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상주의 인물

인천채씨 -우담 채득기의 무우정(舞雩亭)1636, 상주 경천대

문장대 2024. 1. 25. 15:39

 

* 인천채씨 -우담 채득기의 무우정(舞雩亭)1636, 상주 경천대

 경천대(무우정) 사벌국면 삼덕리 1-13(경천로 652) 1636년

무우정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무우 채득기(蔡得沂, 1604~1647)공의 정자이다. 조선 인조 때 1628년부터 은거하면서 충절과 북벌 의지를 다지며 공부하던 곳이다. 그는 여기서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가뭄이 심할 때에는 악공과 무희를 동원하여 음악과 춤을 추며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무우정은 막돌로 기단을 쌓고 자연석 주초 위에 전면은 둥근 기둥이고, 후면은 사각 기둥이다. 합각지붕의 홑처마로 보수 당시는 가운데 칸과 전면 반 칸은 우물마루이고, 남(안)쪽은 방이었으나, 나중에 방은 헐어버렸다. 1748년 상주목사 이협이 중건하였고, 1948년 이를 보수하였으며 2005년 지붕보수와 목조 공사를 시행하였다. 우담은 병자호란 후 나라가 오랑캐에게 짓밟히자 거처를 상주로 옮겼고, 무지산(無知山)에 서재를 엮어 독서를 하였다. 지금도 고을 사람들은 그곳을 별좌대(別坐臺)라 부르고 있다. 그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훗날 효종), 인평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는 청나라가 어떤 해악을 끼칠지 몰라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널리 뽑아 가서 보호케 하였다. 당시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는 경남 하동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한 죽당(竹塘) 최탁(崔濯) 같은 인물이 선발되었고, 학자로서는 우담 같은 이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우담은 국명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3년 동안 보은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다시 권유하자 우담은 봉산곡이란 가사를 짓고 대궐문에 나아가 상소하고 자진(自陳)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세속에 빼어난 산림의 선비가 어찌 이 풍진 속에 왔는가(山林拔俗之士,何以來此風塵中)'라 한 뒤 백의로 심양에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 심양에 들어간 우담은 왕세자의 보호는 물론이려니와 청나라에서 무례하게 대할 수 없도록 해 다방면에서 그들을 경탄시켰다. 갖은 고초와 박해를 무릅쓰고 기어이 왕호단(往護團)과 협력하여 왕세자들을 보호하였고, 특히 봉림대군과 북벌의 밀약을 나눴다. 우담이 태공병법으로 대군에게 진언하자 대군은 '장자방(張子房)과 제갈양(諸葛亮) 같은 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대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환국하여서는 다시 상주 낙동강변의 경천대 아래 무우정에 은거하며 임금의 소명에도 나가지 않았다.

 

             이곳 경천대 무우정 주변 봉산별곡 해설판 주변이 우담 선생님이 생전에 살던곳

       ​무우정 -채득기 선생님이 낙향하여 지은 경천대 옆 정자

 

 

 

        아래 무우정에 대하여 읽어보시면 채득기 선생님의 삶이 조명됩니다.  상주인의 자랑입니다.

 

 

         

   경천대 소개도 읽어보시고

        중동면 회상리 끝마을이 섬같이 멋지죠

추가 설명 :  채득기 선생님은 1604년 충북 음성군 원남면 출신으로 상주출생은 아니고 상주에서 낙향하셔서 살았고 그 묘소가 상주시 외서면  천마산 연봉리 막실에 있습니다. 식산 이만부처럼 상주를 사랑하여 상주에서 오래 살다가 1646년 43세로 별세하셨고, 묘역도 상주에 있으니  상주의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후손도 연봉리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병자호란이1637년 1월3일 일어나고 33세 무렵 상주로 이사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병자호란은 그해 항복하고 포로들이 많이 끌려갔습니다. 1637년 2월 24일 항복했습니다. 전쟁은 1개월 23일 단기간에 남한산성에서 치루어졌고 항복했던 치욕적인 전쟁입니다.

기간
1637년 1월 3일 ~ 1637년 2월 24일
(음력 1636년 12월 8일 ~ 1637년 1월 30일)
장소
한반도 서북부, 중부
원인
홍타이지 칭제건원으로 인한 조선 청나라의 관계 악화[1]
  정복을 위한 후방 변수 제거 목적
교전국
지휘관
우익군 지휘관 숭덕제
좌익군 지휘관 도르곤
좌익군 지휘관 호오거
요토
도로이 버이러 두두
니칸
쇼토
양구리 
마푸타
잉굴다이
1차 선봉대 지휘관 로오사
2차 선봉대 지휘관 도도
병력
속오군 80,000~90,000여 명
어영군 6,000여 명
총융군 20,000여 명[2]
수어군 14,000여 명
훈련도감군 5,000명

총 90,000명~100,000명
1차 선봉대 300명
2차 선봉대 1,000명
3차 선봉대 3,000명
동로군 8,500명
본군 8,600명
후미군 12,900명
기타 11,000명[3]

총 45,000여명[4]
피해
피해 규모 불명[5]
장교 10~300명
병사 7,000명 이하[6]
결과
청의 압승
조선 국왕 인조 항복 선언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단절[7]
영향
조선의 사회·경제 파탄 및 청나라 속방화
명나라 멸망 가속화
소현세자 피랍, 의순공주 강제 혼인
조선인 다수 피랍

 

우리나라군인이 청나라 군보다 더많은 군인수가 참여했었는데도 여러가지 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는데 정말 창피한 잔쟁입니다.

* 이상은 출처인 작성자 허생 선생님의 글과 사진이고 필자가 이글에 나타난 연봉리 막실을 며칠을 헤매며 묘역을 찾아 보다가 실패하고 점촌에 거주하시는 전 점촌고 채기식 교장선생님이 우담 선생님의 직계 후손을 소개하여 통화하고 연봉1리에 다시가서 인천채씨 후손의 안내로 묘역을 발견함. 병자호란때 그 악랄한 청나라에 세자들을 호종하고 돌보며 나라를 이어가도록한 충신중의 충신의 묘엳을 참배했습니다. 마침 고향을 지키는 장남과 차남을 알았는데 그 중 차남은 백원 초등학교 1년 후배입니다. 친절한 안내에 너무감사합니다. 묘역을 발견하도록 인도하신 점촌의 채수선생님 후손  채기식 교장님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다시 올립니다. 인천채씨 후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전국회의장 채문식의원도 인천채씨입니다. 중종때 채수 선생님은 설공찬전의 자자로서 지금에 와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채수선생님의 묘약은 공검면 율곡리에 있습니다. 

 

* 우담선생님의 묘역은 아래와 같이 항공사진에다 그림을 그렸으니 우담선생님을 존경하는 분들은 묘역 방문에 참고바랍니다.

묘소 주소 : 경북 상주시 외서면 연봉1리산 76-6.   새주소:상주시 외서면 연봉1리 연봉5길 103번지 양지마을 채씨 후손 자택뒤 과수원사이 30m 근방-양지마을  앞에는 주타장도 있습니다.   양지마, 양지뜸, 양지마을, 우담 등으로 부리우며 인천채씨 후손이 2024년 2월 23일 거주함

                                                      우담 선생님 부부묘

                                              후손이며 백원 초등 1년후배인 채선생님 후손 촬영

                                            주변에 따로 존재하는 후순 묘지를 이곳 선영하에 다시 모심

                                               인천채씨 우담파 후손들은 종종 오시겠죠-만고의 충신입니다.

                                         도로 주차장에서 30m 거리의 우담 선생님과 후손들의 묘역을 다시 촬영해봅니다.

 

* 우담 선생님은 병자호란 전후로 만리타향에서 봉림대군을 모시고 수발하느라 엄청난 고생을 하셨습니다. 요새도 그런 충산이 나와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걸어서 만주 심양(선양-봉천)까지 오고가시는 것도 힘으는데 그곳에서 여러해 동안 대군들을 보좌하시느라 엄청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담 선생님의 생에에 대한 글을 쓸 계획입니다. 충북 원남에서 성장 배경 등 자료수집하여 우담선생님에 관한 글을 쓰고자 다짐합니다. 여태 상주경천대에가서 무우정에 누웠다가 멋모르고 집에온 한심한 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