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면과 산북면에 산양면 4대정자와 3대구곡(청대구곡, 석문구곡, 산양구곡 )을 소개합니다.
근암서원과 봉천사, 월방산, 녹문리 고병숙가옥 등을 금천 양쪽의 우암정, 주암정, 경체정, 농청정 4정자와 연계하면 멋진 관광지가 될 같습니다.
주암정,우암정, 경체정은 산북가는 도로에서 서중리 근암서원 지나 우측 현리 가는 강변도로 타면 찾기쉬우나 농청정은 빙돌아 산양중 서쪽 도로에서 존도리 가다가 입구에서 우측 강변 좁은도로로 500미터 가야 나타남-이정표와 안내판이 없으므로 위지도 참고하여 답사하세요.
금천 강변에 존재합니다.
금천은 동로의여러 계곡물이 경천호에 유입되고 다시방류되어 아천과 대하리천이 합하여 다소 폭이 넓은 하천으로 산북면 소재지와 산양면 소재지 옆으로 흐르다가 삼강에서 내성천과 합류. 이어 농암천-영강과 다시 하풍리 일대 삼강 주막근방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의 본류가 됨
우암정 아래도 옛날에는 물이 흐르는 금천이었답니다. 민가가 1채 있네요. 옛날에 정자 1채 짖는것은 요새 빌딩 20층 건설보다 힘들건데 참 대단하십니다.
산양에서 현리가는 202도로옆에 멋지게 존재하는 경체정(청대구곡 제2곡)이며 아래 사진 글을 잘 읽어보세요.
경채정 아래 바위 아래 물에 발을 담그고 여름을 보낸다면 천국이 여기지요.
금천위의 바위가 마치 배위의 형상이라 주암이라고 함-바위다리와 바위에 자라는 소나무가 기적적으로 자라는 곳입니다. 주암 재익하 선생님이 새운 명소임. 산북면(山北面) 서중리(書中里) 44-4번지에 있는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종(顯宗) 때의 생원인 주암 채익하(舟巖 蔡翊夏)가 세웠다. 마을의 동남쪽을 흐르는 강변에 배의 형상을 한 바위 위에 짓고 이름을 주암(舟巖)이라 하였다. 채익하(1633~1676)는 인천채씨(仁川蔡氏)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인 나재 채수(懶齋 蔡壽)의 6세손이다. 주암의 9대손이 쓴 주암정기(舟巖亭記)가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암정 [舟巖亭] (두산백과)
경남 함양 안의면에 농월정이 있다면 이곳에는 농청정이 존재 - 함양 안의에서 육십령까지 여러정자가 있다면 이곳 문경 금천 강변 양안에도 많은 정자들이 존재합니다. 저기정자 앞 바위에도 존도와 라는 서각이 존재. 이정자는 청대 권상일 선생님이 거주하시고 만드신 정자임
위 안내판 잘보시고 아래사진 태고암 서각 보세요.
문경시에서멋지게 조성한 설비-감사합니다-여기가 지상천국이 아닌지!
벼랑 바위에 새겨진 농청대 멋진글씨가 찬란합니다.
이곳 존도봉의 여러 바위들이 절경이며 청대구곡 5곡과 석문구곡 1곡이라는 역사의현장입니다.
청대 권상일 선생님은 너무 충신이어서 아래 자료를 곡주님 곡주생각 불로그에서 복사해서 올렸습니다. 묘지는 산양과 산북의 경계인 산북면 표지석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100미터 지나 묘지가 있고 신도비는 근방 수니매밀촌식당근방에 있답니다. 울산 울주의 최고의 목민관임.
영조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59)의 소통 정묘년 1747(영조23년) 12월 11일 /청대 일기
밤 2경 말에 전교하기를 승지는 입시하라. 라고 하여,바로 일어나 망건과 관대를 하고 합문에 나아가서 입시를 하니 주상이 보고싶은 마음이 생겨서 입시하게 하였다 라고 하여 내가 소신이 어찌경학을 알 수 있겠사옵니까. 단지 헛된 이름을 훔쳐 온 세상을 크게 속이게 되었사옵니다. 위로는 임금과 어버이를 속였으니, 더욱 송구스러워 어찌할지를 모르겠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며칠 전에 좌의정이 경연에서 경학에 밝은 선비라고 진달하였다) 주상이 심경에도 말했듯이 밤중에 일어나 사념에 잠기면 마음이 자꾸 들뜨고 다잡기가 어렵다.슬픈 마음이 일어나면 마치 앞에 물건이 나타나는 것 같다,이때 심신을 한 군데로 모으는 방법으로 무엇이 먼저인가? 역(易)에 이르기를 동동(憧憧)거리며 왕래하면 벗들이 따르리라, 라고 했는데 동동은 마음의 왕래를 가르키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여 내가 눈을 감으시고 사념을 끊으시면 정신을 안으로 수습할 수 있사온데, 신도 구구한 회포가 있어서 감히 전하께 말씀을 올리겠사옵니다.매일 밤중에 잠을 못 이루시면 성체가 쉽게 손상될 것 이온데, 이 때문에 염려되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옛 사람이 말하기를 군주는 야대(夜對,임금이 밤중에 신하를 불러서 경연을 베풀고 경사와 학문을 논 하는 것을 말한다.)가 주강보다 낫다.고 했으니 이 말을 왜 하였겠는가? 밤에는 낮보다 정신력이 더 낫기 때문이다. 밤이면 나는 피곤한 줄 모르지만 신료들은 아마도 힘들 것이다.낮에는 기운이 고달파서 비록 수백 명이 발로 차더라도 일어나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내가 밤이 되어 비록 잠을 못 이루시더라도 누워 쉬시면서 정신을 모으느 것이 좋겠사옵니다.진덕수의 야기잠(夜氣箴)에 밤은 곧 하루의 겨울이다.라고 했고 진무백의 숙흥야매잠에는 사념을 일어나게 하지 말고 마음을 안정시켜 밤의 원기를 길러 정(貞)해 질 때 다시원(元)이 돌아올것이다 라고 하였사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그것은 맞는 말이다. 네 계절로 말하자면 가을과 겨울에 거두어 갈무리한 다음에야 봄을 맞으면 밖으로 펴질 것이다.역에 또 말하기를 날이 어두워지면 들어가 쉰다.고 하였다.라고 하여 내가 옛 책에 이르기를 삼경에 잠을 못 자면 피가 심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라고 하였고 또한 밤에 이야기하는 것은 기운을 매우 상하게 한다.고 하였사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잠이 오지 않을 때 누우면 문득 답답하여 반드시 일어나 서성거리니, 이것이 내 마음의 병이다. 라고 하고 또 주상이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요긴한 방법은 무엇이 먼저인가? 라고 하여, 내가 그 요점은 경(敬)에 있으나 외(畏)가 가장 긴요하옵니다.신이 경험한 적이 있사옵니다.길을 가다가 위험한 곳을 만나면 마음이 두려워 자연히 정신을 가다듬으므로 딴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畏가 가장 긴요하옵니다. 라고 대답하니, 주상이 그 말이 참으로 옳다. 畏란 것은 곧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知와 行은 당연히 둘 다 공부해야 하나 경중을 따지자면 어느 것이 중요한가? 라고 하여, 내가 선후를 따지자면 지가 앞이고 행이 뒤이나 경중을 따지자면 행이 무겁고 지가 가벼우니, 지금의 입과 귀의 병폐를 고치려면 행을 먼저하고 중요시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라고 대답하니, 주상이 행의 요점은 무엇인가? 라고 하여 뜻을 진실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독서의 방법은 주석에 힘을 다 쏟을 필요는 없고 대문(본문)에 힘을 다 쏟아야 하는데 주요 내용을 스스로 터득하면 주석은 자연히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내가 성상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책을 읽을 때는 먼저 대문을 읽어 그 뜻을 구하여 찾되,만약 깨닫지 못하면 마음속으로 실마리를 찾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명확하게 깨닫도록 하고, 만약 끝내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면 대주(大註:큰 주석)를 대문을 읽는 방법대로 읽고, 그래도 끝까지 깨닫지 못하면 소주(작은 주석)를 이와 같이 읽는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얻는 것이 많겠으나,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사옵니다. 이 때문에 입과 귀의 병폐가 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하니, 주상이 승지가 책이 많은 것이 병폐라고 말한 것은 역시 옳다 라고 하였다. 주상이 주례를 익혀 본적이 있는가?라고 하여 내가 익숙하게 읽지는 못했사오나 주자는 주공이 천리를 익숙하게 운용한 책이라고 하였사옵니다. 라고 대답하니 주상이 주자가 한 이말은 내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라고 하였다. 주상이 심감(心鑑)을 보았는가? 라고 하여. 내가 신이 보지 못 하였사옵니다.라고 대답하니, 주상이 이것은 내가 지은 책이다.틀림없이 옥당이나 춘방에 있을 것이니,가져 와서 본 뒤에 의견이 있으면 말해 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고,또 주상이 내가 이미 편히 잘 수 없다는 병을 말했거니와 만약 이 병에 대한 유익한 말을 찾으면 이후에 와서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내가 보잘 것 없는 말씀일망정 한마디라도 찾으면 글이든지 말씀으로든지 어찌 감히 아뢰지 않겠사옵니까 라고 하였다. 바라를 친 뒤에 물러나 나왔다. 권상일(權相一) 1679(숙종 5)∼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의 근암리(近菴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심(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부사 달의(達意)의 딸이다. 학문을 일찍 깨우쳐 20세에 옛사람들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전적·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좌랑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병조좌랑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해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해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733년 양산군수·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해 간행하고, 이듬해 상소해 민폐 근절책과 관기숙정 방안을 건의했다. 홍문관의 계청에 의해 경연에 참석해 소신을 진술했다. 그 해 울산부사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고, 구강서원(鷗江書院)을 창립해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공씨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등 선치를 하였다. 1741년 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45년 봉상시정, 이듬해 사헌부헌납·사간원사성·사헌부집의·동부승지·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판결사(判決事)·홍문관부제학·한성좌윤·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황(李滉)을 사숙해 「사칠설(四七說)」을 지어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둘로 분리하고, 이는 본연의 성이며 기는 기질의 성이라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청대집』 18권, 『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과 『일기(日記)』 30여 권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근암서원(近菴書院)에 향사되었다.
[출처] 영조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의 소통|작성자 곡주 후일에 우인수교수님이 청대일기를 번역하셔서 책자로 만들었으며 주로 울산에서 큰 활약을하여 울산, 언양, 경주 지방의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울산 목민관임. 울산의영웅 이며 충신, 백성들의 영웅이 이곳 근암리서 탄생(당시 이곳은 상주땅이라고함. 채헌선생이 구곡을 경영할때는 금천가에 있엇지만...세월이 물길을 돌렸고 현재는 연못으로 변했다. 울산에서는 상주의 영웅 청대선생이라고 한답니다. 저서 청대일기, 학성지는 농청대에서 완성했다고 함. 여기까지 청대 권상일 선생님의 소개입니다. ------------------------------------------------------------------------------------------------ 채헌 : 조선 정조 때의 문신․학자. 자는 계징(季澄), 호는 근품재(近品齋). [네이버 지식백과] 채헌
배모양의 이물위에 주암 채익하 선생님( 1573-1615)의 학덕을 기려 후손들이 세웠다는 주암정((舟巖亭)이 고즈넉이 서있다.허리가 안좋으신 채훈식선생게서 몇십년을 정자를 쓸고 닦고 관리를 하신 것이다. 주암 채익하는 임진왜란때 안동의병장을 하신 유명한 근시재(近始齊) 김해(金垓,광산김씨)선생의 4남인 김광악의 둘째딸에게 장가들은 분이다.그러니까 김해선생의 손서(孫壻)가 되신다.주암 채익하를 검색하니 정부인 안동장씨의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쓴 근시재 김해선생의 묘지명이 보인다..주암 채익하선생의 처고모부가 유명한 석계 이시명 선생(석계 이시명의 후처가 정부인 장씨)이고 그 아들이 바로 영의정으로 추증되신 갈암 이현일 선생이다.갈암 이현일과 주암 채익하선생의 부인과는 내외종4촌간이란 뜻인데...주암 채익하 선생이 그만큼 대단한 가문이고 대단한 양반이고 대단한 선비라는 뜻이다...내가 알기로 안동의 광산김씨는 영남에서 특이하게 노론을 한 가문인데...사위가 석계 이시명이고....외손자인 갈암 이현일은 남인의 영수가 된다...갈암 이현일은 송시열선생과 많은 논쟁을 하게 되는 분이다. 대다수 영남의 남인선비들은 출세에 지장을 받고 과거시험도 통과 못하고....과거에 합격해도 정승이나오질 못했다...약 200년간....소설가 이문열선생의 14대조가 유명한 정부인장씨의 남편인 석계이시명선생이고 아들이 영의정에 추증된 갈암이현일인데 갈암의 조카항렬(족친)이 30여명되지만 한사람도 문과급제를 못 했다.그러나 서인인 율곡 이이선생께 배운 족친들중 과거급제자가 13명이었고...현직에 9명이나 있엇다...200년간 산림에 은거하며 벼슬을 못한,또는 안한 선비들(영남 남인들)이 제사때 바로 조상님들을 '처사(處士)**부군신위'하며 지문을 쓰고 위패를 모시는데 바로 이런 이유다...처사란 산림(향리)에 은거한 사람을 일컫는다...퇴계이황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남명조식선생은 묘비명에 '처사라고 써달라'고 했다한다... 약봉 서성과 소호헌편액(보물 지정)자료는 요기참고. http://blog.naver.com/gaetuel/20194754861 )- |
◆ 채헌이 18세기에 설정한 석문구곡
1곡 농청대(弄淸臺), 2곡 주암(舟巖), 3곡 우암대(友巖臺), 4곡 벽립암(壁立巖), 5곡 구룡판(九龍板), 6곡 반정(潘亭), 7곡 광탄(廣灘), 8곡 아천(鵝川), 9곡 석문정(石門亭)이다.
◆ 청대구곡
1곡-우암, 2곡-벽정(경체정), 3곡- 죽랍(도천사절터), 4곡- 가암, 5곡-청대. 6곡-구잔, 7곡 -관암, 8곡-별암, 9곡 소호(청원정)
◆ 산양구곡
1곡- 창주, 2곡-존도봉, 3곡-창병, 4곡-형제암, 5곡- 암대, 6곡-상주,
7곡-근품산 8곡-구룡판, 9곡-반정
위의 3대구곡이 산양면과 산북면 금천, 대하천변에 있는 절경이다. 경북대 김문기 교수와 이일배 선생님이 해설하신 자료를 보고 올렸으나 그 위치는 자세히 몰라 앞으로 이근방을 여행하며 장소를 답사 할 계획입니다. 이곳에서 거주하신 청대선생님과 주암선생님의 유적이 후세들에게 좋은 명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개인생각으로 농청정, 주암정이 이 곳 절경의 중심인 같습니다. 문경시 산양면에 청대구곡, 석문구곡, 산양구곡이 거의 존재한다는 사실은 산양면 주민들에게는 큰 자랑거리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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