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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대감 이종성 일화(조선 영조시대)

문장대 2023. 3. 28. 15:36

* 조선후기 영조때 문신인 이종성 대감의 일화를 재차 올립니다.

 이종성(李宗城.1692.숙종 18∼1759.영조 35)

     

 

조선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종성 대감 초상화

 

조선 영조 때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시호는 효강(孝剛),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항복(恒福)의 5세손이며,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 어려서부터 성리학(性理學)에 힘을 기울였으며, 1711년(숙종 3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746년(영조 23) 문과에 급제, 삼사(三司)를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국가 재정을 충족케 하여 삼남(三南)의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서북 변경을 튼튼케 하는 대책이라고 진언했다. 왕에게 가납(嘉納)되어 관서암행어사(關西暗行御史)로 내려가 군제를 바로잡고 탐관오리들을 숙청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외국의 통화(通貨)를 금하도록 주청했으며, 1752년(영조 28) 좌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적당(賊黨) 김상로(金尙魯)ㆍ이인좌(李麟佐)의 간계로 영의정을 그만두었으나, 1757년(영조 33) 내의원(內醫院) 봉상시도제조(奉常寺都提調)가 되고 그 해 인원대비(仁元大妃)의 상(喪) 때 의례의9조(疑禮儀九條)와 종묘ㆍ혼전(魂殿)의 예의7조(禮儀七條)를 써 올려 이를 시행케 하였다. 그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한마음으로 동궁(東宮)을 보호하여 대신 유척기(兪拓基)ㆍ이천보(李天輔)와 더불어 합심하매,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적당들이 간계를 부리지 못했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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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시호는 효강(孝剛),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항복(恒福)의 5세손이며, 시술(時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필(世弼)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태좌(台佐)이며, 어머니는 홍득우(洪得禹)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3일 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이듬 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다. 그 해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했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부당함을 상소해 석방하게 하였다. 1733년 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 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를 상소하였다. 1735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어 화폐 사용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 해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1738년 이조참판, 1741년 부사직, 1742년 충청도관찰사, 174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예조판서ㆍ형조판서ㆍ대사헌ㆍ개성부유수, 1749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ㆍ우빈객(右賓客),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던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을 거쳐 1757년 내의원봉상시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 때 인원대비(仁元大妃 : 숙종계비 김씨)의 상을 당해 의례의구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칠조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오천집(梧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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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1-오천대감 이종성(李宗城)의 일화 (원수 유척기를 도운 일화)

유척기(兪拓基)는 숙종 17년(1691)에 태어나 숙종 40년 증광문과 병과급제 검렬, 정언을 거쳐 이조참의, 도승지, 양주목사, 함경,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이어 1739년 우의정, 1758년 영의정이 되었고 1760년 영중추부사,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가 있던 당대 명필이며 유명한 재상으로 영조 43년에 죽으니 문익(文翼)의 시호를 받은 사람이다. 정언으로 있을 때 경종 1년(1721) 세제(世弟)영조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숙종 37년(1711) 사마사를 거쳐 장단 오목이(장단군 군내면 읍내리)에 거주하면서 공부만을 하고 있던 이종성(李宗城)의 집 근처에 이르러 고개를 넘으려 하였으나 7일 동안을 가도 그 자리를 맴돌게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연유를 몰라 곰곰이 생각 끝에 동리사람에게 이 지방에 명인을 물으니 백사 이항복의 5대손이신 이종성(후 오천대신)이란 분이 사는 게 이분은 지략과 도량이 넓으며 장래의 성쇠와 길흉을 점치는 신출귀몰한 유명한 재주를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찾아가서 사죄를 하고 자초지정을 간청하니, “그대 공이 청나라에 가게 되면 천자께서 쌀 1,000석을 보내라고 할 것이니 우리나라에서는 수년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하라.” 는 부탁을 하려고 그리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하직을 하고 떠나가는데 웬일인지 순식간에 청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도착하여 영조(英祖)책봉에 주청드리는 자리에서 천자께서는 이종성이 말한 대로 과연 1,000석을 보내줄 것을 하명하자 우리나라의 곤궁한 실정에 대하여 자초지종을 상세히 상주하니 고개만을 끄덕이니 할 수 없어하며 요행이 사면하게 되어 무사히 돌아오는 길에 이종성을 예방 치하를 드린 후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한다. 이후 이 고개를 가칠일고개(加七日嶺)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맑고 맑은 오목내(梧川)가 흐르고 있어 이종성은 오천대신으로 불려졌다. 오천대신 이종성에 얽힌 일화는 많다. 이종성이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가 되어 낙향 낚시와 시희로 소일을 하던 중 집안이 가난해 말을 타지 못하고 단신이 걸어서 황해도 봉산고을 사또로 부임차 이 지역을 지나던 김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오목내를 건너서 건너가려할 때 건너쪽 언덕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이 있어, “여보 영감” “미안하지만 나를 업어 강을 건너줄 수 있겠는가?” 하고 간청하니 서슴지 않고 “예” 하며 발을 걷어붙이고 장등이에 업고 개울을 건너가는데 반쯤 가다가 김사또가 하는 말이, “이 근처 오천대신이 살고 계시다는데 알고 있느냐”며,“ 무엇으로 소일을 하고 계시느냐” 고 물으니, “예, 그분은 낚시를 하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원천이나 하고 지낸다.”하니 깜짝 놀라며 기절초풍 개울 한가운데로 자빠졌다 한다. 이리하여 오천대신은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입히게 하고 깡보리밥을 같이 하면서 황해도 봉산은 인심이 좋은 고장이니 아무쪼록 선정을 베풀어야 된다는 간곡한 부탁을 하니 대감의 말씀에 한 치라도 소홀함이 없이 하겠다면서 공손히 하직하고 3년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출처] 조선 문신 이종성(李宗城)|작성자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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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2-사또의 보리밥 타령

겸손에 관한 실화 한 토막을 보자. 조선 영조 때 경기도 장단의 오목이라는 동네에 이종성이라는 은퇴한 정승이 살고 있었다. 동네 이름을 따 “오목 이 정승”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매일 강가에 나가 낚시를 하면서 노후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가 어린 하인을 데리고 낚시를 하다 시장기를 느껴 근처 주막에 방을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을 신관 사또의 행차가 그 주막에 몰려왔다. 주막에 방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또는 부득불 오목 이 정승이 식사하는 방으로 들어왔다. 신관 사또가 거만하게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아랫목에 앉다 보니 문득 방구석에서 식사하는 촌로(村老)와 어린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들이 마주한 밥상을 보니 사또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밥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사또가 물었다. “여보게 늙은이, 지금 자네가 먹는 밥은 대체 뭔가?” “보리밥이오.” “어디 나도 한번 먹어볼 수 있겠나?” “그러시지요.” 이렇게 해서 노인이 내민 보리밥 한 숟가락을 먹어본 사또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뱉어내더니 소리쳤다. “아니, 이것이 어떻게 사람의 목구멍으로 넘어갈 음식이란 말인가?” 사또가 노발대발하자 아전들은 냉큼 주모를 시켜 쌀밥과 고깃국을 대령했다. 그러는 사이에 노인과 아이는 잠자코 밖으로 나가버렸다. 바야흐로 사또가 식사를 끝낼 무렵, 이 정승 집 하인이 사또를 찾아왔다.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는 고관 벼슬을 지낸 어른이 부르자, 사또는 부리나케 정승 집 대문간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섬돌 밑에서 큰절을 하고 고개를 들어 보니 조금 전에 주막에서 보았던 바로 그 노인이 아닌가. 비로소 사태를 깨달은 신관 사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대감, 아까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오목 이 정승의 추상 같은 목소리가 그의 귀를 세차게 때렸다. “그대는 전하의 교지를 받들고 부임한 관리로서 그 책임이 막중한데도 교만한 위세를 부렸으니, 그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백성들이 먹는 보리밥을 입안에 넣었다가 뱉어버리는 행위는, 도저히 목민관으로서 있을 수 없다. 그런 방자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으로 어찌 한 고을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당장 벼슬 자리를 내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청운의 뜻을 품고 장단 고을에 부임했던 신관 사또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낙향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자신이 귀하게 되자 겸양하지 못하고 교만함을 드러냄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였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 지위가 올라가고 학문이 깊어갈수록 더욱 겸손하게 마음을 낮추고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 시대에는 벼슬이 정3품인 당상관에 이르면 낮은 가마인 평교자를 타도록 법으로 정해 두기까지 했다. 클린턴 버나드는 “진실로 위대한 사람들은 남들을 조종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조종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기보다 낮은 자들을 기념하여 탑을 세우겠다고 주장해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도 당대 과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하다고 알려졌지만, 자신이 가르치던 대학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겸손했다고 한다. 위대함이란 조심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을 자기 입으로 떠벌리지 않는 것이다(참고자료: 이상각이 지은 <마음이 여유로우면 모든 일이 쉬워진다>). 교만과 아집의 샘물을 마신 사람은 자기 삶의 발자취에 오점을 남기기 쉽고, 자기의 공든 탑을 자기 손으로 훼손하게 된다. 겸손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김형태 칼럼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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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3 -장단대감(오천대감)의 혜안

파주시 장단은 장단 콩으로도 유명하지만 장단대감의 출생지로 많은 일화가 있다. 사도세자를 살리려고 엄청 노력한 장단대감은 시파벽파의 다툼과 여러가지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장단으로 내려가던 중 영조임금의 총애를 받는 문숙의가 가짜 임신을 하고 그 가짜아들을 후계자로 만들 엄청난 흉계를 목숨을 걸고 막은 정승이다. 이로서 정조가 임금으로 등극할 계기를 만든 분이다.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도 임신을 하지않고 정조가 임금이 되도록 노력한 거룩한 중전이다. 영종(영조)대왕이 만년에 정순왕후로부터 후사를 이으려고 임신에 도움이 되는 보약을 정순왕후에게 자주 주었지만 안먹고 버렸다. 간특한 문숙의는 자기집안의 아이를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 속이려다 이를 알아차린 장단대감의 기지로 엄청난 사건을 미리막았다. 이종성 대감은 고향으로 갈려다 궁중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매일 한강에서 낚시하다가 벼슬을 못해 한강물에 빠져 죽으려는 청년 무부를 살려주고 자기의 서녀 산홍이를 결혼시키고 사위를 삼았으며 그 청년을 창경원 홍화문 수문장을 시켜 문숙의의 가짜 아들을 음식이라고 속이고 들어오는 궁중 무수리와 하인을 제압하고 칼로 음식을 절반짜르니 2-3일되는 아기였다. 이후 문숙의는 유산되었다고 소문났고, 궁중은 발칵뒤집어 졌다. 문숙의는 이를 무마하려고 들었고 그 청년 수문장은 죽였다는 말도있고, 승승장구했다고도 한다. 그 청년은 경상도 청년이지만 경상도 어딘지는 모른다. ( 한국사 이야기 독후감) 정조는 갖은 고초끝에 임금으로 등극했으나 장단대감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나라는 문씨 나라가 되었다. 정조는 너무 감사해 나중에 장단대감에 시를 바쳤다.

 

垂釣江上 所須河人 (수조강상 소수하인) 용산강가에 낚시 드리울 때 기다린 사람 누구였더뇨

五月江上 爲誰遲遲 (오월강상 위수지지)  오월강가에 누구를 위하여 지루하게 기다렸던가

           -한국사이야기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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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4. 오천대감 이종성의 일화

오천대감 이종성(李宗城)은 숙종 18년(1692)에 장단 오목이 (장단군 군내면 읍내리)에서 태어나 자는 자고(子固)이며 호는 오천(梧川)으로 좌의정 이태좌의 아들로서 숙종 37년 사마시를 거쳐 영조 3년 중랑문과 병과급제 전적, 정언을 지내고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한 후 교리 부제학, 평안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1744년 형조, 예조, 이조판서 대사성 개성유수 등을 걸쳐 좌의정, 영의정, 영중추부사로 영조25년에 죽으니 문충, 효강등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밝은 문장과 글씨로 뛰어난 명재상이며 장단대신 또는 오천대신으로 널리 이름이 높았다. 이종성이 벼슬을 하직하고 장단에 낙향하였던 때였다. 이종성은 대재상의 지위를 차지하였던 큰 위인이었으나 장단에 낙향한 후에 그의 생활은 농촌의 한 늙은 농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선 그 거처 범절로부터 의복, 음식, 행동이 한 때 나라의 정권을 잡고 국내를 호령하던 때의 재상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지극히 검소하였다.이종성이 귀히 기르고 알뜰히 가르친 손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성혼이었다. 새로 슬하에 거느리게 된 그 신부도 역시 명문 대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자라서 규중 예의범절을 모두 익힌 요조숙녀였다. 그 손부(孫婦)는 가례를 행한 후 일찍이 친정에서 배운 놀라운 예절과 행실로써 삼일을 치르게 되었다. 때는 손부가 삼일을 치르고 몇 달을 지낸 어느 날 아침이었다. 손부는 첫닭이 우는 소리를 따라서 일찍 유두분면과 녹의홍상으로 의복과 단장을 갖춘 뒤에 이공에게 아침 문안 시간을 기다려 문안을 드리게 되었다. 이종성은 손부의 아침 문안을 받은 뒤에 매우 화려한 안색으로 손부를 쳐다보면서 "네가 우례를 해온지도 벌써 오래 되었으니 이제는 집안 일에 대하여 서투른 것은 없겠구나."​하고 말을 물었다. 손부는 양미를 숙이며 공손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지당하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과연 손부는 워낙 영리한 까닭에 시집 온지 며칠을 지나 시가의 가풍과 가규를 얼른 잘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공은 손부의 지당하다는 대답을 들은 뒤에 또다시 쳐다보면서 "내가 내일 아침에는 네 손으로 일운 쌀에 밥물을 붓고 네 손으로 불을 때어서 지은 밥을 먹고 싶구나." ​하였다. 손부는 이종성의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원래 손부는 명문가의 후손으로 밥을 대하면 먹을 뿐이요, 쌀을 어떻게 씻으며 그 씻은 쌀을 솥에다가 어떻게 부으며 쌀을 솥 속에 먼저 붓고 나중에 물을 붓는지 먼저 물을 붓고 나중에 쌀을 붓는지 또는 물을 부으면 얼마나 부으며 불은 어떻게 때며 얼마만큼 때야 밥이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맹문이었다. 그러므로 밥을 지으라는 시조부의 말씀에 깜짝 놀라며 잠깐 주저하는 태도로 서 있다가 매우 황감하다는 어조로 "불민하와 밥 짓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사오니 어찌 진지를 감히 지을지 황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종성은 잠깐 양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펴며 "그래. 아직 못하는 일이면 할 수 없다." 하였다. 손부는 매우 부끄러운 기색으로 물러나왔다. 이공은 그 이튿날 아침 돌연히 가마를 마련한 뒤에 아무런 말이 없이 손부를 친정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손부는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조부의 명령이라 감히 거역할 길이 없어 친정으로 갔다. 그 친정에서도 별안간 온 것을 이상히 생각하여 곡절을 물었다. 그는 아무런 허물이 없었고 다만 시조부가 밥을 지으라는 말에 밥을 지을 줄 모른다 하였더니 별안간 친정으로 가서 있으라고 말하였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녀의 부친이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부끄러워 하는 기색을 띄우며"네가 그렇게 쫓겨오게 된 것는 밥을 지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너의 시조부께서 이런 조치를 내리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밥을 짓는 것을 배우거라." 하였다. 그녀는 부친의 말을 듣고 일찍 밥을 지어보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부엌으로 나가 쌀을 씻고 밥물을 부으며 불을 때고 밥을 넘기며 자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석으로 뿐 아니라 천생으로 영리하고 총명한 그 재주로서 밥쌀을 내는 것과 밥물을 붓는 분량이며 또 불을 때는 정도를 새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로 그녀가 지은 밥은 유난히 윤기가 돌고 밥맛이 좋았다. ​그렁그렁 수삭을 지나 그는 다시 시가로 돌아간 뒤 누가 말한바 없이 스스로 부엌에 내려가 밥을 지었다. 이종성은 그 밥을 처음 한 술을 뜬 뒤에 찬미를 느껴서"이 밥을 누가 지었느냐" 하니 매우 황송하다는 기색으로 "새 아기씨께서 지었습니다." 하였다. 이종성은 매우 기뻐하는 기색을 띄우며 그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이종성이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손부를 불러서 이야기를 하였다. "네가 지은 밥을 참으로 잘 먹었다. 밥 한 그릇을 다 먹기는 지금까지 처음이다. 내가 너를 밥을 지을 줄 모른다고 친정으로 보낸 뜻은 네가 밥을 안지었거나 밥을 지을 사람이 없어서 그랬겠냐? 그러나 가정을 다스리는 안주인로서 무엇이든지 다 알아 둘 필요가 있는 게야. 하인을 부릴지라도 내가 알고 부리는 것이 안주인의 도리란다. 그러므로 밥 짓는 법을 알게 하려 한 것이다. 비단 밥뿐이겠느냐, 무엇이든지 모두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게야. 이후로 부터는 각별 명심하여 주의 하거라." 일렀다. 손부는 이종성의 말에 감동되어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손부는 그날 밤부터 밥을 짓는 것 이외에 빨래, 다듬이 그릇닦이 등 여지껏 손 대 본 일이 없는 것까지 모두 친히 하였다. 이종성은 손부가 다시 돌아온 뒤 어느 날 그의 손자를 처가로 보냈다. 때는 마침 농사를 시작하는 초엽이었다. 장인은 사위를 만나게 되자 '옳다! 내 딸을 밥지을 줄 모른다고 쫓아 보냈으니 손자는 어떻게 가르쳤는가 보자.' 하고 일종의 앙갚음을 할 생각으로 사위를 향하여 "금년 농사를 방금 시작하는 땐데 사위되는 사람이 맨 첫번 논을 갈아주면 농사가 대풍이 된다고 하니 수고스럽지만 우리 논에 쟁기질 좀 하여주게나." 하였다. 일국의 재상의 손자가 쟁기질을 해 보았을 리는 만무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사위보다 이종성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위는 장인의 말을 듣고 조금도 주저하는 빛이 없이"예, 장인어른 갈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승낙한 뒤 즉시 버선을 벗고 다리를 걷어올린 후 쟁기를 걸머지고 소를 몰아 논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에 쟁기를 걸어 메고 논을 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논 가는 법이 어찌나 틀에 잡혔는지 상농부(上農夫)에 지지 않았다. 장인은 사위가 그렇게 쟁기질을 익숙하고 능숙하게 하는 것을 보고 '오! 무서운 양반이다. '이종성이 자녀들의 교육에 대하여 그렇게 빠짐없이 가르친 것을 크게 탄복할 따름이었다. 농사가 한참 바빠 논매기 김매기에 땀을 뻘뻘 흘릴 시절이었다. 어느 날, 농부들이 들어와 이종성에게 아뢰기를 “내일부터 논을 매겠삽는데 품앗이로 먼저 대감댁의 논을 매게 되었습니다. 황송하오나 댁의 일이오니 만큼 밥과 반찬을 썩 잘해 주셨으면 소인의 생색이 더 나옵고 일도 더 잘 되겠습니다.”청하였다. 이종성은 쾌히 승낙하였다. 그리고 즉시 돼지와 닭을 잡고 또 임진강 어부에게 기별을 하여 좋은 물고기를 구해와서 굽고 끓이고 졸이어 과연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진수성찬을 차리고 특히 밥은 백미 중에서도 상백미를 골라 짓게 하였다. 그래서 반찬이 풍성풍성 하고도 산해진미로 된 것이 큰 잔치와 같았다. 여러 농부들은 생전 처음 얻어먹는 음식이었다. 기뻐하며 칭찬하는 소리가 동리에 자자하였다. 그 이튿날 이종성의 하인은 그 동리에서 부자라 일컫는 농부의 집일을 하게 되었다. 그 머슴이 석양이 산등성이로 넘어갈 무렵 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종성이 머슴을 불러 세우고 “너 오늘 무슨 밥을 먹었느냐?” 하고 물으니 “별 반찬이 없삽고 된장찌개 마늘잎 장아찌와 풋김치 몇가지였습니다.” “고기는 없었느냐?” “고기가 다 무엇이오니까?” 이종성은 머슴에게 밥과 반찬이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물은 뒤에 품앗이가 끝나는 날까지 여러 집에서 대접한 밥과 반찬을 꼭꼭 말하라 일렀다. 그리하여 머슴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때는 먼저 이종성에게 그날그날 먹은 음식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어느 날 온 동리의 논밭에 김매기 밭갈이가 다 되어 품앗이 일이 끝난 날이었다. 이종성은 품앗이한 여러 농부를 불러 세우고 “품앗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일을 돌려 가면서 똑같이 하는 것을 품앗이라고 합니다.” “옳다. 그런데 내 집 머슴을 데려다가 일을 시킬 때에 밥은 무슨 밥을 먹이었느냐?” “밥은 콩과 보리가 섞인 것을 먹이었삽고 반찬은 김치와 된장 몇가지를 먹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내집 일을 하던 날은 무슨 밥을 먹었고 반찬은 무엇을 먹었느냐?” “대감 덕택으로 옥같은 쌀밥과 고기며 생선 등 여러 가지 맛있는 반찬을 먹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내 집에서 먹은 것이 다르지 아니하냐.” “다릅니다.” “그러면 품앗이가 아니지 않은가. 품앗이란 일하는 것만 똑같이 하는 것 뿐 아니라 먹는 것도 또한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 집에서 너희들 대접한 것과 네 집에서 내 하인을 대접한 것이 틀리니 그것은 품앗이가 아니다. 그런데 내 다시 생각하니 첫째 내집 내 하인에게 잡곡밥을 준 것은 너희들이 잡곡밥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집 하인을 분명 멸시한 것이 아닌가. 내가 너희를 엄히 조치할 것이나 특별히 이번만은 용서하여 주거니와 지금 이후로는 너희들은 언제든지 잡곡밥, 특히 콩밥을 해 먹어야 한다. 만일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는 전후 죄를 합쳐서 큰 벌을 내릴 것이니 각별 명심하여 거행하여라!” 하며 호령하였다. 여러 농부들이 "황공무지로소이다." 하며 절을 꾸벅꾸벅 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물러 나왔다. 그런 후 여러 농가에서는 종래부터 흰쌀밥만 먹던 것을 고쳐 일제히 콩을 위시하여 여러 잡곡을 먹게 되었다. 이종성이 여러 농민에게 잡곡밥을 장려한지 몇 달을 지낸 뒤에 농부들을 불러 세우고 “그동안 잡곡밥을 먹으니 어떻드냐?” “괜찮았습니다.” “밥맛은 어떻든고?” “흰밥은 싱거움으로 반찬이 없으면 먹을 수 없사오나 잡곡밥은 밥맛이 구수하여 반찬이 없어도 잘 먹겠습니다.” “그러면 흰밥과 비교하여 어떤 것이 유익하더냐?” “잡곡밥이올시다.” "옳다! 우리가 잡곡밥을 먹으면 먹기도 좋고 또는 반찬도 절약되는데 어찌 흰쌀밥 먹기를 원하겠느냐. 오곡중에 가장 귀한 것이 쌀이니 그렇게 귀한 쌀은 될 수 있는 대로 아껴 두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같이 너희들이 늘 쌀밥만 먹는다면 어느 하가에 치부를 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도 더욱 쌀을 아낄 줄 알아야 할거이니 한층 더 힘을 써서 쌀 대신 콩, 보리, 밀 같은 잡곡으로 먹기를 힘써 각기 많은 쌀이 마을 곡간마다 가득가득 쌓여 있게 하여라.” 이종성이 이렇게 품앗이를 기회로 잡곡 먹기를 장려한 것은 장단 백성이 쌀밥만 숭상하는 폐단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단 백성이 일제히 잡곡 먹기에 힘쓴 뒤로는 과연 쌀을 저축하게 되어 그 부력이 날로 증가하게 되었다. 장단 백성의 부력이 늘어난 것은 오직 잡곡을 쌀의 대신으로 먹은 은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콩과 잡곡으로 혼식을 장려하게 되니 장단태(長湍太)라 하면 전국에 걸쳐 유명하게 되었다.

[출처] 오천 대감의 일화|작성자 상민짱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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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5- 오천대감이 백성을 위해 임금께 장계를 올린 중요 역사적 사실

영조실록 18권, 영조 4년 5월 10일 경신 6번째기사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 조선 영조때 이인좌의 난으로 역적이된 이인좌의 출가한 자매는 놓아 주게 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영남 어사(嶺南御史) 이종성(李宗城)의 장계(狀啓)에 따라 아뢰기를,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姊妹)가 지금 문경현(聞慶縣)에 갇혀 있는데, 율문(律文)으로는 본디 연좌(連坐)되지 않아야 하겠으나, 이와 같은 것은 한 고을뿐이 아니니, 한 번 품재(稟裁)를 거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번에 군사를 일으킨 것은 대역(大逆)이니 본디 한 등급을 더하는 율(律)을 써야 하나, 출가한 자매에게 전연 문죄하지 않는 것은 법의 뜻이 있으니, 각처에 갇혀 있는 가운데에서 이미 출가한 자는 놓아 보내게 하고 출가하지 않은 자는 규례대로 조율(照律)하여 처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따라서 이인좌의 자매는 역적의 가족이지민 이종성 대감의 건의로 목숨을 유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