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동국통감

동국통감 26

문장대 2025. 12. 2. 21:46

 

신라 선덕여왕 14년, 고구려 보장왕 4년, 백제 의자왕 5년, 을사년(乙巳年), 645년, 당나라 태종 정관 19년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조빙하였다.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김유신(金庾信)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미처 주(主)를 뵙지도 못했는데 봉인(封人)이 백제의 대군(大軍)이 와서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한다고 급히 알리자, 주가 또 김유신을 제배(除拜)하여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그를 막게 하였다. 김유신이 명을 듣고 처자(妻子)를 보지도 않고 길을 떠나 백제의 군사를 맞아 싸워 패주(敗走)시키니, 참수(斬首)한 것이 2천 급이었다. 승전을 알리고 미처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는데 또 백제의 군사가 국경에 나와 주둔하며 장차 대거(大擧)하여 와서 침략하려 한다는 급보가 있자, 주가 김유신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이 공(公)의 한 몸에 매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공이 다시 가도록 하라.” 하였다. 김유신이 드디어 길을 떠나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장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데, 더구나 우리들이겠는가?” 하였는데, 백제의 군사가 이를 바라보고는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곧 물러갔다.

봄 2월

○제(帝)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이었는데 수(隋)나라가 네 번 출사(出師)를 하였으나 능히 얻지 못하였다. 짐(朕)이 지금 동정(東征)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아 주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어 주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은 평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짐이 늙기 전에 사대부(士大夫)들의 남은 힘을 써서 이를 취하려 한다.” 하였다. 제가 정주를 출발하는데 친히 궁시(弓矢)를 차고

손수 우의(雨衣)를 안장 뒤에 매어 달았다. 이세적(李世勣)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형세를 크게 펼치고 회원진(懷遠鎭)으로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군사를 몰래 북으로 용도(甬道)로 향하여 고구려가 뜻하지 않은 때에 나가게 하였다.

여름 4월

○이세적이 통정(通定)으로부터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고구려 성읍(城邑)이 크게 놀라서 모두 성문을 닫고 스스로 수비하였다.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렀고, 절충 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은 10여 기(騎)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城門)을 위압(威壓)하니, 성중에서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으며,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은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전봉(前鋒)이 되어 나아가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가서 고구려 군사 수천 인을 격파하였고, 이세적과 도종은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인구 1만 명과 식량 10만 석을 노획하였으며 그 땅을 개주(蓋州)로 삼았다. 장양(張亮)은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그 성은 사방이 동떨어졌으나 오직 서문(西門)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이르니, 부총관(副摠管)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올랐다.

여름 5월

○성이 함락되니, 남녀 8천 구(口)가 함몰하였다.

○신라주는 제(帝)가 친히 정벌한다는 것을 듣고 군사 3만을 발하여 그를 도왔는데, 백제가 그 허점을 틈타 신라국(新羅國) 서쪽 일곱 성을 엄습하여 취하니, 신라주가 김유신을 보내어 백제를 침략하였다.

○제(帝)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백암(白巖) 등의 성을 빼앗았다. 이에 앞서 이세적이 나아가 요동성 밑에 이르고 제는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요택은 진펄이 2백여 리로 사람과 말이 통행할 수 없었으므로 장작 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펴고 다리를 놓아 군사가 머물지 않고 행군하여 요택의 동쪽으로 건넜다. 고구려왕은 신성(新城)과 국내성(國內城)의 보병과 기병 4만을 발하여 요동을 구원하니, 도종이 4천 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맞이하였다. 군중(軍中)에서는 모두들 많고 적은 것이 현격히 다르니 도랑을 깊이 파고

군루를 높이어 거가(車駕)가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도종이 말하기를, “적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벼이 보는 마음이 있으며 멀리 오느라 아주 피곤할 것이니, 그를 공격하면 반드시 패배시킬 것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하고 승여(乘輿)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어찌 다시 적을 군부(君父)에게 남겨 놓겠는가?” 하였다.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말하기를, “강적을 만나지 않으면 어찌 장사(壯士)의 힘을 나타내겠는가?”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들어 공격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쓸어버리니, 대중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미 접전(接戰)하였는데 행군 총관(行軍摠管)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해 달아나므로, 당나라 군사가 패하였다. 도종이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고구려 군사의 진영이 혼란한 것을 바라보고는 날랜 기병 수 십 명과 더불어 그를 충격(衝擊)하고, 이세적은 군사를 이끌고 원조하니,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여 죽은 자가 1천여 인이었다. 제가 요수(遼水)를 건너고는 다리를 철거하여 사졸(士卒)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 아래에 주둔하여 도종을 위로하고 물품을 내렸으며, 마문거를 뛰어 올려 중랑장(中郞將)으로 제수하였고, 장군예를 목베었다. 제가 스스로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이르러 사졸(士卒)들이 흙을 져다가 참호(塹壕)를 메우는 것을 보고 제가 그 중 더욱 무거운 것을 나누어 말 위에서 가져다 주니, 종관(從官)들이 다투어 흙을 져다가 성밑에 놓았다. 이세적이 밤낮을 쉬지 않고 요동성을 공격한 지 13일 만에 제가 정병(精兵)을 이끌고 와서 모이니 그 성 수백 리를 에워쌌으며,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세적이 포거(砲車)를 벌여 놓고 큰 돌을 날려 3백 보(步)를 넘으니, 맞는 곳마다 문득 무너졌다. 고구려 사람이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그물로 얽어 막았으나 능히 막아내지 못하였는데, 충거(衝車)로 비옥(陴屋, 성 위에 낮게 쌓은담. 여장(女墻))을 두들겨 부수었다. 이때에 백제에서 금휴개(金髹鎧, 금적색(金赤色)의 칠(漆)을 한 갑옷)를 올리고 또 현금(玄金, 쇠[鐵])으로 문개(文鎧, 무늬 있는 갑옷)를 만들어 군사가 입고 따르니, 갑옷의 광채가 해와 같이 빛났다. 남풍이 급히 불자 제가 예졸(銳卒)을 보내어 충거의 장대 끝으로 올라가서 그 서남루(西南樓)를 불지르니 불길이 성중(城中)을 연소(延燒)시켰다. 인하여 장사(將士)를 지휘하여 성에 오르자, 고구려 군사가 힘을 다해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1만여 인이었다. 패한 고구려 군사[勝兵] 1만여 인과 남녀 4만 구(口)와 양곡 50만 석을 노획하고,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이세적은 백암성(白巖城) 서남쪽으로 진격하고 제는 서북쪽으로 임하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心腹)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청하고 성에 임하여 도월(刀鉞)을 던지는 것으로 신호를 삼겠다고 하였으며, 손대음은 항복하기를 원하나 성 안에는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제가 기치(旗幟)를 그 사자(使者)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항복하려거든 마땅히 이것을 성 위에 세우라.” 하였다. 손대음이 기치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올라온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그대로 따랐다. 백암성에서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가 이윽고 후회하니, 제가 그 반복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성을 얻게 되면 마땅히 사람과 물건을 모두 싸우던 군사에게 상주겠다.” 하였다. 이세적이 제가 장차 그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보고 갑사(甲士) 수 십 인을 거느리고 청하기를, “사졸(士卒)들이 다투어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그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을 탐내는 때문입니다. 지금 성이 함락되려 하는데, 어찌 다시 그들의 항복을 받아서 싸우던 군사의 마음을 외롭게 하겠습니까?” 하니, 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못하는 바이다.” 하니, 이세적이 곧 물러갔다. 성 안의 남녀 1만여 구를 얻어 물가에 임하여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는, 백암성(白巖城)을 암주(巖州)로 삼고, 손대음(孫代音)을 자사(刺史)로 삼았다. 처음에 연개소문이 가시성(加尸城)의 7백 인을 보내어 개모성(蓋牟城)에 수자리 살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으니 그 사람들이 종군(從軍)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겠다고 청하였다. 제가 말하기를,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운다면 연개소문이 반드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니, 한 사람의 힘을 얻어가면서 한 집안을 멸망케 하는 짓은 내가 차마 못하겠다.” 하고, 모두에게 늠곡(凜穀)을 주어 보냈으며, 개모성을 개주로 삼았다.

○제(帝)가 고구려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니, 고구려 장수 북부 누살(北部耨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누살(南部耨薩) 고혜진(高惠眞)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구원하다가 군사가 패하여 항복하였다. 이에 앞서 제가 안시성에 이르러 진군(進軍)하여 공격하니, 고연수와 고혜진이 그 군사와 말갈병(靺鞨兵)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제가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지금 고연수가 계책으로 삼을 만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전진하여 안시성과 연결하여 보루(堡壘)를 만들고 높은 산의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성중(城中)의 양식을 먹으면서 말갈의 군사를 풀어놓아 우리의 우마(牛馬)를 탈취한다면 공격하더라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돌아가고자 하면 진펄이 장애가 되어 앉아서 우리 군사를 괴롭힐 것이니, 이것이 상책(上策)이고, 성중의 무리를 빼내어 그와 더불어 밤을 타서 달아나는 것이 중책(中策)이며, 지능(智能)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이 하책(下策)이다. 경(卿)들은 보라. 저들은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사로잡히는 것이 내 눈 안에 있다.” 하였다. 이때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는 나이 많으면서 일에 익숙하여 고연수에게 이르기를, “진왕(秦王, 당 태종의 즉위 이전의 봉호(封號))은 안으로 군웅(群雄)을 토평(討平)하고 밖으로 이적(夷狄)을 정복하여 홀로 서서 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해내(海內)의 많은 무리를 의지하여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우리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멈추어 싸우지 말고 여러 날 오래 버티면서 기병(騎兵)을 나누어 보내서 그 양도(糧道)를 끊는 것만한 것이 없다. 양식이 이미 다하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가 없고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길이 없으니 이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고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니, 안시성과의 거리가 40리였다. 제는 그들이 머뭇거리며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대장군(大將軍) 아사나두이(阿史那杜尒)를 명하여 돌궐병(突厥兵) 1천 기(騎)를 거느리고 이들을 유인하도록 하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거짓 패하여 달아나매, 고연수가 말하기를, ‘상대하기 쉽다.’ 하고, 앞을 다투어 나아가 안시성(安市城) 동남쪽 8리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불러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건대, 적에게 임하여 장차 싸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사졸(士卒)의 마음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마침 여러 진영을 지나다가 사졸들이 고구려 군사가 이른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칼을 빼어들고 깃발을 달아매면서 얼굴에 기쁜 빛이 나타남을 보았으니, 이는 필승(必勝)의 군사입니다. 폐하께서 20세 전에 몸소 행진(行陣)하여 무릇 기이한 계교를 내어 승리하게 되었던 것은, 모두 위로 성모(聖謨)를 품하고 여러 장수들이 성산(聖筭)을 받든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일도 폐하의 발종 지시(發蹤指示)를 바랍니다.” 하니, 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여러 공(公)들이

이로써 사양함을 보이니, 짐이 마땅히 여러 공들을 위하여 헤아려 보겠다.” 하고, 곧 장손무기 등과 더불어 수백 기병을 따르게 하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바라보고 산천의 형세로 보아 복병(伏兵)할 만한 곳과 출입할 만한 곳을 살피었다. 고구려 군사가 말갈(靺鞨)과 더불어 합병(合兵)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니, 제가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도종(道宗)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왕사(王師)에 대항하느라, 평양(平壤)의 수비는 반드시 허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병(精兵) 5천 명을 빌려 주시어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 십만의 무리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제가 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고연수(高延壽)에게 속여 말하기를, “나는 그대 나라의 강신(强臣)이 그 군주를 시해한 까닭으로 죄를 물으러 왔다가 싸우기에 이르렀으나, 나의 본심이 아니다. 그대 나라의 지경에 들어와서 추속(芻粟)이 공급(供給)되지 않기 때문에 그대 나라의 몇 성(城)을 취하였으나, 그대 나라가 신례(臣禮)를 닦는다면 잃은 것을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하니, 고연수가 그것을 믿고 다시 방비를 설시하지 않았다. 제가 밤에 문무 관원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는 이세적에게 명하여 보기(步騎)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령(西嶺)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은 정병 1만 1천을 거느리고 기병(奇兵)을 삼아 산 북쪽으로부터 협곡(狹谷)으로 나와 그 뒤를 충격(衝擊)하도록 하였으며, 제는 스스로 보기(步騎) 4천을 거느리고 고각(鼓角)을 끼고 기치(旗幟)를 눕혀서 산에 올랐다. 제가 여러 군사에게 칙유(勅諭)하여, “고각 소리를 듣거든 일제히 내달아 분격(奮擊)하게 하라.” 하고는,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수항막(受降幕)을 조당(朝堂) 곁에 베풀도록 하였다. 이날 밤에 유성(流星)이 고연수의 진영(陣營)에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고연수 등이 유독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려고 하였다. 제는 장손무기의 군영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고각을 울리고 기치를 들도록 명하니, 여러 군사가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함께 진격하였다. 고연수 등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그 진영은 이미 혼란해졌다. 마침 천둥 번개가 쳤는데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복(奇服)을 입고 큰소리로 외치며 진중(陣中)에 깊이 쳐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어 고구려 군사가 휩쓸렸다. 대군(大軍)이 이틈을 타서 진격하자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져서

 

죽은 자가 2만여 인이었다. 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 장군(遊擊將軍)을 제배(除拜)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을 의지하여 스스로 고수(固守)하였으나, 제가 여러 군사에게 명하여 그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무기는 교량(橋梁)을 모두 철거(撤去)하여 그들의 돌아갈 길을 끊었다. 고연수와 고혜진(高惠眞)이 그 무리 3만 6천 8백 인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였으며 군문(軍門)으로 들어와서 배복(拜伏)하고 명(命)을 청하였다. 제가 누살(耨薩) 이하 관장(官長) 3천 5백 인을 가려서 내지(內地)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어 평양으로 돌려보내었으며, 말갈 3천 3백 인을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령(領)을 얻었는데, 기타의 기계도 이와 상응하였다. 제가 행차했던 산의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蹕山)이라 하고, 돌에 새겨 공을 기록하였다. 고연수를 홍로경(鴻矑卿)으로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으며, 역서(驛書)로 태자(太子)에게 알리기를, “짐이 장수가 되어 이와 같이 하였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처음에 신라 사람 설계두(薛罽頭)가 일찍이 친우(親友)와 더불어 그의 뜻을 말하기를, “국가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骨品)을 논하여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아무리 크나큰 재질과 뛰어난 공로가 있더라도 스스로 떨치지 못하니, 나의 소원은 서쪽으로 중국[中華]에 유람하면서 불세(不世)의 책략을 떨치고 비상(非常)한 공을 세워서 스스로 영화로운 길을 이룩하여 잠신(簪紳)·검패(劍佩)로 천자의 곁에 출입했으면 족하겠다.” 하고, 해선[海舶]을 따라 당나라로 들어갔다. 이번 전쟁에 미쳐 자천(自薦)하여 좌무위 과의(左武衛果毅)가 되어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으니, 공이 1등이었다. 제가 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고 묻자 좌우에서 사실대로 대답하니, 제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중국 사람도 오히려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망설이고 앞서지 못하는데 외국 사람이 나를 위해 왕사(王事)에 죽었으니, 어떻게 해야 그 공을 갚겠는가?” 하고, 어의(御衣)를 벗어서 그를 덮어주고, 대장군(大將軍)을 추증(追贈)하여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제(帝)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반사(班師)하였다. 제가 백암성(白巖城)을 이기고 이세적(李世勣)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험준하고 군사가 정예(精銳)하며 그 성주(城主)는 재간이 있고 용맹스러워

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복종하지 않으므로 연개소문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능히 항복받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건안성(建安城)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니, 만약 불의(不意)에 나아가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나의 복중(腹中)에 있게 될 것이니, 이는 병법(兵法)에 이른바, ‘성에는 공격하지 않는 바가 있다.’고 한 것이다.” 하니,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성을 공격하였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의 양도(粮道)를 끊는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북을 울리며 진군하여 건안성을 취할 뿐입니다.” 하였다. 제가 말하기를, “공(公)으로 장수를 삼았는데 어찌 공의 계책을 쓰지 않겠는가? 나의 일을 그르치지만 말라.” 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안시성 사람들이 제의 기치(旗幟)와 일산(日傘)을 바라보고 문득 성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제가 노(怒)하였고, 이세적은 안시성을 이기는 날에 남자는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일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를 듣고 더욱 굳게 지키므로, 공격한 지 오래었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제에게 청하기를, “저희가 이미 몸을 대국(大國)에 맡기었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속히 큰 공을 이루시어 저희도 처자(妻子)와 서로 만나보고 싶습니다만, 안시성 사람들은 그 가인(家人)을 돌보고 아끼어 스스로 싸움을 하니 갑자기 함락시키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 저희는 고구려의 10여 만이나 되는 무리로서 당나라 깃발만 바라보고도 기가 꺾이고 무너져내려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랐었는데, 오골성(烏骨城)의 누살(耨薩)은 늙고 쇠잔하여 능히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군사를 옮기어 그곳에 임하면 아침에 이르러 저녁에는 이길 것입니다. 그 나머지 요로(要路)의 작은 성들은 반드시 위풍(威風)만 바라보고도 패하여 달아날 것이니, 그런 뒤에 그들의 물자와 양곡을 거두고 북을 울리며 진군하여 앞으로 나가면, 평양성도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한 말하기를, “장양(張亮)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 동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 힘을 합쳐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넌다면, 곧바로 평양성을 취하는 것은 이 거조(擧措)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제가 장차 그대로 따르려 하였으나, 유독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천자의 친정(親征)은 제장(諸將)과는 다르니,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新城)의 노병(虜兵)이 오히려 10만이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모두 우리의 뒤를 밟을 것이니, 안시성을 먼저 격파하고 건안성을 취한 뒤에 휘몰아 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는 만전의 계책입니다.” 하니, 제가 곧 중지하였다. 여러 장수가 안시성을 급히 공격하였는데, 제가 성중에서 닭과 돼지의 들레는 소리를 듣고 이세적에게 이르기를, “성을 포위한 지 오래 되어 성중(城中)에 연화(煙火)가 날로 줄어들었는데, 지금 닭과 돼지가 몹시 들레니 이는 반드시 군사에게 잘 먹이고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는 것이다. 마땅히 병비(兵備)를 엄하게 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고구려 군사 수백 인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는데, 제가 이를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의 죽은 자가 수 십 인이었고 나머지 군사는 퇴주(退走)하였다. 도종(道宗)이 군사를 독려하여 성 동남쪽에 토성(土城)을 쌓아 그 성을 침핍(侵逼)하니, 성 안에서도 성을 더 높게 쌓아 그를 막았다. 사졸이 번(番)을 나누어 교전(交戰)하기를 하루에 6, 7차례 하였고, 충거(衝車)와 포석(礮石, 큰 돌을 퉁기어 날려서 성첩을 부수는 무기)으로 그 누첩(樓堞)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이에 따라 목책(木栅)을 세워 무너진 곳을 보완하였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제가 친히 그를 위해 침을 놓아주었는데, 밤낮을 쉬지 않고 토산을 쌓아 무릇 60일 동안에 50만 명의 공력을 들였으니, 산 정상이 성보다 두어 길이 높아 성 안을 아래로 굽어보았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산 정상에 주둔하여 적을 방비하게 하였는데, 산이 무너져 성을 누르매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임소를 떠나 있었으므로, 고구려 군사 수백 인이 성의 무너진 곳으로부터 나와 싸워서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웅거하고 참호(塹壕)를 만들어 지켰다. 제가 노하여 부복애를 참(斬)하여 군중에 돌려 보이고, 제장(諸將)에게 명하여 공격하기를 3일 동안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와서 죄를 청하니, 제가 말하기를, “그대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다만 짐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이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을 임용한 것1)보다 못하다고 여기며, 또 개모성(蓋牟城)과 요동성(遼東城)을 격파한 공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대를 용서할 뿐이다.” 하였다. 제는 요동 지방[遼左]이 일찍 추워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무르기가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 가므로 군사를 돌려 철수하게 하였다. 먼저 요주(遼州, 요동성)·개주(蓋州, 개모성) 2주(州)의 호구(戶口)를 빼내어 요수(遼水)를 건너게 하고는 이내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시위(示威)하고 돌아가니,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城主)가 성에 올라 배사(拜辭)하니, 제가 그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縑] 1백 필을 주면서 임금을 잘 섬기라고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기(步騎) 4만을 거느려 후군(後軍)을 삼게 하고 요동에 이르러 요수(遼水)를 건넜다. 요택(遼澤)이 진창이어서 거마(車馬)가 통하지 못하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인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에는 수레로 다리를 삼았는데, 제가 스스로 말채찍에다 섶[薪]을 매어서 역사(役事)를 도왔다.

겨울 10월

○제가 소구(瀟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 메우는 것을 독려(督勵)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는데 풍설(風雪)이 사나워 사졸들의 옷이 젖고 죽는 자가 많으므로, 길에 불을 피우고 기다리도록 하였다. 무릇 현도(玄菟)·횡산(橫山)·개모(蓋牟)·마미(磨米)·요동(遼東)·백암(白巖)·비사(卑沙)·맥곡(麥谷)·은산(銀山)·후황(後黃) 10성(城)을 빼앗았고, 요주(遼州)·개주(蓋州)·암주(巖州) 3주(州)의 호구(戶口)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 인이었다. 고연수(高延壽)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곧 근심 중에 죽었고, 고혜진(高惠眞)은 마침내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신성(新城)·건안성(建安城)·주필산(駐蹕山) 3대전(三大戰)에서 고구려 군사와 당나라 병마(兵馬)의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제가 능히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런 원행이 있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성명(聖明)함이 세상에 보기 드문 임금으로서, 난(難)을 제거함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비할 만하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까웠다. 군사를 쓸 즈음에 이르러서는 기계(奇計)를 냄이 끝이 없어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는데, 동정(東征)의 역(役)에서는 안시성(安市城)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城主)야말로 비상한 호걸이라 이를 만하다. 그런데 역사 기록에 그의 성명(姓名)을 빠뜨렸으니, 양자(楊子)가 이른바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대신(大臣)이 역사 기록에서 그 이름을 잃었다.’는 것과도 다름이 없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당(唐)나라 안록산(安祿山)의 난에 장순(張巡)이 수양(睢陽)을 지킬 때에 지친 군사 수만으로 고성(孤城)을 에워싸고 지키면서, 바야흐로 (세력을) 펼쳐 제어할 수 없는 오랑캐를 막아 그 목을 누르고 그 목구멍을 막으면서 수미(首尾)로 견제(牽掣)하여 동남쪽으로 침범하지 못하게 해서 강회(江淮)가 보존되었고, 적(賊)이 이미 평정되어서는 그의 재용(財用)을 의뢰하여 중흥(中興)을 이루었으니, 그 당실(唐室)에 공을 거둠이 컸습니다. 안시성주(安市城主)는 외로운 성의 약한 군졸로써 병비(兵備)를 엄하게 하여 굳게 지키면서 당나라의 당당한 수만의 군사에게 대항하니, 제가 비록 친히 임하여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마침내 능히 빼앗지 못하였고, 제군(諸軍)이 동으로 향하여 평양과 다툴 수 없어서 요(遼)의 동쪽이 마침내 안전하게 되었으니, 성주(城主)가 고구려에 공을 세운 것이 또한 작지 않습니다. 대개 장순은 비록 능히 적을 제어하지 못하고 한 성에서 많은 적들에게 붙잡혔으나, 무릇 크고 작은 수백 번의 싸움에서 힘이 꺾여 죽었으니, 그 늠름한 충의(忠義)가 지금까지도 한 날 같습니다. 성주는 연개소문에게 굴하지 않았으니 그 절의가 가상하고, 이제 또 성을 에워싸고 굳게 지키면서 백성에겐 칼날에 피를 흘리지 않게 하였다가 제가 돌아가게 되어서는 성에 올라 배사(拜辭)하니 제도 또한 이를 가상히 여겨 비단을 주며 임금을 섬기는 충절을 격려하였으니, 그 충의(忠義)가 또 어찌 장순에게 뒤지겠습니까? 그리고 장순이 대적한 것은 모두 양(梁)나라와 송(宋)나라 사이의 군도(群盜)였으나 마침내 성을 지키지 못하고 죽었는데, 성주는 대항하는 것이 승여(乘輿)였고 또 능히 성을 지키면서도 절의를 보전하였으니, 비상한 호걸의 재주라 이르더라도 또한 마땅치 않겠습니까?”

겨울 11월

○신라에서 이찬(伊飡) 비담(毗曇)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각주

1) 한(漢)나라 때 사람 왕회(王恢)는 무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실패하자 죽음을 당하였고, 진(秦)나라 때 사람 맹명(孟明, 百里奚의 아들)은 진(晉)을 정벌하여 크게 패하였으나 목공(穆公)의 재등용으로 결국 진(晉)을 이기고 서융(西戎)의 패국(覇國)을 이루었다는 고사(故事).

신라 선덕여왕 15년, 고구려 보장왕 5년, 백제 의자왕 6년, 병오년(丙午年), 646년, 당나라 태종 정관 20년

봄 2월

○제(帝)가 경사(京師)로 돌아가 이정(李靖)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의 무리로써 고구려에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정이 말하기를,

“이는 도종(道宗)이 해명할 바입니다.” 하였다. 제가 도종을 돌아보고 묻자 도종이 주필(駐蹕)에 있을 때에 허술한 틈을 타서 평양을 취하자던 계책을 갖추어 진술하니, 제가 창연(悵然)하여 말하기를, “그 당시는 갑작스러워서 내가 살피지 못했다.” 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사죄(謝罪)하고 아울러 두 미녀(美女)를 바치니, 제가 이를 돌려보내며 사자에게 이르기를, “여색(女色)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나, 그들이 친척을 버리고 온 것을 가엾게 여기어 짐은 취하지 않겠다.” 하였다.

○고구려 동명왕모(東明王母) 소상(塑像)이 3일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처음에 제가 장차 돌아가려 하면서 궁복(弓服)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는데, 그것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또 더욱 교만 방자하였다. 비록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렸으나 그 말이 대체로 모두 궤탄(詭誕)하였으며, 또 당나라 사신을 대우하는 것도 거만할 뿐더러,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다. 제가 비록 누차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신칙하였으나 침범하여 능멸함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제가 조공(朝貢)을 허락할 수 없다고 조칙하고 다시 그를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라 선덕여왕 16년 · 진덕여왕 원년, 고구려 보장왕 6년, 백제 의자왕 7년, 정미년(丁未年), 647년, 당(唐)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21년

봄 정월

○신라에서 비담(毗曇)·염종(廉宗) 등을 주참(誅斬)하였다. 처음에 비담 등이 여주(女主)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그를 폐하려고 명활성(明活城)에 둔쳤는데, 관군(官軍)은 월성(月城)에 주둔하여 공격하고 수비하면서 10일 동안 해산하지 않았다. 밤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는 일이 있으므로, 비담 등이 사졸(士卒)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밑에는 반드시 피를 흘리는 일이 있다.’ 하니, 이는 자못 여주가 패배할 조짐이다.” 하자, 사졸들이 소리 높이 부르짖어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여주가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순서를 잃으니, 김유신(金庾信)이 여주를 뵙고 이르기를, “길하고 흉한 것은 무상하여 오직 사람들이 불러오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주왕(紂王)은 적작(赤雀, 봉황(鳳凰))이 나타났기 때문에 망하였고, 노(魯)나라에서는 기린을 잡았으므로 쇠하였으며, 고종(高宗, 은(殷)나라 무정(武丁))은 꿩이 와서 울었으므로 흥하였고 정공(鄭公)은 용이 싸웠으므로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德)이 요망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면 별의 이변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으니, 청컨대 여주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하고, 곧 허수아비가 불을 안고 있도록 만들어 풍연(風鳶)에 실어 띄워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하고, 다음날 사람들을 시켜 길가에서 소문 내기를, “어젯밤에 떨어졌던 별이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적군(賊軍)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또 백마(白馬)를 잡아서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며 축원하기를, “천도(天道)는 양(陽)이 강건하고 음(陰)은 유순하며, 인도(人道)는 임금이 높고 신하는 낮은 것인데, 진실로 혹 그것이 바뀌게 되면 곧 큰 혼란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비담 등은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고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범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난신 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귀신이 함께 미워하여 천지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인데, 지금 하늘은 이에 대해 아무런 뜻이 없는 듯이 도리어 별의 괴변(怪變)을 주성(主城)에 보이시니, 이는 신이 의혹되어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오직 하늘의 위엄으로 사람의 하고자 함을 따라서 선(善)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신(神)으로서 부끄러움을 만드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고, 이에 모든 장졸(將卒)을 독려(督勵)하여 분발해 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복주(伏誅)되고, 연좌(連坐)된 자가 30인이나 되었다.

○신라에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었는데, 돌을 쌓아 올려 위는 모나고 밑은 둥글며 속을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하였으니, 높이가 수장(數丈)이었다.

○신라주(新羅主) 덕만(德曼)이 훙(薨)하니,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여주가 평일에 죽을 시기를 미리 이야기하였는데, 그날에 이르러 과연 훙하였다. 세상에서 여주가 세 가지 일에 기미를 알았다고 칭하였으니, 대개 그림 속의 꽃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을 알고, 개구리의 소리를 듣고 병화(兵禍)가 있음을 알았으며, 죽을 시기를 미리 이야기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 이에 진평왕(眞平王)의 모제(母弟)인 국반(國飯)의 딸 승만(勝曼)이 즉위하였는데, 신장이 7척이고 손을 드리우매 무릎을 지났다.

봄 2월

○신라에서 이찬(伊飡)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대아찬(大阿飡)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군주(郡主)로 삼았다.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신라의 선덕주(善德主)를 추증(追贈)하여 광록 대부(光祿大夫)로 삼고, 이어서 여주에게 책명(策命)을 내려 주국(柱國)을 삼고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하였다.

○당제(唐帝, 태종(太宗))가 장차 다시 고구려를 치려고 하니, 조정에서 의논하여 이르기를,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으므로, 갑자기 빼앗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대가(大駕)가 친히 정벌하실 때에 그 백성들은 밭을 갈아 곡식을 심지 못하였으니, 함락된 성에서 실제로 그 곡식을 거둬들였더라도 계속되는 한재(旱災)로 백성의 태반은 식량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자주 약간의 군사를 보내어 영역을 침범해서 저들로 하여금 명령에 의해 달아나느라 피로하게 만들면, 쟁기를 놓고 보루(堡壘)로 들어가게 되어 수년(數年) 사이에 천리(千里)의 땅이 쓸쓸하게 될 것이니, 인심이 저절로 이탈되어 압록강(鴨綠江)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제(帝)가 그대로 따라서 좌무위 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 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서 군사 1만여 인을 징발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가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 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이랑(孫貳朗)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서 군사 3천 인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營州都督府)의 군사를 따라 신성도(新城道)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양군(兩軍)은 모두 물에 익숙하고 잘 싸우는 자를 선발하여 배치(配置)하였다. 이세적의 군사는 이미 요하(遼河)를 건너 남소성(南蘇城) 등 몇 성을 거치는데, 모두가 성을 등지고 항거해 싸우므로, 이세적이 공격하여 패주시킨 다음 그 주위의 성곽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

○우진달과 이해안이 고구려 경내(境內)에 들어가 무릇 1백여 차례 싸워서 석성(石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므로, 고구려 군사 1만여 인이 나와서 싸웠는데, 이해안이 공격하여 이기니, 고구려 군사로서 죽은 자가 3천 인이었다. 제가 송주 자사(宋州刺史)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강남(江南) 12주(州)의 공인(工人)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였으니, 고구려를 치려고 함이었다.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가서 사은(謝恩)하였다.

○신라에서 연호를 태화(太和)로 고쳤다.

겨울 10월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였다가 크게 패하였고, 신라의 비령자(丕寧子)가 죽었다. 이때에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보기(步騎) 3천을 거느리고 무산(茂山)·감물(甘勿)·동잠(洞岑) 세 성(城)을 공격하므로, 신라주(新羅主)가 김유신을 보내어 보기(步騎) 1만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는데, 백제의 군사가 몹시 날래므로 김유신이 고전(苦戰)하다 힘이 다한 끝에 비령자에게 이르기를,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송백(松柏)의 절개를 아는 법이다. 오늘 사세가 급한데,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힘차게 기계(奇計)를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하니, 비령자가 말하기를, “지금 많은 사람 중에 유독 나에게 부탁하니,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나아가 그 종 합절(合節)에게 말하기를, “오늘 마땅히 위로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내 아들 거진(擧眞)이 나이는 어리나 장지(壯志)가 있어서 반드시 나와 더불어 함께 죽으려고 할 것이니, 만약 부자(父子)가 목숨을 같이한다면 집사람들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너는 거진과 더불어 내 뼈를 잘 거두어

돌아가서 그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고는 곧 창을 비껴들고 돌진(突陣)하여 두어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거진이 싸움에 나아가 함께 죽으려 하므로, 합절이 말의 재갈을 잡고 저지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유명(遺命)이 계셨는데, 부친의 명을 저버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버린다면 효라고 할 수 있겠소?” 하니,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도 목숨을 아껴 구차스레 산다면 또한 효라고 하겠는가?” 하며, 합절의 팔을 칼로 치고 돌진하여 또한 죽으매, 합절이 말하기를, “높이 받들던 분이 죽었는데, 죽지 않고 무엇하겠는가?” 하고, 또한 교전(交戰)하다가 죽으니, 삼군(三軍)이 감격하여 일제히 나아가 향하는 곳마다 적의 기세가 꺾이고 함락되어 3천여 급을 베었는데, 의직만이 겨우 혼자서 모면하였다. 김유신이 세 사람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몹시 통곡하였으며, 여주(女主)도 그를 슬퍼하여 예로써 장사지내게 하고 은상(恩賞)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겨울 12월

○고구려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莫離支) 임무(任武)를 시켜 당나라에 가서 사죄하게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26 (정암 서당) | 작성자 jase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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