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도덕경을 저술한 학자인데 장자와 더불어 도가를 창시한 분이다.
노자의 초상화
| 시대 | 춘추시대 말기 초(楚)나라 |
| 출생 - 사망 | 약 BC.571년 ~ BC.471년 추정 |
| 관련 고사성어 | 무위자연(無爲自然) |
| 목차 |
1. 노자에 대한 설
노자의 초상화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허난성 루이현(鹿邑縣)) 출신이다. 이름은 이이(李耳)이고 자는 담(聃)이며 호는 백양(伯陽)이다.
노자가 태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기원전 57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1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 혹자 중에는 기원전 5세기, 심하면 기원전 4세기로 보는 사람까지 있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가 하면 노래자와 노자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자는 주(동주(東周))나라의 도서관을 관장하는 책임자를 지냈는데, 주나라가 쇠퇴하자 이를 한탄하며 서쪽 산관(또는 함곡관)1)을 나가 은퇴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위대한 철학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 노자는 도가학파(道家學派)의 창시자이다.
2. 노자의 철학을 보여주는 일화
1) 공자와의 만남
기원전 519년 춘추시대 중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해에 공자는 동주(東周)의 도성이었던 뤄양(洛陽)을 방문한다. 평소 주의 문물제도를 흠모해왔던 공자로서는 뤄양 방문이 그야말로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을 것이고, 주 무왕을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공자였기에 흥분 그 자체였을 것이다.
공자는 우선 주 천자가 제후들을 맞이하고 대전을 거행하는 명당(明堂)을 비롯하여 왕성의 궁실, 주나라 조상 후직에게 제사를 드리는 태묘(太廟),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단(天壇) 등을 돌아보았다. 또 특별히 당시 이름난 음악가인 장홍을 방문하여 ‘악(樂)’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공자가 뤄양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자는 그의 제자 강상초(康桑楚) 등과 함께 열렬히 공자를 환영했다. 뤄양의 각종 도서와 『주례』와 관련하여 얘기를 나누던 중에 노자는 공자에게 『사기』에 인용된 것처럼 자기 철학의 일단을 드러냈다. 그 대목을 보면 이렇다.
“그대(공자)가 말하는 예란 이런 것이오. 그 사람과 뼈는 이미 다 썩었는데 오직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인 것. 군자는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날리는 쑥대처럼 굴러다닌다고 합디다. 장사를 잘하는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간직하길 마치 그 물건이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덕이 넘치나 그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들었소이다. 그대의 교만한 기상과 넘치는 욕심, 얼굴과 모양새를 꾸미는 일, 갈피를 못 잡는 어지러운 뜻일랑 버리시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외다.”
노자의 이 말은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지만 공구의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으며 동시에 노자의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안다.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짐승이 달리기를 잘 한다는 것도 물론 잘 안다. 달아나는 자에게 그물을 칠 수 있고, 헤엄치는 것에게 낚시를 드리울 수 있으며, 나는 것을 향해 활을 쏠 수는 있다. 그러나 용이라면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뭐랄까? 그는 용과 같았다···”
(『노자한비열전』)
또 『공자세가』에도 노자가 공자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귀한 자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재물을 딸려 보내고, 어진 자는 사람을 보낼 때 말로 한다고 합디다. 내 비록 부귀하지는 못하나 인자로 자처하길 좋아하니 이런 말로 그대를 떠나보낼까 합니다. ‘총명하여 깊이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위험이 따르는데, 이는 남을 잘 비판하기 때문이요, 많은 지식을 지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로운데 이는 남의 결점을 잘 꼬집어내기 때문이다. 사람의 자식은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신하된 자는 임금 앞에서 자신을 치켜세우지 않는 법이다.’”
(『공자세가』)
2) 무위자연
기원전 484년, 오자서가 ‘반란’이란 모함을 받고 자살한 바로 그 해, 노자는 홀연히 자리를 내던지고 푸른 소를 타고 서쪽으로 가버렸다. 진(秦)의 산관(散關, 산시(陝西)성 바오지시 서남)을 지날 때 관문을 지키던 사령관 윤희란 자가 “은거하시려는 모양인데 몇 글자만 남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하자, 노자는 그 자리에서 저 유명한 『도덕경(道德經)』을 써준 다음 바람과 같이 관문을 나가 사라졌다.
『도덕경』은 『노자(老子)』라고도 부르는데, 5천 자밖에 안 되는 짧은 문장이다. 이 글에서 노자는 우주발전의 자연법칙을 ‘도(道)’라 불렀는데, 이것이 도가학파의 기원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경』에 반영된 노자 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법률 · 도덕 · 풍속 · 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푸른 소를 타고 있는 노자의 모습
노자의 사상은 횡포한 세상에 대한 소극적 반응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또 항거할 수 없는 압력에 부딪쳤을 때 취할 수 있는 일종의 자기이해와 자기위안의 심리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친구 상종(常從)으로부터 큰 계시를 받았다. 한번은 상종이 큰소리로 느닷없이 “혓바닥이 아직 있나?”라고 물었다. 노자는 “있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상종은 “그럼 이빨은?”이라고 물었다. “없지.” 그 순간 노자는 약자가 살아남고 강자가 멸망하는 이치를 깨달았다.
노자의 전체 사상은 청정(淸靜)과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사물의 자연적 발전에 맡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고 이내 무너질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쓰러지지 않을뿐더러 더욱 강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의 발전은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지극히 약한 것이 지극히 강한 것이고, 후퇴가 곧 전진이다. 술잔이 차면 넘치고 달이 차면 기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노자는 억지로 나가려 하지 말고 마음을 다 잡을 것이며, 일삼지 않는 것이 일하는 것이니 자연의 변화가 곧 규칙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지 않는 것(무위(無爲))이 바로 아주 중요한 일을 벌써 많이 한 것(유위(有爲))이다.
3. 평가
노자는 중국 철학사와 사상사에서 우주의 기원과 우주 만물의 생성 등에 관해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인물로 평가 받는다. 노자의 사상은 노자 이후 장자에 이르러 ‘노장사상’으로 체계화 내지 심화되어 중국 철학사와 사상사는 물론 중국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도가는 훗날 도교(道敎)라는 신앙체계로 발전되었는데, 도교에서는 노자를 시조로 받든다.
노자가 은퇴하기 위해 넘은 관문인 산관(지금의 대산관)
4. 관련 유적
노자와 관련한 유적은 그의 신비한 행적에 걸맞게 중국 전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주요한 유적으로는 우선 그의 출생지이자 고향인 허난성 루이(鹿邑)현을 들 수 있다. 루이현에서 동쪽으로 5킬로미터 지점의 태청궁진(太淸宮鎭)의 노군대(老君臺)와 태청궁 유지 등은 국가급 문화명승지(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노자의 사당을 비롯하여 관련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2012년에는 허난성 루이를 ‘중국 노자문화의 고향’으로 명명하고 이와 함께 ‘중국 노자문화 연구센터’를 건립했다.
한편 루이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 가운데 하나인 이(李)씨 성의 발원지이다. 이 때문에 전 세계 이씨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이곳을 끊임없이 방문하고 있다. 『이씨조맥원류(李氏祖脈源流)』에 의하면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은 노자를 자신들의 선조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이씨 성을 가진 인구는 약 1억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노자 관련 유적지로 유명한 곳은 노자가 『도덕경』을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누관대,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기념하는 공자입주문례비이다.
노자가 윤희의 부탁으로 『도덕경』을 구술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누관대
1) 누관대(樓觀臺)
‘천하 제1 복지(天下第一福地)’로 불리는 이름난 도교 명승지인 누관대는 산시(陝西)성 저우즈(周至)현 동남 15킬로미터 지점인 종남산(終南山) 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풍광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산과 물, 무성한 나무와 대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옛날 책에서는 이곳을 두고 “관중의 물과 산들 중에서 종남산이 으뜸이고, 종남산 뭇 봉우리들 중에서 누관이 가장 유명하다”라고 했다.
누관대란 이름은 춘추시대에 얻었다. 전해 내려오기로는 함곡관을 지키던 대부 윤희가 이곳에다 풀로 누각을 엮어놓고 지냈는데 어느 날 밤에 하늘을 보다가 동쪽에서 뻗치는 붉은 기운을 보고는 장차 진인(眞人)이 이곳을 지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뒤 과연 노자가 함곡관을 지나게 되었고 윤희는 노자를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노자는 이곳에서 『도덕경』 5천 자를 저술하여 누각 남쪽 높은 축대에서 이를 전하고 누관대란 이름을 남겼다.
동한시대 이후 노자가 도교에 의해 시조로 받들어지면서 누관대는 중국 전통철학과 종교의 성지가 되었다. 주(周) 목왕이 이곳에 와서 옛 음악을 연주하고 누관궁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진시황은 이곳 남쪽에다 청묘(淸廟)를 짓고 직접 와서 신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한 무제도 북쪽에 사당을 지었다 하고, 진 혜제(晉惠帝)는 이곳에 1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고 300호가 넘는 백성들을 이주시켜 전문적으로 건축과 원림(園林)을 보살피게 했다.
남북조 시대에는 북방의 이름난 도사들이 이곳에 다 몰려 ‘누관파’를 형성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수 문제(隋文帝) 초기에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수나라 말기 혼란기에 당 고조(唐高祖) 이연이 타이위안(太原)에서 기병하고, 그의 딸 평양공주가 호현(鄠縣, 지금의 산시(陝西)성 서쪽)에서 사람들을 모아 아버지의 기병에 호응하자 누관대의 장교도장 기휘(岐輝)는 관내의 돈과 식량을 긁어 적극적으로 평양공주를 지원했다.
이연이 포진관2)에 주둔하고 있을 때 기휘는 부하들을 보내 돕게 했으며, 이연도 군사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하면 누관대에 와서 재를 올리며 길흉화복을 물었다. 이때 기휘는 “폐하의 성덕에 하늘이 감동하시고 진왕(秦王, 이세민)이 계속 승리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의 명입니다. 어떤 적인들 물리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이연을 격려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연은 중국을 통일한 다음 노자를 조종(祖宗)으로 삼기로 하고 직접 누관대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누관대란 이름을 종성궁(宗聖宮)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도교를 맨 앞에 세우고 그 다음에 유교, 마지막에 불교를 두는 당나라 초기 도교 숭상의 국책을 결정했다. 당 현종(唐玄宗) 이융기는 도교에 더욱 심취하여 꿈에 노자를 보았다는 것을 구실로 종성궁을 종성관(宗聖觀)으로 바꾸고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벌였다. 이로써 누관대는 굉장한 규모와 수많은 도사들이 북적대는 최고 전성기의 황실 도관이 되었다.
누관대는 고대의 유적과 한 · 당 시기의 고적들 그리고 주위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때문에 역대로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걸음하여 적지 않은 문장을 남겼다.
누관대의 명승고적으로는 상선지(上善池) · 설경대(說經臺) · 연단로(煉丹爐) · 여조동(呂祖洞) · 앙천지(仰天池) · 서진정(栖眞亭) · 화녀천(化女泉) · 고탑 · 노자묘(老子廟) 및 종성궁 · 회영관 · 옥진관(玉眞觀) · 옥화관 등이 남아 있다.
공자입주문례비
2) 공자입주문례비(孔子入周問禮碑)
뤄양에 남아 있는 공자입주문례비는 공자와 노자 이 위대한 두 사상가가 만난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비에는 정확하게 ‘공자가 주나라에 들어와 예악을 묻고 이곳에 이르렀다’는 뜻의 ‘공자입주문례악지차(孔子入周問禮樂至此)’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뤄양 노성(老城) 동관대가(東關大街) 북쪽 옛 문묘 앞에 서있다. 높이는 5.8미터에 폭은 5.4미터이다. 청 세종(世宗) 옹정(雍正) 5년인 1727년에 허난부윤 장한(張漢)과 뤄양현령 곽조정(郭朝鼎)이 세웠다.
현재 비의 상태는 완전한 편이며 낙양중점문물보호단위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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