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 : 대구 달성군 사문진주막촌 - 강정보-디아크 문화관
* 여행인 : 문장대 부부
* 여행일 : 2018년 5월 21일 (월)
- 여행기-
5월을 맞이하여 여러 행사가 많은데 우리가족도 여러 행사가 많았다. 모두 행사를 잘 치루고 보람이 있었는데 대구의 딸과 작은 아들이 또 우리부부를 초청했다. 평소에 사문진 나루터와 낙동강 강정보에 관심이 많아 자년들에게 문의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곳을 구경삼아 다녀가라고 한다. 손주들도 보고싶고 유명한 명승지를 답사하고 싶어 상주자택을 오전 10시경에 출발하여 한시간 후에 대구 딸과 함께 합류하고 이어서 달성군 화원읍 화원동산 사문진 주막촌에 도착했다. 곧 미리와 있던 작은아들 부부와 손녀를 만났다. 손주와 총 6명이 현지 관광을 하는데 나는 별도로 주막촌을 둘러보고 주변 전망대가 있는 화원동산을 답사했다. 마침 달성군 소싸움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야시장,음식점, 각설이패 등으로 성황리에 행사를 하고 있다.
낙동강 옆 화원동산은 200미터 높이도 안되며 전망대가 있는 높은지대를 답사하는데 여러 역사의 유적들이 존재한다. 월남참전비, 육군 모부대 육이오 전쟁전승기원비, 피아노 계단길, 어린이 놀이터. 식물원, 동물원, 물레방아, 폭포, 각종 꽃밭, 둘레길, 고분군, 주막촌, 테크길 등 여러가지의 시설이 조성되어 놀라울 정도다. 여기에 늦게나마 여행 온것이 잘한 같다. 나는 혼자 도보로 걸어서 이곳을 두루 살펴보았고, 가족들은 전기전동차로 편하게 구경했다. 사문진 주막촌은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초기부터 이곳은 물류의 집산지이고 이곳을 통하여 서울과 전국으로 여러 물류들이 오고 갔던 것이다. 어느 선교사가 피아노를 이곳 사문진 나루터를 통하여 대구시내로 이송하여 우리나라의 기독교 전파에 힘입은 곳이다. 일제시대때는 경부선이 부설될 무렵 이곳 사문진나루터 뱃사공이 배건너는 손님이 없어지자 경부선을 지나는 철마를 막아서서 차에 치어 죽고 여기 임자없는 나룻배만 남아 있었다는 영화의 촬영지다. 근래에는 모방송국에서 연속극을 촬영한 곳이다. 따라서 오늘도 이곳을 관광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사문진 나루터를 구경하고 이후 4키로 거리의낙동강 강정보를 탐방했다. 4대강 사업으로 새로 만들어진 강정보는 달성군의 12대 명소가 되었다. 여기에는 국토종주길이 이어지고, 자전차, 전기자전차 등을타고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운동하고 있다. 강정보 일대는 유원지 공간이 넓어 많은 시간이 소요하여어 볼거리를 모두 보았다. 또 이근방에는 유명한 식당들이 많아 관광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사문진 나루터와 강정보 2관광지의 관광, 식사를 하고 나니 벌써 오후3시다. 이젠 혜어질 순간이다. 대구 자녀들의 집에 하루밤 지내고 가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귀가했다. 자녀들의 효심이 감사하다.
사문진 나루터에 대해 다시 설명하고 싶다.
- 내륙을 운행하는 수운의 중심지다.
- 물류가 이송-집산하는 곳이며 낙동강을 건너 오가가는 선조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내륙교통요지
- 현대인들에게는 중요한 관광지 역할
-임자없는 나룻배 영화촬영지
- 연속극 촬영지
- 우리나라에 피아노가 처음으로 여기를 통해 들어온 역사의 현장
- 6.25사변시 낙동강 전투 대비와 전승 기원지
-사문진 나루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에 있던 조선시대 나루터.
-개설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마을은 조선 인조 때 개척되었는데, 낙동강 범람으로 인해 늪이 여기저기 많이 생겨 ‘늪마을’이라 하다가 120여 년 전 이씨라는 선비가 들어와 마을 앞 큰 호수를 보고 ‘호촌’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낙동강이 범람할 때 이곳 흙을 많이 훑어갔다고 ‘훑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06년(고종 43) 고령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천동, 사동, 사문(沙門), 사문(寺門)이라 하였다. 사문(沙門)은 낙동강 홍수로 인해 마을이 형성되어 호촌2리에서 모래를 거쳐 배를 탄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큰 절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사문(寺門)이라고도 불려졌다.
-변천
사문진나루터는 조선 전기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나루였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 물품 수송로이기도 하였는데,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나루터가 가장 번창해 1486년(성종 17)까지 대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문진나루터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왜에서 이입된 물품을 보관하는 화원창(花園倉), 왜물고(倭物庫)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사무역의 발달로 15세기 후반에 폐쇄되었다. 하지만 사문진나루터는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조선시대 대소비지 대구를 대상으로 하는 남해안의 돛단배나 범선의 입출항이 잦았는데, 주요 운송 해산물로는 소금, 미역, 김, 어물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왔던 곳이 바로 사문진나루터였다. 1901년 5월 이른 아침 피아노 1대가 어설프게 포장되어 인부 30여 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토막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신기해 하였다.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나루터를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는데, 당시 대구에 집산된 물자는 쌀 20만 석, 콩 10만 석, 우피 40만 근과 그 밖의 잡곡, 양재, 잡화 등과 소금 10만 석, 석유 3만 5,000상자, 성냥 6,000상자, 옥양목 6만 단, 무명 10만 단, 방적사 1,000가마와 그 밖의 견, 면직물류, 약재, 잡화 등이다. 이것들의 약 5분의 2가 대구 시장을 통해 분산 소비되었고, 나머지 5분의 3 정도는 대구를 중계지로 하여 대부분 낙동강을 통해 부산 및 상류 각지로 수송되었다.
이 밖에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선 운영권은 주로 입찰로 정해졌고 승객 대부분은 서쪽 고령군 다산면 주민들이었다. 도선은 처음 장대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목선이었으며, 이후 자동차 엔진을 갖다 붙였고, 나중에는 엔진이 달린 철선으로 바뀌었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철선의 규모도 10t급으로 한 번에 60명의 승객과 차량 6대를 운반할 수 있었다. 특히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1시간에 3~4회, 낮 시간대는 시간당 1회 정도 고령과 달성을 오갔다. 당시 하루 평균 100여 대의 차량과 1,00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운임은 마을 사람이면 1년에 벼 1말 5되 정도를 선주에게 지불하고, 일반인은 1인당 500원, 중학생 이하는 무료였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대구 시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다. 다산면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나루터를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덕분에 화원유원지도 유명해졌다.
철도 개통 후 사문진나루터는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사문진교 준공과 동시에 한여름 나루터 근처 모래사장을 찾던 피서객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현황
2010년 현재 사문진나루터는 대구광역시 정수장으로 바뀌어 있다. 사문진나루터가 있던 곳 위로는 2009년 총사업비 400억 원을 들여 교량 780m, 연결 도로 670m를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 개통한 사문진교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네이버 지식백과] 사문진나루터 [沙門津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사문진나루터 [沙門津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치 | 대구광역시 > 달성군 |
---|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화원읍倭物庫)가 사문진나루터가 있었던 화원에 설치될 정도로 교역되는 물산이 많았다. 왜물고에는 사무역이 아닌 공무역으로 인해 생겨난 일본 물산들을 보관하였다가 판매를 하기도 하였다. '사문(沙門)'은 '모래가 많은 백사장으로 통하는 문'이란 뜻이다. 일설에 사문진(沙門津)의 한자어가 '사문진(寺門津)'이어서 신라시대 본 포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많은 절이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문진
대구 달성군의 중요한 명승지 강정보와 사문진 나루터
사문진 나루터-배타는곳
사문진 주막촌
임자없는 나룻배 촬영현장과 필름 모양 다리
강정보 전경
미술전람회가 열리는 디아크 문화관
멋진 식사후 아래에서 아메리카노
식사후 마지막엔 2충에서 맛잇는 커피를 마시고 귀가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 5대 군락지(상주시 : 공검지-중덕지-새남골 백련 재배 단지-달지-녹동마을 앞 군락지) (0) | 2018.08.19 |
---|---|
봉정사와 학봉 종택 (0) | 2018.08.03 |
상주 공검면 관광지 - 공검지, 초록별마을, 염소목 유원지, 우복 정경세 선생님 유적 (0) | 2017.12.17 |
안동-하회마을 관광 (0) | 2017.11.12 |
구례관광안내 (0) | 2017.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