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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전 저자 채수 선생님의 유적 탐방

문장대 2017. 6. 23. 16:46

* 여행지 : 문경-상주일대 유적지(대정공원, 쾌재정 등 채수 선생님 유적지) 

* 여행자 : 채기식 전 점촌고 교장님 부부, 문장대 부부 총 4명

* 여행일 : 2017년 6월 23일 (금요일)

* 참고사항 : 청암중고 전직 교원들 모임인 청솔회 6월 모임이 문경 가은 민지 송어 회집에서 게최되어 14명의 회원 중 10명이 참석하여 모임을 끝내고 귀가길에  조선 중종때 언관이며 문신이신 채수선생님 유적지를 탐방했다. 고도 상주는 충북 영동, 문경, 예천일부,  선산, 김천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따라서 정승판서는 무수히 배출했고 유적지도 많다. 유명한 남계집, 매호 조우인의 매호별곡, 상주 함창의 설공찬전 등은 한국문학사에 귀중하게 취급되는 작품이다. 오늘은 설공찬전의 저자 채수선생님의 유적을 탐방하고자 한다.

 

 

 

붉은선은 청솔회 6월 모임을 마치고 탐방한 경로 : 농암장터- 대정공원- 이안 쾌재정- 채수선생님 묘역과 사당-동래정씨 열녀비

 

* 설공찬전의 저자 채수선생님의 약력과 작품배경 

 

   전북 순창이라는 실제 지역을 배경공간으로 삼아 이 곳을 관향으로 하는 설씨 집안의 실화라 표방하고, 등장인물도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교묘히 배합해 설정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원귀관념 및 무속에서의 공수현상 등을 활용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채수의 행적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어떠한 주제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강직한 언관의 길을 걷던 채수는 중종반정 직후 관직을 버리고 처가인 함창(지금의 상주)에 은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쾌재정을 짓고 소일하는 동안(1508년에서 1511년 사이) 평소 발언하고 싶었던 바를, 이 소설을 빌어 피력한 것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 아버지는 신보(申保)이다. 1469년(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의 초시(初試)·복시·전시(殿試)에 장원함으로써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三場)에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해 부수찬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가했다.1475년(성종 6) 이조정랑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장악원(掌樂院)의 관직을 겸했으며, 1476년 문과 중시에 급제했고, 사가독서했다. 1478년 응교로 있을 때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외직으로 좌천되게 했다. 1479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폐위에 반대했다가 파직되었으나 1481년 직첩이 환급되었다. 그후 제학·충청도관찰사·한성부좌윤·대사성·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설공찬전

 

간신히 보존 발견된 설공찬전 원본 - 이 소설을 본딴  허균의  홍길동전은 100년후에 저술됨

 

 

 

 

 

- 여행기-

  매달 모이는 문경 청암중고 근무 전직교원 모임인 청솔회 모임이 가은 민지리에서 개최되었다. 식사후 모임을 마치고 채기식 교장님 부부와 문장대부부는 농암의 유명한 한우물 대정공원내에서 다시 모여 지나온 애기에 꽃을 피웠다. 동료, 제자, 선후배에 관한애기, 근무시 일화 등을 애기하니 무더운 날씨도 잊었다. 채교장님의 무궁무진한 추억은 정말 재미있고 행복했다. 추억의 얼음과자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든 중 유시일 농암면장님이 공원을 두루 살피면서 여름에 오실 관광객을 대비하는지 이곳저곳을 점검하신다. 알고보니 청암중 출신이고 이고장 농암 화산 출신이다. 현지에 출장나와 직접 점검 하시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낀다. 같이 정자에 올라앉아 농암이야기, 학교이야기를 하고 혜어졌다. 잠시 대화해보니 고향에 부임하여 솔선수범하는 휼륭한 공직자이다.

 

2시간을 보내고 우리일행은 상주에서도 알아주는 채수선생님 유적과 묘역, 사당을 방문했다. 채기식 교장선생님의 선조이시니  채수선생님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을 여러모로 들어보니 역사책에서 조금씩 공부하던 사실보다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알게되어 내마음을 점점 흥미에 빠지게 했다. 평소 열차타고 생각 없이 정자의 하나라고 쉽게 지나치던 양정역과 함창역사이 쾌재정은 정말 명당에 자라잡고 있으며 채수선생님의 멋진 유적지이다. 쾌재정을 탐방하고 나니 선생님의 묘역을 탐방하고 싶었다. 나는 퇴직후 정인지, 김시민, 임백령 묘역을 탐방하기 위해 과산군 일대를 탐방했던 바 있다. 그리고 증평의 배극렴, 청주의 최명길, 천안 북면 은석산의 박문수, 경남 산청의 남명 조식선생, 문익점 묘역도 탐방한적 있다. 며칠전에는 상주 승곡의 조정대감 묘역, 우복 정경세모역도 다녔으며 우리나라왕릉과 정승 판서의 묘역을 자주 탐방했다. 앞으로도 예산의 이산해 묘역 등도 탐방 계획이다.

 채수 선생님은 상주 공검 율곡리에 묘역이 있다. 채교장님의 헌신적인 안내로 쾌재정에서 2키로 거리의 묘역을 지나는데 사당이 바로 지나는길에 있고 종손이 살고계신다. 돌아올때 사진을 찍기로하고 이안 숭덕국고 건너편 작약식당을 가장동네로 들어서니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엄청 심한 가뭄에 타들어가는 논밭과 동네안길을 지나니 공장이 있고 양정동네가 보이며 멋지게 조성된 신도비가 나타난다. 이어서 산속길로 들어서니 오래된 원본 신도비가 나타난다. 도굴군에 의하여 신도비가 분실되었으니 옮기는 도중 유실되어 근방 큰도랑에 쳐박혀 있는것을 다시 새워 놓은 옛 신도비가 또 나타난다. 이곳을 관리하는 주민이 잠시 안내하는데 사나운 개들이 우리일행을 둘러싸서 혼이났다. 송아지 만한 똥개들이 우리두사람의 뒤로 돌아가 입을 다리에 대고 달려드니 점잖은 체면에 웃긴했지만 사실 혼났다. 나중에 묘역 참배후 내차를 신속으로 더 몰고가서 채교장님을 태우고 왔을 정도이다. 귀가하며 숭덩국교 건너편 동네 이안리 종가집에서 사당에 참배하고, 촬영하였다. 국도 굴다리 옆에 새워진 이조 중종시 반정되기전 바른소리하다가 왕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한 권달수 부인 동래정씨 열녀비를 관람했다. 상주는 가는곳미다 유물 유적이 많다. 그냥 지나치면 아무것도 없지만 역사공부를 조금만하면 많은 유적을 볼 수있다. 작년 가을에 문경 산양의 근암서원과 주암정도 숨은 유적지만 알고보면 대단한 역사의 유적이다.

 

 

※ 지난해 가을에 능금이 익어갈때 문경 산양의 주암정과 채문식 생가, 유적지를 소개해주시고, 올해는 상주 이안의 쾌재정과 난재선생님의 묘역을 안내하여 역사적 사실을 일

깨워준 채기식 교장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 며칠전 상주 테마공원 강의실에서 설공찬전에 대해 연구하신 김철수 상주문화원장님의  발표 세미나가 5월15일 개최되었는데 몰라서 참석못해 안타깝네요.

 


 

       대정공원에 오셔서 공원이곳 저곳을 점검하시며 공무를 수행하시다가

         우연히 만나  잠시 우리 일행과 담소를  나누고 고향과 학교이야기를  꽃을 피우며 잠시 동안 애기 했는데, 유시일 면장님은 청암 중 출신이며 입지적 인물이고 이곳 화산리 출신이다.

 

                        

 

                 설공찬전의저자 채수선생님의 후손 채기식 교장님(현재문경시 삼락회장님)

 

                              

 

                       대정공원 내 오래된 소나무가 멋진데 한그루에 1억이면 여기 수많은 소나무의 가격은 얼마일까!

 

                       쾌재정에서 본 이안리 가장동네--나의 고교 은사 김영훈 선생님고향

 

 

 

설공찬전의 저자소개와 내용소개 안내판이 쾌재정 입구에 있네요. 잘읽어보세요

 

 

 

 

 

                            채문식 전 국회의장 비석

 

 

 

                               쾌재정의 모습

 

          난재선생님은 도승지, 대사헌, 평양,충청감사, 예조참판- 사위는 김안로이며 사위는 정승판서 모두 역임. 고향은 한양이며 함창현감으로 있을때 공검지 근방 살구나무 집 처녀와 결혼하여 낙향할 때 처가곳 상주땅 이안에서 살았고 이때 설공찬전을 집필. 호는 한자로 나재이지만 문중에서 난재로 읽기로 함-아래 별도 설명

 

 

 

                        16세손 채교장님은 정자를 두루살피시네요.

 

                                 쾌재정기

 

 

 

                             새로조성된 양정 채수선생님 신도비

 

                            난재 채수 선생님 신도비 앞에 서신 16세 후손 채교장님

 

                        유실되어 도랑에 처박힌 처음의 신도비를 다시복원

 

                        처음의 신도비 앞의 채수 선생님의 신도비 내용)

 

 

 

                            인천 채씨 재실

 

                            양정공 난재 채수선생님 묘역과 묘비

 

 

 

 

 

 

 

                                  후손의묘역

 

                                   

 

              묘지는  난재 채수 선생님의 둘째아들 채소권 묘역- 형조판서를 역임

 

                            

 

 

 

                           채수선생님 사당

 

 

 

 

 

                             숭덕초등 건너편 지하도 옆에 권달수 부인 정씨 열녀비

                         정려각, 권달수는 연산군에게 간언하다가 죽임을 당함

 

                          남편의 죽음에 애도하다가 식음을 전페하고 애도하가 운명하신 동래 정씨의 애닮은 망부곡이 비각앞에서 들려오는 듯 합니다. 채수 선생님과는 무관한 유적입니다. 권달수는 조선시대 연산군, 중종 동시대 사람인 듯합니다.

 

난재 채수 선생, 그는 누구인가? (하하 문화센터 이계양 카페에서 퍼온글)

 

-성명 : 채수(蔡壽)

-생몰 : 1449년생(세종 31) ~ 1515년졸(중종 10, 향년 67)

-본관 : 인천(仁川)

-: 기지(耆之)

-: 난재(懶齋) *(: 게으를 나, 라는 본음이 난, 란으로 맨앞자리에 오면 두음법칙에 의거 난[Nan]으로 읽음)

-시호 : 양정(襄靖)

-출생지 : 한양 명례방(漢陽 明禮坊)

-출신지 : 충주 성산(忠州 星山, 현재는 충북 음성군 원남면 삼룡리, 부친 채신보 선생의 세거지로 묘원이 있음)

-분묘지 : 상주 함창현(현재 함창읍, 공검면과 이안면 등으로 분리, 처가가 공검지 옆 동네 살구나무집이었다고 전하며, 묘는 공검면 율곡에 부인과 합장)

-출사경로 : 예종(睿宗) 1(1469) 기축(己丑) 추장시(秋場試) 갑과 장원 등 3시 장원(조선시대 단 2중 한사람)

-내관직 : 사헌부감찰, 형조참판, 대사헌

-외관직 : 충청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증직 : 좌찬성

-유고 : 난재집

-기타 : 홍길동전보다 1백년 앞선 최초의 국문소설이라는 {설공찬전(薛公瓚傳)}1996년 가을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뢰를 받은 서경대 이복규 교수에 의해 발견되어 원문 판독작업을 하고, 19974월말에는 중앙일보, 월간중앙에 이러한 사실이 발표되어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간 학계에서는 1618년작으로 추정되는 {홍길동전}을 최고(最古)의 국문(한글) 소설로 꼽아왔다. 133,500여자 분량으로 충북 괴산의 성주 이씨 문중 문고에서 나온 이 소설은 승정원 승지를 지낸 이문건(李文楗, 1494~1567) 선생이 쓴 {묵재일기(黙齋日記)}의 낱장 이면에 설공찬이'라는 제목의 필사본 형태로 적혀 있었다. 이 소설의 내용은 당시 중종반정의 공신들인 신흥사대부와 훈구파의 갈등이 본격화하는 정치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이라는 주인공이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가를 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학자들은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이 소설은 신흥사림파를 비판한 풍자소설로 보이며 실존인물과 가공인물을 적절히 배치해 소설적 완성도를 꾀했다고 밝혔다.  

저자 채수 선생은 훈구파의 한사람으로 성종 때 폐비 윤씨에 대한 애석함을 표현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며, 1506년 중종반정에는 사림파인 사위들의 권유로 가담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처가가 있는 함창으로 낙향한 뒤 세상을 멀리하고 은일하면서 소설 {설공찬전}을 쓴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했다. 채수 선생은 조선 중종 6(1511)에 조선시대 최초의 공식 필화사건을 부른 패관소설이자 한문소설인 {설공찬전}(국문번역본 {설공찬이})을 지은 문인이다.(중종실록 등 참조)

이 소설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최초의 국문소설(한문 원작을 훈민정음인 국문으로 번역한 소설)로 밝혀지고 있으며, 채수 선생은 조선조 최대의 필화사건 후 중종왕의 배려로 극형을 면하고 함창으로 낙향하여 이안천변에 <쾌재정><서당> 등을 건립하고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사후 선생의 유고를 모아 후손들이 펴낸 {난재집} 3권이 있으며, 선생의 둘째 아들 졸재 <채소권> 선생도 아버지 채수 선생과는 다른 장르의 패관소설 {화왕전}을 조선시대 최초로 지은 문인, 학자, 문신(형조판서)으로 유명하다.

 

* 난재집[懶齋集]

조선 중기의 학자 채수(蔡壽:1449~1515) 선생의 시문집.

목판본이며, 3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난재(懶齋)는 채수 선생의 호인데, '''게으를 나()'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천채씨 문중에서는 ''의 본음(本音)''으로 읽고, 두음법칙에 따라 ''으로 표기한다.

책의 구성은 지문(誌文제문(祭文만장(晩章연보(年譜(((잡문(雜文책문(策文)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잡문의 '발치문(拔齒文)'은 저자가 54세에 통증을 느끼던 이빨을 뺀 후 튼튼하던 이빨이 나이를 먹어 쇠퇴한 것을 보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소 중에는 가뭄으로 왕이 구언(求言)하자 이에 응해 천견(天譴)은 왕이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특히 왕의 뜻에 영합해 교언영색(巧言令色)한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한 {홍문관예문관합사상소(弘文館藝文館合司上疏)}는 당시 선비의 기개를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는 또 '강유지도(强柔之道)'에서 정치를 전적으로 유()로 하면 형정(刑政)이 쇠퇴하고, 반대로 강()을 쓰면 백성이 잔악해지니 적절히 겸용해야 하는데, 군신(群臣)의 사정(邪正)을 가리거나 군정(軍政)을 시행함은 강으로, 소민(小民)의 가난은 유로서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국방에도 관심을 보여 '문보방비변(問保邦備邊)'을 썼으며, 백성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보였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