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동국통감

동국통감 31

문장대 2025. 12. 2. 22:24

동국통감 권9 신라기(東國通鑑 卷9 新羅紀)

문무왕 (文武王)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장자(長子)이다. 모(母)는 문명 왕후(文明王后)로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이다. 자질과 외표가 영특하고 총명하였으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재위(在位)한 지 무릇 20년이었는데, 통일된 뒤는 11년이다.

신라 문무왕 9년, 기사년(己巳年), 669년, 중국연호 당(唐)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2년

봄 정월

○중 신혜(信惠)를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으로 삼았다.

○제(帝)가 중 법안(法安)을 보내어 와서 자석(磁石)을 구하였다.

봄 2월

○죄수를 사면하고 하교하기를, “지난날 국가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북쪽에서 정벌하고 서쪽에서 침략하여 잠시도 편안한 해가 없었으며, 전사(戰士)의 백골이 들판에 쌓였었다. 선왕(先王)께서 백성의 잔해(殘害)를 민망히 여기어 바다를 건너가 청병(請兵)한 것은, 본디 두 나라를 평정하여 누대(累代)의 깊은 치욕을 씻고 백성의 쇠잔한 목숨을 보전하려 한 것인데, 백제는 비록 평정되었으나 고구려는 멸망시키지 못하였었다. 과인(寡人)이 능히 선왕의 뜻을 받들어 이미 두 적(敵)을 평정하여 사방이 안정되었으므로, 출전하여 공을 세운 자에게는 모두 이미 상을 주었으나, 다만 감옥에 갇힌 자의 고충을 생각건대,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정책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으니, 나라 안의 죄인은 죄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다 방면하여 사면하는 것이 옳겠으며, 가난한 백성이 남의 미곡(米穀)을 빌려 간 자는 풍년을 기다려 갚되 단지 그 원곡(元穀)만 돌려주고, 흉작으로 더욱 곤궁한 자에게는 이자와 원곡을 모두 면제하라.” 하였다.

○고구려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그의 무리 4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투항(投降)하였다.

여름 4월

○당나라에서 고구려의 3만 8천 3백 호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경서(京西) 여러 주(州)의 광활한 땅으로 옮기고, 그 중 빈약(貧弱)한 자는 그대로 머물게 하여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급찬(級飡) 지진산(祗珍山) 등을 보내어

당나라에 가 자석(磁石)을 바치게 하였다.

○제가 노하여 왕이 백제의 토지(土地)와 인민(人民)을 마음대로 차지하였다고 책망하니, 왕이 각간(角干) 김흠순(金欽純)과 파진찬(波珍飡) 김양도(金良圖)를 보내어 사죄(謝罪)하게 하였다.

겨울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노사(弩師, 쇠뇌를 쏘는 데 능숙한 사람)를 징소(徵召)하므로, 왕이 노사 구진산(仇珍山)을 보내어 사신과 함께 (당나라) 조정에 나아갔다. 제가 목노(木弩)를 만들어 쏘아보라고 명하였는데, 30보(步)를 지나지 못하자, 제가 구진산에게 묻기를, “듣건대 너의 나라에 있으면서 만든 쇠뇌는 천보(千步)에까지 쏘았다는데, 지금 겨우 30보였으니, 어찌된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재목이 좋지 못해서입니다. 만약 본국에서 재목을 가져온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제가 사신을 보내어 재목을 구해오게 하고, 제가 구진산에게 명하여 다시 만들어서 쏘게 하니, 60보에 이르렀다. 제가 그를 힐책하니, 대답하기를, “신 또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으나 아마도 나무가 바다를 지나오는 동안에 습기가 배어든 탓인가 합니다.” 하였다. 제는 구진산이 일부러 기술을 다하지 않는가 의심하여 죄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끝내 그 재능을 발효하지 못하였다.

신라 문무왕 10년, 경오년(庚午年), 670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함형(咸亨) 원년

봄 정월

○황제가 김흠순(金欽純)에게는 환국(還國)을 허락하고, 김양도(金良圖)는 가두어 두었는데, 옥에서 죽었다.

봄 3월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므로, 왕이 사찬(沙飡) 설조유(薛鳥儒)와 옛 고구려 장수 연무(延武)를 보내어 정병(精兵) 2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함께 싸워서 크게 이기니, 죽이고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당나라 군사가 잇달아 이르므로 우리 군사가 물러나 백성(白城)을 보호하였다.

여름 6월

○옛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劒牟岑)이 고장(高臧)의 외손 안승(安勝)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처음에 검모잠이 고구려를 다시 일으킬 계획으로, (고구려) 유민을 수합(收合)하여 패강(浿江)으로 가서, 당나라의 관인(官人)과 중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던 길에, 서해(西海)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옛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漢城)으로 맞아들여 임금으로 세우고는,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보내어 고하기를,

“우리 선왕인 신(臣) 고장은 왕도(王道)를 잃어 멸망을 당하였으나, 지금 신등이 본국(本國)의 귀족(貴族) 안승을 모시게 되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대, 번병(藩屛)이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신등이 듣건대,

멸망해 끊어진 세대(世代)를 일으켜 계승시키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義)라 하니, 오직 대국(大國)에 바랄 뿐입니다.” 하였는데, 신라왕이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있게 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구려기(高句麗紀)》에는 ‘이미 왕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4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검모잠(劒牟岑)이 국가를 다시 일으키려고 당나라를 배반하고 왕의 외손인 안순(安舜)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혹은 서자 안승이라 칭하였고, 혹은 외손 안순이라 칭하여 그 말한 것이 어긋나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신라기(新羅紀)》를 상고해 보면, ‘고구려의 검모잠이 잔민(殘民)을 수합하여 서해(西海)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신(大臣)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을 보고, 그를 모시어 임금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왕의 외손이라고 칭한 것이 이치에 가깝긴 합니다. 그러나 그 책명(冊命)하는 글에는 또 ‘선왕(先王)의 정사(正嗣)는 오직 공(公)뿐이다.’ 라고 일컬었으니, 어찌 된 것입니까? 김부식(金富軾)이 말한 것은 피차가 모순되니, 상세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帝)가 대장군 고간(高侃)을 보내어 동주도 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군사를 동원하여 안승을 치니, 안승이 검모잠(劒牟岑)을 죽이고 도망하여 왔다.

가을 7월

○왕이 장수를 보내어 백제의 여러 성을 습격하여 취하였다. 처음에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고 웅진 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주관하게 하였는데, 왕이 백제의 땅을 대부분 취하고는 도독부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니, 따르지 않고서 사마 미군(司馬彌軍)을 보내어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보았으므로, 왕이 그 꾀를 알고 미군을 머물게 하며 보내지 아니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어 백제를 토벌하였는데, 품일(品日)·문충(文忠) 등은 63성(城)을 취하였고, 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은 7성을 취하였으며, 문영(文穎) 등은 12성을 취하였다.

가을 8월

○왕이 사찬(沙飡) 김수미산(金須彌山)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책봉하여 고구려왕으로 삼고 이르기를, “공(公)의 태조(太祖)는 덕을 쌓고 공을 세워서 자손이 서로 이어왔으며,

 

천리(千里)의 땅을 개척하여 8백 년이 가까워졌는데, 남건(男建)·남산(男產) 형제에 이르러,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불화가 지친(至親) 사이에 조성되어, 국가가 멸망되고 종사(宗社)가 끊기니, 백성들은 동요하여 의탁할 마음이 없었다. 공(公)은 산과 들로 난을 피하다가 이웃 나라에 자신을 투속(投屬)하였는데, 백성은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하늘은 반드시 권명(眷命)이 있는 것이다. 선왕(先王)의 정사(正嗣)는 오직 공뿐이니, 제사를 주관할 사람은 공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삼가 김수미산 등을 보내어 공을 책명(冊命)하여 고구려왕으로 삼게 하니, 공은 마땅히 유민(遺民)을 안무(按撫)하여 모으고 옛 서업(緖業)을 이어 일으켜서, 영원한 이웃 나라가 되어 형제와 같이 섬기되 공경히 할지어다. 겸하여 갱미(粳米) 2천 석과 갑옷을 갖춘 말 1필(匹)과 능라(綾羅) 5필과 견주포(絹紬布) 각 10필과 면(綿) 15칭(稱)을 보내노라.” 하였다.

○왜(倭)가 국호(國號)를 일본(日本)이라 고치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해가 돋는 곳에 가까움으로 이로써 이름을 삼는다.”고 하였다.

신라 문무왕 11년, 신미년(辛未年), 671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함형 2년

○왕이 군사를 움직여 백제의 밭벼를 짓밟고 드디어 웅진(熊津)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幢主) 부과(夫果)가 전사하였다.

○왕이,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을 보내어 옹포(甕浦)를 지키게 하였다.

여름 6월

○흥륜사(興輪寺) 남문(南門)에 벼락이 쳤다.

○왕이 장군 죽지(竹旨)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밭벼를 짓밟고는, 드디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웠는데, 5천 3백 급(級)을 베고, 백제의 장군 2인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6인을 노획(擄獲)하였다.

가을 7월

○당나라 총관(摠管) 설인귀(薛仁貴)가 중 임윤(琳潤)을 보내어 왕에게 글을 보냈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왕(先王) 개부(開府, 태종무열왕)는 한 나라를 일으킬 계책으로 많은 성을 옮겨 다니면서 서쪽으로 백제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침구(侵寇)를 경계하여, 60의 가까운 나이로 노경(老境)에 접어들었으나, 항해(航海)의 위태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험난한 파도를 멀리 건너 와서, 중화(中華)에 마음을 기울이어, 천문(天門, 천자가 있는 대궐문)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외롭고 허약한 실정을 갖추어 진달하며 (여(麗)·제(濟)의) 침략과 소요에 대해 밝게 논하였으므로,

그 정상의 드러나는 바가 듣는 이에게 슬픔을 견딜 수 없게 하였습니다.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는 기개가 천하에 뛰어나고 정신은 우주(宇宙)에 왕성하여, 기울어지는 자를 붙들어주고 약한 자를 구해줌에 날마다 겨를이 없었습니다. 선군(先君)의 애원을 받아들이고, 요청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들여서, 경쾌한 수레와 좋은 말[輕車俊馬]이며 아름다운 옷과 좋은 약재들을 하루 사이에도 몇 번씩이나 내리며 대우함이 특별하였으며, (선군(先君)도) 또한 이미 은총을 받들어 군대의 일[軍事]을 대양(對揚)함에 서로 계합함이 물과 고기의 관계와 같고, 정의는 금석(金石)보다도 굳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수륙(水陸)에서 교전(交戰)하자, 주필(駐蹕)의 전역(戰役)에 문제(文帝, 당 태종)께서 친히 행군하여 남의 불쌍함을 위로하였던 것은 숨은 의리가 깊었던 것입니다. 성인(聖人, 중국의 황제)께서 선덕(先德)을 계응하고 왕 또한 가업(家業)을 이어받으매 전쟁을 멈추고[洗兵刷馬] 모두 함께 선왕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수 십 년 동안 중국이 피로(疲勞)하였으나 수시로 저장한 창고를 풀어놓고 마초(馬草)도 날마다 빨리 대주면서 창도(蒼島, 반도(半島))의 땅 때문에 황도(黃圖, 중화(中華))의 군사를 일으켜야 했습니다. 이제 강한 도적들이 이미 말끔히 사라졌고 원수들은 나라를 잃었으니, 마땅히 심려(心膂, 가슴과 등뼈)의 관계를 옮기지 말고 중외(中外)가 서로 돕는다면, 자연히 조상께서 후손에게 계책을 끼쳐 자손을 편안하도록 도울 것이니, 훌륭한 사가(史家)의 칭찬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께서는 멀리 천명(天命)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언(父言)을 저버리어, 천시(天時)를 함부로 업신여기고 선린(善隣)의 관계를 속여 침범하나, 지키자니 지탱할 수가 없고 나가 싸우자니 능히 대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소(大小)가 같지 않고 순역(順逆)의 차례가 어그러진 것이니, 이는 왕이 요량(料量)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임금의 명을 어기는 것은 충성치 못함이요 아버지의 마음을 배반하는 것은 효도가 아닌데, 한 몸에 두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스스로 편하겠습니까? 종횡(縱橫)의 말을 듣고 이목(耳目)의 정신을 번거롭게 하여, 고문(高門)의 터전을 소홀히 하며 귀감(鬼瞰)의 힐책을 맞아들이니, 선군(先君)의 성업(盛業)을 받들고도 다른 의도를 품는 것이 어찌 지혜라 하겠습니까? 또 고구려 안승(安勝)은 나이가 아직 어리어, 스스로의 거취(去就)에 의심을 품고 있으니, 금대(襟帶, 산하(山河)의 요충지)의 중임을 감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설인귀는, 화살에 다친 새처럼 공포를 느끼는 (안승의) 신세를 불쌍히 여겨, 차마 군사를 가하지 않고 있는데, 외부에서 구원할 것을 믿는다니, 이 무슨 잘못입니까? 황제(皇帝)의 덕택은 끝이 없고, 인자한 기풍은 멀리 미쳐서, 멀리서 이 소식을 듣고는 낙심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으시어, 이에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와서 연유를 살펴보게 하였으나, 왕은 행인(行人, 사신)을 시켜 서로 물어 보지도 않고, 고기와 술로 군사를 호궤(犒饋)하지도 않으면서,

드디어는 갑옷이나 군사를 작파(雀陂)나 강구(江口)에 숨기어 가만히 스스로 후회할 일을 만들면서 서로 의지할 기색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 고장군(高將軍, 고간(高侃) 장군)이 거느린 한기(漢騎, 한인(漢人) 기병(騎兵))와 이근행(李謹行)의 번병(蕃兵)과 오초(吳楚)의 도가(棹歌, 뱃노래. 여기서는 단순히 뱃사공을 뜻함)와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악소(惡少)들이 사면(四面)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타고 내려와서 험지에 의지하여 성수(城戍)를 쌓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에게 치명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왕께서 만일 괴로운 군사들로 노래를 부르게 한다면, 사세는 굴(屈)하여도 일시에 일이 호전될 것이니, 그 연유를 갖추어 논하여 저렇고 이러한 것을 밝게 진술하소서. 이 설인귀는 일찍이 황제를 뵙고 친히 위임을 받았으니, 상황을 아뢰게 되면 일이 반드시 밝게 소생될 것인데, 어찌하여 괴롭고 조급하게 스스로 소요에 휩싸여 있습니까? 아! 옛날에는 충신이 되었더니, 지금에는 역신(逆臣)이 되었도다. 왕은 기미(機微)를 깨달음이 깨끗하고 밝으며, 풍채(風采)가 시원스럽고 준수하므로, 유겸(流謙, 겸손을 유포(流布)한다는 뜻)의 의리로 귀결하여 순적(順迪, 도(道)에 순(順)한다는 뜻)의 마음을 가진다면, 혈식(血食, 제사(祭祀)를 뜻함)이 때에 따라 있게 될 것이고 모저(茅苴, 제후의 사직(社禝)이란 뜻)가 바뀌지 않을 것이니, 아름다움을 점쳐서 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왕의 계책일 것입니다. 지금 왕의 소속인 중 임윤(琳潤)을 보내어 글을 주어 기다렸던 한두 가지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답한 글에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정관(貞觀, 당(唐)나라 태종(太宗) 연호) 22년(648년 진덕여왕 2년)에 입조(入朝)하여, 직접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의 은칙(恩勅)을 받들었을 때에 (이르기를,) ‘짐(朕)이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매양 침략해 오는 능욕(陵辱)을 당하여, 편안한 해가 없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모두 그대 신라에 주어 영원히 편안하게 하려 한다.’ 하시었으므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은칙을 듣고서 사람마다 분발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대사(大事)가 끝나지도 않아서 문제(文帝)가 먼저 붕(崩)하시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시어 다시 전에 은혜를 계승하여 자주 자애로움을 받았으며, 형제(兄弟)와 아이들은 고관 대작[懷金拖紫]에 올라 은총의 극치가 만고에 없었으므로, 분골 쇄신(粉骨碎身)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현경(顯慶, 당나라 고종(高宗) 연호) 5년(660년 무열왕 7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 선왕의 뜻이 끝맺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시어, 지난날의 유업(遺業)을 이루려고 장수에게 명하여 정벌(征伐)함에 크게 선병(船兵)을 출발시켰으므로, 선왕께서 나이 많고 힘이 약하여 행군(行軍)을 견디지 못하였지만,

 

전에 은혜를 추모하여 억지로 경계(境界)에 이르러서 먼저 나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응접(應接)케 하였으므로, 대군(大軍)이 수륙(水陸)으로 함께 나아가 온 나라를 같이 평정하였습니다. 소 대총관(蘇大摠管, 소정방(蘇定方))이 한병(漢兵) 1만을 남겨두었고, 신라도 또한 아우인 인태(仁泰)를 파견,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熊津)을 진압하게 하였습니다. 대군(大軍)이 돌아간 뒤에 적신(賊臣) 복신(福臣)이 강서(江西)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를 모아서 부성(府城)을 포위하여 핍박할새, 먼저 외책(外柵)을 격파하여 군사 물자를 모두 빼앗고 다시 부성을 공격하여 거의 곧 함몰될 지경이었으며, 또 부성 곁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포위하여 지킴으로,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그들의 포위를 해산하는 동시에, 드디어 적의 성을 격파하고 다시 군량을 운반하여 한병(漢兵) 1만을 호문(虎吻)의 위험에서 면하게 하였습니다. 현경 6년(661년 문무왕 원년)에 이르러서는, 복신의 도당(徒黨)이 점점 많아져서 강동(江東)의 지방(地方)을 첨략하여 취하므로, 웅진에 머물고 있던 군사 1천이 가서 공격하다가, 군사가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이로부터 웅진에서 청병(請兵)이 밤낮으로 서로 잇따랐습니다. 드디어 많은 군사를 출동시켜 주류성(周留城)으로 가서 포위하매, 적(賊)은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대항해 싸워서 군사와 말이 실패하고 돌아오니, 남방(南方)의 여러 성(城)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모두 복신에게로 귀속(歸屬)하였습니다. 복신은 승전(勝戰)한 기회를 이용하여 다시 부성을 포위하고 또 웅진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단절시킴으로, 곧 건아(健兒)를 모집하여 사잇길로 가서 구원하였습니다. 6월에 이르러 선왕(先王)이 훙(薨)하고, 또 군사를 출발하여 북(北)으로 돌아오라는 칙지(勅旨)를 받들었으나, 내가 상중(喪中)에 있음으로 능히 나가지 못하였으며, 함자도 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 등이 칙령(勅令)을 받들고 와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운반해달라고 하였고, 웅진의 유총관(劉摠管)이 또한 사람을 시켜 와서, ‘부성이 외롭고 위태롭게 되었으며 길이 끊기고 군량이 다하였다.’고 갖추어 진달하므로, 드디어 유총관과 함께 옹산(瓮山)을 쳐서 빼앗고 도로를 개통하였는데, 만약 먼저 웅진으로 운송하면 칙지를 어길까 두려웠으며, 만약 오로지 평양으로 공급하면 곧 웅진에 군량이 끊길까 두려웠습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노약자를 뽑아서 웅진으로 운송하고, 정강(精强)한 자를 뽑아서 평양으로 향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 웅진으로 간 자는 길에서 눈을 만나

사람과 말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용삭(龍朔, 당나라 고종 연호) 2년(662년 문무왕 2년) 정월에 이르러, 유총관은 우리 양하도 총관(兩河道摠管)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같이 운송하게 되었는데, 눈바람이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얼어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이 잘 전달되지 않았었는데, 대군(大軍)은 이미 돌아갔으며, 우리의 군사도 또 돌아오는데 주려서 얼어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군하여 호로하(瓠瀘河)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의 군사가 추격해오므로 우리는 먼저 물을 건너서 다행히 승리하고 돌아왔으며, 웅진부성(熊津府城)에서는 자주 곡종(穀種)을 요구하므로 전후에 보낸 것이 수만여 곡(斛)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웅진에 운송하고 북으로는 평양에 공급하게 되어, 아주 작은 나라가 두 곳으로 나누어 이바지하느라니, 인력(人力)은 극도로 피폐하고 우마(牛馬)는 모두 죽었으며, 저장하였던 창고는 앉아서 뻔하게 고갈됨을 보면서도 또 유진(留鎭)하는 당나라 군사에게는 때에 맞추어 의복을 지급하였습니다. 도호(都護) 유인원(劉仁願)은 멀리서 외진 성을 지키면서 자주 백제의 침략과 포위를 당하므로, 우리가 또 군사를 보내어 포위에서 풀어 구원하였으며, 당나라 군사 1만 명이 우리에게서 입고 먹기를 지금 4년 동안 하였으니, 국가의 은택(恩澤)이 비록 다시 끝이 없다고 하겠지만, 신라에서 충성을 바친 것도 또한 족히 가엾이 여길 만합니다. 용삭 3년(663년 문무왕 3년)에 이르러서는, 총관(摠管)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 부성(府城)에 와서 구원하므로, 우리 군사도 또한 출발하여 같이 주류성 밑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에 왜인(倭人)들이 백제를 와서 도왔는데, 병선(兵船) 1천 척은 백사(白沙)에 정박하였고, 백제의 정예 기병(騎兵)은 언덕 위에 둔진(屯陣)하였으므로, 우리가 날랜 기병으로 먼저 언덕 위의 진영을 격파하니, 주류성에서는 용기를 잃고 드디어 곧 항복하였습니다.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회군(回軍)하여 북쪽을 쳤으나, 임존(任存) 한 성은 미혹에 집착하여 항복하지 아니하므로, 우리 군사가 돌아오려고 하였었는데, 두대부(杜大夫)가 칙령(勅令)을 받들고 백제와 더불어 함께 회맹(會盟)하라고 하므로, 나는 이르기를, ‘백제는 간사하여 온갖 방법으로 이랬다 저랬다하니, 지금 아무리 함께 회맹한다 하더라도 뒤에는 아마 후회가 있을 것이다.’ 하고, 회맹을 정지하도록 주청(奏請)하였습니다. 인덕(麟德, 당나라 고종 연호) 원년(664년 문무왕 4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엄한 칙령이 내렸으므로, 회맹하는 일이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나 감히 칙령을 어길 수 없어서, 이에 취리산(就利山)에 단(壇)을 쌓고, 치사(勅使) 유인원을 대하여 삽혈(歃血)로써

서로 맹세하고 산하(山河)로써 서로 서약하여, 경계를 긋고 봉표(封標)를 세워 영원히 경계를 삼았습니다. 건봉(乾封, 당나라 고종 연호) 2년(667년 문무왕 7년)에 이르러서는, 대총관(大摠管)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요동(遼東)을 친다는 것을 듣고, 내가 한산주(漢山州)로 가서 군사를 보내어 경계에서 모이게 하였는데, 제일 먼저 정탐하는 사람을 보내어 형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돌아와 말하기를, ‘대군(大軍)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므로, 우선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며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성이 함락되려 할 때 영국공의 사자(使者) 강심(江深)이 와서 이르기를, ‘대총관(大摠管)의 처분을 받들건대, 신라의 병마(兵馬)는 모름지기 성(城)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일찍 평양으로 나가 곧 병량(兵粮)을 공급하라.’ 한다고 하므로, 부회(赴會)하기로 전령(傳令)하고, 행군하여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러 (소식을) 들으니,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 하므로 우리도 또한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건봉 3년(668년 문무왕 8년)에 이르러서는 태감(太監) 김보가(金寶嘉)를 보내어 바닷길로 들어가 영국공에게 품(稟)한 결과, 우리도 와서 평양에 모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5월에 이르러서는 유 우상(劉右相, 유인궤(劉仁軌))이 와서, 잇따라 병마(兵馬)를 출동하여 같이 평양으로 나가자 하므로, 나도 또한 한성주(漢城州)로 가서 병마(兵馬)를 점검하였습니다. 이때에 번·한(蕃漢, 거란[契丹]과 당나라)의 여러 군사가 사수(蛇水)에 모두 모이매, 남건(男建)이 군사를 내어 한 번 결전(決戰)하려고 하므로, 우리의 군사가 홀로 선봉(先鋒)이 되어 먼저 대진(大陣)을 격파하니, 평양성 안은 예봉(銳鋒)이 꺾이고 기세가 위축되었으며, 영국공이 다시 우리나라의 날랜 기병 5백 인을 데리고 먼저 성문(城門)으로 들어가, 드디어 평양을 격파하고 능히 대공(大功)을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병사(兵士)는 모두 이르기를, ‘정벌(征伐)한 지 이미 9년을 지나 인력(人力)이 다하였으나 두 나라의 평정이 오늘에서야 이루어졌으니, 반드시 의당 나라로서는 진충(盡忠)의 은혜를 입고, 사람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국공은 곧 우리 군사가 전에 군기(軍期)를 잃었다고 이르면서, 그가 조정에 들어가서는 도리어 우리 군사가 공이 없었다고 말하였으며, 또 비열성(卑列城)은 본시 우리나라의 땅으로 고구려에 함락된 지 30여 년만에 이제 도로 이 성을 얻어 관리(官吏)를 두어 지키게 하였던 것인데, 또 이 성을 고구려에 돌려주었습니다. 무릇 우리나라가 백제를 평정함으로부터 고구려를 평정하기까지 충성과 힘을 다하여 당나라 조정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무슨 까닭으로 하루아침에 거절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총장(總章, 당나라 고종 연호) 원년(668년 문무왕 8년)에 이르러서는, 백제가 맹약(盟約)을 어기어 국경을 넘어와서 침범하고, 또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당나라 조정에서 전함(戰艦)을 수리하여 밖으로는 왜국(倭國)을 정벌한다 핑계하면서 신라를 치려 한다.’ 하였습니다. 함형(咸亨, 당나라 고종 연호) 원년(670년 문무왕 10년) 6월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모반(謀叛)하여 진영에 머물러 있는 조관(朝官)을 죽임으로써 내가 군사를 출동하려고 하여 먼저 웅진(熊津)에 통보하기를, ‘고구려가 이미 모반하였으니, 치지 않을 수 없다.’ 하매, 백제의 사마미군(司馬彌軍)이 와서 이르기를,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곧 피차간 서로 의심을 가질까 두려우니, 두 나라로 하여금 서로가 볼모로 교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서는 입조사(入朝使) 김흠순(金欽純) 등이 와서 장차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나누어 돌려 주게 하였는데, 일찍이 수년(數年)이 못되어 한 번 주고 한 번 빼앗게 되니, 우리나라 신민(臣民)은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지난해 9월에 사실을 갖추어 알리려 하였으나, 풍파를 만나 알리지 못하였으며, 그 후 백제가 흔단을 꾸며 우리가 배반한다고 무함하였으므로, 앞에서는 귀신(貴臣)의 마음을 잃고 뒤에 와서는 백제의 참소를 당했으니, 진퇴 유곡(進退惟谷)으로 충성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사인(使人) 임윤(琳潤)이 편지를 가지고 왔으므로, 총관(摠管, 설인귀(薛仁貴))이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海外)에 온 것을 우러러 알았습니다. 사리로 보아 반드시 사인(使人)을 보내어 교외(郊外)에서 맞이하고 고기와 술을 보내야 하나, 멀리 다른 지역에 있어서 예(禮)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온 편지를 펴서 보건대, 오로지 우리나라가 반역한 것으로 칭하였으니, 원래 그것이 본심(本心)이 아니므로 척연(惕然)히 두렵기만 합니다. 이제 억울함을 대략 진달하고 반역하지 않았음을 갖추어 기록하오니, 태양은 비록 볕을 주지 아니하나, 해바라기의 본심은 오히려 해를 향하여 있습니다. 총관은 영웅의 빼어난 기질을 타고나서 장상(將相)의 높은 재능을 품었으니, 당나라 군사가 나오기 전에 먼저 원래의 연유를 물었습니다. 이번에 온 편지로 인하여 반역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히 진술하오니, 청컨대, 잘 생각하여 상황을 갖추어 아뢰소서.” 하였다.

○소부리주(所夫里州, 부여(扶餘))를 두고 아찬(阿飡) 진왕(眞王)으로 도독(都督)을 삼았다.

가을 9월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 등이 번병(蕃兵)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구지(溝池)를 깊이 파고 성루(城壘)를 높이어 대방(帶方)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급찬(級飡) 당간(當干) 등을 보내어 당나라의 조선(漕船) 70여 척을 습격하고,

낭장(朗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사졸 1백여 인을 사로잡았으며, 익사(溺死)한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러한 공으로 당간에게 사찬(沙飡)을 제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31 (정암 서당) | 작성자 jase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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