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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서원( 사벌국면 묵상리)

문장대 2022. 11. 4. 17:12

 

사벌국면 묵상리 각근사 아래 위치한 지강서원 지도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먹실마을에 있었던 서원. 1745년(영조 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국성(鄭國成)·조희인(曺希仁)·조우신(趙又新)·조정융(曺挺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25년에 설단(設壇)하여 매년 7월에 단향(壇享)을 실시하고 있으나 서원을 복원하지는 못하였다. 재산으로는 밭 1,500평, 대지 300평 등이 있다. 묵계계곡에 돌담만 남아 있는데 복원이 필요하다.

 

                  저기 보이는 4개의 위패석은 정국성, 조희인, 조우신, 조정융 4분의 비석이다.

조희인은 조우인의 아우입니다.

신잠선생님이 새운 상주의 18개 서당중 매악서당이 있던곳에 지강서원이 새워졌고 임진왜란때 전소되어 현재 단소만 남아있다. 지강서원에는 4명의 역사의 유명 인물이 배향되었는데 이곳엔 그분들의 비석만 존재한다.  지강서원은 묵상리 마을 4거리에서 각근사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중간에서 지강서원 터만 볼 수 있다.

 

서원(書院)의 단() 모습은 이러하다. (지강서원)

소재지: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산28

 

조선조 말에 전국에 소재하는 서원은 47개소를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이후 유림은 훼철된 서원에 단()을 세우고 향사를 지속하였는데, 어느새 시대가 변하여 과연 단()은 어떻게 세웠을까 궁금해하는 이가 많다. 사벌 묵상리와 함창 하갈리로 연결되는 지강골로 들어서면 1925년에 세운 지강서원(芝岡書院)의 설단(設壇)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묵상(墨上)은 상주군 중북면 지역이었으며, 묵실 위쪽이 되므로 웃묵실, 또는 상묵실이라고 했는데, 1914년 묵상리라고 하고, 사벌면에 편입했다. 반묵실에서 개울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150여 년 전 이곳에 서당이 있었는데, 서당 훈장이 명필이라 붓끝에서 글씨가 실같이 잘 나온다 하여 묵사(墨絲)라 하던 것이 묵실(墨室)이 되었다고 전한다. 지강골은 반묵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함창과 각근사로 소통한다.

 

지강서원은 영천자 신잠 목사가 창건한 18개 서당 중의 하나인 매악서당(梅嶽書堂)이 그 모태이다. 매악서당은 처음에 덕가 패목(佩目, 배미기) 마을 서당골에 있었는데, 뒤에 용담리 황룡 마을로 옮겼다가 1648(인조 26) 매악산 서쪽 기슭인 묵계(墨溪) 위로 옮겼었다. 서원은 1745년에 창건되어 네 분을 모시다가 1870년에 훼철되었고, 1925년 설단(設壇), 단향(壇享)하며 오늘에 이른다.

현재 지강서원 터에 보면 유허지(遺墟地) () 한 기가 서 있고, 좌에서 우로 네 분의 위패석을 세웠는데, 사방을 돌담으로 둘러 흔치 않은 모습이다.

 

• 정국성(鄭國成, 1526~1592):「進士復齋鄭先生」으로 자()는 숙거(叔擧), 호는 복재(復齋),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계함(繼咸)의 아들이다. 정경세의 증조부이며, 155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목사 윤국형의 천거로 연은전(延恩殿) 참봉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임진란에 의병을 일으켜 안령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다. 생후 백일(百日)이 채 못 되어 양친을 모두 여의고 자라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음을 아프게 여겨 누님을 어머니같이 섬기고 죽으매 마음으로 3년 상을 입었다.

• 조희인(曺希仁, 1578~1660):「郡守黙溪曹先生」으로 자()는 여선(汝善), 호는 묵계(黙溪)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몽신의 아들이며, 조우인의 아우이고, 정경세의 문인이다. 1612년에 역옥이 일어나서 정경세가 투옥되자 친척도 화를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 아니하는데, 그는 시종 문밖에서 옥바라지를 다 하였다고 한다. 1627년 문과급제 1658년 통정대부가 되었다. 군수로 있을 때 선정(善政)하여 거사비가 섰으며,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를 거쳐 상례가 되었다.

• 조우신(趙又新, 1583~1650):「典籍白覃趙先生」으로 자()는 여집(汝緝) 호는 백담(白潭)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정경세와 이준의 문인이며, 광해군에게 상소하여 인목대비를 폐하는 것과 영창대군 살해에 대해 부당함을 말하고, 발론한 삼적신(정인홍. 이이첨. 류희분) 등의 참형을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년 동안 과거를 아니 보고 두문불출하였다. 161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여러 관직을 거쳐 1648년 식년(式年) 문과에 올라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백담집(白潭集)이 있으며, 학문과 덕행이 높아 그를 추모하는 뜻으로 별묘가 있는 덕담의 마을은 그의 호를 따라 백담(흰대미)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조정융(曺挺融, 1598~1678):「郡守湖翁曹先生」으로 자()는 유첨(維瞻), 호는 호옹(湖翁), 본관은 창녕(昌寧), 우인의 아들이다. 1631년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고, 4개 군수를 역임했으며 모두 거사비가 섰고, 글씨와 문자에 능하였으며 문집이 있으며, 1666년 상주 상산관(商山館)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

 

위패 석 앞에는 네 기의 원형 주초가 박혀 있는데, 이는 묘우가 삼 칸이라는 것을 말한다. 상주에 훼철 당한 많은 서원이 복원되었고, 그 옛터마저도 남아있지 않은 곳도 몇 군데 있지만 지강서원은 단향으로나마 모신다는 것과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할 것이다.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러한 서원과 백담 서당은 조속히 복원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출처] 서원(書院)의 단(壇) 모습은 이러하다. (상주 지강서원)|작성자 kkhn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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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광희 입니다. 40여 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늘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관심이 있어, 상주박물관 자원봉사자, 상주시 문화관광해설사로서 상주를 알리는데, 노력을 하고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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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잠선생님에 대한 글 - 권세환 교수님의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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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潛 牧使의 思想과 敎育活動


문경대학교 초빙교수 권세환


Ⅰ. 신잠(申潛) 목사(牧使)


1. 신잠(申潛)의 삶
신잠(申潛)은 1491년(성종 22년)에 태어나 1554년(명종 9년)에 상주목사로 재직 중 순직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뛰어난 화가이며 교육자였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으로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다시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 즉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도 장흥에 유배되어 17년 만에 양주(楊州: 지금의 아천동)에서 주거의 편리만 인정받았다. 그 뒤 20여 년간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였다.
1543년(중종 38)에 다시 등용되어 궁궐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의 주부가 되고 태인(정읍)현감, 간성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태인현감으로 부임해서는 7년 동안 재직하며 동서남북의 사학당(四學堂)을 세워 유학(儒學)을 권장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고을 사람들이 신잠(申潛)의 그런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선정비를 세우고, 성황당을 지어 신잠(申潛)과 부인 등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모셨다. 이 조각상은 모두 나무로 만든 입상이며 원색을 사용하였다. 이 고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삭망(朔望)에 신잠(申潛) 선생께 제사를 올려 태인 고을의 태평과 국세를 상납할 때에 불상사가 없기를 기원하였다.
1551년(명종 6년)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18개소(1개소 불명)에 서당을 짓고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 청백리로 녹선(錄選)되고, 명종 9년(1554년) 9월에 순직하였다. 상주에서도 학문을 장려하여 근암서당 등을 지어 교육하였으며, 상주 백성은 그를 부모처럼 우러러 받들었다. 옥성서원(玉城書院)과 무성서원(武城書院), 예강서원에 입향되었으며, 수선서당(修善書堂) 앞에 유애비가 있다.
신잠(申潛)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3절(三絶)로 일컬어졌다 한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묵죽에 뛰어났다고 하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묵죽과 포도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할 만한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중탐매도(雪中探梅圖)와 화조도(花鳥圖)가 그의 작품으로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영천집(靈川集)이 있다.


2.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신잠(申潛)
가. 국역 국조인물고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에 천거(薦擧)에 의하여 군직(軍職)에 보임(補任)되었으나 받지 않았고, 그해 겨울에 대신(大臣)들이 ‘공이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데다 재주가 나라를 빛낼 일을 감당할 만하므로 그가 오기를 기다려 상례(常例)에 따라 조용(調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아뢰자, 마침내 육품(六品)으로 초수(超授)하면서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로 임명하였다. 주부라는 관직이 비록 공에게 마땅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은명(恩命)이 범상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대궐에 나아가 사례(謝禮)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신잠(申潛)은 주부가 됨은 무익(無益)하니, 고쳐 수재(守宰) 즉 수령(守令)에 임명하여 치적(治績)을 살펴보려 한다.” 하고, 이에 태인현감(泰仁縣監)에 보임하였다. 어떤 이는 공이 하찮은 벼슬로 굽혀 임명됨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서 가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내가 비록 오래도록 다스려 본 경험은 없지만, 본디 산야(山野)의 처사(處士)와는 동류(同類)가 아니고, 은명(恩命)이 이러함에 이르러 의리상 피할 수 없다. 하물며 옛날의 대현(大賢)은 모두 주현(州縣)을 맡는데 편안해 하면서 충분히 그 뜻을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겼을 뿐이니, 내가 어찌 꺼리겠는가?” 하고, 마침내 나아갔다.


공이 현(縣)을 맡음에 있어 본래부터 일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수양한 바가 이미 많은데다가 또 세상일을 두루 겪은 것이 많았으므로, 이를 한 고을에 베풂에 있어서는 성대하여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백성들을 어루만짐에는 있어서는 그 자서(慈恕)를 다하고, 정사(政事)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신명(神明)을 다 바쳤으므로, 다스린 지 일 년 사이에 온 경내가 한결같이 교화되고 복종하였다. 또 이 고을은 인순(因循)해 오던 폐단을 계승함이 지극하여, 명목(名目)이 없는 부(賦)와 바르지 않은 세(稅)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많이 섞여 나왔으므로 백성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 조목조목 계획을 세워 구분하여 처리하여 거의 모두 다를 개혁(改革)함으로써 그것이 구원(久遠)하게 행해지기를 구하였지, 한 때의 이해(利害)에 따라 급히 변칙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백성 중에 일을 가지고 현(縣)의 뜰에 이르는 자가 있으면, 말을 온화하게 하고 자신의 뜻을 낮추어 위엄과 꾸짖음을 가하지 않았고, 부결(剖決)은 합당하여 남의 의표(意表)의 밖에서 나왔다. 골육(骨肉)끼리의 소송(訴訟)이 있게 되면, 역시 반드시 은의(恩義)의 중함을 깨우쳐주고, 거듭 그것을 간절하고 상세하게 하므로 백성이 모두 부끄럽게 여기고 탄복하며, 뉘우치고 깨달아서 그 다툴 바를 잃어버리고 물러갔다. 그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예(禮)를 흥기시키고 풍속을 선량하게 하며, 재목이 될 만한 이를 육성(育成)하고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방촌리사(坊村里社)에 널리 국당(局堂)을 설립하여 스승과 학생을 위한 장소로 삼았는데, 전포(錢布)를 많이 출자(出資)하여 그 비용을 넉넉하게 하는 한편, 종종 직접 방문하여 종용히 소속된 이들을 가르쳤다. 그 가르친 바는 사조(辭藻)를 기송(記誦)하여 익힘에 있지 않고, 나이 많은 사람을 존양(尊養)하고 효절(孝節)을 기리고 선양함에 있었으므로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반드시 경이(敬異)를 더하고, 그 성명(姓名)을 기록하였다. 절기(節期)가 이르면 혹 늠미(廩米)와 술 및 음식을 보내어 장려(獎勵)하였고, 미미한 전곡(錢穀)의 출납(出納)에 이르러서도 역시 반드시 직접 점검하였다. 그리고 아전들이 살피지 못한 것을 살펴 밝혔으므로, 아전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때마침 연이어 흉년을 당하여 유리(流移)하는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먹을 것을 바라자, 이에 부정공(富鄭公, 송나라 때 사람 부필(富弼)로 청주의 난민을 구제하는 데 대한 구체적 내용을 진달한 적이 있음)의 고사(故事)를 끌어와 방실(房室) 백 칸쯤을 벌여 설치하여 거처하게 하면서 매양 음식을 먹게 하였고, 대악(大惡)을 저지른 자가 아니면 반드시 몸소 임하여 살폈으며, 무릇 의약(醫藥)으로 조호(調護)할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조치(措置)가 섬세하고 구비되는 등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원근(遠近)에서 소문을 듣고서 다투어 태인(泰仁)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아 이에 의지해서 목숨을 온전히 한 자가 무려 수천인이었다. 이에 관찰사(觀察使) 김광철(金光轍)공이 조정에다 그 일을 올렸는데,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고서 일급(一級)을 가하도록 명하였다.


1551년에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초배(超拜)되었는데, 이때에 공의 병이 치유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임금의 은혜로 중임(重任)에 조용(調用)됨에 감읍하여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되어 이전에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알려진 자에게 모두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는데, 공 역시 그 명을 받았다. 상주는 경상도(慶尙道) 전체를 통틀어 요충지(要衝地)에 해당하여 수레가 폭주(輻輳)하고 기무(機務)가 호번(浩繁)한데, 연이어 흉년이 드는 바람에 유민(流民)이 전부(顚仆)하여 죽어나가는 자가 서로 베고 누울 정도로 많았다. 공이 이에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근면하게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여 살려 주었는데, 규모(規模)와 절목(節目)에 있어서는 한 결 같이 태인에 있을 때에 의거하였다. 이 때문에 굶어죽는 백성이 없었고, 또 농사짓는 것을 감독하여 그들로 하여금 때에 맞게 힘을 쓰게 하였으므로 가을에 이르러 여러 고을이 모두 재앙을 입었으나 오직 상주만은 곡식이 잘 여물 수 있었다. 관찰사 정응두(丁應斗)공이 조정에 황정(荒政)의 전최(殿最)를 올리자, 임금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한 단계 품계(品階)를 올려 주었다.
상주는 속현(屬縣)이 넷이었는데, 모두 궁벽한 오지였으므로 선비들이 강학(講學)할 장소가 없는 것을 매우 병통으로 여겼다. 이에 당원(堂院)을 크게 열매 땅을 골라 건물을 지었는데, 비록 극심한 기근(饑饉)을 당하더라도 능히 늠용(廩用)을 절약하여 그 비용을 제공하였고, 또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州)의 인사들이 다투어 서로 흠모하여 본받아 궁벽한 촌(村)과 사(社)에 이르러서도 모두 사적(私的)으로 영건(營建)하고, 또 이를 위해 힘든 일을 도와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학업(學業)에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그 중 서원(書院)으로 이름난 곳이 무려 열 곳쯤이었다. 또 주문공(朱文公, 남송(南宋) 때 주희(朱熹))의 남원(南原)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고을의 수양된 인사들을 골라 원장(院長)으로 삼아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준행할 교육의 조목(條目)을 가지고 학식(學式)을 간행하매 소학(小學)과 성리학(性理學) 등의 서적을 많이 구입해 여러 서원에 나누어주어 수장케 함으로써 배우는 이들에게 영구한 이익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설치하고 베푸는 데에 있어서는 모두 그 방법을 실천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 12월 초2일에 급환(急患)을 얻었는데 이틀을 넘기고서는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춘추 64세였다. 관찰사가 조정에 부음(訃音)을 알려오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잠(申潛)은 청렴하고 근면하여 다른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참으로 이 때문에 슬프도다.” 하고, 마침내 부의(賻儀)를 더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날 마치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처럼, 선비들은 가정에서 곡을 하고, 백성들은 들에서 울부짖었다. 그 상여가 나아감에 미쳐서는 고을의 부로(父老)와 유사(儒士)들이 상여를 만류(挽留)하면서 슬프게 전송하였는데, 인파(人波)가 도로를 가득 매울 정도였다. 향촉(香燭)을 치전(致奠)할 때엔 끊이지 않고 다른 지역에까지 미쳐, 군민(軍民) 중에 뒤늦게 함창읍(咸昌邑)의 치소(治所)에까지 이르러 치전을 닦는 이가 있었으니, 이 어찌 권세와 이익을 가지고 권유(勸諭)하여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겠는가? 이듬해 3월 모일(某日)에 선영(先塋)이 있는 아차산의 임좌병향(壬坐丙向)의 묘원(墓原)에 예법(禮法)에 따라 장사지냈다.


나. 태백산사고본 10책 13권 32장 A면
명종 13권, 7년(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5일(정축) 2번째기사


【이명규를 형조 판서로 이준경을 지중추부사로 신잠을 상주 목사로 삼다.】
신잠(申潛)을 상주 목사로 삼았다. 신잠(申潛)은 고(故) 참판 신종호(申從濩)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데다가 문헌(文獻)의 가세(家世)를 힘입어 명공인 선배들과 교유하였고 또 스스로 노력을 기울여 학식을 넓혔는데 이것이 문장에 드러났으므로 당세의 위인(偉人)으로 성대한 각광을 받았다. 중종 때 현량과(賢良科)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바로 귀양가서 해우(海隅)에 유락(流落)된 지가 거의 20년이나 되었다. 정유년에 김안로(金安老)가 처형되자 기묘제현(己卯諸賢)으로 요행히 생존된 자는 모두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신잠(申潛) 역시 소명의 은택을 입어 방환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미 그 과제(科制)를 혁파했기 때문에 문반(文班)에 복직시킬 수 없었지만 그 재능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직질(職秩)을 올려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그 치적이 제도(諸道) 중 으뜸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환조(還朝)하여서는 곧 산수나 즐기려는 뜻으로 간성군(杆城郡)을 얻어 부임하였데 얼마 안 되어 전조(銓曹)가 정의(廷議)에 의해 주의(注擬)하였으므로 상주 목사에 제수한 것이다. 상도 일찍이 그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임지로 떠날 때 인견(引見)하였다. 신잠은 초년에 축출당해 반평생을 궁하게 떠돌았고, 만년의 벼슬길 또한 초라하여 빛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진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기는 정성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늙어갈수록 더욱 돈독하였으니, 참으로 군자라고 할 수 있다.


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7권 74장 A면
明宗 17卷, 9年(1554 甲寅 / 명 가정(嘉靖) 33年) 12月 13日(己卯) 1번째기사


【상주 목사 신잠의 졸기. 미두 8석을 치부하다】
상주목사(尙州牧使) 신잠(申潛)이 졸하였다. 신잠(申潛)은 자질이 영민하고 서화(書畫)에도 솜씨가 있었으며 글을 잘 지었다. 처음에 현량과(賢良科)로 진출(進出)하였다. 기묘년의 화로 폐치된 지 20년 동안에 아차산(峨嵯山) 밑에다 거처를 정하고 혼자서 서화를 즐기며 장차 일생을 마칠 듯이 했었는데 인묘조(仁廟朝)에 특별히 6품직을 제수하였다. 벼슬살이를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하여 일찍이 일 그르치는 때가 없었고 상주 목사가 되어서는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부모처럼 친애하였다. 염근(廉謹)으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애석하다. 재능을 크게 펴보지도 못했는데 하늘이 너무 빨리 빼앗아갔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경상도 관찰사【권철(權轍)이다.】의 서장을 보니 상주 목사 신잠(申潛)이 죽었다고 했다. 이 사람은 염근했기에 위에서도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미두(米豆)를 8석씩 치부(致賻)하도록 하라.”


라.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9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청렴하고 근신(謹愼)하는 관리로 뽑힌 사람으로 호조 판서 안현(安玹) 등 18명, 병으로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 대사헌 이준경(李浚慶) 등 10인이며 외임(外任)으로 뽑힌 사람은 상주(尙州) 신잠(申潛) 등 14인이었는데, 각기 향표리(鄕表裏) 1습(襲)씩을 하사하였다.


마. 신잠비
비는 높은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세웠는데, 비몸돌의 윗변 양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처리하였다. 비문은 비바람에 글씨가 많이 닳아 있어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우나, 신잠(申潛)의 공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신잠비는 이곳 주민들이 당시 태인현감(泰仁縣監) 신잠(申潛)의 선정(善政)과 그의 치적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중종(中宗) 39년(1545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석의 글은 소세양(蘇世讓)이 지었으며, 태인 지역에는 이 비석 외에도 신잠(申潛)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무성서원, 신잠(申潛)의 모습을 새겨두고 제사를 받드는 조각상 등이 있다.


【신잠 비문 번역】
새 그물을 치고 대밭 집에 한가히 있음에 베옷에 띠 두르고 기뿐 얼굴로 자기를 소개 하면 서 보기를 원하는 두 선비가 있으니, 김태학 생원과 백태학생 삼귀였다.
우리는 태인 고을에 여러 대를 살았다면서 신잠 군수의 행적을 말하였다. 이 고을은 교통이 혼잡한 곳으로 인가는 드물되 일은 많아서 부역이 자주 있고, 조세 부담 이 무겁다. 늦추면 예산이 부족하고 서두르면 원망이 심하니, 둘 다 병이되는 사리를 깨닫고, 신군수가 갑진년 상반기에 먼저 읍민의 폐해를 개혁할 법을 세우고, 읍민을 무마하며, 송사에 삼가고 자기는 엄하게 다스리며 사람을 대하는 것을 너그러이 하니, 읍민이 기꺼이 따르다.
‘자유가 무성군수로 읍민을 예로서 가르치니, 공자가 기뻐하시다’의 명언을 본받아 이러함이 백성 다스리는 좋은 법인데 형법으로 엄하게 백성을 억누르니, 순후하고 아름다운 풍습이 드물게 되었다. 어찌 법으로만 하리오.
학문을 일으키고 풍습을 변화시킴에 뜻을 하고 마을에 서당을 세우고, 서책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고, 녹미를 남기여 스승을 맞아 고을의 준수한 자제를 가르치고,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며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여 염치를 갖게 하며, 순후하고 독실한 행동으로 과오를 범치 않게 하니, 호협하고 교활하던 벼슬 하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마음을 고쳐 착한 행동을 하게 되어 차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거처하는 방 벽에 청렴, 신중, 근면을 대서하여 부쳐 놓고 벼슬하는 법도로 삼으면서 동 편에 집 수 칸을 얽고 틈이 나면 군민과 더불어 거문고 치고, 시를 읊어 속세의 진애를 물리 쳤다. 옛날 신라 말에 최문창 고운이 힘써 이 고을에 있었던 유풍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우리 신 군수의 시문의 재주와 흉금의 지혜가 천 년 전의 최고운과 같으며, 읍민이 사랑하고 부러워함이 최고운에 뒤짐이 없다. 신 군수의 이름은 잠이요. 자는 원양이며, 고령인으로 조선조 정승을 지낸 숙주의 증손이며, 삼괴선생 호종의 아들로 가훈을 받들고 가업을 이었으며, 문장과 서화를 세상에서는 삼절이라고 칭송하였으니, 찾아와 배우고자 한 선비가 문 앞에 가득하였다. 이제 관직이 만료되어 떠났으나, 군민을 다스리는 것은 교묘한 포용으로 공적이 많았다. 군민의 노소가 망설이지 말고 돌을 갈고 선정의 치적을 새겨 거리에 세우기로 회의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원양의 치적이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르쳐 한나라 벼슬을 하는 사람이 지방군수로서 정사를 잘 함으로써 이름을 얻었다. 내가 늙고 졸렬하여 어찌 기문을 지어 여러 사람을 만족하게 하리오만은 원양은 계유년 진사 시험에 합격한 동문생이며, 시산과 나의 집 거리가 머나 잘하는 정사를 고을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며, 또 역사들이 대서특필한 서책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어찌 나의 글이 필요하리요만은 두 선비와 마을 노인들의 요청을 사양치 못하고, 또 뒤에 부임할 군수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정기원 28년 창룡기사중춘개망승전대부전의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관세자이양 진산 소세양 기




Ⅱ. 조선시대(朝鮮時代) 상주의 교육


1. 목민관(牧民官)의 교육 활동
조선시대 상주에 부임한 목민관(牧民官)은 1908년까지 상주목사(군수 포함)가 155명으로 알려졌으며, 함창 현감은 146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상주교육에 많이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목사(牧使)는 1551년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1554년 12월 상주에서 순직할 때까지 3년간 서당 18개소를 건립하고 주자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운영하게 하였다. 신잠(申潛) 목사(牧使)가 세운 서당은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목사는 1580년부터 1581년까지 1년 정도 상주목사로 있는 동안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이전(李㙉), 전식(全湜) 등 수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목사는 1604년부터 1606년까지 상주목사로 재임하였는데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상주 교육(鄕試 및 文會)에 이바지했고, 1606년에 ‘상주목선생안(尙州牧先生案)을 수찬했다.
장밀헌(藏密軒) 송인명(宋寅明) 목사는 1723년부터 1724년까지 상주목사로 재임하였는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탕평책을 주장하였다. 1724년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죽애(竹崖) 오상원(吳尙遠) 등과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성리대전’을 강론할 때 송 목사는 심경(心經) 및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다. 또한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등 많은 목민관들이 교육활동에 공헌하였다.


2. 상주로 내거한 명문사족 출신의 교육 활동
상주 지역 교화에 이바지한 분들로는 광산(光山) 노숭(盧嵩), 제정(齊亭) 이달충(李達衷), 홍여강(洪汝剛), 이은(李垠), 조숭(趙崇), 황보신(黃保身), 정난손(鄭蘭孫), 이종림(李從林), 권회(權恢)의 내거도 상주의 학풍진작(學風振作)에 기여를 했다.
또 허백정(許白亭) 홍귀달(洪貴達),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 강형(姜詗), 채수(蔡壽) 등의 절의(節義)는 삶 자체가 교화(敎化)‧교훈으로서 당대 뿐 아니라 후세까지 상주 선비들에게 끼친 영향은 컸다.


3. 상주 선비들의 교육 활동
운정(芸亭) 김언건(金彦健,) 후계(后溪) 김범(金範), 서대(西臺) 김충(金冲), 율정(栗亭) 서극일(徐克一) 등은 충과 효의 고장이 되는 초석을 마련하였으며,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복제(復齋) 정국성(鄭國成), 서산(西山) 민여해(閔汝諧),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등은 상주가 인재의 고장이 되게 한 큰 스승이었다.
김일(金鎰), 김각(金覺), 이봉(李逢) 등이 충을 실현하였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월간(月磵) 이전(李㙉), 창석(蒼石) 이준(李埈), 유진(柳袗) 등이 존애원(存愛院)을 창설하는 등 상주를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할 만큼 문화를 발전시켰다.




Ⅲ. 상주(尙州)의 서당(書堂) 교육


1. 서당(書堂)
조선시대 서당(書堂)은 고려시대의 서당을 계승한 사설교육기관으로서 주로 일반 서민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서당의 주된 설립 목적은 사학(四學)과 향교(鄕校)에 진학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데 있었다. 말하자면 중등교육기관에 입학할 수 있도록 지방의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한문(漢文)의 독해력을 증진시키고 유교(儒敎)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서당(書堂)은 설립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랐다. 훈장(訓長)자영서당, 유지 독영서당, 유지 조합서당, 촌 조합서당 등이 있었다.
서당에는 주로 훈장(訓長)과 접장(接長)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훈장(訓長)의 학식 수준이 일정치가 않아서 경사백가(經詞百家)에 능통한 사람으로부터 문의(文意)나 체득한 훈장(訓長)도 있었다.
접장은 주로 서당 내에서 연령이 많고 학력이 뛰어난 학생들 선발하여 임명하였으며 접장은 지식수준이 낮거나 초보단계에 있는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 하였다.
서당교육은 천자문(千字文)으로부터 당율(唐律)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였다.
수업은 주로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로 이루어 졌다. 강독은 유교 경전들에 대해 읽고 그 뜻을 풀이하는 것으로 전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通鑑), 소학(小學), 사서삼경(四書三經), 사기(史記), 당송문(唐宋文), 당율(唐律) 등의 순으로 읽어 나갔다. 제술은 글을 짓는 방법을 가르친 것으로 5언절구(五言絶句), 7언절구(七言絶句), 사율(四律), 십팔구시(十八九詩) 등을 가르쳤다. 습자는 글씨 쓰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순서로 가르쳤다.
서당의 교육방법은 상당히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우선 유교 경전 등을 읽히되 학습자의 능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숙독하도록 하였다. 또 교과목을 지도할 때 계절을 고려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고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여름에는 흥취를 돋우는 시(詩), 율(律)을 짓도록 하고, 봄과 가을에는 사기(史記) 및 고문(古文)을 읽도록 하였으며, 겨울에는 내용이 어려운 경서(經書)를 읽도록 하였다. 또 특이한 점은 놀이를 이용하여 학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초‧중‧장 놀이, 고을 모둠놀이, 조조잡기, 글 대구 맞추기, 추석 때의 가마놀이 등을 이용하여 가르쳤다.
조선시대 서당은 비록 서민 자제들에게 초보적인 교육을 담당했던 사설기관이었지만 국민대중의 문자교육과 국민문화 창달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효종 10년(1659년)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에게 명하여 서당학규(書堂學規)를 제정케 하였으며, 이것이 소위 향학지규(鄕學之規)이다. 따라서 향학지규(鄕學之規)를 제정했다는 것은 서당이 조선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가를 말해준다.


2. 상주(尙州)의 서당(書堂)
상주(尙州)의 서당(書堂)은 명종 6년(서기 1551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부임(赴任)한 신잠(申潛) 목사(牧師)가 18개소(個所)의 서당(書堂)을 건립(建立)하고 흥학(興學)에 진력(盡力)한 것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 되었다. 처음 서당이 창설될 당시에는 서원과 서당의 구분이 명확치 않고, 또한 이 시기에 세워져 오늘에 전하는 서당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서원에 반드시 설치되어 있는 사현기능(祀賢機能)만이 없을 뿐 서당의 운영과 체제 그리고 규모가 서원과 다르지 않다. 이들 서당 중에는 일부가 서원(書院)으로 승원(陞院)한 곳도 있으며, 그 외의 서당(書堂)들은 인멸(湮滅)되거나 취회(聚會)를 가지며 유지해 나가는 서당(書堂)도 있다. 신잠(申潛) 목사(牧使)가 세운 18개소의 서당(書堂)을 그 위치와 현황만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가. 하곡서당(霞谷書堂)
상주의 서쪽 7리 지점으로, 흥왕사의 옛 절터에 세웠으며, 이후 장백사 옛 절터의 오른편으로 옮겼다가, 을묘년에 취봉산의 서편 언덕으로 옮겼다.
󰡔在州西七里興旺寺舊基後移於長白寺舊地右乙卯移建於翠鳳山西麓󰡕
상산지의 기록에 의하면 장백사의 위치는 상주시 연원동 일대로 비정하였으며, 정확한 위치 고증은 어렵다. 다만, 을묘년에 옮겨 세운 현재의 위치는 연원리 88-1번지로, 외서면 봉강리로 넘어가는 고개 우측의 민가 3채가 있는 마을에 서남향 하여 정면 4간 측면 1간반의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며,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각 1통칸 온돌방과 부엌이 시설되어 있는 일자(一字)형 집이다. 근년에 벽체를 시멘트 몰탈로 보수하여 본래의 모습을 많이 훼손하였다. 하곡서당의 편액 또한 근년에 제작한 것이다. 서당에는 서당당록 4권의 구문적이 보관되어 있으며, 창녕성씨와 울산오씨들이 관리하며, 매년 동짓달에 취회(聚會)를 하고 있다.


나. 도곡서당(道谷書堂)
상주의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재주남서5리(在州南西五里)󰡕 상주시 서곡동 363번지이며, 서당에 보관된 기록들에 의하면 이곳은 후계(后溪) 김범(金範)이 은거하여 학문을 강마하던 장소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던 것을, 1677년(숙종 23년)에 사족(士族) 이익달(李益達) 등에 의해 구도곡(求道谷: 서곡리), 오대(午垈: 오대리), 교촌(校村: 신봉동)등 인근 마을의 8개 문중이 1인당 보리 1두(斗)와 전 1전씩을 모금하여 중건하였으며, 이때 향교(鄕校)와 근암서원(近巖書院), 도남서원(道南書院) 등에서도 서당의 복원에 지원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을 하였으며, 그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팔작지붕으로, 정면 2칸은 우물마루로 창호는 사분합들문이다. 양협실은 각 1통칸의 온돌방으로 북향하여 전면의 계류를 내려다보고 있다. 건물의 우측에 정면 4칸의 목조 요사채가 있다. 서당의 취회일(聚會日)은 매년 음력 동짓달 보름날이다.


다. 석문서당(石門書堂)
주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처음 사벌동에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고 만력 병신년(1596년 선조 29년)에 병현 남쪽에 중창하였다.
󰡔在州東十里初建沙伐洞壬癸亂見燒萬曆丙申重創於柄峴南󰡕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또한 이후 이를 중창한 지역의 사족들은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를 못한다. 여기에 기록된 지명을 상주시 사벌면 덕담리, 또는 금흔리 남쪽의 석문지 부근으로 추정하며, 그 위치도 자세히 알지를 못한다.
라. 수양서당(首陽書堂)
주의 남쪽 25리 지점의 수양산 아래 노은동 서편에 있으며, 양 계류가 흘러 천석이 그윽하게 깊은 아름다운 승지이다. 옛적에 서산의 북쪽 옥봉 아래에 있어 옥성이라 하였는데 서당이 서원으로 승격되고, 숭정기원후 무자년(1648년 인조 26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在州南二十五里首陽山下老隱洞西兩溪合流有川石幽邃之勝舊在西山北玉峰下名以玉城因陞院崇禎後戊子移建今處󰡕
외남면 신상리 노은동(농골)마을 뒤에 있는 저수지가 끝나는 곳에 있는 마을을 서당마라고 부르며, 마을입구에는 주형원 효자비각이 있고, 마을 뒤에는 경주손씨의 재실이 있다. 수양서당이 있었던 자리는 마을 뒤 산 밑에 있으며, 지금은 경지로 변하여 밭이 되었다. 서당이 처음 세워졌던 자리는 서산의 옥봉 아래로, 오늘날의 외남면 구서리로 마을 뒤편 속칭 부처바위가 있는 절골로 추정되며, 이곳이 옥성서원으로 승격하자 지금의 외남면 신상리 노은동으로 옮겨갔다.


마. 노동서당(魯東書堂)
주의 동쪽 5리 바깥 논실 마을에 있다. 처음 한산의 동쪽 능선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고 숭정 기사년(1629년 인조 7년)에 신방동에 다시 세웠으며, 숙종 병오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식산 이만부의 기문이 있다.
󰡔在州東五里外魯谷村初在寒山東麓壬癸亂見燒 崇禎己巳重建新坊洞肅廟丙午移建今處李萬敷有記󰡕
처음 서당이 세워진 곳은 상주시 외답리 마을 입구의 산록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고 1629년에 신방동에 세웠다가 숙종 병오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하나 그 위치를 고증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상산지에 기록된 병오년은 숙종년간이 아니고, 영조 2년(1726년)의 오기로 보인다.


바. 수선서당(修善書堂)
주의 남쪽 30리 지점인 수선산 아래의 청리동이며, 가정(嘉靖) 임인년(壬寅年) (중종 37년 1542년)에 영천자 신잠이 상주 목사로 부임하여, 이곳에 유람하여 경관이 좋음에 기뻐하며, 지역의 부노(父老)들과 상의하여 이곳에 서당을 건립하고 손수 수선서당이라 큰 글자로 써서 현판을 걸었다. 뒤에 계곡의 서편으로 이건하고,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계묘년(선조 36년 1603년)에 철암 아래에 중건하였으며,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기문을 지었다.
󰡔在州南三十里修善山下靑里洞嘉靖壬寅申靈川潛來遊喜其山回水隨謀父老營建書堂且手書修善書院四大字揭額後移建於溪西壬辰亂見燒癸卯創於鐵巖下李埈有記󰡕
이 서당은 월간(月澗) 이전(李㙉)선생이 이곳에서 심혈을 기울여 강학하던 곳으로, 옥성서원이 산사태로 매몰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서원을 복원할 때 까지 신주를 이곳에 봉안하고 향사를 치루기도 하였으며, 서애 류성룡의 문집을 발간할 때 이곳 수선서당에서 문집의 교정을 하였다. 1987년, 청상저수지의 건설로 서당이 수몰되자 저수지 아래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서당이 건립된 이후 네 번이나 이건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담장 앞에는 후계(后溪) 김범(金範)이 찬(撰)한 신잠(申潛) 목사(牧使)의 유애비(遺愛碑)가 있으며, 원래의 비(碑)가 낡아서 글자의 판독이 어렵게 되자 새로 비를 모각하여 바로 옆에 옛 비석과 함께 세워놓았다.


사. 용문서당(龍門書堂)
주의 남쪽 35리 지점인 웅이산 아래 공성면 정동리 서당마을에 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그 후 우리령(우하리)과 광동리(오광리)의 두 곳에서 운영하다가 숙묘 정유년(숙종 43년 1717년)에 다시 장동리 옛터의 서쪽으로 백보 뒤에 세웠는데, 이듬해 강당의 화재로 보관되어 있던 서적들이 전부 소실되었다. 이후 기해년(숙종 45년 1719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在州南三十五里功城熊耳山下壬癸亂舊堂見燒其後改建于雩里嶺及廣洞兩處 肅廟丁酉于移建于熊山舊址西百步翌年講堂失火所藏書籍盡燒己亥于重創󰡕
임진왜란으로 서당이 소실되어, 두 곳으로 나뉘어 운영하다가, 옛터에 서당을 중창하였으나 화재를 당하여 소장문적들이 전부 소실되기도 하였다. 장동리의 서당이 있던 자리는 공터로 남아 있다가, 근년에 농사작업장을 지었다. 마을 한 가운데 수령 500년이 넘는 늙은 은행나무 한 그루와 돌로 짜놓은 아름다운 우물 하나가 남아서 서당이 있었다는 흔적을 전하고 있다.


아. 영빈서당(穎濱書堂)
주의 북쪽 50리 영수 위에 있다. 처음 서당이 세워진 곳은 현촌의 냇가 옆이었다. 백담 구봉령이 지나다 시를 남기었으며, 또한 강당의 이름을 존성당(存省堂)이라 지었다. 계사년(1593년)에 왜적에 의해 불타버리고 계묘년(1639년)에 수계촌에 중창하고, 후에 서원으로 승원(陞院)하여, 숙묘 정묘년(숙종 13년 1687년)에 다시 중창하였고, 지금의 임금 경술년에 다시 중창하여 강당 양쪽의 온돌방의 이름을 오른쪽은 존성, 왼쪽은 진수라고 하였다. 주변에 고산정과 사인정이 불과 수 백보 거리에 있다.
󰡔在州北五十里潁水上初建縣村川邊萬曆甲辰具栢潭鳳齡過有詩且名以尊性堂癸巳見燒於倭賊癸卯重建于修稧村後因陞院移附修稧所 肅廟丁卯移建于今處金楷有記 今上庚戌重創兩夾室右曰尊省左曰進修去孤山及舍人亭不過數百步󰡕
서당이 처음 세워진 곳은 현촌(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현리)마을의 냇가 옆에 있었으며, 백담 구봉령이 이곳에 들려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수계촌에 다시 세웠는데, 그 자리가 근암서원으로 승원하여, 서당을 수계소로 옮겨 사용하다가 지금의 자리인 문경시 산양면 반곡리 122번지로 옮겼다고 하였다. 서당은 처음 6개 문중이 운영하였으며, 취회일은 매년 음력 3월 15일이다.


자. 매악서당(梅嶽書堂)
주의 북쪽 30리 지점에 있는 매악산 서쪽 산기슭의 묵계 계곡에 있으며, 앞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개울 위와 아래에는 폭포가 있어 천석이 절경이다. 옛적에는 패월촌에 있었는데 중년에 황룡촌으로 옮겼으며 숭정 무자년에 현재 자리로 옮겼다.
󰡔在州北三十里梅嶽山西麓墨溪上前有小塘溪上下有瀑布洞壑川石幽愛可賞舊在佩月村中 中移黃龍村崇禎戊子又移建于今處󰡕
사벌면의 매호리와 묵상리 마을경계지점의 매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위에 있다. 이 서당은 처음 패월촌에 있다가 황룡촌으로 옮겼으며, 다시 숭정 무자년(인조 26년 1648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서당에서 서원으로 승원(陞院)하여 지강서원(芝岡書院)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자 그 자리에 단소를 만들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차. 오산서당(梧山書堂)
주의 동쪽 25리 지점의 비란촌에 있다. 처음에 보탄 위에 건립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고 그 후 오동리에 중건하고 이름을 오산서당으로 하였다. 숙종대왕 기해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현재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
󰡔在州東二十五里飛鸞村 初建寶灘上 壬癸亂見燒 其後重建於梧桐里號梧山 肅廟己亥 見燒移建今處󰡕
오산서당은 처음 보탄에 세웠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오동리로 옮겼으나 기해년(숙종 45년 1719년)에 또 화재로 소실되어 비란촌으로 옮겼다고 하여, 상주시 중동면의 죽암리(비란)과 오상리(면소재지)로 옮겨 다녔음은 확인 할 수 있으나 서당이 있었던 자리에 대하는 그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카. 고봉서당(孤峰書堂)
주의 동쪽 20리 지점으로 갑장산의 동쪽 줄기인 고봉아래의 장천마을에 있다.
󰡔在州東二十里 甲長山東麓孤峰下長川村󰡕
갑장산의 동쪽줄기 아래인 낙동면 내곡리 마을로 추정하며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서당이 고봉서당과 삼봉서당(三峯書堂)의 둘로 나뉘어 삼봉서당이 분당(分堂)하여 낙동면 화산리로 옮겨가고 난 이후 옛 서당이 있었던 자리를 찾을 수가 없으며, 서당의 자리에 대한 비정(比定) 또한 낙동면 상촌리의 서당마을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타. 봉성서당(鳳城書堂)
주의 동으로 60리 위수 위에 있다. 예전에는 단밀현의 서북1리 지점에 있었는데, 뒤에 서원으로 승원하여 용암리로 옮겼으며, 병술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임진년 왜란 때 다시 옛날의 자리에 세웠으며, 계해년에 다시 옮겨 세웠는데 옛터에서 남으로 수십 보 되는 곳이다.
󰡔在州東六十里渭水上 舊在丹密縣西北一里許 後因陞院移建于龍巖 丙戌見燒 壬辰亂改建于舊址 今上癸亥又移建又舊址南數十步󰡕
처음 서당은 지금의 의성군 단밀현의 뒤편에 있었는데 그 자리가 속수서원으로 승원(陞院)하여 용암리로 옮겨 세웠으나 화재로 서당이 불타버리자 옛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워 운영하다가 계해년(癸亥年)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서당이 속수서원으로 승원하여 처음 옮겨갔던 옛 서당자리는 지금의 저수지의 가운데가 되어 물속에 잠겨있다고 한다.


파. 백화서당(白華書堂)
주에서 45리에 있는 중모현의 서쪽 서귀동 아래에 있다. 예전에는 신덕리에 있었는데 중년에 무등리와 서귀동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숙종대왕 신묘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在州四十五里 中牟西 西歸洞下 舊建於新德里 中移無等里及西歸洞兩處 肅廟辛巳又移于今處󰡕
처음에는 신덕리에 있었다고 하였다. 신덕리에는 황효헌, 황맹헌 형제가 선조인 방촌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백화영당을 건립하고 공부하던 백화영당이 있었다. 이 백화영당은 옥동서원의 전신으로 이 영당이 서원으로 승원(陞院)하여 옥동서원이 되었다. 이는 백화서당이 건립된 시기보다 31년이 앞서는 시기이며 일명 이를 백화서당이라고도 불린다.
이 백화영당은 별개의 서당인지, 아니면 영당인 이곳을 신잠목사가 백화서당으로 명명하였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고증할 길이 없다. 다만 현재의 백화서당에 남아있는 지붕의 망와에는 신사 와장승청담(辛巳 瓦匠僧淸潭)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망와(望瓦)의 신사년(辛巳年) 명문과 상산지(商山誌)의 백화서당 기록이 일치하고 있어 지금 현존하고 있는 백화서당은 1701년(숙종 2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하. 봉암서당(鳳巖書堂)
주의 서쪽 45리 화령현의 원통산 아래에 있다. 예전의 이름은 봉산서당이었는데 서원으로 승원하여 봉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임금님 경술년에 현재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在州西四十五里化寧圓通山下 舊名鳳山因陞院 今上庚戌改建今處于󰡕
봉산서당에 소재 노수신(穌齋 盧守愼)선생을 배향하고, 봉산서원으로 승원하여 서당을 봉암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 화동면 선교리 마을 끝에 있으며 서당이 2개로 분당을 하여 그 자리에는 상재와 하재로 분리 운영되고 있는 2채의 건물이 현존하고 있다. 이곳 서당의 운영은 광산노씨, 풍산김씨, 상산김씨, 청도김씨, 진양하씨, 함양여씨의 6문중이 운영하고 있다.


갸. 송암서당(松巖書堂)
주의 서쪽 17리 지점의 도솔산 서쪽 기슭에 있다.
󰡔在州西十七里 兎率山西麓󰡕
외서면 개곡리 서당골에 서당의 옛터가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에 불타 버려 김혜(金惠)가 복원하였으며, 정종로(鄭宗魯), 정난시(鄭蘭時)등이 중수하였다. 이후 1946년에 김상달(金相達)・김상복(金相福) 제씨(諸氏)가 외서면 개곡리 서당골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인 외서면 관동리로 옮겨 세웠다.


냐. 지천서당(智川書堂)
주의 남쪽 15리 지점인 지천냇가 위에 있다. 옛 이름은 연악서당인데 서원으로 승원(陞院)하여, 이름을 지천서당으로 하여 새로이 지금의 자리에 지었다.
󰡔在州南十五里智川上 舊名淵嶽因陞院改創于今處󰡕
상주시 지천리 마을 안에 있으며, 건물에 달려있는 현액(懸額)은 연악서원으로 되어있다. 강당 앞의 질구내를 건너 높은 언덕위에 연악서원의 묘우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 있었던 서원의 강당은 고종년간의 전국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 된 이후 연악서원의 묘우는 복원하여 향례를 지내고 있으나, 강당은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하여 서당의 강당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댜. 죽림서당(竹林書堂)
주의 서쪽 40리인 은성창이 있는 곳의 죽림마을에 있었으며, 임진왜란에 불타버려 숙종대왕 을해년에 새로이 지었으며, 홍도달의 기문이 있다.
󰡔在州西四十里 銀城竹林村 壬辰亂盡燒 肅廟乙亥重創洪道達有記󰡕
은척면 봉상리 죽림마을에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695년(숙종 21년)에 새로 짓고 홍도달의 기문이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서당은 은척면 무릉리로 옮겨 세웠으며 현재도 매년 회합을 가지고 있다.




Ⅳ. 신잠(申潜) 목사(牧使)의 교육 사상


위와 같이 상주의 자제들이 공식적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551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潜) 목사가 1554년 12월 2일 상주에서 순직할 때 까지 세운 18곳(1곳은 전하지 않음)의 서당에 의해 상주가 교육향이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후계(后溪) 김범(金範)은 신영천유애비명(신영천유애비명)에서
“폐단을 없애고, 강포(强暴)함을 물리쳤으며, 부세(賦稅)를 공정히 하고 사역(使役)을 균등히 하였다. 서원을 창설하여 학문을 권장하였으며, 그 시설함에 고인(古人)의 법도를 따랐다. 일 년 사이에 정통(政通)하고, 인부(人浮)하더니 주민이 복이 없어 문득 별세(別世)하였다. 상여(喪輿)가 떠나던 날 노유(老幼)가 호곡(號哭)하며 간절히 비(碑)를 세우기를 원하여 유애명(遺愛銘)에 ‘하늘이 어진 목사를 내시니, 실로 우리 부모님 같도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가르쳤으니 은혜는 깊고 덕택을 두텁도다.’라고 하였다”
또한 신잠(申潛)이 유배 풀려 경기도 아차산 아래로 갔다가 1544년(중종 34년) 태인 현감으로 부임하여 무명잡세 없애고 마을마다 서당 두고 학자금을 지원하였다.
무고한 백성에게는 포근하지만 간악한 토호와 교활한 향리에게는 호랑이였다. 태인의 백성은 성황당에 신잠(申潛) 일가의 조각상을 모셔놓고 매년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 국태민인(國泰民仁)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년) 겨울에 임금이 중외(中外)의 신료 중에서 청렴하고 근면하게 임무를 수행한 자를 가려서 아뢰도록 명하자, 관찰사 유지선(柳智善)공이 또 조정에 공의 청렴하고 근면한 자취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에는 공이 이미 풍질(風疾)을 앓아서 재직할 수가 없었다. 구례(舊例)에 수령(守令)이 병으로 해임될 것을 구하면, 관찰사가 예(例)에 따라 파관(罷官)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유공이 비록 공의 질병을 알고 있었으나 오히려 예(例)를 좇아 청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잠(申潛)은 맑은 덕이 이미 드러나 이르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다스린다. 그러므로 병이 있다하여 해직(解職)시킴은 불가하다.” 하면서 체직(遞職)을 명하고, 인하여 벼슬을 올려 장려하였다.
또한 국역 국조인물고(1999년 12월 30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는 공이 문장(文章)과 예술(藝術)에 있어 능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시(詩)는 문선(文選)을 조종으로 삼고, 사(詞)는 초나라 이소(離騷)를 주장(主張)하여, 격률(格律)은 고고(高古)하고 지취(旨趣)는 심원(深遠)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공의 척구(隻句)와 편사(片詞)를 얻기만 하여도 마치 큰 옥을 얻은 듯이 여겨서 전해가며 완미함을 그치지 않았다. 만년엔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솜씨가 공교로웠고, 또 난초와 대를 그림에 있어 지극히 그 실물(實物)에 핍진하여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으므로, 다투어 비단을 걸고서 이를 구하였으나 공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간혹 친구와 더불어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즐거운 나머지, 시가(詩歌)를 발하게 되면 화락하고 화창하여 그 풍류와 기개가 남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여 모두들 흠모하고 우러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잠(申潛)은 목민관으로서 지방의 백성들을 위하여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보살피고 어려움을 들어 주었다. 목민관으로서 정사를 처리함에 신명을 다 바쳤으며, 백성을 위하여 개혁하였지 자신을 위하여 일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온화하고 자신을 낮추었으며, 부결(剖決)은 항상 합당하게 하였다.
그는 태인현감으로 있을 때 4학당(四學堂)세워 유학을 권장하였으며, 상주목사로 부임하여서는 2년간에 18개소의 서당을 지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는 상주에 속현(屬縣)이 넷이나 있었으나 궁벽한 오지라서 선비들이 강학할 장소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서당을 만들어 학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임하필기에 나타난 것과 같이 그는 청렴하고 근면하여 청백리의 표상이 되었다. 이것은 그가 몸소 많은 사람들에게 표상이 된 것이다.
신잠(申潛) 목사(牧師)는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상주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것 같이 슬퍼하였으며, 그가 순직했을 때 임금이 ‘경상도 관찰사 권철(權轍)의 서장을 보고 상주 목사 신잠(申潛)이 죽었다했다. 이 사람은 염근(廉謹)했기에 위에서도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미두(米豆)를 8석씩 치부(致賻)하도록 하라’고 할 정도로 청렴하고 근면하였다.
이러한 일면으로 볼 때 신잠(申潛) 목사(牧師)가 목민관으로 있을 당시는 잦은 사화(士禍)로 인한 피해의식이 있는 뜻 있는 선비들은 오히려 초야에 은거하였으니, 이는 자연을 찾아 심신의 수련과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면서 제도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사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으로 볼 때 신잠(申潛) 목사(牧師)의 교육 사상은 이러한 재지(在地) 지식인의 욕구에 부합하며 관학의 공동화(空洞化)로 인한 교육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방법으로 향촌사회(鄕村社會)를 사실상 선도하고 있는 사족(士族)에 의해 운영되는 서당(書堂)이라는 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어느 정도의 자율권이 주어지는 사학에 의한 교육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지역의 학풍을 진작하며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길이라 판단하여 서당(書堂)을 육성하였다고 본다.
이는 또한 퇴계(退溪)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퇴계(退溪)는 학교는 풍화지원(風化之原)‧수선지지(首善之地)‧예의지종(禮義之宗)‧원기지우(元氣之寓)이지만, 국가작양지방(國家作養之方)으로서의 관학 교육은 이미 올바른 교육적 목적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에 퇴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원교육을 적극적으로 창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서원교육운동은 송대의 서원성립과는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사상이 신잠(申潛)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신잠(申潛)이 상주 목사로 부임한 것은 상주로서는 너무나 큰 복이었다. 이제 우리 상주가 옛 문화의 중심지라 할 추로지향(鄒魯之鄕)의 명성을 되찾을 때, 신잠(申潛) 목사(牧師)의 교육을 향한 열정(熱情)과 사상(思想)도 더욱 빛날 것이며, 그로 인해 상주의 문화가 더욱 발전하고 웅주거목(雄州巨木)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참고 문헌]
1. 경상북도상주교육청(2004), 상주교육사, 대구 : 대구·경북인쇄정보협동조합.
2. 상주문화연구소(2003), 상주문화연구(상주의 서당교육고찰), 대구 : 문창사.
3. 상주시사편찬위원회(2013), 상주시사, 광주: 대한인쇄.
4. 신득렬 외 3인 공저(2013), 쉽게 풀어쓴 교육철학 및 교육사, 서울: 양서원.


[사전]
1. 두산백과(2010), 서울: 두산동아출판사.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1991), 서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 국역국조인물고(1999), 서울 : 신흥인쇄주식회사.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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