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병천정(쌍룡계곡 늑천정, 송요좌 건립, 문경-상주)

문장대 2023. 10. 25. 21:09

병천정은 늑천정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의 학자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부친 송요좌(宋堯佐)가 숙종 29년(1703)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정자로, 송명흠은 생전에 이 정자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심을 돋웠다 한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0년경 일본인에 의해 훼손되어 중수하였고, 1984년에도 중수하였다 한다.

병천정은 도장산(道藏山, 828m)과 청화산(靑華山, 970m) 사이로 흐르는 쌍룡계곡 끄트머리, 용이 놀던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용유동(龍遊洞)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화산과 병천(甁泉; 쌍룡계곡)의 승경(勝景)을 기록하고, 그곳에 ‘송씨의 정자’ 즉 병천정이 있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정자가 세워진 자리는 경상북도 문경과 상주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행정구역상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에 속하지만 정자의 관리는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노인회에서 맡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병천정 [甁泉亭]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회란석과 넓은 바위가 쌍룡계곡의 명소임을 말해준다.

 

상주시 화북면과 문경시 농암면 사이에는 병천정이 존재한다. 병천정은 늑천정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시대 유명한 학자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인 송요좌가 건립하였고 현손인 송명흠이 아버지가 건립한 병천정을 유지 보수하였다. 조선시대 잘 관리 되어 오다가 일제때 많이 훼손되어  당시 보수했고 이후 해방후 화북면쪽에서 유지 관리해오고 있다.병천정은 농암면 내서리와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에 존재하는데 정자가 좋은데다가 정자 아래는 회란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고 남근석 닮은 바위와 용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들이 규모가 크서 수십명이 앉아 모임을 할 수 있는 큰 바위다. 물 좋고, 공기 좋고, 경치좋고 그와중에 정자까지 있으니 금삼첨화의 관광지다. 주변에는 속리산 문장대, 동천, 우복동, 청화산, 승무산,도장산, 시루봉이 있어 교통이 좋은 곳이라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는 곳이다. 이근방에 피앗재를 통과하는 백두대간도 지나가니 많은 등산객들이 이곳을 겸사 겸사 지나간다. 오지였던 이곳이 쌍룡터널이 개통되어 문경과 상주를 잘 연결해주고 있다. 정감록의 10승지의 한 곳으로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이런곳이라 충청도에서 살고 있던 유림들이 이곳에 정자를 마련하고 노후를 보낼 작정이었던 곳이다. 상주가 처가인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인 송요좌가 증조 할아버지의 고향을 답사하고 이곳 우복동 명소에 정자를 건립하였다고 생각된다. 병천정은 송요좌의 아들인 송명흠이 아버지가 지은 정자를 보수하며 자기의 호를 따서 늑천정라고 명명했다. 송명흠의 호가 역천인데 늑천정이라는 사실은 다소 궁금하다. 나재 채수선생님의 호가 난재라고 하는 사실과 유사하다. 옥편을 찾아보니 역자는 늑자로 쓰이진 쓰이진 않는데 이유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상주와 문경 2고을에 모두 연고를 갖고 있는 필자로서는 젊은 시절 초임 발령을받아 이곳 농암에서 근무했고 처가 외가도 모두 농암이니 쌍룡계곡과는 천생연분이다. 당시 길이 없을때 토끼 다니는 길을 자전차를 타고 쌍룡마을까지 와서 다시 냇가를 따라 가다가 소나무길을 오르내리며 험한 계곡을 내려보기도 했다.  당시 길 양쪽에 절벽의 웅장함은 금강산을 방불하는 절경이었다. 휴일만 되면  이곳에 놀러 오기도 했다. 당시 참으로 꿈과 같은 명승지였으니 조선시대 양반 유림들이 우복동 십승지인 이곳에 당연히 정자를 새우고  노후를 보내고자 함은 당연지사이다. 필자가 젊은 시절엔 송시열만 알았지 송시열과 1살 많은 송준길이 누구인지 몰랐으니 그의 증손 송요좌 송명흠은 당연히 몰랐다.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고 서인의 중심인물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남인과 대립관계이고 정계에서는 강인한 성격으로 적이 많아서 역사의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충북일대의 여러곳에 그의 흔적이 많은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특히 화양동 계곡의 여러 역사적 유물과 유적은 우암의 인물을 잘 기억되게 한다.  그의 친구이자 친척인 송준길도 우암 못지않게 정계에 진출하여 많은 활약을 하여 조선의 대유학자이며 정치가가 되었다.  이 두문신은 양송이라 칭하며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송시열에 관한 글은 아직 못올렸고 상주와 관련이 많은 동춘당에 대해서는 며칠전 글을 쓰고 등산기에 올린바있다. 오늘은 병천정에 대해 글을 쓰고 있으므로 동춘당의 증손인 송요좌와 현손(고손)인 송명흠에 대한 자료를 올려봅니다. 

 

* 병천정을 건립한 송요좌 선생님의 자료1.

 

송요좌(宋堯佐) 1678년(숙종 4)∼1723년(경종 3).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도능, 호는 묵옹.병천정은 조선 후기의 학자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부친 송요좌(宋堯佐)가 숙종 29년(1703)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정자로, 송명흠은 생전에 이 정자에서 학문을 논하고 시심을 돋웠다 한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0년경 일본인에 의해 훼손되어 중수하였고, 1984년에도 중수하였다 한다. 병천정은 도장산(道藏山, 828m)과 청화산(靑華山, 970m) 사이로 흐르는 쌍룡계곡 끄트머리, 용이 놀던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용유동(龍遊洞)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화산과 병천(甁泉; 쌍룡계곡)의 승경(勝景)을 기록하고, 그곳에 ‘송씨의 정자’ 즉 병천정이 있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정자가 세워진 자리는 경상북도 문경과 상주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행정구역상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에 속하지만 정자의 관리는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노인회에서 맡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병천정 [甁泉亭]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송요좌 선생님의 자료2

송요좌는 송요좌는 송준길의 증손이다. 부는 송병원(宋炳遠)이요, 생부는 송병익 이다. 1705년(숙종 31) 을유(乙酉) 식년시 (式年   試) 진사(進士) 3등 54위로 합격하였다. 군수를 지냈다. 망언을 하거나 함부로 웃지 않았고 뜻을 세워 독서하였다. 박람강기하여 고금의 역사에 통달하였다. 또한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항상 『소학』으로 자신을 검속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부모의 상에 추워도 문을 달지 않았으며 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1721년(경종 1) 신축년 사화가 나자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1700년대 중기 병천에 세웠다. 병천정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동춘당 송준길의 손자 력천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이 독서하고 교육하였던 정자이다. 력천송명흠의 부친인 송요좌(宋堯佐)가 세웠다고 한다. 도장산의 기암괴석을 앞에 두고 발치에는 회란석(廻瀾石) 사이로 몇 길의 물 속까지 보이는 소를 앉혔다. 이 정자는 문경군과 상주군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정자이지만, 관리는 화북면 용유리 노인회에서 주관하고 있다. 이는 과거부터 력천이 상주의 인물로 취급되어 왔고, 정자가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주경계에 앉은 탓이기도 하다. 녹차(綠此) 황오가 ‘병천정화홍해사(甁泉亭和洪海史)’라는 시를 남겼다. “구월에 나귀 타고 개울 샘을 찾으니(九月騎驪尋澗泉) 병천 정자가 홀연히 앞에 섰네(甁泉亭子忽 當前). 뭇 산은 푸른 바위에 묶어 동쪽 땅도 없는데(群山碧束東無地) :2거대하게 둥글둥글한 반석 그 위론 하늘일세(巨石圓盤上有天). 새는 뭇 봉우리 모습을 즐겨 지저귀는데(鳥悅峯巒含氣色) 용은 폭포가 나무뿌리 뽑음을 미워하네(龍憎瀑布拔根綠). 거처하는 사람은 고을 시장에 출입도 않고(居人不出郡中市) 황국화와 단풍으로 평생을 벗한다네(黃菊丹楓一百年).“ 병천정은 1984년 중수했다.《검간 조정 선생의 『임란일기』에 의하면,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상주지역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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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명흠(宋明欽. 1705∼1768) 자료1

조선 중기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아버지는 송요좌(宋堯佐)이며,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사화를 피하여 낙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옥천, 도곡(塗谷), 송촌(宋村) 등지로 옮겨다니며 살았다. 뒤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충청도도사, 지평, 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에 제수되어 별유(別諭)가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 집의, 승지, 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어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재, 민우수(閔遇洙), 송사능(宋士能), 김양행(金亮行), 신소(申韶) 등과 서신으로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 《역천집》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송명흠 선생님의 자료2

명흠은 자는 회가(晦可)이고 호는 늑천(櫟泉)이며, 본관은 은진이다. 고조는 동국 18현인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 증조는 공조정랑을 지낸 송광식(宋光栻), 조부는 의금부도사를 지낸 송병원(宋炳遠)이다. 병원은 딸만 둘을 두어 동생 병익의 2자 요좌(堯佐, 1678-1723)로 계후하였다. 송요좌의 큰 아들이 송명흠이다. 송명흠은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이재의 문인이다. 송명흠은 어려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고, 9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재독할 만큼 영민하였다. 16세에 김육(金堉)의 현손인 김도흡(金道洽)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다. 18세 때(경종 2년)에 신임옥사가 일어나 고모부 김제겸(金濟謙)의 부친이면서 노론 사대신의 한 명이었던 김창집(金昌集)이 죽고 김제겸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송명흠은 부친 송요좌가 사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옥천(沃川)으로 낙향할 때 함께 갔다. 23세 때 이재를 처음으로 찾아뵙고, 이후 자주 내방하여 수학하였다. 30세 때에 운평 송능상과 맹자와 주서(朱書)를 독서하였고, 12월에는 녹문 임성주와 운평 송능상과 모여서 독서하였다. 영조 15년 35세 때에 신임사화가 소론과격파에 의해 조작된 무옥임이 밝혀져 경신처분이 내려졌다. 신임사화가 마무리되자 영조는 세자 교육을 담당할 산림 천거를 요청하는데, 송인명이 세자의 강학을 위해 도학이 있고 행실이 바른 선비로 5명을 천거하였는데, 그 중에 한 명으로 송명흠도 있었다. 50세 때에 민우수(閔遇洙), 신경(申暻), 김원행(金元行), 송능상(宋能相), 최재흥(崔載興)과 함께 시강원 서연관으로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병 때문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762년(영조38) 윤5월에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 송명흠을 다시 징소하면서 영조가 “마땅히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상설(象設)을 바라보라. 칠순이나 되는 임금의 기대는 오직 호서(湖西)에 있고 동궁의 보도(輔導) 또한 산림(山林)에 있다. 글로는 뜻을 다할 수 없고 오직 ‘반드시 보고 싶다.[必欲見]’라는 세 글자가 있을 뿐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라고 했다. 59세(영조39) 때 3월 5일의 상소에서 영조를 조후(曹侯)비유한 ‘적불(赤芾)’이란 말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적불(赤芾)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軺軒)을 탔는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이에 대해 계속해서 초선(抄選)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영조는 “송명흠의 적불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 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박세채의 문묘 종향 문제로 당론이 이어지자 신경(申暻)ㆍ송명흠ㆍ홍계능(洪啓能)ㆍ김양행(金亮行)을 모두 초선에서 빼라고 명하면서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 송명흠, 김양행, 홍계능을 서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영조43년에 유림을 서인으로 만든 것은 3백 년 동안 없던 바라 하여 송명흠을 서인으로 삼으라는 명을 정지하였다.⌈영조실록⌋ 44년 조에 송명흠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사관의 평이 다음과 같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초(旌招)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藹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송명흠이 이재의 문인이 된 데에는 부친 송요좌가 낙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배경을 작용했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연혼관계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재의 부친 이만창(李晩昌)은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결혼했는데, 민유중은 송존길의 사위이자 문인이다. 이재에게 송준길가는 어머니의 외가가 된다. 송명흠의 학연을 논할 적에 김창협→이재→송명흠으로 학통이 이어진다고 본다. 이재(1680-1746)를 김창협(1651-1708)의 문인으로 본다. 그런데 이재가 김창협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는지는 다소 명확하지 않다. 이재 스스로가 김창협으로부터 직접 사사했다는 기록이 안 보이고, 김창협이 사망할 때 이재의 나이가 19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김창협에게서 직접 학문을 전수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받았다고 하더라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김창협과 이재의 관계는 직접적인 학문적인 사승관계보다는 연혼관계를 통한 사숙일 가능성이 높다. 이재는 어려서 숙부 이만성(李晩成, 1659-1722)에게 수학했다. 이만성의 배위는 김창협의 숙부인 김수흥(金壽興)의 딸로 이재에게는 작은어머니가 된다. 김창협과 이만성은 사촌처남과 사촌매제 사이다. 이재에게 이만성은 숙부이면서 스승이었고, 김창협은 이만성과 사촌처남매제의 관계다. 이런 연혼 관계로 이재가 김창협에게 직접 지도를 받지는 못했지만 사숙하여 학문이 낙론으로 귀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성봉현, 「늑천(櫟泉) 송명흠(宋明欽)의 학연과 경세관(經世觀)」,「우계학보」 34호, 2016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