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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련과 반석평의 비교

문장대 2023. 4. 18. 19:31

* 송사련은 은혜를 배반한 조선시대 대표적 악의 인물이고 반석평은 은혜를 갚은 천사 같은 인물이다. 송사련은 외가의 역모고변으로 한때 출세의 가도를 달렸으나 2대에 다시 반노집안인 천민으로 내려간 집안이고 반석평은 후손들이 양반으로 대대로 복받은 대조적인 인물이다. 역사상 비교되는 두 인물은 교육하시는 분들에게 선악의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오니 활용바랍니다. 두사람은 조선 중종시대 사람인데 반석평이 24년 먼저 태워났다.

* 먼저 송사련의 자료를 올립니다.

송사련(1496~1575)은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의 고종사촌이었지만, 어머니가 서얼 출신으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그가 왜 사촌을 역모로 내몰았는지는 다음의 이유가 거론된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송사련이 남곤과 심정의 사주를 받았다고 서술하였고, 『대동야승』에서는 남곤과 심정에게 아부하여 상을 받아내려는 의도였다고 기술했다. 역모를 고변한 송사련은 당시 좌의정인 안당의 조카로 그의 어머니는 안당의 서매였다. 그의 어머니가 서출이니 출세가 힘들었다. 그러나 관상을 잘보는 실력으로 관상감의 관리로 근무하며 외가인 안당의 집을 출입했다. 관상감의 관리도 당시의 간신 심정과 남정의 추천으로 서출임에도 임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출이라는 출신대문에 당시 상당한 무시를 받았으리라! 가슴에 항상 불만을 품고 있던 차 자기의 외사촌인 안당의 아들 안처겸을 역모죄로 고변하였다. 외삼촌 안당의 귀여움을 받은 듯 하지만 무슨이유로 외사촌 안처겸을 미워했던 같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후 심정과 남곤이 조광조를 몰아낸 사화에 불만을 가진 안당의 안들 안처겸이 평소 이웃에사는 이정숙(李正叔), 권전(權磌) 등과 함께 담론을 하다가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정세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비판적인 말을 하였다. 이때 송사련도 같이 있었다. 송사련은 안처겸의 말을 빌미로 하여 그를 역모 주동자로 만들었다. 이때 증거로 안당의 부인인 안처겸의 어머니의 사망 조문록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송사련은 안처겸과 외사촌 고종사촌 사이었다. 송사련은 이 역모 고변으로 자기의 천한 신분을 높이고자 외갓집을 고변했다. 가담자를 추국하여 경명군을 추대한다는 역모로 변해 100명이 사망한 신사무옥을 일어켰다. 결국 외가인 안당과 안처겸의 집안은 역적으로 몰려 망하고 송사련은 외갓집의 전답은 물론 노비들까지 하산 받아 크게 성공했다. 이런 만고 천하에 비르먹을 일이 있었나 생각된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꼴이 되었다. 한때 조카를 사랑한 안당의 죄이련가! 기묘사화의 억울한 죽음을 회복해주려고 노력하던 충신 안당은 조카 송사련의 엉터리 역모 고변으로 죽음과 함께 패가망신 당했다. 

 

한편, 송사련은 외삼촌 안당의 아들 안처겸의 역모를 고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중종부터 선조 까지 네 임금을 섬기며 관직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아들 송익필(宋翼弼), 송한필(宋翰弼)은 학문적으로 명망이 높았다. 이이(李珥)가 함께 성리학을 논할 만한 사람으로 이들 형제를 꼽을 정도였고, 성혼(成渾)도 아끼고 존경하는 벗[외우(畏友)]으로 대우하였다. 송익필의 제자는 김장생이라는 대단한 학자를 길러내긴 했다. 그러나 이후 후손인 송사련 아들들은 아버지의 무고로 인해 관작이 삭탈되어 반노(叛奴, 상전을 배반한 종)가 되었다. 다시 설명하면 신사무옥(辛巳誣獄)은 ‘무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사년(1521, 중종 16)에 발생한 무고 사건이다. 1521년 안처겸(安處謙)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던 심정(沈貞)·남곤(南袞)을 제거하고 경명군(景明君)을 추대할 것이라는 고변이 있었다. 이 내용을 아뢴 사람은 안처겸의 고종사촌인 관상감 판관(觀象監判官) 송사련(宋祀連)과 송사련의 처남인 평민 정상(鄭瑺)이었다. 송사련의 고변 이후 추국이 이루어졌고, 결국 안처겸 등을 비롯하여 백여 명이 연루되었다. 안처겸과 그의 아버지 안당(安瑭), 동생 안처근(安處謹)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약 1백 명이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안처겸 옥사(獄事)’라고도 불린다.

 
* 그러면 역적모의를 했다고 고변당한 안처겸은 누구인가

안처겸(1486년(성종 17)∼1521년(중종 16))은 중종대 좌의정 안당의 큰아들이다. 권세 있는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관직 생활은 매우 짧았고, 36세에 신사무옥으로 죽임을 당했다. 안처겸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허(伯虛), 호는 겸재(謙齋)·근재(謹齋)·허재(虛齋)이다. 그는 1513년(중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후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장의(掌議)를 맡았다. 1517년(중종 12)에는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의 문묘 종사를 주장하기도 했다. 1519년(중종 14) 34세로 동생 안처함(安處諴)·안처근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다. 현량과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대책(對策)만으로 시험을 보도록 한 제도인데, 안당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현량과에 추천하여 급제시켰다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안처겸은 곧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삼년상을 치렀다. 1521년(중종 16)에는 탈상하여 처가에 있으면서 이웃에 사는 이정숙(李正叔), 권전(權磌) 등과 함께 담론을 하다가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정세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비판적인 말을 하였다. 이때 송사련도 같이 있었다. 송사련은 안처겸의 말을 빌미로 하여 그를 역모 주동자로 만들었다.

 * 신사무옥의 배경이 되었던 기묘사화

송사련은 안처겸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과 남곤을 제거하려 했다고 고변하였다. 2년 전에 발생한 기묘사화를 일으킨 이들을 지목한 것이었다. 이로써 기묘사화의 비극은 2년 뒤 신사무옥으로 이어졌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에 남곤, 심정 등의 훈구세력에 의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조광조 등에게 쓰인 죄명은 ‘붕당(朋黨)’이었다. 이들이 붕당을 형성해 자신들과 뜻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과격하게 일을 추진함으로 국정을 위기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묘사화는 사실상 조광조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였던 중종이 이끌어갔다. 『중종실록』을 편찬한 사신(史臣)은 중종이 홍경주(洪景舟)에게 내린 밀지를 기록해 놓았다. 그 내용은 “간당(奸黨)이 이미 형성되었고, 임금이 고립되어 제재하기가 어렵다. 함께 제거하는 것을 도모하여 종사를 안정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1월 14일 새벽에 남곤 등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가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조광조 등의 제거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안당 등은 강하게 항의하였고, 성균관 유생들은 궁궐에 난입하여 통곡하였다. 조광조는 유배되었지만, 중종이나 남곤 등은 그의 세력을 확실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조광조와 기묘사림에 우호적인 인사들은 하나둘씩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정광필이 영의정에서 물러났고, 안당도 파직당했다가 영중추부사로 옮겼지만 지속적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결국 조광조는 사사당했고,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구(金絿), 윤자임(尹自任) 등도 유배되었다. 반면, 남곤과 심정은 정승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남곤은 세상을 떠난 이후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 1558년(명종 13)에 삭탈관직 당했고, 심정은 김안로(金安老)와 정치적 갈등을 겪다가 1531년(중종 26)에 사사되었다.

 
* 신사무옥의 전개과정
 
기묘사화 이후 중종과 남곤, 심정 등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행해졌던 개혁들을 모두 폐지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당성은 부족했고, 조정에는 조광조를 지지했던 세력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 가운데 1521년(중종 16) 10월 11일에 송사련과 정상의 고변이 올라왔다. 송사련의 고변 내용은 안처겸이 이정숙, 권전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남곤, 심정 등의 공신 세력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안처겸의 어머니 장례식의 조객록(弔客錄)과 발인(發靷) 때의 역군부(役軍簿) 등을 증거로 제출하였다. 결과적으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모의가 실제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조광조가 제거된 이후 정국은 긴장 국면이 계속되었고, 송사련의 고변이 올라오자마자 정국은 역모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추국을 맡은 대사헌과 대사간은 “그들이 종사에 관계되는 어떤 계책이 있을 것인데도 형장을 견디며 자복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고, 추국은 연일 계속되었다. 22차례의 형장과 심문 끝에 이정숙은 중종의 폐립을 고려했었다고 자복하였다. 권전이 형장을 맞다가 죽고, 안처겸도 결국 중종 폐립을 시인하고 말았다. 거기에 경명군(景明君)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말까지 추국 과정 중에 나왔다. 중종은 안처겸 옥사와 관련하여 1백 명 이상을 처벌하였다. 안처겸, 이정숙, 안처근, 안형(安珩), 신석(申晳) 등이 처형되었고, 일부는 형장을 받다가 죽거나 유배되었다. 더불어 기묘사화 때 목숨을 부지한 김정, 기준(奇遵)도 결국 죽임을 당했고, 한충(韓忠)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 기묘사화, 신사무옥 연루자들의 신원

안처겸 옥사의 연루자들에 대한 신원(伸寃)은 사건 이후 3개월이 지났을 때부터 거론되기 시작했다. 유배된 자들의 가족들이 억울함을 토로하며 국왕에게 선처를 바라는 사례가 이어졌고, 일부는 유배에서 풀려나기도 했다. 1529년(중종 24)에 정광필은 혐의가 뚜렷하게 없는 자들을 풀어주자고 건의하였고, 1533년(중종 28)에는 구수담(具壽聃)과 이준경(李浚慶) 등의 건의로 안처겸 옥사 연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 조치가 내려졌다. 한편, 1544년(중종 39)부터는 삼사에서 조광조와 기묘사림에 대한 신원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중종은 임종 직전에 조광조의 신원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명종 즉위 직후인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면서 신원 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윤원형(尹元衡) 처형 이후인 1565년(명종 20) 조광조 신원에 대한 논의가 재개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 선조 가 조광조의 복관과 추증을 명하였다.

* 무고자 송사련은 어떻게 되었나

송사련(1496~1575)은 안처겸의 고종사촌이었지만, 어머니가 서얼 출신으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그가 왜 사촌을 역모로 내몰았는지는 다음의 이유가 거론된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송사련이 남곤과 심정의 사주를 받았다고 서술하였고, 『대동야승』에서는 남곤과 심정에게 아부하여 상을 받아내려는 의도였다고 기술했다. 한편, 송사련은 안처겸의 역모를 고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중종부터 선조 까지 네 임금을 섬기며 관직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아들 송익필(宋翼弼), 송한필(宋翰弼)은 학문적으로 명망이 높았다. 이이(李珥)가 함께 성리학을 논할 만한 사람으로 이들 형제를 꼽을 정도였고, 성혼(成渾)도 아끼고 존경하는 벗[외우(畏友)]으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들들은 아버지의 무고로 인해 관작이 삭탈되어 반노(叛奴, 상전을 배반한 종)가 되었다. (자료출처-네이브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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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천한 신분에서 은혜를 배풀어준 상전에게 끝가지 은혜를 갑고 조상대대로 양반신분을 유지한 반석평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올립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송사련과는 대조적이다.

 

 조선 중종시대 문신 반석평 선생님 

- 출생, 사망, 성장환경, 출세과정 : 1472년-1540년 이고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이며,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그의 형 반석정은 생원시에, 동생 반석권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조선시대 역대 감사중 8도 감사를 모두 역임한 사람은 태조때 함부림과 중종때 반석평이라고 한다. 반석평 선생님은 거제 반씨에서 분파된 광주 반씨이다. 여말 선초에 반충이라는 선조께서 조선개국의 원종공신으로 책봉받아 광주반씨로 분파되었다. 그의 증조는 선략장군, 충무위 부호군을 지낸 반사덕(潘思德)이고, 할아버지는 한성 판윤을 지낸 반강(潘崗)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반서린(潘瑞麟)이다.아버지는 양반이나 그의 어머니는회미 장씨는 첩이어서 반석평은 과거를 볼 수 없는 신분이었다.조선시대는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천하면 과거 응시가 불가하다. 신분을 어려서는 멋모르고 살다가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이참판댁 일꾼으로 들어가서 생계를 이어갔다. 말이 일꾼이지 당시는 종의 신세였다. 참판댁 아들은 이오성이었는데 이오성이 공부하고 있을때 어께넘어로 공부를 했는데 반석평이 너무 총명하여 이참판은 깜짝 놀랐다. 그는 하나를 가르키면 열을 아는 천재였다. 이참판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그를 같은 반씨집안의 양아들로 보내 대를 잇게하고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는 이참판댁과 연락을 두절시켰다. 양아버지 반서린의 집에가서는 더욱 공부에 매진하여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할머니와 서울에가서 할머니가 바느질로 수입을 얻어 공부시켰다고 하는 분도 있다. 유몽인의 어유야담,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중종실록에서도 반석평의 출세이야기가 전해진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보니 반석평은 당시에 양반은 아닌 같다. 그러나 두뇌는 조선8도에서 최고였다. 천민이 40%인 조선시대에는 양반만이 과거에 응시하는 모순되고 아주나뿐 제도이다. 이를 극복하고 반서린의 양아들로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의 길을 열었다.

 

-과거 급제후 여러관직 발령사항

이참판댁 종으로 있으면서 종문서를 불살어고 면천시키고 반석평은 반서린의 양아들로 되어 과거에 응시하여 1504년 연산군 10 32세 때 생원시에 전체 합격자 100명 중 38위의 성적이다. 이때 그의 형도 동방 합격하였다. 3년후인 중종 2(1507) 35살에 식년시 문과에 3(병과) 22위로 급제하였다. 전체 급제자 33명 중에 32위이다. 급제후 한림직인 검열에 임용되어 관리가 되었다.한림에 임용되어 사관으로 5년간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 문무를 겸한 유장(儒將, 문신 장수)이었다.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호조형조예조의 정랑을 지내고 세 품계를 건너뛰어 함경도 경흥부사에 임용되었다. 이후 그가 함경도관찰사에 임용될 때도 문무를 겸비하였다고 하여 뽑혔다. 그는 문무를 겸한 관리이다. 따라서 양계지역의 일을 잘 알아 함경도절도사 등 변방의 장수로 여러 차례 임용되었다.  5도 병사를 지냈다고 하며 충청, 전라, 평안, 함경, 황해 등 다섯 도의 관찰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반석평은 예조와 호조, 공조의 참판을 두루 지내고 명나라 사신으로도 두 번 다녀왔다. 중종 34(1539) 67세 때에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라 오위도총관을 겸했으며, 이듬해 병으로 한가한 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졸하였다. 관리로 임명당시 여러번 탄핵되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후세에 길이 남는 모범관리가  된 사실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본받아야 한다. 이분에 대한 책이 발간되어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도서관에서도 이분에 관한 책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이참판댁의 아들을 만나 은혜를 갚은 이야기

조정의 높은 관리를 하면서 젊은 시절에 보살펴준 이참판댁 생각이 나서 은혜를 갚기위해 시골(전라도 옥구) 살던곳을 찾아 갔으나 참판댁은 무슨 이유인지 망하고 폐가가 되어 있었다.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와 살던 중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참판댁 아들 이오성을 만났다. 말도 없이 거리를 걷던 은인의 아들을 만나니 너무반가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였다. 반갑게 맞이하여 은인의 아들 이오성을 집으로 데려갔다.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며 지난일을 이야기 했다. 다음날 반석평은 조정에 나아가 중종임금에게 자기의 출세과정을  솔직하게 애기하고 자기의 벼슬을 내리고 은인의 아들 이오성에게 벼슬을 줄것을 고했다. 중종 임금은 반석평의 마음에 감동하여 벼슬은 그대로 두고 은인의 아들에게 사옹원 별좌 관리로 특별 임용했다. 당시 상황으로 극히 통과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이 이야기가 유몽인, 이익, 이덕무가 쓴글에 나타난 것은 유명하다. 중종실록에도 나타나 있으니 놀랄 일이다. 너무나 감동적인 스토리여서 TV 역사프로그램이 자주 나타나서 현재 우리의 국민들이 감명을 받고 있다.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에 반석평 선생님의 스토리가 방영된 사실이 있다. 팔도 감사와 5도 병사를 한분이고, 주요관직의 참의, 참판, 판서까지 한분이 우리역사상에 별로없다. 정말로 대단한 분이다. 특이한것은 반석평의 후손인 반기문 전유엔 사무총장이 반석평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정말 놀랄일이다. 하늘의 천복을 받은 문중이라고 생각된다. 세계대통령을 역임했고 잘했으면 우리나라 대통령까지 될  뿐한 반씨 문중이다. 반기문 유적은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 생가가 있고 조금 떨어진 음성읍 원남면 하노리 음성읍 입구에 광주반씨 문중산이 존재한다. 이 묘지들은 반씨 집성촌이 있는 군산, 옥구의 옥산-회현에 있는 회미장씨 어머니와 조상무덤을 이장했고,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반석충의 묘지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군산 옥구 옥산면이나 회현면의 반씨 문중은 이곳 음성군 관리로 임용받은 선조의 주선으로 음성땅에 가족들이 이사해서 대대로 반씨 문중세거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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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우 두인물은 24세 차이가 난 중종때 인물로 대조적인 행동으로 역사에 상반된 행동을 한 인물이다. 선악과 도덕을 가르키는 교육자들은 조선의 두 인물의 행동을 잘 보시고 피교육자들에게 교육하시면 좋은 교육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거의 500년이 된 당시의 정치현상을 잘 파악하여 온고지신과  타산지석의 자료로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역시이야기를 좋아하는 문장대 이종하가 등산을 못간 날 역사 자료를 참고하여 감히 등산기 역사란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