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보현지맥

수암종택-흰티재

문장대 2020. 2. 20.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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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지  :  수암종택(상주 중동), 휜티재(의성 다인, 비봉산 기슭)

* 등산인 ▶ 문장대 이종하 혼자

* 등산일 ▶ 2020년 2월 20일(목)

* 등산 및 여행 개요 오늘 오전은 수암종택 입구 우물 3거리에서 출발 하여 경치좋은 합수점을 다녀왔고, 오후엔  2일전 비봉산 등산을 하고 하산시 흰티재 가기100미터 전에 알바로 맥을 이탈하고 죽암마을에 도착했다. 안타까워 오늘은 도암고개서 역으로 출발하여 흰티재와 그위 능선갈림길로 해서 죽암마을지나 도암고개 출발지에 원점회귀했다. 이후 광덕고개와 행현고개 일부를 답사했다.

 

오전에 답사한 수암종택입구 우물리 3거리서 위천-낙동강 합수점 사진을 먼저 올려봅니다.

 

 

우물3거리 수암종택 입구서 합수점으로 갈때는 맥길로 갔다가 돌아올때는 좌측 농로로 편히 다녀옴-남원양씨 유허비 첨모각을 관광함 - 이후 수암종택도 관광함 등산로는 가시가 좀 있네요.

 

 

우물3거리 수암종택 입구에 주차공간이 10대정도 있어 애마를 주차하고 기맥의 백미인 낙동강-위천 합수점을 다녀왔다. 길이 썩 좋지는 않아 돌아올때는 좌측 첨모각 방향으로 내려가 좋은길로 오다가 수암종택을 관람했다.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종택 입구 공터에는 10대 이상의 차가 주차가능

 마을 표지석 뒤에 리본이 보이는 곳으로 진입하는데 등산로에 가시가 얼굴을 강타한다.

 

 

웅장하고 멋진비석과 큰소나무는 문중의 위용을 자랑한다.

 

 등산로가 수암종택 뒤로 이어지다가 밭을 만난다. 밭뚝으로 가면 다시 산으로 진입하는데 가시가 많은 산이네요.

 

 

 합수점 근방은 백마강 낙화암 같고 경치가 지상천국이다. 바위에는 바위손이 지천이다.

 

부이자 소나무도 멋지고 부처손 군락지이네요. 암예방에 좋다는데 ....

 

 부처손이 많아도 그림의 떡 - 보기만 하고 지납니다.

 

 합수점은 경기도 양평군  세미원 두물머리 남한강-북한강 합수점 만큼 웅장하고 경치가 좋네요. 멀리 영덕-당진 고속도로  다리와 나각산이 보입니다. 정말 지상천국이네요. 이곳에 살고싶고 떠나기 싫은곳이네요. 우째 이런 곳이 상주 고향에 있나요!

 나각산 아래 물량리 마을 - 강변에는 자전거도로가 이어지고 계속가면 상주보와 낙동역사이야기관이 있는 부산가는 싸이클 길이며 대한민국 라이딩하시는분은 100% 이곳으로 지납니다.  라이딩하며 저쪽에서 이곳을 보면 더욱 절경입니다.

   부처손이 이렇게 많은곳은 처음이네요.

등산인들의 리본이 큰나무옆에 즐비

 

 합수점 바로앞  -손을 넣어 물을 만져봅니다. 합수점 물 만져보기는 처음이네요.

 

 

 

넣어

 경치가 왜 이리좋은지 - 황홀합니다.

 합수점에 공을 누가 뛰었네요.

  합수점을 배경으로 셀프사진 찍었는데 사진이 별로입니다. 못난얼굴 보여줘서 미안합니다. 경치가 너무좋아 담아 보았네요. 물만 보이고 아무것도 안보이네요 ㅎㅎㅎ

 

강변 낭떠러지를 보며 내려오다가 약간의 알바를 하고 뒤돌아가 농로로 돌아갑니다.

 

 산에서 내려가는길이 망가졌네요.

 

 

남원양씨 유허비에서 본 소나무 보호수와 수암종택

 

첨모각- 남원양씨 유허비  수암종택 근방에 있어서 류씨 문중 소유인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네요.

경기도 통진 살던 조선 선조때 양세룡이 두암처사 이며 임진왜란때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류진선생님과 우복 선생님과 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문장대 맏 며느리가 남원 양씨 인데 며느리 선조이네요. 자세한 설명은  본 등산기 마지막에 좀더 복사한 자료 있습니다.


 낙시광은 강주변에 텐트치고 낚시 합니다. 저쪽다리는 중동교 입니다.

 돌아오는 도중 상주보 가는 이정표 발견-저산위로 가면 절벽과 전망대 있네요. 나중에 가보기로하고  수암종택으로 갑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몇년전에 이곳 와본적이 있지만 문화재를 또 관람해봅니다.  안동에는 종택이 많은데 상주에는 많지는 않네요.

 

수암종택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문화재 관리 하는곳에서 조사하러 나왔네요

 

 

 

누가 사는지 2마리 애완견이 바라보네요.

절경의 합수점과 수암종택을 잘 구경하고 갑니다.

 

우물3거리에 주차하고 갔다가 원점회귀합니다. 

 

 

 다음은 2번째인 오후 등산한 등로와 사진을 올립니다.

 

 

 

다음은 비봉산 아래 흰티재-도암곡개로 고고

 

 * 다인면 도암2리 백암마을에 주차하고 농로로 이어지는 도암고개로 걸어갑니다. 300미터 오르막으로 오르니 2군데 축사가 있고 우측 산가까이 있는 축사 옆으로 가는  농로로 오르다가 산 밑 논까지 가서 산으로 진입.

 

 

  통신탑 있는 도암고개서 역으로 비봉산 방향으로 저기 볏집 파란 뭉치 방향으로 오릅니다.

 

 도암고개4거리의 이정표 통신탑-축시가 2곳 -산 방향에 이어지는 축사 옆길로 오릅니다.

 

 저기 보이는 축사 옆길입니다. 전신주 따라가는 길입니다.

 마지막에는 논이 있고 리본이 붙어있습니다.

 논에서 오던곳을 뒤돌아보고

 

산으로 진입합니다. 리본이 자주보입니다. 이곳으로 내려 온분들 리본입니다. 나는 이곳을 알바해서 역으로 올라갑니다. 비봉산 방향으로 가지요.

 

정병훈 선생님 부부가 2번이나 다녀가시고 요소요소에 리본을 달아놓아 햇갈리는 곳이 없도록 했네요. 감사합니다.

 첫 봉우리 정상인데 백암마을 뒤산이고 평지마을 옆산 같네요. 우측에 평지교회가 보입니다.

 봉우리 내려가니 임도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오트바이타고 왕래합니다. 건너가니 가산대부묘지 등장

 이후부터는 수레길인데 한참 이어집니다. 그냥 룰루랄라

 이곳에서 500미터 오르면 조금 높은 봉우리와 편한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비봉산이 가까워집니다. 흰티재는 어딘가?

 

 드디어 힌티재 등장하네요. 캐른도 있고 쉼터바위도 있어 식사하고갑니다.

 

케른이 허무르기전의 사진입니다.

나는 2일전 알바로 이곳까지 못와서 이제보니 기분좋고 좀더 올라가서 알바한장소와 원인을 규명해보려고 좀더 오릅니다.

 

 

 힌티재 옆에 묘한 바위도 구경하고

 여기 리본을 보고 하산했어야 하는데 똑바로 내려가서 2일전에 알바한 이유를 알았네요. 흰티재서 300미터 비봉산 쪽 거리임

 바로 이곳에서 리본보고 우측으로 가야하는데 똑바로 가서 알바하고 다른능선으로 내려가 죽림마을에 도착-능선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어야 합니다. 나같은 사람이 가끔 있는지 하산길이 있다가 없어지다가 합니다. 비봉산에서 급경사 하산하다가  리본을 반드시 보고 길을 택하세요. 이곳인 힌티재 300미터전에는 능선이 2곳으로 갈리는 죽림마을 갈림길 능선입니다.

  알바하여 다른능선으로 다시 내려오면 좌측이나 우측에 임도가 있는데 오늘은 좌측 연못있는곳으로 빙돌아 내려 왔는데 맷돼지 방어 고압철망이 있으니 힘듭니다. 능선으로 계속가거나 우측 농로로 하산 하시길 바랍니다.

빙돌아서 농로를 따라 외롭게 죽림마을과 평지마을 2마을을 지나고 조산지 정자가 있는 백암마을 도암2리 주차지로 원점회귀합니다. 이번에는 차를타고 도암고개-광덕고개로 갑니다.

 

 

 다시 도암고개 도착하고 광덕고개로 갑니다.


 4차산 생기기전 구도로 여기가 광덕고개입니다.


 도암고개서 육감으로 이리저리 농로를 따라 큰도로 까지 오니 아래가 광덕고개다-이곳이 광덕고개는 졸음운전터가 되었다.위에서 본 광덕고개 - 새로 건설된 4차선 현대식도로

  신호등 받고 빙돌아서 반대편  졸음 운전 해결 장소로 와서 주차하고 새로 조성된 다인정수장 가는오르막길을 올랐다.

 

 

 

 

 졸음운전 장소 화장실 앞으로 오르는 새로생긴 오르막길을 오르면 우측에 루핑집과 다인정수장 관리실이 존재한다. 개가짓는다

 

 정수장 끝까지 가서 산으로 진입하니 봉우리가 나타나고 체육공원 등장 - 도로방향으로 내려가면  전기생산 판낼앞 행현고개등장하고 도로옆 전신주에 수많은 리본이 붙어있어 지맥길임을 직감한다. 체육공원과 우물1리길까지는 미답지로 남겨둔다.

 

 

 태양열 판낼앞 전신주- 다인면소재지서 중동면으로 가는 길 첫고개 800미터 거리에 행현 고개 임-여기서 1키로미터 거리 행현저수지 행현교회, 행현마을은 맥길이 아니고 다인면소재지서에서 중동가는 첫고개 800미터 거리우측 태양열 판낼 앞 전주가 들머리입니다.

행현고개 태양열 판날 앞이 전신주 이정표 리본군 참조

 

이상이 지맥 등산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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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귀가하며 찍은 사진입니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중동교 앞 토진나루터 비석-이곳에 매운탕집이 존재했는데 공터이네요.

 근방에 비행기 기총소사 훈련장은 주민들이 힘들었고 중동교는 고마운 명물이었는데

여기서 수암종택 나들이길 -전망대

 

 중동교 강변에서 본 합수점-역시 절경

 

  둘레길로 가고싶지만 오늘은 참고 중동교 건너 강변으로 차를 몰고 가니 길이 좋다가 나중에는 좁은 자전길로 가다가 낙동역사이야기관이 나오네요.

중동교 건너자마자 자전길 따라 가봅니다. 낙동 상주보앞으로 가네요.

 

-  여행 및 등산기-

바이러스 코로나 19가 온나라를 흔들고 셰계 각국의 경제를 어렵게 한다. 언제 끝날런지! 2일전 비봉산을 하산하면서 힌티재 300미터 위지점  2능선 갈림길에서 우측의 리본을 보고 우측 능선으로 와야하는데 직진하여 알바하고 힘든 길을 개척하다시피 하여 죽암마을로 하산했다. 오늘은 2일전의 알바원을 알고 어느지점에서 알바가 시작되었는가를 알기위해 비봉산 입구 도암고개에서 올랐다. 오전에는 우물3거리서 합수점을 다녀왔는데 백마강 낙화암보다 경치가 좋았고, 양평군 양서면 세미원 두물머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 처럼 멋진 곳임을 알았다. 지맥의 마지막인 합수점을 처음부터 맛보는 셈이다. 중동교를 지나면서 이곳을 보고 지나가긴 했지만 막상 이곳을 답사하고 보니 지상천국이다. 합수점에 물도 만져보았다.

 

오후에 다인면 소재 백암마을인 도암2리에 주차하고 도암고개를 향해 오르는데  비봉산방향을 역주행인 셈이다. 우물리서 우물교거쳐 의성 단밀면으로 갔다가 길이 헷갈려 다시 뒤돌아 오다가  의성 단밀면 팔등리로 돌아와 간이교를 건너 강변으로가다가 용무리로 가는 힘든길을 가서 다인면에 도착했다. 그냥 그대로 갔으면 될건데 미리 겁먹고 돌아간것이 화근이다. 30분 동안 차를 몰고 헤매다가 이곳 도암2리에 도착했다. 동네 할머니가 어디가느냐고 문의하는데 비봉산 간다고 하니 엉뚱한 곳으로 간다고  걱정한다. 거꾸로 비봉산을 향하는 셈이다. 도암고개 축사와 통신탑을 기준으로 산으로 향하는 농로로 올라 작은 산을 진입했다. 역시 리본이 나타난다.  계속 오르기만하는데 수레길도 있고 등산로가 너무 좋다. 2일전 힘들었던  등산이 다시 생각난다. 한참오르니 보고싶던 비봉산 기슭의 힌티재다.

 

힌티재에서 쉬며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300미터 좀 더 올랐다. 알바원인과 알바지점을 규명하기 위해서다. 산에 다니면 될텐데 뭔 규명인가 자책해 보지만 나의 성격탓이다. 급경사에서 완만한 지점에 이르는 곳에 도착하니 우측에 2분의 리본이 존재한다. 2일전에는 실수로 못본게 알바원인이다. 비봉산에서 하산하며 2능선이 이어지는데 리본을 보고 우측으로 하산했으면 길도 좋고 편했는데 똑바로 내려갔으니 엉망인 길로 내려가 지맥길을 잃었다. 원인과 지점을 파악하니 쓴웃음이 나온다. 힌티재에 이정표가 있어야 하지만 이곳이 더 급하고 중요지점이다. 나같은 사람이 더러있는갔다. 이유는 족적이 많다. 오를때 정상적인 곳으로 올랐으니 2일전의 길로 다시 하산했다. 2개의 능선 중 좌측능선이다. 한참 내려오니 좌측에 도로가 보여 내려가니 수로이다.  맷돼지 방지용 철선을 넘어 농로로 진입했다. 조금 내려오다 우측에 농로가 있는데 또 실수다.

 

 빙돌아서 내려오는데 이곳 평림리에는 농로가 거미줄 처럼 있어서 내리막기로만 가면 마을이다. 죽암 마을과 평지마을 지나 백암마을인 도암2리 마을회관에 안착했다. 이후 다시 도암고개와 농로길을 따라 4차선 도로가 있는 광덕고개에 도착했다. 거의 농로인데 가끔 산에 리본이 보인다. 광덕고개서 길을 거너 졸음운전 편의지점에 도착하여 새로된 오르막길을  올라가보니 다인정수장이다. 정수장 끝까지 가서 묘지옆을 지나니 리본이 부착된  들머리다. 조금오르면 도암체육공원이 있는데 오늘은 체력상 미답지로 남겨두었다. 다시 차를타고 다인면에서 중동으로 가는도로 800미터 지점인 첫고개에 태양열 판넬이 있는곳이 우물리 방향 들머리다. 판넬 앞 건너 전신주에 빽빽하게 리본이 부착되어있다. 들머리만 확인하고 상당히 먼거리의 우물리를 미답사 구간으로 두었다. 산내고개, 사갑고개 등이 미답지이다. 대다수의 등산인들은 징걸재에서 출발하여 우물리 합수점에서 마치는 산행을 하는데 나는 3-4번 다녀야 징걸재-비봉산-합수점 구간을 마칠같다.  체력이 약하니 어쩌랴! 따라서 산행기도 조각조각 나서 후답자의 도움은 안될 같다. 

 

 하지만 가족이나 선답자들은 본산행기를 보고 조금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귀가 중 중동교에 도착하여 나루터와 합수점을 멀리보고 좀 쉬었다. 다라를 건너자마자 강변길이 있어 차를 몰고 가니 처음에는 강변 2차선이더나 나중에는 좁은 1차선이었다.  겁을먹고 좁은 길과 2개의 고개를 넘으니 상주보와  낙동역사이야기관 앞이다. 전에 이곳으로 와서 궁금했던 길을 멋모르고 지나왔다. 만보기는 25,000보를 가르키니 10키로미터 정도 걸었습니다.

 

 

첨모각에 대한 고찰

 

 

두암 양세룡 선생의 유허비  첨모각 - 밝게 빛나고 숭모하는 비석

상산의 낙동강가에 두암(竇巖)이 있는데 이곳은 양처사가 피난을 와서 지낸 곳이다. 그때 사람들이 그 명성을 사모하였는데 그 소리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두암처사라 불렀다.

공의 후손인 윤석, 흠석, 승팔 등이 공이 남긴 유사 한 통을 가지고 시산에 있는 누추한 집으로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의 선조는 대대로 통진에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그만 재앙을 당하였다. 그러나 공 혼자 화를 면하여 이 동네까지 떠나 와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수암 류진 선생과 같은 곳에서 살았고 또 우복 정경세 선생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살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재앙을 만났으나 나이가 어려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이리저리 전전하여 상주의 봉황산성에까지 이동하여 임시로 지내게 되다가 마침내 두암에서 온전하게 지내며 세상의 명성에는 뜻을 버리고 무보 생각과 나라 생각에 아침저녁으로 북쪽을 바라보며 울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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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룡 공의 비문인데 향교의 강국장께서 아래의 비문 가운데 잘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있다고 하여 메일로 파일을 받아서 보았다.

붉은 색으로 처리한 부분의 글자가 잘못 읽거나 빠뜨린 부분의 경우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商山之郡洛水之上有竇巖實梁處士避難之所也時人慕其名而以其聲相近也故因以杜庵處士稱日公之後孫允錫欽錫承八等以公遺事一通訪余於時山獘廬而言曰吾先祖世居通津龍蛇之亂閤門遇公獨免流於此洞旣與柳修巖先生同居一村又與愚伏鄭先生隔江而居以吾先祖資質之美從遊於二先生之間薰陶染必有所可傳者而家藏文獻累

經虐炎便成宋之無徵殊無以影響於來後將欲謀竪一片他山以表其墟願惠一言以銘之余辭以病耄而不獲謹按公諱

世龍字見五姓梁氏系出南原高麗兵部郞中諱能讓爲鼻祖四傳諱堅文科大提學號月亭玄孫俊文科成均祭酒生諱祐

文科版圖判書號黙齋守麗節  太祖累徵不起至諱誠之進士文科出入館閣吏工部兼佐理勳封南原君諡文襄卽訥齋先

生也是爲受貫之祖生四子皆淸顯季諱琥縣監生諱淵文科兵吏判左贊成號雪翁於公爲曾祖祖諱允儉郡守考諱思善蔭

參奉妣慶州金氏希仁女丁卯年日生於通津佐洞里第幼而岐性沈靜寡黙文藝夙就壬癸之燹酷被兵年弱

所依轉轉流離始於鳳凰山城竟全于竇巖絶名韁惟思親朝夕北望號哭終身茹痛門洛水蒼壁削立或釣于水

遠挹嚴先生之淸風數畝田園日涉成就仰慕晋處士之雅趣以自靖戊子十月六日歿葬于馬谷山庚兌之原配順興安

氏后配慶州金氏同原生一男基玟金氏出繼之以銘

天作奇巖有竇可容兵塵不入勝於崇墉山靈呵噤以待有德龍蛇之訌公棲息烟霞可風雨攸除外險內夷靜可書杜門屛跡全命安身修爺仁里幸接芳隣況又愚翁隔江而居往來薰沐寧用徐魯多君子斯取斯秦炎累虐文獻無遺遺風如昨

口碑尙菀惟水沄沄惟山嵂嵂釣水有臺嚴瀨風淸亦有田園陶令趣成賢閭有表風是長我銘無愧應語千霜

            

                                      歲黃虎嘉平節     豐山 柳 東 濬   謹撰

                       檀紀 四三0一年 戊申五月  日   十代 孫 欽 錫   謹書

             此事經營多歲而力絀未遑者今因十二代孫允錫十三代孫承八承昌承淳等特別誠

             捐始克成就實擧之大幸豈非爲吾祖後孫者之所當銘感者哉


상기 두암선생 자료는 외삼님의 불로거에서 복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