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행지 : 윤지미산-닥터부르베리 갈림길
2. 일시 : 2016년 2월 24일 10시-13시 (2시간)
3. 산행인 : 문장대 혼자
4. 특이사항 : 작년에 탐방한곳 외 미탐방한 중간구역 탐방
4-5키로 산행했으나 이미 구간에 합산됨-76.3
이 구역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운 충절의 고장이고 낙화담이 있다. 한학이 무척 발달된 마을이다. 화령재-신의터재 구간을 탐방하면 옆에는 항상 판곡저수지와 농장, 마을이 보인다. 따라서 체력이 약한 나같은 사람은 중간으로 이탈하기 좋은 유혹의 구간임 -아래 별도소개. 말구리는 경사가 급해 말이 넘이진곳
작년에 신의터 재에서 4.5키로 무지개산 입구를 다녀왔고, 반대로 화령재에서 무지개산 2.8키로 탐방했으니 윤지미산에서 닥터 부루베리 거쳐 무지개산까지 6,2키로의 거리인 중간지대를 탐방 못해서 어제 큰재-개머리재 구간을 4회에걸처 마무리하고 오늘 상주를 출발하여 화령재-수청삼거리-화령터널 위를 유턴하는 농로길을 빙돌아 가니 화령재 1키로 이정표가 나타난다. 조금가니 전에 보던 판곡저수지 끝 말구리 동네가 보여서 그기로 주차할려고 가니 대형트럭이 농로길을 막아 공터에 주차하고 화령재부터 1.7키로 이정표를 찾았다. 화령재부터 신의터재 방향 2번째 이정표이다. 말구리회관 300미터 전이다. 은근이 헉헉대며 1.2키로의 윤지미산을 밧줄을 잡고 올랐다. 화령재부터 걸었으면 2.8키로 거리인데 농로길을 따라와서 화동 판곡 저수지 말구리 회관 직전 에서 올랐으니 백두대간 탐방은 1.2키로다. 신의터재로 가는 방향은 비교적 순탄한 흙길이다. 여기서부터 신의터재는 9키로이다. 한참 걸어가니 화령재3.8키로 이정표가 나타난다. 아직도 2시간 30분거리가 남았다. 엄청 내리막길을 걷다가 작은 능선도 걸었는데 가야할 거리는 아직 멀었다. 벌써 지쳐온다. 연일 마루금을 걸어서 이런가! 아닌면 체력탓인가! 오른쪽은 판곡 마을과 저수지가 게속 보이고 버스길도 보인다. 신의터재까지는 아무래도 무리다. 닥터부르베리 농장으로 가고 싶다. 여태 까지의 산행은 겨우 4.5키로미터 정도 거리이다. 그나마 닥터부루베리 이정표 부터 무지개산 입구까지 600미터 정도는 미답지역이 되었다. 신의터재부터 닥터베리 이정표까지 다시 산행할 예정이다. 오늘 완전히 마쳤으면 좋았으련만 여러가지 형편을 고려하여 600미터 남겨놓았다. 오늘도 선배님의 차를 선교리 닥터부루베리 진입로까지 오시라고 부탁했다. 선배님의 덕택에 무리없이 산행을 하는셈이다. 오늘도 사람한분 못만나고 세찬 2월 바람만 무섭도록 불어된다. 산속의 닥터베리 이정표와 선교리에서 화령으로 넘어가는 버스길 옆 닥터베리 이정표까지 걸었다. 신의터재까지는 5키로미터이나 이정표끼리의 거리는 2키로정도이다. 가까운 선교리 닥터베리 입구에서 판곡리 말구리회관까지 선배님의 차로 가서 내 애마를 회수하였다.
힘들때마다 도와 주시는 선배님에게 감사드리며 인증사진 올려봅니다.
낙화담과 낙화담소나무-관광지
경북 상주시 화동면의 청도김씨세거지인 판곡리에 들어서면, 먼저 마을의 내력을 상징하는 재실을 만나게 된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김준신 의사의 제단비가 있는 재실이다. 청도김씨 출신의 의병장인 김준신 의사는 이 마을의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일군 선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재실 곁으로 너른 들판이 내다보이는 자리에는 앙증맞은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못 전체를 가득 채울 듯한 인공 섬이 있고, 그 섬 안에 아름다운 수형의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연못과 소나무가 모두 아늑한 자연마을에 잘 어울려 가을 운치가 살아 있는 풍광이다.
이곳에 연못이 지어진 건 조선 건국 무렵이다. 당시 황간 지역에서 현감을 지내던 김구정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자,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할 곳을 찾아나섰다. 그의 눈에 들어온 터가 바로 이곳 화동면 판곡리였다. 숲이 우거지고 골이 깊어서, 세상살이와 거리를 두고 살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땅은 유난히 불의 기운인 화기(火氣)가 드셌다. 김구정은 그래서 화기를 누르기 위해 마을 중심에 바로 이 연못을 팠다.
지금은 고작 330㎡ 규모지만, 처음에는 무려 5000㎡를 넘었다고 한다. 낙화담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들의 한스러운 내력이 보태지며 붙었다. 당시 전투에서 승승장구한 김준신 의사가 순직한 뒤의 일이다. 복수를 위해 찾아온 왜병을 피하려던 아낙들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며 차례차례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지금 연못의 규모로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주변 풍광을 압도할 만큼 큰 연못이었음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낙화담 의적천양시'(落花潭闡揚詩)
노산 이은상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았네/
절사곡(節士谷`절곡은 김준신의 호)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라//
설악(雪岳) 높은 본대로 이르는 말/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 저앞 비탈 개간밭앞에 주차하고 황토밭을 가로질러 오면 무덤 4기가 있다, 바로 여기가 화령재부터 2번째 이정표 1.7키로 이고 윤지미산 1.2키로 표시됨. 주차한 곳부터 300미터지점은 상주 화동 말구리 회관이고 판곡저수지가 시작됨.
화령재 부터 2번째 이정표 -무덤 3기위-말구리회관300미터거리
화령재 2.8키로의 윤지미산
추위에 완전무장-호르라기는 왜? ㅎㅎ
장방형으로 돌을 박아 야양하기 쉽게 만듬
화령재와 신의터재 중간의 닥터부루베리 이정표
여기서 300미터 마을길로내려가면 농장이있고
1.5키로 농로따라가면 화동면 선교리 버스정류소가 나옴
체력이 정상이면 신의터재 5키로미터를 충분히 산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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