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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의 인물 구수복 선생님

문장대 2021. 3. 22. 19:24

◎ 상주의 인물 구수복 선생님

 

* 종의 모함에 쫓겨난 구수복 -謀陷-具壽福

구수복(具壽福:1491[성종22]~1535[중종3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1519년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의 한 사람이다. 증조부는 집의(執義) 구강(具綱), 조부는 병조참의 구신충(具信忠)이며, 아버지는 생원(生員) 구이(具頤), 어머니는 덕수 이씨(德水李氏)다. 자는 백응(伯凝), 정지(挺之)이고, 호는 병암(屛菴), 수재(睡齋)이다. 본관은 능성(綾城: 전남 화순군 능주면의 옛 지명)이다. 형제가 함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충암(冲菴) 김정(金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4남 1녀 중 2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네 살 되던 해 4월과 8월에 잇달아 부모가 별세하여 어린 동생들과 함께 외가에서 지냈다. 1510년(중종 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16년에는 다시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었다가 한림에 올랐으며, 승정원 주서, 부수찬(副修撰), 정언(正言), 수찬(修撰), 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상주의 인물’ 제6권, 상주문화원)

 

사화(己卯士禍,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己卯名賢으로 부름)가 일어나기 전 저녁에 이조에서 숙직하였는데, 밤 2경(밤 9시~11시)에 정원(承政院)에서 급히 부르므로 달려가 문 서쪽 틈으로 경연청에 이르니, 대간, 홍문관, 승지, 주서, 한림을 모두 갈아치우고 승전(承傳:임금의 뜻을 전하는 것)을 받도록 독촉하는 것이었다. 공은 사건의 단서를 알 수 없어 승정원 관리에게 물으니, 승정원 관리도 또한 모른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남곤(南袞)과 이장곤(李長坤)에게 고하기를, “대간, 시종과 사필(史筆) 잡은 자를 일시에 다 갈아서 조정의 이목이 없어졌으니, 한밤중의 이 일이 장차 묻혀 없어져 이름을 적을 수 없습니다. 사유를 자세히 들은 다음에 적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영상 정광필(鄭光弼)이 소명을 받들고 바쁘게 입궐하므로 공이 나아가 묻기를, “뜻밖에 이런 큰 변을 만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또 들은즉, 이자(李耔) 등이 모두 금부에 하옥되었다 합니다. 변이 일어난 연유를 모르고 어찌 차마 승전(承傳)에다가 이름을 적겠습니까.” 하니, 영상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사세를 보아서 하리라.” 하였다. 승지가 두세 번 사람을 보내 묻기를, “이름을 적지 않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직무를 폐각(廢却:내버려서 물리치는 것)했다는 것으로 입계하겠다.…계달(啓達:신하가 글로 임금에게 아뢰다)하여 죄를 다스리겠다.” 하였다. 영상이 말리면서 “지금 임금께서는 심히 노하여, 만약 아뢰면 나이 젊은 낭관(郞官)이 반드시 큰 죄를 입을 것이다.” 하여, 드디어 계하지 않았는데, 그 후임자를 탄핵하여 파직하였다.

 

공은 짧은 지팡이와 짚신으로 이름난 산과 경치 좋은 지역을 편답하였는데, 속리산의 훌륭한 경치를 가장 사랑하였고, 숲 속과 샘가에서 시를 읊조리면서 즐기느라 돌아갈 줄 몰랐다. 김태암(金兌岩)이 사는 시골에 의지해 머물다가 그대로 집을 정했다. 계사년에 조정에서 경이 오랫동안 내쳐져 있었다 하여 의논하여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제수하였는데, 을미년에 관아에서 죽었다.(己卯錄補遺) 사화 초기에 그의 용출하는 의기로 심정(沈貞)과 남곤 등 훈구파의 간교한 음모를 좌절시켜, 조광조와 김정 등 제현의 당장 참형(斬刑)을 면하게 한 일로, 후에 대간이 치죄를 청하자, 이에 1519년 12월 15일에 군직(軍職)에 제수되었다가, 이후 다시 윤구(尹衢)의 옥사에 연계(連繫)되어 주서(注書)로 있었다는 것 때문에 1520년(중종 15) 3월 20일에 파직 하옥되었다가 동생 구수담의 상소로 방면되었다. 병암 공은 방면되자마자 한양을 떠나 정처 없이 내려온 곳이 경상도 상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한 5년을 지내자, 장인 이수(李穗)가 사위를 딱하게 여겨서 보은에 있는 자기 농막에 가서 살도록 하자 늘 봉계(鳳谿)에 두고 온 동생 생각이 나 가까운 보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얼마 후, 농막의 하인들이 싫어하여 중상을 하는 말을 들은 장인이 쫓아내어, 한겨울에 비참한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는데 호걸남자 한 사람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묻기에 그 연유를 말했더니, 그 호걸남자가 눈[雪]밭에 털요를 펴고 마주 앉아 꿩고기로 안주를 하여 술을 하기를 친한 사이같이 하고, 곧장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가 가옥과 전답 수십 경을 주어 공이 부인과 딸들이 함께 모여 살도록 하고 날마다 만나서 즐겁게 지냈다. 이 호걸남자는 바로 연원 찰방(連原察訪)으로 있다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내려와 지내던 희암(希庵) 김태암(金泰巖:『己卯錄補遺』에서는 金兌岩이라고 했음)이었다. 공은 짧은 지팡이와 짚신 차림으로 명산 승지를 찾아 음풍영월하였으며, 특히 속리산의 경치를 가장 좋아하여 수풀과 샘 사이에서 시를 읊조리며 즐기어 집에 돌아갈 줄을 몰랐다고 한다. 수시로 고봉의 모정(茅亭)에서 성리학을 강론하여 후학을 기르는 일에 몰두하다가, 1533년 외직인 구례현감(求禮縣監)에 제수되었다. 이때 공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아차린 듯 유훈(遺訓)을 써 놓고 부임했는데, 향년 45세의 나이로 관사에서 별세하였다. 묘소는 구병산(九屛山) 자락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또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에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보은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배향되었다.(‘상주의 인물’ 제6권, 상주문화원)

 

 

*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종과 구수복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종의 모함에 쫓겨난 구수복」은 광명시의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인 능성구씨(綾城具氏) 중 구수복(具壽福)[1491~1535]이 삭탈관직하고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장인에게 쫓겨난 후에 학풍을 다시 일으켰다는 인물담이다. 조선 전기 문신인 구수복의 자는 백응(伯凝), 호는 병암(屛庵)·수재(睡齋)이다.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정랑으로 재직하던 1519년 기묘사화 때 직소(直所)에 있으면서 심정(沈貞) 등으로부터 북문을 열라고 협박당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사화가 일어난 뒤 삭직(削職)되었다. 1533년 이준경(李浚慶) 및 아우 구수담(具壽聃) 등의 힘으로 구례현감으로 복직되었으나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났다. 1996년 광명문화원에서 발행한 『광명의 뿌리』의 41~42쪽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구정회[전 경기도의원]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채록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구수복은 방면되자 즉시 서울을 떠나 경상도 상주 평온으로 낙향했다. 은거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5년을 지냈는데, 장인인 단산도정(丹山都正) 이수(李穗)가 사위를 딱하게 여겨 보은에 있는 자기 농장에 가서 살도록 했다. 얼마 후에 농장의 종들이 싫어해서 중상하기를 “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하자, 이 말을 들은 장인 이수가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노하여 사위를 쫓아냈다.

이때는 겨울철이었는데 수척한 말 한 필과 연약한 종 한 사람을 데리고 길에 나와 갈 곳이 없어 방황하였는데 행색이 참으로 비참했다. 때마침 호걸남자가 사냥하러 수많은 종과 매와 사냥개를 몰고 지나가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이에 그가 말 위에서 읍하고 묻기를 “그대는 누구시기에 길에서 홀로 머뭇거리고 있소?”함에, 구수복이 연유를 대개 말하니, 그가 즉시 말에서 내리기를 청하여 눈 위에 털요를 깔고 서로 마주 앉아 담소하면서 꿩을 구워 안주로 술을 권하기를 숙친한 사이 같이 하고 그의 집으로 같이 갔다. 이후 그가 가옥과 전토 수십 경을 주어, 구수복이 부인과 셋 딸이 함께 편히 살도록 하고 날마다 만나서 즐겁게 지냈다. 그 호걸남자는 찰방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보은에 내려온 김태암(金泰岩)이었다. 그 후 구수복은 학풍을 일으켜 후진을 많이 배출했다는 이야기이다. 「종의 모함에 쫓겨난 구수복」의 주요 모티프는 ‘종의 모함으로 쫓겨나서 다시 학풍을 일으킨 구수복’이다. 주인이 종을 학대하여 내쫓는 경우는 흔히 있는 모티프이지만 반대로 종들이 모함하여 주인을 내쫓는 모티프는 드물다, 구수복은 오히려 서민적이요, 종들이 옳지 못한 모함을 해도 일일이 대항하지 않고 순응했다. 이런 성품을 지닌 구수복은 지인지감(知人之感)이 있는 김태암의 도움으로 호구지책이 해결되어 학문에 계속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는 결국 장인이 의도한 대로 학풍을 일으켜 후진을 많이 배출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종의 모함에 쫓겨난 구수복」 [-謀陷-具壽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구수복 선생은 서울 출생이지만 이곳 상주-보은 땅에서 살며 중종때 신사 무옥에 걸려 목숨을 잃은 최수성과 교우관계를 가졌다. 최수성 선생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하고 현재의 보은 마로면 관기땅에 고봉정사를 새우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충암 김정과 병암 구수복 선생과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최수성은 2년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고봉정사는 주인을 잃고 폐허가 된것을 현재 이곳에 구수복의 5대손인 구일봉 선생이 다시 새운 정사이다. 마로면에 능성구씨가 대대로 많이 사는데 그분들은 구수복 선생님의 후손이라고 생각된다. 고봉정사를 구수복 선생이 새우지를 않았지만 교류한 원정 최수성 선생님의 동료이기 때문에 구일봉 선생이 재건 했다고 본다. 근래 보은 마로면의 울미산, 살목산, 시루봉을 등산하면서 관기 남쪽의 청산 방향 지하도 근방에서 멋진 고봉정사를 답사하고 안내판에 역사적 사실을 보았다. 그 안내판에 기록된 3분을 검색한 결과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을 공부하게 되였다. 사극에서 방영되던 장면이 이제 생각난다. 중종의 국청으로 의금부에서 피비린내 나는 장면은 너무 무시무시하다. 안당의 인척인 송사련의 거짓 고변으로 신사무옥이 일어나 수 많은 사람이 죽거나 귀양 갔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비참한 사건이다. 정여립이나 이인좌는 실제로 그들이 역모를 일으켜 본인은 물론 집안이 몰락했지만 안당이 멸문지화 당한 신사무옥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자기를 돌봐준 사람을 역모로 몰아 자기는 출세하고 남을 몰락시킨 송사련의 거짓고변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송익필은 어찌된 영문인지 학자로 유명인사들과 교류한것은 아이러니한 사건이다. 구수복, 구수담 형제를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상주에서 살았던 구수복이 상주의 인물로 부각된 것은 현재 평온에서 살았기 대문이다. 원정 최수성, 병암 구수복, 충암 김정 3분이 이곳 상주와 보은에서 교류했고 또 구수복의 상주 평온 유허비는 상주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는 동생의 노력으로 신원되어 구례현감으로 있다가 사망하였는데 보은땅 마로면 관기리에 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