다. 3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을 죽이려고 한 선조의 이상한 생각이 참으로 안타깝다. 임진왜란 전의 소규모 도적같은 왜구를 물리친 정여립도 당시 왜구을 물리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선조임금에게 의심을 당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라를 위해 도와주는 사람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이상한 선조 임금을 지금 500년후 필자는 올바른 임금인가를 생각해본다. 

 

* 기축옥사(1589년) 발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3년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역모라는 사실로 굳어지고 이들의 역모를 다스리는데 당시 좌의정인 정언신은 정여립과 9촌간 집안이라 탄핵을 당하여 위관에서 물러나고 좌의정까지 내려놓아야 했다. 이때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 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는 거의 제거되었으니, 비명에 숙청된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0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런데 그의 모반사건에 대해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뉘어져 있다. 조작설의 이유로는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 모반의 조작설

첫째, 그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수신()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둘째,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 같은 야사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칼을 땅에 꼽고 죽은 것이다. 죽는 사람이 어찌 칼을 땅에 꼽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는 설.

 

기축옥사는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의 채택에 신중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동인 사이에 구전되어오는 설을 직서했다고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에 의하면, 고변이 있자 일반인은 그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했다는 것이다. 즉, 그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이었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인을 환천()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모반의 타당설

반면, 그의 모반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그가 남긴 문자 중에 천하공물설()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는 하사비군론()을 들고 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인의 통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가 성지화자()라고 칭찬한 유하혜()의 말을 인용한 하사비군이라는 말은 참으로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신채호()가 일찍이 지적한대로,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전부터 있었던 목자()는 망하고 전읍()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하여 전읍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정감록을 퍼뜨리고 그것을 믿게 했다 한다. 왕조의 운수가 다해 천명이 타성에게 내려 새 왕조의 출현이 필연적임을 믿는 것이 도참신앙이고, 이것을 고의로 조작했다는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참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을 은밀히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은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공통성은 있으나, 역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소만록(桐巢漫錄)』
  • 『동남소사(東南小史)』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송강전집(松江全集)』
  • 『단재전집』(신채호, 형설출판사, 1972)
  • 「정여립연구」(김용덕, 『조선후기 사상사연구』, 을유문화사, 1977)

    [네이버 지식백과] 정여립 [鄭汝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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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일으킨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그로인한 기축옥사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 정여립의 출생과 사망까지의 모든 자료를 먼저 살펴봅시다. (자료출처-네이브 지식백과 나무위키)[네이버      지식백과] 정여립 [鄭汝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여립의 출생-1546년. 사망 1589년이며 조선의 문신, 학자,유교신자 전주출신 서인, 동래 정씨이다. 정여립은 조선시대의 문신겸 사상가,공화주의자, 정여립모반사건인 기축옥사가 등장한다.본관은 동래이고 전주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전북 전주시의 도로명 중에도 정여립로가 있고 완주군 상관면에 정여립 생가터가 있다. 태어난 곳은 전주인데 생가터의 지명이 완주군 상관면인 이유는 과거 전주시와 완주군은 원래 같은 전주군이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도농 분리 정책으로 인해 도시 지역인 전주부와 농촌 지역인 완주군으로 행정 구역이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을 <연려실기술>에는 전주성 남문 밖이라고 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주성 동문 밖이라고 하였다. 태생 설화에서는 고려 중반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 정중부 태몽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데 1570년(선조 3년) 과거에 급제하여 1584년 수찬의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여립이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 새를 잡아다가 찢어 죽인 것을 여종이 정여립의 아버지에게 알렸고 이후 아버지에게 혼난 정여립이 앙심을 품고 여종이 자는 틈을 타 배를 갈라 죽인 다음 다음날 "이 아이가 나의 잘못을 일러바쳤기에 내가 죽였다."고 태연하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방약무인한 성격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대로여서 어전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왕을 노려보았다는 야사도 있다. 당연하지만 왕이 '고개를 들거나 '내 얼굴을 보라'는 말이 있기 전까지는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런 미친 짓을 했다면 카더라식 야사가 돌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정여립의 목이 날아간 자초지종이 쓰여졌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반체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정여립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해 꾸며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인조 대에 조선 전기의 야사들을 모아서 편찬된 <대동야승>에서는 “정여립은 넓게 보고 잘 기억했으며 논의가 격렬하여 마치 거센 바람이 부는 듯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총명하고 박학다식했다는 평가 역시 전해진다. 한마디로 정여립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잔인한 살인자, 무례한 반역자라는 프레임을 씌운 확률이 높다는 것. 원래 자신의 입지 확보를 위해 율곡 이이와 성혼의 문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서인에 속해 있었지만 이이가 죽은 후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는 물론 서인의 영수인 성혼, 박순 등을 비판했다. 이는 당대 사람들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였는데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이가 모친 신사임당의 죽음에 충격 받아 잠시 불가에 몸을 담은 적이 있는데 정여립이 이 사실을 발설하는 바람에 유학자 이이의 이미지를 엄청 깎아먹었다. 결국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여립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했다거나 스승 이이의 이미지를 깎아먹었다는 등의 얘기는 사실 서인 측에서 주장한 것뿐이다. 율곡 이이 자신부터가 양시양비(兩是兩非)를 주장하며 서인과 동인 어느 측에도 속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이이가 학문이 높지만 한때 승려 생활에 몸 담은 전력 때문에 출사를 못했으므로 불가에 몸 담았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여론 기관인 삼사의 관리를 추천하고 자신의 후임을 지명할 수 있어서 권한이 막강한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서 왕의 외척인 심의겸과 심충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를 반대하는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서인과 동인이 갈라지니 이것이 동서 붕당의 시발점이다. 한편 이이, 성혼, 박순 등은 붕당을 꺼리던 대표적인 인물들로 후일에도 붕당을 최소화하려 노력하지만 서인으로 분류되고 정여립은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되니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심의겸과 김효원 이전에는 서인과 동인 당색 자체가 없었는데 훗날 소급 적용하여 이이의 제자이니 서인이고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겼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박순, 허엽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스승에게 배워도 서인과 동인으로 당색이 달라지니 당색이 학문적 성향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이가 스스로 서인이라고 한 적이 없었으나 선조 시대에 관료 생활을 시작한 이황 조식의 제자들이 이전에 진출한 기성 사림들을 변절자들이라는 식으로 깎아내리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이와 성혼은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편협한 젊은 사림들은 이들이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고해서 서인이라고 낙인찍고 비난하매 이에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대체로 서인의 학통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정여립은 이러한 분위기를 보았음에도 스승을 모욕한 자들과 어울리면서 앞장서서 이와 같이 주장하였으니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원인은 간단하지 않다. 왕의 외척을 편들면 왕을 위하는 것 같지만 역사적으로 외척의 발호는 왕권의 약화를 불러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는 동인은 서인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것이다. 동인 입장에서 서인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파기한 세력이고 서인은 왕의 정통성을 이유로 임금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 훗날 예송논쟁의 기저에 깔린 정서가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서인 측이 정여립을 스승에게 대들었다지만 동인 측이 볼 때 서인은 임금에게 대드는 것이다. 붕당 당시 상황을 단지 노쇠한 기득권 세력과 버릇없는 신진 세력과의 세력 다툼으로 볼 수만은 없다. 당시 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동인에 의해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되던 송익필의 조모가 노비임이 들춰지며 송익필 일가 70여 명이 노비로 환천(還賤)되는 일이 발생한다. 동인은 서인 송익필의 부친 송사련이 좌의정 안당과 그 아들들을 고변하여 멸문시키고 재산과 노비들을 가로챈 행적을 들어 서인을 도리에 어긋난다고 비난하였다. 안당의 부친 안돈후와 노비인 첩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송사련의 모친이고 송익필의 조모가 된다. 송사련은 신분이 천했지만 안당의 배려 덕에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안당의 집안을 멸문시키고 재산과 노비들을 빼앗은 건 동인에서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설에는 서인의 책략가로 통하던 송익필이 노비로 환천된 자신의 일가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이 일을 들춰낸 동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정여립 사건을 기획했다는 설도 있다. 송익필과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 가장 뜻이 맞는 사람이 정철이었고 정여립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가문이 동인의 영수 이발인데 이발은 송익필 집안이 노비로 환천되도록 주도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히는 송익필은 노비가 아니라 조모가 얼자 출신이다. 양인과 천민이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낮은 신분인 천민이 되는 법이기는 하지만 양반과 노비 출신 첩 사이에 낳은 자식을 노비로 한다는 말은 들어보도 못한 말이다. 송익필의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는데 조선 시대에 노비가 하급 관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동인은 조사 결과 양친이 모두 노비라는 명목으로 송익필과 일가를 모조리 환천시켜 버렸다. 대다수의 일가는 일단 도망갔으나 당연히 추쇄가 시작되었으며, 송익필은 결국 자수하여 장례원에서 노비로 확정이 된다. 그러나 안당의 가노로 떨어진 건 아니라서 유배와 석방을 반복하며 전국을 떠돌았고 후일 인조때 서인이 정권을 잡자 복권되었다. 인망이 높았던 정여립에게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차린다. 이곳의 이름 때문에 바다 위에 있는 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진안의 금강 상류에서 구량천과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섬 모양의 지형이다. 하중도까지는 아니고 금강과 구량천이 아슬아슬하게 잘록목을 이룬 호리병 모양이다. 정여립은 죽도에서 활쏘기 모임을 하는 등으로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유학의 이상사회가 '대동(大同)')를 만들었다. 대동계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모임이었고 이는 정여립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뛰어난 학식과 통솔력, 활 솜씨를 겸비한 정여립을 추종하는 동인의 무리가 많았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그의 명망이 높았다. 후일 정여립의 난 당시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간 선비 호남에는 1,000명, 영남에도 수백 명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옥사를 기점으로 하여 영호남, 특히 호남 출신의 과거 급제자 수는 크게 줄어든다. 물론 호남 사림이 완전히 가 마른 것은 아니었다. 주로 피해를 입은 호남 사림은 전주 일대의 동인 계열 사림들이었고 무엇보다 옥사를 확대시킨 세력 중에는 서인 계열 호남 사림도 있었다. 훗날 선조가 "과인이 간악한 정철에게 속아 호남의 어진 선비들이 고초를 겪었다"며 화해의 손짓을 내밀기도 하였으니, 호남이 정치 아니면 먹고 살 길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후에도 광산 김씨처럼 정치적으로 노론에 속한 가문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옥사를 기점으로 호남 민심이 정치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 1528 ~ 1594)의 요청으로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손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했다. 이를 볼 때 대동계는 관군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남언경은 이 때 정여립의 손을 빌렸다는 이유로 한패로 몰려 모반 사건 이후 탄핵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정여립이 무고하다고 생전에 항변했다. 1589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진격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을 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금부 도사를 보내 정여립을 체포하도록 지시했고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쳤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살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 사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먼저 정여립이 도망친 곳이 죽도인데 정여립은 이미 죽도에서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고 이는 조정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죽도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죽도로 도망쳐서 관군에게 포위되어 자결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이끌고 있던 곳은 전라도 진안인데 황해도 관찰사인 한준이 상소를 올렸다는 점, 당시 조선에서는 모반 사건에 대해 암행어사나 승지 등을 파견해 해당 사건을 면밀히 조사한 후 한양으로 압송해 국문을 통해 역모 여부를 판단하는 등 엄밀한 조사 과정을 거쳤는데 아무런 조사 과정도 거치지 않고 군대가 먼저 갔다는 점도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여립이 과연 모반을 꾀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물론 그의 대동계가 무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불과 2년 전에 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동참해 달라고 의뢰할 정도라면 이미 관아에서도 용인한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여립의 행동은 모반을 꾀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데 만약 정여립이 진정 모반을 꾀했다면 자신의 계원들을 이끌고 싸워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의문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은 조작된 모반 사건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동인에서는 정여립이 죽도에서 대동계원들과 잔치를 벌이다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다만 정여립의 형 정여복과 정여립의 사위인 김경일이 정여립의 행동을 수상하게 생각했고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던 승려인 도잠과 설청 등은 정여립이 반역을 한다고 생각해 도망치기도 했으며 이발의 동생인 이길이 정여립과 만난 후에 이발에게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고 편지를 쓰기도 한걸 보면 정여립의 행동이 수상쩍기는 했던 모양이다. 정여립은 시대를 앞선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 즉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요"이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훗날 부각되어 반체제적인 인사로 낙인찍혔다. 이 말 앞에는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에는 위나라가 정통임을 주장하는데 주자는 이를 부정하니 참 신기한 일이다."라는 말이 붙어있다-). 그의 천하공물론은 라틴어에서 '공화국'을 가리키는 용어 "res publica"와 그 의미가 일치한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공중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국가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 그는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기도 했다.왕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선진적인 사상인셈. 신분제에 대한 비판은 만적 등 이전부터 있었고 정여립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 과거의 사상을 가져온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이렇게 보면 정여립은 한반도에서 기록상으로 드러나는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때문에 신채호는 그를 많이 띄웠다. 종종 전북 지역 신문이나 책에서 올리버 크롬웰보다 60년 앞섰다며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띄워주는 걸 볼 수 있다. 이는 종종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지역 출신 인물의 지나친 띄워주기인데 이미 15세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있었고 고대 로마도 공화정을 했었다.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 공화주의의 대표로 여겨지는 인물이지 서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공화주의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란 선전은 반박이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선조수정실록>을 포함하여 대체적으로 그가 자결한 이후 시신이 한양으로 이송되어 육시를 당하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영조 시기에 작성된 <봉사말록>이나 남하정이 쓴 동인 계열 당론서인 <동소만록>에서는 죽도로 놀러간 정여립을 진안 현감 등이 꾀어내 살해하고 이후 자결한 것으로 꾸며 상소를 올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보면 정여립이 자살한 것은 맞는 걸로 보이는데 정여립이 자결할 때 그 자리에 있던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과 박춘룡은 정여립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을 심문했던 사람은 정여립과 9촌 관계로 정여립과 가까운 사이라고 유배되었던 정언신이다. 이후 선조가 친국하는 자리에서도 정여립이 타살당했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정옥남과 박춘룡은 잡혀온 후 한참 동안을 감옥에서 심문 받고 권정례 후 처형되었는데 만약 서인이 정여립을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한 게 사실이라면 서인들이 그 때까지 정옥남과 박춘룡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실상 정여립의 난은 서인이 동인의 씨를 말리려 한 구실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 때 가장 앞장서서 동인을 몰아내려 했던 인물이 서인의 정철이었지만 뒤에서 조종한 것은 사실상 선조였다는 평가가 대다수. 하지만 임금을 미워할 수는 없으니 결국 타깃은 정철이 되었다.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정철이 선조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만다. 이에 대해서 정철이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 대신 광해군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정철이 투옥된 이유는 건저(建儲) 문제인 선조에게 왕세자 책봉을 건의하는 문제의 총대를 매었기 때문이었다. 동인과 함께 건의하려다가 동인 측이 빠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혼자 제기한 셈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건저(建儲)의 당시 조정 상황은 정철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선조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서 건저를 의논하고자 삼 정승을 불렀는데 당시 영의정이 이산해, 좌의정이 정철, 우의정이 류성룡이었다. 정철 정도면 거기서 "신성군이 가한 줄로 아뢰오."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자리에서 꿋꿋이 광해군을 지지한 그도 책임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정철은 류성룡 덕분에 약 사발 안 먹고 살아남을 수는 있었는데 이산해는 당장 갈아버리자고 했다. 정철의 대표적인 작품 사미인곡이 유배 문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에 쓰인 작품은 아니다. 세자 건저 문제로 귀양간 것은 1591년 2월이고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1585년과 1589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정여립 모반 사건 동인 남인 북인으로 갈라진 하나의 계기로 설명하고 있다. 상술하듯 정철이 세자 건저라는 트롤링을 벌여 서인을 말아먹을 시점에 동인은 이것을 서인을 몰아낼 구실로 삼았다. 이 때 정철 축출에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타격을 많이 받은 쪽)들을 북인,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은 쪽)들을 남인으로 본다. (자료출처-네이브 지식백과 나무위키)[네이버지식백과] 정여립 [鄭汝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여립에 관한 여러 자료
  • 1991년 KBS 드라마 <왕도>에서는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다. 홍국영 가문의 주요한 비밀인 '대동계' 명단을 보관한 사람으로 나온다. 나레이션으로 정여립 모반 사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사 1마디 없이 폼을 잡다가 칼에 맞아 죽는걸로 퇴장한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안내상이 연기했다. 류성룡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류성룡과 언쟁을 벌인 이후에 사라진다. 이후 대동계를 조직해 그들을 이끌고 왜구와 싸우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역사대로 점차 조정에 의해 역도로 몰리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서 정여립은 자신의 사상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에 절망하고 자신이 시대를 잘못 탔다는 한탄을 한 이후 시점이 조정으로 바뀌어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사실상 퇴장한다.
  • 2009년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 죽도의 한에서는 배우 김갑수가 연기했다. 애초에 역모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묘사하며 자살설 대신 살해설을 택하여 토벌군 총사 윤흥국의 칼에 찔려 폭포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나온다.
  • 2010년 개봉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배우 임재윤이 연기했다. 중립적인 포지션으로 등장하지만 지나치게 완고한 태도를 보여 왕을 비롯한 동서인 양측에 비난을 받았고 오프닝 씬이 끝나자마자 목이 잘리고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진다.
  • 2014년 KBS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배우 최철호가 연기했다. 드라마 초반에 하차하지만 정여립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계속해서 활동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초반부에 대사 1마디 없이 기축옥사를 묘사하기 위해 등장한 것에 그쳤다. 대동계의 사람들을 단련시키는 장면과 이후 모반으로 오인받자 칼 위에 엎드려 자결한 채 정여립을 잡으러 온 왕의 선전관이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 웹툰 <포천>에서는 정사의 기록을 따라 잔혹하고 음험한 인물로 그려진다. 같은 작가의 웹툰 <오성X한음>에도 등장하는데 이이 이항복을 총애하는걸 질투해 일을 벌이며 이런 행적이나 훗날의 대동계 조직과 모반이 모두 선조의 의도대로 놀아난 것으로 나온다.
  • 이두호 화백의 만화 <파문>에서는 주인공인 임차손이 축적한 거대한 부를 바탕으로 동쪽(=일본?)과 결탁한 거대한 조직의 수장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이순신이 그 실체가 지어낸게 아니냐는 질문에 사실 더한게 있다는 말로 처리. 다만 연재 중단으로 이후 행보는 미지수.
  • 슈타인호프의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2부에 등장한다. 1부에서 연산군에 빙의한 주인공 덕분에 역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영향인지 국왕을 보위하는 비밀 경찰 '금위사'의 수장이 되어 있다. '대동계'도 정여립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직한 정보 조직의 이름으로 나온다. 일반적인 평가를 반영한 듯 유능하지만 냉혹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주인공이 빙의한 국왕의 개혁에 반대하는 정철 등 서인을 '정철의 난'이라는 역모로 몰아 서인 세력 1만 명을 부여주(작중 조선령 북만주)로 강제 이주형을 받게 만드나 잔혹한 고문을 일삼은데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무고한 사람까지 역모로 몬 것이 발각되어 본인도 삭탈관직되고 유배를 가게 된다. 하지만 귀양지에서 절치부심해서 야인들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복권되고 해외 정보를 전담하는 비밀 기관 '익문사' 수장에 임명된다.
  • 마늘맛스낵 작가의 대체역사소설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세계관에서 공산주의의 시초이기 때문. 물론 정여립은 작중 고려보단 떨어져도, 보다 괜찮은 세상을 만들어보기 위해서 이상향인 고려 다음가는 나라를 만들어보겠다는 뜻으로 만들었으나, 정작 후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정여립의 이상과 달리 그냥 미치광이들이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악마들로 변해버렸다.
 다큐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동래 정씨 족보에서 제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편찬한 족보에는 정여립의 이름이 그대로 실려 있다.
 
 
 
 혹자는 정여립의 호와 사망지가 일치하는 것을 두고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터를 잡고 사는 지역이나 마을 이름, 자신과 인연이 깊은 지명을 호로 삼는 것이 관례였기에 벌어진 일이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의 경우도,자신이 벼슬을 물러난 후 터를 잡은 낙동강 상류의 '토계마을(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의 지명에, 자신의 평상시 지론인 '물러날 퇴'를 더하여 '퇴계(退溪)'라는 호를 지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여립 역시 자신이 가장 아끼는 곳이자 대동계의 탄생지가 된 지명인 진안군 죽도(竹島, 이름은 죽도지만 실제로는 섬이 아닌, 물길이 빙 둘러서 돌아가는 호리병 모양의 산이다)를,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 셈이다.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 인조반정의 주요 공신들이 송익필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김장생이 송익필의 제자로 송익필의 면천 및 사후 복권에 특히 애를 썼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여립의 난 파트에서 엑스트라 1 같은 인물처럼 나오는데 사실은 거물이다. 서경덕의 제자로 이황과도 토론할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정제두의 스승이기도 하다.
 
. 율곡을 배신하였는가?. 송익필 환천 사건. 대동계의 조직 정여립의 난?
 죽음에 대한 의혹 후일담 - 남인/북인의 분열기타 대중매체에서 같이보기 등을 위에서 기술하였다.
 
자료출처 - 나무위키 (자료출처-네이브 지식백과 나무위키)[네이버지식백과] 정여립 [鄭汝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에필로그
 
이상의 자료를 읽으보시면 정여립은 어떤사람인가? 정여립 모반사건, 그로인한 기축옥사가 일어나 1,000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무섭고 잔인하다. 송강정철이 위관이 되어 동인을 멸문지화로 만든사건이다. 후에 당시 임금인 선조는 후회하고 동인들의 신원을 회복하고 정철을 강계로 유배보낸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철을 비롯한 모든 문신들이 합심하여 나라을 위기에서 구하는 일들이 많았다. 임진왜란도 동인과 서인이 다투어 전쟁준비를 하지 않은 탓으로 많은 군인과 백성들이 일본군에의해 살상당했다. 임진왜란 바로 3년전에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니 참으로 한심한 당시 선조임금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우는 정철의 여러작품을 보면 정철은 참으로 신비스런 인물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술을 좋아하고 성질이 고약하다고 한다. 기축옥사를 위관의 지위로 지휘한 장본인이고 이로인해 1,000명의 문신과 가족이 목숨을 잃고 멸문지화를 당한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율곡을 배신하였는가?. 송익필 환천 사건. 대동계의 조직과 정여립의 난, 죽음에 대한 의혹 후일담 -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같이보기 등이 위에서 기술되어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