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역사 등 좋은글

고약회 선생님과 고약해 선생님(조선시대 관리)고찰

문장대 2022. 10. 8. 22:52

* 조선시대 수군 절도사 고약회 선생님

- 절도사 개성고공(약회) 묘표

공의 휘는 若淮요 성은 高씨이니 관이 開城으로 고려 이부상서 良敬公 諱 令臣의 후이다. 증조 휘는 大明이니 합문지후요, 조의 휘는 瑛이니 판도판서요, 고 휘는 士原이니 본조 직제학이다. 妣는 遂安郡夫人 金氏이니 찰방 履의 딸이다. 공을 낳아 봉제사를 이었다. 관이 수군절도사에 오르고, 세조조의 원종공신이다. 묘는 용주현의 동남 회룡산의 경좌원에 있다. 배 숙부인 거제 潘씨는 부위 潤의 딸이니 묘가 考位墓 위에 있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남의 맏은 壽延이니 部長이요, 다음은 壽仁이니 府使요, 다음은 壽堅이요, 딸은 張綱, 安石亨, 金慶昌이다. 壽延이 5남 3녀를 두었는데, 남의 맏은 克勤이니 경력이요, 다음은 克儉이니 부위요, 다음은 克恭이니 贈判決事요, 다음은 克謙이니 部長이요, 다음은 克良이니 同知요, 딸은 金銳, 金粹澣, 安子溫이다. 壽仁의 자는 克亨이니 奉事이다.
克勤의 자는 胤孫이니 校尉요, 증손 應斗는 참봉이요, 현손 三省은 護軍이다.
克儉의 자는 胤宗이니 주부요, 孫 興雲은 문과 贈都承旨요, 증손 仁繼는 문과 사예요, 9세손 裕는 문과 승지이다.
克恭의 자는 天祐이니 贈右尹이요, 손 尙顔은 문과 군수요, 증손 爾堅은 봉사요, 爾行은 통사랑이요, 현손 世章은 참봉이요, 6세손 命說은 호군이다.
克謙의 자는 胤元이니 참봉이요, 손 景福은 부정이요, 현손 是衡은 嘉義요, 是恒은 도사요, 6세손, 海翼은 증참판이요, 7세손 處大는 중추요, 11세손 述謙은 교관이다.
克良의 자는 胤緖요, 克亨의 자는 希允이니 참봉이오, 손 夢錫은 교위이다.
그 뒤의 제손들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후손 永贊이 쓰다.

상의 2년 무신(1908) 5월 일 후손 孝璋, 光謙, 泗林, 振海, 澓 등이 고쳐 세움.

뿅뿅 다리 주차장으로 이동해
고약회 어른 묘소에들러 호을
씨가 묘소 전경사진 묘비사진
실측사진을 찍은후 돌아갔다

태허 권성호친구의 (문경종고 광산과 동기동창-17회) 다음카페에서 복사하여 올립니다.

 

개성고씨 김사원 선생님의 차남이신 고약회 선생님의 묘역은 회룡포 뽕뽕 다리 입구 300미터 전 회룡산 동쪽 기슭에 있다. 도로에서 다시 개성고씨 문중 묘역을 지나 능선을 타고 5분만 오르면 고약회 선생님의 묘역에 도달한다. 고려시대 원나라 지배를 받던 시절에 축산 전원발 선생님은 원나라에서 큰 벼슬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고국에 거주하면서 원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절감하도록 노력하여 나라에 큰공을 새웠다. 따라서 조국인 고려에서는 당시 상주땅이던 이곳 영순면 오룡리 일대에 식읍을 하사 받았다. 따라서 용궁과 산양면 일대는 축산 선생님의 토지와 산이 대다수 였다. 이때 외손인 개성고씨 김사원 선생님에게 많은 산과 토지를 주니 명당이 대다수 였다. 지금의 영순면 오룡리 분토골은 명당중의 명당이다. 이곳에 전원발 선생님의 명당 묘지가 있고 개성고씨 김사원 선생님의 묘소가 이웃에 존재한다. 퇴산재 등 여러 유적이 존재한다. 이곳을 지나다보면 누가 보아도 명당인 분토골에 두 분의 묘소가 있다. 우리나라 유명한 풍수가들이 모두 다녀가고 찬사를 늘어 놓는 명당이다. 고사원 선생님은 두분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고약하이고 차남은 고약회이다. 두분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고려말 조선초 무신으로 지냈다. 오늘은 예천군 용궁면 회룡포 뽕뽕다리 500m 근방에 존재하는 고약회 선생님의 회룡포 마을 입구 뽕뽕 다리쪽의 묘소를 답사하여 찍은 사진을 올려 봅니다. 

 

회룡포 관광지 입구는 2곳인데 한곳은 향석리 성저마을  대교를 통과하고 오르는 비룡산 장안사 쪽 오르막이 있는 곳이고, 또 한곳은 뽕뽕다리 쪽 평지 도로인 이곳 대형주차장과 화장실, 회룡포 녹색마을 쪽에 있다. 뽕뽕 다리를 건너면 1박2일 촬영한 마을인 회룡포 마을과 식당, 카폐가 존재한다. 마을을 지나 또 다리를 건너면 삼강주막가는 등산길이 존재한다. 

녹색마을에는 대형주차장이 2곳이다.

 

 

회룡포 녹색마을 대형 간판 도로 건너서 서쪽 산으로 진입하면 개성고씨 문중묘가 존재한다.

 

주차장이나 녹색마을 간판에서 보면 서쪽 산에 수 많은 묘지와 비석들이 존재하여 명당터 임을 볼 수 있다.

 

잘 벌초되어 있는 개성고씨 문중 묘지-이곳을 구경하면서 무심하게 지나 다녔다. 

개성 고씨 문중묘에서 3분 정도 능선을 타고 오르니 김사원 선생님의 차남 고약회 선생님의 묘역이다.

 

통정대부 수군 절도사 개성고 공 약회 지묘-숙부인 거제반씨 묘(고려말-조선시대 세종)

 

 

 

 

이곳 회룡산 동쪽 기슭 역시 명당임을 알 수 있다.

 

도로에서 본 회룡산과 우측 능선 묘역

 

이곳은 회룡포 전망대를 가는 등산로인데 2키로 미터가면 장안사와 비룡산 전망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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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고약회 선생님의 아버지인 김사원 선생님의 묘소를 소개합니다.

 

문경시 영순면 오룡리 434-1 분토골 분토마을 뒤에 위치한 고사원 선생님의 묘지를 소개합니다.  묘소 아래는 퇴산재 재실과 사현재가 있고 묘역 우측엔 축산 전원발 선생님의 묘지가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명당이다. 

 

* 조선시대 관리 고약해 선생님( 고약해 어원이 되신 관리)

고약해 선생님 자료 

[  ]

이칭별칭유형시대출생 - 사망성격성별본관대표관직(경력)
 순평(), 시호 정혜()
인물
조선
1377년(우왕 3) ~ 1443년(세종 25)
문신
개성
형조참판, 개성부유수

정의

조선전기 형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개성(). 자는 순평().

생애 및 활동사항

1393년(태조 2) 성균시()에 합격하였고, 태종 초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가례()』를 준수한 일과 어머니에의 효행으로 사간원의 천거를 받아 공안부주부(簿)에 제수되었다.

1418년(태종 18) 형조정랑으로 있을 때 무녀() 치죄에 대한 잘못으로 외방에 부처(), 세종 초에 복직되었다. 그뒤 장령·경창부소윤()을 거쳐 예조참의·이조참의·충청도관찰사·한성부윤·형조참판·대사헌을 지냈다.

1434년(세종 16) 장령 민신()과의 상핵사건()으로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황주목사·인수부윤()·형조참판을 지냈다. 1442년 개성부유수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혜()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세종실록(世宗實錄)』

조선시대 세종임금때 고약해 선생님은 임금에게 바른소리를 많이하여 세종임금이 다른신하 들에게 마음에 안들면 고약해 같다고 빗대어 오늘날 고약해, 고약하다의 어원이 되었다.  후궁 안탁갑이 왕후 청송 심씨의 미움을 받아 궁궐에서 쫓겨 날때 세종임금이 매일 저녁 후궁 안타갑을 불러대며 안타깝을 찾아서 오늘날  "안타깝다" 라는 말의 어원이 된 것도 이때다. 

 

고약해와 세종 - 고약해 어원과 세종실록의 일화

[고약해와 세종 - 고약해 어원과 세종실록의 일화] 

세종실록에 보면 실제로 고약해라는 신하가 나오는데, 세종과 고약해의 관계는 정말로 고약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한편,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고약해의 어원도 그 신하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진짜로 어원이 그런지, 또 얼마나 고얀 사람이었는지 기록들을 살퍼봅니다.

 

세종과 고약해 어원설은 진짜? 

 

유교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왕에게도 성질을 내는 신하가 있었다면 누가 믿을까요? 하지만 실제로 그런 신하가 있었습니다. 조선 세종 때 '고약해'라는 사람은 임금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마음에 안 들면 휙 하고 나가버리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약해의 어원이 이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 왕에게 대든다는 상황은 생각도 못해봤을 얘기다.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KBS)

 

세종은 말 그대로 성군이었는지라, 신하들에게 격의 없이 토론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물의를 일으킨 신하들이 있었으니 바로 '허조'와 고약해입니다. 세종 때 고약해는 실존인물이며 형조참판과 대사헌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태종 때 유교 예법을 잘 지키고 효행이 높다 하여 사간원에서 추천하여 벼슬에 올랐고, 태종 때 이미 형조정랑, 한성부윤 등을 거쳤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한 형조참판 고약해.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KBS)

 

세종 즉위 이전부터 벼슬을 하였고 성격까지 겁이 없어서 고약해는 세종 감히 노려보기도 했고 어명에 대꾸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고약해을 '대사헌'에 등용하였습니다. 현재의 검찰총장의 지위인데, 고약해의 직언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간언"을 막지 않고 들었던 세종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감히 세종에게 고약해가 대들다 

 

세종실록을 찾아보면, 첫 번째 세종과 고약해의 충돌은 세종 7년의 일입니다. 세종이 격구(말을 타고 막대기로 공을 넣는 놀이)를 좋아하자 이를 폐지하자고 다섯 번이나 끈질기게 청을 올렸던 것입니다. 전쟁에도 도움이 안 되는 놀이라는 고약해의 간언에 세종은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는 변명을 해야 했습니다. 이에 '김자'도 전조에 음란한 풍습이었다고 고약해를 거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오대산사고.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strykr)

 

또한 세종 9년 기사를 보면, '수륙재'에 밀초를 쓰는지에 대해서도 세종의 어명을 반대하며 "어찌 구구하게 논의하냐"는 말투로 공격을 했습니다. '수령육기제' 논쟁 때는 감히 "소인"이라는 말도 썼습니다. 임금에게는 "소신"이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논쟁에서 소인을 고집한 것은 자신을 더 낮춰서 왕까지 낮추는 예의 없는 언행이었습니다. 

 

(세종대왕과 고약해의 일화를 재현하는 TV프로그램.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JTBC)

 

수령육기제는 지방 관리의 임기가 짧아서 늘리자고 하는 논의였는데 이 날 세종을 고약해에게 거의 말싸움에 가까운 반항이 받았습니다. 당시 호조참판이었던 고약해는 언성을 높여서 자신이라도 간언 하지 않으면 누가 임금을 말리겠냐며 따졌습니다. 이에 세종도 언성을 높여서 이기려고 하였는데, 고약해는 세종의 말을 끊고 끼어들어서 자기 말을 해 버렸습니다. 

 

(세종의 입장에서도 매우 황당했을 상황이었다.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JTBC)

 

세종의 입장에서도 황당했을 것입니다. 유교국가에서 모든 신하가 다 보는 중에 대드는 광경이니 말입니다. 그러자 세종도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감히 말하는가!"하고 억누르려고 했습니다. 고약해도 성질이 단단히 났는지 자릴 박차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임금에게 "실망했습니다"라고 말해 버렸던 것입니다. 

 

(조선은 어느 왕조보다도 왕권 강화에 노력을 기울였던 국가였다.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이응준)

 

세종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일단 화를 가라앉히고 "알아들었으니 자리에 앉으라"라고 사태를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왕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서 끊어버리고 성질을 내며 벌떡 나가려는 행동은 다른 임금 같았으면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었습니다. 세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의외의 상황이 오히려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고약해 어원은 민간 속설일 뿐 

 

이 날은 세종도 단단히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는 다들 물러난 후에 도승지를 불러서 화풀이를 했습니다. 세종은 고약해가 잘못한 것들과 효령대군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까지도 말하면서 흠담을 했습니다. 도승지도 열 받은 세종의 마음이 헤아려졌는지 탄핵을 시행하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세종도 쑥스러웠는지 효령대군에게서 들었다는 말들은 비밀로 하자고 했습니다. 

 

(세종이 언론을 막지 않은 것은 바른 공론문화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MBC)

 

그런데 다음 날 신하들의 반응은 세종의 길을 막았습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을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온 것입니다. 일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말을 잘 못했다고 벌을 준다면 누가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하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세종과 신하들이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세종이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군 세종은 자유로운 언론을 보장했으나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MBC)

 

그러나 세종이 친히 보살펴서 고약해를 감싼 것도 여러 번입니다. 의금부에서 김복항 사건에 얽혀 고약해의 죄를 청하였으니 세종은 논죄하지 말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세종과 고약해의 일화를 보면서 느껴야 할 것은, 신하가 불경하더라도 공론은 살아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신념입니다. 고약해가 고약하다의 어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지만 세종도 최대한 참았기에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세종실록을 찾아보면 실제로 고약해에 대한 일화들이 나온다.(사진은 예일 뿐임)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Unknown)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고약해의 어원이 고약해라는 것은 고증된 바가 없다. [고약해, 세종 - 고약해 어원] / ⓒ Unknown)

 

마지막으로... 세종과 고약해의 일화 때문에 "고약해"의 어원이 이 신하 때문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오해로 보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실인 것처럼 이런 고약해 어원설이 떠돌았지만, 국어학적으로 그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고약의 어원이 "괴악하다"라고도 하지만 이 역시도 정확한 사료로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도 고약하다의 어원은 찾지 못했다고 하니, 그저 민간 속설 정도로 생각해야겠습니다. 

 

 

출처: https://kiss7.tistory.com/1014 [키스세븐:티스토리]

 

고약해라는 분의  개인 자료는 부족하여 키스세본 : 디스토리에서 복사하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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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고씨와 인척관계인 국파 선생님에 대한 글을  2020년도 1월에 본 등산기에 올린 바 있어 다시 올려봅니다.

 

* 국파 전원발 선생님에 대한 고찰 

 

문경 영순면 달지리와 삼강마을 - 회룡포를 답사하면서 주변 관광지를 돌아보는 기회가 많았다. 그때마다 전원발 선생님의 명당 묘역과 생가터, 그분에 관한 유명 유적지인 청원정, 선생님을 배향한 소천서원 등의 명승지를 답사했다. 고려말 조선초 문신이자 서예가인 국파선생에 대한 여러자료를 초록하여 서술해보기로 합니다.

 

 

 

 

 

전원발 선생님이 태어난 곳은 과거에는 축산-원산-용주-용궁으로 이름이 변했다. 과거에는 용궁도 상주땅이었으며 근래에 와서는 용궁의 달지리도 문경땅으로 변했다. 따라서 전원발 선생님이 태어날 당시는 상주땅이고 용궁은 근래는 예천이었으며 달지는 현재는 문경 땅이었으므로 상주-문경-예천에 모두 관련된 인물이다. 다만 관할지 변경으로 고향이 이리저리 바뀐 셈이다. 

 

* 전원발 선생님 출생과 사망

역사 자료에 의하면 1288년 출생-1421년 사망인데 이사실이 맞다면 133세를 살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청나라에 254세 산 사람도 있지만 당시 상황으로 볼때 생몰 연대는 조금 부적합하다. 따라서 어떤 자료에는 생몰 연대 미상이라 기술하고 있다. 1315년에 원나라에 가서 장원으로 급제한것은 맞다. 원나라에서 병부상서 역임한 것을 추적하면  1288년 태생은 맞은듯 하다. 생가터는 아직 답사하지 못해 사진은 추후 올립니다. 문경사랑의 사진과 글을 우선 올립니다.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선생 기념관이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삼강나루터 입구 선생의 생가터에 마련됐다. 생가를 상상케하는 작은 기념관은 국파 선생 연구위원회에서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애국애족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건물을 마련하고 2009년 12월 18일 오후 2시 개관식을 가졌다. 개관식에서 전경수 한국마약범죄학회 회장은 경과보고와 개회사에서 “국파 전원발 선생은 고려 때 관리로 38년간 원나라에서 볼모 아닌 볼모로 재임을 하면서 고려가 원나라에 바쳐야 하는 금, 은, 명주, 말 등 조공을 삭감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셨다”며 국가를 위해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국파 선생(1288~미상)은 고려 공민왕 3년(1354년), 원나라가 망하고 귀국했을 때 원나라에 조공을 감면케 한 공로로 축산부원군에 봉군되고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소천강 일대를 하사받아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전원발 선생님 출생지

 출생당시는 상주땅이었다. 지금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삼강나루터 입구에 그의 생가터를 발굴했고 전원발 역사관이 새워져 있어 당시 많은 유명인사가 다녀간 자리다. 당시 시장군수 유명인사 등이 참석하고  박찬종 변호사도 참석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예천, 문경의 유명인이 많이 참석해다고 한다.

 

* 전원발 선생의 정치 생활과 말년에 귀향한 생활 조명

국파 선생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원나라가 지배하여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다. 너무 과중하여 나라가 위태로웠다. 흉년이 들면 조공을 바치지 못하자 원나라 관리들은 우리나라의 처녀들과 어린 청년들을 조공대신 잡아갔으며 처녀들은 궁에서 시녀노릇을 했고, 결혼 못한 병사와 강제결혼시켰다. 이때 견디지 못한 여자들은 고국으로 천리길을 물어물어  추위와 기아를 견뎌내며 고향에 왔지만 화냥녀라고 취급했고 억지로 참은 여자 중 기황후는 황제의 부인인 황후가 되기도 했다. 행주에서 출생한 기황후는 고려말 행주기씨를 흥하게 한 공녀출신 황후이다. 남자들은 끌려가서 노동이나 힘든일을 하고 미소년은 거세당하여 궁중일을 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를 뼈아프게 한다. 이때 전원발 선생도 하급관리로 끌려가서 적응하며 다행히 원나라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에 오르는 쾌거를 이룬 성공적인 인물이다. 1315년에 과거 장원급제한 사실은 유명하며 신라때 최치원이 당나라에가서 과거급제한 사실에 비해 손색이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국파선생은 원나라 병부상서에 올라 큰 관리가 되었으나 원나라가 망하고 난뒤 귀국하여 이곳 고향에 돌아와 무이리에 청원정을 짖고 말년을 유유자적 했다. 당시 유명한 홍건적을 물리친 김득배 장군과 이제현 등과 교유했다.

38년간 원나라에서 관리로 생활했으며 귀국시 황제에게 고려의 조공을 탐감하도록 건의하여 성공했고 조선이 개국하고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의 조공은 나라의 재정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공민왕은 국파선생에게 축산부원군의 벼슬을 내리고 청원정 일대의 토지를 식읍으로 주었다. 이때 유유자적하며 지친새라는 한시도 짓고하여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 전원발 선생님의 사망과 묘역

  전원발 선생님은 조선초에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며 이곳 무이리 청원정을 짓고 편하 생활을 하다가 1421년 사망하였다. 영순면 오룡리가 명당이라 그곳에 유택을 정했고 그 자손 3형제 전강, 전근, 전경이 오룡리 마을 뒤산에 안장했다. 풍수지리학회에서는 이곳이 명당이라고 많은 풍수가들이 찾아오고 있다. 산양-삼강주막가는 도로 옆에 오룡리가 있고 좁은 농로를 500미터 올라가면 마을이 있으며 마을 끝에 큰 주자장과 묘역이 존재한다. 옆에는 개성고씨 묘역도 자라하는데 며칠전 묘지에서 앞을 바라보니 달봉산과 주변산이 좌청룡-우백호 형상으로 보인다. 묘지도 마을뒤 평지나 다름없는 안쪽이고 앞의산들도 200미터 높이의 야산이다. 마을 끝에 넓은 주차장이 존재하여 묘역을 쉽게 방문 할 수 있다. 후손은 3형제로 전강, 전근, 전경 3형제 아들을 두었으며 3명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조선에 이런집안이 몇명 있을까? 대단합니다.

 

 

  오룡리 마을 안쪽에 주차장도 있고 재실이 있어 차로 답사하기 좋은 명당이다.

 

 

 

* 전원발 선생님 유적

달지리의 작은 역사관은 현재 초라하지만 용궁면 무이리에 있는 청원정과 바로옆에 있는 소천서원은 역사적인 유적이다. 청원정은 새로 건설되었지만 산양구곡 중 마지막 9곡 정자이다. 금천강변의 바위는 멋지고 바위에 청원정 글씨는 무척 고풍스러워 서예가들이 많이 답사하는곳이다. 보은 법주사에도 전선생님의 글씨가 남아있다. 법주사를 답사하면 스님들에게 문의하여 글씨를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소천서원은 청원정 바로옆에 존재하며 대원군 시절에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국파선생님만 배향하는 서원이다. 예천 용궁면에서 금천리 입구에 안내판을 새웠다고 한다. 위의지도를 참조바랍니다. 지친새라는 국파 선생님의 시는 김득배 선생님의 운을 따라 지은 시로 유명하다. 용궁전씨(축산전씨라고도함)의 후손들이 청원정 옆에 많은 비석과 유적을 마련하여 조상의 업적을  빛내고 있다.

 

 

 

 들머리 : 입구- 무이리 마을회관 앞 추월정 지나 마을 관통하여 금남리  용궁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도되고, 반대로 용궁면소에서 금남리로 가다가 느티나무에서 좌측으로 가도됩니다. 

 

 용궁향교 앞 입구에서 아래와 같은 이정표를 보고 가도된다. 무이서당 구경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삼강가는 도로따라가다가 우측동네로 들어가면 추월정도 나타남. 무이리에 존재하지만 좀 찾기가 거북한 것은 사실입니다.

 

 

 

금천 옆 청원정 - 산양구곡중 제9곡 정자

 

 

  문이 잠겨 담장 밖에서 촬영해 봅니다.

                          청원정 뒤 바위  김구정 선생님의 글씨 (1338-1384)

 

아래사진 부터는 바로 옆에 존재하는 소천서원

소천서원을 옆 담벼락에서 찍은사진

 

 

제목 -- 지친새   :  국파선생님이 김득배 선생님의 운을 따서 지은 시입니다.

 

江闊脩鱗縱

(강활수린종)

林深倦鳥歸

(임심권조귀)

歸田是吾志

(귀전시오지)

非是早知機

(비시조지기)

강 넓어 큰 고기 마음껏 놀고

숲 깊어 지친 새 돌아오누나

전원으로 돌아옴은 내 뜻이지만

진즉에 기미 앎은 아니었다네

脩鱗: 큰 고기

倦鳥:지친 새

知機:기미를 알다

[출처] 지친 새 [전원발]|작성자 난초

 

 

전원발

[  ]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다. 1315년 원나라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원나라에서 영록대부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 등을 지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초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출생-사망본관호국적활동분야
? ~ 1421
용궁()
국파()
한국
정치

본관은 용궁()이고, 호는 국파()이다. 민부전서() 진()의 아들이다. 1315년(충숙왕 2) 원나라에서 고려인 인재를 뽑는 괴과()에 장원급제하여 영록대부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殿)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자주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나라는 작은데 세공()의 폐가 많습니다’라고 말하여 세공으로 인한 고려의 부담을 덜도록 노력하였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도, 당시의 황제인 순제()가 소원을 묻자, ‘다만 고려에서 거두는 공물()을 대폭 삭감해 주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공물의 특감()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김득배()·이제현()·김구용()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유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비()의 글씨가 남아 있다. 용궁의 소천서원()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원발 [全元發] (두산백과)

 

 

전원발

[  ]

이칭별칭유형시대출생 - 사망성격성별본관저서(작품)대표관직(경력)
호 국파()
인물
고려
미상 ~ 미상
관리, 문신
용궁(, 경상북도 예천)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
원 병부상서, 축산부원군()

정의

고려후기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 축산부원군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개설

본관은 용궁(). 호는 국파(). 전법총랑() 전충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총랑() 전대년()이며, 아버지는 응양군 민부전서() 전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영록대부(祿)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용궁의 소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작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가 있다. 아들에 사복판사() 전한()이 있으며, 손자 전강()·전근()·전경()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벼슬)으로서 현달(: 높은 지위에 오름.)하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백씨통보(百氏通譜)』

  • [네이버 지식백과] 전원발 [全元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다음은 전선생님 후손의 글을 올려봅니다.


원나라가 고려 조정에 모든일에 사사건건 간섭한 때는 칭기즈칸이 유럽과 러시아,동서아시아,중앙아시아 거의 세계를 지배하고 4대에 걸쳐 5대인 쿠빌라이 칸에 의해서 더더욱 전성기를 맞이하는 몽고시대때인데, 쿠빌라이 칸이 군사력을 증강시켜서 고려를 7차 침입까지 하였으나 막아냈다 .그런데 그때 더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자 고려 정권을 잡고 있던 최우와 고종이 강화도로 피신하자, 더 침입하고 끝내 고려가 원나라의 사위 나라가 되서 일을 사사건건 간섭 당하였다. 쿠빌라이 칸(황제)은 13만의 원나라 군과 고려 1만군을 억지로 동원하여  14만군으로 왜나라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태풍 때문에 실패 하였다 .원나라는 고려의 미인,어린아이들도 데려가고 고려의 왕족들까지 데려가서 원나라의 풍습을 배우게 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는 등 횡포가 극심했다.

수해나 한해로 고려국가  조공을 미쳐 내지못하면 젊은 청년을 잡아다가  거세 시켜 내시로 잡아가고, 부녀자를 공녀로 삼는등 인간 공물을 요구 하기도 했다.  고려와 원나라 관계는  약소국과 강대국간의 불안전 한 힘의 균형이었디. 더더욱  홍건적이 수시로 고려를 공격하기 때문에 원나라의 우화 관계를 위해서는  조공은 어쩔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러한  선상에서 경상북도 문경 예천 출신이 국파 전원발 선생이 원나라에 파견되어 조공을 깍는 일을 했다. (홍건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 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중심이 된 한족(漢族) 반란군)

 


* 국파 전원발 선생 기념관 개관식 축하해 주신분에게 감사 의 메시지

2009.12.18 오후2시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국파 전원발 선생 생가터에서 개최된 향토문화관 국파 전원발 선셍 기념관 개관식에 축하 화환을 보내주신,  민주당 정균환 대표(국회의원)님, 임태희 노동부 장관님, 한나라당 국회의원 조운환 의원님, 국민연금 공단 관리공단 전광우(국파 전원발 선생 후손) 이사장님 ,경찰발전협의희, 대한민국무궁화클럽. 한국사이버시민마약감시단 전북지역감시단, 문경 예천 새농민 단체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날 행사에 영하의 추운날씨에도 불구하시고, 기꺼히 참석하시여 사회를 봐주신 대한민국무궁화클럽 노철환 대변인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 올바른 사람들의 모임 대표  박찬종 변호사님, 한국마약범죄학회 고문 전,국회의원 엄호성 변호사,문경시청 관계자. 문경시 영순면장 , 예천군청 문화관광과장 님,문경문화원 채대진 원장님,지역주민등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조상의 업적과 정신 문화를 잊지않고  전국 경향각지에서 오신 전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 전상근 실장님 , 대한불교 총화종 종무원장 전남정 스님을 비롯하여  국파선생의  후손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고려 시대 경상북도 문경.예천에서 태어나 18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볼모아닌, 볼모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38년간 조공을 삭감시켜 세공으로 부터 피폐한 국민을 보호한 국파 전원발 선생의  애국 애족 정신을 영원히 보존하고 전파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화환을 보내주시고 뜻을 함깨해 주신 분께 그듭 감사드립니다. 저물어 가는 한해 나쁜것은 다보내고,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향토문화관 국파 전원발 선생 기념관 
                           관장 전경수 올림


* 전원발(全元發) 선생님 - 네이브 검색자료 초록

  여말 선초, 용궁면 무이2리 소천(蘇川) 사람, 호는 국파(菊坡), 본관은 용궁(竺山), 용성부원군 방숙(龍城府院君邦淑)의 5세손, 전법총랑 충경(典法摠郞忠儆)의 증손, 판도총랑 대년(版圖摠郞大年)의 손자, 민부전서 진(民部典書璡)의 아들,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1315년(충숙왕 2)에 원 나라가 고려인 인재를 뽑는 괴과(魁科)에 장원 급제(壯元及弟)하여 원 나라에서 영록대부 병부상서 겸 집현전 태학사(榮錄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올랐는데, 자주 입시(入侍)하여 황제에게 아뢰기를, "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나라는 작은데 세공(歲貢)의 폐가 많습니다."라고, 고려의 실정을 들어 여러 차례 세공의 폐됨을 원 나라 조정(朝廷)에 알렸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귀국할 때 원 나라 순제(順帝)가 이르기를, "소원을 말하라."라고 하자, "다만 고려에서 거두는 공물(貢物)을 대폭 삭감해 주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공물의 특감(特減)을 허락받아 조선 개국 후에도 명(明) 나라까지 이 예에 따라 공물을 받았다 하니, 그의 사심(私心) 없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정녕코 본받을 만하다. 이때 원 황제(元皇帝)는 공복(公服) 1벌을 하사하여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래서 후손이 용궁(龍宮), 또는 축산(竺山)을 본관으로 쓰고 있다. 소천(蘇川)에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난계 김득배(蘭溪金得培), 익재 이제현(益齋李齊賢), 척약재 김구용(척若齋金九容)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글씨에 뛰어나서 그의 글씨는 중국 원(元) 나라에도 알려졌고, 법주사 자정국존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 李叔琪撰)를 해서(楷書)로 썼다. 그의 필치(筆致)는 송설체(松雪體)도 아니고, 고려 재래의 서풍도 아니나 범속(凡俗)치 않았다. 용궁면 향석리에 이성 기단(二成基壇)의 삼층석탑(三層石塔)과 미륵불(彌勒佛)을 제작하여 세웠다. 왜냐하면 이 곳에 신라시대 축산군(竺山郡)을 처음 설립할 때 용(龍)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 징조(徵兆)가 있어 부락민(部落民)들이 서로 싸워 살인 사건이 자주 일어나므로 탑과 미륵을 세웠다. 그래서 평화를 소원하니 부근 주민들의 질병과 잉태(孕胎)까지도 부처님의 덕을 많이 입게 되었다고 한다. 소천(蘇川, 省火川)의 맑은 물이 물굽이치는 강 동안(東岸) 첩첩한 곳에 세워진 청원정(淸遠亭)이 그의 것이고, 이 정자의 바로 옆에 있는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고, 묘는 문경시 영순면 오룡동 분퇴동 사현산 병향 임좌(聞慶市永順面五龍洞分退洞沙峴山丙向壬坐)에 있는데, 1803년(순종 3)에 입재 정종로(立齋鄭宗魯)가 찬갈(撰碣)하였고, 용산 이만인(龍山李晩寅)이 신도비(神道碑)를 찬하였다. 실기(實記) 1권이 있다. 소천(蘇川)에 있을 때 난계 김득배(蘭溪金得培)가 증시(贈詩)하기를, "강물이 넓으니 물고기가 자유롭고, 숲이 깊으니 지친 새가 돌아온다. 전원(田園)에 돌아옴만이 나의 뜻이요, 부귀의 위태로운 기미를 일찍 안 건 아니어라(江闊修鱗縱 林深倦鳥歸 歸田乃吾志 非是蠶知機)"라고 하였다. 후손들은 이조 때부터 용궁면 가야리가 중심이 되어 용궁현(龍宮縣)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東文選 19卷(五言絶句), 大東韻府群玉, 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龍宮縣邑誌, 竺山勝覽 1934, 朝鮮寰輿勝覽 1929, 醴泉郡誌 1939, 族譜, 韓國人名辭典, 韓國藝術總覽 167쪽, 韓國書藝史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