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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성씨의 유래와 단종시 영의정 황보인 충비 단랑의 이야기

문장대 2016. 3. 27. 19:02

 

-황보(皇甫)성씨의 유래와 단종 임금 때 영의정 황보인의 충비 단랑의이야기-


    황보씨 시조는 고려태조 왕건의 창업공신 가운데 한사람인 금강성(金剛城) 장군 황보능장(皇甫能長)이다. 보능장은 신라에 쳐들어간 후백제의 군사를 달구벌(현 대구)에서 격파하는 등 공을 세워 영천 부원군으로 봉함을 받고 영천군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영천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의 기록이 없어져서 황보인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영의정 황보인은 사육신 김종서등과 함께 불의의 권력에 피를 뿌린 노재상이다. 황보인에 이르러 가문의 영예가 극치에 이르렀으나 수양대군의 반역으로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멸문의 참변을 당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일족이 가문과 명성을 보존하려 흩어질때 황보인의 손자 만이 여종 단랑의 도움으로 구룡포면 대포리 짚신골에서 성장 가문을 보전한뒤 4대를 숨어살았다.

   이조 숙종때 290년만에 누명이 풀려 충신으로 추앙받게 되자 황보씨 가문이 다시 되살아나 오늘에 이른다. 수양대군일파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을 위해 당시 충신인 영의정 황보인과 김종서를 죽일 때 황보인의 손자는 여자노비 단랑의 노력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당시 역적은 3족을 멸하는 엄청난 재앙을 당하는데 이때 여자 노비 단랑은 100일도 안된 아기를 물동이에 넣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갔었다. 봉화 상운면에 도달하여 황보인의 사위집에 머물다가 사위 역시 역적의 집안으로 죽임을 당할판에 어린 아기를 보호 할 수 없었다. 약간의 노자를 주어서 반강제로 내보냈다. 단랑과 아기는 목숨부지를 위해 불령계곡을 넘고 태백산맥을 넘고넘어 내려가서 도달한 곳이 남쪽 장기곶이며, 지금의 구룡포읍 성동리이다. 그기서 단랑은 황보인의 손자를 아무도 모르게 자기 아들과 같이 키웠다. 역적의 손자이니 어쩌랴! 황보인의 손자가 20세가 되던해에 어머니는 갑자기 아들에게 절을하는 충성스런 노비 단랑! 어리둥절 한채 어머니께 절을받는 아들. 그러나 어머니가 아니고 저는 대감댁의 노비이고 손자가 20세까지 어머니처럼 키운 노비라고 고했다. 그 기막한 광경을 보았다면  차마 인간으로서의 회한이 어떠했으랴! 키워준 어머니가 노비라니! 이후 대감댁 손자는 김씨로 살다가 황보인 대감의 대를 이었다. 포항 근무시 이런 전설이 전해지는 포항 구룡포 성동리 매뚜기 마을을 찾아가서 노비 비석과 사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추억을 그려보았다. 구룡포여고 근무시에는 못가보고 선산중학교 교감시절 포항학생문화회관 연수가서 귀가시 찍은 사진을 올려본다. 우리나라에 이런 멋진 여자노비도 있었고, 영천황보 가문에 이러한 비화가 있었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단종때 영의정 황보인의 여종 충비 단랑의 비각

광남서원앞에서



                

                          비석한자--忠婢 丹良 之碑(충비단랑지비)

          - 요새 같으면 상상도 못하는 일이고 기막힌 사연임-

 

 

 

 

 

 

 

 

 

 

                                              

광남서원앞(성동리) 

 

 

 

 

    

  광남서원 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