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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진재 노사신 선생님(조선 전기 영의정)

문장대 2023. 4. 5. 13:34

보진재 노사신 선생님과 소재 노수신 선생님 고찰

 

* 노사신 선생님 본관은 파주 교하 노씨, 출생, 사망 연대 1427년-1498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임금시대 사람이고 세조때 많이 활동한 정치가. 노태우 전대통령도 교하 노씨

 

* 노수신 선생님 본관은 광주(광산) 노씨, 출생, 사망 연대 1515년-1590년 중종10년-선조23년이고 유배생활을 20년 이상하고 말년에 영의정까지 역임했지만 마지막에 정여립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탄핵되고 곧 병사함. 

 

* 노씨 성은 같지만 본관이 다른 분인데 노사신이 선배정치가입니다.

 중종과 선조때 문신 소재 노수신과 이름이 비슷하여 많은 분들이 혼란을 격고있어 보진재 노사신 선생님의 자료를 올립니다. 사실 노사신 선생님이 노수신 선생님보다 88년 일찍 태어났다. 다같이  마지막 영의정 까지 벼슬한 점은 두분이 같으나 본관은 노사신 선생님은 교하 노씨이고 파주가 고향이다. 노수신 선생님은 상주가 고향이고 광주(광산)노씨이다. 노사신 선생님의 어머니는 세종대왕 장인 심온의 딸이라 왕실과 친척이었다. 따라서 그래서 문종과 수양대군 등의 세종의 자녀들과 이종사촌이다. 따라서 생애에 많은 어려움이 없었고, 비교적 정치에 덜 휘말렸으나 노수신은 인종 임금을 위하여 정치적으로 활동하다가 당시 영의정 이기를 탄핵하였고 인종 사후 명종 때 을사사회에 휘말려 이기, 윤원형 등 소윤의 보복으로 20년 이상 순천, 진도, 괴산에서 유배생활을 한 점이 다르다. 나중에 선조 임금때  부름을 받아 승승장구하여 영의정까지 역임했으나 마지막에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다시 탄핵을 당하고 76세에 병사하였다. 노사신 선생님은 벼슬을 하면서 불교경전 한글번역 등 학문연구와 경국대전을 최항과 함께 편찬하는데 총괄한 분이다. 벼슬도 다양하게 역임했고 건주위정벌,  남이장군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노사신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노태우 전대통령은 파주 교하 노씨이다.  보진재 노사신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선조로 생각된다. 

 

정의

1427(세종 9)∼1498(연산군 4).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자반(子胖), 호는 보진재(葆眞齋)·천은당(天隱堂). 노균(盧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노한(盧閈)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노물재(盧物載)이며, 어머니는 심온(沈溫)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1년(문종 1) 생원시,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곧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에 선임되었다. 이어 집현전부수찬·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여 국가 사명(國家詞命)을 관장하였다.

1459년(세조 5)에는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 이듬해는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462년에 세조의 총애로 세자좌문학에서 5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그 뒤 우부승지를 거쳐 1463년에는 도승지에 초배(超拜)되어 국가의 기무(機務)를 관장하였다. 같은 해 홍문관직제학을 겸하여 세조가 주석(註釋)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주석서 『요해(要解)』를 증보하여 찬진(撰進)하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崔恒)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총괄하였다. 같은 해에 호조판서로서 충청도 가관찰사(假觀察使)를 겸하여 지방 행정의 부정을 낱낱이 조사했고, 이듬해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또한, 1466년에 실시된 발영(拔英)·등준(登俊) 양시에 응시하여 각각 1등과 2등으로 합격하는 영예를 얻었다.

1467년 말에는 건주위 정벌(建州衛征伐)의 공으로 군공 2등(軍功二等)을 받았다. 1468년에는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올라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69년에 의정부 우참찬·좌참찬을 거쳐 우찬성에 올랐다. 우찬성에 재임 중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의 사신 강호(姜浩)와 예교(禮交)를 맺어 외교적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1470년(성종 1) 의정부좌찬성에 올라 이조판서를 겸했으며, 1471년에는 성종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6년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사서(史書)와 시문을 찬진하고 성균관에서의 강의 등으로 성종의 문치를 도와, 1482년에는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85년에는 영중추부사로서 평안도와 경기도의 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진휼사 겸 호조판서(賑恤使兼戶曹判書)가 되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487년 말에는 명나라 효종(孝宗)의 즉위를 맞아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우의정으로서 영안도도체찰사(永安道都體察使)가 되어 국가의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담당하였다.

1492년에 좌의정, 149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문과 독권관(文科讀卷官)이었을 때 처족을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윤필상(尹弼商)·유자광(柳子光) 등이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를 제거하는 논의를 주동하자, 세조의 총신이었다는 처지 때문에 미온적으로나마 동조하였다.

그러나 유자광 등이 옥사를 확대하려는 것을 적극 견제하여 사림파의 피해를 줄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사옥(史獄)이 진행되는 도중인 같은 해 9월에 병사하였다.

유년 시절에 홍응(洪應)과 함께 윤형(尹炯)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문과 급제 직후에 이미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집현전학사 때에는 장서각에 나가 독서에 전념하여 ‘진박사(眞博士)’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세조·성종의 총애를 받아 문치를 도와서, 호조판서에 재직할 때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을 주관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은 직접 편찬을 담당하였다. 또한 성종 때는 여러 사서(史書)의 편찬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 1476년 12월에는 서거정(徐居正)·이파(李坡)와 함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진하고, 1481년에는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수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강희맹(姜希孟)·서거정·성임(成任)·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을 총재했으며, 이를 위해 1476년부터 동국문사시문(東國文士詩文)을 수집하였다.

한편 1482년에는 이극돈(李克墩)과 함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신증(新增)하고, 이듬해에는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서거정·어세겸(魚世謙) 등과 같이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함허집(涵虛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조선 세조∼성종조의 공신연구」(정두희, 『진단학보』 51, 1981)
  • [네이버 지식백과]노사신 [盧思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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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상주가 고향인 소재 노수신 선생님의 자료를 올립니다. 

노수신( : 1515(중종 10)∼1590(선조 23))은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과회()이고, 호는 소재()·이재()·암실()·여봉노인()이며, 시호는 문의()였다가 후에 문간()으로 고쳐졌다. 전라도 광주 사람이다. 중종 26년(1531)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1541년 27세에 이언적에게 나아가 배웠다.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로 전적 수찬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인종 즉위초에 정언이 되어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고, 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더욱 덧붙여짐으로써 진도에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에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 나와 즉시 교리에 기용되고, 이어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기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노수신의 철학사상은 명나라 철학자 나흠순을 수용하였다. 나흠순의 리기일물론(理氣一物論)과 도심인심체용설(道心人心體用說) 등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나흠순의 욕망긍정론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황·기대승 등은 나흠순을 선학(禪學)으로 규정하고 노수신도 선학의 혐의가 있다고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