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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리 최경창과 기생 홍랑 사랑이야기

문장대 2022. 10. 18. 17:40

 

♧ 조선 함경도 기생 홍랑의 사랑 이야기 ♧

조선 선조 때 함경도 기생 홍랑(洪娘 ? ~ ?)과 함경도 경성에 북해평사로 부임한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

과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다.

홍랑은 어릴 때부터 미모와 문재(文才)가 뛰어났고, 시·서·화를 겸비한 함경도 경성의 시인이자 기생이었다.

'고독한 대나무' 고죽 최경창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송강 정철과 교유하며 '조선 8 문장' 중의 한 사람으로 통했다.

과거에 합격한 최경창은 1573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한다.

부임 축하 연회에서 당시 최고의 문장가 최경창과 홍랑의 ? 대면이 이루어진다.

이때 홍랑은 16세, 최경창은 34세였다.

이 자리에서 홍랑은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시 한 편을 낭송하며 "소인은 고죽의 시를 좋아하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최경창이 어찌 홍랑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시작된 둘의 사랑은 점차 농밀해져 갔고 최경창과 함께 근무지를 동행하며 부부처럼 지냈다.

이들의 사랑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이듬해 봄, 임기를 다한 최경창이 서울로 발령을 받게 된다.

홍랑은 서울로 돌아가는 최경창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 멀리 떨어진 쌍성 까지 몇 날 며칠을 따라가며 배웅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함관령 고개에 이르렀다.

당시 관기들은 해당 지역의 관청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홍랑은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서야 했던 홍랑의 심정을 읊은 시 한 수가 남아 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  선조때 홍랑의 한글시 

 

 

한양으로 돌아간 최경창은 이듬해 큰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국법을 어겨 가며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으로 와 고죽의 병 수발을 들었다.

국법을 어긴 홍랑의 병시중이 문제가 되어 최경창은 파직이 되고 홍랑은 다시 함경도 경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최경창은 돌아서는 홍랑에게 송별시 한 편을 지어 보낸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운 난초 건네노니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 돌아오려나

함관령에 올라 옛 노래 부르지 마오

지금도 청산은 구름과 비에 어둑하니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을 떠돌다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후암 안중태 님의 카폐에서 퍼온글입니다.

홍랑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얼굴에 상처를 내고 삼 년간 경기도 파주에서 움막을 치고 시묘 살이를 하며 최경창을 지켰다.

9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홍랑은 전쟁 중에도 최경창의 시와 문집과 서화들을 피난시키며 온전히 지켰다.

전쟁이 끝나자 홍랑은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품을 전하고 생을 마감한다.

문중에서는 최경창의 무덤 아래 홍랑의 묘소와 함께 시비를 세워 주었다.

/ 옮겨온 글입니다.

시월 마지막 주 화요일,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이달도 나흘 남기고 있네요.

기온변화도 심하고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은 코로나,

각별히 건강관리에 유의하셔야겠습니다.

 

[출처] ♧ 조선 함경도 기생 홍랑의 사랑 이야기 ♧|작성자 후암 안중태

 

문화예술산책 : 네이버 블로그

안녕하세요. 제 3시집 "요즘 우리부부" 출간하고, 간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사랑시인,세상과 소통하는 지하철 시인 후암안중태 시인입니다. 늘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고 시와 삶이 하나로 어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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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1537~1582),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1539~1583), 손곡 이달(蓀谷 李達,1539~1609)선생은 당나라 이태백, 두보, 왕유에 비유하여 삼당시인으로 불리었다. 세분 모두 같은 시대를 살면서 생애가 불우하여 암담한 현실과 혼탁한 세상에 비애와 고독, 좌절과 불만을 주로 읊었다.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사랑

고죽 최경창이 34세(1573)되는 가을에 북도
평사로 부임하려고 함경북도 경성으로 갈 때, 홍원에 들렀다가 그곳의 관기 홍랑을 만났다.
홍랑은 12살 무렵에 고아가 되어 마을의 의원에게 글을 배웠다고 하였다. 관기이기는 하였지만 절세가인으로 문학적인 재능까지 뛰어나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동행하여 변방 경성에서 2년 가까이 함께 살며 깊은 정을 쌓았다.
이듬해 봄, 고죽이 서울로 돌아가자 배웅하며 이별의 정분을 나누었다. 돌아가던 중 함관령에 이르러 시조 한 수를 지어 고죽에게 주며 함께하지 못하는 애틋함과 사모의 정을 표현했다.
고죽은 이 시조를 한문으로 옮겨 새로운 7언고시(七言古詩) 「번방곡(飜方曲, 시조를 한문으로 옮겨 재창작한 시)」으로 새 작품으로 만들었다.
 
묏버들 가려 꺾어 임의 손에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돋아나면  
초췌한 저를 본 듯 여기옵소서.

이별하는 연인에게 버들가지를 꺾어주는 「절양(折楊)」의 풍속은 중국에서 이별을 뜻하며 재회를 기원하는 증표라고 한다.
고죽은 사랑의 열병으로 시를 지었다. 「님 생각(閨思)」이다.

주렴 걷으니 깊은 어둠 사이 은은한 새벽 빛
밤 깊은 5경 꿈속에 료양에 도착했네.      
외론 꾀꼬리 내 시름 거둬 가고           
이슬비 가여린 미인(해당화)을 적시네.   

그 뒤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한 달음에 함경북도에서 출발하여 일곱 낮 일곱 밤 만에 서울에 도착 하였다.
이때는 명종의 인순황후 국상 중이었고, 선비가 관기를 데려와 산다고 소문이 나서 파직 되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적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의 관비(官婢)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것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9년(1576) 5월2일자.
홍랑은 홍원의 관기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별의 시간, 고죽은 홍랑에게 시 두 수를 지어 주었다. 시 「이별에 주다(贈別)」이다.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리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 하리  
지금도 궂은비 내려 첩첩 산길 어둡겠지

후에 고죽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가 있는 파주로 찾아와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쳤다.
이후 6년, 얼굴에 상처를 내고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질 않고, 뜨거운 숯을 삼켜 스스로 목소리와 노래를 잃고 수절 하다가 죽었다.
홍랑이 죽자 정성에 감격한 문중에서 고죽의 묘 아래에 홍랑을 장사 지내주었다. 신분의 차이를 넘어 목숨까지 바친 홍랑의 사랑이  아름답다.
다음 시는 《고죽유고(孤竹遺稿)》에 「제목 없는 시(無題)」라고 실려 있다. 내용을 보면 여인이 멀리 한양에 있는 임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고죽이 홍랑의 마음을 헤아려 쓴 것인지, 홍랑의 시를 「무제」라고 올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임은 한양에 계시고 첩은 양주에 있습니다.   
날마다 임을 사모하여 푸른 루각에 오릅니다.  
방초는 짙어지는데 버들은 시들어 가고       
석양에 서쪽으로 흐르는 물 멍청히 바라봅니다.

 

하동신문 하동칼럼에서 복사한 글입니다. 

 

고죽 최경창과 관기.시인 홍랑의 사랑이야기

 

                                                       시인.수필가 /가현/김병수

 

조선시대의 명기(名妓)'하면 제일 먼저  황진이(黃眞伊)가 떠오를 것이다.

또한 매창이며 김부용 등도 빼 놓을 수 없지만 그러나 정작 '조선시대의 최고의 기생'으로 그리고 시인으로 감히 홍랑(洪娘) 꼽고 싶다.

홍랑의 작품 갯버들은 고시조 작품이지만 현대적 문학접근으로도 최고의 서정시인에 손색이 없다.

두 기생의 공통점은 예기(藝妓노래그림글씨시문 따위의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이자 재색(才色 여자의 재주와 아름다운 용모)을 고루 갖춘 여류 시인이다.

이들 두 여인의 차이점은 분명 있지만 재능이나 미색으로는 구분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해 둔다.

황진이는 명문대가 황진사댁 첩의 딸로 동네 머슴이 황진이를 짝사랑하다가 그만 상사병으로 죽어 그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을 지나가다 멈춰 어느 점쟁이의 부탁(?)으로 황진이의 속곳을 상여에 덮어 주어 그 상여가 움직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로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의 길을 택해 사대부라 합시고 폼만 재며 이간구실은 말 할 것도 없고 밥값도 제대로 못하는 양반들을 쌍코피 내 준 어찌 보면 자기가 첩의 딸로 태어나 좋은 데 시집을 못간 그 한을 이들 사대부에게 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랑은 황진이와 전혀 출신이 다르다.
홍랑은 비록 관기였지만 당시 조선 최고 문장가이고 시인으로  당나라에서 조차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고 칭송 받았으며 문집 後唐書에도 고죽 작품이 조선 문인 가운데 유일하게 실려 있으며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명성이 높았던 풍류 문장가 고죽 최경창에게만 일생동안 그의 모든 것을 일편단심 바친 여인이었다.


   충신불사이군이요열녀불경이부라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육신 성삼문을 '충신불사이군'이라면 홍랑은 '열녀불경이부'로 비유될 수 있다


 최경창의 후손들에 의하면 홍랑은 함경도 홍원 기생으로 '애절(愛節 사랑의 절개)' 이란 이 름을 가진 여인이었다 한다.

 그녀의 이름 '애절'처럼 홍낭은 비록 관기(官妓)의 몸이었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 했던 홍랑은 누구나 다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

 (路 柳牆花아무나 쉽게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창녀나 기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홍랑은   백광현이달(허균스승)과 함께  3당시인인 고죽 최경창(1539~1583) 이 문과에 급제 후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    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 후 그를 알게 되어 사 랑이 싹터 그녀는 일생을 자기의 모든 것을 고죽에게 바친 정말 '순애보'의 주인공이다


 고죽과 홍랑의 로맨스는 홍랑이 최경창을 만나 세세생생(世世生生 : <불교몇 번이든지 다시 환생하는 일또는 그런 때중생이 나서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형태)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이야기이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옛 부터 국방의 요지이었기에 최경창은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홍랑을 만나게 된다당시 최  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과 경성 최고의 기생이었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경창은 관리였기에 관기 홍랑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고...

홀로 생활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 한 몸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홍랑은 최경창과 군사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 을 쌓아가게 된다그러나 이듬해 봄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은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당시 홍랑은 관아에 속해있던 관기였기에 다른 지역으로 함부러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 되었 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밥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이별을 눈 앞에 둔 그녀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첫사랑 최경창에게 홍랑은 모든 것을 바쳤다그러나 이별이 너무나도 서럽고 아쉬어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님과 같이 있고 싶어 한양으로 부임하는 최경창을  멀리 멀리까지 배웅해 주었다.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러나 어찌할 것인가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 고개에 이르렀고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 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 옆에 피어있는 산버들이었다.


홍랑은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에 다가가 그 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픈 시조 한 수를 이렇게 읊었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자시는 창밧괴  심거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녀기쇼셔
    
           묏버들가지 가려 꺾어 보냅니다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 돋아나면 날(홍랑)인가도 여기소서

  

   훗날 최경창이 홍랑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위의 시를 한시로 이렇게 번역을 했다 한다.
  
   택절양류기천리  인위시향정전종 수지일야생신엽
   擇折楊柳寄千里  人爲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이별의 아픔이란 이 세상 어느 누구나 다 마찬가지 홍랑과의 헤어져야 하는 최경창의 맘은 더욱 아팠을 것이다.

   홍랑을 두고 고죽은 한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당시에 국법은 관기는 관할 지역을 떠나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경창은 사랑하는 홍랑을 두 고 올 수 밖에 없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최경창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된다.
    아마 홍랑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렸지 싶다.
    상사병에는 약이 소용 없다'는 말처럼 그는 계속 시름시름 앓았다 한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접한 홍랑은 경성에서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하 여 최경창을 만난다두 사람의 이런 이야기   가  조정에 들어가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다마 침 그때가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국상 중이었는데..... 국상 중에 기생을 불러들였다는 구 실  로 홍랑은 양계의 금(兩界의 禁 함경도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금함)
어겼다는 죄목으로 홍랑 또한 홍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최경창은 그의 곁을 떠나는 홍랑에게 유란(幽蘭)을 선물하며 아래와 같은  시로서 그녀를 위로하였다.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리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하리
   지금도 궂은 비 내려 첩첩 산길 어룹겠지


   이렇게 최경창과 홍랑은 두번 째 만남과 이별 후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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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년(선조6) 가을,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이 북도평사가 되어 한양에서 천리 길, 함경도 경성으로 가는 길이다. 북도평사는 함경도 병마사(兵馬使)를 보좌하는 벼슬이다. 도중에 홍원군에 들르니, 군수가 축하연회를 베풀어 준다. 기녀가 술을 올리고 창을 한곡 하였다. 이어 또 다른 기녀에게 창을 권하자 “저는 창보다 시를 더 좋아합니다.”라고 한다. 최경창이 “누구 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고죽의 시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녀 홍랑이 고죽의 시를 한 수 읊는다. 시가 끝나기를 기다려 군수가 “이 분이 바로 고죽 선생님”이라고 소개한다. 작자와 독자인 시인과 여인의 만남, 고죽과 홍랑은 서로 놀랐다. 수작(酬酌)이 이렇게 되면 연분이 안날수가 없다. 학자요, 시인이며, 음률을 알고 피리를 불던 조선 팔대 문장가 고죽 최경창과 시를 알고 교양과 미모가 빼어났던 기생 홍랑은 그 자리에서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조선 최고의 로맨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후기의 학자 남학명이 문집 <회은집(晦隱集)>에 기록을 남겨 널리 회자되었다. 


두 사람은 경성에서 꿈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고죽의 임기가 다하여 이별의 날이 찾아왔다. 눈물로 밤을 새운 홍랑은 떠나는 고죽을 따라 며칠 길을 가다가 쌍성에서 결국 이별한다. 돌아오는 함관령(咸關嶺) 고개에는 산버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날은 저물고 비가 내렸다. 홍랑은 시(묏버들가)를 지어 산 버들과 함께 고죽에게 보낸다.


「묏버들 가려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시오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기생의 신분으로 넘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는 홍랑에게 또 하나 슬픔이 더해졌으니, 서울로 떠난 고죽이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이다. 몇날 며칠을 걸어 홍랑은 서울로 찾아간다.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고죽을 찾아가 병수발을 든다. 고죽은 그 정성 덕에 건강에서 회복되는데 그 즈음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이 퍼진다. 홍랑은 당시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출입을 금하는 ‘양계의 금’을 어겼고, 고죽은 당시 명종왕비인 인순왕후의 국상 중에 첩을 삼는 죄를 범한 것이다. 고죽은 파직을 당하고, 홍랑은 경성으로 돌아간다. 고죽은 이별의 시 두 편, <증별(贈別)>과 <우(又)>, 그리고 홍랑의 묏버들가를 한역한 <번방곡(飜方曲)>을 지어 홍랑에게 준다.


증별(贈別)
「옥 같은 뺨에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나서니
새벽 휘파람새도 이별을 알고 슬피 울어주네
비단적삼 좋은 말을 타고 강산 넘어 떠나는 길
저 멀리 아득한 풀빛만이 외로운 길 전송하네」


우(又)
「말 없이 마주보며 난초(幽蘭)을 주노라.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간)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나 오려나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함관령에서 옛 노래 더 이상 부르지 말아라.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지금까지도 구름비에 청산이 어둡나니. 」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 후 종3품의 종성부사로 임명되지만 동인들의 끝없는 모함으로 강등되어 귀경하다가 1583년 경성 객관에서 객사하고 만다. 향년 45세.


남학명의 <회은집(晦隱集)>과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 따르면 고죽 사후에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무덤 곁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도 임의 무덤을 떠나지 않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죽의 시편들을 챙겨서 피난했다. 전쟁이 끝난 뒤 홍랑은 고죽의 유작을 해주최씨 문중에 전한 뒤에 그의 무덤 앞에서 자진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시집 <고죽집>은 이런 곡절을 거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었던 홍랑의 순애보는 양반문중을 감동시켰고, 문중은 홍랑을 고죽의 무덤 아래 묻어 주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율하리에 고죽과 부인 임씨의 합장묘가 있고 그 아래 홍랑의 묘가 남아있다. ‘시인 홍랑지묘’라 새긴 묘비 뒷면에는 홍랑의 <묏버들가>와 그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고죽은 전남 영암 구림마을 태생으로, 그의 사당이 있는  ‘동계사’ 입구에도 두 사람은 하나의 돌이 되어 서 있다. 돌의 뒷면은 ‘홍랑가비(洪娘歌碑)’로 <묏버들가>가, 앞면은 ‘고죽시비(孤竹詩碑)’로 <묏버들가>를 한역한 <번방곡>이 새겨져 있다.


최경창은 백광훈·이후백과 함께 양응정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5년 17세 때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1568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가 됐다. 예조·병조의 원외랑을 거쳐 1575년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학문과 시와 서화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이이·송익필·최립 등과 무이동에서, 정철·서익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하여 당대 8문장으로 꼽혔으며, 백광훈·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시가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무제(無題)
「임은 서울 계시고 첩은 양주에 살아
 날마다 임 그리워 취루에 올라보면
 방초는 짙어지고 버들은 쇠어가니
 비낀 석양에 강물만 바라보는 빈 눈길」


최경창이 홍랑이 되어서 쓴 시다. 앞 두 행은 정(情)이고, 뒤 두 행은 경(景)이다. 둘이 나란히 앉아 홍랑은 정을 쓰고, 고죽은 경을 쓴 것 같다. 그러면서 합일(合一)에 이른 듯한. 살아서 함께 하지 못한 많은 세월들이 죽어서는 흙이 되어 함께 묻혀있고, 두 사람이 쓴 시는 돌에 새겨져 하나가 되어 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율하리에 고죽 최경창과 부인 임씨의 합장묘가 있고 그 아래 홍랑의 묘가 있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었던 홍랑의 순애보는 양반문중을 감동시켰고, 문중은 홍랑을 고죽의 무덤 아래 묻어 주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00년 고죽의 후손들이 신도시 개발에 밀려 조상의 묘소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홍랑의 무덤 속에서 부장품으로 묻었던 ‘묏버들’ 시의 원본을 비롯해 고죽의 육필 원고들을 다량으로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고죽의 작품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이처럼 기생 홍랑의 공로가 크다. 새롭게 이장된 고죽부부와 홍랑의 묘소 앞에는 그들이 생사를 초월한 풍류의 반려였음을 밝히는 시비(詩碑)가 자랑스럽게 길손을 맞고 있다.


출처 : 작가 이광이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 중국 당나라 3당시인 - 이백, 두보, 왕유   * 조선 3당시인-백광훈, 이달, 최경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