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문무왕 6년, 고구려 보장왕 25년, 병인년(丙寅年), 666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건봉(乾封) 원년
여름 4월
○신라 영묘사(靈廟寺)에 화재가 났다.
○신라에서 내마(奈麻)인 한림(漢林)과 삼광(三光)을 당나라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였는데, 한림은 천존(天存)의 아들이고 삼광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니, 청병(請兵)하여 고구려를 멸하려고 짐짓 그들을 보낸 것이다. 제(帝)는 삼광을 좌무위익부중부장(左武衛翊府中部將)으로 삼았다.
○고구려 왕이 태자 복남(福男)을 당나라에 보내어 태산(泰山)에 시사(侍祀)하게 하였다.
○신라에서 김인문(金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어 가 태산에 시사하게 하였는데, 제가 우효위 대장군 식읍 4백호(右驍衛大將軍食邑四百戶)로 높여 제수하였다.

○고구려의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죽으니, 아들 남생(男生)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처음에 남생이 9세(歲)에 음직(蔭職)으로 중리 소형(中裏小兄)에 보임(補任)되었는데, 당나라의 알자(謁者)와 같았다. 중리 대형(中裏大兄)으로 옮기자, 국정(國政)에 참여하여 모든 사령(辭令)을 전부 주관하였다. (그 후) 중리 위두 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승진되었고, 천개소문이 죽게 되자, 남생이 대신 막리지 겸 삼군 대장군(莫離支兼三軍大將軍)이 되고, 대막리지(大莫離支)로 높여졌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와 더불어 고사를 논하며 말하기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征伐)하였으나 어찌하여 이기지 못하였는가?’ 하니, 왕개보가 대답하기를, ‘천개소문이 비상(非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천개소문은 또한 재사(才士)인 것이다. 그러나 능히 곧은 도리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혹하고 포악하며 스스로 방자하여, 대역(大逆)에 이르렀던 것이다. 《춘추(春秋)》에,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적(賊)을 토벌하지 않으면 그를 일러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천개소문이 모름지기 목숨을 보존하여 집에서 죽게 된 것은, 요행으로 모면한 것이라 하겠다. 남생과 헌성(獻誠)이 비록 당나라 종실에서는 소문이 나 있었으나, 본국(本國, 고구려)으로 말한다면 반역자가 됨을 면할 수 없다.” 하였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치려고 천개소문의 시역(弑逆)의 죄를 성토(聲討)하니, 천개소문이 천자의 사신을 가두어 업신여기고 거만하여 불공(不恭)하였습니다. 그 죄악은 천하 고금에 없던 것으로, 비록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모두 흉역(凶逆)임을 알고 침을 뱉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은, 신종(神宗)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것은 천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까? 이와 같은 난적(亂賊)의 괴수(魁首)를 비상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천하 고금에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누구인들 비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왕안석은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한 데다가, 학술(學術) 또한 바르지 못하였습니다. 《춘추(春秋)》는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이니, 난신 적자를 주토(誅討)하는 의리가 더욱 엄격하였는데도,

왕안석은 단란조보(斷爛朝報): 여러 조각이 난 조정(朝廷)의 기록이란 뜻. 왕안석(王安石)이 《춘추(春秋)》를 헐뜯은 말임.)라고 이르면서,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하지 못하도록 청하였으니, 대체로 《춘추》의 (난신 적자를) 주토한다는 뜻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이 논의(論議)되고, 인주(人主)에게 고한 내용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은 우리 동방(東方)에 명사(名士)이니, 천개소문의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죄에 대하여 상세히 알았을 것인데, 왕안석의 잘못된 말에 동의하여, ‘재사(才士)’라고까지 한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그 또한 남의 신하가 되어 《춘추》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이에 분변하여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구려 남건(男建)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고, 남생(男生)은 국내성(國內城)에 웅거하였다가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이에 앞서 남생이 여러 부(部)에 나가 안찰(按察)하면서, 그의 아우 남건(男建)·남산(男產)으로 하여금, 그 곳에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는데, 혹자가 두 아우에게 이르기를, ‘남생은 그대들이 핍박할 것을 미워하여, 장차 그대들을 제거하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먼저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하고, 또 남생에게 고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두 아우는 형이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에게 항거하려고 한다.’ 하였다. 남생이 몰래 사람을 보내 정탐(偵探)하게 하였는데, 남건 등이 그를 체포하고 왕명(王命)을 거짓 꾸며 남생을 부르니, 남생은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남건은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가지고는, 군사를 징발하여 남생을 토벌하였다.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을 지키면서 거란[契丹]·말갈(靺鞨)과 결탁하여,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내응(內應)해 주기를 구하니, 제(帝)가 헌성에게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을 배수(拜授)하고, 승여(乘輿)·승마(乘馬)·서금(瑞錦)·보도(寶刀)를 하사하여 돌려보냈으며, 이어 좌효위 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명하여, 군사로 호응하게 하였다.
가을 9월
○당나라에서 남생에게 특진요동도독 겸평양도 행군대총관 지절 안무대사 현도군공(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行軍大摠管持節安撫大使玄菟郡公)을 제수하니, 남생이 가물(哥勿)·남소(南蘇)·창암(倉巖) 등의 성(城)을 가지고 항복하여 귀부하였다. 제는 또 서대 사인(西臺舍人) 이건역(李虔繹)에게 명하여 군중에 나아가 위로하고 포대(袍帶)와 금구(金釦) 칠사(七事)를 하사하였다.

겨울 12월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는데,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사열소상(司列少常) 백안륙(伯安陸)과 학처준(郝處俊)을 부관으로 삼고, 방동선(龐同善)과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아울러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서, 그 수륙(水陸) 제군(諸軍)을 총관하게 하였다. 아울러 전량사(轉粮使) 두의적(竇義積)·독고경운(獨孤卿雲)·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처분을 받게 하고, 하북(河北) 여러 주(州)의 조부(租賦)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용(軍用)에 수급(需給)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의 귀신(貴臣) 연정토(淵淨土)가 종관(從官) 24인을 거느리고 12성(城)의 7백 63호(戶) 3천 5백 43구(口)와 함께 신라에 투항하니, 신라에서 의량(衣粮)과 전택(田宅)을 주어 중외(中外)에 나누어 배치하고, 그 12성(城)에는 아울러 사졸(士卒)을 파견하여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신라 문무왕 7년, 고구려 보장왕 26년, 정묘년(丁卯年), 667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건봉 2년
가을 7월
○제(帝)가 신라에 칙령(勅令)하여 지경(智鏡)·개원(愷元)·일원(日原)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遼東)으로 나아가게 하니, 왕은 곧 지경을 파진찬(波珍飡)으로, 개원을 대아찬(大阿飡)으로, 일원을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삼았다. 제는 유인원(劉仁願)·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로 따라 나가고, 신라는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도(道)로 따라 나가 평양에 모여서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적(李勣)이 처음 요수를 건너올 때,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신성(新城)은 고구려 서쪽 변경(邊境)의 요해처(要害處)로서, 먼저 얻지 못하면 나머지의 성들을 쉽게 취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이를 공격하였는데, 성인(城人)이 성주(城主)를 포박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16성(城)이 모두 항복하였다. 방동선(龐同善)과 고간(高侃)은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천남건(泉男建)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기습하니, 좌무위 장군(左武衛將軍) 설인귀(薛仁貴)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고간이 진군하여 금산(金山)에 이르러 고구려와 더불어 싸우다 패하자, 고구려는 승리의 기세를 타고 북쪽으로 쫓아갔는데, 설인귀가 군사를 유인해 측면을 공격하여

5만여 인을 사살하고, 남소(南蘇)·목저(木氐)·창암(蒼巖) 세 성을 빼앗은 후에, 천남생과 합세하였다. 곽대봉(郭待封)은 수군(水軍)으로서 다른 길로 평양에 나아갔는데,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憑師本)을 보내어 군량과 군기를 실어다 보급하게 하였다. 풍사본의 배가 파손되어 기일을 어기자, 곽대봉의 군중(軍中)은 굶주리고 군색하였다. (곽대봉이) 글을 지어 이적에게 보내려고 하였으나, 다른 곳에서 그의 허실(虛實)을 알아챌까 두려워서, 곧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적에게 보냈다. 이적이 노하여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바야흐로 급박한데, 어찌하여 시를 지어 보내는가? 참하고야 말겠다.” 하니, 행군관기 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해석해 주자, 이적은 이에 군량과 병기를 다시 보내주었다. 원만경이 격문(檄文)을 지어 이르기를, “압록(鴨綠)의 험악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 하니, 천남건(泉男建)이 회보(回報) 하기를, “삼가 명령을 듣겠습니다.” 하고, 곧 군사를 옮겨 압록진(鴨綠津)에 웅거하니, 당나라의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제(帝)가 이를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에 귀양보냈다. 학처준(郝處俊)은 안시성(安市城) 아래 있으면서 군사의 대열을 미처 갖추지도 못했는데, 고구려의 군사 3만이 갑자기 다가옴으로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으나, 학처준은 호상(胡床)에 의지하여 바야흐로 마른 밥을 먹고는, 정예군을 뽑아 그들을 격퇴시켰다.
가을 8월
○신라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주(漢城州)로 나아가 이적을 기다리니, 이적은 평양성(平壤城) 북쪽에 도착, 글을 보내어 군사들을 그 곳에 와서 감독하게 하였다. 왕은 그 말에 따라 장세(獐塞)에 이르렀다가, 이적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곧 돌아왔다.
겨울 12월
○당나라에서, 유진 장군(留鎭將軍)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신라왕과 합동으로 고구려를 치게 하고, 이어 왕에게 대장군 정절(旌節)을 하사하였다.
신라 문무왕 8년, 고구려 보장왕 27년, 무진년(戊辰年), 668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총장(摠章) 원년
봄 정월
○이적(李勣)이 군사를 거느리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 부대총관(遼東道副大摠管)으로 삼고, 학처준(郝處俊)·김인문(金仁問)을 부관(副官)으로 삼았으며, 김인문으로 하여금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봄 2월
○이적 등이 고구려의 부여성(扶餘城)을 빼앗았다. 이에 앞서

설인귀(薛仁貴)가 이미 고구려 군사를 금산(金山)에서 격파하고, 승세(勝勢)를 몰아 3천 인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공격하려고 하니, 모든 장수들이 군사가 적다고 만류하였다. 설인귀가 말하기를, “군사는 꼭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렸다.” 하고, 드디어 선봉(先鋒)으로 나아가, 고구려와 싸워서 이기고 드디어 부여성을 빼앗으니, 부여천(扶餘川) 가운데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시어사(侍御使) 가언충(賈言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요동에서 돌아오니, 제가 군중(軍中)의 사정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옛날 선제(先帝, 당나라 태종)께서, (고구려에) 문죄(問罪)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은, 그들에게 틈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속언(俗諺)에 이르기를, ‘군(軍)에 길잡이가 없으면 중도(中道)에서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지금 천남생(泉南生)의 형제가 서로 다투어 우리를 인도하고 있고, 그들의 실정과 허위를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장수는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껏 싸우니, 신은 그러므로 꼭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고구려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9백 년이 못되어 마땅히 80세의 대장이 그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고씨(高氏)가 한(漢)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지금 9백 년이고, 이적의 나이가 80이며, 오랑캐는 연이어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약탈하고, 땅을 파느라 형편이 흔들리고 분열되었으며,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오고, 두더지는 문에 구멍을 내며, 인심이 위태롭고 해괴하니, 이러한 원정은 다시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천남건(泉男建)이, 다시 군사 5만 인을 보내어, 부여성을 구원하려 하였으나,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조우하여, 서로 싸우다가 패하니, 죽은 자가 3만여 인이었다. 이적은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進擊)하였다.
○신라에서 사신을 파견, 미녀(美女)들을 당나라에 바치니, 제가 받지 않고 곧 미녀를 바치지 말라고 칙령(勅令)하였다.
여름 4월
○혜성(彗星)이 필수(畢宿)와 묘수(昻宿)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 허경종(許敬宗)이 말하기를, “혜성이 동북(東北)에 나타났으니,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조짐이다.”고 하였다.
여름 6월
○요동행군 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인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가 칙명을 받들고, 숙위 사찬(宿衛沙飡) 김삼광(金三光)과 더불어 당항진(党項津, 화성군(華城郡) 남양면(南陽面))에 도착하니, 신라왕이 김인문(金仁問)을 시켜 예를 갖추고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유인궤가 약속을 마친 후에

천강(泉岡)으로 향하자, 왕이 드디어 부(部)를 나누어, 28 총관(摠管)을 임명하였다.
○부성(府城)의 유인원(劉仁願)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大谷)·한성(漢城) 등 2군(郡)과 12성(城)이 귀순하였다고 통고하니, 왕이 일길찬(一吉飡) 진공(眞功)을 보내어 하례하였다.
가을 7월
○신라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주(漢城州)에 유숙하면서,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당나라의 고구려 토벌을 도왔다. 김유신은 병으로 머물러 있게 하고, 김흠순(金欽純)·김인문(金仁問)을 장수로 삼으니, 김흠순이 왕에게 고하기를, “만약 김유신이 (함께) 가지 않는다면, 아마 후회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등(卿等)은 모두 나라의 보배이다. 만약 함께 가서 만에 하나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그때 나라의 일은 어찌 되겠는가? 김유신을 머물러 둘 것 같으면, 은연(隱然)중 나라의 장성(長城)이 될 것이니, 내가 시름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아우이고, 김인문(金仁問)은 김유신의 생질인데,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저희들은 모두 재목이 되지 못하는데, 지금 대왕의 말씀을 따라 장래를 예측하지 못할 위험한 곳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가르침을 듣고자 합니다.” 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무릇 장수란 나라의 간성(干城)이요 임금의 조아(爪牙)로서, 시석(矢石)의 사이[矢石之間, 전쟁터를 이름]에서 승부를 결단하려면, 반드시 위로는 천도(天道)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얻으며, 가운데로는 인심(人心)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성과 믿음[忠信]으로 보존할 수 있으나, 백제는 오만(傲慢)으로 망하였고, 고구려는 교만으로 위태롭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정직함으로 저들의 굽음을 치는데, 어찌 이기지 못함을 근심할 것인가? 더구나 밝으신 천자의 위엄을 의지해서 지극히 불인(不仁)한 것을 치는 데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가을 9월
○당나라 군사가, 신라의 군사와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고구려왕 고장(高臧)이 항복하였으며, 당나라 장수 이적이 그를 잡아 돌아감으로 고구려는 망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이적이 이미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킨 후, 제도(諸道)의 군사가 모두 모여 압록책(鴨綠栅)까지 진군하여 도착하자, 고구려가 항전하였는데, 이적이 이들을 격파하고 2백여 리를 추격하여,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이 서로 잇따라 항복하였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에 이르자

이적의 군사가 잇따라 도착하였으며, 김인문 등은 이적을 만나 영류산(嬰留山) 아래로 진군(進軍)하였다. 문영(文穎)은 사천원(蛇川原)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그들과 싸워서 크게 패배시켰다. 여러 총관(摠管)의 군사가 모두 모여서, 드디어 당나라 군사와 함께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한 지 한 달이 넘자, 고구려왕은, 천남산(泉男產)을 보내어, 수령(首領) 98인을 인솔해서, 흰 기를 세워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게 하였다. 이적은 예로써 그들을 접대하였다. 그러나 남건(男建)은, 오히려 성을 굳게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 나가 싸우게 하였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은 군사의 일을 중[浮圖] 신성(信誠)에게 맡기었는데, 신성은 은밀히 첩자(諜者)를 보내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한 지 5일 뒤에, 닫힌 성문을 열어 놓았다. 이적이 군사를 풀어놓아,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들어가서 그 성문에 불을 지르게 하니, 불꽃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남건은 다급하고 궁지에 몰린 끝에 자신을 칼로 찔렀으나, 목숨이 끊기지 않았다. 이적이, 고장(高藏)과 아들 복남(福男)·덕남(德男)과 대신(大臣) 남건 등 20여 만의 군중을 붙잡아 경사(京師)로 돌아가니, 신라의 김인문 등도 그들을 따라갔다. 남생(男生)은 평양을 공격하는 데 참여하였다 하여, 제(帝)가 그 아들을 요수(遼水)에 보내어 직접 위로하게 하고, 경사에 집을 마련해 주었다. 유인원은 이적과 모이자는 기일을 넘겼다 하여, 소환(召還)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나, 사면하여 요주(姚州)로 귀양보냈다.
시조(始祖) 동명왕(東明王)이 한(漢)나라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년(甲申年, 서기전 37년 동명왕 원년)에, 졸본부여(卒本扶餘)에 도읍하면서부터 국호(國號)를 고구려라 하였다. 유리왕(琉璃王) 계해년(癸亥年, 3년 유리왕 22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기고, 산상왕(山上王) 기축년(己丑年, 209년 산상왕 13년)에 환도(丸都)로 도읍을 옮겼으며, 동천왕(東川王) 정미년(丁未年, 227년 동천왕 원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국원왕(故國原王) 신축년(辛丑年, 341년 고국원왕 11년)에 다시 환도에 도읍하였다가, 계묘년(癸卯年, 343년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長壽王) 정묘년(丁卯年, 427년 장수왕 15년)에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고, 평원왕(平原王) 병오년(丙午年, 586년 평원왕 28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보장왕(寶臧王) 무진년(戊辰年 668년 보장왕 27년) 당(唐)나라 고종(高宗) 총장(摠章) 원년에 망하였으니, 28왕을 합하여 모두 7백 5년이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현도(玄菟)·낙랑(樂浪)은 본래 조선(朝鮮)의 땅으로 기자(箕子)에게 봉하였던 곳이다. 기자는 그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밭에는 잠농(蠶農)으로 길쌈하게 하며, 금법(禁法) 8조(條)를 설시하였다. 이러하므로 그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아니하여 문호(門戶)를 닫는 일이 없었고, 부인(婦人)은 정절과 신조로 음란하지 않았으며, 음식은 변두(籩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인현(仁賢)의 교화이다. 그리고 또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삼방(三方)과는 다르기 때문에, 공자(孔子)가,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면서, 바다에 뗏목을 타고 와서 살려고 한 것도,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역(周易)》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까워서이다. 고구려는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로부터 중국(中國) 동북쪽 모퉁에 끼어 있었다. 그 인근 지역은 모두 천자(天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던 지역으로서, 어지러운 세상이면 영웅이 특별히 일어나 명위(名位)를 참람하게 도둑질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다구(多懼)지역에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겸손한 뜻이 없어서 그 봉장(封場)을 침략하여 원수가 되고, 그 군현(郡縣)에 들어가 살게 되었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병화(兵禍)가 연속되어 대체로 편안한 해[歲]가 없었다. 그들이 동천(東遷)하게 되어서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가 통일된 때와 서로 만났는데도, 오히려 조명(詔命)을 거절하여 불순하게 굴고, 왕사(王使)를 토실(土室)에 가두었으니, 그 완고함과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때문에 누차 문죄(問罪)하는 군사를 불러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간혹 가다가는, 기계(奇計)를 베풀어 대군(大軍)을 함몰시킬 때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뒤에야 멈추게 되었다. 그러나 시말(始末)을 살펴본다면, 그들이 상하가 화합하고 중서(衆庶)가 돈목할 때에는 아무리 대국(大國)이라도 능히 취하지 못하였는데, 그들이 나라에 의롭지 못하고 백성에게 인애(仁愛)하지 못하여, 대중의 원망이 일어나게 되자, 붕괴되어 스스로 떨치지 못하였다. 때문에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천시(天時)와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하였고, 좌씨(左氏)는 말하기를, ‘나라가 흥(興)함은 복(福)으로써 되고, 나라가 망(亡)함은 화(禍)로써 되는 것이다.

나라가 흥할 때는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와 같이 하니 이는 나라의 복이요,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토개(土芥)와 같이 여기니 이는 나라의 화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야말로 의미가 있다 하겠다. 무릇 그러하다면, 대체로 국가를 가진 자가, 함부로 폭리(暴吏)로 (백성들을) 구박(驅迫)하고 강종(强宗, 세력 있는 종족)으로 (백성들을) 취렴(聚斂)하여, 인심을 잃게 된다면, 아무리 다스려서 혼란하지 않게 하고, 보존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하더라도, 또한 억지로 술을 마시면서, 술에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땅으로 뒤에 기자(箕子)에게 봉한 바가 되어, 기자가 백성을 예의로써 가르치고 금법(禁法) 8조를 설시하여, 그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며 부인(婦人)은 정조와 신의로써 음란하지 않고, 음식(飮食)에는 변두(籩豆)를 사용하였으니, 공자(孔子)가 이곳에 살려고 한 것이 어찌 인현(仁賢)의 교화 때문만이겠는가? 시조(始祖) 주몽(朱蒙)이 졸본(卒本)에서 왕이라 칭하고 도읍을 세움으로부터, 세월이 지난 것이 8백에 이르렀는데, 그 말세(末世)에 이르러 사치함이 한도가 없고 교화가 능이(陵夷)하여 진작되지 않아서, 권신(權臣)들이 국명(國命)을 잡게 되자, 과감히 시해(弑害)를 행하고 마음대로 그 임금을 두었으며, 게다가 교린(交隣)에 있어 도의로써 하지 못하고 서로가 침벌(侵伐)하였으며, 또 하늘을 두려워하여 큰 나라를 섬기지 못하고 중국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군사가 재차 동원하여 토벌하게 되었으니, 군신(君臣)이 생포되고 종사(宗社)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 것이 어찌 스스로 취한 일이 아니겠는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국정을 담당하여, 비록 (그가) 극히 사나웠다고는 하나, 정사가 한 사람에서 나와 마음이 분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뛰어나고 칙량할 수 없는 무덕(武德)으로도 오히려 능히 뜻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게 되자, 두 아들이 권력을 다투어 골육(骨肉)이 서로 도모하고 대중의 마음이 갈라져, 공격하고 수비하는 데 계책이 없게 되었으므로, 81세의 장수가 그들을 멸하게 되었으니, 또한 소국(小國)을 보호하는 자의 영원한 귀감이 될 만하다.” 하였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당(唐)나라 문황(文皇)은, 뛰어난 무덕(武德)으로 천하를 평정하여, 이밀(李密)을 항복시키고 두건덕(竇建德)을 공격하였고, 왕세충(王世充)을 사로잡고 유무주(劉武周)를 베었으며, 유흑달(劉黑闥)을 제거하고 소선(蕭銑)을 멸망시켜, 함하(函夏, 중국을 일컬음)를 통일함에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었으니, 뇌정(雷霆)의 아래에 누가 두려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고구려 하나를 정벌함에 있어서는, (제(帝)가)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렸고, 장손 무기(長孫無忌)와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세적(李世勣)·설만철(薛萬徹)이 모두 한 때의 명장(名將)으로 책략에 빈틈이 없었으나, 안시성(安市城)의 전역(戰役)에서 거의 군사를 잃게 되었습니다. 문황은 깊이 스스로를 뉘우치고 애석하게 생각하여, 장차 다시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고종(高宗)은 보통 재질의 군주로, 학처준(郝處俊)·유인궤(劉仁軌)·설인귀(薛仁貴)는 그 장수의 재능이, 어찌 장손무기·도종·설만철보다도 나았겠으며, 비록 이세적의 나이가 거의 80이라고 하나, 그 무략(武略)이 어찌, 안시성에서는 모자랐다가 오늘에는 뛰어남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고종이 고구려를 멸함에 성공이 어찌 쉬웠겠습니까? 신(臣)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소적(小敵)의 견고함에 대적(大敵)이 사로잡힌 격이니, 안시성의 전역에서 분명한 것은, 이미 오늘이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황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에는, 연개소문이 비록 한없이 흉악하였다고는 하나, 나라에 큰 흔단(釁端)이 없었고, 안시성주(安市城主) 또한 비상한 사람으로, 성을 견고히 하여 굳게 지키면서 죽기를 기약을 하니, 싸움을 걸 수도 없게 되고 성을 공격해도 항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문황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천개소문은 죄역(罪逆)이 천지에 가득하였으니, 하늘이 장차 그 악함을 막고 벌(罰)을 내렸어야 할 것인데도, 다행히 집안에서 늙어 죽었으나, 천남생(泉男生)의 형제는 시기심 많고 사나워서, 집안끼리 싸움을 하고 상국(上國)에는 교묘하게 꾸며대어, 천하의 군사를 동원케 하니, 신라 또한 대대로 원수로 지냈으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돕고 따랐던 것입니다. 이에 고종이 죄를 성토하며 토벌함은, 명분이 서 있는 군사로서 망해 가는 나라를 더욱 망하게 한 격이 되었으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하나 되었겠습니까?

논자는 말하기를, ‘고종은 다행하게도 승리하고 태종(太宗)은 불행히도 승리하지 못하였으니, 곧 시세(時勢)가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국가 흥망(興亡)에 운수가 있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시조(始祖)는 영웅(英雄)의 자질로, 금와(金蛙)의 여러 아들에게 미움을 당하자,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러 우거진 숲을 헤치고 나라를 세워, 새로 제도를 마련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위엄과 덕망이 날로 융성하여 돌아와 붙좇는 이가 또한 많았으며, 송양(松讓)을 항복받고 말갈(靺鞨)을 물리쳤으며, 행인(荇人)을 취하고 옥저(沃沮)를 멸망시켜서, 한 지방에 웅거하여 삼한(三韓)을 호시탐탐 날카롭게 노려보았으니, 어찌하여 이렇게도 쉽게 성공을 할 수 있습니까?
유리(瑜璃)는 유복자(遺腹者)로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그가 승습(承襲)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다행이 왕위를 이어서 선비(鮮卑)를 항복 받고 양맥(梁貊)을 멸하였으며, 나라를 개척하여 점차 넓히어 나갔으나, 작은 죄에 분개하여 두 신하를 베고, 용맹스러운 것을 미워하여 태자(太子)를 죽였으니, 이는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대무(大武)는, 총명하고 굳세어서 괴유(怪由)를 미천(微賤)한 데에서 발탁하고, 두지(豆智)에게 군국(軍國)을 위임하였으며, 구도(仇都)는 탐욕스럽고 비루하였기 때문에 배척을 당하였고, 발소(勃素)는 지능(智能)이 있기 때문에 포상되었으며, 개마(蓋馬)를 정벌하고 낙랑(樂浪)을 멸망시키자, 부여(扶餘)는 달아나 숨어 스스로 피하고, 구다(句茶)는 위엄을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니, 나라를 넓게 개척함에 나라의 형세가 더욱 번창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부인(夫人)의 참소를 믿어 호동(好童)과 같은 어진 아들이 있었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밝히지 못하고 죽게 하였으니, 그가 일을 처리한 것을 더듬어 보면,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부류라 하겠습니다.
민중(閔中)은 상(喪)을 당하여서도, 연회를 즐기고 사냥하는 데 빠졌으며,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고, 모본(慕本)은 사납고 어질지 못하여, 간하는 신하를 해치고 죽였으니, 그가 좋게 죽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태조(太祖)는 나라를 향유한 지 90여 년에, 늙고 혼미하여 정사에 게을러지자, 후사를 부탁함에 사람을 제대로 임용하지 못하였으므로, 화가 충신과 사랑하는 아들에게 미쳤으니, 아무리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강하게 한 공훈이 있었다 하더라도, 무엇을 족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차대(次大)는 총애받던 아우로서, 왕위를 엿보아 온 지 여러 해였는데, 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는 데도 마음을 고치지 않고

주살(誅殺)을 자행(恣行)하였으니, 천도(天道)는 되돌려 주기를 좋아하므로, 그에게 화가 미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대(新大)는 난을 피하여 도망나갔으나, 나라 사람들이 마음이 쏠려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세웠으니, 의당 답부(答夫)가 시역(弑逆)한 죄상을 먼저 밝혀서, 대의(大義)를 폈어야 할 것인데, 자기를 끌어다 세워준 공을 덕으로 생각하여, 도리어 그를 총애하여 임용하였습니다.
고국천(故國川)은 영명(英明)한 자질로서, 무언가 해보려는 뜻을 분발하여, 권세를 가진 간신을 죽이고 유일(遺逸)로 있는 인재를 찾아내었으며, 초택(草澤)에서 을파소(乙巴素)를 초빙하여, 국상(國相)으로 발탁해 임용하여 정성을 다해 국사를 위임시키고, 또 인재를 천거한 자에게 상을 주었으니, 진실로 쇠퇴한 세상에서 없었던 성대한 일이었으나, 후사(後嗣)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죽은 시체가 식기도 전에 우비(于妃)가 음란한 추행으로 궁방(宮房)을 어지럽혔던 것입니다.
산상(山上)은 우비와 간음(姦淫)하여 나라를 얻었으니, 천륜(天倫)을 어지럽힌 데 대하여 언급해야 하겠지만, 말하기조차 추잡한 일입니다.
동천(東川)은 천성이 관인(寬仁)하여 임금의 도량이 있었으나, 충신의 간함에 성을 내었으며, 상국(上國)을 침범해서 갑자기 승리하자 곧바로 교만하더니, 한번 패하게 되자 자신이 도망가는 신세를 낭패하여, 망국(亡國)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은 어찌된 일입니까?
중천(中川)은 비록 일컬을 만한 덕은 없으나, 능히 총희(寵姬)의 무고(誣告)를 분변하여 의심치 않고 죽였으니, 어찌 그리 용단이 있었습니까?
서천(西川)은 숙신(肅愼)을 방어하고 단노성(檀盧城)을 빼앗자, 여러 부락이 두려워하였는데, 만년에는 시기함으로 인해 동기(同氣)를 죽였습니다.
봉상(峰上)은 사납고 강퍅함이 더욱 심하여, 숙부와 아우를 죽였으며, 간하는 말에 성을 내고 스스로 방자하여 궁실을 높이고 담장을 조각하였으니, 백성들이 학정(虐政)에 시달리고 마침내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쳤으며, 미천(美川)은 일찍이 황야(荒野)로 달아나 어려운 일을 골고루 겪었으므로, 의당 지혜로운 덕망과 술책이 있었을 것인데도, 일컬을 만한 덕이 없고 한갓 상국(上國)을 침범하는 것으로서 일을 삼았습니다.
고국원(故國原)은 모용씨(慕容氏)의 변란을 당하여 패해 도망가 숨고, 어머니와 아내는 사로잡혀갔으며, 아버지의 시체 또한 발굴되고, 성곽(城郭)과 궁실(宮室)은 불에 타 거의 없어졌으며, 늙은이·어린이, 진귀한 보물들을 빠짐없이 약탈해갔으므로, 사직(社稷)을 거의 보존할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무릎을 꿇고 신(臣)이라 청하고 볼모를 바치며 조공을 보냈으니,

이는 의당 와신상담(臥薪嘗膽)할 때인데도, 도리어 자신의 원수는 잊고 자신의 가까운 이웃을 씹어대어, 백제와 흔단을 만들어 적봉(敵鋒)에 피를 묻히게 하였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소수림(小獸林)은 태학(大學)을 세워 자제(子弟)를 가르쳐서 무엇인가 일을 해보려는 것 같았으나,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에 의혹되어 동진(東秦)의 중을 맞이하고, 사찰을 세워서 부처 받드는 데 더욱 마음을 썼으니, 동한(東韓)에서 부처에 아부하는 처음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고국양(故國孃)은 강한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중국(中國)을 소요스럽게 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졌는데도, 오히려 또 부처를 섬기고 복을 구하였으나, 복은 얻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으니 의혹된 일입니다.
광개토(廣開土)는 웅장하고 위대하고 기이한 재주가 있어, 능히 싸우면 이기고 치면 취하였으며, 장수(長壽)는 더욱 오랜 수명을 누리어 나라와 군사가 부강(富强)하였습니다.
문자(文咨)·안장(安藏)·안원(安原)은 모두 중재(中材)로서 평범한 군주였으며, 양원(陽原)은 무략(武略)이 굳세지 못하여 나라의 형편이 날로 위축되었고, 평원(平原)은 한재(旱災)를 만나 걱정하여, 쓸데없는 경비는 정지시키고 급하지 않은 업무는 제쳐놓았으며,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궁핍한 자를 진휼(賑恤)하였으니, 훌륭한 점이 있었습니다.
영양(嬰陽)은 처음 즉위(卽位)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할 뜻을 두었으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는 의리를 알지 못하여, 말갈(靺鞨)과 작당하여 상국(上國)을 침략하였으며,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함에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으니, 의당 순리를 본받아 죄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바야흐로 또 신라를 치고 백제를 침범하여 병화(兵禍)를 좋아하였으므로, 다시 수나라 양제(煬帝)의 토죄(討罪)를 빚게 한 것이며, 백만 대군이 요갈(遼碣)을 지나 살수(薩水)를 건너와서, 소혈(巢穴)을 공격해 전복시키는 것이 목전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응변(應變)과 양현감(楊玄減)의 반란이 없었더라면,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영류(營留)는 어리석고 나약하여, 적신(賊臣)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시역(弑逆)의 마음을 가졌으나, 능히 조기에 분변하지 못하여 견빙(堅氷)의 화를 이르게 하였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치밀하지 못하여 화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보장(寶藏)은, 연개소문이 왕위에 세운 바 되어 권세가 신하에게로 옮겨지고,

정령(政令)이 임금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으니, 나라는 모두 연개소문의 나라이고 백성도 모두 연개소문의 백성으로, 모든 일을 마음대로 자행하여 한없이 흉악하였으며, 제(帝)의 조서(詔書)를 어기고 사신을 가두므로 죄역(罪逆)이 가득하였습니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노(怒)하여 친히 6사(六師, 천자(天子)의 군대를 말함)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는데, 아무리 주필(駐蹕)의 전역(戰役)이라도 뜻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고, 고구려의 나라 형편도 또한 위태로워졌으니, 이는 비록 연개소문의 죄악이라고 하나 또한 보장이 임금답지 못한 소치였습니다. 그 후 태종은 유감이 풀리지 않아, 자주 해마다 장수를 명하여 나가 토벌하게 하고, 장차 재차 거병(擧兵)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군신(君臣)이 협력하여 나라의 보존을 도모할 때인데도, 임금은 위에서 어둡고 신하는 아래에서 포악하여 사치는 한도가 없었으므로, 나라의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갔던 것이며, 연개소문의 여러 아들은 제각각 서로 다투어, 심지어는 중국(中國)에 호소하여 향도(鄕導)가 되었으니, 아무리 고종(高宗)이 보통 재질의 군주라 하더라도, 하나의 늙은 장수를 보내어 일거(一擧)에 섬멸하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여, 고씨(高氏) 7백년의 종사(宗社)가 하루 아침에 폐허가 되었으니, 슬픈 일입니다.”
신라에서 김유신(金庾信)을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으로 삼아 특별한 예로 높이고, 김인문(金仁問)을 대각간(大角干)으로 삼았다. 신라왕은 평양이 이미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회합하려고 힐차양(肹次壤)까지 갔으나, 당나라 군사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漢城)에 이르러,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옛날 백제왕 명농(明禯)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자,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金武力)이 그를 맞아 싸워서 왕과 대신(大臣) 4명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부친 김서현(金舒玄)은 양주 총관(良州摠管)이 되어, 백제와 여러 번 싸워서 그들의 예기(銳氣)를 꺾어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 김유신은 조부와 부친의 업적을 이어받아 사직(社稷)의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공적이 매우 컸으므로, 지금 특별한 예로 상을 주려고 한다.” 하고, 이에 태대서발한이란 직함을 설치하여 그를 제수하고,

직위는 대각간의 위[上]에 두었으며, 식읍(食邑) 5백 호에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여, 궁전에 오를 적에도 종종걸음으로 빨리 걷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김인문에게는 대각간을 제수하고 식읍 5백 호를 하사하였으며, 그 나머지 장수들에게는 상을 논함에 차등을 두었다.
겨울 10월
○이적(李勣)이 경사(京師)에 조회하고 고구려의 포로를 바쳤다. 이적이 장차 이르려 함에, 제가 명하여 먼저 고장(高臧) 등을 소릉(昭陵, 당태종의 능)에 바치되, 군용(軍容)을 갖추어 개가(凱歌)를 연주하면서 경사로 들어와 태묘(太廟)에 바치게 하고, 제는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받았다.
겨울 11월
○신라왕이 한성주(漢城州)로부터 신료(臣僚)를 거느리고 와서 고구려 포로 7천 명으로 조묘(祖廟)에 고하기를,
“삼가 선왕의 뜻을 받들어 대당(大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백제와 고구려의 죄상을 문책하였으며, 원흉(元凶)이 죄를 자복하여 나라의 형편이 안정되었으므로 감히 밝히어 고합니다.”
하고, 드디어 나라를 위해 죽은 자에게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
○당나라에서 평양(平壤)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를 도호(都護)로 삼았다. 고구려 왕 고장(高臧)에게는 정사가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면(赦免)하여, 사평태상백 원외동정(司平太常伯員外同正)으로 삼았으며, 천남산(泉男產)을 사재 소경(司宰少敬)으로 삼고, 중 신성(信誠)을 은청 광록대부(銀靑光碌大夫)로 삼고, 천남생(泉男生)을 우위 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았다. 남생(男生)은 순후하고 예가 있으며, 주대(奏對)에 변론이 민첩하였는데, 뒤에 변국공(卞國公)으로 졸(卒)하였다. 남건(男建)은 검주(黔州)로 유배보냈다. 오부(五部) 1백 76성(城)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백 현(縣)으로 삼고, 도호부를 두어 통괄하게 하였으며, 고구려의 장수로 공이 있는 자를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삼고 중국 사람과 함께 다스리게 하였으며, 우위위 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 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 (삼아)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고, 겸하여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또한 김유신에게 글을 보내 포장(褒奬)하고, 또 김인문(金仁問)에게 작위(爵位)를 더하여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신라의 영묘사(靈廟寺)에 화재가 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30 (정암 서당) | 작성자 jaseo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