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사서 전식(조선 시대의 문신, 자랑스러운 상주인)

문장대 2023. 11. 26. 18:21

전식(全湜)

정의

조선시대 대사간,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상주에서 태어난 문신

 

개설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전팽조(全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혼(全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참봉 이신(李信)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상주에서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혹은 상산의 삼로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전식 [全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식 선생님의 또 다른 자료

본관 옥천(沃川). 자 정원(淨遠). 호 사서(沙西). 시호 충간(忠簡).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병 수십 명을 죽이고 김익남(金益南)의 추천으로 연원(連源)도찰방이 되었다. 1603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력(遊歷)하여,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로 불렸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예조정랑에 등용, 기주관(記注官)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고 부수찬 ·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그 뒤 전적 ·장령을 역임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태복시정(太僕寺正)으로서 왕을 호종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쳐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올랐다가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박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28년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다. 1642년 중추부지사 겸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춘추관동지사에 이어 대사헌에 보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상주(尙州) 백옥동(白玉洞) 서원에 배향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전식 [全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상주시 외답동 산 24-1에 존재하는 전식 신도비- 인공폭포에서 상주톨게이트 방면 100m이동하면 도로에서 보입니다. 상산엘피지 주유소도 보입니다. 상주 입구이죠. 상주 마리앙스 예식장 오기전 다리 건너기전 100전? 혹시 전식 선생님의 묘소를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합니다. 백전봉 갈미기 동네에 있다는 소문도 있네요.

 

외답 화개 인근 마을과 문중에서는 귀부 옆에서 뒤로 돌아서서, 이수 위에 돌이나 동전을 던져, 이수 위에 올라가게 되면 출사하거나 원하는 자식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사서 전식의 신도비.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전식(全湜, 1563~1642)의 본관은 옥천(沃川)으로,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광해군 실정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삼로(商社三老)’ 또는 ‘상산삼로(商山三老)’라 일컬어졌다. 관직은 대사간·대사헌·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 신도비는 1700년(숙종 26)에 건립되었으며 경상북도 상주시 외답동 산24-1번지(상주 시내에서 낙동 방면 국도 25호선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의 찬자(撰者)인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 『용주집(龍洲集)』 권20에 '「지사사서 신도비명(知事沙西 神道碑銘)」'이란 제목으로 신도비문이 실려 있다. 2009년 12월 28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내용

전식의 신도비는 비신(碑身)·이수(螭首)·귀부(龜趺)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수는 운룡문(雲龍紋)의 새김이 뚜렷하고 귀부도 귀갑문(龜甲紋)을 포함한 전신의 새김이 섬세하게 조식(彫飾)되어있는 반면, 비신 전면과 후면의 하단 일부가 손상되어 떨어져나갔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33㎝이며, 비신의 높이는 178㎝, 정면 폭은 80㎝, 두께는 16㎝이다. 비신의 전면 상단에 “증좌의정 행지중추 충간공 사서 전선생 신도비명(贈左議政 行知中樞 忠簡公 沙西 全先生 神道碑銘)”이라고 쓴 전액(篆額)이 새겨져있으며,비신은 전면과 후면에 걸쳐 작은 글씨의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1659년(효종 10)에 조경(趙絅)이 지었고, 1700년(숙종 26)에 신도비를 건립하면서 이봉징(李鳳徵)이 지은 비문 음기(陰記) 7줄을 후면에 추가로 새겨 넣었다. 글씨와 전액(篆額)은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신도비의 내용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대북(大北)의 영수였던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논박, 1625년(인조 3) 후금(後金)이 요동을 함락하고 있을 당시 해로(海路)를 통해 연행(燕行)한 일화를 포함하여 가계, 관력, 임란시의 의병 활동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신도비는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정경세·이준과 더불어 ‘상산삼로’라 칭송된 사서 전식의 유학자로서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주 사서 전식 신도비 [尙州 沙西 全湜 神道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식(조선) 신도비

* 사서 선생님의 묘약은 백전봉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아직 발견하지못했다. 옥천 전씨 종가집을 알게되면 촬영하고 올리겠습니다.

* 사서 전식 선생님의 여려자료 고찰

 

전식
全湜
출생
1563년(명종 18년)
사망
1642년(인조 20년) (향년 80세)
정원(淨遠)
사서(沙西)
시호
충간공(忠簡公)
본관
부인
강화 최씨 - 부사(府使) 최거원(崔巨源)의 4세손녀(四世孫女)
남양 홍씨 - 사인(士人) 홍천서(洪天敍)의 딸

1. 개요
조선 중기에 활동한 조선의 문관이다.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며 사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류성룡, 장현광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였으며 훗날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가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등의[1] 청요직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상주 옥동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2. 생애

1563년 정월 상주에서 전여림(全汝霖)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전팽조(全彭祖)는 국자감의 진사였으며[2], 조부는 전혼(全焜)이다.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깊어 마을 사람들이 효동(孝童)이라고 칭찬했으며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이라는 사람이 사람보는 눈이 좋았는데 전식을 칭찬하며 나중에 크게 될 인재로 기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 수십 명을 베는 공을 세워 김응남의 천거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에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603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의 낭관,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등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예조정랑, 울산판관, 전라도도사 등을 지냈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는데 이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함께 산수를 유람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상사삼로(商社三老)라고 불렀다.[3]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후 예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인 기주관(記注官)과[4] 임금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知製敎), 경연을 담당하는 관리인 홍문관 수찬과 교리를 지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는데 이때 이귀와 장만의 잘못을 논죄(論罪)하자 장만의 휘하 장수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장군은 아무 죄가 없는데, 실수한 말을 하고 있다."라고 하자 반박하며 꾸짖기를 "종묘와 사직을 몽진(蒙塵)하게 하고 군부(君父)로 하여금 피난을 떠나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이냐? 너희들도 또한 남의 신자(臣子)된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느냐?"라고[5] 하니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괄의 난이 끝난 후 병조 참의와 동부승지, 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승지로 있을 때 임금이 김공량(金公諒)에게 절충 장군(折衝將軍)의 자급(資級)을 내려주었으나 전식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반려(返戾)하였는데 여론이 일처리를 잘했다고 칭찬했다. 1625년에 형조 참의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서 다녀왔다.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후금의 사신인 유해(劉海)가 화친을 맺자고 요구하였다. 이 때 조정의 의견이 화친으로 대부분 기울었는데 전식은 이에 대해 항소(抗疏)하여 화친하는 일의 시각이 절박하지 않다고 지적(指摘)하였다. 정묘호란 후에 예조 참의에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어 여섯 가지 조목에 대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라는 것, 치우친 사심을 버리라는 것, 군정(軍政)을 닦으라는 것, 군관(軍官)의 수효를 줄이라는 것,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믿지 말라는 것, 남의 동정을 기찰(譏察)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1630년부터 이듬해까지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임명된 것이 네 번이었고 이조와 병조의 참의가 된 것이 두 번, 대사간에 임명된 것이 네 번이었는데 나이가 있고 병이 들어서 조정에 있을 수 없으니 간절히 외직을 청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임명되었다. 1634년 대사간으로서 논하기를 "옛날에 우리 선왕(先王)께서 경국대전을 만드신 후 비록 왕자(王子), 대군(大君)일지라도 감히 그 제도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평 대군(麟坪大君)은 혼례(婚禮) 때에 의복과 기용(器用)이 너무나 사치스러웠으니 아마도 선왕의 제도에 누(累)가 될 듯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고향인 상주에 있었으나 영남지역을 이끄는 의병장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곧바로 한양으로 달려가니 왕이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특하게 여겼다.[6] 병자호란 이후 곧바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638년에 대사간에 3번 임명되고 대사헌에 한번 임명되었으며[7] 예조참판, 대사성에도 임명되었다. 이때 차자를 올려 여덟가지 조목을 논하였는데, 성궁을 조양하라는 것(調養聖躬), 실덕을 힘써 닦으라는 것(懋修實德), 사치하는 풍조를 통렬하게 혁파하라는 것(痛革侈風), 언로를 넓게 개방하라는 것(廣開言路), 기강을 떨쳐 숙정하라는 것(振肅紀綱),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라는 것(崇獎節義),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보살펴 주라는 것(勤恤民隱), 내수사를 혁파하라는 것(革罷內需)이었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 뒤에도 대사헌과 대사간에 3번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대신(大臣)들이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전모(全某)는[8] 덕망(德望)이 본래부터 높고 나이가 이미 노년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서둘러서 크게 써야 합니다."고 하였는데 오히려 그 말을 듣고서 더욱 스스로 겸손하게 처신하며 관직에서 물러났다.1642년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하고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이는 이성구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곧이어 대사헌에도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알려지자 인조는 3일 간 조회를 중자하고[9] 부의(賻儀)와 사제(賜祭)를 정해진 예의(禮儀)대로 내렸으며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追贈)하였다. 이후 맏아들인 전극항(全克恒)이 병자호란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포함된 공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兼領經筵事世子傅監春秋館事)로 증직되었다.시간이 지나 숙종 때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는다.[10]

3. 여담

전식은 장남인 규천(虯川) 전극항(全克恒), 차남인 창주(滄洲) 전극념(全克恬)과 함께 삼 부자가 모두 문장으로 명성이 있어 666년 역사를 지닌 상주의 유명 시회(詩會)인 낙강시회에 삼 부자가 참석하였.[11]장남인 전극항(全克恒)은 당대에 명문장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대교,예문관검열 등을 역임하고 예조정랑을 지냈다. 예조정랑으로있었는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서 호종하던 중 한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가서 수십 일을 머물며 지키다 결국 전사했다. 게다가 셋째 아들인 전극연도 행방불명되어 전식은 1637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좌의정 이성구에게 전극연의 행방을 알아봐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세 아들 중 차남만 남게 되어 문중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차남인 창주(滄洲) 전극념(全克恬)이 어쩔 수 없이 역임하던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은거하며 문중을 이끌어 나갔다.
 

 

[출처] 문경군 읍지 (附 인근읍지, 상주군읍지)

자료제공: 문경문화원장 전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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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덕들이 한반도에서 가장 고생한 세대로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을 모두 겪은 16세기 중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뽑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그 세대에 태어나 활약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며 정묘호란 때는 당시 임금인 인조를 호종했고 병자호란 때는 나이가 74세인데도 불구하고 고향인 상주에서 영남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참전했다. 심지어 병자호란으로 인해 두 아들을 잃는 슬픔까지 겪었다.
  •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육로는 후금이 막고 있어서 해로를 통해 다녀왔다. 사신으로 다녀온 일을 기록한 사행록(槎行錄)에 따르면 이때 태풍으로 배가 흔들려 주변 사람들이 동요했는데도 불구하고 태연히 자리에 앉아 시를 읊으니 모든 사람들이 경탄했다고 한다. 태풍이 불어 함께 간 4척 중 하나는 침몰되었는데 침몰된 배에 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도 지었다. 이때 지은 시들은 모두 자신의 문집인 사서문집(沙西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 경연관으로 있을 때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이 "경연관 중에 고금에 통달한 사람은 정경세(鄭經世)요, 사리(事理)에 통달한 사람은 전식(全湜)이다.”라고 항상 칭찬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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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길이 왕과 국정을 논하던 자리에서 "전식(全湜)은 충성스럽고 순후한 자입니다. 성상께서 항복(下城)하였을 초기에 사대부들은 모두 달아나고 흩어졌는데, 전식은 끝까지 남아 있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이의가 없이 모두 와서 공직(供職)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며 칭찬했는데 인조가 답하기를 "전에는 전식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제서야 훌륭한 사람인 줄을 알았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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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년 유형원이 편찬한 지리지 동국여지지 상주목 인물란에 언급된다. 또한 18세기 중반 무렵 편찬된 여지도서 상주목 인물란에도 언급되며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덕에 여지도서 경주부 명환(名宦)란에 언급된다.[13]
  • 남인의 계보인 남보(南譜)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가문인 옥천 전씨도 기록되어 있고 기록된 인물로는 전식 외에도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과 전팽령의 형인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가 기록되어 있다.
  • 고향인 상주에는 전식이 과거시험 보러가는 길에 들린 주막집 주인이 꾼 용꿈의 기운을 받아 급제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 사후 지역의 유림들의 추대로 대대로 지역에서 대대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인 향불천위로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14]
[1] 부제학은 홍문관을 이끄는 실질적 수장이다. 대사간은 임금께 간언을 하여 항상 올바른 행동을 하게 이끄는 사간원의 수장이다. 대사성은 성균관의 수장으로 현재의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비유가능하다. 대사헌은 관리를 감찰하고 언론 역할을 하는 사헌부의 수장이다. 이 관직들 특히 부제학과 대사간, 대사헌은 언론 역할을 하는 삼사의 수장 중 하나로 이 자리에 임명되는 것 자체가 학자로서 큰 영광이자 목표였다.[2] 과거시험 과정인 소과와 대과 중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는 의미이다.[3] 기록에 따라 상산삼로(商山三老)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단어 모두 의미는 거의 같다.[4] 기주관으로 역임하면서 선조실록 편수(編修)에 참여하였다.[5] 쉽게 말해 이귀와 장만이 정말로 아무 잘못이 없었다면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이괄을 피해 한양을 떠나는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인데 같은 임금을 모시는 자들이 어찌 잘못한 사람을 감쌀 수 있나라는 의미이다.[6] 인조가 말하기를 "경(卿)이 창의(倡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매우 가상(嘉尙)히 여기는 바이다. 영남(嶺南)의 군대가 부래(負來)한 뒤에 재차 집결(集結)한 것은 참으로 영남의 사대부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지 않는 의리를 아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니, 호남(湖南)은 이에 대하여 부끄러운 바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7] 대사헌으로서 병자호란 동안 김자점의 무능함을 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8] 과거 유교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의 본명은 임금과 부모, 스승이 아니면 한참 어린 사람에게만 쓸 수 있었다. 특히나 임금 앞에서는 더욱 엄하게 지켜야 했기 때문에 본명을 말하지 않고 '모'라고 돌려서 칭한 것이다.[9] 대신의 죽음에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는 것은 매우 높은 직급의 재상이거나 당대에 명망이 두터운 대학자 또는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에 한해서 임금과 신하들 모두가 예의를 갖추어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매우 명예로운 대우였다.[10] 시호를 하사하는 교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교지에 따르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었다(危身奉上)하여 '충'이요.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다(正直無邪)하여 '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11] 이 시회의 시작은 119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살았던 백운(白雲) 이규보부터이다. 시회는 1862년까지 총 51회 열렸는데 시회의 개최자나 참석자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규보김종직, 유호인(兪好仁), 김일손이황, 이준(李埈), 채득기(蔡得沂), 홍여하(洪汝河), 신석번(申碩蕃), 이만부(李萬敷), 정종로(鄭宗魯) 등의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모두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장가이므로 낙강시회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시회임을 알 수 있다. 시회의 역대 내력은 다음을 참고[12] 원문: 學士任叔英 常稱 經筵官 通古今鄭經世 達事理全湜[13] 인물 설명에 따르면 경주부윤으로서 자신의 학식을 통해 지역의 학문을 일으켰고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들이 유애비를 건립해 주었다고 한다.[14] 불천위는 원래 국불천위만 인정되는데 조선중기부터 대부분의 세월을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며 동인 계열 인물에 대한 불천위가 안 내려지자 동인이 강성한 지역인 경상도에서는 지역의 유림들이 추대하여 지역을 대표할 만한 인물의 제사를 향불천위라는 이름으로 지정하여 계속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불천위로 모셔진다는 것은 생전에 매우 명망있는 인물이며 불천위를 모시는 가문은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였다.

 

 

 

위 초상화 주인공인 명신 사서 전식은 상주 사람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을 모두 격은 분이다. 얼굴이 미남입니다.

 

 

* 사서 전식 선생님 유허지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갈마기 마을 안에 논뚝위의 사서 전식 유허비-아마 이곳에서 살았거나 사망했거나 묘터인듯

위의 글에서  상주시 외답동 봉의산 아래 묘지와 신도비가 있다고 설명. 이 표지석이 왜 여기 있을까? 궁금합니다.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3층석탑도 전식 선생님의 사연이 있는 곳이라 소개합니다.

출처 - 충북나그네(푸른바다)2023. 1. 30. 08:59


길을 따라 50여미터 정도 올라가면 대밭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금암리 석탑은 대나무밭 가운데 있다.
주위가 정리정돈이 되어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었다.
예전에는 잡목사이에 있어 참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쁘게 조발하고 면도까지 한 듯 깔끔하다.


이 탑이 있던 용암사 터는  동이면 금암리 용암마을 북쪽 산 중턱 바위 사이에 있다. 용암사는 옥천읍 삼청리에 있던 용암사와 같은 이름의 다른 절이다. 용암마을 뒷산 서쪽 경사지에 있던 이 절터는 현재 경작지와 포도밭이며 500평 정도가 절터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기와 조각이 소수 발 견되고 있다. 특히 마을 주변 산등성이로 이전한 삼층석탑은 조형미가 아름다운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동이면 금암리 용암마을 동쪽 산 능선에 있 는 삼층석탑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 정된다. 높이 195㎝이며, 화강암으로 만든 기 단부, 탑신부, 옥개석 등의 조형미가 아름답다. 그러나 3층 탑신이 없어 아쉽다. 원래 금 암리 석탑은 용암마을 북서쪽 탑산이골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40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 였다고 한다.



머리에 회로가 엉킨듯한 느낌이다.

분명 금암리 삼층석탑을 잘 찾았었는데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금암리 석탑을 본지도 거의 10여년이 되었으니 그럴만도 하겠다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자위를 해본다.
금암3리 마을표지석을 보며 마을회관이 있는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된다.


길을 따라 50여미터 정도 올라가면 대밭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금암리 석탑은 대나무밭 가운데 있다.
주위가 정리정돈이 되어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었다.
예전에는 잡목사이에 있어 참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쁘게 조발하고 면도까지 한 듯 깔끔하다.


이 탑이 있던 용암사 터는  동이면 금암리 용암마을 북쪽 산 중턱 바위 사이에 있다. 용암사는 옥천읍 삼청리에 있던 용암사와 같은 이름의 다른 절이다. 용암마을 뒷산 서쪽 경사지에 있던 이 절터는 현재 경작지와 포도밭이며 500평 정도가 절터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기와 조각이 소수 발 견되고 있다. 특히 마을 주변 산등성이로 이전한 삼층석탑은 조형미가 아름다운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동이면 금암리 용암마을 동쪽 산 능선에 있 는 삼층석탑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 정된다. 높이 195㎝이며, 화강암으로 만든 기 단부, 탑신부, 옥개석 등의 조형미가 아름답다. 그러나 3층 탑신이 없어 아쉽다. 원래 금 암리 석탑은 용암마을 북서쪽 탑산이골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40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 였다고 한다.

 
금암리는 군동면(郡東面) 용암리(龍岩里)라 불리던 마을이며, 1739년 기록에는 군동면 용암리에 47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기록에는 55호에서 15세 이상 255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암리 유래는 마을 뒤에 용암사란 절이 있고 큰 바위들이 용같이 뻗었다 하여 용암말 이라 불렸고 옆마을이 목시, 목쇠인데 목쇠는 목금(木金)으로 목금의 금(金)자와 용암의 암(岩)자를 따서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쳐서 금암리가 되었다.금암리에는 충청북도문화재인 1545년 송정 전팽령이 건립한 양신정(養神亭)과 1765년 유림들에 의해 세워진 목담서원이 있다. 목담서원(鶩潭書院)과 목담서원에 모셔진 사서공 전식 선생의 영정, 명종 때 효자를 기리기 위한 효자정과 효자비, 그리고 그 효행을 뒷받침 하는 호천(虎泉) 등이 있다.임진란 때 중봉 조헌선생을 도운 인봉 전승업선생은 개전초기에 중봉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 의병 100명과 군수품을 모아 보은 차령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금산전투 후 연곤평에서 순절한 의병과 승병 1,000여명의 시신을 모아 오늘의 칠백의총을 만들고 중봉선생 유족을 돌보았다.자연마을로는 압구정, 등나무마을, 새말, 솔밭말, 건너말, 용암말, 안골말, 황새골, 옥고대, 말참묵이가 있고 건너말은 빈집만 남아 있다. 용암말에 오필렬효자문과 청주한씨(淸州韓氏)효부비가 있다.압구정은 고창오씨(高敞吳氏)가 입향조인 공조참의 오천(吳泉)공이 세종 16년(1434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20여대를 이어 살고 있다. 1978년 취락구조사업으로 적하리 분지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금암리로 집단이주 창앞마을을 이루었다.압구정 뒤에 서당골이 있고 앞에는 갯들, 나마터, 씨드물, 돌가티, 부단지골, 막은골, 줄골이 있고 새마을 앞에서부터 대정목, 모새골, 샘골 그 앞에 새골이, 바위틈새골, 봇들, 못안이 있고, 둥구나무 마을 앞에 방아다리, 용암말 주변에 장나무골, 부흥산, 가는골, 서당골, 턱갈메기, 산지당, 탑선골, 당수말, 말래, 홍고개, 삼거리, 증갱이, 못안이 있다.말참묵(말차목)이 앞에 수우골, 긴다랭이골, 탑송골, 부차골이 있다. 새말 주변에 줄골, 갯들, 강당, 봇들, 못안골, 찰방재, 새골, 샘골, 동자말, 새말 앞들이 있고 황새골, 못안, 섬말, 골말, 장수마루, 수골, 새터말, 뒷골, 삼거리, 찰방재가 있다.
 
 

* 다음은 전식선생님이 참가한 낙강시회 이야기와 자료

낙강시회는 1196년(고려 명종2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우거했던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회(詩會)로부터 1491년(성종22년)의 상주목사 강구손, 의성군수 유호인 등의 시회를 거쳐 1862년(철종13년)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에 걸쳐 이루어진 역사적인 시회(詩會)입니다.이 시회를 열었거나 참석한 사람은 이규보, 안축, 김종직, 유호인, 김일손, 권오복, 이황, 강신, 조찬한, 이준, 조정, 조익, 류진, 전식, 전극, 전극염, 조우인, 강사상, 채득기, 홍여하, 손만웅, 조정융, 정도응, 신석번, 이옥, 이만부, 권상일, 조천경, 이승연, 정종로, 이경유, 류주목 등입니다. 이 분들은 이미 한국문학사 및 유학사에 오른 선비들이어서 낙강시회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주었지요.여기서 임술년 7월16일은 1622년으로 사서 전식선생이 60세 되던 해이고, 사서 전식(沙西 全湜), 큰아들 규천 전극항(虯川 全克恒), 작은아들 창주 전극념(滄洲 全克恬) 3부자가 함께 낙강범월시회에 참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得淸字小序

‘淸字’자를 얻어 쓰는 시의 짤막한 서문1)

 沙西 全 湜

 

단구2)의 15일 자리에 나와 蒼石3)옹이 갔었다. 좌석의 손과 벗은 다 평소 의중에 있던 친한 이었다. 종일 술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어 그 취흥이 거나한데 얼마 뒤 어스름녘에 더위가 가시자 작은 거룻배를 앞 여울에 띄워 달빛을 타고 거슬러 오르며, 퉁소 소리를 들으니 단란하고도 즐거웠다.술병을 기울여 자작하고 노래하고 읊조려 서로 화답하니 아지 못할래라, 파옹坡翁의 옛 놀이가 능히 또 이 가운데의 진실한 즐거움을 가졌던가. 파옹坡翁은 두 손을 얻어 따랐으나 우리들과 더불어 한가롭게 논 사람은 이미 10여 인에 이르렀다. 그 풍류와 문장의 아담함은 또 두 손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우리들의 오늘 밤 놀이는 옛날 동파옹의 놀이에 그리 뒤지지 않으리라. 다만, 날이 16일이 아니고4) 강이 적벽은 아니나, 오히려 용연5)에서 모여 완상키로 하였으니, 이 못은 실로 嶺南영남의 큰 못이다. 붉은 언덕과 푸른 절벽이 빙 둘러서 하늘 높이 섯는데 파옹으로 하여금 다시 놀게 하더라도 반드시 이 사이에서는 시부詩賦를 읊었으리라.주인옹主人翁6) 검간공黔澗公이 젊은이와 어른 20여 인을 모아 놓고 먼저 와 있었다. 그것은, 속수7)의 모임과 비교해 보아도 아주 지나침이 있었다. 나는 마침 조물주의 희롱을 당하여 오던 길에 비를 만나 촌집에 갇히어 부득이 여러 벗과 함께 할 수 없었고, 여러 벗들도 미친 구름이 시샘하여 명월의 시8)를 욀 수도 없었다. 세상 온갖 일이 다 이같이 슬프니 좋은 때를 만나 흡족해하기 어렵다는 시를 이에서 거듭 읊조린다. 아, 속수涑水의 뱃놀이 성대하였도다. 운자韻字를 나누어 시 짓는 일은 옛부터 있었으니, 어찌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여 뒷날 오늘을 보는 자로 하여금 아쉽게 여기게 하랴. 맑을 청淸 자를 얻어서 애로라지 크게 한 번 웃는다.16일 해 질 녘, 속수로부터 도남서원으로 가다가 길에서 소나기를 만나 촌집에서 잤다.9)

 

※ 全湜(1562~1642)의 자는 淨遠이요 호는 沙西다. 西厓 柳成龍과 旅軒 張顯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임란에 창의하여 국토수호에 앞장섰고, 학문과 문학에 다 능하였다. 중국 사신행의 기행으로 「槎行錄」이 있음

1) 서문(小序)의 표시는 편의상 필자가 단 것임

2) 丹丘는, 신선이 사는 곳으로 밤낮으로 밝다는 丹邱·丹臺·丹丘城이라고도 함

여기서는 당시 상주 영역이었던 丹密縣(현·의성군)을 가르킴.

3) 蒼石은, 李埈의 호임.

4) 龍淵은, 앞에서 말한 自天臺 밑의 용소

6) 主人翁이란, 黔澗 趙靖이 당시 도남서원 원장이었음을 가르킴.

7) 涑水는, 단밀면 涑岩洞, 渭川이 동리 앞으로 흘러 동명을 대신함.

8) 明月章은, 소동파의 「전적벽부」에서도 ‘誦明月之詩’란 말이 나옴

9) 마지막 구절은, 沙西가 손수 단 註임.

 

오동나무 가지에 맑은 가을빛 드니

단구丹丘의 경치는 강성1)보다 좋도다.

뉘 집 맛좋은 술은 시벗을 맞는가

특별한 곳 호쾌한 놀이에 명월을 얻었네.

오늘 함께 완상함을 무엇이 방해하랴

문득 삼경에 이름도 깨닫지 못하네.

아득한 공중에 구름 흩어져 가을바람 이니

너른 들 하늘과 맞닿은 곳에 구슬 같은 이슬 가득하네

계수나무노 물결에 띄우니 사람 그림자 일렁이고

꽃다운 자리 물에 임하여 나그네 마음 깨끗하네.

술잔 앞 시 읊음은 강락2)을 따를 만하고

좌상의 문장 재능은 수형3)을 맡을 만하네

아름다운 일4)은 천년 세월에 드문데

좋은 날은 하물며 두 어려움5)을 겸하였네.

오래 앉았으니 문득 적삼이 서늘해져

도리어 허공을 날 날개라도 생기는가 싶네

그래서 옛날 멋진 자취 남긴 일 상상하고

다시 오늘 밤 뭇 선비 모일 일 생각하여

배를 옮겨 연일 밤 즐김을 갖고자

말고삐 나란히 하고 벗들 가는 길 재촉하였네

소나기가 어찌 곽노6)에게만 푸짐한지

찬 주점7)에서 끝내 장경長卿같이 누웠네

원망스레 용암8)을 바라보니 몸은 병날 지경인데

좁은 방에 혼자 자며 꿈결에 자주 놀라네.

저같이 많은 시기 받은 건 조물주의 탓이니

하찮은 재주로는 군평9)에게 묻지 말라.

여러 번 동파노인 후적벽부10) 읊조리니

도산陶山의 한바탕 웃은 정11) 배나 생각나네.

모부12)에서 시월에 다시 유상하여

뱃전 두드림 낙강洛江에 모여 또 서로 맞자네.

신선땅이 아마도 범인을 받아 주겠지

학이 나를 스치며 우는 소리 오래도록 듣네.

 

1) 신선 땅 같은 丹丘(단밀현)의 경치는 江城(강마을)보다 좋다는 뜻. 江城은, 李白의 ‘江城如畵裏’(강가의 성은 그림 같은데)라고 하여, 宣城을 묘사한 바가 있음.

2) 康樂은, 진나라의 謝靈運(385~433)을 가르킴이니 그가 康樂侯에 봉작되었기 때문에 불리던 호. 書畫에 정교하고 시에 능하였으며 성품이 호탕하고 산수를 사랑하여 회계에 살며 시를 지으면 귀천 없이 다투어 외었다 함. 李白이 그의 시풍을 사랑함.

3) 水衡은, 고대 한무제 때 설치했던 皇家의 上林苑을 관장하고 겸하여 稅收를 관리하던 관청. 여기서는 조정의 주요 벼슬을 지칭함.

4) 소동파가 행하였던 적벽놀이.

5) 二難은, 겸하기 어려운 두 일로, 여기서는 뛰어난 풍경과 선비를 다 갖추기 어려움을 뜻함

6) 郭老는, 집을 떠나 타향에 있는 노인으로 봄. ‘郭’은 성밖이란 뜻이 있어, 작자가 상주성 밖의 단밀에 있었기 때문.

7) 寒壚(찬 주막)의 ‘壚’를 문집(沙西先生文集卷1)소재의 작품에서는 ‘술독로罏’자로 표기하엿다. 본 작품은 문집 소재의 작품과 詩語가 다른 곳이 아주 많은데 심지어는 詩句까지 변경된 곳이 11군데나 됨, 뒤의 長卿은 司馬相如의 字

8) 龍岩은, 洛江의 명소 자천대 밑 용소.

9) 君平은, 한나라 嚴遵의 字.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음.

10) 소식의 〈後赤壁賦〉는, 꿈에 깃옷을 입은 道士를 만나는 일이 주요 제재가 된 작품임.

11) 『沙西先生文集』 소재의 작품 끝에는 이 웃음에 대한 註가 달렸음. 즉, 退溪가 月川 趙穆등과 風月潭에서 놀기로 하였는데 비가 와서 놀지는 못하고 시 두 수를 지었다. 제1수의 3.4구에서, “무단히 어젯밤 강이 바다 되어, 천 년의 풍류 한바탕 웃음에 부치었네. ”(無端昨夜江成海 千載風流一笑休)라고, 하였음

12) 謀婦는, 모의하는 곳. 의견을 모아 결정하는 곳이란 뜻의 謀府의 誤記인 듯함.

 


[原文]

 

得淸字

 

沙西 全湜

 

丹丘十五之席 余與蒼石翕赴焉 座上賓朋俱平素意中之親也 竟日酬酌 其興陶然 旣而薄暮暑去 因泛小艇於前灘 乘月洄泝 聽簫團樂 壺觴而自酌 歌詠而相和 未知坡翁舊遊 能復有此中眞樂耶 坡翁得二客從行 吾黨之所與翶翔者 已至十數輩 而其風流文雅 又非二客之比 則吾黨此夜之會 不必多讓於疇昔也 第以日非旣望 江欠赤壁 更圖會翫於龍淵 淵實嶺中之巨浸也 丹厓翠壁 環立揷天 使坡翁復遊 亦必有吟於此間也 主翁黔澗公 會少長二十餘人 已先在矣 其視涑水之集 亦遠過之 余適値造物兒所戱 滯雨於道傍村舍 不得與諸友同之 而諸友亦被狂雲之妬 不果誦明月之章 世間萬事皆如此怊悵 難逢恰好辰之時 重咏於斯焉 嗚呼 泛涑之擧盛矣 分韻之事古也 烏可以拙才而辭之 使後之視今者惜也 得淸者聊博一笑 十六日暮 自涑水向書院 路遇驟雨 滯宿村舍

 

秋入梧梢報晩晴

丹丘色相好江城

誰家美酒邀詩伴

特地豪遊得月明

今者何妨供勝翫

居然不覺到深更

遙空雲散金風起

曠野天低玉露橫

桂棹泛流人影動

芳筵臨水客心淸

樽前歌詠推康樂

座上文才屬水衡

美事由來千載罕

良辰况是二難幷

偏知坐久衣衫冷

却訝凌虛羽翼生

仍想昔年留勝迹

更思來夕會群英

移船欲辦連宵樂

須友爭催並轡行

驟雨豈曾饒郭老

寒壚終復臥長卿

龍岩悵望身還病

蝸室孤眠夢屢驚

若被多猜因造物

休將小數問君平

頻吟坡叟重遊賦

倍憶陶山一笑情

謀婦孟冬猶再賞

叩舷崇洛且相迎

仙區倘荷客凡骨

佇廳玄裳過我鳴

 

[출처] 역주 낙강범월시( 譯註 洛江泛月詩) [ 譯 권태을]

 

* 사서 전식 선생님은 우리가 배우는 국사 교과서에는 충분히 나오지 않는 분이나 상주출신의 유명한 대학자이다. 채수, 정경세,이만부, 정종로, 이준 송준길등 등 천재적인 대유학자가 상주에서 태어나거나 낙향, 혼인 관계로 상주를 사랑하며 상주에서 활동한 역사적 인물이다. 이외 많지만 차츰 필자가 연구하는대로 글을 쓰서 발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