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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감사 반석평(조선시대 중종)

문장대 2023. 4. 9. 17:49

우리나라에는 8도 감사를 역임한 사람은 2명이라고 한다. 1분은 조선시대 초 태조임금 당시의 함부림이고 또 1분은 조선시대 중종 임금시의 반석평 님이다. 이중에도 반석평 선생님은 8도감사는 물론 5도 병사도 역임했다고 한다. 오늘은 반석평 선생님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합니다.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 있는 반석충 묘역과 사진(아래)

                                                                   반석평 선생님 초상화

 

 

♣ 조선 중종시대 문신 반석평 선생님 

 

- 출생, 사망, 성장환경, 출세과정 : 1472년-1540년 이고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이며,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그의 형 반석정은 생원시에, 동생 반석권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조선시대 역대 감사중 8도 감사를 모두 역임한 사람은 태조때 함부림과 중종때 반석평이라고 한다. 반석평 선생님은 거제 반씨에서 분파된 광주 반씨이다. 여말 선초에 반충이라는 선조께서 조선개국의 원종공신으로 책봉받아 광주반씨로 분파되었다. 그의 증조는 선략장군, 충무위 부호군을 지낸 반사덕(潘思德)이고, 할아버지는 한성 판윤을 지낸 반강(潘崗)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반서린(潘瑞麟)이다.아버지는 양반이나 그의 어머니는회미 장씨는 첩이어서 반석평은 과거를 볼 수 없는 신분이었다.조선시대는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천하면 과거 응시가 불가하다. 신분을 어려서는 멋모르고 살다가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이참판댁 일꾼으로 들어가서 생계를 이어갔다. 말이 일꾼이지 당시는 종의 신세였다. 참판댁 아들은 이오성이었는데 이오성이 공부하고 있을때 어께넘어로 공부를 했는데 반석평이 너무 총명하여 이참판은 깜짝 놀랐다. 그는 하나를 가르키면 열을 아는 천재였다. 이참판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그를 같은 반씨집안의 양아들로 보내 대를 잇게하고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는 이참판댁과 연락을 두절시켰다. 양아버지 반서린의 집에가서는 더욱 공부에 매진하여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할머니와 서울에가서 할머니가 바느질로 수입을 얻어 공부시켰다고 하는 분도 있다. 유몽인의 어유야담,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중종실록에서도 반석평의 출세이야기가 전해진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보니 반석평은 당시에 양반은 아닌 같다. 그러나 두뇌는 조선8도에서 최고였다. 천민이 40%인 조선시대에는 양반만이 과거에 응시하는 모순되고 아주나뿐 제도이다. 이를 극복하고 반서린의 양아들로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의 길을 열었다.

 

-과거 급제후 여러관직 발령사항

이참판댁 종으로 있으면서 종문서를 불살어고 면천시키고 반석평은 반서린의 양아들로 되어 과거에 응시하여 1504년 연산군 10 32세 때 생원시에 전체 합격자 100명 중 38위의 성적이다. 이때 그의 형도 동방 합격하였다. 3년후인 중종 2(1507) 35살에 식년시 문과에 3(병과) 22위로 급제하였다. 전체 급제자 33명 중에 32위이다. 급제후 한림직인 검열에 임용되어 관리가 되었다.한림에 임용되어 사관으로 5년간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 문무를 겸한 유장(儒將, 문신 장수)이었다.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호조형조예조의 정랑을 지내고 세 품계를 건너뛰어 함경도 경흥부사에 임용되었다. 이후 그가 함경도관찰사에 임용될 때도 문무를 겸비하였다고 하여 뽑혔다. 그는 문무를 겸한 관리이다. 따라서 양계지역의 일을 잘 알아 함경도절도사 등 변방의 장수로 여러 차례 임용되었다. 5도 병사를 지냈다고 하며 충청, 전라, 평안, 함경, 황해 등 다섯 도의 관찰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반석평은 예조와 호조, 공조의 참판을 두루 지내고 명나라 사신으로도 두 번 다녀왔다. 중종 34(1539) 67세 때에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라 오위도총관을 겸했으며, 이듬해 병으로 한가한 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졸하였다. 관리로 임명당시 여러번 탄핵되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후세에 길이 남는 모범관리가  된 사실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본받아야 한다. 이분에 대한 책이 발간되어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도서관에서도 이분에 관한 책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이참판댁의 아들을 만나 은혜를 갚은 이야기

조정의 높은 관리를 하면서 젊은 시절에 보살펴준 이참판댁 생각이 나서 은혜를 갚기위해 시골(전라도 옥구) 살던곳을 찾아 갔으나 참판댁은 무슨 이유인지 망하고 폐가가 되어 있었다.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와 살던 중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참판댁 아들 이오성을 만났다. 말도 없이 거리를 걷던 은인의 아들을 만나니 너무반가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였다. 반갑게 맞이하여 은인의 아들 이오성을 집으로 데려갔다.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며 지난일을 이야기 했다. 다음날 반석평은 조정에 나아가 중종임금에게 자기의 출세과정을  솔직하게 애기하고 자기의 벼슬을 내리고 은인의 아들 이오성에게 벼슬을 줄것을 고했다. 중종 임금은 반석평의 마음에 감동하여 벼슬은 그대로 두고 은인의 아들에게 사옹원 별좌 관리로 특별 임용했다. 당시 상황으로 극히 통과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이 이야기가 유몽인, 이익, 이덕무가 쓴글에 나타난 것은 유명하다. 중종실록에도 나타나 있으니 놀랄 일이다. 너무나 감동적인 스토리여서 TV 역사프로그램이 자주 나타나서 현재 우리의 국민들이 감명을 받고 있다.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에 반석평 선생님의 스토리가 방영된 사실이 있다. 팔도 감사와 5도 병사를 한분이고, 주요관직의 참의, 참판, 판서까지 한분이 우리역사상에 별로없다. 정말로 대단한 분이다. 특이한것은 반석평의 후손인 반기문 전유엔 사무총장이 반석평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정말 놀랄일이다. 하늘의 천복을 받은 문중이라고 생각된다. 세계대통령을 역임했고 잘했으면 우리나라 대통령까지 될  뿐한 반씨 문중이다. 반기문 유적은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 생가가 있고 조금 떨어진 음성읍 원남면 하노리 음성읍 입구에 광주반씨 문중산이 존재한다. 이 묘지들은 반씨 집성촌이 있는 군산, 옥구의 옥산-회현에 있는 회미장씨 어머니와 조상무덤을 이장했고,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반석충의 묘지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군산 옥구 옥산면이나 회현면의 반씨 문중은 이곳 음성군 관리로 임용받은 선조의 주선으로 음성땅에 가족들이 이사해서 대대로 반씨 문중세거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