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명산탐방

지평1리-지평저수지-200봉-염이골-아천리-지평리(저수지 한바퀴)상주

문장대 2024. 2. 24. 20:28

* 지평1리-지평저수지-200봉-염이골-못안마을-임도-염동교-아천리-지평리(저수지 한바퀴)

* 문장대 이종하의 2024년2월 24일 등산기

우측아래 지평1리 마을회관 주차하고 붉은선따라 검은 화살표 방향으로 염이골을 지나 지평저수지 주변과 주변야산을 한바퀴 이동하고 원점회귀

                                              오늘 오룩스 이동경로

 

 

*  이동구간 : 상주시 이안면 지평1리회관 주차,출발-자평저수지 뚝-200봉-염이골-지평지수지 못안마을-저수지 주변임도-염동교-감바우 마을 끝-구도로-신도로-동물이동통로-동물이동통로 남방향-험한길-인삼, 말, 소농장 앞-마을도로-다시 지펑리방향 좁은도로로 진입-마지막 임도-150봉의 급경사 치고오름-지평1리 뒷산 봉우리 150봉-지평1리 하산

 

* 이동내용 : 이곳 지평리는 이안천 걷기 운동으로 자주다닌 곳이다. 지평리 진모래 옆 산으로도 올라 지평저수지 쪽 200봉을 절반 답사하였다. 오늘은 이곳 정자 뒤산을 지평저수지 뚝을 통한 길로 오르고 하산은 지평저수지 못안마을 10가구 정도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5일전 답사한 염동교쪽으로 가서 저수지 남쪽 방향 야산을 치고 이동하여 다시 지평1리로 한바퀴 돌 예정이다. 그러면 한달전 미답사한 이안천 지평리 관수정 정자쪽 산을 모두 답사하고 지평저수지도 거의 한바퀴 도는 등산이다. 즉 2번의 답사중 미답지를 완성하는 격이된다. 차를 타고 함창에서 농암을 가다보면 경들못이라고도하고 감바우못이라고도 하는 지평저수지길을 답사하고싶고 그 도로 주변산을 답사하고 싶은마음 간절하였다. 다행이 이안천을 답사하면서 이곳 지평저수지 주변 야산을 빼먹고 답사한 같아서 못내 아쉬웠다. 오늘은 지평저수지 주변 모든것을 해결하고자 작심하고 상주자택을 출발했는데 날이 쌀쌀하여 주민들 1분도 못보았다. 김축 부자 충효각이 있는 지평1리 마을회관에 무조건 주차하고 좌측 지평저수지 방천으로 이동하였다. 뚝 높이가 상당하여 저수지가 상당히 넓어 감바우 마을 까지 저수된 큰 호수이다. 못 중간에는 태양광을 설치했다. 저수지 뚝을 가로질러 내려가니 폭포물이 떨어지는데 수력발전도 가능하다.

 

요사이 눈과 비가와서 우렁차게 폭포수가 되어 이안천 아래로 내려 꼽는데 소리가 우렁차다. 다행이 물이흐르는 다리가 있어 다음 산과 뚝 반대쪽으로 이동가능하다. 폭포수 옆 따라 마침 철계단이 설치되어 쉽게 오른다. 아래에서는 지평마을을 들을 가로질러 대형트럭이 1대가 이동한다. 저런 좁은길을 어찌 잘 운전하는지 묘기다. 관수정 근방 이안천 물흐르는 제방의 공사를 하는  중이다. 철계단을 오르는데 힘이든다. 급경사가 등장하여 낑낑대며 전번에 대현리 3거리 아래동네서 오르던 산길로 이동하였다.당시에 내가 매어둔 띠지가 보일때까지 힘들게 이동하는데 좌측아래는 이안천이 흐르고 관수정도 보인다. 멀리는 중소리 지평2리 진모래도 보인다. 우측 저수지를 보며 지겹게 오르내리며 전번 오르던 곳까지라고 생각되는 곳까지 이동했다. 250봉 정도 높은 곳에 내가 매어둔 띠지가보인다. 그리고 아래 묘지와 관수정 가는 강변길이 보여 일단 멈추었다. 다시 오던곳으로 가다가 못안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는 북쪽 내리막을 족적을 따라 내려가는데 상당히 급강하다. 한참 내려가니 평지이고 산돼지 목욕탕이 보인다. 마을이 지척이라 겁은 덜난다. 지평저수지 못 안골에는 10여호 집에 존재하는데 별천지다. 염이골에 농토는 서쪽에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주로 휴양을 위한 별장들이다. 도로에서 3km이상 들어온 곳이다.  마침 남쪽의 작은 외딴집으로 내려가는데 망을 쳐 놓았다. 낮은 곳을 2번 넘어 첫집에 도착했는데 인기척이 없다. 집은 방하나 주방하나인데 cctv장치가 있어 혼날까봐 조용히 그집을 나와 마을길에 도착했다. 연자방아가 보인다. 그리고 도로로 나가는 임도인지 마을길인지 보인다. 주민을 불러내 길을 확인하고 길을 오르니 트럭이 지나간다. 걸어서 오르다 보니 5일전 바로 산위로 지나간 능선이 보이고 차를 타기위해 걷던길이다. 힘들게 내려가다보니 조금전 트럭이 다시온다.

 

염치불구하고 마을지나 구도로에서 신도로 오르는 곳까지 태어달라고 하니 외국청년인 듯한 운전수가 트럭을 몰로 다나면서 배달하는 같다. 1km정도를 히치하여 신도로 아래 도착했다. 이제 강변 테크계단이 있으면 강구경하면서 계단을 가려고 했는데 이안면장은 이곳 저수지를 관광화 하지 않는다. 전국의 큰 저수지 주변은 테크계단을 설치하여 관광객을 유치히는데 이안면은 답답하다. 매운탕집도 있으면 식당도 잘되는데 있던 것 까지 망하고 말았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는 큰 저수지에 계단을 설치하여 저수지를 한바퀴도는 시설을 해 놓았는데 아쉽다. 이안면장이나  상주시장님의 배려가 요구된다. 다마 개운저수지는 일부 테크 계단을 설치하였던데 아쉽다. 차를 얻어타고 새도로를 걸어가서 동물이동통로 아래 도착하여 우측으로 올랐다. 다른곳은 전부 쇠망으로 폐쇄하였다. 새도로 우측으로 오르니 괜찮은 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한참가니 차츰 잡목가시가 대단하다. 갑자기 인삼밭과 말과 소를 기르는 이름모르는 농장이 존재한다. 풀어진 개들이 야단이다. 겁이나지만 농장으로 내려가니 길이 좋다. 농장을 나오니 좋은길이 보이고 길 양쪽에 소류지다. 낚시하는 차들이 보인다. 반대쪽으로 내려가니 우측으르 산길이 보이고 지평1리로 오르는 산길이 보인다. 1-2채의 집이있고 여흥민씨 가족 석실이 보인다. 평상이 있어 조금 쉬다가 길이 없어진 산으로 오른다. 길도 없지만 경사가 급하여 여러번 쉬며 150봉을 올랐다. 내려가는 길이 험하여 내려가다가 뒤돌아와 능선을 빙돌아 오르니 족적이 있고 묘지가 등장한다. 능선을 따라 자꾸 내려가니 지평1리 마을이 지척이다. 한참 내려가니 함녕김씨 묘지가 많다. 이곳이 고향인 임진왜란시 김축부자의 후손마을이다. 조금 내려오니 애마가 주차된 지평1리 마을회관이다. 주변에 운동기구가 있어 몸푸는 운동을 했다. 마을사람은 1분도 보지 못했다. 마을 앞들이 상당히 넓어 아마도 부자 동네이고 양반 동네이다. 차를 회수하여 마을입구에 있는 충효각과 김축선생 사당이 보인다.  충분히 두분의 충성을 숙지하고 촬영하였으며 이안천 변을 지나 3번도로에 진입하고  30분 거리의 상주자택에 도착했다.

===========================================

이안천변 걷기운동을 하던 기간 자주 들리던 지평1리 마을회관

고요들 정자. 방송탑, 운동기구, 경노당, 회관 망라한 멋진 마을 

 

마을 앞들의 농토가 기름지고 넓다.

 

회관 앞의 연자방아

 

마을에서 500m걸어 지평저수지 뚝 도착-이제방으로 물이 고여 아천리 감바우까지 물이 도착-가뭄에 특별도움

 

뚝방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물이 철철 흘러내린다.  지평천에서 이안천으로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200봉을 오르는 철계단

 

 

이안천 굽이가 나무사이로 보임

 

등산로가 있네요. 

한달전에 이안면-공검면 경계서 이곳까지 올라와서 관수정위 무명봉들 반쪽 답사-오늘에야 완전 답사-관수정 뒷산

괴물바위 구경

이안천 지평리 관수정 정자 뒷산을 완주하고 저수지 못안마을로 하산중 산돼지 목욕탕 발견

 

 

카메라 밧데리 소진으로 폰으로 촬영-아래사진부터

 

                                               외딴집과 10호 정도의 못안마을

 

                                           마을 뒤산 중턱으로 도로로 가는 임도로 걷습니다.

 

                                             주민의 차를 얻어타고 새도로 아래까지

 

                                            새도로 아래서 걷다가 동물 이동통로 만남

 

 

                                          새도로에서 우측 산으로 오릅니다. 좋은길 따라 갑니다.

 

                                        인삼밭, 말, 소 농장을 지나 지평선 넘게되는 고개아래 도착

                                          평상에서 조금  쉬다가 급경사 오르니 주차한 지평리 보임

 

                                          급하고 심한 고개를 넘어 마을뒤 은행나무도착

 

                                              마을의 사당-이동네는 함녕김씨 동네

 

                                                  다시 원점 도착하여 주변의 운동기구로 몸을 푼다.

충효각 정려각

임진왜란시 의병에 참가한 김축부자의 충효정려각

 

김 축은 선조때에 함안 군수 응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함녕이다. 어릴 때 부터 총명하고 강직하며 의지와 기개가 남달랐다. "남아로 태어나 싸움 터에 나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시체가 말 가죽에 쌓여 돌아오는 것이 도리다." 김 축은 항상 이렇게 남자의 도리를 강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 상주 함창 문경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김 축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고, 충무공 이 순신 장군의 막하 군관이 되어, 걸망포 해전등 여러 해전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뒤에 용양위호군이 되어 문열공 김천일의 진중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함안 남원 등지에서 역전고투 끝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진중에서 장열한 전사를 하였다. 그의 아들 영달(1591년-1636년)은 나이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참변을 당했다. 영달의 어머니 정부인 청주 한씨는 왜적을 피해 지평리의 뒷골 대나무 밭에 숨어서 살면서 어린 아들 영달을 키우면서 아버지의 장한 죽음을 되새겨 주었다. 이렇게 엄한 어머니의 교훈을 받으며 자란 아들 영달은 나라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마음으로 앉을때나 누울 때는 왜놈의 나라인 왜국을 향하지 않고 왜놈식의 물건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병자호란 때 영달은 향리의 장정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본도 병사 민 영이 진에 합세하여 분전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 역시 시체를 수습할 길이 없었다. 혼을 불러 와 향리의 뒷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예로부터 충효의 극치는 한 집 안에 한사람 혹은 한 마을에 한사람도 어렵거늘 김축은 그 부자가 충과 효를 다하였다. 참으로 거룩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나라에서는 두 부자의 충효를 기리어 아버지에겐 자현대부 호조판서를 아들에겐 통정대부 승전원 좌승지를 증직하고 고향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지금 지평리에는 충효각이 세워져 두 부자의 충효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영달의 모자가 피란하여 살던 대나무 밭에는 첨축재가 세워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흠모와 칭송을 더하게 한다.

 

김축부자의 벼슬 비석

                                         김축 후손과 그 배우자들의 비석

 

----------------------------------------------------------------------------------------------------------------------------------

인구문 효자비

인구문 효자각은 교동인(喬桐人) 인구문의 효행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건립한효자각이다.효자 구문은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났고 권참봉(權參奉) 경순의 문하에서수학하였다.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가례(家禮)에 따라 제례(祭禮)를 다하였고 예(禮)에넘칠 정도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묘소 옆에 여막을 지어 시묘 3년을 하루같이 곡을 하니 산천 초목과 짐승들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3년 시묘는 마쳤으나 애통함을 금할 수 없어 묘소 옆에 영모제(永慕劑)를 지어거처하면서 25년간을 한결 같이 상복을 벗지 않고 있다가 81세의 일기로 세상을떠났다. 현감 이후(李候)는 그가 지은 영모제에 찬시(讚詩) 및 쌀과 고기를 보내어 효자를 돕게 한 일도 있었다. 1870년(고종 7년)에 명정(銘旌)되어 1904년(광무 8)에 효자각을 건립하였으며1978년 군비로 보수 정화하였다.효자각은 맛배건물로서 4방 한칸 짜리이다. 익공 柱頭에 처마는 겹치마이고,벽체 하방은 회벽, 상부는 홍살이라 각내에 2개의 편액을 걸었다.

 

縣板 : 孝子 學生 印龜文之閣, 上之七年 庚午命旌印孝子 行蹟記
由來: 1870년(高宗 7) 命旌 1904년(光武 8) 孝子閣 建立. 1978년 補修淨化

 

인구문의 효자각-이동네 입구는 충효각과 효자각이 존재하는 양반마을입니다. 

 

                                            3번 구도로 의 이정표

 

                    이안천변과 3번 국도 구도로 이안천대교에 있는 정자와 이안면 비석-바르게 살자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