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동국통감

동국통감 34

문장대 2025. 12. 2. 22:31

효소왕( 孝昭王) 휘(諱)는 이홍(理洪)으로,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며, 모(母)는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金氏)이다. 재위(在位) 10년에 수(壽)는 16세였다.

신라 효소왕 3년, 갑오년(甲午年), 694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中宗) 사성(嗣聖) 11년

여름 4월

○김인문(金仁問)이 당(唐)나라에서 졸(卒)하니,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몹시 애도하며, 수의(襚衣)를 보내주고 관등(官等)을 더하였으며, 사례시(司禮寺)·대의서(大醫署)에 명하여, 육원경(陸元景) 등으로 하여금 영구(靈柩)를 보내 주게 하였다. 왕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追贈)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경도(京都) 서원(西原)에 장사 지내게 하였다. 김인문이 일곱 번이나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는데, 무릇 22년이었다.

겨울

○송악(松岳)·우잠(牛岑)의 두 성을 쌓았다.

신라 효소왕 7년, 무술년(戊戌年), 698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15년

봄 3월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였다.

여름 6월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벼락이 쳤다.

가을

○측천무후가 고보원(高寶元)을 좌응양위 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封)하였으며, 안동(安東)의 구부(舊部)를 내려 주어 통괄하게 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신라 효소왕 8년, 기해년(己亥年), 699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16년

가을

○병고 가운데서 고각(鼓角)이 저절로 울렸다.

○측천 무후가 고장(高臧)의 손자인 고덕무(高德武)를 안동 도독(安東都督)으로 삼았다

신라 효소왕 9년, 경자년(庚子年), 700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17년

여름 5월

○이찬(伊飡) 경영(慶永)이 모반(謀叛)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신라 효소왕 10년, 신축년(辛丑年), 701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18년

여름 5월

○영암군 태수(靈巖郡太守) 제일(諸逸)이 탐오(貪汚)하여 장(杖)을 맞고 해도(海島)로 유배(流配)되었다.

신라 효소왕 11년, 임인년(壬寅年), 702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19년

가을 7월

○왕이 훙(薨)하였으나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의 아우인 융기(隆基)를 왕으로 세우고, 시호를 올리기를 효소(孝昭)라 하였다.

○측천무후가 왕이 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위해 슬퍼하여 이틀 동안 조회를 거두었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고, 새 왕을 책봉하여 신라왕을 삼고는, 그대로 장군 도독(將軍都督)의 칭호를 승습(承襲)하게 하였다.

가을 9월

○죄인을 사면(赦免)하고, 여러 주군(州郡)에 1년 동안의 조세(租稅)를 면제하였다.

성덕왕(聖德王) 휘(諱)는 융기(隆基)인데, 다시 흥광(興光)이라 하였으며, 효소왕(孝昭王)과 어머니를 같이 한 아우로서, 재위(在位) 35년이었다.

신라 성덕왕 2년, 계묘년(癸卯年), 703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20년

가을 9월

○영묘사(靈廟寺)에 화재(火災)가 났다.

신라 성덕왕 3년, 갑진년(甲辰年), 704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사성 21년

여름 5월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았다.

○김대문(金大問)을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으로 삼았다.

신라 성덕왕 4년, 을사년(乙巳年), 705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신룡(神龍) 원년

겨울 10월

○나라의 동쪽 주군(州郡)에 기근(饑饉)이 들어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므로, 사신을 보내어 진휼(賑恤)하였다.

신라 성덕왕 6년, 정미년(丁未年), 707년, 중국연호 당나라 중종 경룡(景龍) 원년

봄 정월

○백성들이 기근으로 많이 죽게 됨으로 벼[租]를 주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신라 성덕왕 10년, 신해년(辛亥年), 711년, 중국연호 당(唐)나라 예종(睿宗) 경운(景雲) 2년

겨울 11월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서 여러 신하에게 보였다.

신라 성덕왕 11년, 임자년(壬子年), 712년, 중국연호 당나라 예종 태극(太極) 원년

○당나라에서 노원민(盧元敏)을 보내어 왕에게 이름을 고치도록 칙령을 내렸다. 흥광(興光)으로 고친 것은 제(帝)의 휘(諱)를 피해서이다.

가을 8월

○김유신(金庾信)의 처(妻) 김씨(金氏)를 봉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이 때 부인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는데, 왕이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평안하여 베개를 도두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이 준 것이다. 부인이 경계하여 서로가 이루어 놓았으니, 남이 모르는 공이 또한 많다. 과인(寡人)은 일찍이 마음에 잊지 않고 그 공을 갚으려고 생각한다.” 하고,

 

해마다 남성(南城)의 조(租) 1천 석(石)을 주도록 명하였다.

신라 성덕왕 12년, 계축년(癸丑年), 713년,중국연호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원년

○전사서(典祀署)를 두어 예부(禮部)에 소속시켰다.

겨울 10월

○당나라에서 조서(詔書)를 보내어, 왕을 책봉하여 표기장군특진 행좌위위대장군 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계림주자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왕(驃騎將軍特進行左威衛大將軍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鷄林州刺史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당나라에서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발해는 본래 속말 말갈(粟末靺鞨)인데, 곧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이 그 무리들과 더불어 요수(遼水)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 동쪽을 보유(保有)하였다. 걸걸중상이 죽자 대조영이 뒤를 이었는데, 사납고 용맹스러워서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차츰 그에게로 돌아오자, 이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하고, 사신을 보내어 돌궐(突厥)과 친교를 맺었는데, 지방이 5천 리에 가호(家戶)가 10만이 넘고 군사가 수만으로 자못 서계(書契)를 알게 되었고, 부여(扶餘)·옥저(沃沮)·변한(弁韓) 등 조선의 여러 나라를 얻게 되었으므로, 중종(中宗) 때는 아들을 보내어 입시(入試)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요위 대장군 발해군왕(左饒衛大將軍渤海君王)으로 제배하고, 통괄하는 곳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 홀한주 도독(忽汗州都督)으로 영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말갈의 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 칭하였다.

신라 성덕왕 13년, 갑인년(甲寅年), 714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2년

봄 2월

○상문사(詳文司)를 고쳐 통문박사(通文博士)로 삼고, 사명(詞命)을 관장(管掌)하게 하였다.

○왕자(王子) 수충(守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케 하니, 제가 집과 비단을 주며 그를 총애하고, 또 조당(朝堂)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봄 윤 2월

○급찬(級飡) 박유(朴裕)를 보내어 당나라에 조회하니, 제가 조산대부 원외봉어(朝散大夫員外奉御)를 제수하였다.

겨울 10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가니, 제가 내전(內殿)에 연회를 베풀고 재신(宰臣)과 4품 이상 청관(淸官)에게 참여하라는 칙령(勅令)을 내렸다.

신라 성덕왕 16년, 정사년(丁巳年), 717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5년

가을 9월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文宣王)·십철(十哲)·72제자(弟子)의 화상(畵像)을 올리니, 태학(太學)에 두라고 명하였다.

신라 성덕왕 17년, 무오년(戊午年), 718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6년

봄 2월

○왕이 나라의 서쪽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고, 나이 많은 사람과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친문(親問)하였는데, 물품 주기를 차등 있게 하였다.

여름 6월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벼락이 쳤다.

○처음으로 누각(漏刻)을 만들고, 누각전 박사(漏刻典博士)를 두었다.

신라 성덕왕 18년, 기미년(己未年), 719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7년

○발해군왕(渤海郡王) 대조영(大祚榮)이 졸(卒)하니, 사시(私諡)를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아들 무예(武藝)가 왕위에 즉위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니, 동북(東北)의 여러 오랑캐가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가을 9월

○금마군(金馬郡)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쳤다.

신라 성덕왕 19년, 경신년(庚申年), 720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8년

○황룡사탑(皇龍寺塔)을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신라 성덕왕 22년, 계해년(癸亥年), 723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11년

봄 3월

○왕이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아름다운 여인 포정(抱貞)·정원(貞苑)을 바쳤다. 포정은 내마(奈麻)인 천승(天承)의 딸이고, 정원은 대사(大舍)인 충훈(忠訓)의 딸인데, 장속(裝束)을 갖추어 보냈다. 제가 말하기를, “여인은 모두 왕의 고종(姑從) 자매(姊妹)로 친속(親屬)을 떠나 고국(故國)을 이별하고 왔으므로, 짐(朕)이 차마 머물러 둘 수 없다.” 하고, (물품을) 후사(厚賜)하여 돌려보냈다.

신라 성덕왕 23년, 갑자년(甲子年), 724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

○아들 승경(承慶)을 세워 태자로 삼고 죄인을 대사(大赦)하였다.

봄 2월

○김무훈(金武勳)을 보내 당나라에 가서 하정(賀正)하였는데, 김무훈이 돌아올 때 제가 칙유(勅諭)하기를, “경(卿)은 정삭(正朔)마다 궐정(闕庭)에 조공(朝貢)을 보내고 소회(所懷)를 말하니 가상(嘉尙)하게 여기며, 또 보내준 잡물(雜物) 등을 받아보건대 모두 바다를 건너 험한 길을 거쳐 왔고, 물품이 정교하고 화려하므로, 경의 마음을 깊이 나타내었다. 이제 경에게 금포(錦袍)·금대(金帶)와 채소(綵素) 모두 2천 필을 주어, 바친 성의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니, 물건이 도착한 대로 잘 받으라.” 하였다.

신라 성덕왕 25년, 병인년(丙寅年), 726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14년

○당나라에서 발해(渤海)의 태문예(太門藝)를 좌효위 장군(左驍衛將軍)으로 삼았다.

 

이전에 흑수 말갈(黑水靺鞨)의 사자(使者)가 당나라에 조회하자, 제(帝)가 그곳에 흑수주(黑水州)를 세우고 장사(長史)를 두었었다. (발해왕) 무예(武藝)가 그 신하를 불러 꾀하기를, “흑수가 처음에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하고는, 지금 당나라의 관직을 청하면서도 나에게 고하지 않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더불어 우리를 공격하려 하는 것이다.” 하고, 이에 아우인 태문예를 보내어, 군사를 징발해서 흑수를 치게 하니, 태문예가 말하기를, “흑수에서 (당나라에)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그들을 공격한다면, 이는 당나라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는 대국(大國)으로 군사가 우리에 만 배가 되는데, 그들에게 원망을 사게 되면 우리는 또 망하게 됩니다. 옛날 고구려가 강성할 때에 군사 30만으로 당나라를 대항하여 대적하였으니, 굳세다고 할 만하였는데도 당나라 군사가 한번 임하자 땅을 쓸어 낸 듯이 없어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무리는 고구려에 비하면 3분의 1인데, 왕이 장차 그를 어기려고 하면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나, 무예가 듣지 않고 (태문예를) 억지로 보내니, 태문예는 두려워서 당나라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조서(詔書)를 내려 (태문예를) 좌효위 장군으로 제배(除拜)하였다. 무예가 사신을 시켜, 태문예의 죄악을 폭로하고, 그를 주벌(誅伐)할 것을 청하니, 그를 안서(安西)에 거처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칙하고는, 알리기를, “태문예가 궁지에 몰려 나에게로 돌아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 없으며, 이미 나쁜 곳으로 보냈다.” 하고, 아울러 사자를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았다. 이도수(李道邃)에게 조칙하여 유지(諭旨)하게 하였는데, 무예가 그를 알고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대국(大國)은 의당 남에게 신의를 보여야 할 것인데, 어찌 이처럼 속이는 짓을 하느냐” 고 하니, 제가 이도수 등이 누설시켰다는 것으로서 좌천시키고, 태문예를 잠시 동안 영남(嶺南)으로 보내고서 (그 사실을 무예에게) 통보하였다.

신라 성덕왕 27년, 무진년(戊辰年), 728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16년

가을 7월

○왕이 아우인 사종(嗣宗)을 당나라에 보내어 조빙하고, 겸하여 표문(表文)으로 자제(子弟)를 보내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줄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한다고 조칙하고, 사종에게 과의(果毅)를 제수하여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도록 하였다.

신라 성덕왕 29년, 경오년(庚午年), 730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18년

봄 2월

○왕족(王族)인 지만(志滿)을 당나라에 보내어 공물을 바치니, 제가 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을 제수하고, 견(絹) 1백 필과 자포(紫袍)·금대(錦帶)를 하사하여,

그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신라 성덕왕 30년, 신미년(辛未年), 731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19년

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서 신년(新年)을 하례하게 하니, 제(帝)가 태복소경 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를 제수하고, 비단 60필을 하사하여 돌려보내면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경(卿)의 이명(二明, 일월(日月)·즉 부부(夫婦))은 경사스러운 복이 있고, 삼한(三韓)은 좋은 이웃이 되어서, 때로는 인의(仁義)의 고장이란 칭찬이 있었고, 대대로 훈현(勳賢)의 업적을 나타냈으며, 문장 예악(文章禮樂)은 군자(君子)의 기풍을 드러냈고, 정성과 충의를 바쳐 근왕(勤王)의 충절을 다하였다. 진실로 번방(藩邦)의 진위(鎭衛)이며, 충의(忠義)의 의표(儀表)이니, 어찌 다른 나라의 사나운 풍속과 같은 취급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의리를 생각함이 부지런하고 술직(述職)이 더욱 근실(謹實)하였으며,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 먼 길에 인사를 닦음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폐백과 진귀한 물품을 바치는 것을 해마다 한결같이 하였다. 우리의 왕도(王度, 제왕의 풍도)를 지켜서 국장(國章, 국가의 기록. 사기(史記))에까지 전하였으니, 이에 그 간절한 정성을 보건대 깊이 가상할 만하다. 이제 사신이 와서야 병고에 걸려서 명을 받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멀리서 생각함에 근심하는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기후가 온화하면 병이 회복되리라 생각하고, 지금 경에게 능채(綾綵) 5백 필과 비단 2천 5백 필을 하사하니 곧 영수하기 바란다.” 하였다.

○일본국(日本國)에서 병선(兵船) 3백 척[艘]으로써 동쪽 변방을 침략하니, 왕이 장수에게 출동을 명하여 그들을 격파시켰다.

신라 성덕왕 32년, 계유년(癸酉年), 733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21년

가을 7월

○제(帝)는, 발해(渤海)·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에 침입하므로, 태복 원외랑(太僕員外郞) 김사란(金思蘭)을 돌아가게 하면서, 왕에게 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를 제수하고,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의 남쪽 변지를 치게 하였으며, 효유(曉諭)하기를, “말갈·발해가 겉으로는 번한(藩翰)이라 칭하면서 안으로는 교활한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이제 군사를 출동시켜 문죄(問罪)하려고 하니, 경도 또한 군사를 징발하여 앞뒤에서 협공(挾攻)하도록 하라.” 하고, 제가 또 말하기를, “듣건대 옛 장수 김유신(金庾信)의 손자 김윤중(金允中)의 현명함은 장수를 삼을 만하다 하니, 그를 보내라.” 하고, 이어 김윤중에게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에 왕이 김윤중 등 네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회합하여 발해를 치게 하였다. 마침 큰 눈이 한 길이나 넘게 내려 산길이 막혔으므로, 사졸(士卒)의 죽은 자가 절반이 넘어서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왔다. 김사란(金思蘭)은 본래 왕족(王族)으로, 먼저 입조(入朝)하여 공손하고 삼가함이 예의가 있었음으로 인하여, 그대로 머물러 숙위하다가, 이때에 와서 곧 돌아왔다. 왕은 김윤중이 김유신의 적손(嫡孫)이란 것으로서 발탁하여 대아찬(大阿飡)으로 삼고 총애하며 그를 대우하니, 왕의 친속이 몹시 그를 질투하였다. 왕이 일찍이 월성(月城)에 올라 종관(從官)들과 더불어 술을 놓고 즐기면서 김윤중을 불러 참여하게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지금 종실(宗室)과 척리(戚里)에서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어서 유독 소원(疏遠)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신등은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깁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과인(寡人)과 경등이 함께 태평함을 누리는 것은 김유신의 공이다. 만약 이를 멀리하여 버린다면, 착한 일을 착하게 대우하여 자손에게 미치게 해야 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김윤중에게 앉을 자리를 주고 김유신의 공렬(功烈)을 이야기하며, 절영산(絶影山)의 말 1필을 하사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조카 김지렴(金志廉)을 보내어, 당나라에 가서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처음에 제가, 왕에게 흰 앵무새 암수 각 1척(隻)과 자줏빛 비단에 수놓은 도포와 금은(金銀)을 박은 기물(器物)과, 서문(瑞文)의 비단과 오색 나채(羅綵) 모두 3백여 단(段)을 하사하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표문(表文)을 올려 진사(陳謝)하였다.

신라 성덕왕 33년, 갑술년(甲戌年), 734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22년

봄 정월

○왕이 백관에게 하교하여, 북문(北門)으로 들어와 진언(進言)하게 하였다.

○김충신(金忠信)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하니, 좌영군위 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으로 삼았는데,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신이 진지(進止)를 받들기로는, 신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잡고 본국(本國)에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말갈(靺鞨)를 토벌해 없애라는 것이었으며, 일이 있으면 계속 아뢰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그때) 스스로 성지(聖旨)를 받들고 장차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교체(交替)할 사람인 김효방(金孝方)이 죽게 되었으므로, 문득 신이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된 것입니다. 신의 본국왕(本國王)은 신이 천정(天庭)에 오래도록 머무르며 뫼신 까닭으로, 다시 종질(從姪)인

김지렴(金志廉)을 보내어 신과 교대하게 하여 이미 당도하였으니, 신은 마땅히 곧 돌아감이 합당할 듯 합니다. 전에 진지를 받들었던 것을 생각할 때마다 밤낮으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페하께서는 먼저 본국왕 흥광(興光)에게 영해군 대사(寧海軍大使)를 더하도록 제가(制可)하셨고, 정절(旌節)을 주어서 흉악한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비로소 임함에 비록 먼 곳이라도 오히려 가깝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이 명하는데 신하가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오랑캐의 포로는 계략에서 이미 화란을 뉘우치고 있으나, 악(惡)을 제거함에는 근본을 힘써야 하고, 법을 선포함에는 오직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사(出師)하는데 있어서, 의(義)는 세 번 이기는 것보다 귀중하고, 적(敵)을 놓아두게 되면 근심이 여러 대에 끼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본국(本國)으로 돌아가므로 인하여 부사(副使)의 직위를 신에게 내려주시어, 천자의 뜻을 전부 가지고 아주 먼 지역에 선포하게 하소서. 어찌 오직 이 진노(震怒)만 더욱 떨칠 뿐이겠습니까? 진실로 또한 무부(武夫)도 기운을 진작시켜 반드시 그 소굴(巢窟)을 전복시키고, 이 황폐한 곳을 안정시켜서 조그마한 공력을 다하여 베푸신 은택에 보답하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니, 제가 허락하였다.

여름 4월

○대신(大臣)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보내어 당나라로 가서 새해에 하례하니, 제가 내전(內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접견하고 위위소경(衛尉少卿)을 제수하였으며, 비란포(緋欄袍)·평만은대(平漫銀帶)와 견포(絹布) 60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김지렴(金志廉)에게 홍로소경 원외치(鴻矑少卿員外置)를 제수하였다.

신라 성덕왕 34년, 을해년(乙亥年), 735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23년

○김의충(金義忠)을 보내어, 당나라에 가서 새해에 하례하게 하였다.

봄 2월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나라에 있다가 졸(卒)하니, 광록 소경(光祿少卿)을 추증(追贈)하였으며, 김의충이 돌아오는 편에 칙령(勅令)으로 패강(浿江, 지금의 대동강(大同江)) 이남 지방을 하사하였다.

신라 성덕왕 35년, 병자년(丙子年), 736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24년

여름 6월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가서 새해에 하례하게 하고, 이어 표문(表文)을 부쳐 진사(陳謝)하기를, “삼가 칙령을 받들건대, 패강(浿江) 이남의 지경을 하사하시는 은택을 베푸셨습니다. 신이 해예(海裔)에 나서 살면서 성조(聖朝)의 덕화(德化)를 입으니, 비록 본래 일편 단심을 가지고 있으나 본받을 만한 공이 없고, 충정(忠貞)으로 일을 삼았으나 공로가 상받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우로(雨露)의 은택을 내리시고 일월 같은 조서를 내리시어 신에게 지경(地境)을 주시고 신이 사는 곳을 넓혀 주셔서,

드디어 때에 맞게 개간하고, 농상(農桑)으로 적합한 곳을 얻게 하셨습니다. 신이 사륜(絲綸, 조칙)의 뜻을 받들고 깊은 영총(榮寵)을 입게 되니, 분골 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위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신라 성덕왕 36년, 정축년(丁丑年), 737년, 중국연호 당나라 현종 개원 25년

봄 2월

○왕이 훙(薨)하니 태자 승경(承慶)이 왕위에 즉위하고 성덕(聖德)이란 시호를 올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34 (정암 서당) | 작성자 jase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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