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운했던 천재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를 아십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구봉 송익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토정 이지함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깊은 우정을 나누며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스승 같은 벗으로 대하여존중했던 “구봉 송익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지함의 수제자 고청으로부터 “ 살아있는 제갈공명”이라 극찬 받았고 단학계에서는 “조선 5백년 유교역사상 최고의 도인”이라 평하는 인물 그러나 타고난 멍에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펴보지 못했던 불운한 천재 송구봉. 많은 신비한 일화들을 남겼지만 정작 역사기록에선 잘 알려 지지 않은 인물 이율곡이 가르침을 구했던 송구봉 선생은 1534년(중종29년)에 당상관(정3품이상) 송사련과 연일 정씨 사이에 4남 1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 자는 운장이다.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홀로 쓴 구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는 고양에서 오랫동안 거주했기에 그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유학의 정치역사에서 세조-중종까지 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훈구파들이 거의 물러나고 사림파 유학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던 시대였으며, 당쟁의 분열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분열되기 시작하던 혼란기였다. 송구봉은 천부적으로 머리가 아주 우수하여 7세에 이미 붓을 잡고 뛰어난 시문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20대 중반까지는 시문을 공부하는 한편, 성리학에 대해 연구하며 학문에 열중한다.그는 일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 책을 보고 이치를 깨우쳐 나갔고 20대부터 그 이름이 알려지면서, 당대 최고 문장가들과 시를 짓고 품평을 했으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교유하며 정치경륜과 학문에 관해 깊은 토론을 하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나간다. 송구봉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 최고의 충의지사로 조헌과 칠백의총의 주인공인 조헌도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김장생 김집 부자 또한 그로부터 학문을 배워 조선후기 예학을 집대성하여 예학의 대가가 된다. 김장생 김집은 이율곡과 송구봉 모두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이들 부자는 조선후기 성리학을 완전히 뿌리 내리며 송자(宋子)라고도 불렸던 우암 송시열의 스승이 된다. 그렇다면 유교대가들의 스승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송구봉의 학문은 어느 정도였을까?율곡과 얽힌 한일화가 있다. 이율곡은 조선역사상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급제)이란 별명답게 대 천재유학자, 정치가였다. 그러한 율곡이 젊은 시절(23세)에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자 선비들이 율곡에게 수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율곡은 압번을 피한 채 “송구봉의 학문이 고명하고도 넓으니 그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비들이 송구봉에게 몰려갔는데 그들의 수많은 질문에 그는 물 흐르듯 막힘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답변을 쏟아내었다. 선비들은 송구봉의 학문과 언변에 감탄하였고 이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동생 송한필도 문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서인의 원이며 대학자인 이율곡도 성리학을 논할만한 사람은 오직 송익필 형제뿐이라 말하였다고 한다. 이율곡, 성혼은 성리학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그와 편지로 주고받으며 많은 의견을 구했다 하니 송구봉의 학문은 당대 비교상대가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학문과 언변을 한번 들은 사람이면 거의 모두 그에게 반할 정도로 인간적 매력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지모(智謀) 또한 감이 남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지혜를 잘 내어 종종 주변사람을 탄복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학문이 높고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송구봉은 조정 관료로 출세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쓰며 살아가는데 이는 그의 집안내력 때문이다. 부친의 악업으로 인한 불운한 운명 송구봉의 집안에는 3백여년전 조상 중에 고려 원종때 상장군을 지낸 이가 있지만 가까이로 고조부 증조부는 벼슬 없이 지냈고 조부는 말단 관직을 겨우 지냈다. 그러다 부친 대에 와서 외형상 크게 가문이 일어났다. 부친 송사련(1496-1575)은 그의 어머니가 좌의정 안당 부친의 몸종의 딸로서 비천한 출신이다. 그는 이런 신분적 제약으로 뛰어넘고자 당대 권력자 심정 밑에서 관상감 판관을 지내면서 큰 벼슬로 출세하려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신분과는 다르지만 이복(異腹) 외삼촌 뻘 되는 안당의 집안사람들과 지인(知人)들이 모인 곳에 우연히 참석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송사련은 안당 안처겸 등이 “조광조 선생을 모함했던 심정, 남곤 등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선생의 불명예를 되찾자는 모의를 계획하는 것을 듣게 된다. 송사련은 이를 심정에게 고발하고 이로 인해 신사무옥(1521년)의 참변이 일어나 사건에 관련된 안당과 그 집안사람들이 처형된다.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으로 출세하고 안당 집안 재산을 차지하여 한평생 권세를 누리다가 1575년에 80세 나이로 죽는다.
그러나 부친의 이러한 영화로운 인생과는 달리 무고 당했던 안당 집안의 신원(伸寃)이 1540년에 회복되면서 송구봉(7세)의 인생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저 송씨 집안은 윗대 할머니가 안당 가문의 몸종이었고 친족관계로 봐도 안당은 송사련의 외삼촌 뻘도 되는데 그 집안을 그렇게 도륙 내다니 “ 하는 세간 사람들의 악평과 구설수에 송구봉 집안사람들은 시달리게 되지만 권세가 남아있어 큰 탈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신분사회에서 천출(賤出)이라는 점은 송씨 형제들에게는 큰 장애가 되어 송구봉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또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길러내어 대학자 교육자로서 비교적 무난한 생애를 보낸다. 하지만 그의 나이 53세 되던 해(1586년)에 이미 죽은 부친의 관작(官爵)마져 삭탈항하는 불운을 당한다. 본래 국법에 의하면, 노비집안이라도 2대 이상 양역(노비 아닌 신분)을 했던 집안은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의하면 송구봉의 집안은 조부 송린과 부친 송사련이 2대에 걸쳐 관상감 벼슬을 지냈으므로 노비를 면하게 된다. 그러나 원한에 사무친 안당의 후손들은 원래 천한 출신인 송씨 집안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린다. 그러던 중 서인계인 정철과 원수지간이던 동인계의 이발, 백유양 등이 정철과 송구봉을 해치고자, 송씨 집안의 양적(양인 증명 문서)를 모두 없애버린다. 송씨 집안은 꼼짝없이 안당 집안의 노비로 전락되고 죽은 송사련도 법적으로 노비가 되고 만다. 보복심에 불타는 안당 집안의 노비가 되면 온갖 핍박과 가해가 있을 것이라는 건 너무도 뻔했기에 70여명의 송구봉 일가는 성과 이름까지 바꾸며 뿔뿔이 도망간다.
이 사실을 안 안당 후손들은 송사련의 묘소까지 찾아가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난도질(묘지처참)한다. 부친의 악업으로 인해 출세 길이 막히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송구봉은 이를 원망하지 않고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며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의 이런 재앙을 막아줄 수 있었던 30년 지기(知己) 율곡도 죽고(1584년) 송구봉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던 정철마저 유배를 가게 되면서 송구봉의 말년은 암운이 더욱 짙어진다.동인계인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가혹하게 처리했던 서인계의 정철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동인들은 “정여립 사건수사”의 배후 조종자로 송구봉을 지목하며 왕에게 처벌을 간(諫)한다. 이로 인해 체포령이 내리고 쫓겨 다니던 송구봉은 자수하여 결국 유배(58~60세)를 간다. 하지만 이때 그는 이 사건에 관련된 평생 벗인 이율곡, 정철, 성혼의 명예를 지켜준다. 모든 인간관계에 평생 바름(直)을 실천할 것을 주장했던 그의 뜻대로 살았던 것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노비로 만들려는 안당 후 손들의 보복을 피해 고령의 몸을 이끌고 떠돌다가 1596년(63세) 충남 당진군 송악면 마양촌을 만년(晩年)의 은신처로 삼아 정착한다. 그리고 그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후학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열중하며 말년을 보낸다. 험난한 인생의 가시발길에도 송구봉은 임진왜란(1592-1598년)을 당해 고통 받은 나라를 구하고자 나름대로 애써보지만, 그의 친구 율곡이 이미 죽고 없었기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그는 66세의 일기로 비운과 고난에 찬 인생을 마감한다.
송구봉에 얽힌 일화 역사기록은 종종 승자는 미화되고 패자는 왜곡되곤 한다. 그래서 야사(野史)나 구전(口傳) 속에 오히려 전실이 숨어있기도 한다. 송구봉은 뛰어난 문인이자 유학자이기도 하지만 정신수양과 도력이 높아 그이 신출귀몰한 재주는 많은 일화들을 남기며 전해져 온다. 송구봉은 안광이 변개가 치듯 너무도 강렬하여 이율곡을 제외하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잇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선조가 가장 신임했던 이율곡이 송구봉을 조정 인재로 자주 천거하자 마침내 선조가 만나보게 된다. 선조 앞에 불려온 송구봉이 시종 눈을 감은 채 말을 하자. 선조가 “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라고 물으니 “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이리하옵니다.”라 대답한다. 이에 선조가 “그럴 리 있겠소.” 어서 눈을 뜨시오”라 하여 송구봉이 눈을 뜨는데, 선조는 그의 안광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기운에 놀라 그만 용상에서 떨어졌다고 한다(기절했다는 얘기도 있음) 이후 선조는 그를 다시 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에 구원병을 끌고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졌는데 송구봉이 그 야심을 꺾은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한번은 이여송 장군과 여러 관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와서 “우리 스승님이 장군을 한번 뵙고자 합니다.”한다. 이에 소년을 따라간 이여송과 수십 명의 호위병들이 깊은 산속의 한 초가집에 이르니, 눈에 천을 감고 있는 노인과 그 옆에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이 “방안에 들어오시오”라고 말하자 이여송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방안에 들어간다. 노인은 이여송에게 술 한 잔을 딸아 주면서” 그 동안 조선을 위해 싸우느라 수고했소. 그러나 이제 전생이 끝났으니 딴 마음을 먹지 말고, 그대들 나라로 돌아가시오.”라고 말한다. 이에 분노한 이여송이 칼을 휘둘러 노인을 죽이려 하자 옆에 있던 소년이 칼을 막으며 이여송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이에 이여송과 수 십 명의 병사들이 노인과 소년을 공격하자. 노인이 천을 벗고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보니 번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그들이 쓰러지게 된다. 노인은 “장군은 이 아이 하나도 못 꺾으면서 어찌 나를 대적하겠소? 장군은 이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니 나쁜 생각 먹지 말고 돌아가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장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소이다.” 라고 말한다. 이에 겁을 먹은 이여송은 도망치듯 말을 타고 군영으로 돌아갔고 그 해 서둘러 철군을 한다. 이 밖에도 송구봉이 이순신에게 거북선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 김덕령을 훌륭한 장수로 가르친 이야기 남명 조식과 교유하며 임진왜란을 대비했다는 이야기 퇴계 이황의 만사(挽詞)를 써준 이야기 등 숱한 일화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일화의 대부분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국난에 대비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내용들이다. 이율곡에게 왜군이 침략할 것을 알려준 이도 송구봉 이라는 일화도 있다. 이율곡의 10만 양병설 또한 송구봉의 지혜에서 나온 발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율곡의 이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그는 죽게 되고 송구봉은 친구의 안타까운 죽음을 하늘에 통곡했다. 현존하는 송구봉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 당쟁에 휘말려 불우했던 지식인 에 그친다. 하지만 야사에 전해진 그의 모습은 제갈공명을 뛰어넘는 신비한 이적선술(異蹟仙術)의 소유자로 국난을 걱정하고 대비했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시골 노인들은 “송구봉 이야기”를 꺼내면 “그때 그 어른이 조금만 벼슬만 했었어도 그까짓 왜놈을 단번에 쓸어버렸을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한다.
그의 시 두 편 제목은 “산행(山行)”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1534~1599)
산행망좌좌망행(山行忘坐坐忘行) 산가다 보니 앉을 줄 모르고 앉아있다 보니 갈 줄 모르네.
헐마송음청수성(歇馬松陰聽水聲) 소나무 그늘 아래 말을 매고 물소리를 듣는구나.
후아기인선아거(後我幾人先我去) 나보다 먼저 몇 사람이나 갔으며, 뒤에 몇 사람이나 올까.
각귀기지우하쟁(各歸其止又何爭) 제각기 갈 곳을 가건만 어찌하여 다투기만 하는고.
선생은 학식이 풍부하고 대가 높아 감히 누구도 근접하지 못하였고 임금님까지도 구봉 선생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당시에 이율곡과 성우계와 가까이 교유했다.하루는 율곡이 선조 대왕께 구봉선생의 학식과 사람됨을 아뢰고 장차 나라의 큰일에 쓰일 인물이 된다고 추천하였다. 그러자 왕은 당장 만나고 싶으니 함께 어전에 들라 명하였다. 그리하여 율곡은 밤중에 구봉과 함께 어전에 부복 하였다.임금은 여러 가지로 질문을 하며 구봉선생의 대답을 듣다가 부복하여 있는 구봉선생에게 “고개를 들고 짐을 보라” 명하였다.
그러자 구봉선생은 잠시 주저하였으나 어명을 어길 수 없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임금을 보는 순간 왕은 용안이 창백하여지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였다. 눈빛이 호랑이의 눈과 같이 번쩍하고 불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왕은 송구봉 선생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 그 사람 얘기는 이제 하지도 말라 어디 그게 사람의 눈이더냐”고 하였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에 쟁쟁한 선비로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이 뛰어났던 만전당(晩全當) 홍가신(洪可臣)과 가까이 지냈었다. 홍가신은 뒤에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사람인데 그의 동생으로 차의 홍경신(洪慶臣)이 있었다. 홍경신은 형이 서얼 출신의 송익필에게 경대(敬待) 하는 것을 항상 못 마땅히 생각하고 그의 형에게 “어찌하여 송익필과 벗을 하십니까? 내가 반드시 욕을 주겠습니다.”하였다. 이에 홍가신이 웃으면서 “송구봉 선생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하는 말이 “그는 비록 사비(私婢)의 소생이라고 하나 그 학식과 인품이 존경할 만한 분이니라. 네가 그렇게 해 보고 싶거든 한번 해 보아라, 그러나 너는 반드시 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홍경신은 송익필이 오기를 기다려 욕을 뵈 주려고 벼르던 차에 어느 날 송익필이 자신의 집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뜰에 내려가 맞으며 절을 하였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홍가신이 까닭을 물었더니 그 아우 말이 “내가 절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습니다.” 하였다. 이후부터 홍경신도 형과 더불어 구봉선생을 스승으로 공경하며 따랐다 한다.
일찌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의 얘기다. 율곡선생의 소개로 충무공께서 구봉선생을 찾아갔다. 마침 구봉선생은 외출 중이었으나 하인의 안내로 사랑채에서 구봉선생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랑방의 아랫목에는 훌륭한 병풍이 한 폭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속의 그림이 한 마리 큰 학이 있는 지라 그 앉아 있는 모습이 평소에 상상하던 거북선의 모습과 흡사하여 그만 자신도 모르게 병풍인 줄도 잊고 몇 개의 구멍을 뚫고 말았다. 그러자 이내 구봉선생이 귀가하였다. 하인들에게 “손님은 모셨느냐?” 하시니, 하인이 “큰일 났습니다. 그 아끼시는 병풍에 구멍을 내셨습니다.” 한다. 그런데 구봉선생님께서는 뜻밖에 “쓸 곳에 쓰인 것이다. 걱정할 것 없느니라.” 하고 사립문을 열며 충무공과는 수인사도 없이 “어디 몇 구멍이나 뚫었는가 보자” 하였다. 처음대하는 이충무공은 어쩔 줄 몰라 하여 사과 겸 인사를 드리니 그제야 정색을 하고 바로 앉아 하는 말이 “이 네 구멍만 갖고는 전 후 좌우로 밖에 더 가겠소.” 잠수를 하고 부상을 하자면 적어도 다섯 구멍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내가 뚫어줄 수밖에 없겠군, 라고 하셨다. 한다. 충무공이 말하길 “당나라의 이적(李勣)장군이라면 몇 구멍이나 뚫겠습니까? 물으니 < 8구멍은 낼 것일세> 하고 또다시 “제갈공명(諸葛孔明)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24구멍은 내겠지> 하신다. 그래 또 다시 묻기를 “원래 완전하게 만들려면 몇 구멍이 되겠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물으니 웃으며 조용히 하는 말이 <48 구멍이 전부일세> 하였다 한다. 이것으로도 구봉선생의 계제(計除)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공명하면 중국의 삼국시대 때 유비를 도와 천하를 평정할 때 신출귀몰한 용병과 작전으로 조조의 간을 서늘케 한 대도인(大道人)인데 그도 크게 미치니 못한 것이 아닌가? 충무공이 생각하기에 당나라의 이적 장군 아니 제갈공명마저도 아득히 미치지 못할 분이라면 도대체 이 어른은 어떠한 분일까? 하기는 율곡선생(충무공과는 친척간)의 소개하여도 가이 짐작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하셨지 않은가? 이제야 진정 훌륭한 스승을 뵙게 되었구나 싶었으리라. 그는 그날 밤늦도록 정치, 경제, 군사 등에 관해서 광범한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으며, 그 후 구봉선생의 제자로 입문하여 훗날의 국난에 대비하는 많은 수련을 쌓았다.그날 밤 구봉선생은 충무공에게 두수의 글을 주셨는데,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섬멸전을 펼 때 신묘한 전략을 세우는데 아주 적절한 글이 되었으며 다음과 같다.
월흑안비고 (月黑雁飛高) 달 밝은 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단우야둔도 (單于夜遁逃) 선우는 밤에 도망치리라
독용잠처수편청 (毒龍潛處水偏淸) 독용이 숨어 있는 곳의 물은 편벽 되어 맑고
벌목정정산경유 (伐木丁丁山更幽) 산에서 나무 찍는 소리가 “쩡쩡”울리니 산은 다시 그윽하다.
일찍이 고청 서기는 그의 문하생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을 알고자 한다면 구봉 송익필 선생을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제갈공명이 구봉선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는 기록이 있다. 구봉선생은 서얼로 태어나 한평생 방탕 생활을 하시면서 많은 시를 지며 남겼으며 깁시습, 남효은과 더불어 산림삼걸(山林三傑)로 불리운다. 그이 시를 잠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낙화는 펄펄 날리어 시냇물이 붉은데
백조는 쌍쌍이 비단강산을 날으네
취객이 무심코 도사를 찾아갔더니
작은배 바람에 떠있을 뿐이구나
천리를 헤메는 유척의 이내몸
십년동안 서울의 봄구경 잊었구나
이제 취한 그 꿈속 같은 내고향
창밖의 천산이 내 벗인가 하노라.
선생은 65세에 면천후 김진려의 집에서 8월 8일 세상을 떠났다.선생의 제자로는 김장생 박엽 정업 서성 정홍명 서기 김반 등 많은 문인들이 있으며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도 송구봉 선생을 외우(畏友)로 하였다 한다. 선생의 구봉집은 뒷날 제자들이 흩어진 시문을 모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구봉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 제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시골에서 올라온 일이 있었다. 그 선비는 제삿날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여 앞당겨 온다고 부지런히 집을 나서서 올라 왔다. 구리쇠 나루를 건너 남대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길에서 어떤 귀인의 행차를 만났다. 길 옆으로 비켜서니 가마안에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빡 놀라 보니 구봉선생이었다. “자네 좀 늦었네. 난 갈 길이 바빠 그만 가네, 이것이나 받아가게, 하시면서 헌 붓 한 자루를 주셨다.그 선비는 공손히 받아들고 땀을 닦으며 남대문에 도착하였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든 선비는 자기가 돌아가신 분을 만난 것을 알았다. 하도 기이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급히 제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보니 제사를 이미 이틀 전에 지냈다고 하였다. 그 선비는 자기가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선생에게 받은 붓을 모두에게 보였다. 제주(祭主)는 그 붓이 틀림없이 구봉선생이 쓰시던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다.당시 율곡 이이, 토정 이지함, 남명 조식, 우계 성혼 등과 깊이 교유하면서도 늘 그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선생의 출신이 다른 분에 비해 비천해서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학문과 도덕에서 그가 천한 경지는 잡초속의 영지(靈芝)라고나 할까. 그의 문인(門人)과 벗들 가운데 문묘(文廟)에 드신 분이 사계 김장생, 김집, 율곡 이이, 추계 성혼, 조헌 등이 있고 무인으로는 김덕령(金德令 : 孫弟子) 박엽 등을 꼽을 수 있으니이것만 보더라도 가히 짐작이 가는 바 있다.
- 여산송씨 14世, 元尹公派 - ※ 송하만 님의 인터넷 글에서 퍼왔으며<30여곳 교정을 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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