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상주가 고향인 경빈 박씨와 복성군 이미(李嵋)

문장대 2023. 4. 24. 21:08

* 중종(1488년-1544년)출생-사망, 1506년 18세에 조선 11대 왕 등극, 재위기간 1506년-1544년으로 38년 

 

* 서론

부친인 성종때 부인인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를 죽인 사건, 숙종때 부인 장휘빈을 죽인사건과 닮은 중종의 부인 경빈 박씨를 죽인 사건이 있고, 영조때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사건과 중종때 첫아들인 복성군을 죽인 기막힌 사건이 전개되는 중종임금 시 일어난 글입니다. 즉 경빈박씨와 복성군 사사 과정의 글입니다. 

 

조선11대왕 중종의 정비는 사가에서 부터 살아온 단경왕후 신씨(7일간 왕비), 제1계비는 장경왕후 윤씨(12대 조선임금 인종의 어머니), 제2계비는 너무나 유명한 문정왕후(조선13대 임금 명종의 어머니)이다. 후궁은 경빈박씨, 희빈 홍씨, 창빈안씨(선조 임금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어머니), 귀인한씨, 숙의 홍씨, 숙의이씨, 숙의나씨, 숙원이씨, 숙원김씨 9명이다. 56세를 사는 동안 정비 3명 후궁 9명을 거느린 임금이다. 기묘사화와 신사무옥과 같은 큰 사건을 다스린 왕으로 임기 중 내내 골치아픈 사건이 일어났던 왕인데 한술 더뜨서 영조 임금과 같이 아들을 죽인 왕이다. 임기 중 작서의 변이 일어나 경빈박씨와 맏아들인 복성군이 상주로 유배갔다가 결국 사사 당한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시기의 왕으로 숙종시 부인인 장휘빈을 죽인 사례와 같이 부인과 다름없는 경빈박씨를 사사 시켰으니 아들과 마누라를 죽인 보기드문 임금이다. 중종은 재위 중 큰 업적은 없고 다수의 사람이 많이 죽은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이라는 참혹한 사건이 생긴 시대의 임금이다.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중종임금으로 등극했으나 재위 내내 사건과 피로 억룩진 시대의 임금이라고 본다. 대군으로 있을때 결혼한 조강지쳐도 중종반정 후 임금이 되었으나 역적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의 부인은 단경왕후로 정비가 되자마자 7일만에 쫓겨난 신세가 된 희안한 일이 벌어진 시대의 임금이다. 왕으로 등극 후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가 제1계비가 되었으나 중종과 10년 살다가  인종과 효혜공주를 낳고 사망하였다. 이때 경빈박씨는 남곤, 심정(화천군 대감) 유자광 등의 대신들과 경빈박씨를 제2계비가 되려고 노력했고 중종의 첫 왕자인 복성군을 세자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당시 영의정인 정광필의 완강한 반대로 제2계비가 되지 못하고 파산 부원군 윤지임의 딸이 문정왕후로 제2계비가 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원형과 정난정의 힘을 얻어 강력한 권위로 후궁들의 자식이 세자로 되는 것을 막고 자기아들 명종을 인종에 이어 왕으로 등극 시켰다. 이 시대 문정왕후의 세력과 권위는 9명의 후궁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장경왕후 사후 가장 임금의 총애를 받던 경빈박씨는 문정왕후의 등장으로 닭쫓던 개 지붕쳐다본 격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이후 재기를 위해 화천군 대감(심정), 남곤, 유자광 등과 노력을 해봤지만 도리어 작서의 변으로 역모에 몰려 되치기 당하고 고향 상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후 상주에서 복성군(李嵋)과 사사당했다. 작서의 변은 당시 참판인 김안로(희락당 대감)와 아들 김희의 조작으로 밝혀졌으나 이미 경빈과 복성군(李嵋)은 죽은 사람이 되었으니 당시에 관련된  경빈박씨와 복성군 등 가족들은 나중에 억울함을 극복하는 입장으로 신원되었을  뿐이다. 참으로 경빈박씨는 안타까운 사실이고 중종은 애매한 마누라와 아들을 죽인 한심한 임금으로 되었다. 

 

 

* 경반 박씨에 관한 구체적인 가정 배경

경빈박씨 출생 미상∼사망년도 1533(중종 28). 아버지는 경상도 상주 사족 박수림()이다. 상주의 선비지만 벼슬이 없어서 박수림은 궁핍하고 미천한 상태로 살고 있였다. 절세미인인 상주처녀 박씨는 당시 연산임금의 채홍사에 걸려 반정이 일어나기전 궁중 기생의 일종인 흥청으로 근무하다가 인조반정의 1등공신인  양아버지 박원종의 권세로 중종의 후궁 실세가 되는 인생 역전을 하였다. 당시 젊은 임금이 중종은 장경왕후보다 착하고 이쁜 경빈박씨를 너무나 총애하였다. 1509년(중종 4)에 왕자 복성군() 이미()를 낳고, 1512년 혜순옹주(), 1514년 혜정옹주() 1남2녀를 낳았다. 처음에는 중종 임금의 총애를 받던 경빈박씨는 장경왕후가 제1계비가 되기전 가장 촉망받는 후궁으로 임금 중종은 당시 숙의 박씨를 당연히 궁중 관례대로 제1계비인 왕비가 되길 바라고 주장했지만 뜻대로 되지 못하고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크게 실망하였지만 재기를 위해 화천군대감(심정), 남곤, 유자광등 주요 대신들과 노력하고 또 여러방법으로 자기 아들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피나는 노력을 다채롭게 했으나 당시 희락당 대감(김안로)와 아들인 김희()가 꾸며낸 작서()의 변(1527년)에 연루되어, 1528년(중종 23) 복성군과 함께 폐서인되었다. 당시 희락당 대감의 아들은 공주와 결혼한 부마였다. 이사건에 억울하개 연루되어 원통하고 분한 경빈박씨와 이미(李嵋)모자는 고향인 상주로 유배당하고 상주에서 허무하게 사사되었다.

 

* 중종반정의 일부 과정

조선시대 연산군 임금 시절에는 전국의  아름다고 미혼의 처녀들은 연산군 임금의 명령에 따라 당시 수도인 한양으로 모두 끌려 갔었다. 채홍사들이 전국에 파견되어 이쁜 처녀들은 모두 흥청으로 끌려가서 당시 임금의 잔치에 동원되어 임금의 쾌락에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 일이 일어났었다. 임금의 학정과 실정에 반기를 든 박원종 등 여러 대신들은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고 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정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모시고 연산군을 유배시켰다. 이를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나중에 광해군 시절에 인조를 올립하고 반정을 성공시킨 인조반정과 함께 우리나라 2번의 반정이 성공했다. 그러나 수 많은 역모사건은 실패로 돌아가서 역사상 큰 사건으로 역사에 나타났다. 연산군의 실정으로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은 수 많은 흥청들 중 경상도 상주땅에서 잡혀간 박씨 쳐녀를 좋게 보아  양딸로 삼아 자기의 세력을 강하기 위해 중종임금의 첫번째 후궁으로 보냈다. 이때 중종은 단경왕후가 임금이 되기전 결혼하여 살고 있었지만 역적의 딸과 여동생이라 7일만에 왕후자리에서 내려왔다. 이때 경북궁 뒤 큰 바위에 단경왕후는 치마를 펴놓고 임금과 말없는 대화를 했다는 치마바위 사건은 지금도 유명하고 치마바위가 지금도 경복궁 뒷산에 있다고 한다. 한편 상주에서 잡혀간 쳐녀 박씨는 처음에는 운이 좋아  박원종이라는 제1실세의 딸로서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당시는 단경왕후와 생이별하고 중종이 혼자 있을때라 경빈박씨가 숙의로 실질적인 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슬하에 1남2녀까지 생겼다. 이때 첫아들의 이름이 이미(李嵋)이고 복성군(福城君)으이었다. 딸은 혜순 옹주, 혜정옹주 였다.

 

* 경빈박씨의 흥망 성쇠

 경빈 박씨는 처음에는 양아버지 박원종 덕분에 궁중에 입궐하여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꿈은 왕비가 되고 복성군이 세자가 되어 뒤에 임금으로 이어갈 희망에 차 있는 실세였다. 고향 경상도 상주에는 박수림이라는 분이 사족으로 생활하고 있었고 박인형, 박인정이라는 오라비가 있었다. 중종 초기에 득세한 후궁 박씨는 아버지와 오빠들을 한양에서 관리로 살게하였다. 아들은 곧 세자로 되고 자기는 왕비로 그리고 친정집은 조선제1의 관리로 변할 즈음에 왕비간택을 하는데 당시 영의정인 정광필이 후궁 박씨는 미천하다고 하여 중전 간택을 장경왕후의 다음으로 문정왕후로 했다. 중종10년에 장경왕후는 후에  왕인 인종을 낳고 죽었다. 따라서 중종은 새왕비를 총애하던 경빈박씨로 택할 것을 원했지만 정광필의 완강한 반대로 중전은 그 유명한 문정왕후로 간택되었다. 이때부터 상주 출신 경빈박씨는 암울한 생활의 시초가 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상주땅에서도 중전마마가 태어 날번 했는데 정광필의 반대로 나락으로 떨어져 복성군 이미와 경빈박씨는 이때 부터 불평분자가 되었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나이도 제1많고 중종임금으로 부터 가장 총애를 받은 복성군과 경빈박씨는 너무 억울하지만 재기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당시 경빈박씨의 사위 김인경과 홍려도 이때부터 경빈박씨와 고통을 같이하며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밀양박씨인 경빈박씨 아버지 박수림은 큰 욕심은 없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오빠들도 한직에 관리로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경빈 박씨는 중전이 없는 때를 틈타 세도를 넓히고 있었다. 고위 관리중에는 심정(화천군 대감), 남곤, 유자광 등 경빈박씨를 따르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실세인 김안로(희락당 대감)에 의하여 경빈박씨는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결국엔 김안로와 그아들 김희의 책략에 따라 작서의 변으로 경빈박씨 가족은 역적으로로 몰렸다. 1527(중종22)년 일어난 서의 변은 죽은 쥐를 돼지 같이 만들어 당시의 세자인 인종의 동궁 문앞에 매달아 저주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경빈박씨와 복성군이 연루되어 친정식구들과 풍지박산이 되었다. 경빈박씨는 고향 상주로 유배가서 사약을 받아 죽었고 뒤이어 그의 아들 복성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은 중종때 복성군 사사와 영조때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죽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작서의 변 사건은 김안로 일당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8년후 1541년 밝혀졌으나 이미 경빈박씨와 복성군은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대로 역사의 현장으로 넘어갔다. 이후 이분들은 신원되긴 했다. 조선시대는 이러한 꾸며진 사건에 억울한 죽음이 많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친정오라비 박인형, 박인정도 각각 온성 벽동에 유배되었는데 중종 33년(1538)에 사헌부에서 이들의 유배형을 풀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중종이 거절하였고, 중종 36년(1541)에는 중종 쪽에서 이들을 방면하는 게 어떻느냐는 뜻을 내비추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고향(상주)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이후에는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두 기록에서 부친 박수림은 언급되지 않는데 귀양된 1533년에서 1538년 사이에 사망했던 것 같다. 경빈박씨의 무덤도 상주에 가매장 되었다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산 33-47에 있다. 남양주 진접읍의 경빈박씨 묘역을 한번 가고싶은 것이 솔직한 나의 마음이다. 한때의 영화를 날리며 국모를 꿈꾸던 상주의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과 문경새재를 넘어 끌려가는 박수림의 딸 박씨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후에 선조 임금이 하성군으로 있다가 임금에 등극하여 경빈박씨는 할머니 뻘로 되는 바람에 형편 없던 경빈박씨의 묘지가 그나마 예를 갖추어 진접읍에 존재한다. 후에 경빈박씨가 파란만장하고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어서 각방송국에서 만든 사극에서 경빈박씨가 자주등장한다. 탈랜트 나종미, 김혜자. 김성령, 도지원이가 극중의 경빈 박씨역을 맡았는데 이중 도지원이가 "뭬야" 라고 한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된다. 도지원이는 이 역이 독특하여 한동안 다른 역에 케스팅되지 못했다고 불평한 장면을 본적있다. 같은 고향인 상주가 낳은 여자 경빈박씨가 500년 후인 지금 자꾸 나의 뇌리를 스친다. 경빈박씨가 나온 연속극은 조선왕조500년, 조광조, 여인천하 등이다. 여인천하 연속극에 나오는 희락당 대감은 김안로이고 화천군 대감은 심정이다. 반대파로서 흥미 진진하다. 주인공은 정난정인데 강수연이 배역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었다. 자료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경빈박씨 [敬嬪朴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