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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령 임진왜란 전적지(상주시 외남면 구서리)

문장대 2022. 11. 6. 20:06

 

임진왜란에 있어서 상주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592년 음력 4월 25일 조선의 중앙군과 왜군의 최초 접전지가 바로 우리 상주북천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최초 접전인 북천 전투에서 우리 조선군을 대패시킨 왜군 선봉과 본대는 북쪽 한양으로 올라갔으나 남은 왜군은 온갖 약탈로 우리 시민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이를 참다못한 상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3개대의 의병 창의군, 충보군 상의군을 조직하여 지속해서 왜군과 대적을 하였고 그중에서도 상의군과 격전을 벌인 외남의 안령전투가 아주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임난과 관련된 역사를 기록할 때 마다 우리는 안령 전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상주시 의회 홈페이지 글 일부 복사)

 상주시 외남면 구서리에 위치한 안령은 임진왜란시 우리의 의병들이 진을치고 상주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역사의 현장이다. 외남면 구서리에 위치한 안령은 현재 구서리 구서 보건지소 앞이다.

                                       상주의 명산 서산 모습 -구서리 뒷산

 

                                         상주시 외남면 구서리 보건지소 모습 -바로 앞이 전적지

 

조선시대의 안령은 외남면 소상리-구서리와 공성면 용신리 사이 수티고개이다. 위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두대간 백학산에서 내려오는 줄기와 구서리 뒷산 서산과 소서산의 줄기와 연결되는 안부이다. 말안장이 있는 오목한 곳이 소 질매의  형태와 닮아서 질매재 혹은 안령이라고 하고 그 아래 마을이 안령마을이다. 현재는 소상리와 구서리 일대인데 현재 상주시에서 새운 안령전적지 비석이 구서리 보건지소 앞에 있다. 

 

☞ 안령전투에 관한 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당시 조선은 파죽지세로 상경하여 1592년 초여름에 북천전투가 일어났고 이일장군이 급파되고 서울서 내려온 약간의 정부군과 상주의 농민 백성들로 급히 급조된 1000명의 군사들과 소서행장의 3만의 군사들과 필사의 전투가 일어났다. 총대장 이일은 전투다운 싸움을 해보지도 못하고 단기필마로 서울로 도망치고 상주목사 겸 경상관찰사 김해는 이일을 맞하러 간다고 하고 화북 우복동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러나 남은 상주 판관 권길, 호장 박걸, 윤섬, 박호, 이경류 등이 주축이된 괸리와 상주지역 백성들로 구성된 1000명의 군인들은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고 일본군과 맞서 싸워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때 1,000명의 농민군도 권길이 농촌마다 다니면서 모은 전투 경험이 없는 군이었다. 전투 준비가 안된 상주 관아의 군인은 소수였고 이일이 순변사로 도착하여 군인을 지금 당장 모으지 않는다면 판관 권길을 당장 죽인다고 협박하여 단시간에 모은 군인들이다. 지금도 상주 북천 전적지에는 당시 북천전투에서 전사한 백성과 영웅들의 전적과 유적들이 남아있다. 부산포-동래전투에서 우리 군의 저항을 잠시 받은 왜적은 물밀듯이 추풍령과 조령방향으로 진격하여 상주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했다. 따라서 상주 백성들의 죽음을 무릅쓰도 대항한 사실은 역사적이다. 상주에 살던 나의 선조도 당시 큰 피해를 당했으리라 짐작된다. 상주 관아가 외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왜적들은 식량약탈과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가짜 왜구들의 횡포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외남면(상주의 바깓 남쪽이라는 뜻)은 당시 주민들의 학구열이 높고 민도가 높아 왜구들의 횡포를 볼 수가 없어 몇몇 유생들이 규합하여 상의라는 1,000명의 의병군을 만들고 왜적과 맞서 싸웠다. 당시 김각이라는 분이 발기하여 상의라는 의병군을 만들기전 몇차레 왜적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 온갖고생을 했다. 안령전투지 근방에 오부자 순절비는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하는 유적이다. 당시 이준, 이전, 정경세 가족과 유명 인사들은 본인들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을 희상당하며 왜적과 싸웠다. 그동안 이곳 근방의 산들을 등산하면서 안령이라는 역사적인 장소를  알려고 노력했으나 전혀 몰랐는데 처음에는 지사리 고속도로 아래 고개로 생각했으나 상주시에서 수서리 보건지소 앞에 안령전투비를 새움으로서 궁금증을 해결하였다. 상주시장님과 조희열 님 그리고 비 건립에 협조하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안령은 실제로 이곳에서 공성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수치고개가 안령이라고 여겨진다. 997도로 중 소상리에서 용신리로 넘어가는 고개 같다. 이곳은 백두대간 백학산 줄기와 서산-소서산  줄기가 연결되는 옴푹한 지형이다. 마치 소나 말의 허리인 안부에 해당하여 안령이라고 생각된다. 전투비가 새워진곳은 구서리 보건소 근방한 진을 친 곳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근방 모두를 안령이라하고 안령전적지라고 말하고 싶다. 전쟁이 끝나고 이근방에 존애원을 지워 병마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극복한 사례는 상주지역의 유림들의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멋진 모습이다. 안령 전투지 비석에 등장하는 유명 인사들은 별도로 명단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몇년전 공성면 효곡리의 어느 유명 인사가 전투에 참가하여 자식을 잃고 효곡으로 돌아와 애틋한 삶을 마감하는 글을 등산기에 올린바 있는데 이 분 가족 역시 안령전투에 참가한 가족들이다. 송량 선비님에 관한 글은 다음과 같다. " 임진왜란때 송량 선비는 두아들과 사위를 왜놈의 칼에 잃었으며, 두아들의 보호로 간신히 목숨을 잃지 않았지만 자신을 막아주던 두아들은 그 자리에서 전사당하고 사위도 왜놈들에게 살해당했다. 작은 딸은 자결하여 왜놈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을 피하였고 큰딸은 시부모를 모시고 일부종사하다가 남편이 죽자 역시 자결하였다. 송량은 왜란을 격으며 어려운 삶을 지탱하면서 국가와 지방민들을 위해 존애각을 새우는 등 좋은 일을 많이했다. 이 가문은 충, 효, 열을 모두 수행하여 영조때 유림에서 정려각을 새웠다. 동네이름도 효곡리이다. 부근에 최만재 효자각도 있는것을 보아 이마을은 전국에서 제일가는 충,효 마을이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송량 일가는 정말 대단합니다.

 

-송량-

1534(중종 29)∼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경명(景明), 호는 우곡(愚谷). 아버지는 부호군 송당(宋璫)이며, 어머니는 재령강씨(載寧康氏)로 선무랑 강완(康琬)의 딸이다. 상주 소곡리에서 출생하였다.생애 및 활동사항성운(成運)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학행으로 정구(鄭逑)의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고, 그 뒤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한성참군(漢城參軍)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명종 21) 노기(盧麒)·정국성(鄭國成)과 함께 낙사계(洛社契)를 창설하여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조약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다.1580년(선조 13) 유성룡(柳成龍)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강(鄕講)을 설치하고 송량과 『심경』·『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였다.1602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오현원(五賢院)을 창건하고 학규(學規)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상주의 효곡서원(孝谷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우곡문집(愚谷文集)』 4권 2책이 있다.

임란의 영향으로 가족이 파멸된 송량 선생님의 유적이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에 존재하는 사실은 이곳 백두대간을 등산하면서 하산하다가 유적지를 보고 알았다. 

 

* 안령전투에 참가한 정국성 선생님의 지강서원 위패석은 아래 사진과 같다.

 

 저기 보이는  상주시 사벌국면 묵상리 지강서원터의  4개의 위패석은 정국성, 조희인, 조우신, 조정융 4분의 비석이다.

 

 정국성(鄭國成, 1526~1592):「進士復齋鄭先生」으로 자()는 숙거(叔擧), 호는 복재(復齋),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계함(繼咸)의 아들이다. 정경세의 증조부이며, 155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목사 윤국형의 천거로 연은전(延恩殿) 참봉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임진란에 의병을 일으켜 안령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다. 생후 백일(百日)이 채 못 되어 양친을 모두 여의고 자라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음을 아프게 여겨 누님을 어머니같이 섬기고 죽으매 마음으로 3년 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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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령 전적비에 관한 글을 쓰신 제너메님의 불로그를 소개하여 안령전적지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합니다.

 

* 상주 외남 「안령(鞍嶺)」 전적비(戰蹟碑)

* 소재지: 상주시 외남면 석단로 707

외남면은 삼한 시대에는 진한(辰韓)에 속(屬)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으며, 1896년 한말(韓末)에는 상주의 남쪽 바깥에 위치한다고 하여 외남면(外南面)으로 칭(稱)하여 오늘에 이른다. 남서북으로 서산(西山, 512.9m), 백두대간 상 백학산(白鶴山, 615m)과 오봉산(五峰山, 541m), 갈방산(葛方山, 530.1m)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비교적 자연재해가 없는 천혜(天惠) 농업지역으로, 지역 주민은 온화(溫和)하고 부지런하다.

 

외남은 일찍이 남촌사면(南村四面)의 중심으로 서산(西山) 민여해(閔汝諧) 선비를 비롯하여, 명현달사(名賢達士)가 끊이지 않고 배출된, 남촌의 추로향(鄒魯鄕)이라 불릴 정도로 교육의 수준이 높았던 곳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곳이 수양서당(首陽書堂)과 옥성서원(玉成書院)이었는데, 특히 이 지역은 가학(家學)이 융성한 곳이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마침내 조선의 중앙군과 왜군이 4월 25일 상주 북천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무참하게 패전하여 상주가 함락되자, 상주는 왜적의 침략 통로가 되었다. 왜적이 군량미 수급을 위해 분탕질을 하는 가운데, 무뢰한들이 왜노(倭奴)로 가장하여 겁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5월 초 이준(李埈), 정경세(鄭經世), 송량(宋亮) 등 10여 명이 의논하고, 병사를 모아 왜적과 이들로부터 고향을 지키고자 안령(鞍嶺)에 진(陣)을 친 것은, 1592년 6월 10일 처음 싸움에서 김사종(金嗣宗) 등이 잘 막아냈지만 싸울 사람과 무기의 태부족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사로잡힌 치욕적인 참패를 당하였다. 이후 군사들이 흩어져 다시 모으기가 어렵게 되었지만, 김각(金覺)은 글을 보내어 서로 알리게 하고, 소모관에 임명한 이전, 이준 형제가 동지를 불러 모아 마침내 의병진을 구성했다. 안령 전투가 기폭제가 되어 군사가 천여 명에 이르자 이 사실을 경상도 순찰사에게 보고하면서 의병의 이름을 「상의(尙義)」라 하였다. 이 땅을 적으로부터 지키고자 스스로 모여 항거하다가 큰 피해를 보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의병진에 모여 70여 차례의 전투를 하면서 임진왜란을 승전(勝戰)으로 이끄는데, 큰 몫을 다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선조들은 임란이 끝나자 조선조 최초 사설의료원인 ‘존애원“을 창설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일일이 그 자취를 일찍이 살피지 못하였으며, 안령 전적지 또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러하지 못하다가 430여 년이 지난 2021년 11월 30일, 마침내 그 흔적을 쫓아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싸움의 현장인 안령 마을 입구에 전적(戰蹟)의 빗돌을 세우니, 당시 순국한 선현들께서는 무어라 하실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적비에서 지방도 997호선 남쪽으로 750여 m 정도 나아가면, 이 싸움에서 5부자(父子)가 순절한절(殉節)한 「임란충렬사 서재김선생휘신지현충비(壬亂忠烈士 西齋金先生諱紳之顯忠碑)」가 자리하고 있어, 이 지역은 임란사의 역사적인 현장으로 새로이 조명(照明)되고 있다.

1592년 6월 10일 처음 싸움에서 김사종(金嗣宗) 등이 잘 막아냈지만 싸울 사람과 무기의 태부족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사로잡힌 치욕적인 참패를 당하였다. 이후 군사들이 흩어져 다시 모으기가 어렵게 되었지만, 김각(金覺)은 글을 보내어 서로 알리게 하고, 소모관에 임명한 이전, 이준 형제가 동지를 불러 모아 마침내 의병진을 구성했다. 안령 전투가 기폭제가 되어 군사가 천여 명에 이르자 이 사실을 경상도 순찰사에게 보고하면서 의병의 이름을 「상의(尙義)」라 하였다. 이 땅을 적으로부터 지키고자 스스로 모여 항거하다가 큰 피해를 보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의병진에 모여 70여 차례의 전투를 하면서 임진왜란을 승전(勝戰)으로 이끄는데, 큰 몫을 다 하였다.

빗돌의 명(銘)은 「안령(鞍嶺) 임란전적비(壬亂戰蹟碑)」이고, 비문(碑文)은 아래와 같다.

『鞍嶺 壬亂戰蹟碑

안령은 임진란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우국충정으로 일어난 상주인의 긍지가 서린 곳이다. 1592년 4월 25일 상주가 함락되자, 5월 초 金覺은 李埈 鄭經世 宋亮 외 10여 명의 도움으로 의병을 모았다. 의병만으로는 적을 막기도 어렵고 적의 보복을 염려한 반대도 있었으나, 金嗣宗 金光輻은 군사를 통솔하고, 韓瑞 金敬德 金應德은 매복하여 적을 막았다. 6월 10일, 대규모의 적이 안령을 공격해 오자 金嗣宗 등이 맞서 싸웠지만 화살이 다하고 적탄을 맞아 물러나니, 군사들도 흩어졌다. 鄭經世는 화살에 맞아 다쳤고 그의 어머니와 아우 鄭興世, 李㙉의 부모와 辛鳳瑞 鄭國成 黃裕元, 金紳과 그의 네 아들 외에도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사로잡혔다. 얼마 후, 金覺은 상주와 이웃고을에 通文하고, 李㙉과 李埈을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동지를 모으니 金命賢 외 25명이 잇달아 모였다. 이들은 金覺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산속에 피난한 사람을 糾合하니 천여 명이 되었다. 이를 순찰사에게 보고하고, 軍號를 ‘尙義’라 했다. 鞍嶺戰은 상주지역 擧義에 큰 영향을 미쳐 金紳의 재종질 金弘敏은 忠報軍 대장으로, 鄭經世 金覺 宋亮 趙光璧 金寭 金嗣宗 金光輻은 昌義軍 결성에도 참여했다. 

임진년의 비통한 일을 여기에 새김은 참담함을 딛고 의병으로 거듭나 임란을 승전으로 이끄는데 이바지한 선현들을 기리고 그 얼을 이어받고자 함이다.

2021년 6월 일

 

昌寧人 曺喜烈 짓고, 商山人 金範秀 앞면 쓰고. 尙州市에서 세우다.』이다.

 

 * 마지막으로 안령전적지 비석에 소개된 유명 인사들의 명단을 올립니다.

김홍민, 정경세, 김각, 송량, 조광벽, 김헌, 김사종, 김광복, 한서, 김경덕, 김응덕, 이전, 이준, 신봉서, 정국성, 황유원, 김신(송량과 김신은 각각 아들 2분과 4분을 전투에서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