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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순흥과 이보흠 (조선 세조시대 순흥부사)

문장대 2023. 4. 12. 17:46

이글의 근거지인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위치를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은 조선시대에는 순흥도호부로서 큰 고을이었다. 역모, 강상 사건, 일제시대 행정개편으로 영주시의 1개면으로 격하된 면소지로 변모했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존재하고 순흥안씨의 본거지-세거지이다. 

 

조선 세조때 순흥에 유배를 온 금성대군(세종임금의 6째 아들)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사전에 금성대군의 여종과 순흥도후부 급창이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운동 격문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풍기현감이 격문을빼앗아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이사건으로 금성대군은 거사에 실패하여 사사당하고 이보흠은 참살당한다. 그리고 순흥은 역적의 고장이라 순흥부로 격이 내려간 고을이 되었고 이 정축지변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당, 안겸 등 이외에는 큰사람이 나지 않는 고을로 변했다. 안씨는 본관이 다른 성씨가 많지만 순흥안씨가 많다. 역사에 가끔 등장하는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가 안산 안씨이지만 안산안씨를 가진분은 잘 안보인다. 이외 죽산, 광주, 탐진, 태안 등 우리나라 현존하는 안씨 문중은 41 성씨이다. 그중 가장 번성한 안씨 문중은 문성공 안향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는 순흥안씨는 안자미가 시조이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만나는 분들은 대다수 순흥안씨이다. 순흥안씨의 본거지인 영주시에 속한 순흥면은 고려시대부터 매우 큰고을로 내려오다 조선시대는 순흥도호부로 명명되어  주변의 여러 고을을 관할하였다. 순흥도호부()는 1413년(태종 13)과 1683년(숙종 9) 두 차례에 걸쳐 설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까지 존속했던 행정구역으로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단산면·부석면과 봉화군 봉화읍·물야면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조선태종 13년인 1413년에 순흥부를 순흥도호부로 개편하고 종3품의 도호부사가 고을을 다스렸다.  순흥 안씨는 시조의 증손인 안향 이후 크게 번성했다. 안향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한 뒤,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렬왕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유학의 학풍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백이정과 우탁 등등 훌륭한 유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으로 이어졌다.

또 이색의 문하에서 권근(權近)이 나와 조선조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되고 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의 소수서원, 곡성군의 회헌영당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가 있다. 안향의 아들 안우기는 찬성을 지냈고, 손자 안목은 정당문학을 지냈다.

                       사진출처 : 나무위키.  안향의 초상으로 고려 후기 문신으로 순흥안씨의 중시조(시조는 안자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안침, 안당과 안위, 안현, 안상 3형제가 유명하다. 안침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전라도 관찰사와 한성부윤, 대사헌,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5형제도 모두 현달하였다. 안당은 성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한 뒤 중종 때 형조·공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나, 1521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안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경국대전을 찬수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 안현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명종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안상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선조 때 거문고, 비파, 장고의 악보를 망라하여 금합자보를 발간하였다. 교서공파에서는 고려 말의 명신 안축, 안보, 안즙의 3형제가 유명하다. 안축은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전법판서가 되고,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 춘추관감사가 되어 충렬, 충선, 충숙왕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안보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 안즙은 대제학을 지냈는데, 3형제 중 안축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安宗源)은 조선 개국 후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오르고,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은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다. 안경공의 아들 안순과 손자 안숭선, 안숭효도 명신으로 유명하며, 안숭선의 현손으로 안자유, 안명세 등이 뛰어났다. 고려 말에는 수많은 학자가 안씨 문중에서 배출된 사실은 역사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유배되어 위리안치된 금성대군과 이곳을 다스리던 관리 이보흠의 단종복위운동으로 순흥 안씨 집안에 멸문지화가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종 복위와 관련된 정축지변이 대표적이다. 또 기묘사화에 이은 신사무옥에서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했으며, 을사사화 때는 안명세가 참화를 당했다. 이등방문을 저격한 이순신에 버금가는 위인 안중근,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가 순흥 안씨 집안에 가한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가장 큰 화는 단종 복위 사건과 관련된 정축지변인데, 당시 순흥에 유배되어 왔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영월에 유배되어 있는 단종과 연계하여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도호부에 세거하고 있던 700명에 달하는 순흥 안씨가 멸문지화를 당하여 전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순흥안씨대종회 홈페이지

 

위와 같이 순흥은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고을이다.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존재하는 곳이며 현재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하며 영주시에서 대대적으로 개발한 곳이다. 부근에 십승지. 풍기인삼, 부석사가 있어 더욱 유명해지고 있다. 순흥이 정축지변과, 신사무옥을 겪는다. 또 김말손(金末孫)이 아버지인 유학(幼學) 김현욱(金賢煜)을 살해하는 강상(綱常)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현으로 강등되고 10년간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다가, 1838년(헌종 4) 순흥도호부로 환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흥도호부 [順興都護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평소 오고싶었던 역사의 현장 --금성대군 신단-이보흠 형제와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다 자기들 종의 배반으로 발각되어 엄청난 화를 당함- 이근방에 고치령이니 마구령이니 산신각 등이 존재하며 단종이 유배중이었던 영월과 통하는 유적이 많음.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에게 제사지내는 금성단-소수서원 근방 도로가에 존재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 사립대학이 존재하는 순흥(조선시대 1542년 중종37년 때 풍기군수 주세봉이 안향을 모신 서원으로 당시는 백운동 서원이라고 불렀다.) 신라고찰 숙수사 절터에 지은 서원으로 안향이 이곳 절에서 지낸적이 있답니다.

 

 

 

순흥은 상당히 큰 고을이었지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순흥은 오늘날 대도시로 존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각종 역사적 사건에 휘말린 순흥은 현재 영주시의 1개면으로 초라하게 존재하고 있으나 최초의 사랍대학인 소수서원이 존재하는 역사적인 곳이다. 이와 같은 순흥도후부는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대단한 도시이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로 수많은 관리들이 죽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귀양가는 억울한 일이 발생했다. 이때 세종의 2째 형님인 수양의  왕위 찬탈에 분개한 6째 아들 금성대군은 이때도 이곳 순흥에 유배되어 위리안치 되어있었다. 첫번째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과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탓이었으리라! 금성대군에게는 둘째 형인 세조의 왕위 찬탈이 너무 부당하여 이곳에 유배되어 와서도 고을을 관장하는 대전 이보흠 부사와 단종복위 운동을 꾀하였다. 군사를 모으고 격문을 돌리기 직전 순흥부 급창과 대군의 여자종 김련이 눈에 맞아 단종복위 운동의 격문을 훔쳐 고변하려고 이곳을 출발했다. 이를 눈치챈 김효급 풍기현감이 도중에 복위운동 격문을 서울가는 중도에서 빼앗아 당시의 왕인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처음엔 영주를 접수한 대군과 부사가 일으킨 복위 운동이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격문의 발각으로 이웃 고을의 수령들이 복위운동을 막아 단종복위운동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금성대군은 동생이지만 가차없이 살해당하고 순흥부사 이보흠 형제는 참살당했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인 순흥안씨들을 비롯하여 300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이때 죽계천을 흐르는 물이 붉은피로 물들어 안정면 동촌리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이마을은 피끝 마을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500년 왕비열전 세조5편(고려출판사)에 금성대군과 이보흠 부사가 일으킨 정축지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시대 들어와 두차례의 왕자의난, 이시애의난, 이징옥의 난, 계유정난(한명회의 살생부 실천-김종서, 황보인 축출사건)에 이어 정축지변은 순흥고을로서는 정말 너무 한 많은 사건이다. 이후 조선의 2대 반정인 중종반정, 인조반정, 신사무옥, 사대사화, 기축옥사, 이인좌의난 홍경래의난 .각종민난, 동학난 등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사건은 조선시대의 허다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 일제시대에 수 많은 애국지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잃는등 파란 만장한 우리나라 역사가 안타깝다

 

* 금성대군과 단종복위운동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세조때 역적으로 참살된 대전 이보흠의 약력과 활동사항을 소개합니다. -정축지변의 과정-

 

이보흠의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이며, 1397년(태조 6)에 태어나 1457년 10월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송현(李松賢)이며, 증조는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된 이흡(李洽), 조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석지(李釋之)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 영천문화대전.

 

이보흠은 1429년(세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가 되었다. 세조가 집권하면서 단종(端宗)이 영월로 물러나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順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되었다. 이보흠은 1457년(세조 3) 순흥부사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상대하여 자주 비분강개의 눈물을 뿌리며, 몰래 남쪽 선비들과 결탁하여 노산군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였다. 하루는 금성대군이 이보흠을 불러 좌우를 물리고 격문(檄文)을 쓰게 하니, 그 내용에 “천자(天子)의 칙령(勅令)을 끼고 제후(諸侯)에게 영을 내리는데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되어 있었다. 이보흠은 순흥의 군사 및 남쪽의 모의에 참여한 자들을 동원하여 노산군을 맞아 영(嶺)을 넘어 오려고 하였는데, 순흥의 관노(官奴)로서 급창(及唱)된 자가 몰래 벽안에 숨어들어 그 말을 엿듣고 그 길로 금성궁(錦城宮)의 시녀(侍女)와 사귀어 그 격문을 훔쳐 오도록 해서 부랴부랴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때에 기천 현감(基川 縣監)이 그 일을 듣고 말 서너 마리를 바꿔 타며 뒤쫓아가서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한양에 들어가서 상변(上變)하니 금성대군과 이보흠을 비롯하여 많은 남쪽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5권 2책의 『대전실기(大田實記)』가 있다. 『대전선생실기(大田先生實記)』는 1883년에 이가순(李家淳)이 편집하고, 후손 이병연(李昺淵)이 5권 2책으로 1921년에 간행하였다. 현재 『대전실기』의 목판 89매를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장팔리 이학두가 소장하고 있으며, 시호를 내린 교지와 함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 이보흠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죽곡리 단애곡(丹厓谷)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8년(숙종 24) 단종의 위호(位號)[지위와 명칭]가 사면되고, 1738년(영조 14)에 이보흠도 사면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에 충장(忠莊)의 시호를 추증받고, 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보흠의 묘소 아래 묘재인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에 이보흠의 행적을 적은 이대전유허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호]와 집터에 판 연못인 순흥연(順興淵),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덕연리에 대전정사(大田精舍)가 남아있다. 이보흠은 충청도 청안(淸安)의 향사(鄕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 영천문화대전.

 

 

 

1457년(세조 3) 6월 27일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제2차 단종복위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구체적인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을 멋지게 소개한 글을 올려봅니다.(아래 글 출처 작성자-달뫼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5백 년 동안 이씨 왕족의 골육상쟁은 그칠 날이 없었으나, <단종애사>는 대표적인 역사의 한 토막이라 할 수 있다. 금성대군은 조선왕조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세종의 여섯 째 아들로, 단종의 숙부인 동시에 세조의 동생이었다. 1426년(세종 8년)에 금성대군 유는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태어나, 7살인 1433년(세종 15)에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어릴 적부터 강직했던 금성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과는 뜻이 같을 리가 없었고 큰일을 꾸미는데 방해가 되므로 1455년(단종 3년) 수양은 금성대군을 모함하여 삭령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광주로 이배시켰다. 그런데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이배되기 전에 단종에게 동정적인 집현전 출신 이보흠이 이미 그곳의 부사로 부임해 있었다.

항상 부사 이보흠을 대하여 말하기를 ‘영월과 순흥은 소백산을 사이에 둔 인접한 지역이건만 어리신 왕의 용안을 뵈옵지 못하고 있으니 이 원통하고 분함을 어디다 풀리요’하고 슬퍼하기를 마지아니하던 중 부사가 대군의 뜻을 헤아리고, 동정을 살피고 감시할 처지에 있으면서 남몰래 야음을 타서 대군과 비밀리에 사육신과 내통하였다.

그러던 중 수양은 단종을 몰아내고 1455년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되었다. 충의와 의분에 불탄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금성대군은 순흥으로 다시 유배되었고, 단종 또한 폐위를 당하여 영월 청령포에 적거하게 되었으니 금성대군의 비통함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이에 금성대군은 부사 이보흠을 설득했다.

순흥의 사대부들과 이민(吏民)들의 지지를 받아 영주를 접수하고 안동으로 진출해 자신의 가동을 중심으로 2,000~3,000명의 군사를 동원하려는 작전이었다. 영남일대에 격문을 돌려 지지자들을 규합해 서울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리고 단종을 복위할 계획과 준비를 갖추고 전 국민의 호응을 청하는 격문까지 다 만들어 두고 거사의 날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순흥부의 급창으로 있던 관노가 금성대군의 여자 종과 사귀어 격문을 훔쳐 서울로 가서 고발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풍기현감 김효급이 쫓아가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고발해 공로를 세웠다. 이로 미루어 금성대군은 세조 측 수령들과 집안의 노비들에게 안팎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 측근들은 결정적인 증거인 격문을 확보하자마자 관련자들을 일망타진한 것이다.

서울의 금부나졸과 안동부사 한명진(한명회의 6촌)의 출동으로 미명에 화려하던 순흥 도호부 일대는 포위 방화되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죽이니 시체는 산을 이루고 붉은 피는 강을 이루어 십여리를 흘러 안정면 동촌동에 와서 끊어졌다 하여 지금까지 마을이름을 ‘피끈’이라고 하며, 풍기 방면으로 쫓겨 간 시민들은 풍기 교촌동 앞을 흐르는 내를 건너기가 무섭게 풍기 어구에서 사살되어 수십 명씩 한 구덩이에 넣고 묻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사건이 발각되자 세조는 소윤 윤자(尹慈)를 순흥에, 우보덕 김지경(金之慶)을 예천에, 진무 권감을 안동에 보내 관련자들을 심문했다. 죄인 심문은 몇 달 동안 계속되었고, 주동자 21인을 비롯해 300여 명에 가까운 영남 사민(士民)들이 처단되었다. 대군과 부사는 병마첨절제사를 겸한 안동대도호부로 호송된 후 대군은 서울로 이송되어 경회루에서 참형을, 부사는 황해도 박천에서 교살을 당하였다. 영월 청령포에 감금되어 있던 단종도 세조가 내린 사약을 마시고 천추의 한을 품고 영월 장능에 묻혀있다.♣​

 
 

 

 

 

정축지변의 화가 미친  영주 안정면 피끝마을의 유래(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다 눈 밖에 난 금성대군은 계속해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가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순흥에 위리안치 된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뜻을 맞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시녀 김련과 관노가 격문을 빼내 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버렸다.당시 풍기 현감 김효급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다. 이때가 세조 3년 1456년이다. 안동부사 한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사람은 물론이고 우마계견(牛馬鷄犬)까지 닥치는 대로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한양에서 철기군이 출동해 2차 학살을 저질다.당시 순흥은 황폐화됐고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순흥에서 참살당한 피가 죽계천을 타고 십리나 흘러 멈춘 곳이 이곳 동촌1리 이다. 그래서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 참고로 순흥안씨 집성촌을 아래와 같이 열거합니다. 자료출처 : 나무위키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충청남도 계룡시 엄사면 유동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일원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일원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단곡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전라남도 나주시 용산리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도장리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정지2리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낙민1리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개곡리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중소리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천리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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