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태종왕 8년 · 문무왕 원년, 고구려 보장왕 20년, 신유년(辛酉年), 661년, 중국연호 당(唐)나라 고종(高宗) 용삭(龍朔) 원년
봄 정월
○당(唐)나라에서 하남(河南)·하북(河北)·회남(淮南) 67주(州)에서 군사 4만 4천여 인을 모집하여, 평양(平壤) 누방(鏤方)의 행영(行營)으로 나가게 하고, 또 홍로경(鴻矑卿) 소사업(蕭嗣業)으로 부여도 행군 총관(扶餘道行軍摠管)을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백제의 종실(宗室)인 복신(福信) 등이, 옛 왕자인 부여풍(扶餘豐)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부여풍이 일찍이 왜(倭)에 볼모로 가 있었는데, 복신이 군사를 일으켜 중[浮屠]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점거하고 (부여풍을) 영입하여 세웠다. 서북부(西北部)에서 모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웅진성(熊津城)에 있는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다. 이때에 낭장(郞將) 유인궤(劉仁軌)는 죄에 연루되어 백의 종군(白衣從軍)하다가, 당(唐)의 조칙(詔勅)으로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가 되어, 전 도독(都督) 왕문도(王文度)의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신라의 군사를 징발하여 유인원을 구출하였다. 유인궤가 기뻐서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富貴)하게 하겠다.” 하고, 당력(唐曆)과 묘휘(廟諱)를 청하여 가지고 가면서 말하기를, “나는 동이(東夷)를 깨끗이 평정하고, 대당(大唐)의 정삭(正朔)을 해외에 반포(頒布)하려고 한다.” 하였다. 유인궤는 군사를 제어(制御)하는데 엄정하여 옮겨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였다. 복신 등은 웅진(熊津) 어귀에 2개의 목책(木栅)을 세우고 막았으나,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와 더불어 합세하여 공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달아나 목책으로 들어가려고 다리를 건너려 서로 다투다가,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1만여 인이었다. 복신 등은 이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任存城)을 보호하니, 신라의 사람들은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 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 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무리를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사신이 유인궤에게 고하기를,

“들으니, 대당(大唐)과 신라가 백제의 유민(遺民)을 모두 섬멸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약속했다 한다. 우리가 앉아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어찌 힘을 다해 싸워서 보존하기를 도모하는 것만 같겠는가?” 하니, 유인궤도 사신을 보내고 글을 전하여 화복(禍福)을 갖추어 말하였다. 그런데 복신과 도침 등은 몹시 거만하여 외부에 사자의 관사(館舍)를 정하고 업신여겨 말하기를, “사신은 벼슬이 낮고 우리는 바로 한 나라의 대장이니 서로 참견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하고, 답서(答書)도 없이 사신을 돌려보냈다. 유인궤는 무리가 적으므로 유인원과 더불어 군사를 합세하여 사졸을 쉬게 하고는, 표문(表文)을 올려 신라의 군사와 합세하여 공격할 것을 청하였다. 신라왕은 조서를 받들고 그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유인궤 등을 구원하였다.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葛嶺)에서 도망쳐 돌아오자 신라는 감히 다시 나가지 못하였다. 이윽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하였으나 부여풍은 제어하지 못하였으며, 복신은 유인원이 외딴 성에 고립되어 구원이 없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기를, “대사(大使)는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겠는가? 보낼 때 송별(送別)하겠다.” 하였다.
봄 2월
○백제 사람들이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자, 신라왕이 이찬(伊飡) 품일(品日)에게 명하여 대당 장군(大幢將軍)을 삼고, 상주 장군(上州將軍)·하주 장군(下州將軍)·서당 장군(誓幢將軍)·낭당 장군(郞幢將軍) 등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품일이 백제 지경에 이르자, 휘하에 군사를 나누어 먼저 두량윤성(豆良尹城)의 남쪽에 도착, 진영(陣營)이 될 만한 곳을 살펴보았는데, 백제 사람들이 군진(軍陣)이 정돈되지 않은 것을 바라보고 갑자기 나와서 공격하니, 신라의 군사가 놀라서 무너졌다. 대군(大軍)이 계속 와서 두량윤성을 공격하였으나, 30일 동안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4월
○신라의 품일 등이 돌아오다가,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갑자기 백제의 군사를 만나 싸웠으나, 패하여 병기(兵器)와 치중(輜重)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 상주병(上州兵)과 낭당병(郞幢兵)은 백제의 군사를 각산(角山)에서 만나 진격(進擊)하여 이기고, 그들의 둔보(屯堡)로 들어가서 2천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였다. 왕은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김순(金純) 등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러 군사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돌아오니, 왕은 여러 장수가 패전했기 때문에

벌(罰)을 논함에 차등을 두게 하였다.
○당(唐)나라가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浿江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삼았으며, 소정방(蘇定方)을 평양도 행군총관(平壤道行軍摠管)으로 삼아서, 소사업(蕭嗣業) 및 호병(胡兵) 35군(軍)을 거느리고, 물과 육지로 길을 나누어 함께 진격하게 하였다. 제(帝)가 스스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뒤를 이으려 하니,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온 힘을 기울여야겠습니까? 만약 고구려를 멸망시키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징발하여 지켜야 하니, 적게 징발하면 위엄이 서지 못하고 많이 징발하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입니다. 이는 천하를 변방을 다니게 하면서 지치게 하는 것이니, 신은 정벌(征伐)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망(滅亡)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고, 마침 무후(武后)도 또한 간하므로 곧 중지되었다.
여름 5월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 장수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의 장수 생해(生偕)와 함께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장소를 옮겨서 북한 산성을 공격하였다. 포차(砲車)를 벌여 놓고 돌을 쏘아대니 맞는 곳마다 성과 집이 곧 무너졌다.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陀川)은 사람을 시켜, 성 밖으로 철질려(鐵蒺藜)를 던지게 하여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廩廥]를 뜯어 그 재목을 실어다가, 성이 무너진 곳을 따라 곧 얽어서 망루[樓櫓]를 만들었으며, 밧줄로 그물을 얽어서 소나 말의 가죽과 솜옷을 매달고는,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놓고 지켰다. 그때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천8백 인이 있었다. 동타천은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대적하자고 격려하였으나, 대략 20여 일이 되자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지쳤는데, 지성으로 하늘에 고하자 갑자기 큰 별이 고구려의 진영에 떨어진 일이 있었고, 또 뇌우(雷雨)가 진동하니, 뇌음신 등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신라왕은 동타천을 발탁하여 대내마(大奈麻)로 삼았다. 처음에 김유신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인력(人力)이 이미 다하였으니 음조(陰助)에 의뢰하겠다.” 하고,

단(壇)을 설치하고 기도하여 마침 천변(天變)이 있었으니, 모두 지성에 감동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유신은 일찍이 고구려의 첩자(諜者)를 보고 맞이하여 이르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하니, 첩자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다만 사실대로 고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왕은 위로는 하늘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인심을 잃지 않아서,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즐기고 있다. 너는 마땅히 돌아가서 너희 나라에 고하라.” 하고, 드디어 위로하여 보냈다. 고구려에서 이를 듣고 말하기를, “신라가 비록 작기는 하나, 김유신이 재상이 되었으니 가볍게 여길 수 없다.” 하였다.
여름 6월
○신라왕 김춘추가 훙(薨)하니 수(壽)는 59세였으며, 태자 법민(法敏)이 왕위에 섰다. 시호를 올려 무열(武烈)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태종이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자, 태평한 시기에 풍년이 들어 경성(京城)에서 베 한 필의 값이 벼 30석(碩), 혹은 50석이었으므로, 백성들이 성대(聖代)라고 말하였다. 비(妃)는 문명 왕후(文明王后) 김씨(金氏)인데,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처음에 그 언니 보희(寶姬)가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가 앉아 오줌을 누니 나라 안으로 두루 흘러가는 꿈을 꾸고, 깨어나 문명에게 이야기하였다. 문명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언니의 꿈을 사고 싶소.” 하고는, 인하여 비단 치마[錦裙]를 주어 값을 치렀다. 그 뒤에 무열이 김유신과 더불어 공을 차다가[蹴踘], 김유신이 무열의 옷끈을 짐짓 밟아서 떨어뜨렸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내 집이 다행히도 가까우니 가서 꿰매도록 합시다.” 하고, 인하여 함께 가서 술을 놓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꿰매게 하였으나 보희는 사양하기를, “어찌 사소한 일로 경솔하게 귀공자(貴公子)를 가까이 하겠는가?” 하였다. 문명이 곧 나와서 옷끈을 꿰매었는데, 아름답고 요염하니 무열이 기뻐하여 곧 혼인을 청하였으며, 드디어 아들을 낳았으니 법민(法敏)이고, 다음은 인문(仁問)·문왕(文汪)·노차(老且)·지경(智鏡)·개원(愷元)이었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왕의 부음(訃音)을 듣고 낙성문(落城門)에서 거애(擧哀)하였다.
가을 8월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 군사를 패강(浿江)에서 격파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신라왕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치고 웅현(熊峴)으로 나갔으며,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에 앞서 제(帝)가, 김인문(金仁問)·유돈(儒敦) 등을 돌려보내며 이르기를,
“짐(朕)이 이미 백제를 멸하여 그대 나라의 환란을 제거하였으나, 지금 고구려가 험고(險固)함을 믿고 예맥(濊貊)과 더불어 나쁜 짓을 같이 하며, 사대(事大)의 예를 어기고 선린(善隣)의 의리를 버리므로, 짐은 그대와 같이 망해가는 오랑캐를 쳐서 섬멸하려 한다.” 하였다. 왕은 비록 복중(服中)에 있었으나, 제의 명을 어기게 됨을 중시하여, 드디어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이어 23총관(摠管)으로 부서를 나누어, 스스로 거느리고 시이곡(始飴谷)에 이르렀다. 어느 사람이 고하여 말하기를, “백제의 남은 백성들이 옹산성(甕山城)에 웅거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먼저 사인(使人)을 보내어 효유(曉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왕이 남천주(南川州)에 행차하여 진수(鎭守)하니, 유인원(劉仁願)도 또한 사비성(泗沘城)에서 와 합세하였다. 김유신이 나아가 옹산성을 포위하고, 백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공손치 못하여 대국(大國)의 토죄(討罪)를 받게 된 것이다. 명(命)에 순종하는 자는 상을 주고 명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유독 외로운 성을 지키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차 반드시 패망하게 될 것이니, 일찍이 항복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다만 목숨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부귀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백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이 비록 작으나 군사와 식량이 모두 넉넉하고 사졸(士卒)은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할 수는 없다.” 하였다. 김유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곤궁에 몰린 짐승도 오히려 싸운다 하더니,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고, 포위하여 풀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이 웅현정(熊峴停)에 행차하여 여러 총관(摠管)을 모아 놓고, 군사들에게 친히 임하여 맹세하며 눈물을 흘리니, 군사들이 모두 분발하고 격려되었다. 드디어 김유신과 더불어 군사를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먼저 큰 성책(城栅)을 불태우고 수천 인을 참하였으며, 성이 함락되자 적장(賊將)을 잡아 죽였다. 왕이 차등을 두어 논공 행상하였다.
○신라의 상주 총관(上州摠管) 품일(品日)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여 천여 급(級)을 참(斬)하니, 달솔(達率)인 조복(助服)과 은솔(恩率)인 파가(波伽) 등이 무리와 더불어 항복하였다. 왕은 조복에게 급찬(級飡)을 내려주고, 인하여 고타야군(古陀耶郡)의 태수(太守)를 제수하였으며, 파가에게 급찬의 벼슬과 또 전택(田宅)·의물(衣物)을 하사하였다.
○신라왕이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파견, 소정방(蘇定方)에게 글을 보내니, 소정방이 말하기를, “내가 명을 받고 적을 토벌하려고, 만리의 바다를 건너 배를 타고 배회(徘徊)한 지가 이미 한 달이 넘었으나, 왕의 원병(援兵)이 이르지 않고 군량도 대어주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왕과 여러 신하들이 적경(敵境)으로 깊이 들어가 멀리 군량을 수송하는 일을 어렵다고 여기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게 국가의 막중한 부탁을 받았으니 죽어도 어려움을 사양할 수 없습니다. 당장 적에 나아가 소장군(蘇將軍)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이제 경의 쾌락을 얻었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국경(國境)에 나간 뒤에는 경이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그의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어 정병(精兵) 수만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당나라의 모든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얼음이 어는 때가 되자,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압록강을 건너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들이 패주하였다. 계필하력이 수 십 리를 추격하여 3만 인을 죽이니, 남은 군사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남생은 겨우 자신의 죽음만을 모면하였는데, 마침 제(帝)가 반사(班師)하라는 조칙이 있자, 곧 돌아갔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제(吊祭)하러 온다는 것을 듣고는, 당나라 군사와 회합치 못하고 돌아왔다. 김유신 등은 군사들을 쉬게 하고 명을 기다렸는데, 함자도 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이 평양에 군량을 수송하라는 칙지(勅旨)를 전하러 왔다.
신라 문무왕 2년, 고구려 보장왕 21년, 임술년(壬戌年), 662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용삭 2년
봄 정월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와서 전왕(前王)에게 칙제(勅祭)하고, 이어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왕(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册封)하였으며, 잡채(雜綵) 5백 단(端)을 하사하였다.
○신라왕이 김유신·김인문(金仁問)·진복(眞服)·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진(鎭)에 남아 있는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어, 군사 수만을 인솔하고 수레 2천여 량(輛)에 쌀 4천 석과 벼[租] 2만 2천여 석을 실어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풍수촌(風樹村)에 이르자,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서 수레가 갈 수 없어서, 모두 소와 말에 실었다. 칠중하(七重河)에 이르자, 사람들은 모두 건너기를 두려워하여 감히 앞장서지 못하는데, 김유신이 앞장서서 건너가자, 여러 군사들이 그 뒤를 이어 따라갔다. 고구려 경내로 들어가 산양(蒜壤)에 이르자, 사람들이 모두 피곤하여 지쳐 있는데, 김유신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우리에게는 대대로 원수이다. 지금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곳으로 나가는 것은, 대국의 힘을 빌어 두 나라를 멸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함이니, 제군(諸君)은 마땅히 힘을 내라.” 하고, 곧바로 평양으로 진군하였다. 이현(梨峴)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났는데, 그들을 역습으로 공격해서 이기니, 병기(兵器)를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당나라의 옥저도 총관(沃沮道摠管) 방효태(龐孝泰)가, 고구려 군사와 싸우다가 군사가 패하여 죽었다. 처음에 방효태가 영남(嶺南)의 수군을 거느리고 사수(蛇水) 가에 주둔하였는데, 연개소문이 이들을 맞아 공격하므로 방효태가 대패하였다. 혹자는 포위를 돌파하여 유백영(劉伯英)·조계숙(曹繼叔)의 진영으로 나가도록 권하였으나, 방효태는 말하기를, “내가 삼가 양대(兩代)를 섬기면서 지나치게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는데,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는 한 나는 반드시 돌아갈 수 없다. 내가 향리(鄕里)의 자제(子弟) 5천여 인을 거느리고 왔는데, 이제 모두 다 죽었으니 어찌 한 몸을 위하여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였다. 연개소문이 육박전(肉薄戰)으로 공격하여, 죽은 자가 수만(數萬)이었으며, 화살이 꽂힌 것이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방효태는 그 아들 13인과 더불어 모두 죽었다.
봄 2월
○당나라 요동도 총관(遼東道摠管) 소정방이 평양의 포위를 풀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앞서 김유신 등이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험한 길로 평양과 몇 리[數里]의 거리였다. 마침 차가운 바람과 눈이 얼어 붙어 사람과 말이 피곤하고 지쳐서 얼어 죽었다. 김유신이 웃통을 벗고 채찍을 잡고서 앞에서 몰아 나가자, 무리가 모두 죽을 힘을 내어 험한 곳을 건넜다. 김유신은, 당나라 군사가 주리고 군색할 것이란 생각 때문에, 먼저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와 군관(軍官) 구근(仇近) 등을 보내어 당나라 군영(軍營)에 보고하게 하니, 소정방은 기뻐하며 글로 사례하였다. 열기가 돌아오자, 김유신은 기뻐서 급찬(級飡)을 삼았다. 김유신이 행군하여 양오(楊隩)에 이르러서, 인문(仁問)·양도(良圖)와 아들 군승(軍勝) 등을 파견,

당나라 군영에 군량을 보내주고, 소정방에게는 은(銀)·세포(細布)·두발(頭髮)·우황(牛黃) 등의 물품을 주게 하였다. 소정방은, 군량이 다하고 군사가 지친데다, 또 큰눈을 만났기 때문에, 군량을 얻어가지고는 곧 회군(回軍)하였다. 양도는 군사 8백 인을 데리고 바다를 통해 돌아갔다. 김유신도 또한 철수하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복병(伏兵)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은 북을 소 허리에 매고 북채를 소 꼬리에 매달아, 휘둘러서 치면 소리가 나게 하고, 또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가 끊이지 않게 하여, 주둔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는, 밤중에 몰래 행군하여 표하(河, 임진강(臨津江))에 도착, 급히 강을 건너 군사를 쉬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구려 군사들이 (이를) 깨닫고는 추격하였다. 김유신이 막아 싸우면서 많은 노(弩)를 한꺼번에 발사하니, 고구려 군사가 또 물러났다. 김유신이 장사(將士)들을 진두 지휘하여 나누어 공격, 그들을 쳐부수었는데, 만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으며,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 5천여 인을 사로잡고, 병기 수만 점을 얻었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공을 논하여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김유신이 왕에게 말하기를, “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勇士)입니다. 신이 편의(便宜)에 따라 급찬에 임명하였으나, 아직 그들의 공에는 부응(副應)하지 못한 것 같으니, 원컨대 사찬(沙飡)으로 높여 주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사찬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김유신은 대답하기를, “작록(爵祿)은 공에 대한 보답인데, 무엇이 지나침이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신라의 영묘사(靈廟寺)에 화재가 났다.
○탐라국주(耽羅國主)인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조빙하였다. 이전에 고을나(高乙那)의 15대 손(孫)인 고후(高厚)·고청(高淸)의 형제 3인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南方)에 나타나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이국(異國) 사람이 내조(來朝)할 형상입니다.”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고후 등이 과연 왔다. 왕이 그를 가상하게 여겨, 큰 아들을 성주(星主)라 칭하였는데, 그가 성상(星象)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둘째 아들은 왕자(王子)라고 하였는데, 대개 왕이 고청을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여, 마음대로 부리기 위한 속셈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막내 아들은 도내(都內)라 하였다. 읍호(邑號)를 탐라(耽羅)라고 하였는데, 올 때에 처음 탐진에 정박하였기 때문이다.

각각 보개(寶蓋)와 의대(衣帶)를 하사하여 보냈는데, 어느 왕 때의 일인지 알 수 없다. 그 뒤에는 백제에 신하로 귀속하였기 때문에, 좌평(佐平)으로 관호(官號)를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항(來降)하여 속국(屬國)이 되었다.
봄 3월
○신라왕이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대포(大酺)를 베풀게 하였다.
가을 7월
○신라에서 이찬(伊飡) 김인문(金仁問)을 당나라에 보냈다.
○당나라 웅진 도독(熊津都督) 유인원(劉仁願) 등이 백제의 군사를 웅진에서 대파(大破)시켰다. 제(帝)는 평양에 군사를 귀환시켜야 하기 때문에, 유인원(劉仁願) 등에게 서쪽으로 복귀하도록 칙유하였으나, 유인궤(劉仁軌)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백제의 남은 화근이 하루가 못되어 다시 일어날 것이니, 고구려의 도망한 도둑들을 어느 때 섬멸하겠습니까?” 하고, 이에 그 곳을 지키었다. 그리고 형세를 살피어 복신(福信)의 잔당들을 웅진의 동쪽에서 격파하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대산(大山)·사정(沙井) 등의 성책(城栅)을 빼앗았는데, 사살과 노획이 매우 많았다. 이에 군사들을 나누어 진수(鎭守)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을 내려다 보고 있고, 높고 지세가 험준하여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증강시켜 그 곳을 지켰다. 유인궤가 밤중에 신라 군사를 독려(督勵), 성으로 접근하여 성첩(城堞)을 빼앗고, 날이 밝자 성으로 들어가 8백 인을 참살(斬殺)하니, 드디어 신라가 군량을 운반할 길이 통하였다. 유인원이 군사를 더해 줄 것을 주청(奏請)하니, 좌위위 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人師)에게 조칙하여, 웅진도 행군총관(熊津道行軍摠管)을 삼아 치주(緇州)·청주(靑州)·내주(萊州)·해주(海州)의 군사 7천 인을 징발하여, 웅진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이 권세를 독점하여, 풍(豐)과 서로 시기하며 풍을 죽이려고 꾀하니, 풍이 복신과 친한 사람을 거느리고 가 기습하여 (복신을) 죽였으며,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倭國)에 보내 파병을 요청하여 당나라 군사에 대항하였다.
○신라에서 대당 총관(大幢摠管) 진주(眞珠)와 남천주 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歆)을 죽였다. 처음에 두 사람이 병을 핑계 대고 국사를 돌보지 않으므로, 왕은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이고, 드디어 그의 가족도 멸족시켰다.
○신라의 사찬(沙飡) 여동(如冬)이 벼락을 맞았다. 여동은 일찍이 어미를 쫓아냈는데, 이에 이르러 벼락을 맞아 죽게 되었다.

신라 문무왕 3년, 고구려 보장왕 22년, 계해년(癸亥年), 663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용삭 3년
봄 2월
○신라의 흠순(欽純)·천존(天存)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취하고 7백여 급을 참수(斬首)하였으며, 거독(居督)·사평(沙平) 두 성을 공격하여 항복받고, 또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0급을 참수하였다.
여름 4월
○당나라에서 신라를 계림주 대도독부(鷄林州大都督府)로 삼고, 왕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았다.
여름 6월
○영묘사(靈廟寺)의 문에 벼락이 쳤다.
가을 9월
○신라왕과 당나라의 웅진 총관(熊津摠管) 손인사(孫仁師) 등이 백제의 주류성(周留城)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부여풍(扶餘豊)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손인사가 와서 유인원(劉仁願)과 합세하니 사기가 크게 떨쳤으며, 신라왕이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 이에 여러 장수가 공격 방향을 의논하였는데, 혹은 “가림성(加林城)은 수륙(水陸)의 요충지이니, 먼저 공격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말하니, 유인궤(劉仁軌)가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실(實)을 피하여 허(虛)를 공격하라.’ 하였으니,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면 군사를 상하게 되고 지키면 날짜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소굴(巢窟)이니, 만약 이를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함락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손인사·유인원 및 신라왕은 보기병(步騎兵)을 거느리고, 유인궤와 부여융(扶餘隆)은 주사(舟師, 수군(水軍))를 지휘하여, 웅진강(熊津江)으로부터 함께 주류성을 향하여 진군했다. 백강(白江) 입구에서 왜인(倭人)을 만나자, 신라군이 힘껏 싸운 끝에 4합(合)을 모두 이기고, 그들의 선박 4백 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으며 바닷물이 붉은빛으로 변하였다. 두릉(豆陵)·윤성(尹城)·주류(周留) 등의 성은 모두 항복하고, 부여풍은 혼자 위기에서 벗어나 달아났으며, 왕자(王子)인 충승(忠勝)·충지(忠志) 등은,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들과 함께 모두 항복하니, 신라왕이 왜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의 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강화(講和)하고 빙문(聘問)하며 상호 왕래하면서, 일찍이 원한을 산 일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오늘날 백제와 함께 우리를 해치려고 일을 꾸미는가? 지금 너희들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으나, 차마 죽이지 못하겠으니, 돌아가 너희 왕에게 말하라.” 하고, 드디어 그들을 놓아주고는,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유독 지수신(遲受信)이 웅거한 임존성(任存城)만은, 험하고 견고한 데다가 저장된 군량이 또한 많아서, 공격한 지 한 달이 되어도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1월
○신라왕이 반사(班師,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옴)하여, 김유신에게 밭 5백 결(結)을 하사하고, 진(鎭)에 남아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는 겨울옷[冬衣]을 주었다.
○당나라 유인궤(劉仁軌)가 장수를 파견,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처음에, 백제 사람 흑치상지(黑齒常之)는, 굳세고 지모(智謀)와 책략이 있어서 달솔(達率)을 삼고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하게 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하자, 그 소속 부대에 항복하였는데, 소정방이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노략질하므로, 흑치상지가 이를 두려워해서 곧 도망했다가, 도망나온 무리들을 불러모아 임존성(任存城)을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니, 열흘도 안되어 그들에게 돌아오는 자가 3만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흑치상지가 대항하여 그들을 격퇴시켰다. 드디어 2백여 성을 수복하니, 소정방이 이길 수가 없었다. 흑치상지가 별부(別部)의 사타상여(沙吒相如)와 더불어 지형이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복신(福信)에게 호응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제(帝)가 사신을 보내어 초유(招諭)하였으므로, 곧 유인궤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성심으로 그를 대우하며, 임존성을 취하는 것을 자신의 공효로 삼게 하고, 곧 병기와 양곡을 대어주니, 손인사가 말하기를, “야심(野心)은 믿기 어려우니, 만약 병기와 양곡을 대어 준다면 이는 도적을 도와 주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유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두 사람을 보건대, 충성스럽고 지모가 있다. 가히 기회가 온다면 이로 인하여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의심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의 지모를 이용하여 임존성을 취하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남은 무리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 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洋州刺史)가 되었으며, 여러 번 정벌(征伐)에 종사하여 공을 쌓게 되니, 특별한 벼슬과 상을 제수하였다. 오랜 뒤에, 연연도 대총관(燕然道大摠管)이 되어, 이다조(李多祚) 등과 더불어 돌궐(突厥)을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좌감문위 중랑장(左監門衛中郞將) 보벽(堡璧)이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세우려고 하매, 조서(詔書)하여 흑치상지와 더불어 함께 토벌하게 하였는데, 보벽이 혼자 진격하였다가 오랑캐에게 습격 당해 모든 군사가 궤멸되었다. 보벽은 하옥하여 베이고,

흑치상지는 공이 없다는 죄로 연죄되어 있었는데, 마침 주흥(周興) 등이 그가 응양 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모반하였다고 무고하여, 조옥(詔獄)에 체포되어 갇혔다가 죽었다. 흑치상지는 아랫사람을 은덕으로 다스렸는데, 그가 타는 말이 군사들에게 매질을 당했을 때, 어떤 사람이 죄주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문득 사사로운 말[馬]로 해서 관병(官兵)을 매질하겠는가?” 하였으며, 전후에 받은 상사(賞賜)를 휘하에 나누어 주어, 남겨두는 재물이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유인궤(劉仁軌)는 백제에 유진(留鎭)시키고, 손인사(孫仁師)와 유인원(劉仁願)은 소환하였다. 이때에 전쟁을 치른 여파로, 즐비했던 집들이 폐허가 되고, 죽은 시체들이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유인궤가 비로소 명하여, 해골(骸骨)을 거두어 묻고 호구(戶口)를 기록하며, 촌락을 정리하고 관장(官長)을 임명하고, 도로를 소통시키고 교량(橋梁)을 세우며, 제방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복구하고, 농상(農桑)을 부과하고 빈민을 진휼(賑恤)하며,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도록 하였다. 또 당나라의 사직(社稷)을 세우고, 정삭(正朔) 및 묘휘(廟諱)를 반포하였으며, 백성들이 모두 사는 곳에 편안히 정착한 뒤에야, 둔전(屯田)을 정비하고 양곡을 저축하며 사졸들을 훈련시켜서, 고구려를 도모하게 하였다. 유인원이 경사(京師)에 이르자, 제(帝)가 묻기를, “경(卿)이 아뢴 일이 모두 형편에 합당하니, 경은 무인(武人)인데 어찌 이와 같이 유능한고?” 하니, 유인원이 말하기를, “모두 유인궤가 한 것입니다.” 하니, 제가 기뻐하여 유인궤에게 여섯 계급을 높이고,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서대 시랑(西臺侍郞) 상관의(上官儀)가 말하기를, “유인궤는 출삭(黜削)의 견책을 당하였어도 능히 충인(忠仁)을 다하였고, (사람들이 통상) 절제(節制,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를 잡기를 원하는데도 (유인궤는) 능히 어진 사람을 추천하였으니, 모두가 군자라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신라 문무왕 4년, 고구려 보장왕 23년, 갑자년(甲子年), 664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인덕(麟德) 원년
봄 정월
○신라의 김유신이 늙어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신라에서 부인들로 하여금 또한 중국 제도의 의복을 입게 하였다.
봄 2월
○신라에서 여러 능에 수호(守戶) 각각 20씩을 두었다.
○당나라에서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熊津)을 대신 수비하게 하고, 부여융(扶餘隆)을 웅진 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서, 본국(백제(百濟))으로 돌아가 백제의 유민(遺民)들을 불러모으게 하고, 신라와의 감정을 풀게 하였다.

봄 3월
○백제의 유민들이 또 사비성(泗沘城)에 모여 모반하자, 웅진도독이 관할하던 군사를 징발, 그들을 쳐서 이겼다.
○신라에서 웅진부성(熊津府城)에 사람을 보내어, 당나라의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월
○신라에서 장군 김인문(金仁問)과 품일(品日) 등을 보내어,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신라에서 사람들이 재화(財貨)와 전토(田土)를 절에 마음대로 시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경(經)에 이르기를, ‘위에서 명한 것은 어기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쫓는다.’ 하였으니,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이래로 부처를 신봉하는 데에 더욱 힘써서, 탑묘(塔廟)의 융성함이 양(梁)나라와 위(魏)나라 때보다 더 지나쳤습니다. 토지의 시주는 다만 여사(餘事)였을 뿐인데, 지금에 와서 이렇게 금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그 명령하는 것이 그가 좋아하는 것에 반대가 된다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백성들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속일 수 없다고 한다면, 비록 간곡하게 달랜다고 한들 그들이 즐겨 따르겠습니까? 뒤에 임금이 된 자가 백성이 교화를 따르게 하려면, 몸소 실천하여 인도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라 문무왕 5년, 고구려 보장왕 24년, 을축년(乙丑年), 665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인덕 2년
봄 2월
○신라의 중시(中侍) 문훈(文訓)이 치사(致仕)하므로, 이찬(伊飡) 복진(福眞)으로 대신하였다. 이찬 문왕(文汪)이 졸(卒)하니, 예로써 장사지냈다. 제(帝)가 양동벽(梁冬碧)·임지고(任智高) 등을 보내어 조문하고, 겸하여 자의(紫衣) 한 벌과 요대(腰帶) 1조(條)와 채능라(彩綾羅) 1백 필과 명주 2백 필을 주었으며, 겸하여 김유신에게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이천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를 책봉하였다. 왕은 당나라 사자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었다.
가을 8월
○경자일(庚子日)에, 신라왕이 유인원(劉仁願)·부여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같이 맹약(盟約)하였는데, 그 서약문에 이르기를, “지난번 백제의 선왕(先王)들이 역순(逆順)에 어두워서,

이웃 나라와 우호 관계가 돈독하지 못하고 친인척 간에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倭國)과 서로 내통하여, 함께 잔학하고 포악한 짓을 자행하면서,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城邑)을 약탈·도륙하였으므로 거의 편안할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는, 한 물건이라도 제곳을 잃은 것을 민망히 여기고, 무고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자주 사자[行人]에게 명하여 화회(和會)하도록 효유하였으나, 지세가 험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믿고서 천경(天經)을 업신여겼으므로, 황제께서 노(怒)하여 삼가 정벌(征伐)을 행하였으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 한 번 군사를 움직임에 나라가 크게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실과 저택을 웅덩이로 만들어 후예의 경계를 삼게 하고,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 후손에게 교훈을 삼도록 해야 할 것이나, 유순한 자를 감싸 주며 배반자를 치는 것이 전왕(前王)들의 좋은 법이요,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어 주는 것이 지난날 철인(哲人)들의 상규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사에 전하였다. 그러므로 전의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扶餘隆)을 세워서 웅진 도독(熊津都督)으로 삼고, 그들의 제사를 모시게 하여 그들의 고향을 보존케 함이니, 신라에 의지하여 영원히 우방(友邦)이 되어, 각자 오랜 감정을 없애고 우호의 화친(和親)을 맺되, 각각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복(藩服)이 되도록 하라. 이에 사인(使人) 우위위 장군 노성현공(右威衛將軍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 친히 임하여 권유하고 이 성지(成旨)를 선포하여, 혼인으로써 약속하고 맹세를 거듭 다짐함에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마시노라. 다함께 시종 화목하여 재해(災害)를 분담하고 환란을 구휼하며, 은의(恩義)를 형제 같이 하고 윤음(綸音)을 공경히 받들어, 감히 실추(失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맹세한 뒤에는 함께 지조를 지키리니, 만약에 동맹을 배반하여 그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邊境)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밝은 신(神)은 이를 보고 많은 재앙을 내려서, 자손을 보육(保育)할 수 없고, 사직(社稷)을 수호(守頀)할 수 없으며, 제사가 끊기고 종자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金書)·철권(鐵券)을 만들어서 종묘(宗廟)에 간직하게 하니, 자손 만대토록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지어다. 신명께서는 이를 들으시고 이에 흠향하여 복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유인궤(劉仁軌)의 글이었다. 피 마시기[歃血]를 마치고는, 희생과 폐백을 제단 북쪽에 묻고, 그 글을 신라의 종묘에 간직하였다. 이에 유인궤는, 신라의 사자(使者)와

백제·탐라·왜인(倭人) 네 나라 사자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돌아가서 태산(泰山)에 모여 제사 지냈다. 부여융은 무리들이 흩어져 버릴까 두려워서 또한 경사(京師)로 갔었는데, 뒤에 당나라에서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시켜, 남은 무리를 안집(安輯)하게 하였다가, 이어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이를 통치(統治)하게 하였다. 부여융이 신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구국(舊國)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를 위임 통치하다가 죽으니, 백제는 드디어 멸망되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백제 시조는 부여(扶餘) 계통에서 나와, 고구려 땅을 피해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거의 7백 년이 되었으니, 자손을 위해 끼친 계책이 훌륭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말기에 이르자, 사치와 욕심이 극도에 달하여 공역(功役)을 함부로 일으키고, 마음대로 하여 법도를 잃어서 함부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해쳤으며, 또 대대로 이웃나라와 원수를 맺어 군사를 함부로 동원하여 침략함으로써, 경내(境內)의 백성으로 하여금 거의 편안한 해가 없게 하였다. 또 예로써 중국을 섬기지 못하고 전쟁을 불러들여 죄를 받게 되고, 자신마저 포로가 되어 드디어 종묘가 빈터로 남게 되었으니, 또한 영원토록 경계 삼아야 할 일이다.” 하였다.
○신라왕이 아들 정명(政明)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대사(大赦)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29 (정암 서당) | 작성자 jaseo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