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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의사 김점동(박에스터)2

문장대 2022. 2. 21. 19:04

조선말에 태어난 김점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를 앞서 소개 하였다. 여기 그분의 생애와 사진을 추가 소개합니다.

 

* 본명 - 김점동,  결혼후 미국에서 살면서 박에스터로 이름이 변경. 미국에서 여성은 성이 남편 성으로 바뀜. 남편의 이름이 박유산 이므로 박에스터로 바뀜.

* 결혼사항 - 구한말 1893년 5월 2022년 2월 현재로 약129년전 박유산과 결혼.  당시 신랑 박유산 26세, 신부 김점동은 17세로 9세 차이, 박유산은 감리교 선교사의 월리엄 홀의 마부 출신.

아주 귀한 사진입니다.  보시는 분은 잘 보관하세요. 120년 전 사진입니다.

 

*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의 삶의 소개

구한말 1877년 서울에서 김홍택의 셋째딸 김점동은 어려서 부터 영특하여 고종황제가 새운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포교활동을 위해 온 아펜셀러등 여러 선교사들이 의료활동을 하면서 왕실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때이다. 이화학당을 졸업한 김점동은 현재의 이화여자대학병원 전신인 보구 여관에서 통역원으로 근무했다. 언챙이를 수술하는 장면을 보고 결심한 그녀는 15세 어린 나이에 여자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현재 같으면 중학교 2학년인 나이에 그의 꿈은 대단하였다. 스크렌턴이 설립한 보구여관은 당시 숙소가 아니고 의술을 수행하는 병원이었다. 이곳에서 근무하다가 2년후 결혼한 김점동은 귀국하는 로제타를 따라 신랑 박유산과 같이 미국으로 의학공부하러 갔다.  결혼후 3년후인 1896년 10월 미국 볼티모어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2년전 1884년 서재필 박사가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가서 갖은 고생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가 된 사실을 보고 그녀의 결심은 대단했다. 이화학당에서 배운 영어가 큰 힘이 되었다. 미국에 가서 남편 박유산은 노동을 하면서 그녀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외조형의 인물이다. 이때부터 김점동의 이름은 남편의 성을 따서 박에스트로 변모했다. 에스트는 폐르사 왕비의 이름이라고 한다.

위 좌측은 김점동, 가운데 여자분은 월리엄 홀 부인 로제트 여사, 우측은 박유산(에스터 신랑)

아래 좌측은 셔우드 홀(크리스마스 씰 발행자), 나이어린 아기는 에디스 홀 입니다. 

 

박유산은 먼 이국땅에서 특출한 아내를 위한 외조를 하며 4년동안 대학공부를 하도록 뒷바라지 하다가 아내가 졸업시험을 치기전 3주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박유산의 묘비명에는 "내가 나그네 였을때 영접하였고" 라는 마태복음 25장 35절이 새겨져 있다. 이후 박에스터는 남편을 이역만리 두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의사가 되었다. 김점동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기록이 많다. 최초의 신식결혼, 최초의 유학생(장로교의 도움), 최초의 변호사, 최초의 광고자, 최초의 신식 여자 입학생 등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극심한 가난과 나라가 불안할때 그 어려운 의과대학 공부를 하였으니 정말 대단한 선구자다. 고국에와서는평양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해주에서 구세병원을 새우고 의료활동을 하였다. 농촌과 오지를 다니면서 환자를 돌보다가 1910년 4월 13일 남편과 같은 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이 사실은  월리엄 홀과 로제타의 아들인 셔우드 홀이 이모같은 김점동의 죽음을 너무 슬퍼해서 크리스마스 쎌을 발행한 계기가 되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역사가 깊은 우리나라에와서 선교와 의료활동을 하여 오늘과 같은 의료기관이 발전되고 많은 의료인이 활동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에 필자는 감명을 받고 있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아무것도 하지못하고 70대 중반을 넘긴 내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선각자들의 투철한 사명감과 정신력을 이글을 통하여 알립니다. 

 

- 위 사진 2점은 극히 귀한 사진임으로 복사하셔서 보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