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조선의 대유학자 입재 정종로 선생님(등산기 추가)

문장대 2023. 10. 14. 19:46

* 이동지역 : 마을입구 파랑 창고-마을 통과-마을끝 정부지원 전기울타리 끝-산으로 진입-358봉-다른능선으로 하산-입재 정종로 묘지-진주 정씨 문중묘-고부태 이정표 고개- 중소 이정표 - 오봉산 - 관현리 이정표 하산-서쪽 능선하산-마을입구 창고앞 원점 도착

 

* 특이한 글 내용 : 본글의 내용은 등산하다가 우연히 뱔견하여 글을 쓰게 되었으므로 등산기를 수록하고 입재 선생님의 일대기 등을 등산기 후에 올립니다.

 

* 등산 및  입재 선생님 묘지 답사 내용 :  상주 숭덕지맥을 답사하며 우연히 발견한 입재 정선생님의 묘역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몇년전에는 노음산을 답사하면서 우연히 북장사 뒤로 하산하는데 멋진 명당을 보았고 그 명당 자리에 식산 이만부 묘역이라는 것을 알았고 당시 폐허 수준이었던 식산 선생님의 묘역이 너무 허술하게 관리되어 상주시청과 상주문화원, 연안이씨 종손에게 묘역 보수를 건의 한적 있다. 그 결과 인지 몰라도 상주박물관에서 식산 선생님의 묘역을 내서면 서만리 장서방 마을 뒤편에 멋지게 이장하였다. 당시 아무리 휼륭한 대학자라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묘지조차 폐허로 변하다는 슬픈 현실이다. 어제 숭덕지맥 오봉산을 답사하고 범산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바위손 군락지 위 358봉에 도착하여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평소 내려가고 싶은 고붓재 마을로 하산했는데 뚜렷한 하산길로 내려가다보니 명당이 등장하고 멋진 묘지가 등장한다. 자세히 비석을 살펴보니 조선의 대유학자이며 조선 정조시대 상주의 유명한 인물 입재 정종로 선생님의 묘비명이다. 이곳에 휼륭한 대학자의 묘지가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몇년전에 식산 선생님의 묘지를 우연히 발견한 사실과 같다. 아! 정말로 내가 건강을 위하여 험준한 지형을 마다하고 다니는 덕분에 이런 행운을 맞이하는구나 싶다.

 

- 아래 사진은  조선시대 대 유학자 입재 정종로 선생님 묘지 위성 지도 입니다. 

상주시 외서면 관현1리 고붓재 마을도로 끝 300m 지점 감나무 밭위 진주정씨 문중묘 위 대유학자 입재 선생님 묘역 표시 지도

 

 

상주는 역사적으로 큰 고을이라 유명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그분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명당과 휼륭한 인문들의 묘역이 많다. 정기룡 장군처럼 묘지가 잘 관리되고 사당과 기념관이 있는 곳과 후손들이 잘관리하는 묘역들이 대다수 지만 가끔 유명한 분들의 묘지가 잘 관리 되지 않는 곳도 있다. 이곳 상주시 외서면 관현리의 입재선생 묘지도 오래되어서 그런지 묘지가 많이 훼손되고 풀이 나지 않아 보기가 안타깝다. 어제 답사후 마음이 허전하여 다음날인 오늘 2023년 10월 14일(토) 연이어 입재 선생님의 묘역을 답사했다. 상주자택을 나와 외서면사무소를 거쳐 관현리 고붓재 마을입구에 주차하고 마을을 관통하여 바위손 군락지가 있는 358봉을 올랐다. 진주 강씨 문중묘가 있는 곳으로 다시 하산하였다. 2번째 방문하는 입재 선생님 묘지에서 묵념하고 주변의 돌을 주워서 벼렸다. 허물어진 묘지를 다듬기도 했다. 비석에는 5대손 정의묵 후손이 새웠다고 쓰여져 있다. 상석에 글씨는 마모되어 알 수 없었다. 망석은 2곳이고 거북 형상의 비석 주춧돌이 양반의 묘비석임을 말해준다.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의 대 유학자로서 묘지로서는 다소 부족하다. 상주시와 문화원, 문중에서 관리가 요구된다. 허무한 마음으로 묘역을 참배하는데 묘 아래 밭에서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이 깊은 산골에 웬 사람들 소리가 나는가 싶어 나무사이로 내려다 보니 문중묘에서 정선생님의 후손들이 시제를 지내고 있다. 우연치고는 너무 고맙다. 안그래도 후손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30명의 후손들을 만났으니 너무나 반가웠다. 마침 후손 중  상주의 유명한 정건화 동명인쇄사-광고사 사장님을 만났다. 이분을 어디서 많이 본 분이다. 내가 직장 다닐때 친하게 지내든 분과 친구사이다. 입재 선생님의 묘역에 관한 일과 문중일에 대한 애기를 하며 멋진 시간을 가졌다. 시제를 위해 전국에서 오신 여러 정씨 후손들과  일일이 인사하고 헤어졌다. 참으로 부럽고 부러운 명문가 후손들이다. 후손 중 학생이 보여 인사하면서 조선시대 대유학자를 조상으로 모신 사실을 축하한다고 했더니 무척 긍지를 느끼는 같다. 후손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오봉산 등산지를 발견하기 위해 오목한 안부를 향했다. 묘지 조성을 위한 포크레인이 산에서 요란하게 작업한다. 2분의 남자분이 지도를 들고 자기들 산을 살피고 있다. 잠시후 농로끝길을 이어 풀이 무성한 곳을 헤치며 오르니 묘지가 있고 고부테 이정표가 있는 안부 오목한 지역에 안착했다. 이곳 숭덕지맥을 여러번 지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마을길로 향하는 곳을 못 가보았는데 오늘은 마을에서 이곳에 도착하여 이정표 방향의 길이 있는지 궁금증을 해결했다. 앞으로 이곳으로 오봉산과 범산 그리고 고붓재, 바위손 군락지를 답사하리라! 이후 동편 오봉산 방향으로 오르다가 중소리 가르키는 이정표를 보고 중소리로 내려가보았다. 라디오 소리가 요란한 곳으로 내려가니 알바다.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안보여 뒤돌아  좌측으로 오르니 중소리 정식 등산로를 발견했다. 아주 뚜렷한 등하산로다.

 

마지막에는 시퍼런 이안천이 보인다. 그러나 건너가는 다리가 안보인다. 불안하여 후일 중소리에서 역으로 이곳 중소리 이정표 방향으로 오르리라 다짐하고 다시 뒤돌아 올라 숭덕지맥에 합류했다. 이후 오봉산을 향하여 올랐다. 오봉산을 올라 멋진 오태저수지를 조망후 벼랑박 고개로 향해가다가 관현리 쪽 내가 주차한 곳의 이정표대로 하산하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숭덕지맥 3곳의 이정표 방향으로 내려가 길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중이다. 요새 머티마을 이정표와 샛마마을 방향 이정표를 보고 내려가는 길이 있나를 알아보고  정식 등하산로를 발견하는데 성공한 바 있다. 오봉산 정상에서 200m 남쪽 벼랑박고개로 하산하니 관현리 이정표가 존재한다. 이곳에서 다소 거친 길을 따라 하산하는데 각종 가시 나무들이 얼굴을 강타한다. 참고 참으며 족적이 보여 내려오다보니 마을과 논, 과수원이 지척이다. 마지막 급경사를 따라 내려오니 도랑이다. 도랑을 건너 과수원지나 마을길에 도착하고 애마를 회수하였다. 오늘은 등산도하고 3곳의 이정표 방향을 따라 정식하산로를 발견했으며 특히 조선 정조시대 대 유학자 상주의 인물 입재 정종로 선생님의 묘지를 2번째 방문하고 그 후손들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우리 역사상 유명한 양반가문 진주정씨 문중 후손들이다. 등산 사진을 소개하고 입재 정종로 선생님의  삶을 조명해보고 입재선생님에 관한 역사적 시실들을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입재 선생님의 묘역 근방을 등산한 과정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정종로 묘역 답사를 겸한 오늘 이동한 등산경로 지도- 8,3,9,10,1, 21(염소목 마을 추가 답사) 경로

 

 

* 사진을 올려봅니다.

 고붓재 마을 입구 주차-출발

 

정부지원 전기울타리 밭 끝에서 우측으로 오름

                                 어제와 오늘 2번 답사한 입재선생님의 부실한 관리의 묘지

 

                                   입재선생의 5대손이 입재선생님 비석을 새움-입재 정선생 지묘

 

                                정건화 사장과 묘지에 대해 30분간 대화-오늘 시제에서 앞장서서 일하는 주인공

 

 

                                       전국에서 시제를 지내기 위해 모인 후손들이 담소하시네요.

 

                                        직계 조상들의 묘지를 새로 조성한 문중묘 

 

                             고부재로 향하는 이정표 등산길 발견함 - 역으로 올라서 발견

 

                         중소 방향으로 가는 등산로를 발견하여 잠시 내려갔다가 뒤돌아옴

 

 

                           오봉산 정상에서 어제 오늘 오태저수지를 조망함-지상천국

 

                         오봉산에서 벼랑박 고개방향 200m 하산하여 서쪽 하산로로 내려옴

 

                           하산하면서  산돼지가 파혜쳐 폐허가 된 의성 김공 묘지

 

                                   안타깝게 폐묘가 된 의성 김공 묘지

 

                   급경사로 하산하여 농경지와 과수원에 도착 -마을 길 거침-원점 회귀

 

오봉산에서 마을 방향 서쪽으로 족적을 따라 하산-마지막은 급경사

 

마을 입구 파랑 창고앞 원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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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를 회수하고 이웃마을 오태리와 반대편마을 중소리 염소목 답사한 사진 올립니다.

 

                            등산마치고 주변마을 오태리로 가서 효령대군 영당 답사

 

 

                                                   오태리 지나 -중소리 답사

 

  등산 마치고 차를 회수하여 고붓재 마을 반대편 중소리 염소목마을 답사-정자 쉼터에서  주민과 잠시대화

 

위성으로 본 이안천변 상주시 공검면 중소리 염소목마을 지도-지상천국의 아름다운 마을

위  사진 모양은 숭덕지맥을 답사하며 북쪽 이안천 아래를 보면 저모양의 전경이 펼쳐집니다.  경치가 이런곳 어디 또 있나요? 이곳  공검면 중소리 염소목마을 을 등산 마치고 빙돌아 답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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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 정종로 선생님의 일대기와 여러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올립니다.

 

- 입재선생님 일대기-

 

입재 선생님은 영조 14년 1738년 11월 13일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서 태어났고 순조 6년 1816년 79세에 졸하였다. 조선 선조때 판서를 지내고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을 하셔서 조국을 구한 우복 정경세 선생님의 6대손으로 탄탄한 양반가 자손이었다. 입재공은 태어난지 어머니의 병환으로 3-4일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함창현 율리(현재는 문경시 영순면 율리)의 외가집인 부림홍씨 가문에서 외조모님 이씨에 의해 양육했다. 친어머니의 사랑은 받지못하고 계모의 슬하에 젊은 시절에 생활했지만 조상들이 물려준 서책들을 모두 통달하여 조선시대 대 유학자의 소양을 길렀다.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내고 친가에 와서는 서실에서 수 많은 책을 읽었다. 조부인 정주원 공에게 수학하여 엄청난 학문의 발전을 하였고, 특히 글씨 수준은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요새 같으면 신동이였다. 두뇌도 엄청 좋지만 조부 정주원 님의 가르침과 본인의 노력 3박자가 두루 갖추어진 천재 소년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왕대 밭에 왕대가 난다는 말에 동감한다. 1747년 영조 23시절 10세에 동네 아이들과 놀지 않고 수 많은 경전과 제자백가 등을 통달한 사실은 놀랄 일이다. 부친은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효자노릇하느라고 여막에서 살아 건강이 무척 쇠약했다. 따라서 어린 나이에도 어른처럼 부친의 약을 시탕하여 병구완을 10년간이나 하였다. 이런 효자가 과연 있을까? 한편 소학을 필사하여 책을 만들고 틈틈히 공부하여 교양을 쌓아 나갔다. 계모인 충주 박씨에게 이복동생이 태어났지만 1756년에는 19세가 된 당시 조부상, 숙부상, 부친상을 당하였다. 한마디로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었다. 요새 같으면 미성년인데도 희망을 잃지 않고 굳건한 정신으로 계묘인 충주박씨를 봉양하고 2여동생과 남동생을 돌보는 굳굳한 청년이 되어 가장의 역할을 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숙부님에게 공부하여 학통을 이어 갔다. 학문은 깊어 갔지만 집인을 돌보느라 과거시험에 응시를 못했다. 혼자 가업을 이어가다가 21세 완산이씨와 혼인하였다. 이때는 선조 우복 정경세 선생님의 신도비를 건립하는 시기였다. 조부상,부친상, 숙부상을 탈상하고 6대선조 우복 선생님의 신도비를 새웠다. 신도비는  2품이상의 벼슬을 한 선조에게 새우는 자격이 있어면서 재산도 있어야 가능하다. 결혼하고 신도비를 새우는 일은 너무나 힘들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새웠다. 지금도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에 신도비가 조성되어 오래전에 답사한적 있다. "이 신도비는 조선 시대 1563년(명종18년)~1633(인조11년) 동안 조정의 문신으로 활약한 우복(愚伏)선생의 유적을 적은 비이다.이 비석은 당초 도로 입구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주위가 개간되어 논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정경세 선생의 증손 정석교(鄭錫僑)가 경상감사 이명준(李命俊)으로부터 기증을 받은 남포석(藍浦石)에 비각 작업을 하고 세우지 못하던 것을 현손 정주원(鄭?源)이 음기(陰記)를 찬(撰)하고 1758년에 6대손 정종로(鄭宗魯)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비석 규모가 장대하고 글씨 보존이 전체적으로 양호하다. 우복 선생은 禮學(예학)에 밝아 예학자로 불리었으며,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선생의 수제자로 선생의 학문은 영남과 기호 지방에서도 널리 인정하였다.(두산백과에서 복사한 글입니다)"

부인 완산이씨 사이에 장녀와 차녀를 낳았고 한편으로는 항계희 선생님에게 도학을 수학하여 학문 증진과 수학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채로운 공부를 한 분이다. 30세에는 호를  ‘입재(立齋)’라하고 주변의 학자들과 학문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과거는 아직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학문과 사상은 탁월하여 영조 임금의 인사천거 명을 하달 받았다. 이때 그는 학문의 연구에만 열중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입재의호를 무적옹 이라는 호로 변경했다. 이유는 입재가 다른고장의 선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산은 골이 깊어 맹수가 등장하므로 청리면 율리로 이사했다. 어릴때 외가집 동네도 율리이기에 밤골인 율리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 본다. 공검면 율곡리로 이사한적이 있는 것을 보면 율리 마을을 좋아한 같다. 할아버지가 살았던 율리에서 다시 우산으로 이사하여 3아들을 득하였다. 이때 마을에서 어린이들에게 15일마다 학문강좌를 개설하여 아동교육에 이버지 했다. 한편 대산 이상정 선생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논하고 여러 학자들과 학문과 사상을 교류하였다. 이 사실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상주의 유명인사가 되고있었다. 이사도 여러번하여 상주의 화산과 공검 부곡의 재실 근방에도 살다가 다시 우산으로 이사했다. 우산에서는 현재 우복종가가 있는 대산루와 계정에 살기도 했다. 차남을 6촌 동생에게 양자로 주고 영양 주실의 만곡 조술도오 교류하며 매부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상주는 주로 남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때 다수의 서인과도 교류하여 다채로운 삶을 이어갔다. 결과로 입재 선생은 영남의 대학자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입재선생은 당시의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족적을 남긴바가 커서 지금에 와서 영남의 명가에는 선생의 문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당대의 생존한 인물을 중심으로 말할 때에는 좌대산 우입재(左大山 右立齋)라 말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도행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는데, 52(정조 13)때는 광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조선시대 임금으로서 학자의 기품을 지닌 가장 뚜렷한 임금은 정조임은 주지의 사실인데 임금이 영의정 채재공에게 훌륭한 학자를 추천하라 할 때 현 광릉참봉 정종로는 경학과 문장이 울연(蔚然)하여 영남 제일인자입니다.”하니 일약 의금부도사를 제수하였다. 유일로 관직을 받고 입시할 때 (정조 1312) 우복선생문집1질을 임금께 올렸는데 그 이유는 광릉참봉에 제수되었을 때 임금이 우복문집에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국내의 다른 지방 저명한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실학파의 거유 순암 안정복을 찾아가 학문과 사상을 논의를 한 것도 이때이다. 55(정조 16) 5월에 도산서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참배하였다. 귀가시 수곡(水谷)에 들러 대산 문인인 동암 유장원을 방문하였다. 59(정조 20) 되던 해에 주상이 우부승지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정종로의 행의와 문장에 관해서 들은 지 오래인데 과연 영남의 제일의 학자인가?”라는 물음에 정종로는 가학연원으로 소년 때부터 뜻을 바로 세워 일상생활에도 근신하는 행동을 잃지 않으며 향리에서 뿐만 아니라 도내에 명망이 가득하니 주상께서 물으신 바와 같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주상은 처음 광릉 참봉으로 임명할 때 그 사람됨을 알았고 그 뒤 과연 깊이 있는 사람임을 들었노라. 이 사람이 곧 문장공 정경세의 봉사손이며 문장공이 경연에 출입하여 충성된 마음으로 임금에게 아뢰는 일을 맡아 대제학, 판서로 그 학식과 덕망이 지금까지도 세인들의 귀에 익었거늘, 지금 그 후손에 이러한 명사(名士)가 났으니 어찌 귀하지 않느냐? 대신(번암 채제공)에게 물으니 향중의 제일인자라고 하니 어찌 마땅한 자리에 등용치 않을 수 있겠느냐. "적당한 자리에 등용하라.” 하명하였다. 이에 의금부도사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숨은 학자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로 천거되어 지평 벼슬에 보임되자 정조왕은 문장공묘(文莊公廟)에 치제(致祭)10)를 명하였다. 60(1797, 정조 21)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거쳐 강령현감(康翎縣監)11)에 제수되었다. 이때 문장공의 사당에 치제를 내린 것에 사은하고 노모를 모셔야 하는 이유로 거리가 너무 먼 강령현감에 사의를 상소하고 물러났다. 강령은 현재 이북 지역인데 해주시 옆이고 옹진군에 속한 함창 정도의 고을이었는데 너무 먼곳에 벼슬이 제수되어 정조임금에게 사의를 표했다. 곧 고향에 인접한 함창현감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이 해 함창에 있는 임호서원(臨湖書院)의 사현(四賢) 행장을 지었고, 귀신론鬼神論을 지었다.62세(1799, 정조 23) 정월에 모부인(춘천 박씨) 상을 당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애곡을 하다가 몇 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63(1800, 정조 24)에 정조가 승하하여 국상을 당하였을 때 선생은 모친상의 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읍내에 나가 객관 밖에서 멍석을 깔고 망곡하였다.(목직 최용식 선생님의 글을 복사한 글임)

 

* 관직 등용 : 입재 선생님은 가정의 대소사로 너무 바빠서 과거에 응시 못하고 틈틈히 전국의 유학자들과 교류하여 영조, 정조 시대의 대 유학자로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영조시대에는 조정의 벼슬 천거가 있었으나 상소로 거절하였고 정주 시대는 당시 영의정인 채제공(충청도 홍주 사람)의 주선으로 광릉참봉(종9품-현재 9급 공무원)을 제수 받았다. 입재선생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관리가 된 분이다. 이후 여러관직으로 승차 이직하여 공정한 업무로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6대 선조인 우복대감이 우산일대에 사패지를 증정하여 봉사손으로 괜찮은 부를 누렸고 본인의 노력으로 많은 공부를 하여 멋진 상주고을의 유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입재선생님의 벼슬 승차과정과 이동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광릉참봉-의금부 도사-사헌부 지평(과거 급제를 않고 승차함)-해주 옹진 근방 강령현감 제수- 현감사임-함창현감- 71세 사헌부 장령(정4품)

 

* 입재 정선생님의 저서 : 소학 필사본, 보망록(소학-사서 삼경의 해석), 우복선생 문집을 임금에게 올림, 함창 임호서원 4현 행장, 귀신론,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의 묘갈명, 태왕론(太王論), 우산 20경 시, 박손경의 문집 서문, 퇴계문인들의 필첩의 서문, 태극권자설과 태극동정설,도산서원묘정비명, 개령의 덕림서원 중수기

, 대순론, 오상설, 맹자불존주론, 이발기발설, 퇴계선생의 주리론 옹호. 우재 손중돈 실기의 서문, 논어연의,여사휘찬을 교감하고 서문, 백불암문집을 교정, 대산(이상정)이 지은 퇴도서절요의 발문 지음.손재(남한조)의 행장,  이광정의 묘갈문, 운곡잡영과 도산잡영을 차운하고, 식산 이만부의 문집 간행에 참가.식산은 상주 사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입재선생은 북장사에서이만부 문집 발간, 낙동강에 배를 띄워 시회(詩會) 참가 등 수많은 책자와 여러 방면의 글을 남겼다. 

 

* 입재손선생님의 학통과 문학의 경향

입재 정종로 선생님은 자는 사앙, 호는 입재 혹은 무적옹 이다. 서애학파이며 경학, 이학, 문학, 예학의 지식을 두루 갖추었으며 596 제목에 1249수 한시 저작자이다. 이 사실은 퇴계 이후 가장 많은 저작물을 소유한 학자이다. 그분의 저서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정조 임금 당시 영의정이던 번암 채제공은 입재 선생을 경학과 문장이 가장 뛰어난 영남의 제1인자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이 높아 정조 임금에게 유일로 벼슬을 천거한 근거다. 당시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사후 현재까지 상주의 대학자이며 큰인물로 추앙 받고 있다. 우복과 무첨재의 영향을 받은 입재의 시는, 자연스레 더 위로 거슬러 올라 서애와 퇴계의 시풍에도 닿아 있기 때문이다. 입재 선생은 퇴계로부터 무첨재 시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공통점이라 고 할 수 있는 도연명과 두보, 주자의 시 영향을 받았다. 입재집에 수록된 시는 총 596제에 1249수로 파악되었다. 입재집 본 집 권1에 맨 처음 수록된 시는 25세 때 지은 계정월야상매이며, 마지막 수는 1816년 79세로 생을 마치기 직전에 지은 개도보전운이다. 권1에 129제 173수. 권2에 73제 202수. 권3에 71제 131수. 권4에 77제 134수. 권5 에 89제 159수. 권6에 43제 229수. 별집 권1에 55제 75수해서 모두 총537제 1103수이다. 이와 별도로 만가 권7에 45제 100수, 별집 권1에 14제 46수 가 실려 있다. 전문 시객이 아닌 도학자로서 이처럼 많은 시를 남긴 경우는 드물다. 근 80년에 이르는 입재의 일생은 受學·交遊·出仕·講論·著述 등등으로 그 활동이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대체로 40세에 이르기까지는 집안에 서 가학을 傳受하던 시기였으며, 이후 60세에 이르기까지는 교유와 출사를 통해 학문을 확충했던 시기였으며, 마지막 생을 마치기까지 약 20년은 講學과 著述로 학문을 전파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입재의 시문 창작도 대체로 학문 전개과정과 상관성을 띠고 있다. 입재는 30세가 될 때까지는 학문에 전념하며 시문창작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 다. 立齋集에 의거하면, 입재가 처음 시를 지은 것은 25세 때이며 30세 가 될 때까지 지은 시는 단 4수에 그치고 있다. 7) 그 후 30대에 들어서 본격 적으로 시를 창작하기 시작하였는데, 내용은 주변경물과 전원풍광을 묘사 한 7언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습작기라고 할 수 있는 이 무렵에는 杜甫· 韋應物·邵雍·蘇軾 등 중국문인들의 시를 차운한 것이 눈에 띈다.

40세에 접어들면서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들과 교유를 통해 학문을 심화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던 입재는, 交情을 노래한 시와 함께 전원생활을 예찬한 오언고시를 다작하였다. 특히 42세 되던 1년 동안 은 陶淵明類의 오언고시를 43제에 48수나 집중적으로 창작하였다.9) 이 무렵 입재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집안에 전통처럼 전해 내려온 도연명류의 古詩 창작이고, 다른 하나는 경화사족 출신으로서 尙州에 내려와 정착한 息山 李滿敷와 菊圃 姜樸·慕軒 姜必愼 후손들의 文風이다. 당시 입재에게 영향을 크게 끼친 인물은 慕軒 姜必愼 의 아들 警弦齋 姜世晋(1717-1786)이다. 그 후 입재의 문학은 菊圃의 손 자 皓隣 姜世白(1748-1824)과 息山의 증손인 林下 李敬儒(1750-1821) 등 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더욱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40대에 이미 학행과 시문을 인정받은 입재는 52세 때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徵召되어 義禁府都事 등에 超授되었으나 謝恩만 하고 물러났다. 이 당시 知己이자 사돈인 損齋 南漢朝(1744-1809) 등과 인근의 곳곳을 유 람하며 많은 기행시를 창작하였다. 이 때 朱子의 ‘雲谷二十六詠’ 중의 第 一絶을 차운한 16수와 第二絶을 차운한 2수를 지어 평소 주자에 대한 존모심을 나타내었다. 59세 때 다시 司圃署 別提와 司憲府 持平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다음해 6월에 康翎縣監으로 임명되었으나 繼母의 연로를 이유로 사직하자, 그 다음 달에 향리와 가까운 咸昌縣監에 제수되었다. 사은숙배하고 부임하였지만 11월에 관직을 버리 고 귀환하였다. 이 당시 읊은 시들에는 그의 출처에 대한 의식이 잘 드러나 고 있다. 60대 이후에는 생을 마치기까지 강론을 통해 학문을 보급하며 저술활동 에 주력하였다. 성리설과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과 序·記·跋·銘·碑誌 등의 글들이 대부분 이때 이루어졌으며, 주자·퇴계·대산의 시를 집중적으로 차 운하여 선현에 대한 존모심과 자신의 완숙된 학덕을 드러내었다. 79세 되던 1816년에 道南書院에서 中庸 강의를 끝으로 일생을 마쳤다. 입재의 6대조 우복 정경세 이후 이들 집안은 학문뿐만 아니라 문학적으 로도 높은 명성을 이어 내려왔다. 대표적 인물이 무첨재 정도응과 입재 정 종로이다. 입재 시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끼친 것은 무첨재와 우복이지만, 이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애와 퇴계의 시풍과도 맥이 깊게 닿아 있다. 우복 이래 이어진 家學의 전통과 퇴계와 서애를 이은 학통으로 볼 때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입재로부터 퇴계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도연명류의 전원 한적과,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적 고뇌를 시로 승화시킨 두보의 詩魂이 저변에 깔려 있으며, 성리학적 사유와 주자에 대한 존모심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 입재 선생님과 학문을 교류한  학자를 소개합니다. 

- 조부 정주원 선생님에게 수학하며 글씨쓰기에 영향을 받았다.

- 숙부 창주공에게 가학을 전수 받았다. 넷째 숙부 정지모에게 수학함으로써 정씨 집안 학통을 이루는 기반을 닦았다.

- 26세에 심기당 황계희를 방문하여 도학(道學)에 관하여 토론하였는데, 심기당으로 부터 학문하는 데에 큰 영향을 받았다.

- 39세가 되든 해 영남의 큰 선비들과 학문과 사상을 토론하고 교유하는 여행길에 올라 학문여행이 시작되었다.사벌면 손재 남한조,예천 용문 남야 박손경,안동 소호 대산 이상정, 의성 사촌 김종덕 그리고 안동 병산서원의 서애선생 묘우에 참배했다. 대구 옻골 백불암 최흥원과 교류하고, 그 중에서도 대산 이상정선생에게 3일간 머물면서 학문에 영향 받은바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 50세에 영남의 대표학자가 사는 영양 주곡을 방문하여 만곡 조술도와 교유하였다. 주곡에는 선생의 매부가 있었다.

- 계파를 초월하여 상주의 서인 유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고 만나면서 교류하였다. 정종로 선생의 시문집에는 영남의 남인인 안정복 이상정 채홍원 외에도 서인들과의 서신 왕래 자료가 많다고 한다.

- 유일 천거로 광릉참봉에 이어 의금부 도사로 관직을 받고 입시할 때 (정조 1312) 우복선생문집1질을 임금께 올렸는데 그 이유는 광릉참봉에 제수되었을 때 임금이 우복문집에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국내의 다른 지방 저명한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실학파의 거유 순암 안정복을 찾아가 학문과 사상을 논의를 한 것도 이때이다. 55(정조 16) 5월에 도산서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참배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수곡(水谷)에 들러 대산 문인인 동암 유장원을 방문하였다. 영남지방 뿐만 아니라 전국의 8도의 유학자들과 교류하여 학문을 높였고 수많은 제자를 전국에 배출하였다. 

 

* 입재 선생님의 한시 

 

1) 계정(우산리 정자)에서 달밤에 매화를 감상하며

 

밝은 달빛 비치는 밤에 차가운 매화나무

창가에 어리어 그림자 어지러이 비끼네

알 수 있노니 산새가 머물러 잠자면서

때때로 매화나무 한 가지를 흔드는 물

 

2) 벗이 방문해 줌을 기뻐하며

 

세속 손님을 잊은 지가 오래였더니

그대가 다정히 혼자 방문해 주었네

오래된 붉은 벼랑에는 물이 흐르고

그늘진 푸른 창에는 구름이 지나네

하룻밤 등잔불 앞에서 이야기하고

삼촌에 꽃 아래서 마음 나누었네

이별한 뒤에 밝은 보름달이 뜨면

서글픈 마음만 더욱 깊어지리라

 

3) 도남서원에서(위나라 소주의 시에서 차운하여 감회를 적음)

 

큰 고개라 가로지른 영남지역은

푸른 바다가 들렀는데 끝이 없네

나라는 중화와 더불어 나란히 있고

이름은 추로(맹공의 출생지)와 같이 존숭되었네

위대하도다 우리 성조여

인문으로 천지를 밝게 하셨네

여러 철인이 성대히 이로써 일어나

지극한 도의 큰 근원을 통찰하시고

 

4) 설성의 영각(충북음성 지방관 집무터)에서 꽃을 감상하고 계부의 시에 공경히 차운함

 

어여뻐라 붉게 핀 철쭉꽃이여

동현의 한쪽 곁에 피어 있으니

백리에 봄소식을

다정하게 네가 알려 왔구나

 

5) 벗에게 드림

 

흥을 타고 언제 방문하려나

어촌이 물가에 가득하여

나의 집 쉽게 알아볼 수 있으니

문밖에 푸른 복숭아꽃이 피었다네

 

* 입재 선생님의 마지막 유언과 묘지 

79세에 아홉수를 못넘기고 건강이 악화되어 64일 큰손자에게 문고(文稿)를 수습 정리하게 하고, 여러 가지 책을 잘 정리하도록 명하고, 의관을 단정하게 하여 정좌하였는데 66일 세상을 떠났다. 8월에 함창 황령산(우산리 옆 은척면)에 장사지냈는데 문상객이 800명이 넘었다. 장사 지낸 10년 후(순조 25) 상주 외서면 관현리 뒷산 지금의 산소로 이장하였다. 장례가 끝난 후인 병자년(1816, 순조16) 824일 조정에서는 증직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임금께 상주하였다. 임금이 몸소 경연하는 소대(召對)에서 참찬관 박종훈, 검열직각 정원용, 시독관 홍경모, 검토관 강세륜 등이 참석하여 검토관 강세륜이 계언을 올렸는데, 그렇게 하라는 주상의 하명이 있었으나 노론의 세도정치로 왕명조차 실현되지 않았다. 품계는 정삼품 통훈대부에 그쳤으나 많은 학설을 내고 저작을 많이 남겼으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하여 당대의 상주고을의 대 유학자로 추앙되면서 영남은 물론이요 호남이나 관동 서북지방에서도 선비들이 모여 250여명(일부 책에는 200명으로)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이로써 우산(愚山)이 다시금 문중의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유학의 연총(儒學 淵叢)으로 영남교학(嶺南敎學)의 본산을 이루었다.

 

(참고문헌) 柳辰熙, 立齋 鄭宗魯의 漢詩硏究 ,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2, 165-177

류진희,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도(陶)·두(杜)와 주자시(朱子詩) 수용양상 35)

 

 

* 상주지방의 여러 명산을 등산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입재 선생님의 묘지 위치와 현재 묘역 상태를 올립니다.

         관리가 안되는 입재 선생님 묘역-상주시 외서면 관현1리 고붓재 마을 뒤산 존재

                                 한자로 새겨진 비석-입재 정선생 지묘-5대손 정이목 건립

                                          묘지 아래  고붓재 마을 농로길 감나무 밭 위 진주정씨 문중묘

 

* 이상의 글은 상주가 고향인 최용식 선생님의 글을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공부하여 올렸습니다. 혹시 최선생님께서 보시고 마땅치 않다고 댓글로 연락 주시면 즉시 삭제 하겠습니다. 위의 글로 어떤 이익을 취하지 않으며 문장대 등산기에 올려 전국의 많은 분들이 입재선생님의 업적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작성했습니다. 정철이나, 윤고산은 정부에서 사당과 기념관을 새우며 묘역을 관리하고 있는데 상주시에서는 상주의 대 유학자 입재 선생님의 묘소 입구에 안내판이라도 설치했으면 고맙겠습니다. 

 

                     문장공 우복 정경세 文莊公 愚伏 鄭經世가계도

정택鄭澤 상주목사-중시조

고조부 정번

증조부 정계함鄭繼咸

조부 정은성鄭銀成

부 정여관(鄭汝寬) 좌찬성

모 합천이씨(陜川李氏), 이공가(李公軻)의 딸, 강양군 이요 江陽君 李瑤 후손

       

기준 : 문장공 우복 정경세 文莊公 愚伏 鄭經世

          초배 전의이씨 부장 이해 部將 李海의 딸,

          후배 정경부인 진성이씨眞城李氏,진보이씨眞寶李氏, 충순위 이결李潔의 딸

         1) 장남 정심鄭杺 예문관검열 禮文館檢閱

               손자 정도응鄭道應 시강원 자의侍講院 諮議, 창녕현감

                       증손자 정석교鄭錫僑 환성재喚惺齋 영양현감

         2) 차남 정학鄭㰒 선교랑宣敎郞

         3) 삼남 정력鄭櫟 만호萬戶,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손자-정도징鄭道徵

증손자-정석교

고손(현손)-정주원

5대손-정인모, 정의모,                           정례모,   정지모

6대손-정종로, 정익로, 정태로, 정명로  정성로    정영로    

7대손-정상진, 정상관

8대손-정민수

9대손-정윤우

10대손-정동규, 정동기, 정동익, 정동벽

11대손-             정우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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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시 공검면 오태리  출신최용식 교장 선생님의 글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그대로 올립니다. 

 

신한국운동

조선말 상주 대유학자

입재 정종로(1738-1816)선생에게 신한국 청소년이 배울 점

 

목직/최용식

---들어가는 말

 

신한국 독자가 대부분 연세가 많은 분들이지만, 저는 청소년 한 두 분이라도 읽기 바라며, 청소년에 가까운 글로 가려합니다, 여러분에게 조선말 상주에 입재 정종로 대유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다음 글은 입재 선생님에게 우리가 배울 점을 요약한 것입니다. 작은 도서관을 돌며 청소년과 학부모에게 서평쓰기 독후감쓰기를 함께 하면서 가장 미흡한 점이 전체에서 부분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오가는 지식의 종합과 분석이 안 되는 것을 많이 경험하게 되어, 입재 정종로 선생 소개에 부분마다 작은 주제를 달았습니다. 청소년 여러분은 부분 주제를 모아 정종로 유학자를 생각해주세요. 작은 주제와 상세 내용이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양해하시고, 궁금하시면 입재 정종로 문집을 독파 해주세요. 그리고 여기 인용한 글은 참고문헌의 본문을 그대로 다수 인용하였음을 이해 바랍니다.

 

입재 정종로 선생님(진주정씨)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과 유성룡 학통인 우복 정경세선생의 6대손이다. 입재 정종로선생은 영조14(1738) 1113일 상주 함창현 율리(현재 문경군 영순면) 부림 홍씨 마을에서 출생하여(일부 책에는 상주 외서면 우산리에서 출생이라고) 순조 16(1816) 6679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조선말 개화기 전 상주의 대유학자로 벼슬보다 제자 가르치기와 기록의 대선비로 기억하고 다음글로 갑니다.

 

---입재 선생님에게 배울점을 먼저 보고 갑시다.

 

1. 힘들어도 이기고 열심히 공부하자.

2. 주변인과 소통하며 살자.

3. 공동체 구성원끼리 편 가르지 말자.

4. 나보다 주변을 먼저 생각하자.

5. 자연 답사와 일상을 기록하자

6. 끝으로 책을 많이 읽자.

 

---입재 정종로 선생님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을 일별 해 봅시다.

 

1. 힘들어도 이기고 열심히 공부하자.

 

 

선생은 생후 3일 만에(일부 책에는 4일로) 어머니를 잃고, 외가에서 외조모인 이씨부인 손에서 자랐다. 6세 때 잠시 상주 우산 본가로 돌아왔다가 조부의 명으로 다시 외가로 가서 외증조부에게 공부를 배우고. 9세 때인 영조22년에 우산 친가로 돌아와 집안 어른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천재적 기질을 보였는데, 5세 때 봄에 꽃봉오리가 달린 매화나무 가지를 꺾어 놀면서 꽃봉오리가 위로 올라간 것은 자라 하고 옆으로 붙은 것은 자라고 하는 등, 나무 가지에서 글자를 알아맞히는 글자놀이를 하였다. 옛날에는 아기에게 먹일 것이 없어 네댓 살이 되도록 영양이 넉넉하지 못한 모유에만 의존하여 아기를 키웠으므로 유아의 발육상태가 현대처럼 일찍이 발달하지 않았다. 7세 때에 십구사략을 읽고 친가에 돌아온 후로는 어린 나이에도 밖에서 놀지 않고 서실에 묻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본가로 돌아온 후 처음에는 조부 엽동공에게 수학하였는데, 아홉 살 때 때 조부 엽동공의 글을 대서할 수준이 되었고 글씨가 훌륭하여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1747 영조 23) 때 이미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책이 쌓인 서고에 들어가 독서에 몰입하여 경전, 정주학, 제자백가 등을 숙독하는 일로 일과를 보냈다.

11세 때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병구완에 매달려 이후 10년을 하루같이 시탕하였다. 선생의 선고는 20대 초반에 모친상을 당해 여막에서 건강을 잃은 데다 선생이 태어나던 30세 이후로는 깊은 독서로 몸이 더욱 쇠약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세월을 병석에서 보냈다.

13세 때부터 숙부 창주공에게 수학하여 가학의 기초를 닦아나갔다.

17세 때는 소학(小學)을 베껴 소책자로 만들어 소매에 넣고 다니면서 행동규범으로 삼아 유학자의 기본으로서 행신의 정립에 정진하였다.

18세 때 조부의 병환이 위독하여 삼개월간 약을 달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계모 충주 박씨에게서 동생이 태어났다.

1756(영조21) 19세가 되던 봄, 2월부터 4개월에 걸쳐 연달아 상을 당하였는데 218일 조부상을 당하고, 39일 숙부상을 당한데다, 521일 부친(향년 50)상을 당하였다. 이때부터 종가를 책임지는 종손으로 어머니(충주박씨)와 두 여동생과 남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 후로 넷째 숙부 추간공에게 수학함으로써 정씨 집안 학통을 이루는 기반을 닦았다.

 

20대에 학문의 기초를 다진 21세 때는 조부로부터 대를 이어 준비해온 선조(우복선생)의 신도비 건립이 당시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다. 신도비 건립은 고조부 때 비문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증조부 때 석재를 마련하고 조부가 음기를 작성한 것이었다. 이러한 누대에 걸친 유업이었으므로 한꺼번에 닥친 조부상숙부상친상의 삼년상을 탈상한 직후 서둘러 신도비를 세웠다. 그 해 가을에 완산 이씨를 맞아 혼인하고. 23세 때 장녀가 출생하였고 25세 때 우산 동네 동편에 작은 집을 짓고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길렀다. 5월에 차녀가 출생하였다. 26세에 심기당 황계희를 방문하여 도학(道學)에 관하여 토론하였는데, 심기당으로 부터 학문하는 데에 큰 영향을 입었다고 한다. 27세에 소학으로부터 사서에 이르기까지 탐독 연구하는 가운데 의아한 것을 해석하는 대로 기록하여 보망록을 쓰기 시작하였다.

 

 

2. 주변인과 소통하며 살자.

 

30세 때 호를 입재(立齋)’라하고 이때부터 학명을 떨치기 시작하여 학자들 간에 학문과 사상을 토론하고 교환하였다. 입재는 논어 위정편의 子曰三十而立자를 따온 것이다. ‘입재가 이 고장에 사는 다른 어른분의 아호(雅號)임을 알게 된 후 무적옹(無適翁)’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31세 때(1768, 영조44) 조정에서 각 지방에 탁월한 인사를 천거하라는 명이 하달되자 향중 서숙의 인사들이 입재를 천거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선생은 서숙에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는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32세에 우복선생의 옛 거주지였던 청리면 율리로 이사하였다가 34세에 율리에서 다시 우산으로 이거하였다. 336월에 장자가 출생하였다. 363월에 차자)가 출생하였다.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마을 느티나무 아래에서 초하루 보름으로 강좌를 열었다. 38세가 되던 해 삼자가 출생하였다.

 

39세가 되든 해 영남의 큰 선비들과 학문과 사상을 토론하고 교유하는 여행길에 올라 학문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때

사벌면 손재 남한조

예천 용문 남야 박손경

안동 소호 대산 이상정

의성 사촌 김종덕 그리고 안동 병산서원의 서애선생 묘우에 참배했다.

대구 옻골 백불암 최흥원과 교류하고, 그 중에서도 대산 이상정선생에게 3일간 머물면서 학문에 영향 받은바 크다고 평가하고 있다.

 

42(1779, 정조3) 정월에 우산은 깊은 산중이라 짐승이 많아 장기간 기거하기가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교유하는 친구들의 안내로 상주시내 북계(지금의 화산리)로 옮겨 살았다. 그러나 두어 달 뒤에 다시 공검 우복 선조의 산소 재실 근처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겨울에 다시 우산으로 다시 이사하였다.45세에 거처하던 집은 동생에게 주고 계정 옆에 있는 서실(대산루)에서 생활하면서 계정을 사당으로 사용하였다. 남손재가 내방하여 선생에게 자제의 수학(修學)을 의뢰하였다. 46세에 11살 된 차남을 재종제에게 양자 보냈다. 50세에 영남의 대표학자로 영양 주곡을 방문하여 만곡 조술도와 교유하였다. 주곡에는 선생의 매부가 있었다.

 

3. 공동체 구성원끼리 편 가르지 말자.

 

  임란이 지난 뒤에 영남 지역 내에서 서인이 상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정경세는 출사했을 때 서인과 원만히 지냈고, 송준길을 사위로 맞았으며 만년에는 성혼과 이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수정했다고 알려졌다. 정경세의 이러한 행보는 그의 문인 중에서 서인이 등장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후 상주는 영남 내 서인들의 거점이 되었고, 서인들은 상주의 서애계에서 한강. 여헌계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영남 남인의 양대 축인 안동과 상주 지역 중 상주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입재 선생님이 한참 활동할 때도 서인이 대부분인 상주였다. 이 때 정종로 선생은 계파를 초월하여 상주의 서인 유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고 만나면서 교류하였다. 정종로 선생의 시문집에는 영남의 남인인 안정복 이상정 채홍원 외에도 서인들과의 서신 왕래 자료가 많다고 한다.

 

4. 나보다 주변을 먼저 생각하자.

 

입재선생은 이 당시의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족적을 남긴바가 커서 지금에 와서 영남의 명가에는 선생의 문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 당대의 생존한 인물을 중심으로 말할 때에는 좌대산 우입재(左大山 右立齋)라 말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도행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는데, 52(정조 13)때는 광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조선시대 임금으로서 학자의 기품을 지닌 가장 뚜렷한 임금은 정조임은 주지의 사실인데 임금이 영의정 채재공에게 훌륭한 학자를 추천하라 할 때 현 광릉참봉 정종로는 경학과 문장이 울연(蔚然)하여 영남 제일인자입니다.”하니 일약 의금부도사를 제수하였다. 관직을 받고 입시할 때 (정조 1312) 우복선생문집1질을 임금께 올렸는데 그 이유는 광릉참봉에 제수되었을 때 임금이 우복문집에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국내의 다른 지방 저명한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실학파의 거유 순암 안정복을 찾아가 학문과 사상을 논의를 한 것도 이때이다. 55(정조 16) 5월에 도산서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참배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수곡(水谷)에 들러 대산 문인인 동암 유장원을 방문하였다. 59(정조 20) 되던 해에 주상이 우부승지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정종로의 행의와 문장에 관해서 들은 지 오래인데 과연 영남의 제일의 학자인가?”라는 물음에 정종로는 가학연원으로 소년 때부터 뜻을 바로 세워 일상생활에도 근신하는 행동을 잃지 않으며 향리에서 뿐만 아니라 도내에 명망이 가득하니 주상께서 물으신바와 같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주상은 처음 광릉 참봉으로 임명할 때 그 사람됨을 알았고 그 뒤 과연 깊이 있는 사람임을 들었노라. 이 사람이 곧 문장공의 봉사손이며 문장공이 경연에 출입하여 충성된 마음으로 임금에게 아뢰는 일을 맡아 대제학, 이조판서로 그 학식과 덕망이 지금까지도 세인들의 귀에 익었거늘, 지금 그 후손에 이러한 명사(名士)가 났으니 어찌 귀하지 않느냐? 대신(번암 채제공)에게 물으니 향중의 제일인자라고 하니 어찌 마땅한 자리에 등용치 않을 수 있겠느냐. 적당한 자리에 등용하라.” 하명하였다. 이에 의금부도사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숨은 학자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지평에 보임되자 정조대왕은 문장공묘(文莊公廟)에 치제(致祭)10)를 명하였다.

 

60(1797, 정조 21)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거쳐 강령현감(康翎縣監)11)에 제수되었다. 이때 문장공의 사당에 치제를 내린 것에 사은하고 노모를 모셔야 하는 이유로 거리가 너무 먼 강령현감에 사의를 상소하고 물러났다. 곧 고향에 인접한 함창현감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이 해 함창에 있는 임호서원(臨湖書院)의 사현(四賢) 행장을 지었고, 귀신론鬼神論을 지었다.

62(1799, 정조 23) 정월에 모부인(춘천 박씨) 상을 당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애곡을 하다가 몇 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63(1800, 정조 24)에 정조가 승하하여 국상을 당하였을 때 선생은 모친상의 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읍내에 나가 객관 밖에서 멍석을 깔고 망곡하였다.

 

5. 자연 답사와 일상을 기록하자

 

기록은 완전 지식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64(1801, 순조 1)에는 모친상복을 벗었으므로 국왕의 소상에 곡하였다. 이해에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의 묘갈명과태왕론(太王論)을 지었다.

65세 때 우산 이십경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다. 또 남야 박손경의 문집 서문을 짓고 퇴계문인들의 필첩의 서문을 지었다.

66세 때에는 태극권자설과 태극동정설을 지었다. 또 도산서원묘정비명을 짓고 개령의 덕림서원 중수기를 지었다. 11월에 부인(完山 李氏)이 향년 68세로 별세하였다.

68(1805, 순조5)대순론을 짓고,

69세에 오상설맹자불존주론을 지었다.

70세에 이발기발설을 지었는데 퇴계선생의 주리론을 옹호하였다. 또 우재 손중돈 실기의 서문을 지었다.

71세 되던 해에 사헌부 지평에서 장령으로 승진 제수되었다. 이 해에 논어연의를 지었고 또 목재 홍여하의 여사휘찬을 교감하고 서문을 지었다.

72세 되던 해에 사림들이 뜻을 모아 우산에 서당을 지어 선생의 강의소로 삼았는데 여기가 도존당이다. 이때부터 매년 강회를 열었는데 매회 수백명이 모여들었고 남손재를 강사로 초빙하기도 하였다. 이 헤에안자(顔子)를 저술하였고, 수촌 오시수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73세에 백불암문집을 교정하였고 대산(이상정)이 지은 퇴도서절요의 발문을 지었으며 손재(남한조)의 행장을 지었다.

74세에 소산 이광정의 묘갈문을 지었고,

75세에 운곡잡영과 도산잡영을 차운하고,

76세에는 식산 이만부의 문집 간행에 참가하였다. 식산은 상주 사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문집간행은 입제선생과 그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상주 북장사에서 이루어졌다.

77세가 되자 늙어서 받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국정을 바로 잡는 정책상소를 올렸다.

78세가 되던 해에 적국 각지에서 글을 써달라고 청해오는 이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 해에 도암 유단, 수암 유진의 묘갈문을 우선하여 지었다. (기록은 지식의 완성이다.)

79세가 되던 해 (1816, 순조16) 3월에 도남서원 원장의 초청을 받고 많은 사림(士林)들이 참집한 가운데 중용에 관한 강론을 하였다. 당시 원장은 선생의 문인 임하 이경유(1750-1821)였는데 행사를 마친 후 낙동강에 배를 띄워 시회(詩會)를 하였다. 5월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64일 큰손자에게 문고(文稿)를 수습 정리하게 하고, 여러 가지 책을 잘 정리하도록 명하고, 의관을 단정하게 하여 정좌하였는데 66일 세상을 떠났다. 8월에 함창 황령산(우산리 옆 은척면)에 장사지냈는데 문상객이 800명이 넘었다. 장사 지낸 10년 후(순조 25) 상주 외서면 관현리 뒷산 지금의 산소로 이장하였다. 장례가 끝난 후인 병자년(1816, 순조16) 824일 조정에서는 증직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임금께 상주하였다. 임금이 몸소 경연하는 소대(召對)에서 참찬관 박종훈, 검열직각 정원용, 시독관 홍경모, 검토관 강세륜 등이 참석하여 검토관 강세륜이 계언을 올렸는데, 그렇게 하라는 주상의 하명이 있었으나 노론의 세도정치로 왕명조차 실현되지 않았다.

 

6. 끝으로 책을 많이 읽자.

 

입재 선생의 품계는 정삼품 통훈대부에 그쳤으나 많은 학설을 내고 저작을 많이 남겼으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렇게 하여 당대의 유종으로 추앙되면서 영남은 물론이요 호남이나 관동 서북지방에서도 선비들이 모여 250여명(일부 책에는 200명으로)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이로써 우산(愚山)이 다시금 문중의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유학의 연총(儒學 淵叢)으로 영남교학(嶺南敎學)의 본산을 이루었다.

 

여기서 청소년 여러분과 결론으로 가보면 우선 많은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자기가 가는 길이 분명해지고, 쉽게 갈수 있으며,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기록하게 되고, 원하는 대로 성공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선생님의 시 몇 편을 감상하며

 

1) 계정(우산리 정자)에서 달밤에 매화를 감상하며

 

밝은 달빛 비치는 밤에 차가운 매화나무

창가에 어리어 그림자 어지러이 비끼네

알 수 있노니 산새가 머물러 잠자면서

때때로 매화나무 한 가지를 흔드는 물

 

2) 벗이 방문해 줌을 기뻐하며

 

세속 손님을 잊은 지가 오래였더니

그대가 다정히 혼자 방문해 주었네

오래된 붉은 벼랑에는 물이 흐르고

그늘진 푸른 창에는 구름이 지나네

하룻밤 등잔불 앞에서 이야기하고

삼촌에 꽃 아래서 마음 나누었네

이별한 뒤에 밝은 보름달이 뜨면

서글픈 마음만 더욱 깊어지리라

 

3) 도남서원에서(위나라 소주의 시에서 차운하여 감회를 적음)

 

큰 고개라 가로지른 영남지역은

푸른 바다가 들렀는데 끝이 없네

나라는 중화와 더불어 나란히 있고

이름은 추로(맹공의 출생지)와 같이 존숭되었네

위대하도다 우리 성조여

인문으로 천지를 밝게 하셨네

여러 철인이 성대히 이로써 일어나

지극한 도의 큰 근원을 통찰하시고

 

4) 설성의 영각(충북음성 지방관 집무터)에서 꽃을 감상하고 계부의 시에 공경히 차운함  

어여뻐라 붉게 핀 철쭉꽃이여

동현의 한쪽 곁에 피어 있으니

백리에 봄소식을

다정하게 네가 알려 왔구나

 

5) 벗에게 드림

 

흥을 타고 언제 방문하려나

어촌이 물가에 가득하여

나의 집 쉽게 알아볼 수 있으니

문밖에 푸른 복숭아꽃이 피었다네

 

---나가는 말 (입재 선생님 소개를 마치며)

조선말 장주 대유학자 입재 정종로선생님이 계시고 난 뒤, 고종 조에 서원철폐로 각 마을 마다 서당이 생기고, 한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 때 조정에 벼슬을 하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이준 열사와 동문수학을 한 고청 최학주(조선신사록) 저의 할아버지는 조선말 지금의 상주 공검 오태리에서 용두서당운영하며 상주와 선산 등 50여 개 마을 서당 접장을 가르치는 순회 훈장을 하셨다. 접장을 가르치러 순회교육을 나가면 한번에 3-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할아버지 문집을 그대로 보관만하는 손자로서 죄송함과 아쉬움이 남아있다.

 

참고문헌과 논문

입재집1.2 경북대학교 출판부

논문 : 18세기 이현일문인의 신원과 추숭운동, 경대사학과석사논문, 이재현, 2013

논문 : 영남의 유교문화권과 지역학파의 전개, 김성윤, 2006

네이버 지식백과] 입재문집 [立齋文集] (두산백과)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글쓴이 : 松河22翰邦57

 

최용식 선생님 사진은 잘 올려지지 않아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상주출신 대구경북 초중고 및 교육청. 한국시민자원봉사회에서 전국 학생 학부모봉사단운영. 한국청소년봉사단연맹중앙지도위원. 각종문예 동인지 활동. 한국문인협회회원, 시집 사랑을 위하여 외 다수. 산문 국가사회적 책임을 말하다 등 다수, 카페 한국교육지식정보나눔중앙회, 나무1004, . 대구중앙도서관사람책. 금빛봉사단. 소년소녀가장돕기천원의기적. 실버넷사회부기자./ 대구동구신암로25 (103-205 ) / 010-7700-6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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