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동국통감

동국통감 33

문장대 2025. 12. 2. 22:29

신라(新羅) 신문왕 (神文王)

휘(諱)는 정명(政明)이고 자(字)는 일소(日炤)이며, 문무왕(文武王)의 장자(長子)로서, 모(母)는 자의 왕후(慈義王后)인데, 재위(在位) 11년이다.

신라 신문왕 2년, 임오년(壬午年), 682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영순(永淳) 원년

여름 6월

○국학(國學)을 세워 예부(禮部)에 소속시키고, 경(卿) 1인을 두었으며, 또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다.

○고구려왕 고장(高臧)이 공주(邛州)에서 졸(卒)하니, 당나라에서 위위경(衛尉卿)을 추증(追贈)하고, 조서(詔書)를 내려 시체를 경사(京師)로 가져와 힐리(頡利, 돌궐(突厥) 왕)의 묘(墓) 왼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그가 통솔하였던 사람들은 하남(河南)·농우(隴右)의 여러 주(州)로 옮기고,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곁 옛 성에 머물게 하였는데, 때때로 국병(國兵)에게 죽임을 당하여 남은 무리가 말갈(靺鞨)과 돌궐로 흩어져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고씨(高氏)는 그 뒤가 드디어 끊어졌다.

신라 신문왕 3년, 계미년(癸未年), 683년, 중국연호 당나라 고종 홍도(弘道) 원년

여름 5월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태자가 되었을 때, 김흠돌(金欽突)의 딸을 맞아들여 비로 삼았으나 후사(後嗣)가 없었고, 뒤에 아버지의 죄에 연좌(緣坐)되어 폐위당했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장차 김흠운의 딸을 맞아들여 비를 삼으려고, 먼저 이찬(伊飡) 문영(文穎)과 파진찬(波珍飡) 삼광(三光)을 보내어 맞아오게 하고, 또 대아찬(大阿飡) 지상(智常)을 보내어 폐백(幣帛) 15여(轝)와 쌀·술·찬구(饌具) 1백 35여(轝)와 벼 1백 50거(車)를 내려주었으며, 이찬 문영·개원(愷元)을 보내어 김씨를 책봉하여 비로 삼았다. 파진찬 대상(大常)·손문(孫文)과 아찬(阿飡)인 좌야(坐耶)·길숙(吉叔) 등에게 명하여, 각각 그들의 처(妻)를 거느리고서

사량(沙梁)·급량(及梁) 두 부(部)의 부인 각 30인과 더불어 그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좌우(左右)의 시종(侍從)이 몹시 성대하였다.

겨울 10월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을 불러서 소판(蘇判)으로 삼고 제택(第宅)을 주었으며, 인하여 김씨를 사성(賜姓)하였다.

○혜성(彗星)이 오거성(五車星)에 나타났다.

신라 신문왕 4년, 갑신년(甲申年), 684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中宗) 사성(嗣聖) 원년

겨울 10월

○유성(流星)이 밤새도록 종횡(縱橫)하였다.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어 금마저(金馬渚)에서 적(賊)을 토벌하여 평정시켰는데, 제감(弟監) 핍실(逼實)과 보기감(步騎監) 김영윤(金令胤)이 죽었다. 이에 앞서 안승(安勝)의 족자(族子)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웅거하여 반역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남은 무리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報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므로, 왕이 장사(將士)를 보내어 토벌하여 베고, 그의 사람들은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옮겨서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처음에 사량(沙梁) 사람 내마(奈麻) 취복(驟福)이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맏이는 부과(夫果)요 다음은 취도(驟徒)며 끝은 핍실(逼實)이었다. 부과와 취도는 일찍이 왕사(王事)를 위해 죽었다. 핍실이 장차 길을 떠나려고 하며 그 처(妻)에게 말하기를, “두 형은 이미 왕사를 위해 죽어서 이름이 썩지 않고 전하여지는데, 내가 아무리 불초하나 어찌 홀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는가? 오늘은 바로 그대와 더불어 죽어서 이별할 때이다.” 하였는데, 싸우게 되어서는 홀로 나가 분발해 공격하여 수 십 인을 참살(斬殺)하고 죽으니, 왕이 칭탄하여 말하기를, “취도는 능히 죽을 곳을 알아서 곤계(昆季)의 마음을 격동시켰고, 부과·핍실은 또한 의분(義奮)에 용감하여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모두 사찬(沙飡)을 추증(追贈)하였다. 김영윤은 곧 급찬(級飡) 김반굴(金盤屈)의 아들로 세가(世家)에서 생장하여 명절(名節)로서 자부(自負)하였다. 장차 길을 떠날새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번 길에 마땅히 이름을 세워 종족(宗族)과 붕우(朋友)에게 보답하겠다.” 하고,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里)에 이르니, 적장(賊將) 대문(大文)이 진(陣)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졸(士卒)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흉당(兇黨)은 둥지에 든 제비와 솥에 든 고기와 같아서, 오래 버틸 마음이 없으므로 만 번 죽을 각오로 한번 싸우기를 바랄 것이다. 옛말에 ‘궁지에 몰린 도둑은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가 지쳐 있을 때에 공격하는 것이 옳다.” 고 하니, 여러 장수가 그렇게 여기고, 모두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는데, 영윤은 유독 격분하여 싸울려고 하므로, 추종자가 말하기를, “지금 여러 장수가 어찌 모두 살기를 도모하여,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적의 형편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인데, 당신만이 유독 싸우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니, 영윤이 말하기를, “적진(敵陣)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을 《예경(禮經)》에서 경계하였고, 전진만이 있고 퇴각함이 없는 것은 사졸의 떳떳한 직분이다. 장부(丈夫)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하였는데, 하필이면 덩달아 따라야 한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가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왕이 칭탄하기를, “이러한 아버지가 있어야 이런 아들이 있는 법이다.” 하며, 그 의열(義烈)을 가상하게 여겨서 증직(贈職)과 부의(賻儀)를 더하였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절의(節義)는 천하의 큰 제방(堤防)으로서, 하늘의 상도(常道)와 사람의 기강을 부식(扶植)하고 있으니, 세교(世敎)에 관계됨이 매우 큽니다. 적(敵)에 임하여 끝까지 싸우고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경우와 같은 것은, 그 절의가 지사(志士)와 충신(忠臣)의 의기(意氣)를 격동시킴이 있으니, 또한 살신 성인(殺身成仁)하는 자라 할 만한 것입니다. 신라가 고구려·백제와의 군사를 일으킨 이래로 그 풍속이, 전진하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삼고 후퇴하여 사는 것을 치욕으로 삼았으므로, 왕사(王事)를 위하여 죽는 자를 이루 다 누누히 열거할 수 없는데, 귀산(貴山)·추항(箒項)·찬덕(讚德)의 부자(父子), 해론(奚論)·눌최(訥催)·동소(東所)·죽죽(竹竹)·비령자(丕寧子)의 부자, 김흠운(金欽運)·예파(穢破)·적득(狄得)·보용나(寶用那)·반굴(盤屈)·관창(官昌)·필부(匹夫)·아진금(阿珍金)·소나(素那)·김영윤(金令胤)·핍실(逼實)·취도(驟徒)·부과(夫果)·탈기(脫起)·선백(仙伯)·실모(悉毛)니 하는 이들은 드러난 자들이고, 그 나머지의 사절(死節)한 사람 또한 많았습니다. 백제가 망할 때는 단지 계백(階伯)만이 있었고, 고구려가 망할 때는 한 명도 사절한 자가 없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절의가 무너짐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능히 신라를 대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신라도 중엽(中葉) 이후부터는 난신 적자가

잇달아 일어나서 당세에 적(賊) 견훤(甄萱)이 쳐들어오자 공경 대부(公卿大夫)가 굽실거리는 모습으로 오히려 혹은 남보다 뒤질세라 항복하였고, 김부(金傅, 경순왕)가 항복할 때에 굴복하지 않은 자는 오직 왕자(王子) 한 사람 뿐이었으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습니까? 애석하도다! 신라가 전성(全盛)할 때에는 사람마다 죽음을 바쳐 절의를 다하였는데, 그 망할 때에는 한 사람도 몸을 바쳐서 절의를 온전히 하는 자가 없었으니, 뉘라서 국가의 흥망이 충절의 있고 없는 것에 관계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까?”

신라 신문왕 5년, 을유년(乙酉年), 685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2년

봄 3월

○서원 소경(西原小京)을 두어서 아찬(阿飡)인 원태(元泰)를 사신(仕臣)으로 삼고, 남원 소경(南原小京)을 두어서 여러 주·군(州郡)의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

○봉성사(奉聖寺)가 완성되었다.

여름 4월

○망덕사(望德寺)가 완성되었다.

신라 신문왕 6년, 병술년(丙戌年), 686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3년

봄 2월

○백제의 옛 땅에 주·군(州郡)을 두었는데, 사비주(泗沘州)를 군(郡)으로 삼고 웅천군(熊川郡)을 주(州)로 삼아,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발라주(發羅州)를 군으로 삼고, 무진군(武珍郡)을 주로 삼았으며, 또 석산(石山)·마산(馬山)·고산(孤山)·사평(沙平) 4현(縣)을 두었다.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가서 예전(禮典)과 아울러 사장(詞章)에 관한 것을 청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유사(有司)로 하여금 길흉(吉凶)에 관한 긴요한 예를 베끼게 하고, 아울러 문사(文詞)에서는 규계(規誡)에 관한 것을 채택하여, 억지로 50권을 만들어서 주었다.

○고구려의 항복한 사람에게 관작(官爵)을 차등 있게 제수하였다.

○측천무후가 고장(高臧)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고, 또 의자(義慈)의 손자인 부여경(扶餘敬)을 백제왕으로 승습(承襲)하게 하였는데, 그 옛 땅은 이미 우리나라와 발해(渤海)·말갈(靺鞨)의 나눈 바가 되었다.

신라 신문왕 7년, 정해년(丁亥年), 687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4년

여름 5월

○문무 관료(文武官僚)에게 토지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신라 신문왕 9년, 기축년(己丑年), 689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6년

가을

○서원경(西原京)의 성을 쌓았다.

 

신라 신문왕 10년, 경인년(庚寅年), 690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7년

○당나라에서 김인문(金仁問)에게 보국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군 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을 제수하였다.

신라 신문왕 11년, 신묘년(辛卯年), 691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8년

봄 3월

○원자(元子) 이홍(理洪)을 봉하여 태자(太子)로 삼고, 죄인을 대사(大赦)하였다.

○당나라에서 헌성(獻誠)을 우위대장군 겸 우림위(右衛大將軍兼羽林衛)로 삼았다. 측천무후가 일찍이 금폐(金幣)를 내어놓고, 활 잘 쏘는 다섯 사람에게 주게 하였는데, 내사(內史) 장원보(張元輔)가 먼저 헌성에게 사양하여 제일로 삼았으며, 헌성은 뒤에 우왕영위 대장군(右王鈴衛大將軍) 설토마지(薛吐摩支)에게 사양하였고, 설토마지는 또 헌성에게 사양하였다. 얼마 후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陛下)께서 활 잘 쏘는 자를 뽑으셨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아마도 당나라 관원이 활 쏘는 것을 수치로 여길 듯하니, 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측천무후가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내준신(來俊臣)이 일찍이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으나, 헌성이 대답하지 않으매, 곧 그를 모반한다고 무함하여 목매어 죽였는데, 측천무후가 뒤에 그 억울함을 알고서, 우우림위 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追贈)하고 예(禮)로써 개장(改葬)하였다.

신라 신문왕 12년, 임진년(壬辰年), 692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9년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어 와서 말하기를,

“우리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는 신공 성덕(神功聖德)이 천고(千古)에 뛰어났으므로,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는데, 그대의 나라 선왕(先王) 김춘추(金春秋)도 이와 같은 묘호를 하는 것은 실로 참람한 짓이니, 반드시 급히 고치라.” 하였으므로, 왕이 사자에게 말하기를, “신(臣)이 감히 명(命)하신 바를 따르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생각컨대 선왕 김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또 훌륭한 신하 김유신(金庾信)을 얻어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업(功業)이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서(薨逝)하게 되자, 온 나라 신민(臣民)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였던 터여서, 추존(追尊)하는 묘호가 서로 범하게 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이제 교칙(敎勅)을 들으니, 두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러한 관계를 위에 알리소서.” 하였는데, 그 후 다시는 칙서(勅書)가 없었다.

○왕이 일찍이 한가로이 있으면서 설총(薛聰)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오늘은 오랜 비가 처음 개이고 훈풍(薰風)이 약간 서늘하게 불어오니, 고담(高談)·선학(善謔)으로 울적한 심사를 풀까 한다.

그대는 특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것인데, 어찌 나를 위하여 말하지 않겠는가?” 하므로, 설총이 말하기를,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臣)이 듣건대, 옛날 화왕(花王, 모란(牡丹)을 지칭함)이 처음으로 왔을 때, 이를 향기로운 화원(花園)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더니, 삼춘(三春)을 당하여 피어났는데, 아름답기가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었다고 합니다. 이에 예쁘고 영묘(靈妙)하여 아름다운 꽃들이 분주하게 화왕을 뵈오려 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갑자기 장미(薔薇)라 이름하는 한 가인(佳人)이 있어, 붉은 얼굴과 옥과 같은 치아(齒牙)에, 곱게 단장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으로 혼자 외로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첩(妾)은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내 풍기는 장막 속에서 잠자리에 모시기를 원하는데, 왕은 저를 허용해 주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백두옹(白頭翁, 할미꽃을 지칭)이라 이름한 한 장부(丈夫)가 있었는데, 베옷에 가죽띠를 두르고 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노쇠(老衰)한 걸음으로 구부리고 와서 말하기를, ‘저는 경성(京城)의 바깥 큰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건대, 좌우(左右)에서 대어주는 것이 아무리 고량 진미(膏粱珍味)이고 풍족하다 하더라도, 상자 속에 저장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약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비록 사마(絲麻, 생사(生絲)와 삼베)를 가지고 있더라도 관괴(菅蒯, 왕골과 띠 풀)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왕께서는 또한 (저에게도) 뜻을 두시겠습니까?’하니, 왕이 말하기를, ‘장부의 말한 것도 또한 도리(道理)가 있긴 하나 아름다운 여인도 얻기 어려우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장부가 말하기를, ‘무릇 임금이 된 사람이 노성(老成)한 신하를 친근히 하면 흥(興)하고 요염한 여자를 가까이하면 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염한 여자와 영합하기는 쉽고, 노성한 신하를 친근히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희(夏姬, 진 영공(陳靈公) 때 미인)는 진(陳)나라를 망쳤고, 서시(西施, 춘추시대 오 부차(吳夫差)의 총희)는 오(吳)나라를 멸(滅)하게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때를 만나지 못하여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 한 문제(漢文帝) 때 사람)은 중낭서장(中郞署長)으로 묻혀 있다가 백발이 되었으니, 옛날부터 이와 같았는데, 전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화왕이 사과하기를 ‘내 잘못이다.’ 하였다 합니다.” 하니, 이에 왕이 초연(愀然)하게 얼굴빛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한 말에 풍자하여 효유(曉諭)한 것이 깊고 절실하니, 청컨대 그것을 써서 두어 경계로 삼겠다.” 하고, 드디어 설총을 높은 직질(職秩)에 발탁하였다. 설총의 자(字)는 총지(聰智)인데, 그의 아버지 원효(元曉)는 일찍이 중이 되어 불서(佛書)를 널리 통달하였고, 얼마 후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자호(自號)를 소성 거사(小性居士)라 하였으며, 요석궁 과부인(瑤石宮寡夫人)에게 장가들어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총명 영리하였고, 이미 장성하여서는 널리 배워서, 능히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의 뜻을 해석하여

후생(後生)을 훈도(訓導)하였으며, 또 글도 잘 지었다.

가을 7월

○왕이 훙(薨)하니, 시호를 신문(神文)이라 하였고, 태자 이홍(理洪)이 즉위하였다.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어 조제(吊祭)하고, 이어서 왕을 책봉하여 신라왕 보국 대장군 행 좌표도위 대장군 계림주도독(新羅王輔國大將軍行左豹韜衛大將軍鷄林州都督)으로 삼았다.

○의학박사(醫學博士) 2인(人)을 두고 학생을 교수(敎授)하되, 《본초강목(本草綱目)》·《갑을경(甲乙經)》·《소문경(素問經)》·《침경(針經)》·《맥경(脈經)》·《명당경(明堂經)》·《난경(難經)》으로 학업을 삼게 하였으며, 또 율령전(律令典)에 박사(博士) 6인을, 수궁전(藪宮典)에 대사(大舍) 2인과 사(史) 2인을 두었다.

○사찬(沙飡) 강수(强首)가 졸(卒)하였다. 강수는 내마(奈麻)인 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처음에 그 어머니의 꿈에 머리에 뿔이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그를 낳으매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으므로, 그의 아버지가 아이를 데려가 관상자(觀相者)에게 보이니, 관상자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복희씨(伏羲氏)는 범의 모형이고 여와씨(女媧氏)는 뱀의 몸뚱이며, 신농씨(神農氏)는 소의 머리고, 고요(皐陶)는 말의 입이었다.’고 하였으니, 예로부터 성현(聖賢)은 그 상모(相貌)가 특이함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아이의 머리를 보건대 뿔이 나있고, 또 검은 사마귀가 있습니다. 상법(相法)에 얼굴의 검은 사마귀는 좋을 것이 없지만, 머리의 검은 사마귀는 나쁘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영특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하므로, 그의 아버지가 돌아와 아내에게 이르기를, “아이의 골격은 보통이 아니니, 잘 기르라.” 고 하였다. 장성하게 되자, 글을 읽을 줄 알고 의리(義理)를 통달하였으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 뜻을 시험해 보려고 “불법(佛法)을 배우려느냐? 유학(儒學)을 배우려느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불법은 세상 밖의 교리이니, 원컨대 유학을 배우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스승에게 나가서 《효경(孝經)》·《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文選)》을 읽었는데, 얻은 것이 더욱 고원(高遠)하였다. 일찍이 대장간 집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모가 장차 예의를 갖추어서 다른 곳으로 장가보내려고 하니, 강수가 옳지 않다고 하자, 그 아버지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이때에 이름이 나 있는데, 미천한 것과 짝을 하는 것은 또한 부끄럽지 않느냐?” 하니, 강수가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의 말에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내당(內堂)에서 내려보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왕이 예로써 장사지내고 부의(賻儀)를 내린 것이 매우 후하였는데, 그 처가 상사(喪事)를 치르는 데 다 이바지하였으므로, 식량이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벼 1백 석을 하사하니, (그 처가) 사양하기를, “첩(妾)은 천한 사람으로서 남편이 있을 때에 나라의 은혜를 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이제 비록 따라 죽지는 못했으나, 어찌 감히 재차 욕되이 후하게 내리시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받지 않고 떠나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33 (정암 서당) | 작성자 jase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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