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우복 정경세 선생님

문장대 2023. 10. 16. 21:47

경북 상주가 고향인 우복 선생님은 조선 명종18년 1563년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나고 인조 11년 1633년 사벌면 매호리에서 졸하였다.  태어난곳과 사망한 곳에는 지금도 유허비가 존재한다. 조선시대 문신이며 정치가이다. 자는 경임 호는 우복 시호는 문장공이다. 영남학파의 이퇴계 학파이고 퇴계선생의 제자이다. 주자를 좋아하였다. 본관한 진주(상주 문중에서는 진양 이라고도 함)인데 고조부 정번의 부친인 정택 선조가 상주목사에 부임하며 진주에서 상주로 이사했다. 진주에는 정택 선생님의 형님이 고향을 지키고 대대로 진주에서 살다가 정택 선조가 상주에 살면서 후손인 우복대감은 상주인이 되었다. 상주가 큰고을이기 때문에 삶을 이곳에 선택한 같다. 우복선생님은 중앙의 모든 요직에 근무했고 지방의 관직도 두루 근무했으며 동궁의 스승으로 스승님으로도 근무했고, 임진왜란, 정묘호란 2전란도 격여가며 임란때는 의병을 일으켰고 왜적을 물리치다가 아내와 동생 흥세를 잃었다. 벼슬 내내 청빈하였으며 가난하여 퇴직 후에는 제사를 지낼 형편도 못되어 친구인 조우인에게 사벌면 매호로 가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퇴직후에는 청리면 율리에 여러 동지들과  존애원이라는 의료시설을 건립했고 말년에 도남서원을 새워 8현을 모셨다. 아들과 부인이 먼저 사망하여 공검면 부곡리에 이들의 묘를 만들고 자기의 묘를 그 위에 만들어 죽음에 대비했다. 지금도 공검면 공검지 위 부곡리에는 우복선생님의 묘지와 사당이 존재한다. 공과 사가 엄격하여 외사촌과 매부가 벼슬길을 마련해 달라고 해도 자격 미달이라고 알선하지 않았다. 본인은 20세에 을과로 과거에 급제했다. 하지만 청빈하게 삶을 영위하여 귀향후 엄청난 가난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사벌면 매호에 마지막으로 살때는 친구 조우인의 도움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후에 학자들과 후손들은 우복 선생님은 재산은 산과 물이며 본인 전답이 전혀 없었고 서울에도 집이 없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서인인 사계 김장생의 제자인 동춘당 송준길이 우복 선생님의 사위로서 조정에 건의하여 사패지를 받았다고합니다.

 - 사패( ) : 고려조선 시대에 임금이 궁가() 공신()에게 나라에서 산림토지노비 따위를 내려 주며  소유에 관한 문서를 주던 또는  문서.

 - 사패지 : 임금이 공신이나 청빈한 신하에게 내리는 토지의 교지)

 

경북 상주시 청리면 율리가 태어난곳-유허비 존재,  존애원(의료기관)설립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는 우북 선생님이 귀향후 살던곳이고 현재까지후손들이 살고있는곳, 매호리는 말년에 가난과 싸우다가 병들어 사망한곳(유허비 존재)- 근처에 도남서원 건립, 공검면 부곡리는 먼저간 2아들과 묻힌 묘역(사당)

우산리는 상우산, 하우산이 있는데 우복 사망후 임금님에게서 사패지를 받은 곳. 현재 종가가 존재하며 종손이 살고 있습니다.

우복 선생님이 태어난곳-상주시 청리면 율리- 사벌면국 매호리 논두렁에도 유허비가 존재한다. 필자가 방문한적 있네요. 매호리 유허비는 우복 선생님이 사망한 곳

 

       우복 선생님이 임진왜란 후 병든 백성들을 돕고자 만든 존애원(의료기관)-상주시 청리면 율리 소재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에 존재하는 우복 선생님 사당과 묘지-사진 좌측아래 학교는공검면 양정초등 인듯

 

 우복선생님이 새운 도남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동에 있는 서원이다.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이준 등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1606년(선조 39) 상주시 도남동에 창건되었으며 1676년(숙종 2) 임금으로부터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797년(정조 21) 동·서재를 건립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92년 지역 유림들이 힘을 모아 강당 등을 건립하였고 이어 동·서재를 지었다. 2002년부터 대규모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경내에는 도정사, 손학재, 민구재, 정허루, 장판각, 전사청, 영귀문, 고직사, 일관당, 입덕문 등이 들어서 있으며 해마다 음력 2월, 8월 하정일(下丁日)에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남서원 [道南書院]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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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3편의 글을 복사하여 올려서 우복 선생님의 삶을 조명해 봅니다.

참고문헌 : [네이버 지식백과] 정경세 [鄭經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상주문화원(사랑방원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장두강 카페의 우복 정경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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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브 지식 백과 복사글

 경임(),  우복(), 시호 문장()
인물
조선
1563년(명종 18) ~ 1633년(인조 11)
문신, 학자
진주()

정의

조선시대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 호는 우복(). 아버지는 좌찬성 정여관()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로 이가()의 딸이다. 유성룡()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8년(선조 11)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했다. 1582년 회시()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곧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1596년 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했으며, 잠시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어왜진영()의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고, 이어서 이조정랑·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이조정랑에 있을 때에는 인사 행정이 공정하여 현사()를 엄선해서 임용·퇴출했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 승정원우승지, 3월에 승정원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이때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 풍습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 영해부사가 되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풍습을 교화하였다. 그 해 겨울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당시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가 시끄러웠기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마을에 존애원()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정경세는 도학()이 정몽주()에서 시작되어 이황()에게서 집성되었으며, 김굉필()·정여창()·이언적() 같은 여러 현인들이 나와 정학()으로 더욱 깊이 연구하여 왕성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정경세는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상주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을 창건하였으며, 이곳에 오현()을 종사()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교서를 내려 구언()하자, 만언소()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화약()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병부()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썼기에 특지()로 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았다. 1610년 4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는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는 다시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 정인홍()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경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정경세는 주자()를 흠모하고 존경하였으며, 주서()를 편람하고 정독하여 후진 교육이나 조의()·경연에서 진강할 때 항상 주서()에 근거를 두었다. 정경세의 저서 『양정편()』은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표리가 되고, 『주문작해()』는 이황이 편찬한 『주서절요()』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정경세는 경전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제자로는 전명룡()·신석번()·강진룡()·황뉴()·홍호()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경세 [鄭經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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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문화원(사랑방원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님의 글을 복사하여 올립니다.

 

 * 상주문화원(사랑방원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Ⅰ. 진양정씨(晋陽鄭氏) 어사공파(御史公派) ․․․․․․․․․․․ 1

Ⅱ. 우복 정경세 탄생 일화(逸話) ․․․․․․․․․․․․․․․․․․․ 3

Ⅲ. 우복(愚伏)의 생애(生涯) ․․․․․․․․․․․․․․․ 3

1. 생애 / ․․․․․․․․․․․․․․․․․․․․․․․․․․․․․․․․․․․․․․․ 3

2. 학문 교유/ ․․․․․․․․․․․․․․․․․․․․․․․․․․․․․․․․․․․․․․ 22

3. 연보 / ․․․․․․․․․․․․․․․․․․․․․․․․․․․․․․․․․․․․․․ 2 7

Ⅳ. 우산(愚山)의 내력(來歷)과 입향(入鄕)․․․․․․․․․․․․․․․․․․ 2 8

부록

여로경비 추측자료

대제학 일람

 

. 진양정씨(晋陽鄭氏) 어사공파(御史公派)

진양정씨 어사공파는 고려말기 상주목사를 거쳐 감찰어사로 전출한 정택(鄭澤)을 파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본관(本貫,貫鄕)이 제도화된 것은 고려초기였는데 이 때 진양(晋陽)을 본관으로 하는 정씨가 처음 생겨난 후로 고려조에는 세족으로 성장하였다. 어사공 정택(鄭澤)은 상주목사(尙州牧事)를 지내고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하였다고만 알고 있을 뿐 생졸연대와 묘소를 실전하여 그 밖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분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그 후손이 상주종친을 이루고 있다. 상주에서 어사공파가 처음 정착하게 된 것은 어사공()이 상주에서 목사로 재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 상주에는 상산김씨(商山金氏)가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김득배(金得培)는 고려의 문관으로 과거를 거쳐 관직에 나가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2)에 이르런 학자였는데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서경(평양)을 탈환하는데 큰 무공을 세우기도 하였고, 그의 아우 김득제(金得齊)는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대장군으로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왕궁수복에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우왕 때는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하여 상산군(商山君)에 봉군되었고 아우 김선치(金先致)는 무공으로 낙성군(洛城君)에 봉군되었다. 이러한 형제의 공로로 그의 아버지 록(祿)은 상성군(商城君), 그 조부 일()은 상락군(上洛君)에 봉군되었다. 이처럼 상산김씨는 고려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이었다. 어사공은 상산김씨 김득제와 사돈이 되어 둘째 아들(諱 의생;義生)이 상주 처가에서 살게 됨으로써 지금의 상주시 공성면 초전에 처음 자리 잡게 되었다. 옛날에는 결혼하면 처가에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으므로 상주가 어사공파의 새로운 터전이 되었는데 어사공의 맏아들(諱 인생;仁生)은 요절하였으므로 후손이 없고 어사공의 후손은 상주에 기반을 잡은 자손들뿐이므로 진양정씨 어사공파는 상주파(尙州派)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 후 공성면 초전에서 4대를 지나고 우복의 5대조(;) 때 청리면 율리로 이거하였고 이거한 지 5대째인 9대손에 중흥조 우복(愚伏 諱;經世)이 탄생함으로써 조선중기 이후 자랑스러운 문벌을 형성하게 되었고, 또 우복 6대손인 대학자 입재(立齋 諱;宗魯)가 크게 문명을 떨침에 따라 더욱 가문이 융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말선초에 상주에 세거하게 된 진양정씨 어사공파는 우복에 의하여 중흥이 이루어진 후 가학(家學)으로 학문이 이어져 왔다. 따라서 우산(愚山)을 본거지로 하는 진양정씨 문중을 이해하는 데는 우선 불천위(不遷位)인 우복과 입재(별묘에 봉향)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기본이 된다. 그 이유는 어사공파에서 우복이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로 과거급제자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나 벼슬이나 학문이 우복에 비견할만한 후손은 없고 우복 6대손인 입재에서 도학(道學)을 인정받고 불천위로서 별묘 봉향되고 있기 때문이다.어사공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어사공파가 시작되는 고려왕조 말기부터 조선왕조 말기까지 500여년을 내려오는 동안, 22대까지 종손의 혈맥이 잘 이어져 종손에는 양자가 한 번도 없었고 반대로 종가에서 지손으로 양자 나가는 일이 여러 번 있어 족보에 나타나는 촌수에 비하여 혈맥으로 촌수가 당겨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종가의 혈맥 보존은 잘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만큼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종친세력(宗親勢力)이 강성해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수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9대 종손인 우복에서부터 과거제도가 시행되던 고종연간까지 12대를 내려오는 동안 열두 분 종손을 살펴보면 열두 분 가운데 문과(文科=大科) 급제를 통하여 관직에 나간 종손이 4(네분)이고 유일로 천거되어 시강원(侍講院) 자의(諮議), 공조좌랑으로 등용되거나 현감의 관직을 지낸 종손이 3(세분)이며, 도학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그친 종손이 4(네분) 11명이고 아무런 첩지를 받지 못한 학생공(學生公)이 우복의 5대주손(仁模) 뿐이라는 점인데 이로써 우복 이후 종가 중심의 문벌형세가 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복은 가문의 명조일 뿐아니라 상주가 배출한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 우복 정경세 탄생 일화(逸話)

우복선생이 탄생에 관한 일화(逸話)가 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상산김씨 세력이 위축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상주에서 시거(始居)한 의생(義生)36녀를 두었으나 장자 효옹(孝翁)의 혈맥만 이어졌고, 효옹도 41녀를 두었으나 장자 걸()의 혈맥만 이어졌으며, 4世 傑에서 24녀의 혈맥이 나왔고, 5世 克恭에서 또다시 독자 (6)으로, 번에서 7에 독자 繼咸(承旨公)으로 이어지고 계함에서 드디어 42녀 중 3銀成(參判公大成(松塢公國成(復齋公)이 분가하여 집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9世 汝寬·而弘, 10愚伏인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5극공이 별세하여 6世 蕃喪主가 된 喪中의 이야기다. 어사공파 5세손 창신교위(克恭)가 별세했을 때 장지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이 때 지나가는 두 스님이 대화하는 내용을 개울에서 빨래를 하던 하녀가 듣고 황급히 집으로 달려와 상주에게 전하였다. 그 내용은 “저 집에 초상이 났구나! 저 등 너머에 명당이 있는데〜”하는 상좌승의 말에 “천기를 누설하면 안된다”고 나무라는 노승의 이야기였다. 이 말을 들은 상주가 버선발로 따라가 길을 막고 간절히 애걸하여 노승을 모셔다가 명당(공성면 인창리 臥牛形山)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노승의 말이 장례를 치른 후 즉시 북쪽방향 십리 밖으로 이주해야 발복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하면 5대만에 해생(亥生;돼지띠)으로 血食君子(국가의 의식으로 제사를 받드는 군자)가 태어날 것이고 이를 시작으로 명현이 세분이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가운이 왕성하여 전 300년은 종파가 흥왕하고 후 500년은 종파와 지손이 함께 흥왕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노승의 말대로 1563(명종 18癸亥)에 우복이 탄생하였다.

 

. 우복의 생애

1. 생애

우복은 명종 18(1563) 914일에 탄생하여 인조 11(1633) 617일에 별세하기까지 만 70년을 일기로 한다. 50년에 가까운 오랜 관직생활에서도 개인의 사유재산을 축적하지 않았고, 마지막 중앙관직 10년간 한양에 주거를 마련하지 않았으며, 태어나서 성장한 고향 청리면 율리(栗里)에도 넉넉한 경제적 생활기반이 없고 벼슬을 다하고 돌아와 세상을 떠난 자리 사벌면 매호리에도 변변한 주거도 없었다. 오직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구현되어 인간이 정도(正道)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에만 가치를 두는 청빈하고 정의로운 일생을 살았다.선생의 생애를 시기별로 구분해보면 그 일생의 뜻있는 역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70년 생애를 8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 1(成長期 ; 出生20)

우복은 명종 18(1563) 914일 상주군 청리면 율리에서 찬성공(贊成公 ;汝寬)과 합천이씨 사이에 22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촉망을 받아 종조부(;國成, ;復齋, 參奉)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 일곱 권을 읽고 내용을 잘 기억하여 칭송을 받았고 8세 때는 소학(小學)을 읽고 외우며 오묘한 뜻을 깨우쳐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16세 되던 해에 처음 진사초시(進士初試)를 거쳤다.18세 때는 상주목사로 부임한 서애(西厓 諱;柳成龍)선생을 찾아가 사제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서애는 새 제자를 만난 즉시 그 정중한 행동과 영특함을 알아보았고 이후 서애의 수제자로 학맥을 이어 한국유학사에 뚜렷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 2(出仕初期 ; 초급관료시기 ; 2028)

20세에 또다시 진사초시를 거치고 21세 때에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와의 혼인하였는데 이듬해 상배(喪配)하는 불운을 겪고 25세에 진성 이씨(眞城李氏)와 재혼하였다. 24세 봄에 정시(庭試)에서 소과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가을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에 등용됨으로써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관직은 주로 학문에 비중을 둔 청환직(淸宦職)이었다. 26세 때에는 예문관(藝文館)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종사랑; 9)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대교(待敎; 통사랑; 8)로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는데 강론에서 임금님(宣祖)의 질문에 원로 경연관들이 대답하지 못한 것을 말단 관직자가 설명함으로써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봄에 무공랑(7)으로 승진되고 봉교(奉敎)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독서당(일명 湖堂)에서 사가독서 하였다. 이에 더하여 정3품 당상관 이하 현직 관료를 대상으로 치르는 과거시험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함으로써 더욱 촉망을 받게 되었지만 사람 추천을 잘못하여 (李震吉 誤薦) 문책되었다가 임금님의 배려로 다시 서용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 3(隱居一期; 2832)

28세 때인 1590(선조23) 6월에는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諱;汝寬)이 향년 60으로 별세하였다. 그해 7월 장녀(노소재의 손부)가 출생하였다. 30세 때(1592) 임진왜란이 나서 국토가 유린되매 병정을 불러 모으고 김광복(金光福) 김사종(金嗣宗)과 함께 왜적에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안령산(安嶺山)전투에서 어머니(합천 이씨)와 동생(興世)을 전란에 잃었다. 우복도 왜적의 화살에 맞아 절벽에 떨어져서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였다. 이후 의병활동은 계속되었고 김각(金覺)송량(宋亮)이전(李㙉)이준(李埈) 등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소모관으로 상의군(尙義軍)이라는 조직으로 대항하였다. 현재 대구시 동구 만촌동 망우당공원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 4(出仕二期 ; 侍講 承旨時期 ; 3237)

이러한 의병활동의 공로로 32세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배명되고 곧 병조좌랑으로 전보되었다가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고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겸직되었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쳐 다시 수찬에 제수되는 등 여러 임무를 바쁘게 수행하였다. 이때 왜란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임금께 나아가 다음과 같은 치도(治道)를 진언하였다.옛날부터 큰 임금의 근본치도(根本治道)는 오직 학문(學問)에 있으니, 이른바 학문이란 선왕(先王)의 말씀을 이어받고 경전(經典)의 해석에 통달할 뿐만 아니라 사변지실(思辨之實)이 점차 쌓임으로써 학문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고 이러한 전후의 혼란기에는 급선무가 성학(聖學)의 근본인 ()’의 사상을 닦는 것이고 또 적을 토벌하는 뜻을 밝혀 놓은 춘추(春秋)’의 공부에 힘쓰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임금님(宣祖)은 이를 받아들이고 칭송하여 선생을 국사(國士)로서 호칭하게 되었으며 하루도 경연을 떠나지 말라고까지 하였다.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과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정경세는 참으로 시강의 인재(侍講才)”라고 칭송하였다. 이렇게 관인으로서 탁월한 능력과 학문적 명망이 누적되는 가운데 33세 때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문학(文學)을 겸직하고 성균관 직강을 거쳐 8월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는데 이것은 경연을 떠나 있지 못하도록 하는 임금님의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4세 때는 이조좌랑에 제수되면서 시강원 문학을 겸하였다. 5월에는 이조정랑(吏曹正郞)의 요직에 배명되었다. 6월에는 어사(御史)로서 영남지방을 순시하였는데 예안에서 송재고택(松齋古宅)을 방문하고 도산서원에 참배하였으며 8월에 복명하였다. 35세 때에는 전시(殿試)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 등 각종 과거시험에 시관(試官)이 되었고 그 해 장자()가 출생하였다. 7월에 의정부 검상(檢詳)에 제수되었다가 곧 바로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으며 춘추관 편수관, 세자시강원 문학,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9월에는 또다시 어사(御史)가 되어 영서(嶺西)지방을 순시하였다. 12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승진되었다. 36세 되는 15981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어 곧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2월에 우승지 3월에 좌승지가 되었다. 4월에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였으며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를 겸하였다. 경상도 일대가 임란의 병화가 가장 심했던 곳이었으므로 시의 적절한 시책을 펴 피폐한 민생을 안정시키었다. 5월에 상주에 들러 추증(追贈) 사실을 가묘에 고유하고 6월에 예천, 9월에 진주와 삼가를 거쳐 군병을 정비하였다.이 무렵 칠년에 걸친 대란을 수습한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선생이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관계에서 물러나게 되자, 선생도 국사(國事)가 바른 길로 지향하지 못함을 탄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올리고 고향(尙州 栗里)으로 돌아왔으나 사직의 청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발령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심심산골에 우복산장(愚伏山莊)의 터를 잡았는데 이 때 우산(愚山)과의 첫 인연이 이루어졌다. 38세 때에는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어 이 고을 사람들이 싸움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나쁜 풍습이 있어 이를 일신하였다. 또 그 다음 해에는 좌승지(左承旨),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해 겨울에 부름을 받아 잠시 상경하였다가 다시 귀향하였다.

 

. 5(隱居二期 ; 3943)

선조 34(1601) 39세 정월에 차자()가 태어났다. 당시는 당쟁(黨爭)의 풍랑으로 중앙 정계가 자못 시끄러웠기 때문에 이때를 기하여 수년간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와 산중(愚山)에 산장을 지어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힘을 기울였다. 6월에는 등에 종기가 나면서 극심한 병고에 시달려 여러 달 동안 사경을 겪었다. 10월에는 완쾌하지 못하였으나 교정청 당상(校正廳 堂上)으로 서용한다는 왕명을 받고 상경 도중 제천에서 병으로 소명을 다하지 못함을 고하고 중도 귀향하였다. 40세 때는 율리에서 이웃 유지들과 더불어 존애원(存愛院)이라는 의료재단(醫療財團)을 만들었다. 2월에 승정원 좌승지의 소명을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고 3월에도 예조참의에 소명이 있었고 교정청에 또 소명이 있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41세 때인 선조 36(1603)에 계정(溪亭)을 짓고 청간정(聽澗亭)이라 이름 붙였다. 다음 해 4월에는 검호(檢湖)에서 배를 타고 달을 감상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저수지가 없어지고 한쪽에 양정초등학교가 세워졌으며 나머지가 논으로 변하여 배를 탈 수 있을 만큼의 호수는 상상하기도 힘이 든다. 6월에 양정편(養正篇)을 편집하였다. 43세 때에는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였다. 도학(道學)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포은(정몽주)에게서 시작되었고 퇴계(이황)에 이르러 집대성 되었으며 그 사이에 한훤당(김굉필) 일두(정여창) 회재(이언적) 등 여러 선생들이 연이어 일어나 정학(正學)을 밝혔다. 이 다섯 선현은 모두 영남지역에서 일어났으므로 이름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이라 하였다. 다음해 겨울 도남서원 상량문을 지었다.

 

. 6(出仕三期 ; 觀察使 牧民官時期 ; 4553)

45세 때 2, 서애선생을 방문하여 병문안으로 보름동안 머물렀다. 곧 다시 대구부사(大丘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목민관으로서 임무수행이 출중하여 한강(寒岡; 鄭逑)의 찬사를 비롯한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당시 목민관으로서 향교와 서원을 통하여 학문을 진작하는 노력이 대단하였고 민정을 보살핌에 있어서 뛰어난 목민관이었다. 대구의 수성(壽城)은 들이 넓은 벼농사지대이지만 가뭄이 자주 들어 민생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를 영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지금의 수성구 지산동에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저수지 축조 이후로는 풍년을 구가할 수 있었으므로 이 지역 주민들이 저수지 제방(지금의 녹원아파트 자리)에 송덕비를 세우고 매년 동제(洞祭)를 지내왔는데 저수지가 없어지고 도시화하면서 1980년대에 동제가 끊어졌다. 이 송덕비는 저수지를 메워 녹원아파트를 지을 때 밀려나 두 동강이 났는데 겨우 연결하여 훼손된 채 지금은 경북대학교 박물관 비석마당에 전시되어 있고 복제된 비석이 대구의 경상감영공원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46세 되던 해 4(광해군 즉위 후)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 내는 것은 힘을 관대(寬大)하게 쓰고 후생(厚生)에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져야하고 그 두 가지의 근본은 절검(節儉)에 있는 것입니다. 듣건대 근년에 국가의 세입이 세출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니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관혼상제는 날로 허례허식에 빠지고 시정 상인들의 돈을 빌려 다음 해의 세입으로 끌어들여 쓰면서도 오히려 절검할 줄 모르나니 어찌 군주(君主)로서 구걸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광해군 조정의 실정을 지적한 내용의 무려 1만여 자나 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무신소(戊申疏)이다. 이 같은 만언소(萬言疏)를 본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불에 태워버리라고 명하고 우복을 국문(鞫問)하려 했으나, 당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이 그 말이 비록 과하나 지극한 충성심을 품지 않고는 이렇게 말할 수 없으며, 또 처벌을 하면 언로(言路)가 막힌다.는 이유를 들어 극력 변호하여 삭직만으로 겨우 수습되었다. 474월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차임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사행기간이 7개월 14일이었다.

87일 조정을 출발, 10일 송도(개성), 18일 평양, 30일 의주 도착,

99일 압록강 건넘, 1027일 산해관 도착,

1113일 옥하관(玉河館)에 도착,

1229일 북경을 출발, (45일간 체류)

126일 산해관 도착, 32일 압록강 건넘,

21일 도성에 도착 복명하였다

사신으로 명나라에서 화약(火藥)의 수입을 두 배로 교섭하였다. 그 외교공로에 따라 가선대부(嘉善大夫;2)가 되고 4월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고 7월에 호군(護軍)을 거쳐 10월에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2월 부임하는 날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겸직 제수되었다. 이듬해(49) 7월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우복 정경세스승 류성룡 이어 퇴계학 지평 넓힌 우복(愚伏) 정경세 학파·당파 초월한 소통, 경계를 허물다.50세 때 묘제례(墓祭禮)를 정하고 가묘에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절일(節日)마다 제사를 지내는 지가 비록 오래 되기는 했지만, 예에 맞는 근거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정성을 기울이면서 사시(四時)에 올리는 정제(正祭)는 폐하기도 하니 더욱 더 성인께서 예를 제정한 본뜻에 어긋납니다. 이제 주자의가례와 여동래종법을 참고하여 한식(寒食)과 시월 상정일에만 산소에 올라가 봉분을 돌아보고 나머지 절일에는 모두 사당에서 제철 음식을 천신할 것이며 함부로 이를 거행하고 폐하지 않을 것임을 삭참(朔參)에 경건하게 고하나이다.” 이 고유문은 묘사(墓祀)의 변천을 시사하고 있다. 3월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엉뚱한 자의 무고로 10여 일간 옥고를 치르고 무혐의 석방되었다. 가을에 호군(護軍)에 제수되고 가의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윤11월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51세 때에는 광해조의 혼미한 국정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외직(外職)을 희망하여 3월에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다. 4월에 부임하여 교화로 선정을 베풂으로써 향민의 존경을 받았다. 풍속을 교화한 내용은 동성혼의 악습, 상례의 복제문제, 상가문상과 부조(扶助)의 악풍을 교정하는 것 등이었다. 또 향교를 중수하였고, 강론을 철저히 하고 고과(시험)를 매월 시행하여 학풍을 크게 일으켰다. 이로써 강릉향교에 근학흥교비(勤學興敎碑)가 세워지고 퇴곡서원(退谷書院)에 배향되어 흥학(興學)의 공을 영구히 기리게 되었다. 강릉의 퇴곡서원은 우복 정경세 한 분 만을 배향한 독향서원(獨享書院)으로 선생의 선정을 기리는 향사를 오래도록 계속해 왔는데 주문진에서는 지금도 풍어제를 우복선생께 올리는 행사가 거의 격년제로 열리며 이 밖에 강릉지방 여러 곳에서 이런 행사를 한다고 한다. 봄에 환선정(喚仙亭)을 방문하고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52세 (1614, 광해군 6) 4월에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서애 유선생(西厓 柳先生)을 봉안하는 데 대한 제문을 지었다. 을묘년(53세) 봄에 가뭄이 혹심하여 구룡연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또 능정산에 단을 설치하고 기우제를 올렸는데 큰 비가 내렸다. 이 때(9월 5일) 갑자기 나라에서 강릉부사 체포명령이 내렸다. 원인은 임금(광해군)의 모후(인목대비)를 폐할 것이라는 소문에 연루된 무고(誣告)였다. 우복은 정인홍(鄭仁弘)의 소행을 꾸짖다가 탄핵을 받아 해직된 일이 있은 후, 무고로 세 번째 옥고(獄苦)를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참한 재변을 당하여 화기(禍機)를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도 한결같이 운명이라 생각하고 긴 옥고에도 태연자약하여 잠자고 밥 먹는 데에 평소와 다름없고 성현의 글을 읽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옥중에 감금되어 있음을 모르는 듯하였다. 이런 모습에 선비들이 더욱 우러러 사모하였고 소암 임숙영(疎菴 任叔英)이 여러 차례 옥을 방문하였고 강릉 선비들이 쌀과 포목을 거두어 옥을 방문하였다.

 

 

. 7(隱居三期 ; 5460)

긴 옥고 끝에 10월에 삭직 석방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평소에 신의(信義)로 교유하던 이 정승(白沙 李恒福)을 방문하였다. 12월 장자()가 여주 이씨와 혼례를 올리고 다음해 9월에 신행을 하였다. 55(광해 9) 봄에 옥성서원에 특별한 약속도 없이 선비들이 찾아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다. 6월에는 삭직된 직첩을 모두 돌려받았다.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1623년까지 6년간을 학문에 전념하면서 산수(山水)를 즐기었다. 그 6년간의 기록할만한 몇 가지 사실을 적어보면 56세 때 사문록(思問錄)을 짓고 그 해 12월 손자(道應; 호는 無忝, 咨議公)가 출생하였다. 또 임천서원(臨川書院)에 학봉 김선생(鶴峯 金誠一先生)을 봉안하는 데 대한 제문을 지었다. 57세 때 충정공 충재 권벌선생(忠定公 冲齋 權橃)의 신도비문을 찬하였다. 가을에는 맏사위(盧碩命)의 사마시(司馬試) 합격 경축연에 참석하였다. 59세 때인 1621년 학봉 선생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606월에는 불행히도 맏사위(盧碩命)의 상()을 당하여 곡하였다.

 

. 8(出仕四期 ; 國政參與時期 ; 6170)

61세 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이로부터 향후 10년간의 벼슬길은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으로 시작되었다. 인조반정은 서인(西人)들의 주동 하에 일어난 정변이며 따라서 정권은 완전히 서인(西人)들에게 돌아갔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핵심 권좌는 독식하였으나 균형을 위하여 다른 지역, 다른 당파에서 정계의 명유(名儒)들을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은퇴한 재상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을 수상으로 하고 영남의 남인(南人) 중에서 우복을 정책참여로 등용하였다. 416일 국왕께 사은(謝恩)하고 22일 처음 조강(朝講)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이후 매월 평균 십 수차례 열리는 조강주강석강에 거의 빠짐없이 입시하였다. 선생의 강론과 행동이 법도에 맞는데다 경전(經典) 내용의 인용이 풍부하고 정확하여 참석자들이 탄복하였다 한다. 성균관 대사성 정엽(鄭曄)은 매 번 성균관 유생들을 모아놓고 선생을 칭찬하였으며, 사계(沙溪 金長生)오늘날 세상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예를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우복 밖에 없다.”고 하였다. 4월 29일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국왕의 역할을 준엄하게 요구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덕을 쌓고 학문이 진보되는 것은 오랜 기간 꾸준한 노력과 정성이 모여서 되는 것이지 갑작스레 이루어지지 않는데 전하께서 게을리 함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로 시작하여 당파를 갈라서 다툼만 있을 뿐 국방을 튼튼히 할 기약이 없으니 전하의 계책이 해이해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먼 훗날 이 왕정에 대하여 길게 탄식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뜻의 차자를 올렸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주상이 다음과 같은 비답(批答)을 내렸다. 내가 차자를 보고 그 뜻을 잘 알았다. 내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는 나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에 어진 선비가 없는 것을 깊이 탄식하였다. 지금 차자를 보니 실로 나의 잘못을 말한 것이었다. 읽고 또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복(敬服)하였다. 내가 비록 부덕하기는 하나 명심하여 잊지 않겠다.” 52일 알성시(謁聖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었다. 6일에는 국왕의 사묘(私廟)에 대한 속호(屬號)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생부(生父)에 대해 현고(顯考)’ ‘효자(孝子)’ 등의 용어를 축문에 쓸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문제로 현()자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선생의 의견에 따랐다. 이 당시 예론에 대해서는 주로 사계(沙溪 金長生)와 논의되었다. 7일 경연관 심광세(沈光世)와 조성립(趙誠立) 등이 ‘정경세는 글을 읽고 덕을 기른 사람이니 전례를 따르지 말고 자주 불러들여 만나 보소서’하고 아뢰니 주상이 그렇게 하였다. 그 다음날 주상의 하사품 미두(米豆)가 내려졌는데 차자를 올려 사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물품이라 부끄러우니 사양하지 말라”하였다. 11일 조강에서 남쪽지방의 인재 가운데 조정에 등용하기에 합당한 인물이 누구냐는 주상의 하문에 선생이 장현광(張顯光)과 유진(柳袗)이라고 답하였다. 12일에는 정시(庭試) 독권관에 차임되었고 15일에는 원자사부(元子師傅)에 겸직되었다. 이삼일 마다 열리는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에 계속해서 입시하면서 선생은 서울에 집이 없고 혼자 여숙(旅宿)에 머물면서 몹시 가난하게 지낸다는 것이 알려져 곡식 등 물품 하사가 계속되었다. 반정 1등 공신 이귀(李貴)는 국왕의 정책수행에 있어서 홍문관이 다른 의견을 제출하여 방해가 된다고 우복을 어전에서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정권 실세의 공격을 받고 서너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921일 대동법(大同法)에 따른 선혜청의 과징문제와 호패에 관하여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의견을 올렸다. 27일에는 따님 혼사로 휴가를 상신하여 103일부터 윤102일까지 1개월간 고향에 머물면서 차녀의 혼례를 행하여 송준길(宋浚吉)을 사위로 맞았다. 62세(인조 2년) 1월 24일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때문에 생긴 집권당(西人)의 반목으로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도착하였다. 이 난리는 2월 15일까지 20일 만에 평정은 되었으나 임금이 공주로 몽진하고 궁궐이 함락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당시 선생은 정책 결정에 강론으로 주상을 보필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영남을 검찰(檢察)하라는 어명을 받고 용인, 죽산을 거쳐 12일 문경(聞慶)에 도착하여 도내에 군사와 군량을 모으도록 통첩을 보냈다. 13일 함창(咸昌)에 도착하기까지 머무는 곳마다 사실을 논하여 상소하였다. 14일 함창에서 관군이 역적(이괄의 난)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15-16일 용궁과 예천을 순시하였다.반정 후에 왕실 주변의 인맥을 희생시키는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선생은 역사적 선례에 따른 정도(正道)를 주장하여 공신 이귀(李貴)의 공격을 받곤 하였다. 지난해에도 있었으나 다시 이귀의 비방과 공격을 받아 여러 번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516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고 26일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었으며 8월에는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제수되었는데 강론에 입시하는 업무와 원자사부(元子師傅)의 직분은 계속되었다. 8월 26일에는 장자(杺)와 사위(宋浚吉)의 사마시(司馬試) 합격에 경석을 베풀었는데 2개월 후인 10월 장자(杺)가 대과(大科; 인조2년 갑자 증광시)에 급제하여 또 경석을 베풀었다. 9월 10일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품되었다. 63(인조 3) 정월에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임하고 세자 관례도(冠禮圖)를 지어 올리고 세자 관례에 참여하였고 다음은 날 세자책봉(世子冊封)에 입시하였다. 장자(杺)가 지난 해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보직되었는데 3월 28일 천연두로 요절하는 참변을 당하였다. 4월 1일 상례절차를 밟아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주상의 만류로 20여일 만에 상구(喪柩)만 떠나보냈고 그 후에도 장지를 구하지 못해 장례를 미루다가 일곱 달이 넘은 11월 10일에야 공검못 서쪽(지금 선생의 산소아래)에 장사지냈다. 5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며, 611일 대사헌에 제수되고 72일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9월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고, 1116일에 대사헌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64세(인조 4년) 1월 21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2월에 또 한 번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24일에는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4월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5월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제수되었다. 523일 또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임금의 덕()과 시무(時務)에 대해서 논하였다. 내용은 임금이 반정(反正) 초기에 폐습을 혁파하고 새롭게 제도를 개혁한다는 목표가 뚜렷했으나 4년이 지난 지금 기대에 미치지 못하므로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유념하시어 성찰하소서.”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하여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경들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긴다. 한 말은 모두 올바른 격언이고 지극한 정론이니 감히 마음을 가다듬어 고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비답을 내렸다. 7월 18일 대사헌에 제수되었다.(이번이 여섯 번째다. 대사헌에 제수된 총 회수는 14번이다.) 서애 선생의 시장(諡狀)을 지었다. 8월 2일 부제학에 제수되었고 18일 정시(庭試;大科) 독권관에 차임되어 조경(趙絅) 등 4인을 뽑았다. 727일 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 당시에 별시나 전시의 과거 시험장이 엄격히 통제되지 않아 고관의 자제들 가운데 시권(試卷;답안지)을 정해진 시간을 지나서 제출하고도 합격되는 일이 있어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선생이 관련된 고관들을 벌주고 합격을 취소하기를 청하는 서계를 올려 사람들이 모두 시원스럽게 여겼으나 옥당(玉堂;홍문관)을 침범하는 내용이라는 반대도 있었다. 10월 2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제수 되었다. 11월 1일 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25일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 왕명으로 내의원으로 하여금 병세를 보살피도록 배려되었는데 이때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㰒)이 고향에서 요절하였다. 선생은 잇달아 두 아들을 다 잃어버렸다. 이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늘의 이치탓으로 돌리고 마음을 정리하여 평안한 듯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65(인조 5) 정월 5일 사직상소를 올려 둘째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해주기를 요청하였는데 그 상소 내용과 임금의 비답을 보면 군신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신은 후사를 이을 자식이 단 둘이 있을 뿐인데 두해 사이에 잇달아 요절하였습니다. 어느 집안인들 화환(禍患)이 없겠습니까마는 참혹하기가 신의 집안처럼 심한 경우는 없습니다. 신은 지난 가을에 분황(焚黃)하는 일로 휴가를 받았으나 질병으로 고난을 겪은 데다 계속되는 변경(邊境)의 외란으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은혜롭게 내리신 휴가로 분황도 하고 아들 영결을 하고자 합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의 애통하고 절박한 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신의 직임을 해임하도록 명하소서. 그리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간절한 저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소서.”하고 상소하였다. 이에 주상의 비답이

경이 올린 상소를 보고 참혹함에 놀랐다. ! 하늘의 도가 고르지 않음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른단 말인가. 그러나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관원은 다 갖추어 둘 필요가 없고 오직 적임자만을 임용하여야 한다.’하였다. 경이 맡고 있는 논사(論思)하는 직임은 결코 가벼이 바꾸기가 어렵다. 그러니 완강하게 사양하지 말고 기일에 맞추어 내려갔다가 곧 올라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휴가를 주고 말을 지급해 주라.”하였으며 본 고을(尙州牧)로 하여금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게 하여 유신(儒臣)을 잘 대우하려는 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가난으로 인해 장례를 제대로 치루지 못하는 걱정을 없게 하라.”하였다. 이렇게 하여 16일 조정을 떠나 20일 청주에 도착했을 때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丁卯胡亂)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25일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상주로 내려갔다. 2월 3일 군병과 군량을 모으도록 도내에 통지하였다. 다음 날 선산에 도착하여 호소사인 여헌(旅軒 張顯光)과 만났고 9일에야 집에 돌아와 아들 상(喪)에 곡하였다. 14일에서 20일까지 함창, 용궁, 예천, 안동을 순행하였다. 3월 8일 오랑캐들이 물러가 군사를 파한다는 유지를 받았다. 47일 강도(江都; 강화도)로 가서 복명하고 임금이 서울로 환궁하는 데에 호종하였다. 환궁한 이후 임금의 신뢰받는 신하이며 왕정을 바로 세우기 위한 규찰자로서 대사헌과 부제학을 오가며 역할을 다하였다. 대사헌의 임무는 문무백관을 규찰하여 기강을 바로 잡고 임금의 잘못을 간하여 풍속을 바로 잡는 어렵고 중요한 역할이었으므로 한 사람이 장기간 계속해서 수행하기 어렵고 신랄한 정책비판이 이루어지면 반대자가 많아져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또 그렇게 하면 능률이 오르지 않으므로 자주 교대되는 자리였다.5, 대사헌으로서 시무책을 올렸는데 내용이 길어 대략을 간추려 본다. 예로부터 비상한 변고를 만난 임금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세우고 비상한 계책을 정하여 혼란을 바로잡고 화를 복으로 바꾸어 비상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중략- 그러나 오랑캐들이 물러간 지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안일에 빠져 조용하기만 하고 충신 의사들의 기상을 세우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신료들을 드물게 접견하시는 것이 예전과 같고 일체의 거동이 평소와 다름없으니 신들은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국가가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는 백성을 단결시켜 다시 흥할 수 있고, 많은 근심을 겪고 난 다음에는 거룩한 새 마음을 열 수가 있는 법입니다. 분발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럭저럭 지내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부득불 장수를 잘 선발하고 군사를 잘 조련하고 군량을 잘 모아두고 병기를 잘 마련해 놓아야 합니다. -중략-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와신상담으로 보여 준 교훈을 받아들여 자강 계책을 세우소서. -중략-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런 뜻을 굳게 세워 시종 게을리 하지 마시고 마치 백척간두에 발을 붙이고 선 것처럼 하시고, 풍랑 속에서 물이 새는 배에 몸을 의탁한 것처럼 하소서. 안일에 젖어 원대한 희망을 소홀히 하지마소서.”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상의 비답이 내렸는데“말한 뜻을 잘 알았다. 경들의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심을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말한 것들이 올바른 말과 훌륭한 계책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조처하지 않겠는가!”하였다. 그 후로도 변화의 조짐이 없어 부제학(副提學)으로서 611일 다시 시무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그 요지를 보면 목숨을 걸고 정론으로 국정을 비판한 대목이 눈에 띈다.“임금이 이미 치욕을 당하였고 종사가 위태롭게 되었으며 재정은 고갈되고 민생은 곤궁하여 오랑캐가 침범하면 막아낼 방책이 없습니다. 설령 대소 신료들로 하여금 분주하게 움직이고 온힘을 다해 방책을 마련해도 어려울 지경인데 어찌하여 현재의 기상은 느긋하고 느슨하기만 하여 평상시와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까? -중략- 삼가 헤아려 보건대 전하께서는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는 듯합니다. -중략- 송나라 태조가 임금의 사사 재물인 내탕고의 돈을 풀어 군비로 삼으면서 이 돈을 오랑캐 놈들의 머리와 바꾸겠다.’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거란의 창궐함이 오늘날 여진과 같이 심하지는 않았으며 국사의 위급함이 오늘날과 같이 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임금이 사사로이 쓰는 돈을 군용으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시행하고 조처한 우리 현실은 부끄러운 점이 있는 바, 신들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중략- 흥경원(興慶園)으로 천장(遷葬)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는 전하의 효성이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대원군께서 이 곳에 묻혀 계신지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으며 금방 물이 스며들거나 흙이 무너질까 걱정이 되지도 않습니다. 성인(聖人;임금을 가리킴)의 어버이에 대해 효성을 다하는 도리는 지엽적인 형식을 따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사직을 안정시켜서 나라를 무궁토록 이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큰 효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계책을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하시다가 외적이 물러가고 백성이 안정되고 농사가 풍년이 들어 시절이 화평해지면 그 때 천장(遷葬)의 예를 의논하소서.” -하략- 전하께서는 신료들이 진언한 것에 대해서 매번 너그럽게 받아들이시면서 장려하는 말로 답하기는 하십니다. 그러나 시행하고 조처하는 사이를 살펴보면 끝내는 흔쾌히 받아들여 널리 시행하는 실제가 없습니다. 신료들이 진언하는 것은 본디 그것을 시행하여 공적을 이루게 하여 티끌만큼이나마 성덕(聖德)에 보답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략- 이 상소에 대하여 주상이 비답한 내용은 경들은 논사(論思)하는 관원으로서 여러 차례 지극한 의론을 진달하여 나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었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중략- 천장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도 나 역시 그것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길년(吉年)을 잡기가 몹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의물(儀物)이 다 갖추어져 다시 민력(民力)을 쓸 일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 이 때에 이장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은 실로 편하지 못하였다. 경들이 진달한 바는 나의 절실한 병통이 아닌 것이 없다. 내가 비록 못나기는 하였지만 마땅히 가슴 속에 새겨 잊지 않고 경들의 정성에 부응하겠다.”하였다. 그 이튿날인 6월 12일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7월 11일 동지중추부사로 바꾸어 제수되었다. 9월에 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10월에 우참찬에 옮겨 제수되었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세자우빈객을 겸하였다. 66(인조 6) 15일 대사헌에 제수되고 214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겸임되고 422일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었다. 611일 부제학에 제수되었고 613일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8월 10일 부제학으로서 시사에 대해 논하는 날카로운 차자를 올렸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반정(反正)한 초기에는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도모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눈을 씻고 보았는데 오늘에 이르도록 다스림의 성과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으며 백성들의 습속은 날로 투박해지고 나라의 일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만약 당초에 정신을 가다듬는 뜻이 성실한 데에서 나와 추호도 거짓이 없고 끊어짐이 없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중략- 오늘의 현실에 대해 전하께서는 급작스럽게 망하지는 않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공사 간에 식량이 모두 떨어져 진구(賑救)할 계책이 없습니다. 이에 노약자들은 시궁창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장정들은 떼를 지어 도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이르러 방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뒷날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논자들이 청한 내탕고의 저축과 노전(蘆田)이나 해택(海澤)에서 조차 세금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을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시원스레 선처하지 못하시고 이를 마치 점거하여 차지하려는 듯이 하십니까? 임금의 직책으로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하략- 이에 대한 주상의 비답은 차자를 보고 그 뜻을 잘 알았다. 경들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 대해 몹시 가상히 여긴다. 차자에서 한 말은 지론(至論)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어찌 감히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67(인조 7) 29일 동궁(東宮)의 조강(朝講)에 입시하였다. 36일부터 412일까지 말미를 얻어 고향에 다녀왔다. 522일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아 사임을 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29일에는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었는데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였다. 5-6월 건강이 악화되어 열흘이 넘도록 병석에 있었고 피부에 질환이 생겨 초수(椒水)에 목욕하도록 말미를 얻었다. 7월 5일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을 때도 건강을 이유로 사직을 원하였으나 사직은 하지 말고 건강을 돌보라고 하명하였다. 712일 치료차 도성을 떠나 여주와 청풍 단양을 거쳐 소수서원에서 머물었고 23일에는 영주에서 초정(椒井)에 세 번 목욕하고 부석사에서 몸조리하였다. 89일 고향으로 돌아와 고령으로 인한 노쇠를 이유로 모든 벼슬길에서 물러나도록 상소를 올렸으나 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왕정에 부응하라 하였다.

9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고 1119일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겸임되어 그 달 26일에야 임금을 배알하였다 68(인조 8) 2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11일 감시(監試;생원 진사시험)의 시관에, 3월에는 문과회시(文科會試)의 시관에 차임되었다. 4월에는 좌의정(金瑬)의 집에 관빈(冠賓)으로 초빙되었다. 이 무렵 선생의 업무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서 대정(大政)하는 일과 경연에 참여하는 일이 기본이었고 대제학으로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한을 관장하였으며 국왕을 보좌하는 최고의 학자로서 국정을 논하는 일이었다. 7월 17일 임금의 덕(德)에 관하여 논하였다. 이 당시 궁녀(宮女) 두 사람이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뽑혀 들어온 것이 말썽이 나서 왕명으로 비변사로 하여금 조사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주상의 뜻에 크게 어긋났다. 주상은 극도의 노여움으로 소문의 출처를 조사하고 이 일에 끼어든 사람을 모두 아뢰라 하였으므로 온 조정이 두려움에 떨고 주위가 불안하였다. 이에 선생이 군왕(君王)의 덕()을 논하는 차자를 올렸다.“이처럼 하찮은 일은 본디 성상께서 노여워할 일이 아니었는데, 성상의 하교가 갈수록 준엄하여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비록 아래에서 잘 못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만, 전하께서 대응하시는 것도 이처럼 지나치도록 엄준하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은 듯합니다. 궁성 안의 금법에 대해서는 바깥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본디부터 이런 일이 없었는데 헛소문이 난 것이라면 성상께서는 평온한 기운으로 그런 일은 없다.’고 답하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성인(聖人)이하의 사람으로서 어찌 허물이 없겠습니까. 오직 허물을 고치는 것이 귀중한 것이니 성상께서는 척연한 마음으로 마땅히 즉시 고치겠다.’고 답하셨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였다면 성상의 가슴속에는 어느 한 구석도 가리어진 것 없이 밝고 즐거우며 주위는 너그럽고 화평하여 상하 간에 정의(情誼)가 유통되어 서로 툭 터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모습을 다시금 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성상의 학문이 중화(中和)의 극진한 공부에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어서 정()이 발하기도 전에 이미 편벽되고 치우침이 없을 수 없어 중도(中道)를 잃었으며, 화기(和氣)를 잃었습니다. 근일에 노여움을 발하신 것은 정도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여움으로 곤두선 머리칼이 관()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기색이었습니다. 천한 것에 대해서도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거늘 더구나 삼사(三司)와 대신(大臣)에 대해서 이럴 수 있겠습니까? 송나라 때 장사숙(張思叔)은 일개 선비였는데도 그가 종을 욕하면서 꾸짖자 정선생(程先生)이 나무라기를 어찌하여 조심해서 참지 못하는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승(千乘)의 임금으로서 대신과 응수함에 있어 이런 목소리와 얼굴빛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치를 살피시고 사물에 응할 때는 텅 빈 마음을 가지시고, 억제하기 어렵고 발하기 쉬운 것에 대해 공력을 기울이소서. 그리하여 분노하는 기운을 구름이 없어지듯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게 하소서. 그럴 경우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반드시 견디기 어려울 듯한 후회스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지난번에 노여움으로 발하신 명령 가운데, 소문의 출처를 조사하고 매개 역할을 한 자를 곧장 아뢰고 참작하여 거행하라는 등의 명령은 법사(法司)나 정원(政院) 및 해당 부서에서도 감히 받들어 준행하기 어려운 것들인 바, 명백하게 전교를 내리셔서 모두 정지하도록 명령하여, 후회하면서 사죄하는 뜻을 시원스레 보이소서. 그럴 경우 해와 달을 가리는 것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아 근심 수심이 화락한 기운으로 변할 것이니 임금의 덕에 있어서 다행스러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주상이 비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그 뜻을 잘 알았다. 경의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 안에서 진달한 사핵(실정을 조사)하는 일에 대해서는 힘써 경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겠다.”하였는데 이로부터 주상의 노여움이 드디어 풀리니 사람들이 서로 경하하면서 이 차자를 돌려가며 보고 읽고 외웠다. 1122일 조정을 떠나 중도에 금천(衿川; 경기도 시흥)을 들러 오리 정승(梧里 李元翼)을 방문하였다. 선생은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이후로 다시는 서울로 올라올 뜻이 없었으므로 영원히 이별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여러 차례 올린 사직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귀향길에 충청도 직산에서 올린 글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옮겨 제수되었다. 69(인조 9) 2월에 대제학(大提學)의 직임과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의 직임도 면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장을 두 번 올려 3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소재 노수신 선생(穌齋 盧守愼 先生)을 오현묘(五賢廟)에 종향하는 데 대한 제문을 지었다. 6월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무릅쓰고 전란에 달려 나갔는데, 도중에 충청도 보은(報恩)에 도착하였을 때 병이 심해져서 나아가지 못하고 상소를 올려 사정을 전달한 다음, 가마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8월에 동궁(東宮)이 궁관(文學 沈演)을 파견하여 병문안을 하고 주상이 파견한 의원이 와서 간병하였다. 윤 11월 의정부 좌참찬(議政府 左參贊)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사위(송준길)와 《주서(朱書)》를 강독하였는데 선생은 정신이 혼몽하여 자제들의 이름자와 서명 날인하는 글자의 획조차도 모두 잊어버렸다. 그런데도 《예기》와 《주서》등의 서책은 모두 외웠으며, 글을 볼 적에는 한꺼번에 여러 줄을 보았는바, 과연 선생의 학문은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70(인조 10; 1632 壬申) 1월에 치사(致仕;노령으로 모든 벼슬에서 물러남)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아래와 같은 주상의 비답이 있었다.“경이 올린 소장을 보니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지금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가 사퇴할 때가 아니니,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체득하여 몸을 조리한 다음 올라오고, 다시는 이와 같은 말을 하지 말라.”하였다. 2월에 매호(梅湖; 상주 사벌면)로 옮겨가 묵곡(墨谷)에 있는 족인(族人)의 집에 머물러 지냈다. 8월에 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9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제도상의 우대책이었다. 71세(인조 11년 ; 계유) 116일 노환으로 10여 일간 병석에서 위독한 상태로 지났다. 66일 위독한 상태가 다시 나타나 또 10여 일간 말문을 닫은 채 병석에 누웠다가 617일 자시(子時)에 서세(逝世)하였다. 소렴 대렴을 마친 19일 동궁이 서찰과 약재와 음식을 보내 문병하였는데 도착하기 전에 운명하였다.부음을 아뢰자 임금이 조회를 파(罷)하였고 부의(賻儀)를 전례(典禮)대로 하였으며, 동궁이 거애(擧哀)하였다. 동궁이 거애하려고 할 때 예관(禮官)이 빈객(賓客)의 상에 거애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아뢰자 주상이 하교하여 이 사람은 모든 정성을 다하여 가르친 공이 있다. 비록 전례가 없다고 하드라도 거애하는 것이 안 될 일이겠는가.”하고 거애하도록 명하였다. 7월 21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예조좌랑 이 조(李稠)를 파견하여 치제하도록 하였고 동궁이 관리(文學 具鳳瑞)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장례가 끝날 때까지 머물도록 하였다.

825일 검호(檢湖 ; 공검지) 서쪽 언덕에 유좌(酉坐) 묘향(卯向)으로 장사 지냈다. 선생이 처음 새 묘지를 잡고 두 아들을 장사 지내면서 그 위쪽에 자신의 혈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선생은 정치권력의 당파에 상관없이 나라를 위하여 애국애민과 진충보국을 실천하고 중앙정부에 앉아 영남의 대표로서 영남인의 고락을 대변해 주었다. 이러한 선생이 南人으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은 것은 당연하지만 서인계(西人系) 학자들도 선생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없었다. 그 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형조판서(刑曹判書)이조판서(吏曹判書)홍문관 대제학(弘文館 大提學)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등 깨끗한 벼슬을 거치면서 오직 밝은 국정(國政)에만 심혈을 기우리다가 인조 11(1633) 71세를 일기로 고향에서 서거하였다. 시호(諡號)는 처음 문숙공(文肅公)이었으나 뒤에 문장공(文莊公)으로 다시 내려졌다.

 

 

2. 학문 교유 (學問 交遊)

 

우복은 훤칠한 키에 널찍한 이마 그리고 정신과 풍채가 시원하고 맑았다. 또 눈빛은 거울처럼 빛나고 음성은 큰 종소리처럼 우렁차며, 체구가 크고 우뚝하여 함부로 범할 수가 없었고, 마음은 바닷물과 같이 깊어서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투철하게 뛰어난 총명(聰明)함과 온후한 덕성(德性)에다 행동은 너그럽되 강직하고 겸손하되 장엄하였다.’ 그러므로 용주 조경(龍州 趙絅)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를 보면 한 번에 장덕군자(長德君子)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선생은 충후관인(忠厚寬仁)으로 마음의 바탕을 삼고 정사실천(精思實踐)을 근본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주자(朱子)에 근원을 두고 퇴계(退溪)를 사숙(私淑)하였으며 서애(西厓)의 수제자였다. 40세를 전후하여 선조 말엽에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여 있을 때 저술한 양정편(養正篇)은 주자(朱子)가 편찬한 소학(小學)에 준거한 교본으로 아동교육에 크게 유익하였으며, 광해군 말기 6년여 고향에 은퇴해 있는 동안에 편찬한 주문작해(朱文酌海)는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좋은 글을 정선한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우복선생은 경전(經典)에 밝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선생이 차녀의 혼사로 일시 귀향한 후 인조임금이 대학(大學)을 강론하자 하매 경연관이 「정모(鄭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자」고 할 만큼 경학(經學)에 밝았고,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조정의 중대한 의식인 대례(大禮)때 예조(禮曹)에서 우복선생에게 소임을 맡긴 것이 전후 네 차례 있었다. 그리고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예학(禮學)의 엄박(淹博)함이 퇴계(退溪)에 부끄럼이 없다하고 지금 세상에서 마땅히 더불어 강학(講學)하고 예()를 논할 사람은 오직 정우복 한 사람 뿐이라하였다. 이 밖에도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창석 이준(蒼石 李埈)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등 학자들이 우복(愚伏)의 예학(禮學)에 대하여 찬탄(讚嘆)하는 말을 남겼던 것을 보면 당시의 국가(國家)의 전례(典禮)와 예제(禮制)에 의문이 있을 때는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모두 선생에게 자문을 받았던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선생의 문장은 험기(險奇)한 말이나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문체가 화기롭고 정감이 두터우며 조리 있고 아담하였다. 또 언론은 명백하고 간결하고 빈틈이 없어 족히 상대를 감동케 할 만하였음은 당시에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전아(典雅)한 문체와 명백한 말로써 국왕(仁祖)10년 동안 측근에서 보필하면서 어떤 일이 있으면 사리를 명백하게 분석하고 논의하여 국왕의 마음을 가장 합당한 도리(道理)에로 인도하려고 힘썼으며 국왕도 또한 하루라도 그가 자리에서 떠날까 두려워하여 나에게 허물이 없음은 정우복(鄭愚伏)의 공이 실로 많다고 하였다.우복선생은 순순하고 솔직한 성품으로 결코 임금의 마음에 영합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기 마음에 옳지 않고 예()의 규범에 벗어나는 일이라 생각되면 명백하고 과감하게 시정시켜 나갔다. 우복선생은 또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부모를 지성으로 섬기고 부모의 원수인 왜인(倭人)과 같은 하늘 밑에 사는 것을 뼈아프게 여겨 심지어 왜인에 관계되는 물건까지도 절대로 집에 가까이 하지 않았고, 숙부가 연로함에 그 봉양을 아버지처럼 하였으며 누이가 빈궁함에 자기 수족과 같이 돌보면서도 매부(妹夫)의 분에 넘친 관직(官職) 요청을 거절하였다. 선생은 청렴하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정신으로 평생을 보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은 재상 40년에 들에는 밭이 없고 서울에는 집이 없으며, 오직 우복산중(愚伏山中)에 산수 하나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인품과 학문은 교유관계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월간 이전(月澗 李㙉)과 창석 이준(蒼石 李埈) 형제와는 서애동문(西厓同門)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궐기하여 생사를 함께한 바 있고 ()이 다를 뿐 형제간이라고 쌍방이 표현한 만큼 무간한 관계였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은 입조 후에 사귄 벗으로 광해조의 혼미한 정국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던 사이였는데 백사가 북청에 귀양 가 있을 때 남긴 말 가운데 나에게는 두 벗이 있었는데 한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한사람은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고 왔다.”고 하였는데 한음(漢陰)과 우복(愚伏)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의 행장(行狀)을 우복선생이 지음으로써 그 세 사람 사이를 짐작할 수 있다.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정우복(鄭愚伏)은 지금 당대에 제일일 뿐 아니라 옛날에도 얻기 어려운 인재(人材)’라 하여 정계(政界)의 동지로 극진히 아끼는 사이였고 예학(禮學)의 대가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우복을 이치지사(吏治之師)라 하여 예학에 대한 깊은 조예에 감탄하여 칭찬하였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는 함께 조정에서 국왕(仁祖)을 보좌하는 임무에 종사하여 경학과 예학을 통해서 사상을 교류하였고 서로 상대방을 존경한 친한 사이였다.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양인의 교분에서 사계(沙溪)의 제자인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을 사위로 맞아 당파를 초월한 인맥을 형성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용주 조경(龍洲 趙絅), 하계 권유(霞溪 權愈) 등의 남인(南人) 거유들과 함께 율곡학파의 핵심인 동춘(송준길)이 행장(行狀)을 짓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시장(諡狀)을 쓴 것은 초당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서분당 이후에 초당파적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나오기도 쉽지 않지만 특히 쌍방의 저명인사들이 힘을 합하여 그 행적을 찬술한 것은 거의 드문 일이다. 선생의 학문은 동춘(同春)에게 많은 영향을 끼침으로써 율곡학파로 하여금 퇴계의 학풍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밖의 교유관계를 보면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은 선생이 대구부사로 재임할 때 가장 친한 사이로 틈만 있으면 방문하여 도학(道學)을 강론하고 글을 남기었다. 그리고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졸재 신식(拙齋 申湜)․사서 전식(沙西 全湜)․소암 임숙영(疎庵 任叔英)․구암 한백겸(久庵 韓百謙)․유천 한준겸(柳川 韓浚謙)․매호 조우인(梅湖 曺友仁)․상촌 신흠(象村 申欽)․지봉 이수광(芝峰 李晬光)․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만취 오억령(晩翠 吳億齡)․일송 심희수(一松 沈喜壽)․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 등 인사들과 교분이 있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유교의 논리체계를 두 측면에서 고구(考究)할 때, 그 하나는 ()()이오 다른 하나는 ()()이라 말한다면 우복선생은 이 양 면을 다 지닌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일 선생은 인조 13(1635; 歿後2) 도남서원(道南書院)에 배향되었는데 배향인물 팔현(八賢) 가운데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퇴계 이 황(退溪 李 滉)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에 이어 여덟 번째였다.

 

이후 여러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는데

덕림서원(德林書院:김천시 개령; 숙종2; (佔畢齋新堂愚伏 ; 三位)

고산서원(孤山書院:경산 고산; 숙종 23) ; (退溪愚伏 ; 二位)

연경서원(硏經書院:대구 공산; 숙종 32) ; (退溪寒岡愚伏 ; 三位)

퇴곡서원(退谷書院:강릉 연곡; 순조 24) ; (愚伏 ; 一位 獨享書院)

우산서원(愚山書院:상주 우산; 헌종 원년) ; (愚伏 ; 一位 獨享書院)

등 도합 여섯 곳의 서원이다.

 

 

3. 우복 선생 연보

[愚伏先生 年譜]

 

1563 癸亥(1) 명종18. 9.14. 栗里에 출생 # 曺友仁(梅湖)1561년생

1569 선조2(7) 十九史略 七卷학습

1570 선조3(8) 小學 학습 # 퇴계선생별세

1578 선조11(16) 경상도 향시(생원진사)초시

1580 선조13(18) 西厓(柳成龍)선생 師事

1581 선조14(19) 경상도 향시(생원진사)초시

1582 선조15(20) 進士會試 第二名 入格

1583 癸未(21) 혼인(全義李氏)

1584 선조17(22) 출생(5.2.) 사별(전의이씨)(6.5.)향년21 # 율곡선생별세

1586 선조19 丙戌(24) 庭試 入格, 9謁聖文科及第 10將仕郞(承文院 副正子)

1587 (25) 史官피천, 혼인(眞城李氏)

1588 戊子(26) 從仕郞(藝文館檢閱 春秋館記事官), 通仕郞 待敎 승진

1589 己丑(27) 務功郞 奉敎 승진, 弘文館正子 經筵典經 春秋館記事官

文臣庭試 壯元賜暇讀書 (정여립생질)이진길 추천 죄로 투옥(20일옥고)

1590 庚寅(28) 찬성공 汝寬 별세, 장녀(노석명)출생

1592 壬辰(30) 壬亂발발, 의병활동전개. 戰難으로 母堂 禍를 입음.

1593 癸巳(31) 入朝의 명이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음 # 학봉김성일 전사

1594 甲午(32) 예조좌랑, 병조좌랑, 홍문관 수찬, 10월 사간원 正言 拜命.

1595 乙未(33) 侍講院司書, 成均館典籍, 弘文館校理.

1596 丙申(34) 吏曹佐郞(銓郞) 侍講院文學, 嶺南御使 특명(按察)

弘文館校理, 春秋館記注官, 吏曹正郞.

1597 丁酉(35) 홍문관교리, 侍講院弼善, 10司諫院司諫 杺 출생(6.20.)

1598 선조31(36) 2右承旨, 3左承旨, 4慶尙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

1599 己亥(37) 副護軍遞職, 栗里로 귀향

1600 선조33(38) 愚山卜地. 2월 영해부사 12월 귀향

1601 선조34(39) 차남 출생

1602 壬寅(40) 1存愛院 설치, 2월 좌승지, 3월 사직, 愚伏山莊 率眷.

1603 癸卯(41) 2溪亭건립하고 聽澗亭이라 명명함.

1604 甲辰(42) 3五峰塘萬松洲, 養正篇 저술, 8월 차녀(송준길처)

1605 乙巳(43) 4월 원종공신 선무1등책록 5道南書院 創建 提議

1606 丙午(44) 도남서원 상량문

1607 선조40(45) 2하회 서애선생문병, 大丘府使 부임, 56일 서애선생별

1608 戊申(46) 21宣祖昇遐, 光海登極, 戊申疏-대구부사 辭職.

1609 광해1(47) 3冬至使 差遣 (879.9.압록강 渡江 11.16. 조천궁)

1610 광해2(48) (3.2.압록강 渡來 3.22. 서울귀환) 從二品 嘉善大夫 陞資, 4成均館

大司成, 10羅州牧使, 12全羅道觀察使 兵馬水軍節度使 除授

1612 壬子(50) 3誣告下獄30(김직재사건), 11同知 中樞府事 除授

1613 광해5(51) 3江陵大都護府使

1615 乙卯(53) 2월 강릉부사 辭職, 11월 무고옥사45-削職

1617 丁巳(55) 6월 직첩 환급, 2월 차남혼인(진산강씨)

1623 인조1 癸亥(61) 回甲, 仁祖反正, 홍문관부제학에 임명

1624 인조2(62) 경연관으로 활동, 杺 進士生員入格 增廣文科 及第

1625 인조3(63) 형조판서, 大司憲 資憲大夫 陞資 長子 杺 卒(3.28.) 曺友仁(梅湖)

1627 인조5(65) 부제학 역임 櫟 武科 及第

1628 인조6(66) 대사헌 5副提學 6正憲大夫

1629 인조7(67) 9吏曹判書 弘文館大提學 禮文館大提學

1630 인조8(68) 知春秋館事 知經筵事

1631 인조9(69) 모든 직책 사임

1633 癸酉(71) 617亥時 告終 721贈左贊成 825禮葬.

 

 

. 우산(愚山)의 내력(來歷)과 입향(入鄕)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경연(經筵)의금부(義禁府)춘추관(春秋館)성균관(成均館)지사(知事)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한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景任,:愚伏]선생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시청이 있는 상주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16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慶尙北道 尙州市 外西面 愚山里)로 되어 있다. 일생동안 애국애민의 정신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한 탁월한 정치가였고 예론(禮論)의 대가였으며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에 큰 자취를 남긴 학자 우복선생(愚伏先生)이 이곳에 처음 복지(卜地)한 것은 선생 38세 때인 서기 1600(宣祖 33)이었으나 이 지역이 그 후손의 세거지(世居地)가 된 것은 그 훨씬 뒤의 일이다. 우복선생의 5대손인 엽동공(燁洞公 諱;冑源1686-1756)때 상주군 청리면 율리(上栗)로부터 선생의 별장이었던 우산으로 이사하였다. 선생의 공덕을 기려 영조26(1750)에 사패지(賜牌地)로 지정되어 남북십리 동서오리의 협곡으로 된 산자수려(山紫水麗)한 이 마을을 우산동천(愚山洞天) 또는 칠리강산(七里江山)이라 부르며 후손들이 흩어져 살아왔다. 중심 마을은 상우산(上愚山)과 하우산(下愚山)인데 상우산은 원래 종택을 중심으로 10여 가구 이내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완전 독가촌이 되었고 상우산에서 개울(愚山川)을 따라 1km 정도의 하류지역에 병와고택(甁庵古宅)을 중심으로 하우산이 있는데 이곳은 우복선생의 6대손 형제분(입재;宗魯 통덕랑공;宰魯) 중 동생이 분가하여 생긴 마을이다.

 

 

 

旅路經費 推測資料

관직생활과 녹봉 및 생활경비 추측

中米=깨끗하게 쓿지 않은 품질이 中質

糙米=매조미, 매갈이, 왕겨만 벗긴 쌀(현미)

田米=밭벼쌀, 또는 좁쌀 黃豆 紬=명주 正布=五升布

녹봉 정1품 춘기 中米4石 糙米12石 田米1石 黃豆12石 紬2疋 正布4匹 楮貨10

하기 중미3석 조미12小麥51필 정포4

추기 중미4석 조미12석 전미1석 소맥5석 주1필 정포4

동기 중미3석 조미12석 황두11석 주2필 정포3

2품 춘기 중미3석 조미10석 전미1석 황두9석 주1필 정포4필 저화8

하기 중미3석 조미10석 소맥4석 주1필 정포3

추기 중미3석 조미10석 전미1석 소맥5석 주1필 정포4

동기 중미3석 조미10석 황두9석 주1필 정포3

3품 춘기 중미3석 조미8석 전미1석 황두8석 주1필 정포4필 저화8

하기 중미3석 조미8석 소맥3석 주1필 정포3

추기 중미3석 조미8석 전미1석 소맥4석 주1필 정포3

동기 중미2석 조미8석 황두7석 주1필 정포3

4품 춘기 중미2석 조미6석 전미1석 황두7석 주1필 정포3필 저화6

하기 중미2석 조미7석 소맥3석 정포3

추기 중미2석 조미6석 전미1석 소맥3석 주1필 정포3

동기 중미2석 조미6석 전미1석 소맥3석 주1필 정포3

5품 춘기 중미2석 조미5석 전미1석 황두6석 주1필 정포3필 저화4

하기 중미1석 조미6석 소맥2석 정포3

추기 중미2석 조미5석 전미1석 소맥3석 정포3

동기 중미1석 조미5석 황두5석 정포2

6품 춘기 중미2석 조미4석 전미1석 황두5석 주1필 정포3필 저화4

하기 중미1석 조미5석 소맥2석 정포2

추기 중미1석 조미5석 전미1석 소맥2석 정포3

동기 중미1석 조미4석 황두4석 정포2

7품 춘기 중미1석 조미3석 전미1석 황두3석 정포2필 저화2

하기 중미1석 조미4석 소맥1석 정포2

추기 중미1석 조미4석 전미1석 소맥2석 정포2

동기 조미4석 황두2석 정포1

8품 춘기 중미1석 조미3석 전미1석 황두2석 정포1필 저화2

하기 중미1석 조미3석 소맥1석 정포1

추기 조미3석 소맥1석 정포1

동기 조미3석 황두2석 정포1

9품 춘기 조미2석 전미1석 황두2석 정포1필 저화1

하기 조미2석 정포1

추기 조미2석 소맥1석 정포1

동기 조미2석 황두1

 

 

조선시대의 自給經濟 (田畓의 미곡생산) (천수답과 수리답) (직파법과 이앙법)

화폐 (조선통보, 상평통보, 1633 인조11, 1678 숙종4) 米穀, 布帛

稅米의 보관과 이동, (이동경비 추산)

관직수행에 의한 재산증식(외거노비, 토지문서, 어음)

원행복장 행색 (두루마기 도포) (짚신 미투리)

 

 

대제학(大提學) 일람

太祖朝 권 근 (權 近) 1352~1409 陽村 文忠 안동

太宗朝 변계량 (卞季良) 1369~1430 春亭 文肅 밀양 (3)

世宗朝 윤 회 (尹 淮) 1380~1436 淸香堂文度 무송

권 제 (權 踶) 1387~1445 止齋 文景 안동 (권근 아들), (6/1)

정인지 (鄭麟趾) 1396~1478 學易齋文成 하동 이공예병 영의정 (15/2)

안 지 (安 止) 1377~1464 皐隱 文靖 康津 공조판서 영중추

世祖朝 신숙주 (申叔舟)1417~1475 保閑齋文忠 고령 좌우영의정 (5/1)

최 항 (崔 恒)1409~1474 太虛亭文靖 삭령 좌우영의정 (6/2)

睿宗朝 서거정 (徐居正)1420~1488 四佳亭文忠 대구 육조판서 좌찬성 (16/0)

成宗朝 어세겸 (魚世謙)1430~1500 西川 文貞 함종 호형병판서 우의정(15/2)

홍귀달 (洪貴達)1438~1504 虛白堂文匡 부계 이조판서 좌참찬 (5/1)

燕山朝 성 현 (成 俔)1439~1504 慵齋 文翼 창녕 예조 공조판서

김 감 (金 勘)1466~1509 一齋 文敬 연안 병조판서 좌찬성 (8/2)

中宗朝 신용개 (申用漑)1463~1519 이락정文景 고령 (보한재 손자) (18/4)

남 곤 (南 袞)1471~1527 止亭 (文敬)의령 (22/0)

유 관 (柳 灌) 1484~1545 松庵 忠肅 문화 우의정

이 행 (李 荇)1478~1534 白巖 덕수 공조참판 예문관 (12/0)

김안로 (金安老)1481~1537 希樂堂 연안 이예판서 좌우의정 (5/2)

소세양 (蘇世讓)1486~1562 陽谷 文靖 진주 판서 좌찬성 (9/0)

성세창 (成世昌)1481~1548 遯齋 文莊 창녕 대사헌 판서 홍문제학(16/2)

김안국 (金安國)1478~1543 慕齋 文敬 의성 좌찬성

仁宗朝 신광한 (申光漢)1484~1555 公齋 文簡 고령 좌찬성 우찬성 (11/1)

明宗朝 정사룡 (鄭士龍)1491~1570 湖陰 동래 판중추부사 (10/0)

정유길 (鄭惟吉)1515~1588 林塘 동래 예조 이조판서 (3/1)

홍 섬 (洪 暹)1504~1585 忍齋 景憲 남양 좌찬성 이조판서 (5/1)

宣祖朝 이 황 (李 滉)1501~1570 退溪 文純 진보 예조판서 판중추 지경연 양관대제학

박충원 (朴忠元)1507~1581 駱村 文景 밀양 좌찬성 (6/2)

박 순 (朴 淳)1523~1589 思菴 文忠 충주 우의정 영의정 (2/1)

노수신 (盧守愼)1515~1590 蘇齋 文懿 光州 영의정

김귀영 (金貴榮)1519~1593 東園 상주 좌의정 (12/1)

이양원 (李陽元)1533~1592 鷺渚 文憲 전주 형조판서 우 영의정

이 이 (李 珥)1536~1584 栗谷 文成 덕수 구도장원 이판 우찬성(7/2)

이산해 (李山海)1538~1609 鵝溪 文忠 한산 영의정 (1/1)

유성룡 (柳成籠)1542~1607 西厓 文忠 풍산 예이판 양관대제학 영의정 (8/1)

황정욱 (黃廷彧) 1532~1607 芝川 文貞 장수 판서 (소재문인)

이덕형 (李德馨)1561~1613 漢陰 文翼 廣州 31세 이조참판대제학 41세영의정

홍성민 (洪聖民)1536~1594 拙翁 文貞 남양 예조판서 호조판서

윤근수 (尹根壽)1537~1616 月汀 文貞 해평 예조판서

이정구 (李廷龜) 1564~1635 月沙 文忠 연안 예조판

이항복 (李恒福)1556~1618 白沙 文忠 경주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우의정

심희수 (沈喜壽)1548~1622 一松 文貞 청송 이예조판서

유 근 (柳 根)1549~1627 西坰 文靖 진주 좌찬성 (12/3)

이호민 (李好閔)1553~1634 五峰 文僖 연안 예조판서 좌찬성

光海朝 이이첨 (李爾瞻)1560~1623 觀松 廣州 예조판서 (12/0)

仁祖朝 신 흠 (申 欽) 1566~1628 象村 文貞 평산 우의정 柳根

정경세 (鄭經世)1563~1633 愚伏 文莊 진주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柳根

김 유 (金 瑬) 1571~1648 北渚 文忠 순천 이조판서 柳根(15/ )

홍서봉 (洪瑞鳳)1572~1645 鶴谷 文靖 남양 이 예조판서 金瑬

장 유 (張 維)1587~1638 谿谷 文忠 덕수 이조판서 金瑬(3/2)

최명길 (崔鳴吉)1586~1647 遲川 文忠 전주 이조판서 張維(3/1)

김상헌 (金尙憲)1570~1652 淸陰 文正 안동 예조판서 좌찬성

이경석 (李景奭)1595~1671 白軒 文忠 전주 이조판서 崔鳴吉

이 식 (李 植)1584~1647 澤堂 文靖 덕수 형조 이조판서 金尙憲

이명한 (李明漢)1595~1645 白洲 文靖 연안 이조판서 李景奭

조 경 (趙 絅)1586~1669 龍洲 文間 한양 이조판서 李景奭愚伏神道碑銘撰

孝宗朝 조석윤 (趙錫胤)1605~1654 樂靜 文孝 배천 대사간 李植

윤순지 (尹順之) 1591~1666 涬溟 해평 공조판서 李景奭

채유후 (蔡裕後)1599~1660 湖洲 文惠 平康 이조판서 李景奭(6/1)

김익희 (金益熙) 1610~1656 滄洲 文貞 광산 이조판서 (사계손자)

이일상 (李一相) 1612~1666 靑湖 文肅 연안 호조판서 채유후천

顯宗朝 조복양 (趙復陽) 1609~1671 松谷 文簡 풍양 예조판서 李景奭(대제학파직)

김수항 (金壽恒)1629~1689 文谷 文忠 안동 예조판서 李景奭

김만기 (金萬基) 1633~1687 瑞石 文忠 광산 兵權 문형 김수항천

肅宗朝 이단하 (李端夏) 1625~1689 畏齋 文忠 덕수 대사헌 김수항천

김석주 (金錫冑) 1634~1684 息庵 文忠 청풍 金萬基

민 점 (閔 點) 1614~1680 雙梧 여흥 찬성 金錫冑

남구만 (南九萬) 1629~1711 藥泉 文忠 의령 우의정 영의정 金萬基

이민서 (李敏敍) 1633~1688 西河 文簡 전주 예호이조판서 金錫冑(6/3)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西浦 文孝 광산 공조판서 金錫冑

남용익 (南龍翼) 1628~1692 壺谷 文憲 의령 예조판서

민 암 (閔 黯) 1636~1694 叉湖 여흥 병조판서 우의정 (7/

권 유 (權 愈) 1633~1704 靈溪 안동 예문관대제학 우복 墓表撰

박태상 (朴泰尙) 1636~1696 晩休 文孝 반남 예조판서 李敏敍

최석정 (崔錫鼎) 1646~1715 明谷 文貞 전주 좌의정 南九萬

오도일 (吳道一) 1645~1703 西坡 해주 판서 南九萬

이 여 (李 畬) 1645~1718 睡谷 文敬 덕수 이조판서 南九萬

서종태 (徐宗泰) 1652~1719 晩靜 文孝 달성 이조판서 吳道一

최규서 (崔奎瑞) 1650~1735 艮齋 忠貞 해주 이조판서 吳道一

송상기 (宋相琦) 1657~1723 玉吾齋 文貞 은진 판서 李畬

김창협 (金昌協) 1651~1708 農巖 文簡 안동 南九萬

강 현 (姜 鋧) 1650~1733 白閣 文安 진주 예조판서 徐宗泰

김진규 (金鎭圭) 1658~1716 竹泉 文淸 광산 공조판서

김 유 (金 楺) 1653~1719 검재 文敬 청풍 이조참판 양관대제학

이관명 (李觀命) 1661~1733 屛山 文靖 전주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景宗朝 이광좌 (李光佐) 1674~1740 雲谷 경주

조태억 (趙泰億) 1675~1728 謙齋 文忠 양주 형조판서

英祖朝 조문명 (趙文命) 1680~1732 鶴巖 文忠 豊壤 병조판서

이 재 (李 縡) 1680~1746 陶庵 文正 우봉 이조판서 李觀命

윤 순 (尹 淳) 1680~1741 白下 해평 이조판서 趙泰億

이의현 (李宜顯) 1669~1745 陶谷 文簡 용인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李觀命

이진망 (李眞望) 1672~1737 陶雲 전주 예조판서 尹淳

이병상 (李秉常) 1676~1748 三山 文淸 한산 참판 李觀命

오 원 (吳 瑗) 1700~1740 月谷 文穆 해주 참판

이덕수 (李德壽) 1673~1744 西堂 文貞 전의 이조판서 趙文命

조관빈 (趙觀彬) 1691~1757 晦軒 文簡 양주 예조판서 李觀命

이광덕 (李匡德) 1690~1748 冠陽 전주 참판 李德壽(李眞望아들)

윤봉조 (尹鳳朝) 1680~1761 圃岩 파평 참판 李觀命

남유용 (南有容) 1698~1773 雷淵 文淸 의령 판서 양관대제학 尹淳

김양택 (金陽澤) 1712~1777 健庵 文簡 광산 우의정 南有容

정휘량 (鄭翬良) 1706~1762 南崖 文憲 연일 金陽澤

이정보 (李鼎輔) 1693~1766 三洲 文簡 연안 판서 양관대제학 金陽澤

정 실 () 1701~1776 念齋 文靖 연일 제학 南有容

황경원 (黃景源) 1709~1787 江漢 文景 장수 참판 金陽澤

서명응 (徐命膺) 1716~1787 淡窩 文靖 달성 판서 李鼎輔

이복원 (李福源) 1719~1792 雙溪 文靖 연안 판윤 徐命膺

이휘지 (李徽之) 1715~1785 老圃 文憲 전주 청使臣 徐命膺

正祖朝 홍낙순 (洪樂純) 1723~ 大陵 文憲 풍산 이조판서 黃景源

김종수 (金鍾秀) 1728~1799 夢梧 文忠 청풍 이조판서 李徽之

오재순 (吳載純) 1727~1792 醇庵 文靖 해주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서유신 (徐有臣) 1735~ 달성 참판 金鍾秀

홍양호 (洪良浩) 1724~1802 耳谿 文獻 풍산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純祖朝 김조순 (金祖淳) 1765~1831 楓皐 忠文 안동 승지 총융사 영안부원군 양관대제학

윤행임 (尹行恁) 1762~1801 碩齋 文獻 남원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이만수 (李晩秀) 1752~1820 屐翁 文獻 연안 판서 홍문관

서영보 (徐榮輔) 1759~1816 竹石 文憲 달성 판서

남공철 (南公轍) 1760~1840 思潁 文獻 의령 판서 삼정승

심상규 (沈象奎) 1766~1838 斗室 文肅 청송 호조판서 양관대제학

김이교 (金履喬) 1764~1832 竹里 文貞 안동 이조판서

홍석주 (洪奭周) 1774~1842 淵泉 文簡 풍산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憲宗朝 신재식 (申在植) 1770~ 翠薇 文淸 평산 이조판서

조인영 (趙寅永) 1782~1850 雲石 文忠 풍양 이조판서 4번영의정

조병현 (趙秉鉉) 1791~1849 誠齋 풍양 科擧부정(賜死) 趙寅永

철종조 조두순 (趙斗淳) 1796~1870 心庵 文獻 양주 예문관 趙寅永

서기순 (徐箕淳) 1791~1854 梅園 淸文 달성 이조판서

김병학 (金炳學) 1821~1879 潁樵 文憲 안동 이조판서 趙斗淳

남병철 (南秉哲) 1817~1863 圭齋 文貞 의령 이조판서 趙斗淳

고종조 박규수 (朴珪壽) 1807~1876 瓛齋 文翼 반남 참판 朴趾源孫 철종부마

조성교 (趙性敎) 1818~1876 性惟 文憲 한양 의정부좌참찬 예문관 金炳學

김상현 (金尙鉉) 1811~1890 經臺 文獻 광산 이조판서

민태호 (閔台鎬) 1834~1884 杓庭 忠文 여흥 총융사 어영대장 金尙鉉

한장석 (韓章錫) 1832~1894 眉山 文簡 청주 판서 金尙鉉

김영수 (金永壽) 1829~ 荷亭 文獻 광산 이조판서 韓章錫

 

 

 

         문장공 우복 정경세 文莊公 愚伏 鄭經世가계도

정택鄭澤 상주목사-중시조

고조부 정번

증조부 정계함鄭繼咸

조부 정은성鄭銀成

부 정여관(鄭汝寬) 좌찬성

모 합천이씨(陜川李氏), 이공가(李公軻)의 딸, 강양군 이요 江陽君 李瑤 후손

       

기준 : 문장공 우복 정경세 文莊公 愚伏 鄭經世

          초배 전의이씨 부장 이해 部將 李海의 딸,

          후배 정경부인 진성이씨眞城李氏,진보이씨眞寶李氏, 충순위 이결李潔의 딸

         1) 장남 정심鄭杺 예문관검열 禮文館檢閱

               손자 정도응鄭道應 시강원 자의侍講院 諮議, 창녕현감

                       증손자 정석교鄭錫僑 환성재喚惺齋 영양현감

         2) 차남 정학鄭㰒 선교랑宣敎郞

         3) 삼남 정력鄭櫟 만호萬戶,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손자-정도징鄭道徵

증손자-정석교

고손(현손)-정주원

5대손-정인모, 정의모,                           정례모,   정지모

6대손-정종로, 정익로, 정태로, 정명로  정성로    정영로    

7대손-정상진, 정상관

8대손-정민수

9대손-정윤우

10대손-정동규, 정동기, 정동익, 정동벽

11대손-             정우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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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두강 카페의 우복 정경세 글을 복사한 내용입니다.

 

우복 정경세

스승 류성룡 이어 퇴계학 지평 넓힌 우복(愚伏) 정경세 학파·당파 초월한 소통, 경계를 허물다

송의호 / 대구한의대 교수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전투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남다른 포용력으로 퇴계·율곡학파, 서인·남인 화합 이끌어내

"임진년(1592) 왜적들이 쳐들어오자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해 매복을 설치하고 싸워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러다가 왜적 대부대와 갑작스레 맞닥뜨려 선생은 화살을 맞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이부인(李夫人)과 동생 흥세(興世)는 왜적에게 살해당했다. 조정은 그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것을 가상히 여겨 예조 좌랑으로 승진시켜 제수했다. 선생은 상소를 올려 간절히 사양했다. 그리고 양호(兩湖) 지방으로 달려가 군량을 모아 왜적을 치고 복수하는 일에 급급했다.”

우암 송시열이 임금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건의하는 시장(諡狀)의 일부다. 노론의 영수 우암이 시호를 요청한 인물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선생이었다. 그는 24세에 알성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에 나아가 사가독서하는 등 일찌감치 인재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경세는 정여립 옥사가 일어나자 사람을 잘못 천거한 죄로 하옥된다. 그는 사면 뒤 낙향하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한다. 2년 뒤엔 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30세 문관 정경세는 무예를 익힌 것이 없었지만 전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의기 하나로 결사 항전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비규환 전장에 어머니와 동생은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그때부터 일본은 우복의 골수에 원수로 박혔다. 조선의 신진 관료가 온몸으로 보여 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10월 17일 선생의 흔적을 찾아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우복 종가를 찾았다. 벼가 익은 들녘 끝 우산(愚山) 자락 종가에서 정춘목 주손을 만났다. 집을 지키며 농사와 태양광발전소를 운영하는 50대 종손이다. 이야기는 전투 직후 조정의 승진 인사에 정경세가 올린 상소로 이어졌다. “왜적을 쳐서 참획한 공로는 모두 김광복 등 몇 사람이 세웠고, 신은 털끝만치도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신이 그대로 관직을 받아들이면 이는 부모 형제의 시신을 팔아 자신의 몸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복의 겸손한 인품이 느껴지는 글이다. 주손은 “선비라면 누구나 그렇게 공을 낮추지 않았겠느냐”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정경세는 결국 승진 대신 사직을 택했다.

위기마다 우산(愚山)에서 저술하고 가르쳐

정경세는 임진왜란을 수습한 서애 류성룡을 일찍부터 지극히 따른 제자였다. 그는 18세에 상주 목사로 부임한 서애를 찾아가 제자로서 예를 올리고 학업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서애는 그런 정경세를 보고 바로 학문하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우복은 그 가르침을 받아 마음속에 간직하고 평생 잊지 않았다. 서애는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서 물려받은 [주자서절요]를 정경세에게 물려준다. 주자의 편지글을 뽑아 퇴계가 편찬한 책이다. 서애가 그 책을 정경세에게 물려준 것은 정경세를 고제(高弟)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퇴계학은 그렇게 서애를 통해 정경세로 이어지는 갈래가 만들어진다. 퇴계학의 적통(嫡統)을 계승한 정경세는 [주자대전]의 봉사(封事)·서(序) 등을 담은 [주문작해(朱文酌海)]를 편찬한다. 우복은 그때부터 퇴계의 [주자서절요]와 자신이 정리한 [주문작해]를 간행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퇴계학은 상주지역으로 확산한다.

우복 종가의 사랑방을 나왔다. 처마에 ‘산수헌(山水軒)’ 편액이 보였다. 선생의 신주가 모셔진 사당에 들러 예를 표한 뒤 주손을 따라 종가의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고요한 숲속에 작은 초가 한 채와 그 뒤로 우뚝한 누각이 나타났다. 초가는 계정(溪亭), 단층과 2층 누각을 이은 건물은 대산루(對山樓)라 불리었다. 일대가 우북산(于北山) 또는 우산(愚山)이다. 정경세의 우복(愚伏)이란 자호도 산 이름에서 음을 취해 겸양의 뜻을 담았다고 한다. 대산루는 우복의 6대손 입재 정종로가 중창했다. 이곳은 1601년 우복이 정인홍의 탄핵으로 세상일에 뜻을 잃었을 때 찾아낸 의지처였다. 이듬해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산장으로 들어온다. 1603년엔 계정을 지어 저술하고 문인들을 가르쳤다.

장서와 독서, 접객 공간인 대산루 2층으로 올라갔다. 책을 보관하는 공간이 넉넉했다. 누각 옆 작은 계곡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계정에 청간정(廳澗亭)이란 별칭이 붙은 게 우연이 아니다. 주손은 “(선생의) 제자는 비슷한 시기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었던 여헌 장현광 선생과 많이 겹친다”고 소개했다. 서애의 아들 류진이 대표적이다. 우복은 류진을 상주에 정착시키며 가르쳤고, 여헌도 그를 가르쳤다.

광해군 향해 “잘난 체 해서야” 직언 상소

계정에서 산속으로 난 길을 200m쯤 더 들어가자 도존당(道存堂)이 나타났다. 우복을 배향했다가 대원군 시기 훼철된 우산서원(愚山書院)의 강당이다. 세월 앞에 상전벽해가 됐다. 주손은 “서원 사당은 복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602년 우복은 상주 율리에 13개 문중과 손을 잡고 기금을 염출해 위급한 환자를 구제하는 약방 형태 의국(醫局)을 설치한다. 우복 종가에서 남쪽으로 25㎞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存愛院)이다. 존애원에는 그 분위기를 살려 처마에 약봉지가 여럿 매달려 있었다.

존애원이 있는 율리는 우복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존애원 인근 산자락에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1604년 우복은 부호군으로 임명된 뒤 이듬해 상주에 서원 창건을 제의한다. “우리나라 도학은 포은 정몽주가 창시하고 퇴계 이황이 집대성했으며, 그 사이에 한훤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등 여러 선생이 일어났다. 이들 모두 영남 땅 수백 리 안에서 일어났으며, 상주는 영남 상류 지역에 있다.” 그는 제생(諸生)과 상의한 뒤 낙동강 변에 서원을 세우고 5현을 합사한다. 도남서원(道南書院)이다. 우복은 상량문에 “후세 학자들에게 도통(道統)의 정맥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그 뒤 정권 실세 정인홍이 학맥을 달리하는 회재와 퇴계를 헐뜯는 상소를 올린다. 우복은 “화를 낼 가치조차 없다”며 이를 무시해 버린다. 그는 다시 탄핵을 당한다. 선조에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구부사 우복은 검소와 공평을 청하는 쓴소리 상소를 올린다. “전하께서 스스로 안일하게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잘난 체해서야 되겠습니까.” 거침없는 직언이다. 광해군은 상소를 다 보기도 전에 불살라버릴 것을 명한다. 이항복 등이 나서서 충언이라고 변론하면서 직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그쳤다.

1612년 우복은 김직재 옥사 사건에 휘말려 구속된다. 수사관이 집안을 뒤져 서찰 등을 압류하자 광해군이 일일이 그 내용을 살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서찰은 임금을 언급한 곳마다 모두 존대하고 있었다. 함께 체포된 맏아들을 심문하니 “신의 아비는 충효 두 가지만 가르쳤다”고 답했다. 이 사건은 오히려 광해군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1623년 우복이 회갑을 맞은 해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서인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사림의 여망을 무시할 수 없어 남인 우복을 중용한다. 인조는 학덕을 익히 듣고 있던 우복에 호의적이었다. 임금은 그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발탁한다. 이때 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의 호칭 문제가 제기된다. 예학을 천착한 우복은 인조와 정원군은 부자(父子) 관계지만 일반적인 부자 관계로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설을 주장해 관철했다. 인조 4년 이번엔 인조의 생모(生母)를 둘러싼 상복 논의가 일어난다. 이귀·최명길 등은 임금도 아들인 만큼 상주로서 삼년복을 입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경세와 김장생 등은 1년짜리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경쟁 세력 기호학파 좌장 김장생과 깊은 교유

사계 김장생이 우복과 같은 주장을 펼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계는 율곡 이이를 잇는 기호학파의 사실상 좌장이었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남인과 서인은 경쟁과 대립의 양대 세력이었다. 퇴계학을 계승한 우복은 이 구도를 바꾸고 싶어 소통을 시도한다. 그는 오윤겸·정엽을 통해 율곡과 우계 성혼에 대한 인식을 수정하고 사계 김장생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했다. “빌려 온 <가례고증> 3책은 바쁜 탓에 미처 다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복이 사계에게 쓴 편지에는 당시 서책을 주고받은 열린 분위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1623년 뜻밖의 혼인이 성사된다. 사계의 고제(高弟) 동춘당 송준길이 영남학파 우복의 둘째 사위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사이에는 더 든든한 소통의 다리가 놓였다. 회덕 출신 송준길은 처가 상주에서 10년을 보내며 제자를 기른다. 그 뒤 상주에는 노론 송준길을 기리는 흥암서원(興巖書院)이 들어서 대원군 시절에도 훼철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춘당은 후일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다. 송준길은 우복이 세상을 뜨자 일대기에 가까운 장장 60쪽(국역 우복집) 분량 행장(行狀)을 짓고, 또 연보를 만들었다. 이번 기사를 쓰면서 정선용이 옮긴 그 행장을 많이 참고했다.

혼인의 인연이 궁금했다. 주손이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했다. 한번은 우복이 사계를 찾아갔다. 사계는 우복에게 혼기에 든 딸이 있다는 걸 알고 “저쪽 방을 가보라”며 제자들이 공부하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 송시열·이유태·송준길이 있으니 그중 한 사람을 사윗감으로 고르라는 뜻이었다. 우복이 다가가 방 안을 들여다보니 한 사람이 반듯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송준길이었다. 우복과 사계는 이렇게 교분이 각별했고, 그런 바탕 위에 두 사람은 예설(禮說)과 경의(經義)를 자주 논의했다. 사계는 우복을 두고 “예학이 퇴계보다 나아 오늘날 더불어 예를 논할 만한 사람은 오직 우복 한 사람밖에 없다”고 과한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우복은 사계뿐만 아니라 서인 계열인 이덕형·최명길·장유 등과도 폭넓게 교유했다. 또 사위 동춘당은 우복의 학문을 접하면서 기호학파에서 누구보다 먼저 퇴계학을 체득하고 퇴계를 흠모하게 된다. 동춘당은 꿈에 퇴계가 나타나 그 감회를 ‘기몽(記夢)’이란 시로 남길 정도였다. 그때부터 기호 학파도 퇴계 학설을 받아들이고 새로이 평가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우복은 이처럼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남인과 서인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송준길과 더불어 양송(兩宋)으로 불린 노론 송시열이 훗날 당파를 초월해 우복의 시장(諡狀)을 쓴 것도 그런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복은 인조를 모신 마지막 10년은 임금의 덕을 채우는데 힘썼다. 그는 임금을 대할 때마다 재계(齋戒)한 뒤 시정의 잘잘못과 민생의 기쁨 등을 경전에서 인용해 간곡히 전했다. 인조는 그때마다 주의 깊게 들으면서 우복을 스승의 예로 대우했다. 인조는 정경세에게 홍문관 부제학을 시작으로 의정부 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겸 대제학 등의 자리를 내렸다.

도남서원을 거쳐 4㎞ 떨어진 사벌면 상주박물관에 들렀다. 전시실 한곳에 선생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벼루와 시호 교지, 호패 등이 진열돼 있었다. 종가는 1998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내려오던 서책을 맡겼고, 목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우복은 평생 주자(朱子)의 글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건망증으로 자주 쓰는 물건이나 자식들 이름까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말이 주자에 미치면 정신이 맑아지며 몇 줄의 글을 들고 그 뜻을 자세히 논했을 정도였다.

서울에 집 한 채 없고 고향에는 논밭 없어

그는 화려한 의복이나 장신구, 재산이나 가업 등에 무관심해 40년을 주요 벼슬에 있었지만, 서울에 집 한 채 없고 시골에는 전지(田地)가 없을 정도였다. 좋아한 것은 오직 아름다운 산수(山水)였다. 자손들이 재산을 나누어 분가한 집성촌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복은 이조판서 시절 외사촌과 매부가 벼슬을 간절히 구했으나 끝내 그들의 뒤를 봐주지 않았다. 누군가가 사실인가 싶어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난들 어찌 그들을 생각하지 않겠는가마는, 저 두 사람은 모두 백집사(百執事, 모든 일을 맡아서 하는 관리)의 일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앞세워 벼슬자리를 가벼이 하겠는가.”

우복은 50여 년을 한결같이 정도를 걸어간 관료였다. 그러면서 예학 등의 일가를 이룬 학자이기도 했다. 벼슬로 나아가기 전 스승으로 모신 서애는 큰 길잡이가 됐다. 신진 관료 시절에는 직필과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고초를 겪을 때는 고향으로 내려와 의료시설 등 백성이 절실한 일을 도모하고, 또 산속에 묻혀 독서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그는 나랏일 가운데도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퇴계학을 바탕으로 기호학과 소통하는 열린 학문을 추구했다. 특히 반대편을 인정하는 그의 남다른 포용력은 경쟁과 대립을 누그러뜨리는 촉매 역할을 했다. 여야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기만 하는 시대, 우복의 소통이 돋보이는 까닭이다.

[박스기사] 아들 잃은 고통 겪은 우복, 나라부터 생각해 시무책 건의 - 간언 무시한 인조는 9년 뒤 병자호란 치욕 겪어

우복 정경세는 두 아들이 모두 자신에 앞서 요절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는 63세에 큰아들을 잃었고 이듬해 둘째 아들이 죽었다. 우복은 둘째 아들 장사를 치르려 가솔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때 북쪽 오랑캐가 침입했다. 정묘호란이다. 1627년 후금이 광해군 폐위 문제를 구실로 쳐들어온 것이다. 백성들은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복은 조정으로 되돌아가 호소사(號召使)로 군사를 모집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갔고 두 달 뒤 화의가 성립됐다. 전쟁이 중단된 뒤 대사헌 우복은 나라의 앞날을 경계하는 시무책을 올린다.

“예로부터 비상한 변고를 만난 임금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세운 다음에야 능히 쇠망한 것을 부흥시키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아 마침내 비상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 쓰러진 것을 답습하며 자강(自强)하지 못하면 끝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화란은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서쪽 지방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짓밟혀 결딴이 났습니다.

심지어 전하는 몽진을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옛 도읍으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위태로움을 모르고 편안히 지낼 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섬으로 피란 간 수치를 어떻게 씻을 것이며, 위협으로 맹약한 치욕을 어떻게 지울 것이며, 짐승 같은 무리와 맺은 화의를 어떻게 믿고 지낼 것인가’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나 깨나 오로지 수치를 씻고 분을 풀겠다는 데만 생각을 두시고 털끝만큼도 무사안일을 탐하는 마음을 그 가운데 섞지 마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비록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가 오랑캐 소굴을 소탕하지 못한다 해도, 뒷날 적이 침입해 오는 것을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러한 때 자강 계책을 마련하지 않아 뒷날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막을 방도가 없게 되면 군신 상하가 잇달아 죽임을 당하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며, 요행히 죽지 않는다고 해도 굴욕을 당함이 장차 열 배는 더할 것입니다.”

그리고 9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인조가 당한 치욕은 우복이 내다본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