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동국통감

동국통감 28

문장대 2025. 12. 2. 21:50

서기 656년, 신라 태종왕 3년, 고구려 보장왕 15년, 백제 의자왕 16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현경(顯慶) 원년

봄 3월

○백제왕이 간신(諫臣) 좌평(佐平) 성충(成忠)을 죽였다. 이에 앞서 왕이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주정하며 여색에 빠지므로, 성충이 극력히 간하자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성충은 음식을 끊고 죽음에 임하여 상서(上書)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이변을 살펴보건대, 반드시 병란의 일이 있을 것이니, 무릇 군사를 씀에 반드시 지세(地勢)를 잘 살피고 골라서 상류(上流)에 처하여 적에 대응하여야 보전하게 될 것입니다. 적병이 만약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을 지나오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백강(白江)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하고 좁은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옳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은 살펴보지도 않았다. 드디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간함을 따라 허물을 고친 자는 흥하지 않은 이가 없고, 간함을 막으며 스스로 옳다고 한 자는 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의자왕은 성충에 대하여 오직 간한 것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에 가두어 죽임으로써 그 마음에 통쾌하게 여겼으니, 그 자신이 사로잡히고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니며, 마침내 적병(敵兵)이

수로와 육로로 나와서 이미 탄현과 백강을 넘어오게 된 뒤에야 그의 말을 취용하지 않았다고 후회하였으니, 또한 어찌 미치겠는가?” 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 왕도(王都)에 쇠비[鐵雨]가 내렸다.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왔다.

가을 7월

○신라에서 (왕의) 아들 문왕(文汪)을 보내어 당(唐)나라에 조빙하였다.

서기 657년, 신라 태종왕 4년, 고구려 보장왕 16년, 백제 의자왕 17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현경 2년

봄 정월

○백제왕이 서자(庶子) 41인을 제수하여 좌평(佐平)으로 삼고 각각 식읍(食邑)을 내려 주었다.

여름 4월

○백제에 큰 가뭄이 들었다.

서기 658년, 신라 태종왕 5년, 고구려 보장왕 17년, 백제 의자왕 18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현경 3년

봄 3월

○신라왕이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靺鞨)과 연결되어 있어 사람들이 능히 편치 못하다 하여 경(京)을 파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都督)을 두어 그를 진수(鎭守)하게 하였으며, 또 실직(悉直)을 북진(北鎭)으로 삼았다.

여름 6월

○당나라의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營州都督兼東夷都護) 정명진(程名振)과 우령군 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서기 659년, 신라 태종왕 6년, 고구려 보장왕 18년, 백제 의자왕 19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현경 4년

봄 2월

○백제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왕궁(王宮)에 들어온 일이 있었는데, 한 마리의 여우가 좌평(佐平)의 서안(書案)에 올라가 앉았다.

○백제에서 장수를 보내어 신라의 독산(獨山)·동잠(桐岑) 두 성(城)을 침략하였다.

○신라에서 장차 백제를 치려고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가서 군사를 청하였다.

○백제의 궁중(宮中)에 괴목(槐木)의 우는 소리가 사람이 곡(哭)하는 것과 같았으며,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곡을 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백제를 치려고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으므로 일찍이 근심스러운 얼굴빛으로 혼자 앉았는데, (선신(先臣)) 장춘(長春)·파랑(罷郞)과 비슷한 자가 나타나 말하기를, “신(臣)이 비록 백골이 되었으나, 오히려 나라에 보답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당나라 황제가 이미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명년5월에 백제를 치게 할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이렇게까지 몹시 기다리시므로 감히 먼저 고합니다.” 하고는, 조금 있다가 보이지 않았다. 왕은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장춘·파랑 두 집의 자손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며,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창건하여 명복(冥福)을 돕게 하였다. 장춘·파랑은 일찍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죽었던 자이다.

겨울 11월

○당나라 우령군 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 등이 고구려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더불어 횡산(橫山)에서 싸워 그를 격파하였다.

서기 660년, 신라 태종왕 7년, 고구려 보장왕 19년, 백제 의자왕 20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현경 5년

봄 정월

○신라에서 이찬(伊飡) 김유신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봄 2월

○백제의 왕도(王都)에 샘물이 피와 같이 붉고, 서해(西海) 가에는 물고기가 떼로 죽어 백성이 능히 다 먹을 수 없었다. 사비하(沙沘河)의 물이 피와 같이 붉었다.

봄 3월

○당나라에서 좌무위 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 등을 보내어 백제를 쳤다. 처음에 신라에서 숙위(宿衛) 김인문(金仁問)으로 인하여 군사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帝)가 토벌할 것을 결의(決意)하고서 김인문을 불러 도로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물으므로, 김인문이 몹시 상세하게 대답하니, 제가 기뻐하여 드디어 소정방을 신구도행군 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서, 좌효위 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방효공(龐孝公)과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등과 수군·육군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으며, 신라왕에게 칙명하여 우이도행군 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여름 6월

○신라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를 도와 백제를 치고는, 남천정(南川停)에 머물렀다. 왕은 소정방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는데 병선(兵船)이 천리를 잇달아서 덕물도(德物島)에 진을 쳤다는 것을 듣고는,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진주(眞珠)·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소 정방과 회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이르기를, “나는 바다를 경유하고 태자는 육로로 좇아7월 10일에 대왕의 군사와 더불어 모이기로 기약하여 곧 의자왕(義慈王)의 도성(都城)을 치게 되면, 뜻한 바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법민이 말하기를, “과군(寡君)께서 대군(大軍)을 기대하고 있은 지 오래이니, 명하신 것을 들으시면 반드시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수라를 드시고 이르를 것입니다.” 하자, 소정방이 기뻐하여 법민을 보내어 돌아가게 하였다. 법민이 와서 소정방의 군사 기세가 몹시 강성함을 말하니, 왕이 기뻐하여 또 법민과 김유신·품일(品日)·흠춘(欽春) 등을 보내어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대응하게 하고는, 금돌성(今突城)으로 나아가 머물렀다.

이때에 백제에 괴변이 많아서 개구리 떼[蝦蟆]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 있고, 도시(都市)의 사람들이 (까닭 없이) 서로 놀라서 달아나기를 잡으러 쫓아오는 자가 있는 것같이 하여 넘어져 죽은 자가 백여 인이고 재물을 잃은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또 천왕(天王)·도양(道讓) 두 절의 탑(塔)과 백석사(白石寺) 강당(講堂)에 벼락을 치고, 또 검은 구름이 공중에서 용이 싸우듯 하였다. 야록(野鹿)과 같은 개가 사비하(泗沘河) 언덕에 이르러 왕궁(王宮)을 향해 짖으니, 왕도(王都)의 여러 개가 길에 모여서 혹은 슬피 울고 짖어대었으며, 귀신이 왕궁 안에 들어와서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으로 들어가므로, 왕이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았더니, 3척(尺) 가량 깊이에서 한 마리의 거북을 얻었는데, 그 등에 글이 쓰여져 있기를, ‘백제는 월륜(月輪)과 같고, 신라는 월신(月新)과 같다.’고 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무당에게 물으니, 해석하기를, “월륜과 같다는 것은 찼다는 것이니, 차면 기울 것이요, 월신과 같다는 것은 차지 않았다는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차 찰 것입니다.” 하니, 왕이 노(怒)하여 그를 죽였다. 혹은 말하기를, “월륜과 같다는 것은 왕성함이요, 월신과 같다는 것은 미약함이니, 생각건대 백제는 왕성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질 것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전수(戰守)의 편리함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배타기에 익숙하지 못한데다가 멀리 큰 바다를 건너왔으니, 그들이 피곤함을 인하여 공격한다면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며, 신라의 사람들은 대국(大國)의 구원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으나 만약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게 되면

 

반드시 의심하고 주저하여 감히 용감하게 나오지 못할 것이므로 신은 짐짓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決戰)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압니다.” 하였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 왔기 때문에 마음에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칼날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요, 신라 사람은 일찍이 여러 번 우리에게 패하였으므로 이제 우리의 병세(兵勢)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아서 그 군사를 피로하게 하고 먼저 일부의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군사를 공격하여 그 예리한 기세를 꺾어 놓은 다음에, 형편을 보아 당나라의 군사를 공격한다면 가히 군사를 보전하게 될 수 있는 것 만함이 없습니다.” 하였으나, 왕은 주저하며 결단하지 못하였다. 좌평 흥수(興首)가 일찍이 죄를 얻어 외방에 귀양가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묻기를, “사세가 급하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흥수가 말하기를, “당나라의 군사는 이미 많고 군율도 엄명(嚴明)한데, 더구나 신라와 더불어 앞뒤에서 몰아치고 있으니, 만약 들판에서 대진(對陣)한다면 승패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나라의 요충지로 한 사람이 창을 들고 지켜도 만인이 당해내지 못하는 곳이니, 마땅히 용사(勇士)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되,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의 사람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며, 대왕께서는 신중히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서 그들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가 피로하게 되기를 가다린 뒤에 분발하여 공격하면 반드시 격파시킬 것입니다.” 하니, 의논하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죄수로 갇혔던 사람이라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가 말한 것을 취용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와 물을 따라 내려가게 하되 배를 나란히 할 수 없게 하고, 신라의 군사는 탄현에 올라 지름길로 가는데 말을 나란히 갈 수 없게 하는 것만 함이 없으니, 곧 군사를 풀어놓아 공격하게 되면 비유하건대 갇혀 있는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와 같아서 잡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매우 옳게 여겼다.

가을 7월

○고구려 평양의 하수(河水)가 3일 동안 핏빛이었다.

○신라의 장군 김유신 등이 백제의 군사를 격파하니, 장군 계백(階伯)이 죽었다.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로 진군(進軍)하니, 백제에서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나온다는 말을 듣고 장군 계백을 보내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계백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편사(偏師)를 가지고 두 나라의 군사를 당해 내야 되니,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아마도 반드시 처자(妻子)에 누(累)가 될 듯하니,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죽어서 개운하게 하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가속(家屬)을 다 죽인 다음 황산에 이르러 먼저 험한 곳에 의거하여 진영을 설치하였다. 갑자기 신라의 군사를 만나자, 계백이 군중에 맹세하기를, “옛날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5천 인으로 강한 오(吳)나라 70만 군중을 격파하였다. 오늘 제군은 마땅히 각각 분려(奮勵)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도록 하라.” 하니, 사람들이 모두 힘을 다해 싸워서 한 사람이 천명을 당해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김유신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이득이 없고 사졸은 힘이 다하였다. 장군 김흠춘(金欽春)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이르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충성을 다해야 하고 아들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를 다해야 한다. 위태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게 되면 충성과 효도를 두 가지 다 온전히 하는 것이다.” 하니, 반굴이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은 관창(官昌)인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므로 그때에 부장(副將)을 삼았다. 품일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내 아이가 나이 겨우 16세이나 지기(志氣)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이야말로 바로 공명을 세울 때이다.” 하니, 관창이 필마 단창(匹馬單槍)으로 앞질러 적진에 나아가 두서너 사람을 죽이고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었다. 계백에게 생포(生捕)된 채로 송치(送致)되니, 계백은 그가 젊고도 용감한 것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진실로 기이한 무사(武士)가 많으니, 가벼이 볼 수 없다. 젊은 나이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장사(壯士)이겠는가?” 하며, 곧 놓아 돌려보냈다. 관창이 그의 아비에게 말하기를,

“이제 적진 가운데 들어갔다가 능히 장수를 베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 하고, 재차 돌진(突陣)하여 힘써 싸웠는데, 계백이 또 사로잡아 그를 베어 그의 머리를 품일에게 보냈다. 품일이 말하기를, “내 아이의 면목(面目)은 살아있는 것과 같구나. 능히 왕사(王事)를 위해 죽었으니, 다행이다.” 하니, 삼군(三軍)이 감격하여 모두 죽을 뜻을 가지고 진격(進擊)하여, 백제의 군사가 크게 패하고 계백이 죽었으며, 좌평(佐平)인 충상(忠常)·상영(常永) 등 20여 인을 사로잡았다. 신라왕은 반굴·관창에게 급찬(級飡)을 추증(追贈)하고 예로써 장사지내게 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계백(階伯)이 명을 받아 장수가 되고 군사를 동독(董督)하여 장차 출발함에 먼저 그 처자(妻子)를 죽였으니, 그 부도(不道)함이 심하다. 비록 반드시 국난(國難)에 죽을 마음은 있었으나, 힘을 다해 싸워서 적을 이길 계책은 없었던 것이니, 이는 먼저 그 사기(士氣)를 잃고 패배를 취하는 일이었다. 장수로서 진실로 적합한 사람을 얻는다면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공격하고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제압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이다. 오(吳)나라 장수 주유(周瑜)는 5만으로써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60만을 공격하였고, 진(晉)나라 장수 사현(謝玄)은 또한 5만으로써 전진(前秦) 때 부견(苻堅)의 80만 군사를 격파하였으니, 백제의 군사가 어찌 5만에 밑돌며, 당나라와 신라의 군중이 어찌 60만을 넘었겠는가? 그러나 주유를 임용하는 데 성의로써 한 것은 손권(孫權)이고, 사현을 거용(擧用)하는데 의심하지 않은 것은 사안(謝安)이다. 이는 오나라와 진나라의 임금과 재상이 유능한 사람이 있어서 장수를 임용함에 적임자를 얻은 것이다. 이제 백제는 위로 임금이 어리석고 아래로는 신하가 간사하여, 훌륭한 이는 축출을 당하고 변변치 못한 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 훌륭한 장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계백의 광패(狂悖)하고 잔인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싸우지 않고 스스로 꺾인 것이다. 다만 관창을 사로잡고도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고, 그 군사가 패배하게 되어서는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옛 명장(名將)의 유풍이 있었다고 하겠다. 또 상고하건대 품일(品日)이 아들 관창(官昌)에게 명하여 혼자 적진에 들어가도록 하였는데, 또한 다만 죽음뿐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나, 감히 이를 위해 사양하지 않은 것은, 신라의 법에 전사(戰死)한 사람은 모두 후하게 장사지내 주고 벼슬과 상을 내리는 것이 온 집안에 미쳤으며, 나라 사람들은 소중하게 여겨 본받아서 죽음을 영광으로 삼았던 것이니, 옛날 전국 시대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관창이 한번 적진(敵陣)에 들어갔다가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을 때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러 군사와 더불어 함께 나아가게 하였다면, 비록 드나들며 적을 찔러 죽이면서 자신을 바쳐 이름을 성취하려 하였더라도 또한 반드시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에 20세도 안된 아이로 하여금 혼자 말을 타고 재차 가게 하였으니, 이는 그 아들이 반드시 죽어도 참으려고 한 짓이니, 후세에 교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장수가 된 사람이 왕명을 받으면 그 가정을 잊고, 군사에 임하여 맹세를 하게 되면 그 어버이를 잊으며, 전고(戰鼓)를 가지게 되면 그 자신을 잊고서 죽을 마음을 갖고 삶에 대한 계획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니, 다행히 승리하면 국가의 복이요 패배하면 절의를 지키다 죽는 것입니다. 이때에 백제의 임금은 우매하고 잔악함이 매우 심하여,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며 망할 징후가 자주 나타나고 당나라와 신라가 협공(夾攻)하니, 비록 어리석은 아이와 부녀자라도 모두 반드시 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계백은 장수가 되어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을 분별하고 처자가 오욕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모두 먼저 죽였으며, 군사가 패하기에 미쳐서도 굴하지 않고 죽었으니, 그가 처자를 죽인 것은 비록 혹 중도에 지나쳤다고 하겠으나 이것으로서 그를 깊이 흠잡을 것은 없겠습니다. 권근(權近)이 계백을 논하는 데 첫째 부도(不道)하다고 하였으며, 둘째 광패하고 잔인하다고 하였으니, 어찌된 것입니까? 만약 사기(士氣)를 잃어 패배한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사람을 논하는 데는 마땅히 그의 지조와 절의를 논할 뿐이요, 성패(成敗)나 이둔(利鈍)은 따질 바가 아닙니다. 옛날 송(宋)나라 말년 주애의 변[朱厓之變]에 육수부(陸秀夫)·유정손(劉鼎孫)은 바다에다 가속(家屬)을 먼저 침몰시키고 잇따라 죽었으나, 늠름한 충의는 지금까지 해와 같이 밝았습니다. 계백은 나라가 반드시 망할 줄을 알면서도 그 자신을 아끼지 않았는데 더구나 그 처자를 아끼겠으며, 그 처자를 아끼지 않았는데 더구나 군부(君父)를 배반하였겠습니까? 백제가 망할 때에 하나의 충신이나 의사(義士)도 나라를 위하여 목슴을 바치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계백이 절의를 지켜 두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이것이 고인(古人)이 이른바 ‘나라가 망하면 함께 죽는다.[國亡與亡]’라는 것입니다. 군자가 덕으로써 남을 사랑한다면, 어찌 작은 실수를 가지고 그 큰 절의를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이는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唐)나라 군사와 신라의 군사가 백제의 도성(都城)을 포위하여 빼앗으니,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므로, 당나라 군사가 그를 잡아 돌아갔다. 이때 소정방·김인문(金仁問) 등이 기벌포(伎伐浦)로 군사를 건너게 하니, 백제가 군사를 모아 웅진(熊津) 어귀에서 막았다. 소정방은 왼쪽 물가로 나가서 높은 곳으로 올라 진을 치고 그와 더불어 싸웠는데, 백제의 군사가 대패하였다. 김유신이 당나라 군사 진영에 이르니, 소정방은 기일이 지난 뒤에 왔다고 하여 장차 김유신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을 베려 하므로, 김유신이 큰소리로 이르기를, “대장군은 황산(黃山)의 전역(戰役)에서 보지 않았는가? 기일이 지난 뒤에 온 것으로써 죄를 삼으니, 내가 죄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더불어 결전(決戰)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 하고, 곧 군문(軍門)에서 부월(斧鉞)을 짚고 서니, 성난 머리털은 곤두선 듯하고 허리에 찬 보검(寶劍)은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소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빠른 걸음으로 와서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變)을 일으키려 합니다.” 하니, 소정방이 이에 김문영을 풀어 주고, 보기(步騎)를 거느리고 곧 도성으로 나아가니, 백제의 모든 무리가 이를 막았는데, 죽은 자가 또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도성에 육박하니, 백제왕은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기를, “성충(成忠)이 말한 것을 취용하지 않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른 것이 후회된다.” 하였다. 왕자(王子) 융(隆)이 당나라 장수에게 글을 보내어 군사를 물러나게 하도록 애걸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도성을 포위하고 네 길로 일제히 나오므로, 융이 또 상좌평(上佐平)을 시켜서 소정방을 초치해 호궤(犒饋)하게 하였으나, (소정방이) 이를 물리쳤다. 왕은 태자인 효(孝)와 더불어 좌우(左右)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을 보호하였으며, 왕궁의 여러 희첩(姬妾)들은 대왕포(大王浦) 암석(巖石) 위로 달아나 떨어져 죽으니, 뒷사람들이 그 바위를 이름하여 낙화암(落花巖)이라고 하였다. 차자(次子)인 태(泰)가 스스로 서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는데,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융에게 이르기를, “왕과 태자가 본디 있는데도 숙부가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당나라 군사가 아무리 우리를 풀어 준다 하더라도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좌우를 거느리고 성에다 줄을 매달고서 나아가니,

 

백성이 모두 그를 따랐다. 융이 대좌평(大佐平)인 천복(千福) 등과 더불어 나가서 항복하매, 소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첩(城堞)으로 올라가 당나라의 기치(旗幟)를 세우게 하니, 태는 사태가 군색하자 성문을 열고 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 효를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소정방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이르기를, “나는 일에 따라 편의하게 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제 차지한 백제의 땅을 공등(公等)에게 나누어주어 식읍(食邑)을 삼도록 하려고 한다.” 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대장군께서는 천병(天兵)을 인솔하고 와서 부도(不道)함을 정벌하여 소국(小國)의 원수를 설치(雪恥)해 주었으므로, 과군(寡君)과 온 나라의 신민(臣民)은 바야흐로 기뻐서 날뛰기에 겨를이 없는데, 감히 사사롭게 자신의 이득을 챙기겠습니까?” 하였다. 신라왕이 금돌성(今突城)에서 와서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보내어 노포(露布, 승첩(勝捷)을 알리는 문서)로 당나라에 승전(勝戰)을 알리게 하였다.

가을 8월

○소정방과 장사들을 위하여 주연(酒宴)을 베풀었는데, 의자왕(義慈王)을 당하(堂下)에 앉히고 술을 돌리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가을 9월

○소정방이 의자왕과 아들 효(孝)·태(泰)·융(隆)·연(演)과 대신(大臣)·장사(將士) 88인과 백성 1만 2천8백7인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돌아갔으며, 김인문(金仁問)은 사찬(沙飡) 유돈(儒敦)과 대내마(大奈麻) 중지(中知) 등과 더불어 소정방을 따라 당나라에 가서 그대로 숙위(宿衛)하였다.

[위의 백제는]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 계묘년(癸卯年, 서기 전18년 온조왕 원년)에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부터 국호(國號)를 십제(十濟)라 하였는데, 뒤에 백제(百濟)로 고쳤으며, 을묘년(乙卯年, 서기 6년 온조왕 13년)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근초고왕(近肖古王) 신미년(辛未年, 371년 근초고왕 26년)에 북한산(北漢山)으로 도읍을 옮기고, 문주왕(文周王) 을묘년(乙卯年, 475년, 문주왕 원년)에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성왕(聖王) 무오년(戊午年, 538년, 성왕 16년)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겨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는데, 의자왕(義慈王) 경신년(庚申年, 660년, 의자왕 20년) 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망하였으니, 총합 31왕에 6백78년이었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신라 고사(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에서 금궤(金櫃)를 내렸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다.’ 하였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지만, 신(臣)이 사기(史記)를 닦음에 있어 그 전해 온 것이 오래 되었음으로써 그 말을 산삭(刪削)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듣건대 신라 사람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라고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고, 고구려는 또한 고신씨(高辛氏)의 후예라고 하여 성을 고씨(高氏)라고 했다 한다.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진(秦)·한(漢) 난리 때에 중국 사람이 많이 해동(海東)으로 도망하여 왔다.’고 하였으니, 삼국(三國)의 선조(先祖)가 어찌 그 옛 성인(聖人)의 후예이며, 어찌 그 국가를 향유(享有)하기를 오래 하였단 말인가? 백제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행동이 대부분 무도하고 또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였으며, 고구려와는 연화(連和)하면서도 침략을 하여, 이익과 편의에 따라서는 신라의 중성(重城)과 거진(巨鎭)을 할취(割取)하기를 마지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이와 친하고 인국(隣國)과 잘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배이다.’라고 한 것은 못된다. 이에 당나라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서 그 원한을 풀도록 하였는데,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어겼으니, 대국(大國)에 죄를 얻어 그 망하게 된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시조(始祖)는 곧 동명왕(東明王)의 맏아들로, 태자(太子)에게 시기받는 바가 되어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서 어렵게 도망하여 좁고 험한 길로 달아나 숨었다가 하남(河南)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하였으니, 비록 모든 일에 있어 처음 시작하였지만 오히려 능히 군사를 엄격히 하여 굳게 지켜서 낙랑(樂浪)과 말갈(靺鞨)을 방어하면서 마한(馬韓)을 차지하여 멸하였고, 또 능히 고구려와 대항하면서도 신라를 대적하여 솥발의 형세를 이루어 7백 년의 업적을 다져 놓았으니 호걸의 군주가 아니면 능히 그렇게 했겠습니까? 다루(多婁)는 도전(稻田)을 만들어 궁핍한 백성을 진휼하고 대신(大臣)을 후히 예우하여 임금의 법도가 있었으나, 신라와 불화(不和)를 조성하여 하나의 작은 성을 가지고 서로 다투느라

수 십 년 사이에 전쟁이 멈추지 않았으며, 기루(己婁)는 신라와 우호(友好)를 닦아 교린(交隣)의 의리를 얻었고, 개루(蓋婁)는 비록 사기(史記)에 ‘품성이 공순하였다.’고 일컬었으나, 반신(叛臣, 신라의 반신 길선(吉宣))을 받아들이어 이웃 나라와의 화해를 잃었고, 한낱 백성(도미(都彌))을 속여서 그 처(妻)를 간음하려 하였으니, 무엇을 족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초고(肖古)와 구수(仇首)는 왕위에 있은 햇수가 비록 많으나 일컬을 만한 일이 없으며, 고이(古爾)는 사냥하기를 즐기어 서기에만 빠지는 실수를 면치 못하였으나, 빈핍(貧乏)한 사람을 진휼하고 조조(租調)를 회복하며, 관제(官制)를 정하고 장리(贓吏)를 금고(禁錮)하며, 이웃 나라와 교류하여 수호(修好)하였으니, 이것이 칭찬할 만한 것입니다. 책계(責稽)와 분서(汾西)는 천승(千乘, 제후)의 존귀함으로써 스스로 신중히 하지 못하여 혹은 적병(敵兵)에게 죽거나 혹은 적수(賊手)에 죽었으니, 슬픈 일입니다. 비류(比流)는 오랫동안 민간(民間)에 있으면서 백성의 괴로움을 알았으므로, 그가 즉위(卽位)하여서는 궁핍한 사람을 진휼 조절하였으며, 사기에는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일컬었는데, 41년의 사이에 재변이 자주 나타나고 흉년이 거듭 닥쳐 백성이 살 수 없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계왕(契王)은 재위(在位)한 지 겨우 2년으로, 다만 비류가 분서를 대신하여 왕위에 섰다가 그가 종래에는 분서의 아들 계왕에게 전하였고, 계왕은 비류를 대신하여 왕위에 섰다가 그가 종내에는 비류의 아들 근초고(近肖古)에게 전하였으니, 오히려 손양(遜讓)의 기풍이 있었습니다. 근초고(近肖古)는 고구려와 더불어 화친을 잃어 그 임금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러서, 원한을 도발해 화를 초래하여 대대로 원수의 대적이 되어 두 나라의 사이에 전쟁이 한창 일어나서 멈추지 않았으며, 근구수(近仇首)는 재위한 지 10년에 대략 그 나라를 보존하였고, 침류(枕流)는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믿어 호승(胡僧)을 맞이하여 절을 창건하고 도승(度僧)이 복을 구하려 하였으나 한 해를 지나서 훙(薨)하였으니, 불법은 족히 믿지 못할 것이 분명한 것이며, 진사(辰斯)는 토목(土木)에 대한 일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며, 궁실(宮室)과 연못을 사치스럽게 꾸미고, 진기(珍奇)한 날짐승을 기르는 것으로써 완물 상지(玩物喪志)하였으며, 열흘이나 혹은 한 달 동안 구원(狗原)에서 사냥하다가 마침내 행궁(行宮)에서 죽었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아신(阿莘)은 무력을 남용함이

거의 없는 해가 없어서 백성이 난리에 지쳐서 대부분 적국으로 달아났고, 경솔하게 태자를 도이(島夷)에게 볼모로 보내어 거의 뒤를 이을 수 없게 될 뻔했으며, 전지(腆支)는 오랫동안 외국에 볼모로 있을 때에 왕이 훙하자 나라 내부에서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돌아와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어찌 그리 다행한 일입니까? 구이(久爾)는 비유(毗有)에게 왕위를 전하고, 비유는 개로(蓋鹵)에게 전하였는데, 개로는 교만하고 사치하며 혼미하여 상국(上國, 북위(北魏))에 청해 강성한 이웃 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며, 적(敵)의 간첩을 믿고 가까이하여 바둑두고 즐기다가 크게 공역(工役)을 일으켜서 오직 궁실(宮室)과 대사(臺榭)를 높게 짓고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심지어 흙을 쪄[烝]서 성을 쌓고 하수(河水) 연안에 제방을 쌓으며 돌을 캐어 곽(槨)을 만들어서, 인력(人力)이 모두 피곤하고 창고가 텅 비었다고 고하였으나 오히려 적국의 술책에 빠진 것을 알지 못하였고, 나라의 형편이 부패되어 적병(敵兵)이 문득 이르렀으니 후회한들 미칠 수 없는 일이며, 자신이 남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나라는 반드시 그 자체에서 친 뒤에 남이 그 나라를 친다.’ 하였으니, 개로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문주(文周)는 사위(嗣位)하여 바로 와신상담(臥薪嘗膽)할 때인데, 우유 부단하여 강신(强臣, 해구(解仇))에게 제재를 받다가 신명(身命)도 보존하지 못하였고, 삼근(三斤)은 어린 나이로 능히 장수에게 명하여 적(賊)을 쳐서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고 신인(神人)의 분노를 통쾌하게 하였으니, 이는 일컬을 만한데도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며, 동성(東城)은 나라의 흉년을 당하여 백성에게 기근이 들었는데도 구휼하지 않고, 임류각(臨流閣)을 세워 몹시 화려하게 하고 스스로 방자하게 연회하였으며, 궁문(宮門)을 닫고 간하는 신하를 거절하면서 놀고 사냥하는 데 빠져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적신(賊臣)에게 해침을 당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무령(武寧)은 작가(芍加)를 베어 토적(討賊)의 의리는 얻었으나, 그러나 백성을 아들과 같이 여기는 도리를 잃어 능히 위로하여 오게 해서 안집(安集)시키지 못하고 적국(敵國)에 백성을 몰아넣게 하였으니, 전사(前史)에 ‘인자하고 관후(寬厚)하다.’고 일컬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성왕(聖王)은 처음 왕위에 올라 능히 대사(大事)를 결단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성인이라 일컬었는데, 말년에 이르러 신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치려고 꾀하다가 그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자

옛날의 우호를 배반하고 분병(忿兵)을 징발하였다가 드디어 전쟁의 칼날에 죽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하루아침의 분노로 그 자신을 망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위덕(威德)은 비록 덕으로 정사를 펴지 않았으나 나라를 오래도록 향유하였고, 혜왕(惠王)은 즉위한 지 2년 만에 훙(薨)하였으며, 법왕(法王)은 사위(嗣位)하고서 불교를 숭상하고 믿어서 도살(屠殺)을 금지하고 매[鷹鷂]를 놓아주었으며,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불태우고, 절을 창건하여 중[僧]을 뽑았으니, 대개 복을 연장시키려고 한 것인데, 1년을 지나 곧 훙(薨)하였으니, 다만 그 미혹되었음을 보겠습니다. 무왕(武王)은 강성함을 믿고 교만하여 신라를 침략하였으므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이 전쟁을 일으키어 많은 시체가 들판을 덮었는데, 당나라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군사를 거두라고 효유하자, 겉으로는 비록 사과하면서도 안으로는 사실 그렇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망해루(望海樓)를 세웠으며, 사비하(泗沘河)에서 놀았는데, 즐겁게 노는 데 빠져 게으르고 오만하여져서 오직 시일이 부족하였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의자(義慈)가 태자(太子)가 되어서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도하고 형제와는 우애하였는데, 그가 즉위하여서는 죄수를 염려하여 죄를 용서하였으니, 그가 정사를 하는 것에 대략은 볼만하였으나, 다만 그가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깊은 꾀와 원대한 지략이 없으므로, 신라와 순치(脣齒)의 형편임을 모르고 함부로 난리를 일으켜 집어삼키려고 꾀하여 금년에 성(城) 하나를 빼앗고 명년에 성 하나를 빼앗자, 자주 승리하는 위세를 의뢰하여 교만한 기운이 갑자기 넘쳐나서 신라 보기를 주머니의 물건으로 여기어 취하려고 하는 마음을 효연(囂然)히 멈추지 않고서, 당제(唐帝)의 조서를 어기어 분란(紛亂)을 풀 마음이 없었고 고구려와 결속하여 신라의 조공 길을 끊었으며, 오히려 또 술에 취하고 주색에 빠져서 충성으로 간하는 것을 막아 끊었으므로, 하늘이 위에서 노하여 누차 재앙과 이변을 나타내어 정녕(丁寧)하게 견책(譴責)하였는데도 오히려 살펴서 깨닫지 못하고 안연(晏然)하게 스스로 방자하였으므로, 능히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의 험한 곳을 확보하지 못하고 당나라 군사가 한번 이르자 사직(社稷)은 빈터가 되고 부여씨(扶餘氏)는 갑자기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 슬픈 일입니다.”

○당나라에서 백제의 옛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여 각기 주현(州縣)을 통할(統轄)하게 하였으며, 거장(渠長)을 뽑아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을 삼아서 그를 다스리게 하였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명하여 군사 1만으로 사비성(泗沘城)에 유진(留鎭)하게 하였다. 백제의 남은 군사가 사비성으로 들어가 생포되고 항복한 자를 노략질하려고 꾀하므로, 유인원이 신라의 사람과 더불어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백제의 군사가 물러나 사비성 남쪽 산마루로 올라가 성책(城栅)을 세우고 한 곳에 모여 틈을 엿보고 노략질하니, 백제의 유민(遺民)으로 반응하는 것이 20여 성이었다. 제(帝)가 좌위 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어 웅진 도독(熊津都督)을 삼아서 그 남은 무리를 진무(鎭撫)하게 하였는데,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 갑자기 졸(卒)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반사(班師)할 때에 왕이 태자 및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이례성(爾禮城)을 쳐서 취하고 관(官)을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또 사비성 남쪽 산마루의 군책(軍栅)을 공격하여 1천5백 명을 참수(斬首)하였으며, 계탄(鷄灘)으로 행군하여 건너서 왕흥사(王興寺)의 잠성(岑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이기고 7백 인을 참수하였다.

겨울 11월

○고구려에서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니, 군주(軍主)인 필부(匹夫)가 죽었다. 처음에 신라왕은 고구려와 백제·말갈이 서로 의지하여 같이 침탈(侵奪)을 꾀하므로, 충성과 용맹의 재질이 있어 능히 방어할 만한 자를 구하여 필부를 칠중성 아래에 현령(縣令)으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거기하여 군사를 동원해 와서 그 성을 포위하자, 필부가 20일이나 지키고 또 싸웠으며 사졸(士卒)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고구려 장수는 갑자기 빼앗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군사를 이끌어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대내마(大奈麻) 비삽(比歃)이 은밀히 성안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는 것으로 적에게 알리자, 고구려 장수가 다시 도전하므로, 필부가 염탐하여 이를 알고는 곧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 밖으로 던지고 군사들에게 영(令)을 내리기를, “충신과 의사(義士)는 죽어도 굴하지 않는 법이니, 힘쓸지어다.

성의 존망(存亡)은 이 한 싸움에 달려 있다.” 하고, 격분하여 주먹을 쥐고 한번 부르짖으니 병자(病者)가 모두 일어나 앞을 다투어 적에게로 달려나갔으나, 사졸은 주리고 피곤하여 다시 떨치지 못하였는데, 고구려의 군사가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공격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므로, 필부는 한두 장수와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웠으나 화살이 그의 몸에 집중되어 마치 고슴도치와 같았으며 피가 흘러 발꿈치에까지 이르게 되어 곧 죽었다. 왕은 몹시 슬퍼하며 곡을 하고 급찬(級飡)을 추증하였다.

○신라왕이 백제를 치고서 돌아와 공을 논함에 계금당(罽衿幢)의 병졸 선복(宣服)을 급찬(級飡)으로 삼고, 군사(軍師)인 두질(豆迭)을 고간(高干)으로 삼았으며, 전사자(戰死者)들에게 관직을 차등 있게 추증하였다. 처음에 대각간(大角干)을 두어 대장군 김유신을 17위(位)의 위에 있게 하였는데, 백제에서 항복한 사람은 모두 재주를 헤아려 임용하여 좌평(佐平)인 충상(忠常)·상영(常永)과 달솔(達率)인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一吉飡)을 제수하고, 은솔(恩率)인 무수(武守)·인수(仁守)에게는 대내마(大奈麻)를 제수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의자(義慈) 등을 황제에게 보이니, (황제가) 그들을 책망하고서 용서해 주었다. 황제가 소정방을 위로하고 또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대로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니, 소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서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래에서 위를 섬기기를 부형(父兄)과 같이 하니, 나라가 아무리 작다 하여도 꾀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당나라 사람이 백제를 멸하고는 사비(泗沘) 언덕에 진영(陣營)을 치고 신라를 침벌하려 꾀하였는데, 왕이 여러 신하를 불러서 계책을 물으매, 계책을 드린 자가 있어 말하기를, “우리 군사로 하여금 거짓 백제의 복장을 하고 적(賊)이 되게 할 경우, 당나라 사람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이니, 인하여 그와 더불어 싸우게 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김유신이 그대로 따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적을 섬멸하였는데, 도리어 그와 더불어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겠는가?” 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개가 아무리 그 주인을 두려워하나 그 다리를 밟으면 도리어 주인을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만났을 때 구제하지 않고 스스로 망하는 데 이르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당나라 사람이 신라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곧 돌아갔다.

○의자(義慈)가 병사(病死)하니, 황제가 금자광록대부 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구신(舊臣)에게 부상(赴喪)을 허락하였으며,

조서(詔書)를 내려 손호(孫皓, 삼국 시대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손자)·진숙보(陳叔寶,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진(陳)나라 후주(後主))의 묘 곁에 장사지내고 아울러 비석을 세웠으며, 아들 융(隆)에게는 사가경(司稼卿)을 제수하였다.

○당나라에서 좌효위 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에, 좌무위 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요동도(遼東道)에, 좌효위 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平壤道)에 아울러 행군 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고, 포주 자사(蒲州刺史)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鏤方道)의 총관(摠管)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28 (정암 서당) | 작성자 jase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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