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상주의 자랑-민간 의료인 청죽 성람 선생(조선시대)

문장대 2023. 11. 26. 16:40

우리나라 역사상 수 많은 의료인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허준선생님과 성람선생을 우리나라 역사상 유명한 의료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옛날 의료인들은 한문을 많이 공부하여 중국이나 우리나라 의료책을 공부하여 침과 뜸, 한약으로 환자를 치료했다. 간혹 예리한 칼로 종기나 부폐한 살을 도려내는 외과적 수술을 한 의료인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 한의사들은 소독에 소홀하여 침을 놓는 방법으로 치료할때는 소독에 소홀하여 병을 여러사람에게 전염시킨 사례도 허다하다. 예를들어 천형이라는 한센병에 걸린 사람에게 침을 놓고 소독없이 그대로 다른사람에게 침을 놓으면 백발백중 전염되는 무서운 치료방법이다. 요새는 수지침을 쓰고 1회용 주사기를 사용하여 전염이 없지만 몇년전만해도 그렇치 못하고 금침이니 동침이니 하면서 마구 찔려댔어니 정말 무서운 치료 행위 였다. 주사기를 삶거나 불에 소득하면 그래도 전염이 덜하지만 주사기 재사용고 침의 사용은 절대적으로 무식한 치료행위다. 잠시 동안 우리나라 침과 소득에 대하여 흥분하며 글을 올렸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오래동안 살지 못하고 일찍 병들어 죽은 원인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선조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삶을 살아간 불쌍한 백성들이었다. 전쟁에 죽고 병에죽고 굶어죽고 맞아죽고 했으니 사는게 아니다 그냥 목숨이 위태롭게 운좋게 이어지거나 죽는 상태다. 참으로 생각하기도 싫은 시기인데 왜군은 조선인과 조선 병사들의 귀와 코를 뻬어서 전쟁의 포상방법으로 수행했다. 그 당시 코와 귀에 소독을 해 주었을가? 정말 지독하고 천인 공노한 만행을 왜군은 조선에서 저질렀다. 이런 시기에 우리나라의 2분의 명의가 있었으니 2분중 1분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이고  한분은 경상도 상주의 유학자이면서 의료인인 청죽 성람 선생이다. 허준 선생은 젊은 시절에는 지금의 산청인 산음에서 민간인 치료를 했지만 스승의 노력과 본인, 가족, 주변의 도움으로 궁중으로 초빙되어 왕자들을 치료하여 인정받고 궁중과 조정의 의료시설인 혜민원에서 의술 활동을 했다. 그러니 국가의 의료공무원이었다. 허준도 서출출신으로 수 많은 고통을 극복하고 명의가 되었고 광해군 임그미절에는 빛나는 의료서책인  동의보감을 저술했다. 참으로 대단하다. 조선후기에는 이제마와 지석영이라는 한의사가 또한 유명했지만 선조시대에 지방 민간인으로 의료에 참여하여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준 한의사도 있다. 그분이 바로 상주의 유명한 민간 의료인 청죽 성람 선생님이다. 허준선생에 비하여 모든면에서 우수한 유학자이면서 의료인이다. 출신면에서도 성람선생은 양반가 출신이고 친구들도 모두 상주의 유명한 학자들이다. 지금부터는 여러 사료를 인용하고 참고하여 성람선생에 대하여 논하고자 합니다.성람선생의 출생부터 사망 그리고 현재의 유적, 사료 등을 올립니다.

 

 

상주의불천위(성람)

■청죽 성람(聽竹 成覽)
🔸자: 사열(士悅), 
🔸호: 청죽(聽竹)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생졸:1556년(명종11) ~1620(광해12)
🔸성격: 문신, 학자
🔸성별: 남
🔸본관: 창녕(昌寧)
🔸대표관직: 효릉참봉, 공조좌랑, 무주현감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본관은 창녕(昌寧). 초명은 성협(成浹), 자는 사열(士悅), 호는 청죽(聽竹). 성완(成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희주(成希周)이고, 아버지는 감사 성세평(成世平)이며, 어머니는 노공좌(盧公佐)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부터 성리학에 뜻을 두어 형 성호(成浩)와 함께 남언경(南彦經)에게 수업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의학에도 밝아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구언령(求言令)이 있을 때마다 수천언으로 진소(陳疏)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처가인 상주에 거처하면서 조익(趙翊)·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교유했다. 벼슬은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된 이래 장원·별좌·공조좌랑·무주현감을 역임한 바 있다.

 



 

존애원





 

위치 :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

⬆️청죽선생유고(聽竹先生遺稿)


●청죽유고(聽竹遺稿)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청죽(聽竹) 성람(成覽)의 시문 집.2권 1책. 목활자본. 1926년 11대손 극(○)이 편집, 간행하였다.권두에 박성양(朴性陽)의 서문이, 권말에 석중(錫中)·석만(錫晩)·극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권1에 시 12수, 소(疏)·유훈(遺訓)· 지경지남도(持敬指南圖) 각 1편, 권2에 부록으로 묘갈명·묘갈추기(墓碣追記)· 유사·정부인홍씨사적(貞夫人洪氏事蹟) 각 1편, 제문 3편, 만사 19수, 기술잡록(記述雜錄) 14편, 통문 3편, 봉안문 3편, 축문 3편, 사실(事實)·원고서(原稿序)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술회계붕당(述懷戒朋黨)」은 점차로 극심해가는 당쟁을 근심하여 모두 사리를 버리고 국익을 위하여 합심하여야 한다고 인심을 풍자하고 충의를 나타낸 것이다. 소의 「인구언논시폐소(因求言論時弊疏)」는 당시 시급하게 고쳐야 할 문제를 진언한 것으로, 사소한 사원(私怨)이 붕당이 되어 국가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것은 선비들의 수치라 지적하고 여론을 종합하여 관민의 뜻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 급선무라고 설명하면서 백성을 사랑하고 세금을 감면하여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이 곧 인정(仁政) 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소는 당시 붕당의 피해, 이산해(李山海)의 실정 등을 지적한 것이므로 당쟁사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유훈」에는 위인(爲人)의 방법으로 입지(立志)·행세(行世)·신언(愼言)·처가 (處家) 등의 방법이 언급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효제(孝悌)가 으뜸으로, 말을 삼가는 것을 처세의 기본으로 삼고 처자들의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는 것 등이 그 방법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밖에 「지경지남도」는 수신하는 방법을 도시한 것이다.

 

 

●존애원(存愛院)
🔸️소 재 지: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번지

🔸️소 유 자:상산 김씨 외 12문중
🔸️문화재 지정:도지정 기념물 제89호
🔸️수 량:1동(714m²)
🔸️시 대:조선시대(1602년)

 

존애원(存愛院)은 임진왜란 뒤에 질병의 퇴치를 상주의 백성들이 자치적으로 해결하고자 설립한 조선 최초의(현재까지) 사설(私設) 의료기관(醫療機關)이다. 선조 32년(1599)에 이 지역에 대표적인 두개의 계(稧)를 합계하여 기해 낙사계로 합사한 13개 문중 24명이 존애당에 모여 향풍쇄신 과 민풍순화, 그리고 특별히 자치적으로 의료행위를 하기로 하였다. 이에 김각(金覺)・송량(宋亮)・성람(成灠)・이전(李㙉)・ 이준(李埈)・강응철(姜應哲)・김광두(金光斗)・정경세(鄭經世) 등의 선비들이 창설하였다. 특히, 우복 정경세의 주도 아래 청죽(聽竹) 성람(成灠)을 주치의(主治醫) 로 모셔와 선조 35년(1602)에 건물을 완성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료행위를 시작하게 돠었다. 즉, 약재 보관 창고와 환자 수용 시설인 당우(堂宇)를 차례로 짓고, 향약재는 슬려 등 유수(遊手)들을 모집하여 채집하거나 당재(唐材)는 미포 (米布)로 무역하여 조달하였다. 약국으로서 운영 규약인 원규(院規)도 있었다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존애원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 학자 정자 (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 왔다. 이는, 1599년에 창설되고, 1602년에 완성되었다. 그후 1811년(순조 110에 중수된 뒤 1886년(고종 23)에재보수했다. 존애원은 미증유의 전화(戰禍)를 입고 질병 앞에 무방비 상태였던 상주 백성들의 고통을 스스로 덜어 주기 위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사설의료국(私設醫療局)이었다. 의료시설이 아주 적었던 당시였지만, 존애원은 많은 약재와 시설을 갖춰 주민과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해 줌으로서 다른 지방에 비해서 큰 자랑거리였으나, 1782년 (정조 6)에 윤모씨(尹某氏)의 무고(誣告)로 관련 문서와 책자 등이 사헌부로 압송되어 유실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료행위는 점차 상실되었다. 그 후 정조의 하문을 받고 초계문신 이동 (李埬)이 1797년(정조 21)에 낙사계의 사실 조사를 아뢰니, 이에 정조대왕도 ‘대계(大稧)’란 칭송을 하면서 자신도 가입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존애원은 의료 활동 뿐 만 아니라 지역민의 화합을 위한 각종 행사를 치루기도 했는데, 그 중 1607년부터 1894년까지 287년 동안 백수회(白首會)라는 경로(敬老)잔치 를 개최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로, 이는 1906년까지 한광(韓匡)의 아들이 여기서 관례(冠禮)와 함께 ‘대계백수회’를 가진 바도 있다. 존애원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상주 선비들의 박애정신(博愛精神)에서 탄생한 사설 의료국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향토 사랑을 실천한 낙사계원들의 모임의 역할도 한 곳이다. 당시 존애원 창설에 동참한 13개 문중은 진양 정씨(晋陽鄭氏)・흥양 이씨(興陽李氏)・여산 송씨(礪山宋氏)・영산 김씨(永山金氏)・월성 손씨(月城孫氏)・청주 한씨(淸州韓氏)・상산 김씨(商山金氏)・재령 강씨 (載寧康氏)・단양 우씨(丹陽禹氏)・회산 김씨(檜山金氏)・무송 윤씨(茂松尹氏) ・창녕 성씨(昌寧成氏)・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존애원의 창설로 상주에 있던 두 계(稧)가 기해낙사계로 합사(合社)했으며, 13개 문중의 계원은 24명이었고, 합계(合稧)한 자리가 존애당(存愛堂)이었다.

 

⬆존애원(存愛院)

※참고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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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독골 영환이 선생님의 자료를 올려 성람선생님의 귀한 업적을 알렸고 필자도 몇개의 자료를 올려봅니다.

 

능암리 마을 끝 성해식 독립투사 비석뒤로 조금 오르니 청죽선생님의 묘비가 존재합니다.

 

도로에서 300m 정도 좋은 묘지길로 따라 어림잡아 오르니 제일 위에 성람선생님 묘소가 존재합니다. 

 

묘지에서 보는 남쪽의 여러 능선이 멋지고, 할배산, 갈방산 석단 분맥이 이어집니다.  북천이 흐르는 배산 임수의 명당 같아요. 후손의 묘도 다수 있네요.

 

 

 

남장마을 끝 도로 옆 코스모스 공원 구도로 위에는 청죽선생 묘갈비가 존재하고 성람선생님의 묘갈을 설명합니다. 1650년 조익, 1701년 권상하 선생님이 추가로 기록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래는 청죽 선생님의 묘갈 사진입니다.

청죽 선생님의 묘갈

* 묘갈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묘갈(墓碣)은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 세운 작은 비석이다. 비석에는 무덤에 묻힌 인물의 직함, 별칭(자, 호), 이름 등을 새기는데, 지위가 높거나 명성이 있으면 명문(銘文)을 새기기도 한다. 명문을 새길 때에는 명문을 짓는 이유를 설명하는 서문(序文)을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유래 :  중국 고대에는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희생물을 매어두는 용도로 비석을 설치하였다. 또 해그림자를 표시하여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비석을 활용하였다. 후에 이 비석에 무덤 속 인물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새기면서 묘갈을 세우는 풍습이 점차 확대되었다. 고려시대 최충(崔沖)의 '홍경사갈(弘慶寺碣)'을 묘갈의 시작으로 본다. 15세기 후반에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이 크게 보급되자 묘역을 치장하고 묘비를 세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 묘비의 종류

  묘에 세우는 비석은 크게 묘표, 묘갈, 신도비로 나뉜다.

  • 묘표(墓表) : 가장 간략한 형태의 비석이다. 앞면에 어떤 사람의 묘라는 것을 나타내는 신원(관직, 호, 이름 등)을 쓰고, 뒷면에 건립 연대를 새긴다. 연대를 쓴 곳에 자손 명단을 간략하게 넣기도 한다.
  • 묘갈(墓碣) : 본래 가장 윗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세우는 형태의 비(비석)를 의미하였다. 후대에 와서는 거북모양의 받침돌을 놓고 용모양의 머릿돌을 올리기도 하는 등 묘비와 묘갈의 구분이 사라졌다. 묘갈에 새긴 글에 명문과 서문이 같이 있으면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 명문만 있으면 '묘갈명(墓碣銘)'으로 비석의 제목인 비제(碑題)의 마지막 부분을 마무리한다.
  • 신도비(神道碑) : 2품 이상 관직을 지냈거나 2품 이상으로 추증된 인물의 묘 앞에 세우는 비를 의미한다. 묘표 또는 묘갈과 별도로, 묘의 동남쪽 위치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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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의 현재 모습

 

                                                    조선시대 민간 사립병원 존애원(옛날 병원)

 

<추가 중복 설명>

우복 정경세의 주도 아래 청죽(聽竹) 성람(成灠)을 주치의(主治醫) 로 모셔와 선조 35년(1602)에 건물을 완성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료행위를 시작하게 돠었다. 즉, 약재 보관 창고와 환자 수용 시설인 당우(堂宇)를 차례로 짓고, 향약재는 슬려 등 유수(遊手)들을 모집하여 채집하거나 당재(唐材)는 미포 (米布)로 무역하여 조달하였다. 약국으로서 운영 규약인 원규(院規)도 있었다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존애원이란 이름은 중국 송나라 학자 정자 (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 왔다. 이는, 1599년에 창설되고, 1602년에 완성되었다. 그후 1811년(순조 110에 중수된 뒤 1886년(고종 23)에재보수했다. 존애원은 미증유의 전화(戰禍)를 입고 질병 앞에 무방비 상태였던 상주 백성들의 고통을 스스로 덜어 주기 위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사설의료국(私設醫療局)이었다. 의료시설이 아주 적었던 당시였지만, 존애원은 많은 약재와 시설을 갖춰 주민과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해 줌으로서 다른 지방에 비해서 큰 자랑거리였으나, 1782년 (정조 6)에 윤모씨(尹某氏)의 무고(誣告)로 관련 문서와 책자 등이 사헌부로 압송되어 유실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료행위는 점차 상실되었다.

 

 

* 상주인으로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상주 성모병원 초대원장-설립자인 성부홍 선생님은 성람선생의 후손인가 생각된다.

* 상주에서 개업하고 있는 여러병원들은 성모병원 출신 의사들이다. 현재 성모병원은  황정한 원장님이 경영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