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역사 등 좋은글

울산오씨의 연원과 상주 봉강리 학성사

문장대 2022. 3. 2. 18:48

상주시내-세천-봉강1리-봉강2리 별표 지점이 학성사인데 도로 바로 옆

 

종친회장 오병욱 님이 작성한 울산오씨의 연원과 정간 오식 선생님의 여러 자료를 올립니다. 

1, 서 문(序文)
2, 정간(靖簡) 식( 湜)공의 관향(貫鄕)
  가 ,울산오씨(蔚山吳氏)의 연원(淵源)
  나,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3 ,정간(靖簡) 식( 湜)공의 상계(上系)
4 정간(靖簡) 식(湜)공의 일대기(一代記)
5 정간(靖簡) 식(湜)공의치적(治績)
  가, 제도개선(制度 改善)
     1)세제(稅制)의 설정(設定)
     2) 합리적(合理的)인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改編)
  나, 왜적침략(倭賊侵略)의 격퇴(擊退)
  다, 외교활동(外交活動)
  라, 귀감(龜鑑)의 청백리(淸白吏)
6, 정간(靖簡) 식(湜)공의 추모행사(追慕行事)
7, 실정(失政)에 의한 문책(問責)
8 ,맺는 말
  <참고자료>




1, 서 문(序文)




정간(靖簡)공은 울산오씨 시조 학성군 연지(鶴城君 延祉)공으로 부터 4세이며 휘 식(諱 湜),
자 위숙(字 渭叔),호 임계 (號 臨溪) 시 정간(諡 靖簡)이고 관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선친 수천(受天)공이 고려조의 밀직사(密直司)정의대부(正義大夫)로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경저(京邸 : 지금의 개성)에서 1370년(高麗恭愍王 19年)出生하여
1426년(世宗 8年) 3월 26일 향년(享年)57세로 선산 향저(善山 鄕邸)에서 졸(卒)하기 까지의
경력과 치적 그리고 실정으로 인한 문책, 사(死)후의 평가등 각종 기록을 통하여 일대기를
살펴 보고자 한다




2, 정관(靖簡)공의 관향(貫鄕)




  가 ,울산오씨(蔚山吳氏)의 연원(淵源)

      울산오씨의 시조는 고려 검교군기감 감(高麗 檢校軍器監 監)을 지낸 해주오씨의 시조
      인유(仁裕)공의 6세손 효성(孝成)의 차자(次子)인 문충공(文忠公) 연지(延祉)다.
      (효성의 장자는 연경(延慶)임) 고려 충렬왕때 문과 급제로 관(官)이 중서시랑 평장사


      (中書侍郞 平章事)에 이르렀고 동남변경을 침범하는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으로
      학성(울산의 옛이름)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후손들이 해주 오씨에서 분적하여
      울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나, 관향(貫鄕)의 연혁(沿革)
      울산(蔚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동해안에 위치하는 도읍(都邑)으로, 본래 신라(新羅)
      굴아화촌(屈阿火村)인데 제5대 파사왕(婆裟王)이 현(縣)을 두었고 통일신라의 제35대
      경덕왕(景德王)은 하곡(河曲)으로 개명(改名)하여 임관(臨關:경북 경주에 있던 옛지명)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태조(太祖)는 흥려부(興麗府)로 승격시켰다.


     그외 울주(蔚州),학성(鶴城),대성(大成),흥려(興麗),등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 울산시 중구에는 학성동(鶴城洞)과 학성공원이 있다.
     이런 변천을 거쳐 1397년(태조 6) 진(鎭)을 두었고 1413년(태종 13년)에는 진(鎭)을
     파(罷)하고 울산(蔚山)으로 개칭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1599년(宣祖 32年) 부(府)로 승격하였고, 1895년(高宗 32년) 군(郡)이 되어 1931년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62년 읍이 울산시(蔚山市)로 승격하고,
     1995년 1월 1일 울산군을 통합하였으며, 1997년7월15일 울산광역시로 승격 하였다.



3 정간(靖簡) 휘 식(諱 湜)공의 상계(上系)
 
   정간 식공은 한국오씨의 도시조인 무혜공(武惠公) 오 첨(吳 瞻)을기준으로 35세 해주오씨 의
   시조 인유(仁裕)공을 기준으로 10세이며, 울산오씨 시조 학성군 연지공으로 부터 4세이다.

   선친(先親) 수천(受天)공은 고려조에 정의대부(正義大夫)로 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 左副代  
   言)을 지냈으며, 조선 태종조에 이르러 사자(嗣子) 식(湜)으로 인하여 가선대부 호조참판(嘉
   善大夫 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고, 조부 현을(賢乙)은 고려조에 중추원 승선(中樞院 承  
   宣)을 지냈으며, 역시 사손(嗣孫) 식(湜)으로 인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
   되었다.



4 정간(靖簡) 식(湜)공의 일대기(一代記)


ㅇ1370년(高麗恭愍王 19年) 부친 수천(諱 受天)공이 고려조의 밀직사에서 정의대부(正義
   大夫) 좌부대언(左副代言) 이었기 때문에 경저(京邸 : 지금의 개성)에서 출생(出生) 하였으며




ㅇ1390년(恭讓王 2 年) 약관 21세에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였으나 당시 공양왕은
  1389년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고 왕위에 올랐으나 

  1392년   조선이 건국되기까지재위 3년간은 압력과 간섭을 받아 정치,경제,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몇 차례의 제도개편의 단행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의 자기 세력부식을 
  위한 사회개혁으로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후 고려왕조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개국의 소용돌이와 왕자의난....... 
  등등. 으로 10여년 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ㅇ1400 太宗이 즉위 하면서 의정부, 삼군도총제부,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등을 설치하는등 관제
   개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할 당시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정4품)을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사헌부 재직당시에는 외교사절로서일본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선산편(善山編)에 "공양왕시 등과 역대성봉사일본유풍절관" "恭讓王時 登科歷
   臺省 奉使日本有風節官"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대성(臺省)은 고려시대 어사대
   (御史臺)의 대관과 중서문하성의 성랑(省郎)의 합칭이며, 조선시대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칭이었다.




ㅇ 1404년 7月 26日(太宗4年甲申)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官階)로서(조선조 문관
   (文官).정 3품) 연산부사 겸 니성도좌익병마단련사(延山府使 兼 泥城道左翼 兵馬團練史:
   영번 부사겸 황해도 좌익병마훈련소장) 권농관학사(勸農管學事)즉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방의 행정권(行政權)과 군사권의 총 지휘자(軍事權의 總 指揮者)로 왕지(王旨:왕의사령장)
   을 받았으며








           ※현재 종손가에 보관된 왕지의 내용 : 王旨 吳 湜爲 通政大夫 延山府使
              兼 泥城道 左翼兵馬團練使 勸農管學事者 永 樂二年 七月二十六日


ㅇ1406년(太宗6年丙戌) 외직으로 남원 부사(南原 府使)를 역임(歷任)
ㅇ1408년(太宗8年戊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입조(入朝 : 조정으로 들어감)
ㅇ1414年 閏九月(태종14년)제주도안무사(濟州都按撫使)겸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출수(出守)


ㅇ1417년 (太宗17年丁酉)3月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입조(入朝 )
ㅇ1417년(太宗17年丁酉)7월2일 인녕부윤(仁寧府尹 : 中央의吏曹에 所屬된職責)
ㅇ1418년(太宗18年戊戌) 6월월24일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ㅇ1419년(世宗卽位年己亥)7월18일 판청주목사(判淸州牧事)
ㅇ1419년(世宗卽位年己亥)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입조(入朝)
ㅇ1422년(世宗四年壬寅) 2월16일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ㅇ1422년((世宗四年壬寅) 12 월19일 좌군총제(左軍摠制)
ㅇ1423년(世宗五年癸卯) 6월26일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출재(出宰: 고을의 원으로 나감.)
ㅇ1426년(世宗8年 丙午) 이조판서(吏曹判書) 및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

ㅇ1426년(世宗8年 丙午) 3월 26일 선산향저(善山鄕邸:고향의집)에서 서거(逝去) 하니
   조정(朝廷)에서 예관(禮官:의례담당관)을보내 사부(賜賻 : 임금이 특명으로 신하에게
   부의(賻儀)를 내려 주던 일)


ㅇ1436년(世宗18年 丙辰) 추증(追贈 :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일.)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5 정간(靖簡) 식(湜)공의 치적(治績)




 가 제도개선(制度改善)


   1)세제(稅制)의 설정(設定)
     1415년 (태종15년)에 제주도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한 데다가 전세(田稅) 제도의
     법이 없어서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겻다. 법식(法式)을 정하여 조세를 거두게 허용하여
     줄것을 임금께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임금이 하교하였다.


    "그곳 지품(地品)에 따라서 차등을 두어 시행하라"
     (定濟州收租法牧使吳湜報本州地척民貧田稅無法民甚苦之許令定式收租敎曰隨其
     地品差等施行)

    -조선왕조실록 2집 태종권29 56쪽-


   2) 합리적인 행정구역의 개편
     1416년(태종16년)에 오식 목사로 하여금 제주가 섬이라고는 하지만 매우 넓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다. 또한 왜구의 침입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행정적으로 빠른 정보
     전달과 대응을 위해선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절감하였다.


     제주도는 백성과 마정(馬政)이 요체였다. 그래서 태종 16년 5월. 목사 오식은 이런
     상황을 공감하고 있는 관리들과 함께 임금께 건의를 하게 된다. 제주 도안무사(濟州都按
     撫使)오식(吳湜)과 전 판관(判官) 장합(張合) 등이 그 땅의 사의(事宜:이치에 맞아 일이
     마땅함)를 올렸다. 계문(啓聞: 글로서 중앙에 올리는 일) 은 이러하였다.


    제주에 군(郡)을 설치하던 초기에 한라산(漢拏山)의 4면(四面)이 모두 17현(縣)
    이었습니다.  북면(北面)의 대촌현(大村縣)에 성을 쌓아서 본읍의 동서도(東西道) 로 삼고,
    정해진(靜海鎭)을 두어 군마(軍馬)를 모아 연변을 방어하였고, 그리고 동서도(東西道)의
    도사수(都司守)는 각각 부근의 군마를 고찰하고 목장(牧場)을 겸임하였으나,

    땅은 크고 백성은 조밀하고 소송이 번다합니다. 동서도(東西道)의 산(山) 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목사(牧使)가 있는 본읍(本邑)을 왕래하려면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농사 때에
    갔다가 오는 데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본읍에는 동도(東道)의 신촌현(新村縣),함덕현(咸德縣) 금녕현(金寧縣)
    과 서도(西道)의 귀일현(貴日縣),고내현(高內縣)·애월현(厓月縣), 곽지현(郭支縣) 귀덕현
    (歸德縣),명월현(明月縣)을 소속시키고, 동도(東道)의 현감(縣監)은 정의현(旌義縣)으로서   
    본읍을 삼아 토산현(兎山縣),호아현(狐兒縣) 홍로현(洪爐縣) 등 3현(三縣)을 소속시키고,
    서도(西道)의 현감(縣監)은 대정현 (大靜縣)으로 본읍을 삼아 예래현(猊來縣)·차귀현
    (遮歸縣) 등 2현(縣)을 소속시키되, 두 곳의 현감이 만약 공사(公事)가 있을 때 감히 

    독단(獨斷)할 수가 없으면, 안무사(按撫使)에 의논을 보내어 결절(決絶)한 뒤에 사연(辭緣)을
    대략 들어 정보(呈報):윗사람에게 보고)하여서 출척(黜陟: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 을  
    올리어 씀.)에 빙거(憑據:사실을 증명할 근거를 댐. 또는 그 근거).하게 하고, 만약 진상

    (進上)하는 마필을 쇄출(刷出:가려내는일)하는 일과 연례(年例)의 마적(馬籍) 따위의
    일이라면 현감(縣監)이 관할하는 마필의 나이와 털빛깔을 정보(呈報)하면, 안무사가
    순행(巡行)하여 친히 감독 고찰하여 시행하고,
 
    관할하는 군관(軍官)과 군인(軍人) 가운데 천호(千戶)와 백호(百戶)는 차정(差定:사무를
    맡김.) 한 연월(年月)의 오래고 짧은 차등을 가지고 현감(縣監)이 분간하여 정보(呈報)
    하면 안무사가 서로 고찰하여 그전대로 차하(差下:벼슬을 시키던 일)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늘 따라야 할, 정하여진 형식이나 법식)을 삼으소서,
 

        _조선왕조실록 2집 태종권31, 113쪽-


   이때 분할된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제주삼읍을 행정구역은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지속 되었다.




나 왜적침략(倭賊侵略)의 격퇴(擊退)


   태종14년 5월.(1414년) 보리를 거둘 무렵 왜구가 침입하였다. 왜구들은 배 23척에 나누어
   타고 썰물때를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해안마을을 노략질하며 다녔다.


  오 목사는 위기에 대처하면서 임금께 급히 상황을 알렸다. 수전(水戰)에 능한 제주인
  송전(宋全)이 태종의 명으로 병선 3척과 화통 병기를 가지고 달려와 격전결과 왜구들은
  패퇴하여 물러갔다.




다, 외교활동(外交活動)


   사헌부 재직당시에는 외교사절로서 일본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
   선산편(善山編)에 기록 되어 있으며 또한 가승에 의하면 일본(日本)에 봉사(奉使:사신으로
   서 명령을 받듦.)시 풍절(風節)이 장중(莊重)하고 지신(持身)이 엄정(嚴正)하여 왜인(倭人)
   이 외경접복(畏敬摺服)하여 왕위(王威)를 선양(宣揚) 하였다고 전(傳)하고있다.


 ' 즉 정중하고 몸가짐이 엄격하고 발라서 사절단 일행이 '왜인(倭人)의 존경과 정중한
   예우를 받는등 외교활동을 원만히 수행하여 왕위(王威)를 선양(宣楊)했다는 것이다.




라, 귀감(龜鑑)의 청백리(淸白吏)


   청백리(淸白吏)는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
   인의(仁義)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理想的)인 관료상이었다.

   정간(靖簡) 식(湜)공은 청백리의 명부(名簿)인 청선안(淸選案)과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
   경상도편(慶尙道編),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전라도편(全羅道編), 지방지 (地方志)읍지
   (邑志)의 선산편(善山編) 및 일선지(一善誌)등에 청백리로 등재 되어 있다






6, 정간공(靖簡)의 추모행사(追慕行事)


   가, 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에 위치한 학성사(鶴城祠)의 경내에는 정간공의 신도비
       (神道碑)가 세워저 있으며 이 사당에는 시조공과 정간공을 비롯한 선현들 의 위패를
       뫼시고 봄,가을로 년2회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 경북상주시 외서면 봉강2리(慶北 尙州市 外西面 鳳岡2里)의 학성사(鶴城祠)





   나, 경북 구미시 무을면 무수리 원성촌의 묘소에는 매년 음력 10월1일을 기하여 묘제를
        행하고 있다





            ※ 정간(靖簡) 식(湜)공의 묘소(墓所)


  다, 경북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 망장의 유허(遺墟)에 1807년(순조7년) 건립된 경락서원
      (景洛書院)에서는 증 영의정 오식(贈 領議政 吳 湜)을 주벽(主壁)으로 훈제 윤홍선(塤齊
      尹弘宣)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주부 강거민(主簿 康居敏) 상정 황 장(橡亭 黃 璋)을
      배향(配享)하였었다.




7, 실정(失政)에 의한 문책(問責)




   1409년 4월 18일(태종9년) 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남원부사로 있을 당시 전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사강(李斯剛)이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노비로서 부당하게 속공(屬公 :
   임자가 없는 물건,금제품 따위를 관부[官府]의 소유로 삼음)된 노비(奴婢)가 둘이
   있었는데, 숨어 있는 것을 데려다 사역을 시킨지 오래였다.

   신법(新法)에 속공 노비로서 도망 중에 있는 것을 본 주인이 잡아서 고(告)하면, 이것을
   상(賞)으로 준다는 말을 듣고, 도리어 새로 잡은 것이라고 말을 꾸며 관가에 고하여 상을
   받았으나, 그래도 부족하여, 다시 속공 노비를 찾아서 잡은 공을 남원부에 고장(告狀)하여.
  
   남원부사로 하여금 노비 1구(口)를 상으로 더 받았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의정부에서
   형조로 하여금 핵실(核實: 사건의 실상을 조사)하게 하여, 이사강(李斯剛)이 관을 속이고
   이익을 탐한 죄로 장(杖) 60대의 태형(笞刑)처분을 당하고 당시 속은 남원부사 오식(吳湜)
   은 1409년 4월 18일 탄핵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8 結 語


  공은 2남 2녀를 두었으며 첫째 아들 흠로(欽老)는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와 야은 길재
  (冶隱吉再)선생에게 도학(道學)을 동문수학(同門修學)하였으며,태재 유방선 (泰齋_柳方善)
  선생의_文學을 수학하였고 사마시에 합격하여 황주판관(黃州判官)을 지냈고

  1416년 제주안무사겸 제주목사때 현지에서 두번째 아들인 천일(千日)공을 두었으며, 두딸중
  큰딸은 파평윤씨(坡平尹氏) 홍주교수(洪州敎授) 윤자반(尹自磻)으로, 둘째 딸은 신천강씨
  (信川康氏) 세자필선 의정부 사인(世子弼善 議政府 舍人) 강신(康愼)에게 각각 출가 하였고
 
  손자 셋이 하동현감(達民), 임피현령(達貞),산음현감(達善)을 지냈으며,
  무엇보다도 자스러운 것은 청백리로 높이 칭송을 받고 있는것이다.


  공의 묘소는 경북 구미시 무을면 무수리 원성촌 에 있고, 위쪽에 시조 학성군을 위시한
  조부와 부친의 제단이 있으며 그 아래 정간공의 묘소가 있는데 좌우에는 문인석이 바닥에는  
  박석이 깔려 있고, 바로 아래에 정경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묘소가 위치 하고 있다.


  역사적인 고찰은 주로 왕조 실록과 동국여지지. 동국여지승람 ,지방지의 자료를 중심 으로
  살펴 보았으며 그 이외 고전 및 문고나 가승, 비문 등에 게재되어 있는 내용을 토 대로 하여

  살펴 보았다.






<※ 참고 문헌 및 자료(參考 文獻 및 資料)>

ㅇ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 實錄) 태종~ 세종편
ㅇ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ㅇ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긍익(李肯翊)의역사서 : 1736~1806)
ㅇ 동국 여지지(東國 輿地志) 경상도,선산, 경주, 전라도, 제주편
ㅇ 동국 여지 승람(東國輿地勝覽) 경상도,선산, 경주, 전라도, 제주편
ㅇ 제주도지 통권제 104호(2000년5월 제주도청 발행)
ㅇ 제주시 인명사전 (2002년 6월 제주문화원 발행)
ㅇ 선산의 맥락 (1983년 8월 선산군청 발행)
ㅇ 조선 왕조실록을 통해본 제주목사 (2005년 8월 제주시청 발행)
ㅇ 판서(判書)공 휘 식 (諱 湜) 묘비음기(墓碑陰記)
ㅇ 울산오씨(蔚山吳氏) 세적 비문(世蹟 碑文)
ㅇ 판서(判書)공 휘 식 (諱 湜) 신도비문(神道碑文)
ㅇ 제주 명환기( 濟州名宦記)
ㅇ 청선안(淸選案)
ㅇ 지방지 일선지(地方誌 一善誌)
ㅇ 점필제집(점畢齋集)
ㅇ 해주오씨 대호군공파 대동보(海州吳氏 大護軍公派 大同譜)
ㅇ 망장지 (1993년 발행)


   
                                               -자료 작성자-
 


 
                                                宗親會長 吳秉彧

 

☞ 아래는 상주 봉강2리 도로옆에 위치한 학성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곳 봉강리는 울산오씨의 집성촌이고 고개넘어 연원동 안양마을에도 울산오씨 집성촌이 존재한다. 이곳 마을의 앞 뒤를 산책하며 수백기의 울산 오씨 묘지를 보았다. 봉강리는 상주시 외서면에 속하는데 연원동과 백전리, 이천리와 경계이다. 봉강1,2리 가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상주시 남적동 세천에서 우산-은척방향 버스길로 2km 가다가 봉강1리 입구 다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봉강2리와 연원동이다. 갈림길 좌측에는 배영초등학교 터에 상주 환경 농민학교가 존재한다. 봉강2리는 이곳 갈림길에서 1.5km 남쪽 버스길로 간다. 개천을 따라 가다보면 우측에 잘 조성된 기와집과 신도비가 있는 학성사이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고 벽이 높아 학성사를 진입하기는 힘들다.  정문옆 20m의 산비탈로 올라야 한다. 들어서면 문이있고, 반월교에 양쪽에 연못이 있다. 정면으로 보면 학성사이다. 이곳 역시 굳게 잠겨있고 마당의 노거수를 벌목하고 그대로 두어 이동조차 곤란하다. 빈곳에서 사진을 촬영 할 뿐이다. 오석으로 된 멋진 안내판에 인명이 한문으로 쓰여있다. 상주의 유명한 인물들 성명이 모두 보인다. 이곳 신도비를 보고 제일교포 오병학 후손이 이곳 여러 건물을 지었다고 이곳  주민이 말한다. 그분 역시 울산오씨이다. 이곳 학성사를 이근방 야산들을 등산하며 수없이 보았는데 매우 궁금했다. 마침 후손인 종친회장이 울산오씨 시조인 오연지 4대손 오식 선생님에 대하여 위와 같이 많은 자료를 소개하였다. 오식 선생님 묘소는 구미시 무을면 무수리에 있고 배향은 구미시 대망리 경락서원에 다른 3분과 함께 모셔져 있다. 이곳은 오식 선생님 신도비가 있으므로 후손이 울산의 옛이름인 학성을 본따서 학성사를 조성하였다. 오늘 노악산 능선의 미답지를 답사하다가 애마가 주차된 봉강2리로 중도 하산하여 학성사를 답사했다. 이곳으로 무턱대고 내려오다가 학성사 뒷편 언덕에서 맷돼지 1마리를 만나 조금 놀랐다. 4번의 몸집이 큰 맷돼지를 등산하다가 만났는데 이곳 학성사 뒷편의 맷돼지는 나를 보고 달아나다가 2분 정도 멈추어서 주변을 살피다가 다시 슬며시 산으로 넘어간다. 공격하고 싶은데 검은색을 입은 우람한 나의 모습을 보고 포기한 같다. 당시는 맷돼지로 인해 기분이 안좋고 지나간 후엔 한동안 내가슴이 쿵닥그린다. 운이 좋은 것 같다. 만약 맷돼지가 공격했으면 속절없이 당해야 했다. 그래도 궁금한 학성사의 뒷편 공터로 내려오니 땀이 흥건한 상태로 가슴을 쓰리며 내려와서 학성사 이곳 저곳을 촬영했다. 이후 잠겨진 문을 피하여 좌측 산비탈로 이동하여 옹벽을 뛰어내렸다. 도로에 안착하여 지나다가 아침부터 만난 주민에게 맷돼지 이야기를 하고 마음을 풀었다. 이주민도 알고보니 내가 직장 근무할때 알고 지내던 분의 아버지다. 퇴직 후 여태까지 전국을 등산하며 문경 백두대간 조령산에서 만난 맷돼지와 상주 주변 야산에서 만난 맷돼지 포함 6번이나 만났는데 오늘 처럼 맷돼지가 가다가 2분간  멈추어서 상황을 살피고 다시 달아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소 놀라서 허둥지둥하다가 나중에 알고보니 아침에 쓰고간 유명메이크 등산 모자도 어디서 분실했는지 모른다. 내일 그 모자를 찿고 싶지 않은 상태다. 혼자하는 산행의 애로점을 다시 한번 격어본 셈이다. 도로와 마을 근방에 엄청난 큰 산돼지가 있을 줄 전혀 몰랐다. 

 

===========

2022년 3월2일(수) 문장대 이종하가 오늘 등산후 하산하며 답사하다가 촬영한 학성사의 여러곳을 소개합니다.

 

               봉강2리는 등암마을, 선바우, 이끼넘에, 갈미기 마을의 옛지명이 있다. 제일 큰마을은 등암마을이고 이곳 학성사도 등암마을 도로 건너편 100m아래다.

 

 

                  연원마을 -봉강마을로 이어지는 버스길로 다니다 보면 서쪽 산 아래 도로 바로옆에

옹벽으로 쌓아 지은 학성사 건물이 보인다. 산아래 기와집이니 누구나 지나다가 궁금해 한다.

 

                학성사 좌측엔 문중 후손들이 숙식하는 건물이 존재한다.

 

 

                      오식 선생님의 신도비

 

                   서운문 

  반월교와 연못 2곳

 

 이건물을 지은 오병학 후손의 비-얼굴 사잔이 희미합니다. 제일 교포라고 합니다.

 

 학성사를 건립할 당시 축하하러 온 분들의 유명인사- 고인이 된 분들이 많습니다.

 

               마당에는 고목을 베어 널부러져 이동하기도 힘드네요.

 

  숭덕문

                경내에 못들어가 우측 산에서 안쪽을 촬영했으나 나무가 학성사 문패를 가린 상태

 학성사 뒷편의 나의고향 봉강글자를 바위에 새긴 상태-역시 잡풀이 대단합니다. 저기 바위 뒷편에서 맷돼지를 만나 놀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