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648년, 신라 진덕여왕 2년, 고구려 보장왕 7년, 백제 의자왕 8년
중국연호 당나라 태종 정관 22년
봄 정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조빙하였다.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조빙하였다.
○제(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우무위 대장군(右武衛大將軍)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행군 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위 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裵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만여 인과 누선(樓船)·전함(戰艦)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봄 3월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신라 서쪽 변방을 침략하여 요거(腰車) 등 10여 성(城)을 함락하고, 여름 4월에 진군하여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니, 신라주가 그를 근심하여 압량주 도독(押梁州都督) 김유신을 명하여 막게 하였다. 김유신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공(夾攻)하니 백제의 군사가 패주(敗走)하므로, 김유신이 추격하여 거의 다 죽이니, 임금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차등 있게 상주었다.
○당나라의 오호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의 보기(步騎) 5천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그를 격파하고,

고구려 군사 1만여 인이 밤에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자, 복병이 일어나서 또 그를 격파하였다.
○제(帝)가 고구려의 곤궁하고 피폐함을 이르면서 명년에 30만의 군중을 징발하여 단번에 섬멸할 것을 의논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대군(大軍)이 동정(東征)하려면 반드시 한 해를 지날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우마(牛馬)로서는 실어 나를 수 없으니, 마땅히 선박(船舶)을 갖추어 군량을 수송하여야 합니다. 수(隋)나라 말엽에 검남(劒南)은 유독 도둑의 무리가 없고 요동의 역사에 또 참여하지 않아 그 백성이 부요(富饒)하니, 마땅히 그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제가 그대로 따랐다.
가을 7월
○좌령좌우부 장사(左領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劒南道)에 보내어 나무를 베어서 선박을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 길이가 백척이고 너비는 길이에 반이었다. 그리고 별도로 사신을 보내어 수도(水道)로 가는데, 무협(巫峽)에서 강양(江陽)에 이르러 내주(萊州)로 나아가게 하였다.
○당나라 설만철(薛萬徹) 등이 바다를 건너 압록수(鴨綠水)로 들어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에 이르러 군영에 머무니, 성주(城主) 소부손(所夫孫)이 보기(步騎)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그를 막았다. 설만철이 우위 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裵行方)을 보내어 보졸(步卒)과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들자 고구려 군사가 무너지므로 배행방 등이 진군(進軍)하여 포위하였는데, 박작성은 산을 의지하여 험준하게 설치하고 압록수(鴨綠水)로 가로막혀 견고하므로 공격하여도 빼앗지 못하였다. 고구려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烏骨)·안지(安地)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인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여 양진(兩陣)으로 나누어 배치하자, 설만철도 군사를 나누어 그와 맞서니 고구려 군사가 무너졌다. 제가 또 내주 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裕)에게 조칙을 내려 양식과 기계를 운반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저장하게 하고, 장차 크게 거사(擧事)하려 하였다.
겨울
○신라의 사신 한질허(邯帙許)가 당나라에 가니, 제가 어사(御史)에게 칙유하여 묻기를,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별도로 연호를 일컫고 있는가?” 하니, 한질허가 대답하기를, “천조(天朝)에서 일찍이 정삭(正朔)을 반포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先祖) 법흥왕(法興王) 때부터 사사로이 연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대조(大朝)에서 명(命)이 있었다면 소국(小國)이 또 어찌 감히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하니,

제가 그렇겠다고 여겼다.
○신라주(新羅主)가 김유신을 보내어 백제를 쳤다. 처음에 김유신이 양주(梁州)에 있으면서 수개월 동안 술을 마시고 음악을 울리며 군려(軍旅)에 뜻이 없는 것같이 하니, 고을 사람들이 비방하여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편안하여 남은 힘이 있어서 한번 싸워볼 만한데, 장군이 세월만 보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므로, 김유신이 백성들을 쓸 수 있음을 알고 여주(女主)에게 고하여 백제를 쳐서 대야성(大耶城)의 전역(戰役)을 갚겠다고 하매, 여주가 말하기를,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건드렸다가 위태롭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군사의 승부는 많고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떠한가를 살펴볼 뿐입니다. 때문에 주왕(紂王)에게는 억조(億兆)의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에서 떠나고 덕에서 떠나게 되어, 주(周)나라에서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같이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는 10인이 있었던 것만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무리가 한마음으로 사생을 같이할 수 있으니, 백제는 족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여주가 그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대야성 밖으로 진군하니, 백제의 군사가 맞아 싸웠는데, 김유신이 거짓 패하여 옥문곡(玉門谷)에 이르자, 백제가 얕보아 크게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해 오므로, 잠복했다 일어나 엄습해 공격하니, 앞뒤로 크게 무너져 비장(裨將) 8인을 사로잡고 1천 인을 참수하였다. 김유신이 사람을 시켜 백제 장군에게 고하기를, “우리 군주(軍主) 품석(品釋)과 그 아내인 김씨의 백골이 그대 나라 감옥 안에 묻혔는데, 지금 그대의 비장 8인이 우리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자 포복(匍匐)하여 명을 청하므로, 나는 그들이 고향을 생각하는 뜻을 애처롭게 여겨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 죽은 시체를 보내 주고 산 사람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는데, 백제 좌평(佐平) 중상(仲常)이 왕에게 말하기를, “죽은 백골을 머물러 두는 것은 이익이 없습니다. 만약 신라에서 신용을 잃는다면 잘못은 그쪽에 있습니다.” 하니, 곧 품석 부처(夫妻)의 백골을 궤짝에 담아 돌려보내므로, 김유신도 8인을 돌려보내도록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세(勝勢)를 타서 백제의 경내로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2만여 급을 참수하고 9천 인을 생포하였으며, 또 진례(進禮) 등 9성을 도륙(屠戮)하여 9천여 급을 참수하고 6백 인을 사로잡았다. 여주가 공을 논하여 김유신에게 직질(職秩) 이찬(伊飡)을 더하고 상주행군 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

○신라주가 이찬(伊飡) 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文汪)을 보내어 당나라에 갔는데, 제(帝)가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맞아 위로하였다. 이미 이르자 김춘추의 의표(儀表)가 대단히 뛰어남을 보고 그를 후하게 대우하였다. 김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과 강론(講論)하는 것을 관람하려고 청하니, 제가 그를 허락하고, 인하여 어제(御製)한 온탕(溫湯) 및 진사(晉祠) 두 비문(碑文)과 아울러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주었으며, 또 사사로이 불러 보고 금백(金帛)을 특별히 후하게 주면서 묻기를, “경(卿)은 소회(所懷)가 있는가?” 하니, 김춘추가 아뢰기를, “폐국(弊國)이 궁벽하게 바다 모퉁이에 있으면서 천조(天朝)를 섬겨 온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나, 백제가 강포하고 교활하여 누차 함부로 침략하여 오더니, 지난해에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깊이 들어와 수 십 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조근(朝覲)의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천위(天威)를 빌려 주어 흉역(凶逆)을 제거하시지 않는다면, 폐읍(弊邑)에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먼 길을 와서 술직(述職)하기는 다시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제가 깊이 그렇겠다고 여겼다. 또 묻기를, “듣건대 그대 나라에 김유신이란 사람이 있다고 하니,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김유신이 비록 약간 재지(才智)는 있으나, 만약 천위(天威)를 빌려 주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이웃의 환란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제가 말하기를, “진실로 군자(君子)의 나라이다.” 하고, 이에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칙명을 내려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征伐)하게 하였다. 김춘추가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니, 이에 궁내에서 진귀한 의복을 내어다 김춘추와 그 시종자에게 주었으며, 조서를 내려 김춘추에게 벼슬을 제수하여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은 좌무위장(左武衛將)으로 삼았다. 김춘추가 장차 돌아가려 하니, 3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명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특별한 예우가 몹시 갖추어졌다. 김춘추가 아뢰기를, “신이 아들 일곱을 두었으니, 원컨대 아들 하나를 머물러 두어 숙위(宿衛)에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곧 문왕을 머물러 두고 돌아갔다. 김춘추가 해상(海上)에 이르러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는데, 종자(從者) 온군해(溫君解)가 고관(高冠)과 대의(大衣) 차림으로 배 위에 앉아 있으니, 순라병이 김춘추로 여기어 죽이므로, 김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가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여주가 온군해를 가상히 여겨 대아찬(大阿飡)을 추증(追贈)하고

그 자손에게 상을 넉넉히 주었다. 김춘추가 김유신을 보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기 때문에 살아돌아와서 다시 공(公)과 더불어 서로 보게 되었다.” 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유신은 나라의 위령(威靈)을 믿고 다시 백제와 더불어 싸워서 20개의 성을 빼앗고 3만여 인을 참획(斬獲)하였으며, 또 품석(品釋) 부처(夫妻)의 백골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 또한 천행입니다.” 하였다.
서기 649년, 신라 진덕여왕 3년, 고구려 보장왕 8년, 백제 의자왕 9년
중국연호 당나라 태종 정관 23년
봄 정월
○신라에서 처음으로 중국 제도를 따라서 관복(冠服)을 만들었다.
여름 4월
○제(帝)가 붕(崩)하였다. 유조(遺詔)로 요동(遼東)의 전역(戰役)을 파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처음 태종(太宗)이 요동(遼東)에서 전쟁할 때에 간하는 자가 하나뿐만 아니었고, 또 안시성(安市城)에서 회군(回軍)한 뒤로부터 스스로 능히 성공시키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며 탄식하기를, ‘만약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러한 행군을 있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그 장차 다시 치려고 할 때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은 표문(表文)을 올려 간하기를,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위명(威名)과 공덕(功德)이 이미 만족하다 이를 만하니, 국토를 개척하는 일을 또한 멈출 만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매양 한 중죄수(重罪囚)를 처결하는데도 반드시 삼복(三覆)·오주(五奏)케 하며, 소선(素膳)을 올리고 음악(音樂)을 멈추게 하는 것은 인명을 소중히 여긴 것인데, 지금 무죄한 사졸(士卒)을 몰아다가 창칼 아래 맡기어 간뇌(肝腦)로 땅을 바르도록하는 일을 유독 민망하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지난번에는 고구려가 신절(臣節)을 잃게 되었으니 토주(討誅)하여도 옳았고, 백성을 침요(侵擾)하였으니 멸하여도 옳았으며, 다른 날 중국(中國)의 우환이 되게 하였으니 제지하여도 옳았지만, 지금은 이 세 가지 조건이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 전대(前代)를 위하여 설치(雪恥)하고 밖으로 신라를 위하여 복수(復讐)를 한다면, 어찌 보존될 것은 작고 손실될 것은 크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자신(自新)할 것을 허락하셔서 능파(凌波)의 배를 불태우고 응모(應募)의 군중을 파하게 되면, 자연히 화이(華夷)가 기뻐하고 의뢰하여 먼 곳은 삼가고 가까운 곳은 편안할 것입니다.’ 하였다. 양공(梁公, 방현령)이 죽으려고 할 때의 말한 것이 이와 같이 충성스러웠는데도 제가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구허(丘墟)로 만들려고만 생각하여 스스로 죽음을 통쾌하게 여기고서야 그만두었다. 사론(史論)에 이르기를, ‘큰 것을 좋아하고 공로를 기뻐하여 먼 곳에서 군사를 괴롭게 하였다.’ 한 것이 이를 이른 것이 아니겠으며, 유공권(柳公權)의 소설(小說)에 이르기를, ‘주필산(駐蹕山)의 전역(戰役)에서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군사를 합쳐 바야흐로 40리에 뻗치니, 태종(太宗)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육군(六軍)이 고구려의 승리하는 바가 되어 자못 장차 부진(不振)하게 되자, 척후(斥候)가 「영공(英公)의 휘하 흑기(黑旗)가 포위되었다.」고 고하였다.’ 하였다. 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비록 마침내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나긴 하였으나 위구(危懼)함이 이와 같았는데도 《신구당서(新舊唐書)》와 사마공(司馬公)의 《통감(通鑑)》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어찌 나라를 위하여 그를 은휘(隱諱)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가을 8월
○백제에서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보내어 정병(精兵)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7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대장군 김유신(金庾信)과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막게 하니, 삼군(三軍)을 나누어 5도(道)로 만들어 공격하였는데, 서로가 이겼다 졌다 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극심하게 싸워서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 드디어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주둔하여 말을 쉬게 하고 군사를 먹일 때에 물새가 동쪽에서 날아와 김유신의 군막(軍幕)을 지나자, 장사들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므로, 김유신이 말하기를, “이는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오늘 반드시 백제 사람이 와서 정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라.” 하고, 또 군중(軍中)에 순회하게 하며 이르기를, “성벽(城壁)을 굳건히 하여 동요하지 말고 내일 원군(援軍)이 이르기를 기다린 뒤에야 결전(決戰)하자.” 하니, 첩자(諜者)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알리니, 은상 등이 가세할 군사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 의심하며 두려워하였다. 이에 김유신 등이 분발해 공격하여 크게 이겼는데, 장군 정중(正仲)을 사로잡고, 은상 및 장사 10인과

군졸 8천 9백 80인을 베었으며, 말 1만 필을 노획하고, 병기(兵器)는 이루 기록할 수 없었다. 좌평(佐平) 정복(正福)이 그 무리와 더불어 항복하였는데, 김유신이 모두 놓아 보냈다. 승리하여 돌아오니, 주(主)가 맞이하여 위로하기를 몹시 후하게 하였다.
서기 650년, 신라 진덕여왕 4년, 고구려 보장왕 9년, 백제 의자왕 10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 원년
여름 6월
○신라주가 김법민(金法敏)을 보내어 당나라에 가서 백제를 격파하였다고 고하고, 주가 또 스스로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무늬를 짜 넣어서 바쳤다. 그 사(辭)에 이르기를,
大唐開洪業 “대당(大唐)이 큰 왕업(王業)을 여니,
巍巍皇猷昌 높고 높은 황제의 계책이 창성하였네.
止戈戎衣定 전쟁을 멈추고 안정시켜서,
修文繼百王 문덕(文德)을 닦아 백왕(百王)을 이었도다.
統天崇雨施 높은 은택을 베풀어 천하를 통어하였고,
理物體含章 마음속에 아름다움을 품고 만물을 다스리네.
深仁諧日用 깊은 인덕(仁德)은 날로 쓰임에 화합하고,
撫運邁時康 순환하는 운수는 태평 성대로 나아가네.
幡旗何赫赫 기치(旗幟)는 어찌 그리 혁혁(赫赫)하며,
鉦鼓何鍠鍠 징과 북소리는 어찌 그리 굉굉(鍠鍠)한고?
外夷違命者 명(命)을 어긴 외이(外夷)들은,
剪覆被天殃 제거되어 하늘의 재앙을 받네.
淳風凝幽顯 순박한 풍속이 어두운 데나 밝은 데에 응결하니,
遐邇競呈祥 먼 곳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드리도다.
四時和玉燭 사시의 기후가 고르고 화창하며,
七曜巡萬方 칠요(七曜, 일월(日月)과 오성(五星))는 만방을 돌고 있네.
維嶽降宰輔 높은 사악(四嶽)에서 재보(宰輔)를 내리매,
維帝任忠良 황제께서 충량(忠良)한 신하 임용하셨네.
五三成一德 오제(五帝)·삼왕(三王)이 순수한 덕 이루어,
昭我唐家皇 우리 당나라 황실을 밝게 하였도다.”
하였는데, 제(帝)가 가상하게 여기어 김법민을 예우하여 대부경(大府卿)으로 삼아서 돌려보냈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시행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삼대(三代) 때에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대에 와서 연호를 일컫는 것은 모두 크게 통일하여 백성의 이목을 새롭게 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시기를 틈타 아울러 일어나 양쪽에서 대립하여 천하를 다툰다거나, 무릇 간웅(姦雄)이 틈을 타서 일어나 왕위를 엿보지 않았다면, 사사로이 연호를 시행할 수 없다. 신라가 한마음으로 중국을 섬기어 사신의 항해(航海)와 공물의 바구니가 서로 길에 잇따랐는데도 법흥왕(法興王)이 스스로 연호를 일컬었으니, 의혹된 일이다. 그 후에도 잘못을 답습하여 해를 지내 온 지 이미 오래이다. 태종(太宗)의 꾸짖음을 들었으나 오히려 그대로 따르다가 이때에 이르러서야 당나라의 연호를 봉행(奉行)하였으니,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고 하겠으나 또한 잘못을 저지르고서 능히 고쳤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서기 651년, 신라 진덕여왕 5년, 고구려 보장왕 10년, 백제 의자왕 11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영휘 2년
봄 정월
○초하루에 신라주가 조원전(朝元殿)에 임어(臨御)하여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으니, 하정(賀正)의 예가 이에서 비롯되었다.
봄 2월
○신라에서 품주(稟主)를 고쳐 집사부(執事部)로 삼고, 인하여 파진찬(波珍飡) 죽지(竹旨)를 집사부 중시(中侍)로 삼아 기밀(機密)을 관장하게 하였다.
○신라에서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을 보내어 당나라에 가서 그대로 머물면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김인문은 김춘추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나아가 배워 여러 책을 널리 읽고 겸하여 노·장(老莊)과 불교의 설(說)을 섭렵(涉獵)하였으며, 예서(隸書)를 잘 쓰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며 음률(音律)을 깨우쳐 지식과 도량이 원대하였다. 이에 이르러 제가 이르기를, “바다를 건너 내조(來朝)하니, 충성이 참으로 가상하다.” 하고 특별히 좌령군위 장군(左領軍衛將軍)을 제수하였는데, 나이 23세였다.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조빙하였다. 사신이 돌아가매, 제가 새서(璽書)를 내리어 주(主)에게 효유하기를, “해동(海東)의 세 나라는 터를 잡은 지 세월이 오래 되었으나 모두 벌려 있는 경계는 지역이 실로 견아(犬牙)처럼 되어 있다. 근대(近代)에 오면서 마침내 혐의스러운 불화를 만들어 서로가 전쟁을 일으키어 대체로 편안한 해가 없어서, 드디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도마에 걸고서 무기나 찾아내어 함부로 격분하며 조석(朝夕)으로 서로가 싸움만 하니, 짐은 하늘을 대신하고 사물을 다스리매 곧 몹시 애달프게 생각하는 일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아울러 와서 입조(入朝)하므로, 짐은 이러한 원수를 풀고 다시 친목을 돈독히 할 것을 명하였는데,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아뢰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순치(脣齒)처럼 서로 의지하여 다투어 군사를 일으켜서 함께 침략해 오므로, 대성(大城)과 중진(重鎭)이 모두 백제가 차지하게 되어 강토는 날로 위축되고 위력은 아울러 시들고 있으니,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탈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타취(打取)하되,

다만 옛 땅을 찾고 곧 교화(交和)를 청하겠습니다.’ 하였으니, 짐은 그가 말할 것이 순리이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땅을 나누어 가진 제후(諸侯)이면서도 오히려 망국(亡國)을 보존하였는데, 더구나 짐은 만승(萬乘)의 군주로서 어찌 위태로운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겠는가? 왕이 겸유한 신라의 성(城)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本國)으로 돌려주고 신라가 획득한 백제의 포로는 또한 왕에게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뒤에야 우환과 분쟁이 해소되고 전쟁이 중지되어 백성은 안식(安息)의 소원을 얻게 되고 삼번(三蕃)은 전쟁의 노고가 없게 될 것이니, 무릇 변경(邊境)에서 피를 흘리고 강토에 시체가 쌓여서 농사짓고 길쌈하는 일을 모두 폐하여 남녀가 의뢰할 곳이 없게 되는 것과 비교하건대, 어찌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지휘에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김법민이 청한 바에 의하여 그가 왕과 더불어 결전(決戰)하도록 맡겨 둘 것이며, 또한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휼(救恤)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명을 받들지 않으면 곧 거란(契丹)의 여러 번국으로 하여금 요수를 건너 깊이 들어가 침략하게 할 것이니, 왕은 짐의 말한 것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고 좋은 계책을 살펴서 도모하여 후회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서기 654년, 신라 진덕여왕 8·태종왕(太宗王) 원년, 고구려 보장왕 13년, 백제 의자왕 14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영휘 5년
봄 3월
○신라주(新羅主) 승만(勝曼)이 훙(薨)하니, 시호는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 여러 신하들이 이찬(伊飡) 알천(閼川)으로 섭정(攝政)할 것을 청하니, 알천이 굳이 사양하기를, “노부(老夫)는 일컬을 말한 덕망이 없고, 지금의 덕망으로는 김춘추(金春秋)만한 이가 없다.” 하니, 여러 신하가 드디어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 김춘추가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였는데, 김춘추는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다.
○당(唐)나라에서 신라주가 훙하였다는 것을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거애(擧哀)하고,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시켜 절(節)을 가지고 조제(弔祭)하게 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追贈)하고 채단(綵段) 3백 필을 주었다.
여름 4월
○신라왕이 고위(考位)를 추존하여 문흥 대왕(文興大王)으로 삼고 비위(妣位)는 문정 태후(文貞太后)로 삼았으며, 죄인을 대사(大赦)하였다.
○고구려에 어떤 신(神)이

마령산(馬嶺山)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의 군신(君臣)이 사치하여 법도가 없으니,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이다.” 하였다.
여름 5월
○신라에서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참작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을 만들게 하였는데, 60여 조(條)였다.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신라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삼았다. 조서(詔書)가 이르자 해독하기 어려운 곳이 있었는데, 우두(牛頭)란 자가 있어 능히 해독하므로, 왕이 깜짝 놀라 기뻐하여 그의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臣)은 본래 임나(任那) 가량(加良) 사람으로, 우두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卿)의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强首)라 일컬을 만하다.” 하고, 사표(謝表)를 짓게 하였는데, 글이 공교하면서 뜻이 곡진하므로, 왕은 더욱 그를 기이하게 여겨 임생(任生)이라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강수는 생업에 힘쓰지 않아 집이 몹시 가난하므로,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의 조(租) 1백 석을 내려 주었다.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당나라에 가서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장수 안고(安固)를 보내어 말갈(靺鞨)의 군사와 더불어 거란(契丹)을 치게 하였는데, 송막 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그를 막아 고구려 군사를 신성(新城)에서 대패(大敗)시켰다.
서기 655년, 신라 태종왕 2년, 고구려 보장왕 14년, 백제 의자왕 15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영휘 6년
봄
○고구려에서 백제·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경(北境)을 침범해서 33성(城)을 취하니,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원병을 요구하였다.
봄 2월
○백제에서 태자궁(太子宮)을 수리하였는데, 몹시 사치하고 화려하였으며, 망해정(望海亭)을 왕궁(王宮) 남쪽에 세웠다.
봄 3월
○당나라에서 영주 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군사를 징발하여 고구려를 쳤다.
○신라왕이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서자(庶子)인 문왕(文汪)은 이찬(伊飡)으로 삼았으며, 노단(老旦)은 해찬(海飡)으로 삼고, 인태(仁泰)는 각찬(角飡)으로 삼았으며, 지경(知鏡)·개원(愷元)은 모두 이찬으로 삼았다.
여름 5월
○정명진 등이

요수(遼水)를 건너매, 고구려 사람들이 그들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湍水)를 건너 맞아 싸웠는데, 정명진 등이 분격(奮擊)하여 크게 이겼다. 1천여 인을 참살 노획하였으며 그 외곽(外廓)과 촌락(村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가을 7월
○백제에서 마천성(馬川城)을 수축하였다.
가을 9월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이때에 백제의 임금과 신하가 사치하고 음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으므로, 백성이 원망하고 귀신이 분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자주 나타났다. 김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백제가 무도하여 죄가 걸·주(桀紂)보다 지나치니, 이는 진실로 천명에 순응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죄진 사람을 칠 때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급찬(級飡) 조미곤(租未坤)이 부산 현령(夫山縣令)이 되었다가 백제에 포로가 되어 좌평(佐平) 임자(任子)의 집에 종이 되었는데, 일을 함에 있어 정성을 다하여 게으른 모습이 없으니, 임자가 그를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였으므로, 조미곤이 도망하여 돌아오매, 김유신은 그가 쓸 만한 것을 알고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임자가 백제의 일을 전담한다고 하는데, 더불어 일을 도모할 생각을 하나 그런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으니, 그대는 어찌하여 가서 말해 주지 않겠는가?” 하자, 조미곤이 말하기를, “공(公)이 불초(不肖)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시키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겠습니다.” 하고, 백제로 돌아가 임자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지난날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사실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김유신이 그의 뜻을 집사(執事)에게 전달하게 하며 이르기를, ‘두 나라의 존망(存亡)은 먼저 알 수 없는 일이나, 만약 그쪽 나라가 망하게 되면 그대는 우리에게 의지하고, 이쪽 나라가 망하게 되면 우리는 그대에게 의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자는 묵묵히 있었다. 두어 달이 지나서 임자가 조미곤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전에 한 말을 이미 잘 알았으니, 김유신에게 돌아가 알리라.” 하므로, 조미곤이 드디어 돌아가 백제의 일을 몹시 상세하게 말하였다. 이에 병탄(幷呑)의 꾀는 더욱 급속하였다.
○신라의 김흠운(金歆運)이 백제와 더불어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고구려와 백제가 침노하여 토벌을 꾀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드디어 군사를 출동시켜 김흠운을 낭당 대감(郞幢大監)으로 삼았는데, 김흠운이 행군하여 백제의 양산(陽山) 아래 주둔하고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백제 사람들이

밤을 이용하여 와서 엄습하고 동이 틀 무렵에는 보루를 따라 들어오므로, 신라의 군사가 놀라서 안정되지 못하였다. 백제의 군사가 혼란을 인하여 급히 공격하니, 날아드는 화살은 비오듯이 모아졌다. 김흠운이 말 위에서 비스듬히 창을 잡고 적을 대기하고 있었는데,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말하기를, “이제 적이 어두운 속에서 일어나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으니, 비록 죽어도 아는 자가 없을 것이오. 더구나 공(公)은 왕의 총애하는 사위요 나라의 귀골(貴骨)인데, 만약 적의 손에 죽게 되면, 적(敵)은 다행으로 여길 것이요 우리로서는 수치가 되는 바입니다.” 하니, 김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자신을 나라에 허락하고서 어찌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는 것을 따지어 마음을 바꾼단 말인가?” 하고, 꿋꿋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종자(從者)가 말의 고삐를 당기며 피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김흠운은 칼을 휘두르며 드디어 적진에 돌입하여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이에 태감(太監)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도 또한 모두 전사하였다. 보기 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가 김흠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그는 귀골로 형세가 영화로운데도 오히려 죽음을 아끼지 않았는데, 나와 같은 자야 살아도 유익함이 없고 죽어도 또한 무엇이 손해되겠는가?” 하며, 또 적진에 나아가 죽었다. 왕이 애도하며 김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一吉飡)을,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내마(大柰麻)를 추증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그들을 슬퍼하였다. 김흠운은 내물왕(奈勿王)의 8세손으로 젊어서 화랑(花郞) 문노(文努)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였는데, 무리 중에서 전사하여 이름을 남긴 자에 대한 언급이 있으면 김흠운은 그를 위해 슬프게 여겨 눈물을 흘리며 격려하여 그와 같이할 것을 생각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동문(同門)의 중[僧]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런 사람이 만약 적진에 나아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취도(驟徒)란 자가 있어 일찍이 중이 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불(佛)이란 첫째는 술업(術業)을 정통해서 본성(本性)을 회복하고, 다음으로 도용(道用)을 일으켜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 하였는데, 나는 불문(佛門)에 있으면서 하나도 취할 만한 착한 점이 없으니, 종군(從軍)하여 몸을 바쳐서 나라에 보답하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고, 곧 군복을 입고 취도라 이름을 고치고는 병부(兵部)에 나아가 종군하기를 청하여 싸움하기에 미쳐 돌진(突陣)하여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계로(季路)가 공자(孔子)에게 ‘삼군(三軍)을 부리신다면 누구와 더불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이르기를, ‘맨손으로 범을 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자는 내가 더불지 않겠으며,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꾀하기를 좋아하여 성사시키는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자로(子路)의 재질로 인하여 알린 것이겠으나, 그러나 실은 군사를 부리는 요도(要道)이다. 그 중과(衆寡)를 헤아리지 않고 그 허실(虛實)을 살피지 않으며, 그 형세를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적의 손에 죽는다면, 무엇이 일에 유익하겠는가? 내 몸을 죽여서 적(敵)을 이길 수 있다면 죽는 것이 옳을 것이고, 내 몸을 살려서 다만 나라를 욕되게 한다면 죽는 것이 옳겠으나,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내 몸을 가벼이 해서 적의 마음을 쾌하게 하겠는가? 김흠운이 전지(詮知)의 말을 듣지 않고 경솔하게 적의 손에 죽었으니, 어찌 뜻은 장렬하나 모사(謀事)에 부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기고 패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통상적인 일이다. 자신이 죽어서 패하는 데에 구제됨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지 않고 뒷날에 공효(功效)를 도모하는 것만 하겠는가?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려고 하는 자와 비한다면 차이가 있다.”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삼국(三國)이 솥발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졌을 때를 당하여 신라가 나라를 형성함에 있어 군사가 고구려나 백제만 못하고, 토지가 고구려나 백제만 못하며, 형세가 고구려나 백제만 못하였는데, 마침내 두 나라가 먼저 망하고 신라가 유독 존재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인심과 세도(世道)의 순후(淳厚)함으로써 이루게 된 것입니다. 대저 신라의 풍속은 충신(忠信)을 숭상하고 절의(節義)를 높여서, 싸움에 임하여 전진하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삼고 후퇴해서 사는 것을 치욕으로 삼았으니, 이에 그 일컬을 만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능히 미칠 바가 못되는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진(秦)나라 풍속에 대하여 논하기를, ‘옹주(雍州)는 토질과 수세가 후하고 깊어서 그 백성들이 중후(重厚)하고 솔직하여 정(鄭)나라와 위(衛)나라처럼 교만 나태하고 허황된 사치의 습성이 없기 때문에

기개(氣槪)를 숭상하고 용력(勇力)을 앞세우며 사는 것을 잊고 죽는 것을 가볍게 여겼으니, 그 강하고 굳세며 과감한 자질이 족히 부강(富强)한 업적을 이룬 것으로서 산동(山東)의 여러 나라가 미칠 바가 아니었다.’고 하였으니, 신라의 순후한 풍속이 그 또한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옹주의 지역은 문무(文武)로 임용하여 이남(二南, 주남(周南)·소남(召南))의 교화를 일으켰으니, 신라로 하여금 만약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임금이 있어 진작하고 창도하였다면, ‘노(魯)나라를 변하여 도(道)에 이르게 한다.’는 기회가 여기에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애석하게도 신라의 정치는 신라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것입니까?”
○신라왕이 딸을 대각찬(大角飡)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27 (정암 서당) | 작성자 jaseo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