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여행 이야기

춘향전과 주인공 이몽룡(본명-성이성)의 소고

문장대 2017. 7. 14. 20:49

Ⅰ. 서론

  춘향전은 조선 중기의 소설로 그 당시는 물론 수백년 동안 내려오며 오늘날 까지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이는 멋진 소설이다. 주무대인 남원은 물론 남북한, 해외 지역 모두에서 극진하게 찬사를 받는 국문학이며, 정치, 만담, 연극, 영화, 판소리, 학교교육, 가정교육에서 두루  발표되는 것으로 우리민족의 자랑거리이다. 극심한 가난과 어려움속에서도 이소설은 소책자로 발행되어 우리 조상들의 읽을거리로 전파되어 성경 빼고는 가장 많이 읽혀진 배스트 셀러이다. 어릴때 부모님이 저녁마다 읽어 주시는 춘향전은 나에게 꿈과 이상세계, 정의감을 일께어 준 작품이었다. 60년대 영화로 발표된 춘향전은 전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바 있다. 이러한 민족문화유산이지만 근래의 청소년들은 춘향전에 대하여 그냥 미미하게 알고있음이 안타깝다.

  판소리를 통하여 조선시대 중기 이후 지금까지 소개되어 명맥을 유지하였고, 뜻있는 분들을 통하여 외래어로 번역되어 세계각국에서 타국민들에게 소개된다는 소식에 다소 안도의 마음이 되고 있다. 이몽룡은 실제인물 계서공 성이성의 젊은 시절의 이 행적을 영조시대 어느 이름모르는 사람에 의하여 소개되어 춘향전으로 탄생되었고, 경북 봉화 물야면 가평리에 계서당이라는 생가를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되어 조명하고자 한다.


. 본론


1. 춘향전은 단순히 전래의 이야기로 인물인 막연한 사람의 꾸며낸 애기 같지만 전연세대 설성경 교수에 의하여 조명되고 1999년 12월4일 KBS1 TV에서 방영되었다.


국문학을 전공하여 구운몽등 많은 역사소설을 연구하고 글을쓰는 설교수님의 주장에 의하면 춘향전은 설화나 판소리에서 그 기원을 말 할 수 있지만 암행어사 출도 사실은 산서 조경남이 지은 계서 성이성 어사를 묘사하여 지어진 소설이라고 확신한다.

                                                                 

춘향전 [설성경]
《춘향전》의 원작자
한국 최고의 문학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춘향전은 판소리, 잡가
다양한 변주를 거듭해왔고, 오늘날에는 영화, 연극, 오페라, 뮤지컬, 에니메이션 등의 형태로 거듭나고 있다. 8종의 판본과 이본(異本)만도 80종이 넘는《춘향전》은 그동안 광대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책세상에서 출간된《춘향전》은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의 학설을 따라, 유학자이자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신 산서(山西) 조경남 선생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원춘향전》을 창작했다고 밝힌다.《춘향전》의 원작자에 대해선는 2001년 설성경의《춘향전의 비밀》(서울대출판부)에서  소개되었는데, 조경남을 원작자로 밝힌 춘향전이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가상 인터뷰 가상 인터뷰는 설성경의 춘향전의 역사적 연구》(연세대출판부, 2000)와 춘향전의 비밀을 참고로 옮긴이 설성경이 가상으로 구성했다.이를 통해 원작자 조경남이 직접《춘향전》의 집필 배경과 이몽룡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 성이성(成以性, 1595~1664)에 대해 밝히고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원작자에게서 직접  듣는  책세상 문고, 세계문학의《춘향전》을 통해 독자들은《춘향전》의 진면모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2. 남원부사의 아들 성이성은 어떻게 이몽룡이 되었나?

 조경남에게 글을 배운 남원부사의 자제 성이성은1639년 암행어사가되어 남원 스승을 찾아온다. 조경남은 자신을 찾아온 제자와 함께 광한루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눴고, 제자를 이몽룡 모델로 ‘원조(元祖) 춘향전’이라 할 최초의《춘향전》을 지었다. 이 날의 만남은 성이성의 암행어사 일기인《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에 묘사되어 있다. 또한 성이성의 5대 후손 성섭(成涉)이 쓴《필원산어(筆苑散語)》의〈기선세유사(記先世遺事)〉에는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변 사또의 잔치연에서 지었다는 한시와 동일한 시가 발견된다. 나의 고조부는 어사가 되었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렀는데, 호남 열두 고을 수령들이 연회를 베풀고 이었다. 어사께서 곧 종 한 장을 청하여 시를 쓰기를, ‘항아리 속의 맛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쟁반 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물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워망 소리도 높구나’……여러 사또들이 놀라 둘러보고 의아할 때에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출두하니 여러 사또들이 한꺼번에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조경남이《속잡록(續雜錄)》에서, 명나라 장군 조도사(趙都司)가 광해군의 흥청대는 군중 잔칫상을 보고 읊은 풍자시라고 소개했다. 조경남은 후에《춘향전》을 쓰면서 이몽룡이 변 사또를 향해 부른 것으로 이 시를 허구화했고, 성어사의 후손들은 허구 속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선조 성이성의 실화라고 전하게 되었다.

3. 약속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아름다운 인간, 춘향
오늘날 독자들은 춘햐을 미모와 덕성을 갖춘 이 도령의 사랑스런 연인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춘향전은 춘향의 사랑과 수절만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변 사또에게 굴복하지 않고 이몽룡과 약속을 지킨 춘향은, 자신이 정한 약속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아름다운 인간이다. 즉 원작자 조경남은 춘향전을 통해, 천한 기생인 춘향도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켜 열녀가 되는 마당에 나라를 위해 목숨이라도 던져야 할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 임병양란 동안에 그런 충성과 절의를 보여주지 못한 부끄러운 사실을 풍자하고자 한 것이다. 옥중에 갇힌 춘향이 곤장을 맞으면서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고 절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출처] 춘향전 [설성경]|작성자 쿠르

인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던 산서 조경남 선생은 성이성의 은사이다. 선조 28년 2월에 태어난 성이성은 어린시절 남원 부사의 아버지인 成安義(성안의)의 권유로 비교적 장수한 조경남 선생에게 글을 배웠다. 영정조 시대에 작자미상의 춘향전은 임진왜란 의병장 조경남의 원심청전을 보고 편집했다고 본다.


4. 성의성 선생의 약력과 성품소개

본명 성의성, 호는 계서,  자는 여습, 본관은 창녕이며 1595년 선조28년 2월 1일 당시 영주 동면 문단리 외가에서 출생 판서공 부용당 성안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고 1610년 광해2년 16세에 거창에서 실시한 향시에 응시하고자 갔으나 시험관이 부친의 친구이라고 남에게 의심받을까 걱정되어 포기했다. 1627년(인조5년) 문과 급제함. 1616년 광해8년 22세에 경시에 모두 합격하고 복시에 나가 답을 작성했으나 옆사람이 먹물을 엎질러 실패했다가 1627년 인조5년 문과급제함. 관직은 사간, 교리, 응교역임. 합천현감, 담양부사, 창원부사, 진주목사, 강계부사를 역임하고 43세에 경상도진휼어사, 호서암행어사, 46세에 호남암행어사, 53세도 호남 암행어사.


-  급제 전후 임명된 벼슬과 사건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 1624년 인조2년 이괄의 난때 부친과 함께 도보로 인조의 어가를 공주까지 호종함

  나. 1627년 인조5년 33세 늦은나이로 식년 문과 급제

  다. 1634년 인조12년 40세 사간원 정원, 원종 추숭론 상소-임금의 노염을 받아 체직하고 귀향

  라. 1635년 인조 13년 부교리 인성군 공이 역모로 죽고, 아들이 죽게되어 모두 아무말도 못하는데 용감하게 경연시 주청하여 그 아들과 연루된자를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정의감의 선구자.

  마. 1637년 인조 15년 43세 경상도 진휼사. 같은해 호서암행어사로 탐관오리 탄핵. 오국불청론 극론

  바. 1638년 인조 16년 44세 주변 권신들이 이조전랑을 삼아 전횡하러들자 이를 반려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여 칭병으로 그향-벼슬을 사양함-지금은 이런 사람 없음.

  사. 1640년 인조 18년 46세에 호남암행어사 제수, 집의 배명.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합천현감 자원. 봉급을 털어 전임자의 포탈 관곡을 수백석이나 채움. 청렴 자수하고 학교를 진흥. 상관을 하늘 받들기로 하니 감사도 감복하여 백성을 구휼함.

  아. 1645년 인조 23년 51세, 부수찬으로 정사로 인평대군의 서장관이되어 연경에 갔다와도 빈손으로 귀국하여 부사 정세규에게 칭송을 받음

  자. 1649년 인조27년 55세. 담양부사 2년 파견된 어사또가 치적을 극진하여 왕의 를 선물 받음. 부응교와 사간에 제수됨

  차. 1650년 효종1년 56세. 성우계, 이율곡의 문묘를 배향 반대 상소한 영남선비들의 잘못을 변호하여 큰화를 면하도록 함.

  파. 1651년 효종2년 57세. 이명익의 경연 누설을 변호하다 사직됨

  카. 1653년 효종 4년 59세. 창원부사에 제수. 노비추쇄를 극진하다가 감사가 타당성을 계청하여  폐단을 줄임. 2년간 해산물 면세. 정역면제. 어민들의 해산물을 관에서 매입하여 대납해주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

  타. 1655년 효종 6년 61세. 진주목사 역임. 진주의 서인들이 시체를 산속에 그냥 방치하는 것을 매장하여 나쁜 폐단을 고침. 민정중이 내려와 큰잔치를 배푸는 것을 만류하여 왕이 옷 1벌을 내림-청백리의 표본

  하. 1660년 현종1년 66세에 강계부사에 제수-인삼세 세금면제, 서울권문세가의 부정거래를 단속. 백성들이 흠모하여 관서의 산부쳐라는 칭송을 얻음-조선제1의 멋진관리. 백성들이 생사당을 지음 강계청백인정면 비석설치. 백성들에게 만년에 가난과 싸우면서도 집터 묘터를 공짜로 제공함.

  가1. 1664년 현종5 향년 70세로 졸함. 만고의 충신, 청백리 정치가, 존경받는 사또, 휼륭한 어버이로 조선역사 제1의 공무원임. 묘역은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손향원 추증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나1. 1695년 숙종21년 청백리에 녹선

  다1. 1786년 정조10년 오천서원 건립. 주향


5. 계서 성이성 선생님의  유적 유물

  가. 계서종택과 사당 : 계서당으로 구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71호(84. 1.10) 1613년 광해5년에 조성된 사대부가옥. 봉화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 소재. 남향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 팔작지붕의 사랑채. 옆에 계서공사당 위치



  나. 묘와 묘비: 인접고을 영주 신암 뒷산에 지리함. 석물과 청백리를 녹한 음각이 새겨진 묘비

  다. 어사화 : 1627년 인조5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임금이 직접 내린 어사화 종이꽃 과 그 꽃받침을 같이 보관함.

  라. 사선 : 계서공이 조정으로부터 암행어사직을 4번이나 명을 받고 출두시에 얼굴을 가리고 직분을 행하였다는 얼굴가리게인 사선이 후손에게 보관되어 관리되고 있다. 구식 결혼때 시랑이 들고 얼굴을 가리는 얼굴 가리개임

  마. 계서 초당 :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소재하는 초당으로 만년에 여기서 은거함. 방이2칸, 툇마루로 되어있음.

  바. 부용당 사당 : 공의 부친은 우부승지, 영해부사, 남원부사, 광주목사, 제주목사를 역임했으며 부용당 성안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계서당 우측 500미터에 재각 춘우재와 사당이 존재함. 부용당의 재각이 창년군 성산면 냉천리 석정에 부용정과 영정각 임란의병장 창의비가 존재함

  사.청백인정비 : 계서공은 다섯고을인 합천현감, 담양부사, 창원부사, 진주목사, 강계부사를 역임했는데 가는곳마다 선정을 배풀어 청백 인정비가 합천을 제외한 4곳에 있다. 비명이 문집에 전해오고 지금도 진주성내에서 비석을 볼 수있다.

  아. 비에 새겨진 글씨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시비에는 전부한자인데 한글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담양 - 담양청백인정비

        맑고희도다, 백옥의 희미함이여! 사랑하고 어루만지니 백성의 어버이네

        한고을의 묵은일을 하루아침에 새롭게 이룩했다. 세해를 다스렸으니

        영원토록 사모하노라

     2) 창원 - 창원청백인정비

         얼음은 깨끗하고 옥은 하얀데 우리님 은덕은 은동이서 나왔네

         백성들의 복 크게 모이니 봉이날아 우리님 나오셨네

         어린백성 입은공 잊지못해 천만년 새겨 기리고자 하노이다.


     3) 진주 - 진주목사성후이성청덕유예비

         사랑과 은혜는 소신신과 두시같았고 간결함은 공수와 황패 같았도다

         임기 못마치고 그만 두시니 백성들의 바람이 이지러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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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청덕유예비사진

      4) 강계 - 강계청백인정명

          도덕 높은 우리님은 성품도 굳세고 밝았다.

          뜻은 청렴하고 씀씀이도 검약하네!

          정사는 공평하고 소송은 이치에 맞고으니 온고을 어려운 사람 구했네 

          형벌은 줄고 세금은 가벼우니 관리와 백성이 모두편안하네

          한해의 다스림도 이세상 다하도록 잊을 수 없도다.


  6. 춘향전 관련설

  춘향전의 이몽룡은 봉화의 실존인물인 성이성 이다. 연세대 교수를 역임한 설성경 교수의 춘향전의 비밀(서울대출판부2001. 12. 26)에 나타남. KBS1 TV에 1999년 12월 4일 대대적으로 방영됨-이몽룡의 실존인물이라고 소개.

  설성경 교수의 말에 의하면  춘향전의 전반부 인물은 당시 유행하던 민간설화나 판소리에서 소재를 따왔고, 후반부의 암행어사 출도는 작가 산서 조경남의 성이성어사를 모델로 했다. 근거사유는 성이성의 고손자인 성섭의 교와문고에 의한다.

" 우리 고조님은 수의어사로 호남지방을 암행하여 한곳에 이르니 호남 12고을 수령들이 기생들과 함께 큰잔치를 배풀어 술판이 난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이때 수의어사가 거지같이 행세하고 들어가 지필묵을 달라하여 한자시로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촉루락시 민루락이요, 가성고처 원성고라! (해설-금동이의 술은 천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물의 눈물은 백성들의 눈물이고, 노래소리는 만백성의 원성소리이다) 하고  한시를 대표사또에게 바치니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는데 아전-서리 들이 암행어서 출두야! 라고 외치며 즉시 수령6명은 그자리서 파직 당했다. 남은 6명도 죄명에 올라 조정에 품계되었다. 이에 호남의 세도가 자제도 많고해서 부패성을 징치하니 호남사람들이 모두 아릅답다고 이야기 했다" 조선 역사 중 이보다 더 휼륭한 관리가 있는가 생각해보니 황희정승, 이순신, 임경업, 토정 이지함 등으로 내가 아는 사람으로는 몇 명안된다. 계서공 성이성은 만고의 충신이며 우리국민들이 모두 본받아야 할 공복이다.


Ⅲ. 결론

  동서고금을 통해 이몽룡(본명 :성이성 - 成以性)은 위와 같은 간략한 자료만으로 유츄해볼 때  누구나 본받아 할 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창년성씨의 자랑이다. 즉 창녕성씨를 갖은 자손이 부럽기만하다. 상주시 내서면 능암과 은척면에도 집성촌이 있으며 다음부터는 창녕성씨 집성촌을 방문하고 싶다. 일생을 강직하고 불편부당하며 권세에 동조하지 않았다. 정언, 사간, 헌납 등의 관리를 하는 동안 직언으로 일관하여 위사람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했다.(한국인명 대사전초록)

 평생동안 공과사를 분명히하고 청렴결백, 검소절약하여 공직인으로서의 최선을 다했다.  관아에서 이속들이 사또 자제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며 음식하나도 사사로이 아문밖으로 사사로이 내어가지 못했다. 퇴직 후 향리(봉화-물야-가평리)에 살때도 신관사또가 부임인사로 왔다가면 자제들을 대신보내 희사하고 관아에 나타나지 안았다. 즉 행세를 하지않았으며 평생 술을 과음안하고 본분을 지키고 기녀는 절대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필자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분만큼 휼륭한 분은 보지 못하였으며 사후 세계 이분이 계신다면 제일 먼저 찾아가볼까 한다.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 054-673-8670   

                                                 위 계서공 선생님의 小考 조명은  창녕성씨 계사공파 종증 인쇄물에서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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