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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안동시 풍산-오미마을, 예천군 호명-선몽대 여행

문장대 2020. 2. 1. 16:36


 안동시 풍산-오미마을, 예천군 호명-선몽대 여행


문수지맥 등산하며 주변의 유적지를 탐방하여 보람찬 여행이었습니다. 사진 올려봅니다. 문장대 이종하 혼자 - 관광일 : 2020년 1월 31일(금)


풍산 오미마을 답사사진 올려봅니다.


-오미동의 유래-

허백당의 후손인 유연당(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고, 그 가운데 5형제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가 팔연오계()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내려 오미동(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마을은 나라가 어려울때 의병에 지원하고 나라를 위해 싸웠으며, 항일운동을 한 애국지사의 마을이다. 하회마을이 풍산류씨의 집성촌이라면 이곳 오미마을은 풍산김씨의 집성촌이다. 조선시대에 많은 유명인사가 배출되었고, 구한말과 일제시대에는 이곳에서 많은 인사들이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곳이다. 안동의 소산마을, 오미마을, 하회마을이 3대 유명 전통마을이라고 생각된다. 오연정 정자 앞에는 24명의 독립투사나 유명인사에 관한 내력이 돌에 새겨져 있다. 이마을은 하회마을 처럼 1일 휴가내어 고택과 마을 유래, 유명인사 등에 괸해 공부해보고, 뒷산에 존재하는 도림강당과 광석산 등산을 해보는 것도 좋을 같다. 안동 검무산에 등산 갔다가 개고개를 지나 오미마을을 답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고등학교때 국어고1 교과서에 나오는 백설부는 이곳이 고향인 김진섭 선생님이 지은 글이다. 어떤 자료는 청천 김진섭님이 전남 목포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다. 납북된 수필가이고 주로 교수로 있었다. 당시는 김진섭 선생님이 이곳 오미마을이 고향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오늘 55년이 지난후 감명깊게 백설이여! 시작되는 당시의 글을 생각해본다.



「백설부」는 「생활인의 철학」과 같이 고등학교의 「국어」와 「문학」 교과서에 여러 번 실리고 있을 정도로 사회적 수필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백설부」는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그리고 순결무구()한 눈의 속성과 눈이 인생에 가지는 의미를 통찰하고, 눈을 의인화하여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의를 통제할 수 있으랴.”라고 눈을 예찬하고 있다.


눈을 통찰하는 시각은 자연에 몰입하는 단계에 이름을 눈이 멎어 놀랄 만한 통일체를 출현시킴을 말하고, “이와 같은 화려한 장식을 우리는 백설이 아니면 어디서 또 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주위에는 또한 하나의 신성한 정밀()이 진좌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도록 명령하는 것이니, 이때 모든 사람은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백설의 계시에 깊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백설을 자연의 신비의 섭리요 인간에게 계시함을 설파하고 있어, 김진섭 수필의 백미를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설부 [白雪賦]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오미마을 뒷산은 둘레길이기도 하다.


55여년전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온 백설부의 저자 청천 김진섭 선생님이 풍산이 고향이었네요. 이 백설부시가 너무 좋아 달달 외었는데 당시는 김진섭 선생님이 어디에 사시는줄 몰랐네요.  목포가 고향이라는 기록도 있네요. 납북인사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안타깝네요.이곳에 문학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여기가 고향일 같고 ㅠㅠ

조선시대 이동네 사시던 분인 풍산김씨 중시조 유연당 님이 아들 9명을 위해 9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살아있네요.  당시 9구루 나무중 나무하나가 고사해서 어리둥절 했으나 그해 아들 1명이 물에 뺘져 죽어서 우연의 일치 치고는 정말 놀랍네요.




 마을 제1 높은곳의 독립운동 기념공원



 동네앞은 검무산이 보이고



  유명한 김재봉 선생님의 어록비



  대단한 구국인사 김재봉 선생님





 허백당 선생님 생가





 김영감 생가




  오미1리 마을회관

 고택이 여러채

오미마을 뒤산 오르는 등산로 계단

연계당 정자





 현수막 뒤는 서촌

 동촌의 오미마을이 서촌과 고가, 유적 등이 대비된다.


기념탑은 연꽃 모양과 계수나무 형상으로 오미동의 전통을 상징하고 겨레와 조상의 얼을 이은 독립운동가들의 기개와 애국애족의 충혼이 영원불멸의 불꽃으로 온 누리를 비춘다는 의미의 불꽃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기념탑 뒤에는 이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김순흠, 김지섭, 김재봉, 김만수, 김낙문, 김병련, 김구현, 김보서 등 8명의 건국 포상자를 포함하여 모두 24명의 독립운동가의 양력과 업적이 새겨져 있다.





오미동 높은 곳에 위치한 광복 기년공원에 많은 인사들의 이력이 돌에 새겨져있다. 24명의 인사들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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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의 선몽대를 소개합니다. 낙동강7백리 중 빼어난 내성천의 절경의 하나입니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1538~1591) 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라고 하는데요. '선몽대'의 대호 세글자는 퇴계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고, 정자 내에는 당대의 석학인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아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국학진흥원 보관)가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곳으입니다. 퇴계선생님이 이곳을 꿈에 보았다고 합니다.




내성천의 제1 빼어난 선몽대를 본 나는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다.  여기가 지상천국이며 살아서 천국을 보았네요. 시간이 있으면 뒷산 정자도 하고 싶지만 오늘 늦게 답사해서 아쉽게 대충대충 둘러보고 귀가합니다. 정말 아쉽고 또 오고 싶네요.

















내성천의 은모래가 멋지다. 백사장은 바다보다 더 멋지다 - 도창가는 길의 호명교 다리가 보인다.





 오미마을 재건한 김봉조 유적


단성연회도 - 오미마을을 만든 김대현의 아들 김봉조는 아버지와 같이 단성현감에 부임하였고 위와 같은 그림이 전해진다. 김봉조 현감재직시 그린 그림일 같아서 올려봅니다. 당시 김봉조 현감은 어머니에게 현감 노릇 잘하여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고 당부햇다고합니다.

세전서화첩

단성연회도



[ ]

1616년 김봉조(, 1572~1630, 호는 학호())는 단성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곳은 아버지 김대현()이 현감으로 재직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머니 전주이씨는 “단성현은 네 아버지께서도 부임했던 고을이다. 더욱 조심하여 아버지의 청덕()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면서 당부하였다. 그는 업무가 끝나면 단소루()에서 양로연을 자주 열었는데, 노인들이 기뻐하면서 “우리가 다행히 죽지 않고 남아 있어서 15년 만에 또 다시 선명부(, 이전의 수령이라는 뜻. 유연당 김대현을 가리킴)처럼 베풀어주시는 연회를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렸다. 1602년 당시, 아버지 김대현이 환아정()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그로부터 15년이 지냈다는 것이다. 양로연에 참석한 노인들은 해가 저물도록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음력 3월 13일이었다.

잔치가 끝난 후 오삼도()가 “선명부()께서 1602년 봄에 잔치를 베풀었을 때 제가 친히 모시게 되어 반가운 나머지 연회도를 그려서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수령께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니 제가 칠십 늙은이로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신도 온전치 못하고 시력도 예전 같지 않으나 연회도를 한 폭 그려서 길이 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붓을 잡고 그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성연회도

안동 풍산김씨 종택은 안동 풍산김씨의 대종가()로, 집의 이름은 유경당()이다. 안동 풍산김씨 종택을 창건한 유연당() 김대현(, 1553~1602)은 성혼()의 문인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상의원직장(), 산음현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고향에서 향병을 모아 안집사(使) 김륵()의 휘하에 들어가 민심 수습에 공헌하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기민 구제에 전력을 기울였다. 유고로 『유연당선생문집()』 4권 2책이 있다.

안동 풍산김씨 종택을 재건한 학호() 김봉조(, 1572~1630)는 류성룡()의 문인이다. 문과 급제 후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그 뒤 단성현감·경상도도사·익산군수·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제용감정에 이르렀다. 저서로 『학호문집()』 3권이 있다. 영천()의 구호서원()에 제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 풍산김씨 종택 [安東豊山金氏宗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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