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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관찰사 조엄과 동래관찰사 지석영-조선시대

문장대 2022. 8. 7. 11:28

상주 목사는 고려 문종이래  조선시대 말까지 1,000명 정도 상주에 부임했다. 기록상 첫 목사가 이재원이고 마지막 목사는 이호준이다. 이후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해방후 현재까지 많은 목사급의 군수와 시장이 발령받아 부임했다. 이 중에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다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온 조엄이 경상괸찰사로 근무한 사실과  종두법을 발견한 지석영 선생님이 역시 동래부사, 동래관찰사로 부임한 사실이 오늘날 새롭게 여겨진다. 조선시대 유명한 사람은 거의 경상관찰사로 부임한 사실이 확인된다. 즉  관찰사를 거쳐야 더 높은 직위를 얻고 출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늘은 조엄선생님과 지석영 선생님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 조엄 선생님에 대한 고찰

출생 - 사망 :1719년(숙종 45) ~ 1777년(정조 1)

 조선의 정치가.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시호는 문익(文翼). 본관은 풍양(豊壤). 1752년(영조 28) 문과에 급제하였다. 내외를 두루 돌고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어 조운(槽運)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유반계(柳磻溪)의 저서(著書)에 의한 제도대로 좌조창(左漕倉)을 마산포(馬山浦)에, 우조창(右漕倉)을 진주 가산포(晋州駕山浦)에 설치하고 공세(貢稅)의 수납과 선부(船夫)들의 급료(給料) 등을 잘 취급하여 나라는 부(富)케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했다. 만기로 돌아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뒤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이르러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에 들어갔을 때 감저(甘藷) 종자를 가지고 와서 제주도(濟州島)에 재배시켜 번식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조저(趙藷)라 부르기도 했다. 공조 판서ㆍ동성균(同成均)ㆍ지의금(知義禁)ㆍ이조 판서ㆍ홍문 제학(弘文提學)을 거쳐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어 정언(正言) 송취행(宋聚行)의 무소(誣訴)를 당하였으나 사실이 없으므로 이조 판서에 복귀, 사퇴하였다. 정조 섭정(攝政) 초에 다시 이조 판서로 보직되었다가 도정(都政)에 이르러 홍국영(洪國榮) 일당의 무고로 인하여 위원군(渭原郡)에 귀양갔고 김해(金海)에 옮기어 거기서 사망했다. 1760년(영조 35) 조상인 조종경(趙宗敬)의 유고집인 《독암유고(獨庵遺稿)》를 삼간(三刊)했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자기의 하는 일이 정당한 것이면 끝까지 고집하므로 세상에서 조고집이라 불렀다.

 

원주 지정면이 고향인 조엄은 상주 목사를 잠시 거쳤으며 고구마를 일본서 가져와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지 않도록 한  휼륭한 분이다. 구황식물이고 오늘은 다방면으로 식품제조에 이바지 하고 있다. 원주 지정면에 가면 조엄 역사 박물관이 있다.

저서

해차록(海槎錄)

[네이버 지식백과] 조엄 [趙曮]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  동래관찰사 선생님에 대한 고찰

종두법을 고안한 지석영 선생님이 관찰사로 근무한 사실이 너무 반갑고 새롭다. 

 출생 - 사망 : 1855년 -1935년.  본관은 충주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한성부 중서훈동 12통 9호[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서학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 의학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영국 제너(Edward Jenner)의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을 위해 백신을 피부에 접종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1876년(고종 13) 수신사 김기수(金綺秀)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 된 스승 박영선(朴永善)에게 일본의 종두 현황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박영선이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가져다주어 이 책을 보고 구체적으로 종두법을 공부하였다.

1879년(고종 16) 일본 해군이 부산에 세운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찾아가 두 달 정도 머무르면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 도즈카[戶塚積齋]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시술법도 익혔다. 같은 해 12월 두묘(痘苗)[천연두 백신의 원료] 3개와 종두침 2개를 구해 귀경하던 중, 처가가 있는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 들러 두 살 된 처남과 마을 어린이 40명에게 우두를 접종하였다. 이것이 국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종두 시술이다.

지석영은 서울에서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으나 두묘 공급이 잘 안 되어 1880년(고종 17)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를 방문하여 종묘 제조법(種苗製造法)·채두 가수장법(採痘痂收藏法)·독우 사양법(犢牛飼養法)·채장법(採藏法) 등 우두 관련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이후 서울에 종두장(種痘場)을 건립하였으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불타 버렸다. 정국이 안정되자 같은 해 9월 전라도 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을 세우고, 1883년(고종 20) 충청도 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개설하였다.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지석영은 1885년(고종 22)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여 종두 보급의 체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887년(고종 24) 시폐(時弊)[잘못된 폐단]를 논하였다가 강진 신지도로 유배를 갔는데, 유배지에서도 종두 보급과 교육을 계속하였다. 1892년(고종 29) 풀려나 이듬해 서울 교동에 우두보영당을 설립하였다. 지석영은 1894년(고종 31) 관직에 복귀하여 형조 참의, 승지 등을 역임하고, 1895년(고종 32) 동래 부사, 동래부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5월 갑오개혁에 참여하였고, 「종두 규칙」을 만들어 생후 70일~돌 무렵의 아기들에 대한 우두 접종을 의무화하는 한편 예방 접종의 필요성을 꾸준히 홍보하였다.

1896년 부산 재판소 초대 판사로 재임하면서 지역민들에게 우두를 놓기도 하였다. 지석영은 1899년(고종 36)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인 경성의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1907년(순종 1) 대한의원에 통합될 때까지 교장을 지냈다. 지석영은 국어학자이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이 1905년(고종 42) 7월 공포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상소하여 한글의 올바른 사용과 교육을 주장하였으며,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 가로쓰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1907년(순종 1) 국문연구소를 세워 총무로 활동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 사전인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였다.

학문과 저술

1885년(고종 22) 의학 서적인『우두 신설』을 썼다. 국문 관련 저서로는 『자전석요』[1907년], 『언문(言文)』[1909년], 『훈몽자략(訓蒙子略)』[1909년] 등이 있다.

묘소

지석영의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57-1번지 망우 묘지 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96년(고종 33)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기장읍성에 동래 관찰사 지석영의 선정을 칭송하는 선정비가 세워졌다. 1988년 부산광역시와 충주 지씨(忠州池氏) 문중은 부산과 지석영의 깊은 인연을 기념하여 동래구 온천1동 금강 공원에 높이 422㎝, 너비 85㎝의 공덕비를 세웠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에는 지석영 동상이 있다. 의료계에서는 종두 보급에 힘쓴 지석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송촌 지석영 의학상’을 제정하여 의학 분야에서 활발한 학술 활동과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의료인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지석영은 의료인과 국어학자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친일 행적이 자주 거론된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도사를 낭독하였다는 이유로 ‘과학 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과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참고문헌

  • 대한의사학회, 『송촌 지석영』(아카데미아, 1994)
  • 홍연진, 「근대 의학의 기수, 지석영」(『시민을 위한 부산 인물사』-근현대편, 선인, 2004)
  • 「부산 법관 1호는 지석영 선생」(『동아 일보』, 1996. 1. 19)
  • 『지석영 전집』1~3(아세아문화사, 1985)

 

관련이미지 7

  • 기장시에 지석영 선정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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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지석영 [池錫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855 ~ 1935

서양의 종두법을 배우다

1879년 전국에 천연두가 창궐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지석영의 조카딸도 그해 사망했다. 한의학을 공부했던 지석영은 천연두의 창궐에 한의학의 무력함을 통감했다. 서양에서 실시하고 있는 종두법이라는 것을 조선의 아이들에게 시행할 수 있다면 수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3년 전 스승인 한의사 박영선(朴永善)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도쿄 순천당의원 의사에게 우두종두법을 배우고 일본인이 쓴 [종두귀감]이라는 책 한 권을 갖고 돌아왔다. 박영선은 그가 배운 종두법과 그 책을 제자들에게 강의했는데, 지석영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책을 읽고 강의를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지석영의 귀에 당시 부산에서 일본 거류민의 치료를 위해 의료행위를 하고 있던 제생의원 원장과 해군 군의관이 종두법을 알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난했던 지석영은 20일 동안 걸어서 부산 제생병원을 찾아가 필담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 열의에 감복한 원장은 종두법을 가르쳐주기로 하고, 대신 지석영은 당시 일본인 거류민들이 편찬준비를 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위한 한국어 사전 작업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렇게 부산에서 보낸 두 달이라는 시간은, 서양의 종두법을 배우고 서양 의학의 우수성을 확인한 지석영이 이후 서양 의학을 도입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국문학에 관심을 갖는 기회도 만들어주었다.

가난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한학과 의학을 배우고

지석영은 1855년 5월 15일 서울 원동(지금의 낙원동)에서 지익용(池翼龍)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매우 가난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지익용은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한의원을 차렸으면 살림이 좀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의업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당시 의업은 중인층의 직업이었으므로 중인 취급을 받을까 염려했던 듯하다.
그러나 중인층의 한의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특히 당시 이름 있던 한의사인 박영선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탐구열이 매우 강했던 넷째아들 지석영을 당시 양반자제들이 다니던 서당에 보낼 형편이 안 되자 친구인 박영선에게 보내 한학과 의학을 공부시켰다.

직접 일본에 가 우두묘의 제조기술까지 습득

부산의 제생의원으로부터 두묘(痘苗, 천연두의 예방으로 쓰이는, 소의 몸에서 뽑아낸 면역물질)와 종두침, 접종기구, 일본 거류민들에게 부탁하여 구한 서양의학 서적 몇 권을 가지고 상경하던 지석영은 충청도 충주군에 있는 처가에 들렀다. 그곳에서 장인을 설득하여 두 살 된 어린 처남에게 첫 종두를 실시했고,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을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우두 접종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묘가 제한된 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접종하기 위해서는 두묘의 지속적인 공급이 필요했다. 접종법은 배웠지만 두묘를 제조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던 지석영은 1880년 수신사 일행에 수행원 자격으로 직접 따라나서 우두묘의 제조기술을 완전히 습득하고 돌아왔다. 귀국한 뒤에는 서울에 종두장을 차려 백성들을 계몽하면서 본격적으로 우두접종사업을 펼쳐나갔다.

우두접종 의무실시로 수많은 어린이들의 생명 구해냈으나 친일 행적으로 오점 남겨

그 무렵 지석영은 개화당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는 우두의 실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혁신을 중심으로 한 선진적 개화사상을 주장한 개화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러던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당의 일원이자 일본 의사와 접촉하여 종두법을 수입한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몸은 피했지만 종두장은 군인들의 손에 완전히 불타버렸다. 정국이 안정된 뒤 지석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부활시켜 계속 종두를 보급했고, 전라도와 충청도에도 우두국을 설치해 종두법을 가르쳤다.
1883년에는 정부의 개화정책 입안에 직접 참여하고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한 뒤 성균관의 서적을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개화파가 몰락하자 지석영의 관직 생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가운데 1885년 [우두신설]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최초의 서양의학서이다.
1887년 지석영은 조세 등 국정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가 국왕에게 닿기도 전에 “흉악한 지석영이 우두를 놓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구실 밑에 도당을 유인하여 모았다”는 이유로 수구파들의 탄핵을 받아 강진 신지도에서 5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그는 다시 교동에 우두보영당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실시했다.
세가 다시 바뀌어 1894년 개화파들이 집권하면서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지석영은 이에 적극 참가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공은 개화파 정부로 하여금 [종두규칙]을 제정하게 하여 전국 모든 어린이들에게 의무적으로 우두접종을 실시하도록 한 일이다. 그로 인해 19세기 말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생명을 구하고, 마맛자국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할 수 있었다.
친일개화정권 당시 그는 형조참의에 기용되었다. 그 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들이 상륙하던 무렵, 대구 감영의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어를 잘하는 지석영은 일본군의 통역과 길 안내를 맡는 등 동학농민운동의 토벌에 도움을 주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동래 부사가 되었다가 동래부 관찰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토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또한 뒷날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낭독한 친일 행적은 그 일생에 큰 오점으로 남는다.

한글 연구와 어린이 교육에도 큰 기여

한편, 지석영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하면서, 밀 재배의 경제성을 설파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한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표시하지 못하는 음이 없고 매우 배우기 쉬운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연구하지 않고 민간에 맡겨버린 결과 혼륜(混淪)과 와오(訛誤)가 심하여졌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한글을 새롭게 재정비하여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다. 고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을 공포했는데, 이는 지석영의 작품이다. 신정국문이 학계에 논란을 일으키자 지석영은 한글 연구를 위한 조직으로 1907년 국문연구소를 설립했고, 그가 교장으로 있는 의학교에 국문연구회를 창립했다. 주시경박은식 등이 이 연구회의 연구원이었다.
지석영은 또한 한글에 대한 서적으로 [언문]을 저술하는 등 한글연구와 한글운동을 전개해나가면서 한자의 뜻과 음을 한글로 표시하는 방법의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옥편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자전석요(字典釋要)]를 펴내기도 했다. 그 외 국채보상연합회 부소장, 대한자강회 평의원, 기호흥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도 펼쳤다.
1899년 지석영의 청원에 따라 최초의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의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공식적인 서양의학 교육기관이다. 1907년 의학교가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편되면서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10년 사직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살다 1935년 2월 1일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에서 협력을 부탁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3․1운동 등 독립운동에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석영 [池錫永] -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들을 천연두의 위협에서 구해내다 (인물한국사, 윤희진, 장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