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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일본 명문 오우치 가문과 우리나라(백제)와의 역사적 소고

문장대 2017. 9. 12. 11:46

  역사추적 26회 자료는 KBS 자료에서 퍼온자료입니다.


[제26회]
1400년 만의 귀환 - 오우치가의 비밀


▣방송 : 2009. 6. 8 (월) 23:30~24:15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최필곤 PD

지난 4월 15일, 한 일본인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들의 이름은 오우치(大內)

이들은 백제 왕릉에 무릎을 꿇고,
참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琳聖太子)의 45대손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우리의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임성태자

그는 과연 누구이고, 오우치 가문은 왜 자신들을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가?
 



성왕 묘역에 절하는 오우치 기미오, 오우치 다카코 부부



▲ 성왕릉에 제문을 올리는 오우치 기미오, 오우치 다카코 부부


한국을 방문한 오우치(大內) 부부는 성묘를 위해 부여 능산리 2호분(백제 성왕의 능으로 추정)에 무릎을 꿇었다.
“아득히 먼 아버지 백제왕의 묘 앞에 머리를 대고
왕의 혈손 45대 후손 오우치 기미오 삼가 아룁니다.
수많은 세대를 거쳐 그리고 수많은 세월을 지나
드디어 대망의 조상의 땅에 지금 돌아왔습니다.”
- 부여 성왕릉 참배 당시, 제문 중에서 -
스스로 한국인과 DNA가 같다고 말하는 오우치 부부. 그들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 익산 원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던 중 눈물을 흘리는 오우치 기미오


“쇼군을 갈아치운 일본 최고의 권력 가문, 오우치”
오우치 가문과 조선 왕실의 관계는?


오우치 가문의 한국 방문은 700년 전에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통교기사만 150년간 에 걸쳐 200회가 넘을 정도로 활발하게 조선과 교역했던 오우치 가문. 그들은 특별히 사신을 통해 요청한 것이 있었는데...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정종실록 1년 7월 10일 중에서
14세기 당시 일본을 재패했던 일본 최고의
가문 오우치 일가는 왜 자신들을 백제의 후손이라 주장했는가?

가문 오우치 일가는 왜 자신들을 백제의 후손이라 주장했는가?



▲ 일본 야마구치시(市)에 남아있는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의 동상과
루리코사(琉璃光寺) 5층탑


“우리에게 없는 백제 왕자의 기록”
일본에 남아 있는
임성태자의 흔적

▲ 코류사에 남아있는 임성태자가 가지고 온 것으로 본 칼



▲ 오우치 가문의 족보와 족보 제일 앞장의 임성태자(琳聖太子)

“임성태자에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
597년, 백제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일본 기록에 의하면 임성태자가 백제를 떠난 시점은 597년. 그는 왜 백제를 떠나야만 했을까? 임성태자가 떠난 후 2년간 혜왕, 법왕, 무왕 3명의 왕이 바뀔 정도로 혼란했던 백제. 건국 이래 가장 치열한 정치적 파장이 예고됐던 상황에서 임성태자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임성태자 공양탑












                            오오치 가문의 후손이 1442년 지은 유리광사내  5층목조석탑이 일본국보로 지정


 


     

야마구치 현에 존재하는 유리광사를 방문하여 가이드로 부터 전해들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백제 성왕의 3째아들 임성태자가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오우치 가문의 45대 후손은 능산리 성왕묘역과  익산 미륵사지와 원광고등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생동안 모은돈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오우치 가문은 일본의 우수한 가문이어서 굳이 조상이 백제사람이라고 밝히지 않아도 되지만 피는 못속여 스스로 백제가 자기조상나라라고 믿고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역사에 임성태자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으니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의 유물(칼)을 아직도 보존한다.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유물과 족보 등의 자료를 가지고 자기조상들이 백제라고 주장하니 대견하고 우리국민들은 받아드려야 한다. 따라서 일본의 야마구치는 우리나라 선조들이 살았고, 후손들이 살고 있으니 한편 자랑스럽기도 하며 우리나라 땅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야마구치를 관광하고, 조선통신사 상륙지, 아카마 신궁도 방문하니 역시 감회가 깊다.


  지금 가수들과 배우들이 일본에서 한류의 열풍을 일으키지만  한류의 열풍이 천사백년전 이미일어났고 조선시대 통신사들이 한류 열풍을 일으켰으며 당시에 통신사들을 위해 일본은 2조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고 했으니 백제와 조선시대 한류에 비하면 지금의 한류 열풍은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드라마 겨울연가로 인해 배용준은 엄청난 한류열풍을 일으켰지만 과거에도 한류열풍은 대단했다. 이런 사례로 볼때 우리나라는 여러면에서 일본의 문화와 지식, 기술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 일본에서는 베컴과 배용준이 살아있는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김종필 전총리는 한일의원연맹위원장 당시에 시모노세키 아카마 신궁앞에 조선통신사상륙 유적지 비석을 만들어서 한국관광객이 많이 방문한다.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는 성왕(AD 494)이 신라의 복병에 의해 피살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대만을 거쳐 일본에 건너갔다. 임성태자 일행은 당시 백제의 문화예술을 일본에 전래 하여 일본불교 확산에 기여하였으며, 백제의 제련기술을 통하여 일본의 철기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 후 백제의 선진기술과 예술 등 수많은 문화를 전수한 것에 인정을 받아 오우치 영토를 하사받고 그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이후로는 일본 서부지역의 주요 국제 무역지를 차지하고 막대한 이익과, 권력을 통하여 일본 명문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미개했던 일본인은 학식과 기술이 높은 우리나라 백성들을 높이 평가하고 대접받았으리라!  임진왜란 당시 노예로 끌려간 우리백성도 현재는 일본에서 우수한 가문을 형성한 심수관 후예가 그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오우치 일가는 야마구치현 등 서일본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활약했지만 모리 가문에 의하여 몰살당했다.  이 모든 것을 볼때 야마구치는 우리나라와 밀접한 곳이다. 이곳에서 살던사람들이 우라나라에 와서 무역을 하여 먹고살았고 부를 축적하여 가문을 부흥시켰으며 그로인해 잘살아  일본 총리가 몇명태어났으니 그들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섞여있으리라!



조선통신사 상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