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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중종14년 1519년), 신사무옥(중종16년 1521년)고찰

문장대 2021. 3. 22. 19:26

◎ 기묘사화(중종14년 1519년), 신사무옥(중종16년 1521년)고찰

 

조선 임금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을 통하여 등극하였다.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이 중종 반정으로 왕으로 추대 되었다. 이때 반정이 일어나 겁을 먹고 집에 있는데 집앞에 여러 말들이 궁둥이를 대군의 집으로 향한 것을 보고 반정이 성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말들은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러 온 말이라고 한다. 중종은 정상적인 방법인 세자로 있다가 임금이 된것이 아니라 반정의 주체인 박원종, 유자광, 유순정, 성희안, 홍경주등 공신 세력 덕택에 등극하여 취임초에는 실권이 없었다. 당시 반정 공신의 뜻에 따라야 했다. 따라서 첫 배우자인 단경왕후도 7일만에 역적의 딸과 동생이라고 폐위되고 말았다. 당시 치마바위란 유래는 중종과 폐위된 그의 처음 부인인 단경왕후가 인왕산 큰 바위에 붉은 치마를 열고 표사하여 서로 쳐다 보았다고 하는 유래는 유명한 이야기다. 자기 부인조차 지킬 수 없었던 임금인 중종은 강력한 신하들에게 많이 휘둘렸다고 한다. 제도적으로 약한 임금이었기에 공신들의 딸이나 여동생들을 후궁으로 많이 두어 그들 공신들의 막강한 권력에 더욱 시달렸다. 후일 홍경주의 양딸이 후궁에 들어가 당시 유명한 조광조를 축출하기 위해 주초위왕이라는 글씨를 낙엽에 꿀을 발라 쓴것을 곤충들이 파먹은 것을 임금에게 보여주고 기묘사화를 일으킨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조광조는 시진 사림파이고 훈구파에 대항한 인물인데 현령과를 실시하고 도학 정치를 실현한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얼굴도 미남이고 배운 것도 많은데다 인격까지 겸비하여 많은 학자들이 그를 따랐다. 이황의 말씀대로 너무 성급하게 훈구파의 공신들을 공훈에서 삭제하는 등 과감한 정치를 시도하여 훈구파인 심정과 남곤에게 탄핵되어 기묘사화의 참극을 당한 사실은 유명한 사실이다. 즉 기묘사화는 조선 4대사화로서 유명하고 실력있는 학자들이 많게 처형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이때가 1519년 중종 14년이다. 심정, 남곤, 김전, 홍경주등의 훈구파가 당시 대사헌인 조광조, 김식등의 신진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1506년 중종반정의 공신인 정국 공신의 대다수인 76명에 대한 공신호를 박탈한 위훈삭제의 조광조의 세력 확장에 불만을 느낀 훈구파를 조광조에 싫증이 난 중종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림파를 제거 시킨 사건이다. 반정에 별 영향이 없는 한심한 사람들에게도 공훈이 부여된 사실을 뒤엎은 조광조에 반항하는 무리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피비린내 나는 기묘사화의 사건이 잊기도 전에 2년후에는 신사무옥이 일었났다. 이때가 1521년 중종 16년이다. 올해가 2021년이니 꼭 500년 전이다. 신사무옥에도 많은 정치가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참으로 한심한 역모 사건이다. 나중에 바르게 밝혀져 당시 죽거나 귀양간 사람들이 신원이 되었지만 그 타격은 크다. 조선왕조 사극에도 나왔지만 그 참변은 너무 크다. 당시 역적 모의로 탄핵당한 안당과 안처선은 물론 김식이라는 조광조에 버금가는 학자도 거창에서 목매어 죽었다. 보은 관기리의 고봉정사를 새운 최수성도 이때 연루되어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관기서 청산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안내판이 존재한다. 고봉정사는 원정 최수성이 건립하였는데 이분과 친히지낸 구수담의 후손이 이곳에 삼탄현에 있는 정사를 이곳에 지었다고 한다. 피비린내 나는 국청이 있는 신사무옥의 연루자들의 사극을 보는 장면은 너무나 비참한데 이것이 무고였으니 기막힌 현상이 아닌가!! 신사 무옥의 사건은 다음과 같다.

 

신사무옥(辛巳誣獄) 또는 신사사화(辛巳士禍)는 1521년(중종 16) 10월11일 관상감 판관(觀象監判官) 송사련(宋祀連)과 그의 처남인 평민 정상(鄭瑺)이 안치겸의 모친 장례식에 온 인사들의 방명록을 안당 일파의 역모 가담자 명단이라고 거짓 고변한 사건이다. 주범 송사련은 안처겸의 모친상 방명록을 역모 고변의 증거로 제시했고, 중종은 곧 의금부에 국문을 열었다.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 안처근 등, 그리고 권전(權磌), 이충건(李忠楗), 조광좌(趙光佐) 등이 살해되었다. 선조 즉위 후 안당의 종손 안로(安璐), 그 족질 안정란이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1586년(선조 19) 안당의 종손인 안로의 처 윤씨의 상소로 조사하여 1589년(선조 23년) 최종적으로 안당의 역모는 허위 사실로 확인되었다. 안당 등은 누명을 벗고 시호를 받았으며, 송사련의 아들 송익필 송한필 등은 양인이 된지 2대가 되었다는 이유로 서인이 처벌을 반대했지만 논쟁 끝에, 도로 환천되어 노비신분이 되었다. 송익필의 가족은 전국 각지로 도주, 뿔뿔이 흩어졌으며 송익필은 김은희, 송갑조 등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당진에서 사망했다. 송사련은 고변으로 득세하여 송사련은 처남 정상 안처겸 등이 모역을 꾀하였다는 사실을 조작, 옥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의 조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30여년간 네 임금 아래에서 호가호위 하였으나, 사후에 관직이 삭탈당하게 된다. 송사련은 출세를 위해 처남과 처남의 아버지 안당을 고변한 사건이다.

 

어느 분의 글에 의하면 처남에게 많은 설음을 받아 고변했다고 하는데 확실한지는 모른다. 어쨋던 출세를 위하여 무고를 한것은 타당치 않다. 안당의 측근들이 무고로 죽임을 당한 사실은 기막히다. 보은 마로면 관기리의 고봉정사의 주인공도 이때 처형당했다. 무고의 주인공인 송사련의 아들 송익필은 1534년 2월 10일 아버지 송사련과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 부인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장남이 인필(仁弼), 차남이 부필(富弼)이고 셋째가 송익필이며 넷째는 운곡거사(雲谷居士) 송한필이다. 그의 선조는 고려 때 상장군을 지낸 정렬공(貞烈公) 송송례(宋松禮)이다. 고려 원종조에 상장군을 지낸 인물로 무신정권 말에 국왕 원종의 편에 서서 무신정권 인사들을 타도하고 국권을 왕에게 환원시키는데 노력하였다. 그후 송염은 낭산부원군이었고 송운은 개성원윤을 역임했고 송선은 여량군을 역임했다. 그는 송송례와 송운의 후손이었으나 그 뒤 그의 가문은 점차 몰락하여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다. 증조부는 송자근쇠[2] 이고 할아버지는 갑사(甲士) 출신으로 직장(直長)을 지낸 송린(宋麟, 또는 宋璘)이다. 아버지 송사련은 정승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가 비첩(婢妾) 중금(重今)에게서 얻은 얼녀 감정(甘丁)과 평민 출신 갑사 송린의 아들이었다.

 

진외증조모 중금의 신분이 본래 노비였기에 신분제에 따라 얼녀 감정은 안당 가문의 노비라 할 수 있다. 이후 감정이 평민 송린과 혼인하여 송사련을 낳았는데 송사련의 신분 또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안당 가문의 재산에 속하나 송사련은 안당의 도움으로 천한 신분을 면하고 관직에 올라 잡직인 관상감 판관(觀象監判官)을 지냈다. 이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숙청되었으며 조광조를 따르던 안당 일족도 위기에 처하자,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안처근 형제는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 심정 등이 자신들마저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위에 불평을 하고 다니며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송사련은 이들의 대화 내용을 엿듣고 역모죄로 고발하였으며 안당의 부인의 부음을 듣고 찾아온 문상객과 장례를 도운 일꾼들을 거사 참여 세력으로 꾸며 고변하였다. 그의 고변으로 안당과 세 아들은 사형당하고 안당의 집안은 멸문되고 재산과 노비는 송사련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벼슬도 당상관인 절충장군과 통정(通政), 첨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 신사무옥의 결과로 1521년 처형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안당, 안처겸, 안처근, 봉천상, 이정숙, 권전, 기준, 조광좌, 최수성, 신변, 권전, 이충근, 안형, 한충 등인데 빠진 분이 있는지도 모른다.

* 신사무옥의 결과로 유배되거나 낙향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유인숙, 장옥, 권질, 안처함(낙향), 김광원, 강이상 등이다. 위의 분들은 당시 모두 유명한 학자들이거나 정치가인데 당시는 역적이었지만 후에 무고로 밝혀져 신원이 되었고 이 추증되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안당은 멸문지화되고 주변 인물이 처형된 사건은 역사상 끔찍하다. 신사무옥은 기묘사화나 다른 사화보다 더 끔직한 사건이다. 순흥안씨들은 당시 기막힌 일을 당한 사실이다.

 

 

자기를 보살핀 주인공을 무고하여 출세한 송사련은 처음에는 호가호위 했지만 무고가 밝혀져 멸문지화 당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송익필은 운좋게도 아버지 사련이 안처겸·안처근 형제가 남곤, 심정 등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폭로, 고변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고 양반이 되었기에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던 송익필은 나이 7~8세에 붓을 잡되 그 조어(造語)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 송사련은 생모가 노비 출신이고, 자신은 서얼 신분이었으므로 아들들의 장래에 누가 될까봐 걱정하였다. 스승이 없이 독학으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차차 자라면서 문장20대에 이미 문장력을 인정받아 문장가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을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이들은 신분을 초월해 그를 친구로 예우하였다. 이산해, 최경창, 윤탁연, 정철, 조헌, 윤두수, 윤근수, 하응림 등도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아와 친구가 되었다. 토정 이지함 등도 그를 찾아보고는 그의 재능을 칭찬하여 구봉같은 이를 스승으로 삼으면 성현에 가까울 것이라고 높이면서 친히 시를 써주기도 하였다. 이때 홍경신은 형 홍가신이 신분이 낮은 송익필과 만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송익필에게 봉변을 주겠다고 벼르던 중 찾아온 송익필을 문간에 나가 보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하고 만다. 홍경신은 내가 절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무릎이 끓어졌다고 하였다. 1558년(명종 13년) 25세 때 아우 송학필과 같이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이후 그의 초시 답안지가 세간에 알려지자 사관(史官) 이해수(李海壽)등은 상소를 올려 "송사련은 예의를 저버린 죄인이니 그 상직(賞職)을 없애야 한다"며 "그 자식들은 역시 얼손(孼孫)들이니 법(法)을 어기고 과거에 나아감은 부당하다."고 규탄, 과거의 고시관이던 동료들과 의논하여 그의 대과 응시를 정지시키고 초시 합격 자격을 박탈하여 벼슬길을 막아버렸다.

 

이때 이산해 등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그의 금고를 풀어주려고 상소를 올리고 백방으로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아버지의 무고행위에 대한 비난과 출생신분의 문제 때문에 세간의 비난을 받았고, 결국 이후 벼슬에 진출하기를 단념하고 경기도 교하군 심학산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명종말엽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안당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조정의 공론이 조성되었다. 1566년(명종 21) 안당이 아무 잘못이 없음이 밝혀져 신원(伸寃), 복권되고 그 직첩이 환급되었으며, 안처근 형제의 거사를 폭로하고 무고까지 씌운 송사련에 대한 비난여론이 조성되었다. 사관 이해수는 서손의 과거 응시는 부당하다며 다시 들고 일어났다. 이후 그는 학문을 후진을 가르치는데 쏟을 것을 다짐하고 경기도 고양군으로 물러나 고양 구봉산(龜峰山) 아래 은거하여 학문에 몰두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쓴다. 그의 호인 구봉은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때 김장생, 강찬, 서소, 강찬, 심종직, 유순익 등의 문인들이 그를 찾았고, 이후에도 김단, 김집, 정엽, 김반, 정홍명 등도 그의 문하를 찾았다. 1560년(명종 15년) 황강 김계휘가 자신의 아들 김장생을 보내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는 27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은 경기도 교하에 있는 심학산의 구봉 아래였다.[1] 교하 심학산에 서당을 짓고 이후 유생들과 문인들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이이·성혼 등과 사귀어 성리학을 논하여 통하였고 예학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등과 함께 8문장가[3]의 한 사람으로 시와 글씨에도 탁월하였다. 김장생, 정엽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김장생은 스승의 예학을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특히 예학에 밝아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후대의 송시열, 윤선거, 송준길 등에게로 학문이 계승되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송익필에게 배운 제자 중에서 유명한 이가 김장생으로, 친구인 이이의 수제자이기도 했다. 송익필은 미리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제자가 스스로 노력해서 터득하게 지도했기 때문에 김장생은 먼저 스스로 수없이 배우고, 읽고 생각하여 깨달은 바가 있은 뒤에야 의문 나는 바를 물어 보았다고 한다. 그가 교하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는 동안 인근에 살던 이이와 성혼과의 교유가 깊어 이들과 만나서 토론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으며 철학의 이치와 세상사는 도리를 서로 탐구하였는데, 대개 이이와 성혼의 질문에 송익필이 답하는 식이었다. 이들의 우정은 서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이자 비슷한 연배였던 조헌 역시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친구로 지내게 되었고, 정철, 윤두수, 윤근수 역시 그와 절친한 친구로 지내게 된다. 문장력이 늘고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버지 송사련의 후광으로 다양한 이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송사련은 은인을 무고하여 출세를 하였고 그 후광으로 송익필은 문장가가 되고 학자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맘은 편치 않았으리라!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송익필이 그리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죄질이 너무 큰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조 - 네이브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 이상의 글은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의 여러 산을 등산하면서 지나가는 길에 도로가에 있는 고봉정사를 답사하고 고봉정사 역사 안내판의 원정 최수정 선생과 상주의 인물 구수복 선생의 관련 자료를 컴퓨터로 검색하며 공부한 자료를 올린 글입니다. 학술지나 논문이 아니오니 부실한 글이라도 양해 바랍니다. 다음은 광명시가 고향이고 상주 평온과 보은에서 살다가 구레 현감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다가 사망하신 구수복 선생님의 자료를 올려볼까 합니다. 구수복 선생은 처가집의 종들에게 미움을 받아 장인에게 쫓겨나고 이곳 보은에 와서 말한필과 종 한명으로 배회하던중 당시 보은거주 김태암의 도움을 받아 살다가 동생의 도움으로 구례현감에 복권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