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영남 상주의 인물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에 관한 글을 출처 올리고 정리한 글입니다. 두분은 임진왜란과 호란을 모두 겪은 인물입니다. 특히 형님인 91세까지 장수하신 이전 선생님은 병자호란까지 겪은 분입니다. 이준은 76세 사망. 두분 모두 상주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 설립의 덕분이 아닐 까요? 당시에 91세까지 산다면 대단하죠-큰 전쟁이 4번이고 당쟁이 심한 시절인데!! 정철과 정인홍 정치에 의해 살아남은 것이 대단합니다. 하긴 유성룔과 정경세 선생님들 당대 선조시대의 휼륭한 분들이 많아 배경은 좋았지만 참 대단합니다. )
이전 李佺
시대출생 - 사망본관이명직업가족관계본관
조선 |
1558년(명종 13년) ~ 1648년(인조 26년) |
흥양(興陽) |
자 : 숙재(叔載) 호 : 월간(月澗) |
문신 |
남동생 : 이준(李埈) |
흥양(興陽) |
조선의 문신.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澗). 본관은 흥양(興陽). 창석(蒼石) 준(埈)의 형. 1640년(인조 18) 유성룡(柳成龍)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을 때 형제가 그에게 찾아가 수학하였으며, 이 때부터 주자학(朱子學)을 전공하게 되었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세마(洗馬)ㆍ독우(督郵)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인조 반정 후 기용되어 지례(知禮)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후에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 유유자적했다.
문헌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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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李埈 ]
조선의 문ㆍ무신.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본관은 흥양(興陽). 수인(守仁)의 아들. 일찍이 유성룡(柳成龍)에게 학문을 배우고 1582년(선조 15) 생원에 합격, 1591년 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어 임진왜란(1592)에 정경세(鄭經世)와 더불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고 고모담(姑姆潭)에 진쳤다가 적의 급습을 받아 간신히 몸을 피하였다. 경상 도사(慶尙都事)가 되어 감사를 도와 모든 계획을 세우고 경리를 밝혀 시기에 적절하게 처리하였다. 《중흥귀감(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는 역대 제왕의 덕행(德行)의 득실과 신하들의 정사(正邪)에 이르기까지 밝힌 것이다. 정인홍(鄭仁弘)이 권세를 잡으니 사대부(士大夫)가 다 아부하였으나 준이 홀로 그를 가까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번은 인홍이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있을 때 그리로 지나는데 인홍이 맞아들이려 했으나 거절하고 도리어 꾸짖은 일까지 있었다. 1597년 지평(持平)이 되어 정언(正言) 장만(張晚)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고향에 돌아갔다가 그 해 가을 왜적이 다시 준동하므로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도와 성을 수축하고 군량을 모았으나 조정의 명령으로 중지되자 소를 올려 항의하였다. 광해군 때 교리(校理)에 재직 중 바른 말을 한 임숙영(任叔英)을 몰아낸 일을 극간하였고 정인홍이 이회재(李晦齋)ㆍ이퇴계(李退溪)를 비방하자 이를 공박하였으며 정인홍의 유적(儒籍)을 삭제하고 사실을 중외에 선포한 태학의 제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동료들을 데리고 소를 올려 극간하였다. 광해군의 정치가 날로 문란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인조 반정 후 집의(執義)에 이르러 이조 참판 이귀(李貴)의 뜻에 거슬려 철원(鐵原) 부사로 좌천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의승군(義勝軍)을 모집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보내었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다시 의병을 모집하고 난이 평정되자 전주(全州)에서 수집한 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니 인조가 특히 절충장군 첨지중추 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임명하였으며,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준 [李埈]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창석 이 준(李 埈:1560∼1635)선생은 호는 창석(蒼石)이며 이전의 아우이다.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안령 전투와 고모담(姑母潭)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준이 백화산(白華山)에서 왜군과 싸우다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형 이전이 죽음을 무릅쓰고 동생 이준을 업고 전장을 빠져나와생명을 건지게 했다는 내용이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에 적혀 있다. 이전은 자(字)는 숙재(叔載)이고 호(號)는 목재(睦齋)이다. 나중에 호를 월간(月澗)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으며 찰방(察訪)과 현감을 지냈다. 이준은 자는 숙평(叔平)이고 호는 창석(蒼石)이며 이전의 아우이다. 건물로는 체화당과 이전을 모시는 월간사당(月澗祠堂)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600m 떨어진 곳에 이준을 모시는 창석사당(蒼石祠堂)이 있다. 체화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반의 팔작집이며, 창석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창석사당은 1996년 12월 11일에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78-2호로 지정되었다.
월간창석형제급난도
[ 月澗蒼石兄弟急難圖 ]
월간창석형제급난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1986년 12월 11일 |
경상북도 상주시 경천로 684 (사벌면) 상주박물관 |
조선시대 |
유물 / 일반회화 / 풍속화 |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李埈) 형제의 충성과 우애를 소재로, 중국 명(明) 화공이 그린 그림이다. 세로 29cm, 가로 21.5cm의 저지한장본(楮紙韓裝本) 오침법(五針法) 총 112면의 첩장(帖裝)으로 이루어졌다.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이전과과 이준 형제가 머물던 향병소(鄕兵所)에 왜군이 들이닥쳤고, 곽란으로 몸이 불편한 이준이 형에게 혼자만이라도 피할 것을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白華山)으로 몸을 피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604년(숙종 20)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간 이준이 이 이야기를 전하자, 감동하여 화공에게 시켜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림은 백화산 아래 진을 치고 창검을 든 왜군이 두 형제에게 다가오자 형이 아우를 설득해 업고 떠나는 장면, 업고 가던 아우를 내려놓고 왜군을 향해 형이 화살을 겨누는 장면, 적을 물리치고 아우를 업고 산 정상을 향해 달리는 장면, 백화산 정상에서 아우를 내려놓고 위로하는 장면 등 모두 네 장면을 그렸는데, 극히 사실적이며 운필이 대담하다. 그림이 완성되자 창석은 주변에 이 사실을 소재로 시문을 청했으며, 유근(柳根)·이민구(李敏求)·이경석(李景奭) 등 당대 명인들이 써준 글들은 부록으로 그림 뒤에 붙여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간창석형제급난도 [月澗蒼石兄弟急難圖]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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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중기의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은 선서하였다. 선서(善書)란 ‘글씨를 잘 썼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그의 작품은 간찰(簡札)마저도 매우 희소하다. 창석 이준과 그의 형 이전(李㙉)은 조선중기에 형제간의 우애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니 만치, 이전과 이준 형제의 유묵은 조선시대에도 수집가들 사이에서 선호되었지만, 좀처럼 볼 수가 없다. 특히 이전의 유묵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없어 그 수준을 평하기가 불가능한 것 같다.
1. 창석 이준의 약력
이준(李埈, 1560~1635)의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이다. 본관은 흥양(興陽)이고, 이조년(李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탁(李琢)이고, 아버지는 이수인(李守仁)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 신수경(申守涇, 10세)의 딸이다. 창석 이준은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했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다. 그 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 천 명을 모집해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해 경상도 도사가 되었으며,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을 주변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이 국정운영의 잘못 등으로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해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 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로운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했으며, 그 뒤 부응교, 응교, 집의, 전한, 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집권 서인 세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 공(仁城君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했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해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했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 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 《형제급난지도》 원화 《월간창석형제급난도》와 그 주인공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 원화, 지본담채(紙本淡彩), 가로 21.5cm×2, 세로 29㎝. [사진 제공 – 이양재]1604년(선조37)에 제작된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과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형제의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가 있다. 이 그림은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 형제의 우애를 묘사한 목판화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의 원화(原畫)로, 가로 21.5㎝, 세로 29㎝이다. 그 원본이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에는 얽힌 일화가 있다. “임진왜란 다음 해인 선조 26년(1593) 봄, 병으로 거동이 힘들던 동생 창석 이준 선생이 형인 이전 선생에게 피신하여 가문을 보존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형은 동생의 부탁 대신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동생을 업고 백화산 정상으로 피해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후에 창석 이전 선생이 명나라에 가서 중국인에게 이야기하니 그들이 감동하여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라고 한다.
그림을 보면, 백화산을 배경으로 왜적이 산 아래 진을 치고 창검을 들어 형제에게 다가오자 형이 아우를 업고 떠나는 장면, 업고 가던 아우를 내려놓고 적들에게 활을 겨누는 모습, 산 정상을 향해 아우를 업고 달리는 모습 등이 한 면에 묘사되어 있다. 그림이 완성되자 창석 이준 선생은 주위의 유명인에게 시문을 청하여 부록으로 그림 뒤에 부치었다. 비록 중국인 화공이 그린 것이긴 하나, 그림만으로도 지극한 형제애를 느끼게 해주며, 그림 뒤에 붙은 선비들의 시문 역시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다. 원본은 1책 56판(112면)이며, 표지 제목은 형제급난도병서시(兄弟急難圖幷序詩)」이다. 표지 다음에 간지가 있고, 제2정부터 제3정까지 주색단선(朱色單線)으로 곽(廓)을 그어 놓고 제2정 전면(前面)에 전자대자(篆字大字)로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라는 여섯 자로 표제하고 2정 이면과 3정 전면에 형제급난지도가 있다. 제4정부터 제56정까지는 병서시(幷序詩)로 유명인사의 자필이 수록되어 있다. 구도(構圖)는 대각선이며, 청·홍·황·흑(靑·紅·黃·黑)의 4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림에는 준령(峻嶺) 구릉(丘陵)과 왜진기치(倭陳旗幟)와 형제가 피난하는 5개 장면을 구체적으로 그려 놓았는데 순서는 형제논의(兄弟論議)→부제급피(負弟急避)→당왜격퇴(當倭擊退)→부제등고(負弟登高)→산정도달(山頂到達)로 되어있다. 왜병(倭兵)이 칼을 잡고 추격하는 장면(執刀追擊場面)에는 이들이 모두 하반신에 훈도시(褌)를 차고 있다. 왜진 기치는 청색 9본, 황색 9본, 홍색 10본이다. 병서시 부분은 제4정에 이준의 구제급난도(求題急難圖)가 있고, 5정부터 8정까지 제형제급난도(題兄弟急難圖)라는 자필이 있다.이어서 이 두 글에 답하는 여러 인사들의 친필이 끝까지 실려있다. 즉 제문을 쓴 이는 이호민(李好閔) 이수광(李晬光) 정경세(鄭經世) 등 26명의 친필이 실려있다. 형제급난지도는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갈충우애(竭忠友愛)의 주제화(主題畵)이다. 부록으로 첨가된 병서시는 당시 명현 문필가의 친필을 모은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이 그림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명나라 화공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림의 화법이 조선초기 삼강행실도에서 보여주는 한 면에 여러 상황을 그려내는 조선의 전형적인 행실도 모습을 하고 있다. 실물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사진만을 보았을 때 필자의 감각으로는 이 그림은 명나라의 종이가 아니라 조선의 닥종이에 그려진 것 같다.
3. 목판본 《형제급난지도》
중국화공이 그린 필사본 <형제급난도>와 더불어 1652년 현손 증록增祿이 편집하고 목판본으로 간행한 <형제급난도>(도2)도 있다. 이 목판본은 규장각에 보관된 것도 있고 심지어 경매에도 나오는 등 다수가 전해지고 있다. 목판본 <형제급난도>의 내용도 중국의 화공이 그린 필사본을 그대로 판각한 것으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목판본을 통해서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은 화면의 하단에서 상단으로 옮겨가면서 그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림의 순서에 따라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형제급난도>화면의 하단에는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의 막사와 창검기치가 표현되어 있어 왜군의 주둔지임을 알 수 있다. 왜군의 주둔지 위에는 월간과 창석 형제가 앉아서 의논하는 듯한 장면[兄弟論議]과 아우인 창석을 업고 왜적을 피해가는 장면[負弟急避](도3)이 있으며, 그 좌측은 동생을 업고 가다 왜군을 만나 대항하는 장면인데 월간이 업고 가던 동생을 내려놓고 왜적을 향해 활을 쏘며 격퇴하는 장면[當倭擊退](도4)이다.
마주한 두 명의 왜군은 창을 든 것으로 보이는데 하의下衣를 벗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왜군의 미개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 위로는 적을 물리치고 아우를 업고 산 정상을 향해 달리는 장면[負弟登高] 및 백화산 정상에서 아우를 내려놓고 위로하는 장면[山頂到達](도5) 등 모두 다섯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당대 명인들이 작성한 병서시
1604년 그림이 완성되자 창석은 경향의 유명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고 이를 소재로 하여 시문을 청했는데, 이 시문이 ‘병서시’이다. 형제애를 찬양한 이들은 이호민李好閔, 차천로車天輅, 손기양孫起陽, 이수광李睟光, 이안눌李安訥, 류근柳根, 정백창鄭百昌, 신흠申欽, 정경세鄭經世, 이민구李敏求, 조경趙絅, 이경석李景奭 등 27명의 당대 명인들이다. 이 병서시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첩장의 4정부터 56정까지 부록으로 그림 뒤에 붙여놓았다.
《형제급난도병서시》에 나오는 문인들의 글을 통해 ‘체화’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우복 정경세가 <형제급난도> 뒤에 쓴 발문을 보면 이들 형제가 얼마나 우애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전李㙉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확실하면서도 지키는 바가 있다하고, 잘 모르는 사람은 착하기는 하나 무능하다한다. 이것은 이전의 평상시 행실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내가 이전와 더불어 이웃하여 산 것이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였는바, 이전에 대해 잘 알기로는 의당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가 능히 난리에 임해서도 겁내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치 않음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나는 참으로 이미 잘 알고 있다.
– 중 략 –
내가 이전을 보건대 그 우애友愛의 마음은 겉부터 속까지 털끝만큼도 거짓으로 꾸밈이 없으며,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어느 한순간이라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동생 이준李埈이 일찍이 폭허증暴虛症을 앓아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 여러 달 동안 낫지 않고 있었는데, 이전이 밤낮없이 함께 거처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은 채, 때맞추어 음식을 먹이고 약재를 조제하였으며 때맞추어 잠자고 일어나게 해 끝내 완전히 낫게 하는 데에 이르렀는바, 그 지극한 행실이 신명에게 미더움을 받은 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생生과 사死가 갈리는 위태롭고 절박한 즈음에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호응하는 듯하고 취하고자 하면 바로 앞에 있는 것과 같았던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아니한가. 이전의 행실 가운데에 미칠 수 없는 것은 특히 이런 점에 있다. 나는 이 그림을 보는 자가 혹 제대로 알지 못할까 염려되어 짐짓 드러내어 써서 이전에 대해 논하는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평소에 순수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고 창졸간에 수립한 바는 바로 그 마음을 미루어 나간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본관은 연안.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는 오언배율五言排律의 시로써 월간 창석 형제의 우애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대 집안 형제간에 우애가 좋으니 [君家好兄弟]
대의는 연한 가지 소중히 여기었지 [大義重連枝]
전란이 일어날 땐 피란을 하였었고 [避地軍興際]
왜적이 핍박할 땐 신명을 보전했지 [全軀賊逼時]
막내아우 바야흐로 질병에 걸렸으니 [季方嬰疾病]
맏형이 어찌 차마 떠나려고 하겠나 [長肯忍分離]
칼날의 앞에서도 두렵지 않은지라 [冒刃何曾畏]
혼자서 활 쏘면서 버티어 냈었지 [彎弓獨自支]
성의에 감동이 되었다고 말할 뿐 [只言誠意感]
그림이 기특한 건 믿기지 않았네 [未信壯圖奇]
기러기 그림자는 서로가 연접했고 [鴻鴈影相接]
할미새는 울면서 다 같이 따라가네 [鶺鴒鳴共隨]
형제 위해 기도한 건 옛이야기 돼버렸고 [祈哀聞古者]
오늘날은 형제간에 욕한 것만 보았었지 [怒罵見今玆]
심간이 내킨 대로 분기할 뿐이지 [但倚心肝奮]
어떻게 수족이 손상되게 하겠는가 [寧敎手足虧]
시랑이 같은 적도 도리어 달아나니 [豺狼還却走]
틀림없이 귀신이 도와준 것이로세 [神鬼定扶持]
무력을 가지고도 당할 수 없는데 [武力誰當此]
서생이 이와 같이 하였단 말인가 [書生乃若斯]
한 사나이가 우주에 이름나니 [一夫名宇宙]
천고에 버금가는 남아였지 [千古次男兒]
칼자루 만지면서 세 번을 감탄하니 [撫劍增三歎]
볼수록 내 생각을 자아내고 남았지 [看來起我思]
우애를 상징하는 할미새와 산앵두나무꽃
시에는 형제애를 상징하는 시어들이 여러 곳에 있다. ‘연 한 가지’는 한뿌리에서 이어진 가지라는 뜻으로 형제자매를 비유하고, ‘기러기 그림자는 서로가 연접했고’라는 의미는 형제가 기러기처럼 질서 정연한 것을 비유한다. ‘할미새는 울면서 다 같이 따라가네’는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한 것이다. 이는 《시경소아詩經小雅》 〈상체常棣〉편에 “할미새가 높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어려움의 구제에 나섰도다. [척령재원鶺鴒在原, 형제급난兄弟急難]”라고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 소疏에 “할미새는 마땅히 물가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높은 언덕에 있으니 안락한 장소를 잃은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안식처를 잃고 어려운 환경에 놓인 것과 같다. 형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로 구제해 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어에서 나오는 할미새는 척령鶺鴒으로 표현되는데, ‘鶺鴒在原’은 할미새가 노는 언덕(벌판에 있다고 해석하기도 함)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형제가 도와준다는 뜻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새이다. 실제로 할미새는 한 마리가 떠나거나 위급한 상황이 되면 시끄럽게 울며 꼬리를 마구 흔들어 댄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할미새의 위급행동을 보고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했다. <형제급난도>란 명칭도 《시경소아》 〈상체〉편의 위 구절에서 따온 것을 알 수 있다. 할미새와 같이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꽃으로 산앵두나무꽃[棣華]가 있다. 《시경소아》 〈상체〉편에 “상체의 꽃이여, 꽃받침이 환하게 빛나는구나.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만 한 이가 없느니라. [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는 어귀를 자신들의 시구에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은 《시경소아》 〈상체〉편에 나오는 어귀들을 차용해 형제간의 우애를 노래했다. 여기서 ‘상체지화常棣之華’를 줄여 ‘체화棣華(산앵두나무꽃)’를 이름으로 하는 정자를 지어 형제가 거주하면서 공부하고 손님을 맞이하면서 집안이 번창하기를 혹은 번창했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했다.
시경소아 상체 편을 시각화한 작품들
한편, 민화 문자도 <제>자에 할미새와 산앵두나무꽃이 등장하는 것은 《시경소아》 〈상체〉편의 내용을 확실하게 시각화하여 서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산앵두나무꽃이 형제간의 우애를 가리키는 이유는 꽃이 한데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체화를 이름으로 하는 정자亭子와 문자도 <제悌>자를 살펴보기로 하자.
① 체화당
경북 상주시 청리면에 있는 체화당(도6)은 <형제급난도>의 주인공인 월간月澗 이전이 노년에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체화당은 월간 이전의 셋째 아들 이신규가 1632년(인조 10) 9월에 건립했는데 월간 선생은 집을 짓고 나서 손수 ‘체화’라는 편액을 걸고 늘 이곳에 거쳐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체화당을 지을 당시 월간선생은 75세, 창석은 73살이었다고 하니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 수 있다.
② 체화정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에 있는 체화정(도7)은 영조 37년(1761) 진사 이민적(李敏迪, 1702~1763)이 학문을 닦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그 후에 그의 조카인 용눌재慵訥齋 이한오李漢伍가 노모를 체화정에 모셔 효도하였고 이에 감동한 순조가 효자 정려旌閭를 내린 바 있다. 체화정은 이민적이 형 옥봉 이민정과 함께 살면서 우애를 다지던 장소로 유명한데, 이로 보아 정자 앞 연못의 이름을 ‘체화지棣華池’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체화정은 단원 김홍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단원이 1766년 안기찰방安奇察訪을 마치고 한양으로 귀경하다가 체화정의 서재에 ‘담락재湛樂齋’라는 편액을 써 주었다. ‘담락’이란 《시경》에 실린 시에서 인용한 말로 형제간에 화합해야 진정으로 즐겁고 기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원이 찰방 시절 어울리면서 잘 알고 있던 이만적 형제의 체화정에 ‘담락’이라는 글을 남기고 떠난 것은 이들의 우애를 김홍도가 대구對句로 응답한 것이다.
③ 문자도 <제悌>자의 ‘형제급난’과 ‘할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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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안보이는 부분을 캡쳐한 그림-아래
민화에는 특이하게도 문자도란 화목畵目이 별도로 있다. 문자도는 문자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의미인데 조선시대의 통용 문자인 한자를 잘 디자인해서 그림으로 만든 것이다. 문자를 그림으로 그린 목적은 윤리 교육의 한 방편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자도 중에서 조선시대 후기에 가장 유행했던 문자도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의 여덟자로 유교국가의 윤리를 집약한 유교문자도이다. 여덟자 중에서 <제>(도8)는 소재가 척령(할미새)과 ‘형제급난’인데 이는 <월간창석형제급난도>의 소재인 《시경소아》 〈상체〉편에서 유래한 것은 동일하다. ‘효제충신예의염치’중 ‘효제’는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 “군자는 근본에 힘쓰고, 근본이 서면 길이 생겨난다. 효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한데서 유교의 가치 중에 으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효에 관해서는 여기서 별도 언급이 없더라도 조선시대를 지배한 중요한 가치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유교문자도가 교육의 목적이 있었다면 《소학小學》과도 관련이 있다. 《소학》은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 유학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소학》 5권에는 양문공의 가훈家訓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문공가훈楊文公家訓, 왈동치지학曰童穉之學, 부지기송不止記誦. 양기양지양능養其良知良能, 당이선입지언위주當以先入之言爲主. 일기고사日記故事, 불구금고不拘今古, 필선이효제충신예의염치등사必先以孝第忠信禮義廉恥等事, 여황향선침如黃香扇枕, 육적회귤陸績懷橘, 숙오음덕叔敖陰德, 자로부미지류子路負米之類, 지여속설只如俗說, 변효차도리便曉此道理, 구구성숙久久成熟, 덕성약자연의德性若自然矣.
양문공의 가훈에서 말하기를 어린이의 배움은 기억하고 외우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타고난 지혜와 재능을 기르고 마땅히 먼저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날마다 옛 일을 기억하여 어제와 옛날에 구애받지 아니하되, 반드시 먼저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 신하의 도리와 예절과 의리와 청렴함과 부끄러움 등의 일로써 해야 한다. 황향이 베갯머리에서 부채질을 한 것과 육적이 귤을 품은 것과 숙오가 남몰래 덕을 쌓은 것과 자로가 쌀을 지고 온 고사 같은 것을 풍속의 이야기처럼 들려주면 이 도리를 깨달을 것이니 오래오래 이루어지고 익으면 덕성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따라서 《논어》와 《소학》의 깨우침을 여덟글자의 문자로 나타내는 유교문자도가 만들어졌다. 그 문자도 중에서 <제>자의 유교적 가치가 형제간의 우애라는 덕목인데 이를 잘 전달하기 위해 고전을 인용하여 회화적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문자도 <제>의 기본적인 도형은 ‘弟’와 ‘悌’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전자의 경우 글자의 상단에 두 마리의 할미새(척령)는 마주보는 도상이고, 후자의 경우는 글자 좌측 마음심⼼자 변에 두 마리의 할미새가 마주보고 있다. 문자도의 발전 단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림 소재를 통해서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경우는 대개 16자로 구성된 화제를 보고 그림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했다.(도9) 도9의 화제는 “春深喬木 鶺鴒和鳴 日暖風和 常棣花幷”(봄이 깊어 작은 나무에 할미새가 사이좋게 우네, 날은 따뜻하고 부드러운데 산앵두꽃 같이 피었네.) 이 시는 《시경소아》 《상체》편의 ‘척령’과 ‘상체’를 소재로 한 새로운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화제의 그림들이 많다는 것은 당시 형제간의 우애를 다룬 시들이 많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교적 가치 담은 회화와 문자도
<형제급난도>와 문자도의 <제>자 등은 <시경소아>의 <상체>편을 회화로 그려 시각화한 것이다. 이처럼 형제간의 우애를 그림으로 나타낸 배경으로 <형제급난도>의 경우에는 실제 있었던 사실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후손이 목판으로 널리 배포했던 것이고, 문자도 <제>자의 경우 중국의 복록수와 같은 길상문자도에서 영향을 받아 유교적 통치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조선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정조대에 국민교육서인 《오륜행실도》발간을 통한 오륜의 시각화와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 목판화, 《월간창석형제급난도》와 《형제급난지도》는 원화와 모판화를 비교하며 그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옛 목판화로서, 회화사적으로 아주 소중한 문화재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652년(효종 3)에 이 원화 《월간창석형제급난도》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목판본으로 《형제급난지도》를 간행하였다. 현손 이증록(李增祿)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증록의 발문이 있다. 원본 그림에서 보여주는 그대로를 베껴서 목판화로 변환(變換)한 것이다.그러나 원화를 번안(飜案)하면서 목판화에서는 많은 차이점을 드러낸다. 목판본의 권수에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라는 전자체(篆字體)의 인서(印書)가 있고, 이어 차천로(車天輅)가 그린 「형제급난지도」와 이준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이어 「형제급난지도」를 주제로 이호민(李好閔) 이수광(李睟光) 이안눌(李安訥) 신흠(申欽) 이민구(李敏求) 김시국(金蓍國) 이식(李植) 한준겸(韓浚謙) 장유(張維) 정경세(鄭經世) 이성구(李聖求) 김식(金湜) 김극항(金克恒) 최현(崔晛) 등이 쓴 제후(題後) 증시(贈詩) 약 20편과 끝에 홍여하(洪汝河)가 지은 「급난도인(急難圖引)」이 수록되어 있다.형제급난지도」는 판화이므로 흑백의 소묘로 되어 있다. 백화산을 배경으로 형이 동생을 업고 가는 모습과 칼과 활을 든 적병 2명이 형제를 가해하려는 장면을 그리고, 그림 옆에 배경과 등장인물을 글씨로 부주(附註)하였다. 창석 이준의 해설에 의하면, “자신은 병이 위독해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으니, 형이나 빨리 피신해 생명을 보전, 가문에 잘못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간청했으나, “형은 자신의 손을 잡고 울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말로 위안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등에 업고 가다가 적군을 만났는데, 적이 칼을 빼어 죽이려다가 형제의 우애에 감동, 살려주었다.이어 수록된 여러 사람의 글은 이 사실을 입증하고 또한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목판본 《형제급난지도》의 후쇄본은 시중에 아주 간간이 나온다. 그리고 원화와 목판화를 비교하며 그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옛 목판화이다. 그러니 어찌 회화사적으로 소중한 문화재가 아니겠는가?
4. 창석 이준의 《영사원종공신록권》
《영사원종공신록권(寧社原從功臣錄券)》, 1628년, 목활자본, 23.4×20.9cm, 필자 소장. 창석 이준이 1628년 9월 하순에 인조로부터 받았다. 첫장 앞면 두 번째 줄에 “同副承旨李埈”이라 적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는 10여 년 전에 대구의 모 경매에서 《영사원종공신록권(寧社原從功臣錄券)》을 낙찰받았다. 《영사원종공신록권》은 수여자가 700여 명이므로 수여자가 수 천명에 이르는 다른 여러 원종공신록권보다는 흔한 녹권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녹권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준(李埈)이 1628년에 받은 것이다. 이준은 위에서 언급한 《형제급난지도》의 바로 그 이준이다.인조실록》 권18, 인조6년(1628년) 5월 26일 병술 3번째 기사에 “以成安義爲右副承旨, 李埈爲同副承旨, 李性源爲持平, 崔惠吉爲修撰”라고 한 것을 보면, 즉. “성안의(成安義)를 우부승지로, 이준(李埈)을 동부승지로, 이성원(李性源)을 지평으로, 최혜길(崔惠吉)을 수찬으로 삼았다.”라는 것을 보면 창석 이준은 1628년 음력 5월 26일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 원종공신록권의 서두를 보면 이 녹권은 ‘숭정원년 9월 14일’ 녹훈된 것이다. 따라서 창석 이준은 1628년 9월 하순에 이 《영사원종공신록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영사원종공신록권》은 1628년(인조 6) 인조반정으로 도태된 북인의 남은 세력이 꾸몄다고 설명되는 유효립(柳孝立)의 모반 사건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자들에게 녹훈한 것이다. 문서의 명칭 《영사원종공신록권》에 이어 발급받은 인물의 관직 및 신분과 성명을 실었다. 본문은 임금의 전지 두 가지를 수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영사원종공신 녹훈의 의의를 천명하고 등급별로 공신을 녹훈하는 1628년 9월 14일의 전교를 수록하였다. 일등 공신은 봉림대군(鳳林大君) 이하 보인(保人) 김효신(金效信)까지, 이등공신은 주부 최대근(崔大根) 이하 사노(私奴) 고룡쇠(高龍金)까지, 삼등공신은 참지 유백증(兪伯曾) 이하 사령 주린(朱麟)에 이르기까지 모두 700여 명의 명단이 실려있다. 두 번째 전지는 같은 해 12월 26일 공신에 대하여 특전을 내린 내용이다. 특전의 내용은 공신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공신 본인의 품계를 1등급 가자(加資)하고 그 부모를 봉작(封爵)하거나 자손을 서용하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조(吏曹)에서 처리하게 하였다. 이 녹권은 목활자본이며, 책의 크기는 23.4×20.9cm이다. 모두 17장으로 끝장에는 공신도감 관직자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당상에는 홍서봉(洪瑞鳳, 1572~1645)과 허적(許積, 1610~1680)이, 낭청에는 김남중(金南重, 1596~1663)과 이경증(李景曾, 1595~1648)이, 감교낭청(監校郎廳)에는 이수림(李修林)과 허일(許佾)이, 감조관(監造官)에는 이유기(李裕基)가 참여하고 있다. 창석 이준이 받은 이 녹권과 목판본 《형제급난지도》는 하나로 묶어 광역시도의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손색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목판본 《형제급난지도》는 입수하지를 못하였다. 될 수 있는 대로 초쇄본을 입수하였으면 한다.
5. 창석 이준의 유묵
송신좌랑조천(李埈 筆 送申佐郎朝天)』, 송별시 시고, 이준, 1628년 음력 7월, 1면; 31.9×18.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송신좌랑조천(李埈 筆 送申佐郎朝天)』
『간찰』, 이준, 1점, 28.6×43.5cm, 상주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황감사 송별시』, 이준, 계혜(1623년) 가을, 35×42.8㎝, 위창 오세창 선생의 구장품, 성균관대학교 소장. 위창 오세창(吳世昌) 선생은 당대(當代) 최고의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분이다. 그의 수집품 《근묵(槿墨)》에 채집되어 있는 이 행서(行書)는 창석 이준 행서를 감식하는데 중요한 기준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의 간찰과 시고』, 신축년(1601년) 5월 초9일, 필자 소장. 위의 글씨는 행서체로 단아(端雅)하게 썼지만, 아래의 글씨는 생각나는 대로 마구 휘둘러 썼다. 이 두 장은 함께 전해 내려왔는데, 분리하지 않고 함께 표구하였다. 이 작품을 보면 역시 조선시대의 구안자(具眼者)들이 “창석 이준이 선서하였다”라고 말할 만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송별시 시고, 이준, 1628년 음력 7월, 1면; 31.9×18.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간찰』, 이준, 1점, 28.6×43.5cm, 상주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황감사 송별시』, 이준, 계혜(1623년) 가을, 35×42.8㎝, 위창 오세창 선생의 구장품, 성균관대학교 소장. 위창 오세창(吳世昌) 선생은 당대(當代) 최고의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분이다. 그의 수집품 《근묵(槿墨)》에 채집되어 있는 이 행서(行書)는 창석 이준 행서를 감식하는데 중요한 기준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이준의 간찰과 시고』, 신축년(1601년) 5월 초9일, 필자 소장. 위의 글씨는 행서체로 단아(端雅)하게 썼지만, 아래의 글씨는 생각나는 대로 마구 휘둘러 썼다. 이 두 장은 함께 전해 내려왔는데, 분리하지 않고 함께 표구하였다. 이 작품을 보면 역시 조선시대의 구안자(具眼者)들이 “창석 이준이 선서하였다”라고 말할 만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창석 이준은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서가(書家)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매우 희소하다. 간찰은 더러 시중에 나오지만, 완벽한 상태의 작품으로서의 시고나 서작(書作)은 매우 희소하여 몇 점 확인되지 않는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준 필 송신좌랑조천(李埈 筆 送申佐郎朝天)〉 1점2면(1면 크기 ; 31.9×18.8cm)이 있다, 이 작품은 무진년(1628년) 맹추(孟秋, 음력 7월)에 쓴 송별시(送別詩)이다. 상주박물관에는 보존 상태가 험한 〈창석 이준 간찰〉이 1점(28.6×43.5cm)이 있다. 또한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의 유묵 컬렉션 《근묵(槿墨)》에는 출생 연도순으로 245번째에 채집되어 있는 계해년(癸亥年, 1623년) 가을에 황 감사에게 써준 한시가 있다. 그 한시는 요수정(樂水亭)의 황 감사(黃監司)를 방문하여 지은 《황감사 송별시》 행서(行書) 1점(35×42.8㎝,)으로,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의 유묵 컬렉션 《근묵(槿墨)》에 채집되어 있다. 이 시를 지은 시기는 계해년(1623년) 가을인데, 그해 3월 14일 새벽에 서인들이 주도하고 남인들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니, 계해년 가을이면 인조반정 4개월 후이다. 이런 식으로 창석 이준의 유묵, 특히 간찰은 조선중기 문인들의 간찰첩이나 유묵첩에 더러는 채집되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십여 년 전에 창석 이준이 신축년(1601년) 5월 초9일 날 쓴 간찰과 시고를 함께 구입하였고, 서울 낙원동 낙원표구사(사장 이효우)에서 족자로 표구하였다. 1601년에 쓴 이 간찰과 시고는 창석 이준의 작품으로는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유묵이다. 이렇듯 창석 이준의 작품이나 간찰이 현재 몇 점이나 남아있는지 명확하지가 않으므로 여기 ‘신 잡동산이’에서 소개하는 것이다.
6. 부(附) ; 《형제급난지도》의 일화를 통해본 현대의 정황《흥양이씨족보(興陽李氏族譜)》를 보면 월간 이전은 1558년 4월 14일 태어나 1648년 윤3월 13일에 향년 91세로 졸하였다. 반면에 동생 이준은 1560년 3월 6일날 태어나 1635년 6월 17일에 향년 76세로 졸하였다. 즉 동생 이준보다 두 살 위이고, 동생이 졸한지 13년 후에 졸하였다. 조선중기에 91세에 졸하였다는 것은 요즘으로는 110세를 넘겨서 졸한 것과 같다. 월간 이전의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澗). 아버지는 이수인(李守仁)이고, 동생은 이준(李埈)이다. 동생 이준과 함께 유성룡의 문하에서 이황의 학설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 이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전이 병이 난 동생 이준을 업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이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그 모습을 그리게 하고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라 이름하니, 당시의 명공(名公)·거경(巨卿)들이 이 일을 노래로 읊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슬프게도, 조선시대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과 창석 이준(李埈, 1560~1635) 형제가 지녔던 것과 같은 형제간의 우애가 없는 것 같다. 우리 민족이 외세에 대응하는 현대의 정황을 이 그림에 빗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경우 이 그림이 시사하여 주는 점은 매우 크다. 어찌 왜적이 형제 가운데 한 사람만 목표로하여 쫒겠는가? 현대의 정황은 형이 동생을 업고 피난하지도 않고, 뒤쫒는 왜적에 활을 겨누지도 않고 있다. 현재 정황은 오히려 형제를 해치려는 외세에게 아우가 있는 곳을 가리켜 알려주는 정황이 아닌가? 이런 정황은 형제 모두가 위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세상이니 슬프고 억울하고 우울하다. 천지사방이 막혀 있으니 무어라도 좀 해결되었으면 싶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이듬해 2월, 경상북도 상주에서 정경세(호는 愚伏, 1563~1633)와 상주의 유학자들로 이뤄진 의병진이 왜적의 공격으로 함락당했다. 이 때 의병진에 참여했던 상주의 유학자 이전(호는 月澗, 1558~1648)과 이준(호는 蒼石, 1560~1635) 형제는 왜병들을 피해 백화산 정상으로 피하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 이준이 토사곽란을 일으켜 쓰러져 탈출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자 이준은 형의 손을 부여잡고 “저는 병으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서는 빨리 여기를 탈출하셔서 선조의 제사를 이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형인 이전은 완곡하게 거부하며 “옛날에 형제가 도적들과 맞붙어서 죽기로 싸운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고 홀로 살아 남을 수 있겠는냐?”라고 말한 뒤 동생 이준을 등에 업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 칼을 뽑아 들고 오는 두 명의 왜적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전은 “하늘은 우리가 잘못함이 없는 것을 아실 것이다”라고 부르짖고는 산을 우르러 “원컨대 산령들께서는 우리들을 살려 주소서”라고 축원하였다. 그런 이후 활에 화살을 매겨 왜적들에게 쏘면서 왜적들을 입으로 꾸짖자 그 소리와 기상이 엄숙하여서 왜적들이 놀라 접근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찰나에 목숨을 버려가면서 동생을 구하려 했던 형의 이야기는 400여 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에도 감동이 줄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교훈을 위해 창작되거나 각색된 것이 아니라, 형 이전의 문집 기록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특히 이 기록은 이전의 문집인`월간집`이 발간될 그 당시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이상정(호는 大山, 1711~1781)이 직접 쓴 것으로, 그 역시 이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형제급난도`를 보고 감명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 전후 시기, 상주를 대표하는 유학자 이전과 이준 형제는 특히 형제간 우애가 두텁기로 유명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동생 이준이 심각한 전염병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부친이 이전에게 몸을 피해 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권하자, “형제는 수족과 같아서 서로 지켜주는 의리가 있어야 하는데, 어찌 동생을 버리고 혼자 피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곁을 지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형제의 우애는 평생 이어져 이후 그들 자제들 대에까지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를 지켰다고 한다. 이러한 형제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중국에서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준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중국 관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 모두가 감동을 받아 화공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이다. 백화산을 배경으로 형이 아우를 설득해서 떠나는 장면, 형이 아우를 내려놓고 왜적을 향해 화살을 겨누는 장면, 적을 퇴치하고 산 정상을 향해 아우를 업고 달리는 모습, 그리고 백화산 정상 밑에서 아우를 내려놓고 위로 하는 모습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후 조선에 돌아온 이준은 이 사실을 소재로 당시 유명한 사람들에게 시문(詩文)을 청해서 덧붙였는데, 정경세·장유 같은 인물들을 포함해 그 대를 대표하는 인물 27명이 방명을 남겼다. `형제급난도`가 만들어 진 과정이다. 유학자로서 목숨을 다해 형제애를 실현했고, 이러한 행위에 대해 당시 모든 선비들이 기록으로 존숭해 주는 문화의 산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형제애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들이 `혈연적 사랑`에만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이웃과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은 가족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 사랑을 이웃과 동포, 그리고 만물까지 확장할 것을 강조하는데, 두 형제는 바로 이러한 유학의 기본 정신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설치되어 있는 존애원(存愛院)에서 찾을 수 있다. 존애원은 이전·이준 형제와 `성이 다른 형제(異姓兄弟)`라고 지칭될 정도로 가까웠던 정경세가 주도하고 성람과 이전·이준 형제 등이 참여하면서 형성된 조선 최초의 사설병원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상주지역은 최악의 의료 상태에 처하였다. 상주는 왜병들의 통과 길목에 위치하면서 많은 전투가 있었고, 이로 인해 농토가 황폐화 되고 많은 젊은 사람들이 죽게 되면서, 경제적 기반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당시 상황은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진정한 유학자들의 실천정신을 일깨웠고, 그것이 `존애원`의 설치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준이 쓴 `존재원기(存愛院記)`에는 이와 같은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남과 내가 비록 멀고 가까움은 있겠지만, 함께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같은 기(氣)를 받았으니, 가슴 속에 가득 찬 `차마 어찌 할 수 없는 (어진)마음`을 확장시켜 동포를 살리는 것이 어찌 본분을 다하는 일이 아니겠는가?`차마 어찌 할 수 없는 마음`, 즉 동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면서 그 아픔을 참지 못하는 마음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재정을 모아 약재를 채취하고 병을 진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이 일은 같은 마음을 가진 상주의 13개 문중 인물들로 결성된 낙사계에 의해 주도되면서, 근 20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중국 주자학 형성을 이끌었던 정이가 “자기의 선한 본심을 보존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말했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존(存)`자와 `애(愛)`자를 따서 당 이름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존애당기`에 “애(愛)란 인(仁)함을 베풂으로써 어버이를 친애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선한 도덕본성을 기르고, 이를 바탕으로 가족을 넘어 이웃과 동포까지 사랑하려고 했던 그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점점 핵가족화 되어 가는 요즘, 어쩌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이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사랑이 핵가족 안으로만 한정되면서 우리 가족과 후세대가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만들어 낸 문화는 다시 가족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전·이준 형제는 아마도 형과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의 형·동생, 그리고 가족들이 살아 가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임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형제애를 넘어 이웃과 사회에 대한 사랑으로의 확장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형제급난도`와 존애원은 이와 같은 가치로 살았던 사람들이 보여주는 중요한 삶의 흔적이 아닐까.
◆존애원
상주시 청리면 율리 353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설 의료기관. 경북기념물 제89호.
1993년 2월2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뒤 질병에 시달리는 주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정죽 성람, 정경세(鄭經世), 창석 이준(李埈), 김각(金覺) 등이 중심이 돼 13개 문중이 계를 모아 설치·운영한 사설 의료기관이다. 중국 송(宋)의 선비 정자의 `존심애물(存心愛物)`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돕게 된다`는 뜻의 `존심애물(存心愛物)`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의료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 십시일반으로 많은 약재와 시설을 모아 가난한 서민들을 치료해 주었다. 의서를 발간해 쉬운 질병은 백성들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의료뿐만 아니라 상주 지역 13개 문중의 모임인 `낙사계`를 만들어 지역화합을 이루고 공히 함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의견을 모았다. 즉 존애원은 상주 선비들의 박애정신에서 탄생한 사설 의료시설인 동시에 향토 사랑을 실천한 낙사계원들의 응집소였다. 지금도 상주 지역은 이러한 선비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존애원의 가치가 살아남아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이상호(한국국학진흥원 연구위원)
질병 시달리는 주민들 치료·지역화합 이끈 의료시설
◆존애원
[출처] 이전·이준 형제와 존애원|작성자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
아래 그림은 이전, 이준형제의 형제급난도 그림인데 상주박물관에 소장
* 두분의 행적은 의병 출정에 의한 형제급난도도 유명하고 존애각 설립도 오늘날 우리 국민들의 귀감이다. 최소한 상주사람 만이라도 이전, 이준 두형제의 애국애족정신을 알아야한다. 월간선생님과 창석선생님의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읍시다.
* 필자의 드리는글 : 형재 급난도 뒤의 산의 이름은 상주 백화산이고 그림은 중국의 화가들이 사신으로간 이준의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입니다. 여러 자료를 모두 합하여 두 선생님의 일생을 묘사해 보았습니다. 모두 출처를 기입하였습니다. 취미 활동으로 이글을 쓰는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출처로 인용한 점 이해 바랍니다.
글속에 정경세가 정세경 으로 되어 바로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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