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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등 좋은글

익양공 이천 선생님 (보은군 장안면 오창리)

문장대 2021. 4. 1. 03:48

조선왕조 500년 연속극과, 역사소설 왕비열전, KBS대하드라마 장영실에 익양공 이천 선생님이 등장하고 소개되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천 선생님이 사시던 보은은  상주와 문경, 안동에  가까워 더욱 관심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원래 안동 예안에 선조들이 살았으나 선조 한분이 이곳 충북 보은 장안면 오창으로 이사와 여기를 고향으로 둔 분이다. 같은 시대에 살던 장영실은 서민 출신이지만 이천선생님은 문벌있는 양반 집안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많은 벼슬을 하면서도 세종임금에게 사랑을 받아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아 가셔서 우리나라의 보기드문 인재이다. 가끔 역사적인 위인 전기에 이천선생님이 소개되는 책이있다. 연속극 장영실의 15회차가 몇년전에 방영되며 이천 선생님의 고향이 충북 보은군 장안면 오창리라고 소개되어 당시 집사람과 집을 출발하여  화령 관기를 거쳐  길상리, 오창리를 헤매고 다닌적이 있다. 그때 말티고개 갈림길 5키로전 픈파크 전 25번 국도 옆인 줄도 모르고 장재리까지 돌아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상주에서 버스타고 국도로 가다보면 속리산 나들목에서 5키로 보은쪽으로 가면 우측에 추원각 등이 보인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보은, 청주 일대의 등산을 하면서  자주 지나니 이젠 이천 선생님의 유적지가 눈에선하다. 유적지 위치 사진을 올려봅니다.이천(1376-1451)은 조선시대 최고 과학자가 아니라. 15세기 세계 최고의 과학자였다. 천재 천문학자 이순지, 제작기술이 뛰어난 장영실 등을 지휘하며 이룬 업적이었다.

 

<이천(李蕆)>1376년 (우왕 2년)에 출생하여  1451년 (문종 1년) 사망하였다.세종 시대 뛰어난 무장이자 과학자로서 평생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이천은 남방의 대마도 정벌과 북방의 야인 정벌 등에 공을 세웠으며,금속활자와 천문기구 제작의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화약무기 개발, 악기 개량, 도량형 표준화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멀티 플레이어였다. 세종은 당시 자신이 기획한 과학기술프로젝트의 총감독으로써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그는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장영실이나 이순지, 김담, 정인지, 정흠지 등 개인적으로 최고의 역량을 갖춘 전문가들을 한데 모은 다음, 이천이란 인물을 중심에 세웠다. 이런 세종의 기대에 부응하여 이천은 천문기기의 실제 제작과 개발을 담당한 장영실의 패스를 이어받아 이론 천문학자인 이순지나 정인지 등 스트라이커들에게 정확하게 어시스트해주어 ≪칠정산내외편≫이라는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을 개발하고 농업의 과학화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이천의 활약상은 천민 출신이었던 장영실과 달리실록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신분이 당당한 양반이었기 때문이다.(할미꽃 당신 카폐 -골드님 글 )

 

세종 때는 조선의 르네상스시대였다. 그 중심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천이 우뚝 서있었다. 공은 과학자로 조선(造船)의 갑조법 금속활자 갑인자 우주시계 혼천의 앙부일구 무신으로 왜구의 대마도 정벌과 노익장으로 북벌을 지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4군과 6진을 설치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토를 넓혔다.조선의 천재과학자 익양공 이천(李蕆) 선생님의 업적 - 여진족 정벌, 사군육진 개척, 인쇄술 발전을 위한 활자 발견, 천문기구 제작 지휘 한 무신이자 과학자이다. (시인 e작가 키페글 일부-대전 노은동 거주)

 

이천 선생님의 벼슬을 망라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의이씨와 예안이씨는 분파되었다가 다시 합파됨.

전의 이씨의 시조는 고려개국공신 이도 이며 8세손  후손 중 언충, 정간, 혼의 3자손이 번성하여 3대 계파를 만들었다. 그 중 문장공 혼은 고려 충선왕시절 첨의정승을 역임했다. 문정공 혼의 손자 익은 예안이씨로 분파하였다가 근래 다시 합파했다. 전의이씨는 세종때 임금이 정간의 집에 행차하여 어필을 내렸는데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의 8자를 가훈으로 삼고있다. 전의 이씨는 문과 급제178명, 상신7명,대제학2명, 청백리8명, 공신8명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전의이씨나 예안이씨는 같은 성씨이다. 세종때 이천은 시조 도의 12대손이며 문장공 혼의  5대손이며 시호가 익양입니다. 조선초 1402년 무과급제, 1410년에는 무과중시에 장원급제한 분이다. 이후 우군첨절제사, 경상,충청 병마절도사, 공조참판, 병조, 호조판서, 지충추원사, 판충추원사의 고위직을 역임한 충신이며 대당군, 과학자이다. 모든 분들의 선조중 이만한 벼슬을 한분이 또 있을까요! 우군첨절제사로 재직시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았고, 충청 병마절도사 시절에는 병선과 화포를 만들어 외국의 침입에 대비하고 국방력을 강화했다. 따라서 육군사관학교 실험실습장 이름이 익양관이 된것은 이천선생님의 탁월한 과학정신능력을 따른것이다.  청동금속활자를 만들고 서운관에서 과학기구를 연구하며 물시계를 만들었다. 앙부일구 정남일구, 천평일구 현주일구는 물시계 종류이다. 과학을 중시하지 않던 조선시대에 이천 선생님은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고 과학을 크게 일으켰다. 이때 장영실과 같이 과학정신을 발휘했다. 장영실은 서민이며 흙수저 출신이지만 이천선생은 양반가문에 테어난 금수저 출신인데도 과학에 몰두한 과학 선구자이다. 따라서 왕조실록에 이천의 기록이 많은 것은 양반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석정님의 불로그를 참고하여 작성)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여러 인물들을 생각해볼때 이천 선생님 같은 인물이 몇명이나 있을까 다시 생각해본다. 세종당시는 평화시절이어서 국난이 없었지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큰 전쟁이 있었다면 이천선생님은 무장으로서 충무공 이순신 이상으로 활약했으리라! 

상주에서 25번 국도를 가다가 화령-관기-속리산 나들목입구 조금 지나면 말티재 갈림길 가기전 우측에  말끔히 단청이된 추원각, 유서각, 도로옆에 하마비가 보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