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사회부장관 전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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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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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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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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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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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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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촌(牛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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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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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사회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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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정치인.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사회부장관이었으며 대한노총 위원장, 제헌국회 및 2대, 3대, 5대, 6댜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자료집으로 장남 전창원 동국대명예교수가 출판한 《이렇게 싸웠다》(1996), 손자 전동건 MBC기자, 손녀 전동현 박사가 참여한 서울대노동법연구회 출판 《우촌 전진한 자료집》(2023)이 있다.친인척으로 최초 민간협동조합인 함창협동조합 창시자 목촌 전준한(가형), 정치인 정재철(사위》, 언론인 이규태(사위》. 섬유예술가 정경연(외손녀). 정치인 정문헌(외손자) 등이 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사회부장관이었으며 대한노총 위원장, 제헌국회 및 2대, 3대, 5대, 6댜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자료집으로 장남 전창원 동국대명예교수가 출판한 《이렇게 싸웠다》(1996), 손자 전동건 MBC기자, 손녀 전동현 박사가 참여한 서울대노동법연구회 출판 《우촌 전진한 자료집》(2023)이 있다.친인척으로 최초 민간협동조합인 함창협동조합 창시자 목촌 전준한(가형), 정치인 정재철(사위》, 언론인 이규태(사위》. 섬유예술가 정경연(외손녀). 정치인 정문헌(외손자) 등이 있다.
2. 생애[편집]
1901년 11월 5일 경상북도 함창군 현내면 오사리(현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전석기(錢晳起, 1879. 1. 28 ~ 1955. 7. 22)[14]와 어머니 상주 박씨(尙州 朴氏) 박성악(朴城岳, 1880. 11. 21 ~ ?)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전약우(錢若雨, 1827. 8. 21 ~ 1891. 7. 17)[15]는 1888년 4월 29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임명되었던 무관이었다.
소년기에는 여관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1917년 경기도 경성부로 올라와 고학하였고, 이후 안동군 일직면 망호리로 이주해 잠시 살다가 1920년 4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후 와세다제1고등학원[16]을 거쳐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에 입학했다.
1926년 도쿄에서 형 전준한과 함께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해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해 항일독립운동,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신의주형무소에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부터 독실한 불자(佛子)로서 강원도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 10여 년간 은거하며 참선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이후 정치가로 활동했지만 죽을 때까지 참선을 멈추지는 않았다. 후일 “정치는 부업이고, 참선이 본업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처음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관여하다가 한국민주당 발기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면서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17] 후보로 경상북도 상주군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에서 활동하면서 제헌헌법에 노동3권과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등 노동 관련 조항들을 명시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회의록에는 보통 다른 의원들은 5분 정도 발언하는데, 전진한 의원은 이익균점권 조항 명시를 주장하는데 약 20분 동안 발언해 신익희 부의장이 약간 짜증을 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노동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18]의 창립과 이후의 국제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2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무 지역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였다. 1955년 노농당[19]을 결성한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농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윤명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사회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유성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20] 같은 해 윤보선의 대통령 출마로 치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지역구 재보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였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5위로 낙선하였다.[21] 같은 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독립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유진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2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186-35번지 자택에서 숙환인 뇌경화증으로 별세했다.
소년기에는 여관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1917년 경기도 경성부로 올라와 고학하였고, 이후 안동군 일직면 망호리로 이주해 잠시 살다가 1920년 4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후 와세다제1고등학원[16]을 거쳐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에 입학했다.
1926년 도쿄에서 형 전준한과 함께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해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해 항일독립운동,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신의주형무소에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부터 독실한 불자(佛子)로서 강원도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 10여 년간 은거하며 참선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이후 정치가로 활동했지만 죽을 때까지 참선을 멈추지는 않았다. 후일 “정치는 부업이고, 참선이 본업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처음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관여하다가 한국민주당 발기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면서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17] 후보로 경상북도 상주군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에서 활동하면서 제헌헌법에 노동3권과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등 노동 관련 조항들을 명시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회의록에는 보통 다른 의원들은 5분 정도 발언하는데, 전진한 의원은 이익균점권 조항 명시를 주장하는데 약 20분 동안 발언해 신익희 부의장이 약간 짜증을 내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노동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18]의 창립과 이후의 국제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2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에서 대한노동총연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무 지역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였다. 1955년 노농당[19]을 결성한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농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윤명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사회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유성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20] 같은 해 윤보선의 대통령 출마로 치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지역구 재보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였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5위로 낙선하였다.[21] 같은 해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독립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유진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2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186-35번지 자택에서 숙환인 뇌경화증으로 별세했다.
3. 업적[편집]
3.1. 헌법에 이익균점권 명시[편집]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헌법에 노동자 경영참여권과 이익균점권 조항을 추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중 이익균점권은 헌법에 명시되지만 노동자 경영참여권은 치열한 토론 끝에 명시되지 못했다. 이는 오늘날 봐도 꽤나 급진적인 조항으로, 쉽게 말하면 “자본가가 기업에 자본을 출자해 기업의 이익을 일부 분배받는 것처럼, 노동자도 기업에 노동력을 출자하므로 그만큼 기업의 이익을 분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참고로 이익균점권은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私企業)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라는 조항으로 명시되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삭제된다.
3.2. 근로기준법 제정 기여[편집]
4. 사상[편집]
전반적인 사상이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와 닮아있는 부분이 많다. 노농당 강령으로써 경제민주화의 본래 의미인 경제적 민주주의도 주장했는데, 자유협동주의도 그렇고 연결시켜보면 한국에서도 독일처럼 “자본가와 노동자가 협력하면서 발전한다”는 주장을 한 반공주의적 노동 중심 정치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전진한은 반공 정치인으로서 자칫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 공산주의를 반대했지만, 자본가에 의한 일당적 사회 지배 또한 우려하였다. 그 결과 1955년 이승만과 결별하고 노농당을 창당, 『자유협동주의』라는 책을 펴내 다음과 같은 사상을 제창했다.
자유협동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각자가 창의적으로 제 소질과 재능을 발휘하는 사회, 노동과 자본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 사람들 간의 상호 연대와 자립, 자치, 협동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전진한의 말에 따르면 “음악에 있어서 악사가 각자 법열 속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악기의 성능과 자기의 개성을 발휘하여 전체와 협동함으로써 하나의 심포니를 형성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는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며 독자적인 자유협동주의 사상 체계를 발전시켜나갔고, “협동이 없는 자유는 방종과 탐욕으로 흐르며, 자유가 없는 협동은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일각에선 전진한의 사상은 고전적인 생디칼리즘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무정부주의보단 코포라티즘에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오늘날 시각에서 이념 체계가 세분화되지 않은 당시 시점을 이거다라고 하나로 재단하는 것도 좀 모순일 순 있다.
전진한은 반공 정치인으로서 자칫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 공산주의를 반대했지만, 자본가에 의한 일당적 사회 지배 또한 우려하였다. 그 결과 1955년 이승만과 결별하고 노농당을 창당, 『자유협동주의』라는 책을 펴내 다음과 같은 사상을 제창했다.
자유협동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각자가 창의적으로 제 소질과 재능을 발휘하는 사회, 노동과 자본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 사람들 간의 상호 연대와 자립, 자치, 협동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전진한의 말에 따르면 “음악에 있어서 악사가 각자 법열 속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악기의 성능과 자기의 개성을 발휘하여 전체와 협동함으로써 하나의 심포니를 형성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는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며 독자적인 자유협동주의 사상 체계를 발전시켜나갔고, “협동이 없는 자유는 방종과 탐욕으로 흐르며, 자유가 없는 협동은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일각에선 전진한의 사상은 고전적인 생디칼리즘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무정부주의보단 코포라티즘에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오늘날 시각에서 이념 체계가 세분화되지 않은 당시 시점을 이거다라고 하나로 재단하는 것도 좀 모순일 순 있다.
5. 매체[편집]
5.1. 야인시대[편집]
제1공화국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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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및 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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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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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에서는 성우 이종구가 연기했다. 전진한이 경북 출신임을 감안했는지 동남 방언을 구사한다. 그리고 조병옥, 장택상, 조봉암과 함께 비중있는 정부의 인사 중 하나이다. 첫 등장은 정부 수립 후 사회부 장관으로서 대통령이 장관들과 대면한 자리에서였는데, 이승만이 그의 남루한 복장을 문제삼았고 임영신도 거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죽기는커녕, “옷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많은 국민들이 끼니도 때우지 못하고 고생하는 와중에, 민생을 책임져야 할 장관인 자신이 쓸데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양복이나 빼입고 다닐 수는 없다”고 반박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6.25 전쟁 시기 부산에서 활동하는 김두한을 만나 노동운동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으며, 김두한이 학도병을 이끌고 전선으로 가기 전에 유진산과 함께 그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후 3.15 부정선거 때(121화) 자유당의 전횡이 거세지자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고 나서부터 등장하지 않았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경북 상주군 을[24]
|
31,518 (75.44%)
|
당선 (1위)
|
초선
|
||
1950
|
경남 부산시 갑[25]
|
9,062 (20.91%)
|
낙선 (3위)
|
|
||
1952
|
302,471 (4.24%)
|
낙선 (6위)
|
|
|||
1952년 재보궐선거
|
경남 부산시 무[26]
|
-
|
당선 (1위)
|
재선
|
||
1954
|
경남 부산시 을[27]
|
31,278 (38.00%)
|
3선
|
|||
1958
|
6,379 (15.52%)
|
낙선 (3위)
|
|
|||
1960
|
|
13,774 (25.50%)
|
낙선 (2위)
|
|
||
11,326 (49.53%)
|
당선 (1위)
|
4선
|
||||
1963
|
36,123 (50.20%)
|
5선
|
||||
1967
|
대한민국
|
|
232,179 (2.09%)
|
낙선 (5위)
|
|
|
서울 종로구 갑[32]
|
2,347 (2.93%)
|
낙선 (3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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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소속 정당[편집]
소속
|
기간
|
비고
|
1927 - 1928
|
입당
|
|
1928 - 1945
|
탈당
정계 입문 |
|
1945
|
창당
|
|
1945
|
탈당
|
|
1945 - 1946
|
창당
|
|
1946
|
탈당
|
|
1946
|
창당
|
|
1946
|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
|
1946 - 1948
|
창당
|
|
1948 - 1950
|
당명 변경
|
|
1950
|
탈당
|
|
1950 - 1952
|
입당
|
|
1952
|
정당 해산
|
|
|
1952 - 1954
|
입당
|
1954 - 1955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
1955 - 1959
|
창당
|
|
1959 - 1960
|
당명 변경
|
|
1960
|
자진 정당 해산
|
|
|
1960 - 1961
|
창당
|
1961 - 1963
|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정당 해산
|
|
1963 - 1965
|
창당
|
|
1965 - 1967
|
합당[36]
|
|
1967
|
합당[37]
|
|
1967
|
탈당
|
|
|
1967 - 1970
|
입당
정계 은퇴 |
1970 - 1972
|
합당[38]
사망 |
8. 참고 문서[편집]
9. 관련 문서[편집]
@ 자료출처-나무위키(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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