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삼척 바다와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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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전후 시대상

문장대 2024. 1. 25. 20:20
인조 : 조선의 제16대 임금. 본명은 이종(李倧).

조선왕조의 네 번째 반정[7] 인조반정으로 백부 광해군과 지지세력인 북인 일파를 대거 축출하여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선조 후궁 인빈 김씨의 5남인 원종(정원군)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 구씨다.[8] 정원군의 장남으로, 능양군[9]으로 책봉되었다.

반정을 통한 인조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 왕조의 창건 및 조선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된다.[10] 조선후기 300년 간 진행된 제도개혁의 논의는 인조 시대에 모두 시작되었으며, 왕통상으로도 인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임금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후손들이다. 혈통상으로 순종의 아버지 고종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8대손이다.[11]

전술하듯 광해군은 물론 그 아들인 세자까지 장성한 상황에서, 능양군 이종의 왕위 계승 순위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쿠데타(정변)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추대되어 이 되었다. 이에 상당수의 실무자와 중립세력들이 협력(혹은 최소한 방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정권 안정성이 높은 조선사에서, 인조반정이 군주를 교체한 조선 최후의 정변이 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에서 시호를 받은 임금이지만 조선 조정은 조선전기와 마찬가지로 중국 왕조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실제로는 중국과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12]

2. 묘호 "인조"[편집]

묘호는 시법에서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열(烈)'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열조(烈祖)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나,
"오대십국시대 남당의 임금 서지고가 이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 대행(大行)[13]에게 이 글자를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라는 비판에 의해 수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논한 신하들 가운데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있어 갑론을박을 하며 재논의를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 묘호의 최종결재권은 임금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효종이 직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열조(烈祖) 두 글자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칭한 바와 한소열(漢昭烈) 묘호의 자의(字義)를 취한 것으로 진실로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공덕(恭德)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말하는 자들은 남당(南唐)이 참람(慘濫)한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지금 이 시호(諡號)를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인(仁)'자가 대행 대왕(인조)의 묘호로 가장 합당합니다.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祥考)하건대 역대 제왕의 시호에 부자(父子)가 호칭이 같은 이도 간혹 있었으니, 우리 나라 세종(世宗)과 세조(世祖)의 호칭도 어찌 이에서 근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명나라 제도를 상고(祥考)하건대 이미 인조(仁祖)가 있는데 또 인종(仁宗)이 있었습니다. 근거할 만한 고금(古今)의 전례(典禮)가 이미 이와 같을뿐더러 주공(周公)의 군부(君父)와 같은 시호를 쓴다고 한 것이 더욱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니, 이로써 결단하여 의논하건대 오늘의 묘호로는 이 '인(仁)'자를 버리고는 달리 쓸 글자가 없으니 '인(仁)' 자로 고치소서."[14]
마지막 걸림돌은, 이미 인종(仁宗)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仁)'자를 묘호로 올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예종임금 때 묘호를 정하면서 세종이 있음에도 세조를 붙여준 선례가 있었고, 명나라에도 인종 인조를 같이 쓰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에 묘호가 그대로 인조로 확정됐다.

"열조"는 시법(詩法)에서 모두 3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하들이 해석한 것은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이다. 실록에선  소열 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인조의 공덕(恭德)에 부합된다고 적었다.[15]

시법에서 '인(仁)'은 성리학에서 추앙하는 최고/최상의 덕으로, "인조"라는 묘호는 성군 중의 성군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엄청,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다. 예를 들어 성종 사후 인종(仁宗)과 성종(成宗) 중 뭘 묘호로 정할 지 논쟁할 때, "제왕의 묘호는 '仁'만 한 것이 없으니 '成'이라는 글자로는 대행 대왕의 지극하신 덕을 다 표현할 수 없다.[16]"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17] 이후 양반 사대부들에게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받들어질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仁宗이 되지 못했다.[18]

그리고 '조(祖)'는 보통 재조[19]의 공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임금에게 올리는 영예로운 묘호이다. 관례적으로 '조(祖)'는 왕가를 연 시조와 중시조로 대우받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이며 종은 공덕과 무관하게 왕가라는 종가를 계승한 왕들에게 일괄적으로 쓰였다. 시법을 근거로 '조(祖)'와 '종(宗)'은 공이냐 덕이냐의 차이이지 어느 쪽이 좋고 나쁜 것은 아니라고도 하지만, 이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종에 비해 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한 조를 더 높게 쳤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찬탈 등의 결격사유가 있는 부왕을 둔 후계자들이, 취약한 정통성과 도전받는 왕권을 포장하기 위해 거꾸로 아버지에게 '조'를 바치는 추숭사업을 강행했다. 왕이 된 어린 조카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아들 예종은 아버지에게 '세조'를, 임란 내내 추태를 보여 왕가의 권위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하성군의 아들 광해군은 제 아버지에게 '선조'를, 정치암투에만 능하고 내정과 외교를 모두 말아먹은 희대의 암군 능양군의 아들 효종은 제 아버지에게 '인조'를 묘호로 선사하며 영구결번 급 귀한 묘호를 남발했던 것이다. 강화도령 출신으로 정통성이 약했던 철종 역시 홍경래의 난 세도정치로 얼룩진 치세를 보낸 양아버지 순종을 '순조'로 다시 추숭하였다.[20] 이러한 '조'들이 과연 세조의 전례를 들어 다른 왕들을 제치고 왕가의 중시조 대우를 받을 자격과 업적을 가진 왕들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결국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정말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에, 거의 요순급의 이상적인 초월 군주에게나 주어질 법한, 조선왕조를 넘어 2천년이 넘어가는 한국사 여러 왕조를 통틀어 현종이나 세종 정도만이 어울릴 만한 그 정도의 묘호라는 얘기다.즉, 암군은 절대로 쓸 수 없는 그런 수준의 영예로운 묘호다.[21] 이 때문인지 인조를 싫어하는 현대인들은 아예 능양군이라고 깎아내려서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 인조라는 묘호를 받은 사람은 명 태조 주원장의 아버지 주세진(朱世珍). 입지전적한 창건자의 아버지니 명예로서의 추숭으로 본다면 차라리 합리성이 있다.

3. 일대기[편집]

3.1. 출생 및 초기[편집]

1595년(선조 28년), 황해도 해주목에 있었던 해주 행궁에서 선조의 첫번째 손자로 태어났다.[22]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내외가 황해도 해주로 피난을 가 있을 때 연주군부인 구씨가 그곳에서 능양군인 인조를 출산한다. 실록에 실린 인조행장을 보면, 한 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어서 할아버지 선조가 이걸 보고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행장'인 만큼 왕을 돋보이기 위한 덧붙힌 기록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인조의 삼촌 격인 광해군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역시 행장(行葬) 특유의 과장으로 보인다.[23] 10대가 되도록 할아버지 선조를 알현할 때마다 재롱을 부리고 그림을 그려 바쳐서 선조가 기뻐하기도 했다.[24]

선조 때 능양군(綾陽君)으로 봉해졌다. 정치감각이 빼어났던 할머니 인빈 김씨가, 정원군의 친형이자 유력 세자 후보였던 신성군이 일찍 죽고,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그와 세자 경쟁을 했었던 이력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조카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고, 여러모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광해군 초기 때까지는 대우가 좋았다. 그의 아버지 정원군은 왕실 종친의 어른으로서 광해군이 옥사(봉산옥사, 계축옥사)를 일으킬 때 관제데모를 주도하는 바지사장 역할 정도만 하면서 유유자적 지냈다.[25] 하지만 살벌한 공안정국은 이들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재위 중반으로 갈수록 의심병이 심각해진 광해군은 역모 고변만 있으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옥사를 일으키고 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3.1.1. 동생의 비참한 자살[편집]

1615년(광해군 7년) 8월, 이른바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한다. 이이첨 일파였던 신경희가 진사였던 소명국에게 이이첨이 주장하던 폐모론을 지지하려고 말했다가 소명국이 거부하자 신경희가 소명국을 공격해 옥에 가뒀다. 그러자 소명국이 신경희가 역모를 꾸민다고 고변했으며, 옥에 갇힌 신경희가 어떡해서든 이이첨이 역모죄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해댔다. 그래서 정원군의 3번째 아들인 능창군이 뜬금없이 잡혀와서 결국에는 유배를 간 사건이다.

수안군수를 지내던 신경희라는 자가 있었는데, 신경희는 조정과 관청에 다니면서 이이첨, 기자헌, 유몽인과 어울리며 지냈다. 이들은 대북파로 광해군과 친하게 지내는 측근 세력이었으며, 광해군 정권의 안정을 위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음해하는 악행을 많이 저질렸다.[26] 그래서 대북파의 정치 공작으로 인해 서인 남인계 신하들이 파직, 삭탈관직, 문외출송, 유배를 갔으며,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쫓겨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정치 공작과 옥사로 인해 이것을 주도한 이이첨, 기자헌, 유몽인을 비롯한 대북파 대신들의 평판이 간악하여 좋지 않았다. 그리고 보다 못한 선비들이 그에게 죄를 줄 것을 상소했지만 광해군은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있었다.

한편 신경희는 이이첨이 주장하던 폐모론에 매력을 느끼면서 지지했고 이를 익산의 진사였던 소명국에게 알려, 소명국이 폐모론에 대해 지지한 다음에, 고을 각지에서 퍼트리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신경희는 소명국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폐모론에 대해 찬성하려고 말했지만 소명국은 이를 거부했다. 폐모론은 이이첨 일파만 주장하는 이론이고 서인이나 남인, 그리고 소북과 집권 세력인 대북들도 폐모론 자체가 스스로 유교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이론이었다.

신경희가 소명국에게 폐모론을 지지하려고 하자, 소명국이 거부해서 불쾌한 신경희는 소명국의 나쁜 행동을 공격하며, 소명국은 이이첨 일파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 국문과 처벌을 받을 준비가 되자, 소명국은 이에 돌파구를 찾았다. 일단 평소에 신경희가 이이첨 일파와 친한 것과 대북의 영수인 기자헌과 유몽인이 이이첨 일파와 가까우면서도 은근히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용했다. 그래서 소명국은 신경희가 역모를 꾀하는 것을 대북파에게 전해졌으며, 대북파인 기자헌과 유몽인은 이이첨이 폐모론을 주장하여 정국을 위험을 빠트린다고 생각했다. 기자헌과 유몽인이 고변을 알리자, 이이첨을 충신으로 생각했던 광해군은 충격에 빠졌지만, 그래도 추국해야 했기때문에 국문장이 마련이 되어서 이때, 소북 출신인 박승종 박홍구가 추국을 돕게 되었다.

추국이 시작할 때 신경희의 역모가 이이첨과 관련이 되어있는 것으로 시작됐고, 한편 이이첨은 조정에 나오지 않고 근신했는데 이는 추국에서 이이첨의 이름이 나올 경우, 바로 국문장에 끌려나올 수도 있고 역모죄로 벌을 받아 유배나 사형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이첨은 추국이 조기에 끝내기를 간절히 바랬으며, 추국의 진행에 따라 자신과의 관련의 유무가 이이첨의 생사 여부를 결정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이첨은 역모에서 살아나게 됐는데, 왜냐하면 신경희가 국문장에서 이이첨과 관련이 된 것을 말하지 못해, 추국이 난감에 빠졌기 때문이다. 신경희는 어떡해서든 이이첨을 살리기 위해, 종친인 인성군과 봉산군수 윤공과 백령첨사 윤숙, 장령 윤길, 정언 양시진 등이 역모를 꾀했으며,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해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했다. 그래서 이 반역의 결과로 추대 될 왕족으로 신경희의 사촌 누이의 양아들 능창군을 지목했다. 그 근거라는 게 임금의 관상과 명운, 국운 길흉을 멋대로 점을 치고는 능창군이 40년간 치평할 임금이라는 점괘를 내보였다는 난언(亂言)에 가까웠던 주장이었다.

신경희의 거짓말로 인해 주모자로 지목된 윤길, 양시진, 윤공, 윤숙, 인성군은 극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반역을 시인하여 유배를 갔다. 능창군을 추대하는 거짓말을 하며 인성군과 능창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누명을 씌우고 국문장에 끌려 오게 만들었던 신경희와 윤길, 양시인 등은 국문 도중 참살당했다. 능창군도 역시 이때 어이없게 잡혀와 창덕궁 인정문 뜰에서 광해군에게 직접 심문을 받기에 이르렀고 이후 옥에 갇힌 뒤 강화도 교동군으로 귀양을 떠났다. 이 사건은 원래 신경희가 이이첨과 관련된 것으로 추국이 시작했고, 폐모론을 주장하여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이이첨을 제거해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신경희는 그렇게 주장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거짓말을 일삼아 전혀 관련이 없는 여러 사람들을 끌고 오게 했으며, 거짓말을 했던 신경희를 난언죄에 처벌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의심많은 광해군은 신경희가 국문장에서 거짓말을 하든지말든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평소 인망이 있었던 능창군을 지목하여 찍고 쳐내렸다. 그래서 광해군의 그 많은 옥사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 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칼을 찬 채 석회수로 지은 밥을 받아 먹고 비참하게 살던 능창군은 견디지 못하고 모멸감과 수치심 때문에 스스로 목을 맸다.

3.1.2. 반정의 준비와 명분[편집]

광해군은 상황 조성은 다해놓고 일이 벌어져 돌이킬 수 없게되면 슬쩍 물러나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능창군을 죽는 것보다 비참한 신세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야 약과 의원을 보낸다, 자살을 병사로 보고한 지방관들을 처분한다 부산을 떨었지만 애시당초 근거도 없는 고변을 그대로 믿고 그 상황을 만든 사람이 누구던가? 평범한 왕족 능양군은 이때부터 광해군을 비롯해서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에게 복수의 칼을 갈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인조는 가만히 있다가 얼떨결에 오른 중종과는 달랐다. 엄연히 반정을 주도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중종에 비하면 자기 목소리를 냈다.

이를 두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미신 때문에 능창군을 죽이고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화병으로 죽었다고 사관의 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작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능창군이 죽은 것은 광해 7년의 일이고, 정원군의 옛집인 새문동에 서별궁(경희궁)을 지은 것은 광해 9년(1617), 정원군이 죽은 것은 광해 11년(1619) 말의 일이다. 화병으로 죽었다기에는 자식이 죽은 지 5년, 땅을 빼앗긴 지 3년이나 지난 시점이고, 오히려 아들이 죽은 다음 해에도 정원군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며 아부하기 바빴고, 광해군도 정원군의 장례식에 종친 이상의 특별대우를 해준다. 정원군의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아들과 달리 겉으로는 아무런 한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조(능양군)는 신경진, 구굉과 함께 초기부터 반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명백한 주역이었으며 심지어 인조정권에 반기를 든 반란 세력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인조 정권 수립 직후 있었던 북인잔당의 반란기도에서 거론된 명분이 인조의 즉위과정에 대한 반발이었는데 그 내용이 마땅히 먼저 소성대비(昭聖大妃)를 받든 다음, 그 명에 따라 임금을 정해야 하는데 금상(今上)은 스스로 왕위를 취했으니 옳지않다는 것이었다.[27]

광해군의 폐위에 명분이 없다는 광해군 옹호론의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폐모살제와 영건 사업으로 인한 민생파탄은 현대 대중들이 생각하는 그런 가벼운 게 아니었다. 광해군 재임기 15년간 조선의 민생은 이미 한계를 넘겨 파탄 직전에 있었다. 광해군을 죽이지 않은 건 그가 한때 왕이었고 여전히 왕족이었기 때문이지, 인조반정 명분이 부족해서라고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조선에서 왕과 왕족은 엄연히 사대부들 위의 최상위 특권계층이었고, 아무리 죄가 커도 왕족을 함부로 죽이려드는 왕은 없었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모후(인목왕후)를 폐하고 아우(임해군, 영창대군)를 죽인 폭군을 징죄(懲罪)함을 명분으로 삼은 임금이, 폐주라 하나 자기 삼촌을 죽이면 명분, 정통성이 살겠는가? 그래서 인조 즉위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광해군은 건강해야 했다.

3.2. 책봉 문제[편집]

명나라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국왕은 충순(忠順)한데 왜 폐위시켰냐"는 반응을 보였다. 반정 이후 책봉을 받으러 간 사신들은 배를 타고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자사에게 "자신의 임금을 시해한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베이징으로 가는 것도 내내 방해받았다.

어렵사리 베이징에 도착했지만, 당연히 곱지 않은 명나라 대신들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으며, 당시 명 황제는 조선 왕을 시해했다는 소문은 물론 '왜군 3,000명을 동원해 조선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까지 듣고있어서, 조선사신단은 이를 해명하는 데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 즉위하고 나서 22개월 동안 왕사(王嗣) 책봉 고명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인조 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국고에서 대량으로 썼으며, 이 과정에서 가도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완전한 도움은 아니었다. 이때 인조가 명에 쓴 뇌물의 양은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쓴 은의 총량을 능가했고, 모문룡은 책봉을 도운 것을 인조 정권의 아킬레스 건 삼아서 온갖 행패를 부리는 계기가 된다.[28]

이런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지 2년 뒤, 햇수로 즉위 3년째, 1625년(인조 3년) 되어서야 명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왕에 책봉된다. 광해군이 친명배금 정책을 따르지 않고 금수와도 같은 후금과 친하게 지내니 폐위시켜야 한다는 서인들의 논리를 도리어 명나라가 깨버린 셈이었다.[29][30]

3.3. 이괄의 난[편집]

인조 정권은 초장부터 불안했다. 집권 직후에 서인들은 남인들과 같이 정권에 참여하면서 북인에 대해 처벌을 논의했는데 이때 남이공과 김신국을 비롯한 실무 관료들은 살아남지만 북인 정권에서 권신이었거나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은 예외도 없고 가차없이 엄격하게 처벌했다. 이것이 실행에 옮겨져서 최고 권력 집단이었던 대북은 이이첨을 처형시키고, 유몽인 기자헌을 유배보내서 완벽하게 분쇄해 갈아버렸다. 반정의 명분이었던 폐모론에 소극적이었던 소북도 예외도 아니게도 처벌했는데 하필이면 대북이 숙청될 때와 같이 행해졌고, 이때 류희분이 처형당하고, 박홍구는 유배 조치에 처해졌다.

규모가 커지게 되자, 서인들 내에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지만, 북인을 그대로 살려두면 반드시 재기하여 서인에 견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북인 숙청에 대해서는 협조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북과 소북에 대한 숙청은 이뤄졌고, 이이첨, 류희분, 기자헌,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권신들은 벼락을 맞게 되었고, 그들의 가문들은 멸문지화가 나며 완전히 몰락했다. 이렇게 대북과 소북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북인 처벌에 대해 박승종은 처벌이 두려워 아들과 함께 자결할 정도였고, 이원익도 역시 한탄할 만큼 지나친 일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북인들은 이에 반발하며, 바로 광해군 복위 운동과 흥안군 인성군을 중심으로 종친을 왕으로 삼아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세우기 시작했다. 1623년(인조 1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에 유몽인은 바로 흥안군을 옹립시키고 광해군 태상왕으로 삼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이 되어 유몽인은 바로 처형되었다. 1624년(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끝난 직후에 박홍구가 유몽인과 비슷한 계획은 세웠고, 흥안군이 이괄과 한명련에 의해 같이 옹립되다가 처형당했기 때문에 옹립할 종친을 인성군으로 바꿔 계획을 꾸몄으나 이것도 역시 발각되어서 박홍구도 처형되었다. 북인 숙청을 마무리하고 이후에 서인 정권이 안정세로 돌아가자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식음을 전폐하며, 목욕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반정 공신 이괄에 대한 혐의가 공신들의 내분(논공행상)으로 이어져 이괄의 난이 일어난다. 이괄은 반정의 동료들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하옥하려고 하자 화가 폭발한다. 문제는 당시 이괄이 부원수로, 조선의 북방 군대를 사실상 전담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 하다 못해 이괄의 군권이라도 빼앗고서 숙청을 해야할 것인데 정작 군권은 그대로 놔둔 채 숙청을 시도했고, 그 결과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31]를 살해한 뒤 후금을 막기 위해 훈련받은 군사 1만을 끌고 남하하여 안주, 평양, 황주, 개성 전격전의 속도로 함락하고 수도 한성까지 점령한다. 내부 반란으로 수도 한성을 점령당한 조선 시대의 반란은 이 반란이 유일무이하다.[32]

인조는 파천하여 의자왕이 그랬던 것처럼 충청남도 공주목 공산성으로 피신하였으며 이괄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반란군은 무악재(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 경기도 이천으로 퇴각하였다가 자신의 심복들에게 살해되었다. 인조는 이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괄의 잔당에 의한 기습을 우려해 공산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괄의 목을 국왕에게 바치는 헌괵례(獻馘禮)를 거행한 뒤에야 공주목을 떠났다. 5일 동안 공주에 머물면서 인조는 문.무과를 치러 공주의 인재를 뽑았고 충청관찰사와 병사, 공주목사의 품계를 모두 올려줬다. 무사히 반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또한 그가 머물던 곳에 있던 2그루 나무에게 정3품 품계를 내렸고 그 옆에 이를 기념한 쌍수정(雙樹亭)이라는 누정이 세워졌다. 쌍수정 옆에는 인조가 공주에 머문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와 비각이 있는데, 인조를 수행한 우의정 신흠이 글을 지었고, 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이로 인해 조선 북방의 방위체계가 붕괴되었다. 게다가 후에 이괄의 부하들은 청군에 투항하고 편입되어 수도(한성)까지의 지름길을 알려줘 국방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게 된다. 결국 인조의 허술한 숙청은 북방군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핵심 인력들을 반란군&청으로 이탈시켜 조선을 공격하게 만드는 를 치른다.

참고로 인조가 피신했던 공산성 백제의 2번째 수도 웅진성[33]이 위치했던 곳으로 후에 병자호란  남한산성에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꿈에 나타나 위기에서 구해줬다는 설화와 관련지어 보면 이래저래 백제와 인연이 있는 모양새다.

3.4. 정묘호란[편집]

서인 정권은 흔히 '친명 배금' 정책을 고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반정공신들은 최명길과 같이 대부분 주화론자였다. 병자호란 직전까지 인조 정권이 (후대의 효종 같은 경우와 비교해) 적극적인 반청 정책(북벌)을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일각에선 광해군 대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계승했다는 연구도 있다. 광해군 대의 외교 관련 업무를 맡은 대신들을 유임하고, 내부적으로 후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들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친청(친후금) 정책을 표방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당시는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이 강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결국 이런 친명 배금 정책 덕분에 인조 5년(1627, 정묘년)에 또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애초에 반정 세력의 주요 인물인 이귀 최명길 등은 주화파였다. 하지만 김자점은 친청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나중에도 그런 오명을 얻게 되지만, 당시에도 숫제 매국노 취급이었다. 이렇게 반정을 일으킨 주요 서인 멤버들을 특별히 공서(훈서)라 하는데, 광해군 시절의 북인(특히 대북)들보다 더 현실주의적인 세력들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인 외교 방법을 논한 것이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끌어들인 재야 서인들[34]은 명분을 중요시하여 척화(斥和, 화친을 배척하는 정책)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후금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고자 하는 의도는 있었을지언정[35]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꿋꿋이 상국으로 섬기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 표방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광해군 때부터 모든 조선 사대부들의 동일한 사대주의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이 엎어진 건 병자호란 이후 더이상 명나라를 도울 수도 없고, 이 청의 공격도 아닌 농민 반란으로 스스로 망해 실망을 금치 못한 뒤이다.

전쟁의 원인은 천명제 누르하치와 숭덕제 홍타이지 시절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와 정치적 원인이 컸다. 청은 기세등등했으나 산해관조차 넘지 못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조공무역을 독점하며 쌓아올린 경제력이 홍타이지 때 즈음에는 고갈되는 중이었다. 여기에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1626년까지 만주에 2년 ~ 3년 연속의 대기근이 닥치면서, 청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 이런 시점에서 청은 산해관 너머로 들어갈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선과 명나라에게 공격적인 요구를 했으나, 점점 비굴해져가는 상황이었다. 1627년에는 식량값이 8배로 뛰어 군대를 유지하기도 벅찬 지경에 이르면서, 홍타이지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또한 광해군 대의 조선은 이미 광해군과 박승종의 명을 받은 정충신이 후금의 정보를 캐내고, 홍타이지를 집중적으로 경계해 그가 후계자가 되기 이전부터 주목하며 철통 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기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36]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선 이중외교(광해군 식 외교)를 폐기하자는 척화론이 강하게 대두했으나, 정권 내부에선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실속도 명분도 챙길 수 없는 어중간한 것으로서, 확실한 화친정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명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격동하는 주변 정세 속에서 인조는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로 이중외교만 어느정도 유지했고, 때마침 누르하치 사후 조선에 대해 정벌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강경파였던 홍타이지의 등극이라는 악재를 연타로 맞이하고, 이괄의 난으로 인해 국경 방비는 아작났는데, 광해군 때의 방비의 절반만 복구해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정충신이 평가하고 인조를 설득했음에도 결국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정묘호란(1627년)을 겪게 된다. 당시 광해군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건 후금은, 다소 저항을 받았지만 계속 한성으로 진격해갔다. 이괄의 난 때문에 북방을 담당하는 방어군이 거의 무너진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37] 당시 서인 정권들도 전략 수립에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전력 공백과 반란군 진압시 병력 피해 등도 알고 있었기에 병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38]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급격히 약화된 서북 지역의 군사력 등으로 인해, 인조반정 이후 계획된 후금에 대한 군사 전략은 그대로 작동하기 힘들었다.

또한 이괄의 난 이후 강화된 기찰[39]은, 북방 무관들이 제대로 된 훈련조차 맘 놓고 못하게 만들었다. 정묘호란 중 자폭하면서까지 분전한 영변부사 남이흥은, 유언을 "조정(朝廷)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강한 적을 만나 죽는 것이 진실로 내 일이지만,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남기기도 했다. 결국 강화도로 도망쳤던 국왕(인조)은 직접 형제의 맹세를 맺는 단에 나갔고, 스스로 피를 마시지 않고 신하가 대신 마시는 선에서 후금과 형제국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정묘화약, 1627.)

그러나 후금은 어거지로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단절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사대에 대한 조공 자체에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또 가도 모문룡을 함께 토벌하기도 했다. 후금에 세폐를 보내느라 온갖 공물을 징발하는 통에 애꿎은 조선 백성들만 허리가 휘었지만, 조정에서는 대충 넘어가며 어영부영 8년이 흘렀다. 그러나 후금은 명국 정벌의 목전에서 여전히 친명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조선의 태도에 앙금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의 인조 정권은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후금과의 사이는 다시 나빠져서, 인조는 국교 단절까지 생각하게 된다.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전쟁나면 큰일난다고 막긴 했지만, 결국 둘은 인조의 눈 밖에 나 유배를 간다. 그리고 후임으로 임명된 도원수가 바로 김자점이었다.[40]

3.5. 병자호란[편집]

정묘호란 8년 뒤, 인조가 즉위한지 인조 13년(1635)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가 승하했다.[41] 이에 후금은 사신 조문단을 보냈는데, 이와 함께 홍타이지를 존호(尊號)에 동참하자는 의견도 함께 보냈다. 표면상으로야 조선이 형제국이니 함께 의논하자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이제 자신을 형이 아닌 아버지, 황제로서 모시라는 압박이었고, 이 과정에서 후금의 사절단은 조선의 호위로부터 위협을 느껴 도주를 감행했으며, 3월 초 화친의 단절에 따라 팔도에 내려진 인조의 '절화교서(絶和敎書, 후금과 외교를 단절한다는 임금의 교지/명령서)'를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형제관계와 달리, 군신관계는 명의 조공국으로서 사대가 완강했던 당시 조선 사대부로서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게다가 유교적으로 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있었다.[42] 오히려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체붕괴할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 없었다. 명이 부모의 나라에다가,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은[43]까지 있어, 그 신앙이 크게 강화되었기에 이를 저버린다면 내부적으로 반정(反正)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44] 이는 대명의리를 반정의 한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당시 조선은 이중외교 이상을 할 수가 없기도 했다. 광해군이라고 해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청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확실하게 굴복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청이 받아들일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즉, 병자호란은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4월 11일 태종 홍타이지는 존호 수여 행사를 통해 국호를 다이칭(大淸)으로,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교체하였다. 4월 11일 존호례에서 조선의 사신 둘은 황제의 나라가 아닌 형제의 나라라며 배례(拜例)를 거부하고, 다음날의 행사에서도 성찬을 걷어차는 등 의례에 강제로 참석한 것에 대해 완강히 거부하였다.[45] 숭덕제는 이들에게 국서를 주었으나, 둘은 국서를 통원보에 버리고, 그 내용을 옮겨 조정에 보고하면서, 사실상 양국의 국서 교환은 끊어져 버렸다.

1637년(인조 15년) 1월[46] 마침내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하하여 주요 성들은 쑥쑥 지나친 채로 조선을 급습했다. 인조는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강화도도 길이 막혀 못 가고, 남한산성에 갇혀버리고 만다. 남한산성에서 한동안 농성(47일 간)으로 버텼지만, 전쟁 전에 식량을 바깥으로 빼놓았기(청야전술) 때문에 결국 물자가 바닥났다. 이때 백제 온조왕과의 인연으로 온조왕사(溫祚王祠)를 건립하게 되는데 자세한 설화는 남한산성 문서 참조. 온조왕사는 후에 정조(조선) 대에 팔전 중 하나인 '숭렬전(崇烈殿)'으로 한층 격상된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출발한 각지의 근왕군(속오군)들은 고질적인 훈련도 및 조직력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며 쌍령전투 등으로 청군에게 각개격파 혹은 차단(괴멸)되었으며, 심지어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서도 청의 기동 전술에 휘말려 흩어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도망친 병사들을 다시 수습하는 과정도 일이고, 재조직해 다시 공격을 할 때는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일부 승전을 거둔 근왕군들도 삼전도의 굴욕을 거둘 때까지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자점의 주력 함경도 근왕군은 한번 털린 이후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47]

이괄의 난의 영향으로 중요지점에는 중앙의 측근들만 기용하고 국내 감시가 너무 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병자호란 때도 도원수 김자점과 중요한 요충지인 강화도의 장신, 김경징 같은 무책임과 무능력자들을 임명했는데, 최소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인조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각지의 사령관들을 잘못 임명한 것이지만, 당시 조선군이 집단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감시한 것도 있다. 이괄의 난 이후 기찰(감시와 통제)이 심각해졌고, 군 지휘관들도 트집잡히지 않기 위해 훈련 자체를 피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모문룡 밑에 있다가 청에 전향한 수군들까지 상대하게 된 강화도에선 김경징의 직무유기 이상의 망나니 짓으로 말미암아 몽골 침입 때도 굳건했던 강화도가 함락당해 그곳으로 피난한 왕자들이 포로로 잡히는 참극까지 벌어졌다.

3.5.1.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편집]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의병의 구원을 바라면서 47일 동안 농성했으나, 각지의 근왕군마저도 청군에게 전부 각개격파(괴멸)되어 더이상 희망이 없자 김류, 최명길 등이 "피폐(皮幣), 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 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청하고 소현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자, 결국 주권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항복하여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를 취하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한다.

야사에는 인조가 이것을 하다가 소리가 안들린다고 홍타이지한테 한소리 듣고 소리가 더 나게 이마를 찧다가 피까지 났다고 하는데 한국사에서 왕이 몸소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린 최대의 굴욕[48]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굴욕으로 인하여 인조의 권위는 완전히 바닥을 치고 내려갔고 인조실록 15년(1637, 정축년) 1월 30일 기사를 보면 삼전도의 굴욕 이후 창경궁으로 환궁하기 위하여 한강 소파진에서 배를 타는데 신하들이 인조보다 먼저 타려고 인조의 옷을 잡아당겨서 밀어내기까지 하면서 배에 올랐을 정도로 조선왕조의 기강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인조는 왕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개망신을 당했는데도 신하들을 처벌하지 못했다.[49]

청은 왕(인조)에게 굴욕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자와 왕자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한 굴욕을 후세에 길이 남기도록 비를 세우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줄여서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된다.[50] 다시 말해 조선을 침략한 적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스스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현대까지도 남아있는 이 비석은 당시 유교 국가이자 명에 대한 사대를 견지해온 조선의 입장에서 실로 길이길이 대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내내 두고두고 조선의 수치(獸恥)를 상징하는 표시로 남았으며, 한국사의 흑역사로 치부되어 현대까지 수난을 겪었다. 청의 국력이 약해진 구한 말부터는 당연히 보복의 대상이 되어[51] 훼손의 운명을 겪었다. 고종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무너지자 바로 삼전도비를 파묻었고, 일제가 이를 다시 일부러 복구했으나 이번에는 1956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당시 문교부에서 치욕의 상징이라며 또 파묻었다. 1963년 이걸 또 꺼내서 다시 훼손하지 못하게 사적으로 지정했는데 이번에는 2007년 2월 3일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서울 한복판에 국가적 치욕이 버젓이 서 있는걸 볼 수 없다며 페인트로 훼손을 가했다.[52] 그러다 약 3개월이라는 시간 끝에 복원에 성공했다.
 
 
페인트로 훼손당한 사적 101호 '삼전도청태종공덕비'
훼손된 삼전도비는 정부에서 정성껏(?) 복구해 조선 시대의 원위치로 옮겨 세워놨다. 관련 기사 허나 아무리 반면교사적 가치가 있다고는 해도 이쯤 되면 좀 안타깝다. 하지만 비록 치욕의 역사라고 해도 역사는 역사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치욕의 역사라 해서 무시한다면, 자기 정권에 유리하게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보수 극우정권이나, 이념에 따라 광기적인 반달리즘을 자행하였던 중국 홍위병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들 또한 이를 통해 후세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3.6. 말년[편집]

병자호란의 패배는 인조가 무능으로 일관한 것과는 별도로, 당시 조선군 자체가 임진왜란, 사르후 전투,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을 겪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탓에 막장이었던 것도 있어서, 그나마 실드(?)를 쳐줄 구석이 약간은 있다.[53] 하지만 소현세자의 일가를 풍비박산 낸 것은 정말 비정하다고 욕을 먹는다. 또한 궁궐 뒷부분(후원)에 연못을 파고 잔치를 자주 벌였으며, 궁녀들이 들고있는 가마에 타고 놀았고, 그 가마에 떨어져 다친 적도 있었다.

만약 인조에게 다른 아들이 없었거나 소현세자가 원손이 장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살았다면 싫어도 데려가야 했겠지만 소현세자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요절했고 인조에겐 무술연마를 즐겨하는 신체 건강한 차남 봉림대군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 의료사고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은 뒤 인조는 봉림대군(효종)을 후계자로 세운다.[54]

이는 종법 질서에[55] 맞지 않는 일이라서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주의적으로 생각하면 인조와 세손의 나이차, 혼란스러운 대외 상황와 같은 충분히 신하와 선비들을 설득해볼만한 사안이었는데, 인조는 설득은 시도도 하지 않고 원손이 왕 노릇하기에 부족해보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다가 김육 등의 반발로 안 먹히자 뒤늦게 원손의 나이를 꼬투리 잡아 핑계댄다. 물론 이후에 소현세자 일가에게 했던 잔혹한 처사를 볼 때 딱히 진정성은 없어보이며, 오로지 왕의 권위와 모략으로 반발을 찍어 눌렀다.

당장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소인배 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 수가 없다!!"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린 다음에 이들 중 일부는 너무 일찍 올려서 누가 봐도 넌씨눈 소리를 들을 짓을 했기는 했지만 내용 자체는 맞는 말이다.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면 당연히 이런 류의 상소는 승계권을 손보려했던 인조의 의중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다. 신하들이 이런 내막까지 알았을 리는 없지만 이시백, 이시방 형제와 김육 등의 반대를 모두 물리치고 봉림대군(효종)을 다음 세자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 김자점이었다.

시류를 잘 읽는 현실주의자 면모가 강했던 김류는 이러한 인조의 의중을 짐작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이며 다만 이후 강빈 사사만은 반대했다. 김자점은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쓰려고 인조가 남겨 중용한 매우 영악한 인물이었다. 인조가 원손에게 후사를 잇게 할 수 없다고 강변하자 김류는 양녕대군을 거론하고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냐는 반박을 받았다. 인조가 재차 원손이 총명하지 못하다고 하자 김육은 자신이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인조는 "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지위로 눌러 끝끝내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전위대 역할로 조정의 여론을 흔들어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운 뒤 인조는 소현세자 일가가 봉림대군에게 걸림돌이 될 거라 스스로 단정짓고 소현세자 일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김육 말마따나 어린 원손은 뚜렷한 책(꼬투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표로 삼은 게 원손의 어머니이자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이었다. 강빈의 품성이 드세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원손이 어려 트집잡을 게 없으니 대신 어머니를 타겟으로 돌려서 노린 것이다. 그리고 인조는 광해 대북 소성대비 영창대군을 궁지에 몰 때 써먹었던 저주를 자신이 활용했다. 뒤숭숭한 궁안에 소용 조씨를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었고, 조씨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조의 사주 아래 행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후에 큰며느리 강빈마저 비정하게 죽였던 인조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죽고 4년 뒤 인조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1649년 초부터 병석에 누워지내기 시작했다. 결국 날씨가 한창 더워진 인조 27년인 1649년 6월 어느 날,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학질(말라리아) 증세로 돌연 승하한다. 실록에는 며칠 전부터 감풍(憾風) 등의 증세가 있어 계속 침을 맞았던 왕이 갑자기 두드러기 오한이 났고, 의원이 진찰한 결과 학질 증세가 있다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왕의 평균수명 40세임을 감안하면, 55세까지 살았던 인조가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 단명했다 말하긴 힘들지만.

4. 치세와 정책의 영향[편집]

조정은 병자호란으로 기존에 세웠던 집권 명분(정통성)이 약해지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왕의 권위가 땅바닥에까지 떨어지자, 내부에서부터 정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고, 이에 기존에 상당히 느슨하게 적용되던 성리학적 종법 질서를 급격하게 강화해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때문에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었고,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烈女)라는 이름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평생 수절해야 했다. 환향녀를 비롯한 환속 문제는 인조도 딱하게 여겼는지 환속 금액 상한 제한과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지키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인조 본인부터가 불탄 한양과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문제를 인식하고 바꿀 생각은 안하고 후안무치한 인간인지라... 설사 인조가 정말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민생근본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더라도 병자호란으로 인해 왕권이 맨틀을 뚫고 들어간 각자도생의 상황인지라, 사직하거나 반대하는 신하들 때문에 제대로 정책을 시행할 수도 없었다.

당시 인조의 왕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예로 들자면, 삼전도의 굴욕 이후 한양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신하들이 자기가 먼저 배를 타겠다고 인조를 밀치면서 탈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임금을 밀치고 자기가 먼저 배를 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역죄였다. 추락한 왕권이 다시 회복된 것은 효종 - 현종기를 거치면서였다. 그러나 위의 예시처럼, 할수있는 선에서는 상식적인 정책을 시행하려는 시도는 했다.

이후 소현세자를 남 대하듯 철저히 박대하고, 급기야 아예 후계를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으로 바꿔버리면서 왕권의 정통성이 약해지게 된다. 당장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즉위 후에도 한동안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고, 이후로도 신하들에게 책 잡힐 행동은 하지 못했으며, 죽은 다음에도 예송논쟁에서 보듯 계속 시비에 시달렸다. 정통성 문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워진 현종도 클 대로 큰 산당을 제어하는 데 고생을 했고, 결국 숙종 대에 가서야 왕권이 다시 강력해졌다.

인조 초반에는 모문룡이 죽을 때까지 가도에 보낸 군량미가 매년 3만 석이며, 이마저도 모자라면 모문룡이 가도 주변 조선인들을 약탈한지라, 병자호란 시기까지 인조 정권에서 낭비한 세수는 26만 8천 7백여 석(= 약 5만 톤가량)으로, 당시 조선의 세수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양을 모문룡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무조건 욕하긴 힘든 게, 모문룡이 명 조정을 뒷배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병자호란 직후 조선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가도에 주둔한 명군(정규군이 아닌 모문룡 부역자들과 잔당)을 전부 쓸어버렸던 일이다. 이 때만큼은 조선도 악에 받혀 정말 쌓인게 많아서인지 확실하게 쓸어버렸다.

인조의 치적으로 꼽히는 것으로는 1. 양전의 실시, 2. 기존 경대동의 문제점 파악 및 추후 시행책 논의, 3. 공물변통론과 대동법 논의, 4. 인조 말기 흉년기의 임시방편적 구휼제도를 시행 등이 있다. 그러나 왕권이 약하여 즉위 직후 시행한 삼도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그는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데다가, 양전이 미비하여 토지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여기에 방납업자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대동법을 주창했던 남인의 이원익까지 그만두자고 주청하자 강원도 외에서는 폐지하고 만다. 그럼에도, 여론의 악평과는 달리 실제로는 통치 안정기 이후에는 조선의 경제력이 다시 회복하고 국력이 그럭저럭 신장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역사적인 의의는 있다.

다만, 교과서상에는 '대동법을 시작했다'는 타이틀만 달고 있는 광해군에, 학자들 사이에선 '진정한 대동법의 시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효종(조선)(정확히는 이때 정국을 주도해 대동법을 정착시킨 김육)과 '대동법의 확대와 정착기'인 현종에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 조도사를 뜯어고친 것도 반정으로 싸늘해진 민심 수습을 위해 내세운 것이었으며, 양전사업을 실시했다지만 이건 사실 법적으로 20년마다 하도록 규정된 것이라 어차피 해야 했던 일이다. 이걸 하지 않았던 광해군이 지나치게 무책임한 괴짜였던 것이고, 인조는 그냥 적당한 수준으로 되돌렸더니 말년의 국고가 살아나는 평범한 왕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아무일도 없었던 평화기 한정으로는 유교 탈레반 수준의 북인, 대북들이 설쳐서 귀중한 평화시대의 국력증진 시간을 말아먹은 전대 북인정권보다는 낫다는 평가.

인조 대 새로 실시된 '영정법'(영정 과율법)은 비판이 있다는 기물이 있었는데, 영정법은 전세 징수에 있어 관행화된 지 오래였던 걸 법제화하며 정리한 것으로, 당연히 거기에 추가 징수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 원래 조세 수입의 대부분은 공납이었고, 영정법이 규정한 전세 따위는 공납과 군포, 나중에 등장하는 환곡 등에 비하면 원래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나중에도 마찬가지 라는 것이다. 그걸 소작농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고 트집 잡고, 후대의 왕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늘어난 대동법으로 징수된 대동미와 군포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결작 등 공납과 군포 대신 받는 쌀들을 영정법과 상관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건 단순히 인조를 까기위한 기만적인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조 때부터 회복세에 들어선 조선 경제는 경신대기근이라는 전지구적 대재앙이 발생하기 전 수십년간 잘 나갔다. '요즘 백성들이 사치를 과시할 수단으로 실생활에 불편할 정도로 옷자락이 길게 늘리고 아무리 열심히 절약을 강조해도 비싼 것만 소비하는 풍조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툴툴거릴 정도. 그런데 이런 사치이야기는 그토록 까는 광해군 때나, 심지어 병자호란 직후나 경신대기근 도중에도 나오는 이야기들이라 헌강왕 이야기처럼 에누리해서 들어야 한다.

세종대왕이 설치한 조선시대의 소방서인 '금화도감'을 폐지했다. 필요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이후 별다른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인조가 즉위 초중반의 삽질 이후에는, 그래도 인조의 통치가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조선의 경제 회복이 워낙에 가파르게 이뤄진터라 별로 신경쓰는 사람이 없다.

인조 16년인 1638년 전라도 경상도에 우역(구제역)이 발생하였을때, 소를 수입해서라도 종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비변사 낭청 성익을 몽골까지 보내 소 181마리를 사오게 하였다. 이때 수입한 소를 번식시키는데 성공하여 한반도에서 소의 멸종을 막을 수 있었다.
비국 낭청 성익(成釴)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몽고(蒙古)에 들어갔다. 심양(審陽)에서 서북쪽으로 16일을 가서 오환 왕국(烏桓王國)에 도달했고, 3일 만에 내만 왕국(乃蠻王國)에 도달했다. 또 동북쪽으로 4일을 가서 도달한 곳이 자삭도 왕국(者朔道王國)이었고, 북쪽으로 가서 3일 만에 몽호달 왕국(蒙胡達王國)에 도달했고, 또 동쪽으로 가서 투사토 왕국(投謝土王國)·소토을 왕국(所土乙王國)·빈토 왕국(賓土王國)에 도달했다. 소 1백 81두를 사가지고 돌아왔는데, 평안도 열읍(列邑)에 나눠주어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1638) 6월 9일 경자 1번째기사>>

5.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인조/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6. 가계[편집]

선조는 또 다른 후궁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 광해군을 낳았고, 늦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정명공주 영창대군을 낳았다. 따라서 임해군, 광해군, 영창대군은 인조의 삼촌, 정명공주는 인조의 고모가 된다.[56]

왕비는 두 명으로, 능양군(綾陽君)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열왕후(仁烈王后)와, 그녀가 1635년 늦둥이를 낳다가 산욕(産褥)으로 사망하고 3년 후인 1638년에 계비에 간택된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慈懿大妃)로 불렸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 더 어렸다.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조선에서 그 유명한 정치 격론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한다.

6.1. 고모 정명공주와의 관계[편집]

할아버지 선조(宣祖)의 유일한 적녀 정명공주와는 고모-조카 관계이지만, 정명공주가 워낙에 늦둥이였던지라 나이는 조카인 인조가 더 많다.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인조와 정명공주는 서로 매우 대립하는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광해군의 치세 때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유폐되어있었기 때문에, 살벌한 광해군의 공안정국 치세 속에서는 애초에 인조와 만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를 폐위하고 서궁에 유폐시킨 뒤 죽이려고까지 한 건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이며, 그런 대북파를 지원한 사람이 바로 광해군이였다. 계축옥사에서 정명공주의 동복 남동생인 영창대군을 역적의 수괴로 지목해 폐서인하여 유배시킨 뒤, 결국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요절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흉 역시 광해군이였다. 기록에는 이이첨의 소행으로 되어 있지만 광해군이 분위기 조성까지 다 해놓고, 슬쩍 빠지는 술수를 썼던만큼 사실상 광해군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대비되게 인조반정 이후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를 바로 궁궐로 복위시키고, 막대한 전답을 내려준 사람이 바로 인조였다. 만약 광해군의 치세가 계속됐다면 정명공주 모녀는 그대로 계속 서궁에 갇혀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만큼 정명공주에게 있어 인조는 조카이기 이전에 인생을 구원해 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둘이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건 사실이다. 인조는 즉위 이후에 할머니 인목왕후(소성대비)와 고모 정명공주를 후하게 대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 모녀를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그 원인은 인목왕후가 정치적 식견이나 처세에 능하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소시민적인 인물이었던 그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정명공주와 하나뿐인 사위 홍주원에게 줄 땅과 재물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국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를 사위에게 내려주며 인조의 권위를 슬슬 긁어대기 시작했다. 광해군 폐위의 명분 중 하나가 폐모살제이고 인조의 왕위를 인정해 준 사람으로 일단 숙여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겉으로는 늘 인목왕후를 우대했지만, 인조라고 그런 행동들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결국 소성대비 사후에 정명공주에게 화살이 날아가게 된다.[59]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가 죽은 지 얼마 뒤, 인조는 가벼운 병에 걸렸다. 그런데 이때 "정명공주가 저주 굿으로 왕을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날부터 정명공주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었다. 옛날 사람이라 미신을 잘 믿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기물 몇개 묻는 걸로 간단히 조작할 수 있는 굿과 저주는 왕실의 여인들을 역모에 엮어 넣을 때 가장 손쉽게 쓰이는 방법이다. 광해군 시기 대북이 칠서의 옥을 꾸몄을 때 그러했고, 뒷날 인조가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제거할 때도 그랬다.

인조는 자신의 병의 원인으로 정명공주로 지목했으나, 최명길 등은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명공주를 처벌해서 안 된다"고 주장해서 일단 정명공주는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그녀는 인조가 죽을 때까지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여염집 여인들처럼 바느질에만 몰두하며 숙이고 숨죽은 듯이 지냈다.

이 숨 막히는 감시는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죽으면서 비로소 풀어졌으나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인조의 아들 효종도 정명공주를 견제했고, 심지어 그녀의 궁녀를 죽이기까지 했다. 정명공주가 위협 없이 온전히 어른으로 대접 받은 것은 정통성으로는 누구도 비길 바가 없었던 숙종대에 이르러서 였다. 정명공주가 시집간 풍산 홍씨 가문은 홍봉한, 혜경궁 홍씨, 홍국영  영조 정조 때 권력의 실세가 된다.

7. 기타[편집]

  • 야사에 따르면 백성들에게 뒷말로 우리 왕은 외모 밖에 볼게 없다라는 말이 떠돌았다는 것과 인조 외모에 의해서 미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둥 또는 오랑캐들과 청나라 사신들이 인조 외모에 감탄했다는 일화가 떠돌고 있다. 다만 이 일화들은 모두 현대에 전해지는 출처 미상의 사실 무근으로 보인다. <인조실록>에 1줄이라도 저런 일화에 대해서 언급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청나라 사서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내용이며 여러 주요 야사책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61] 그리고 아버지 원종의 외모가 당시에 외모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는데 초상화를 보면 현대 미남상 기준과 많이 다른 걸 엿볼 수 있다.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어필로 행서체로 적혀 있다. 대대로 필체가 반듯한 조선 왕가의 특질은 계승된 듯.[62] 다만 필체를 남기는 것 자체를 싫어해 상소에 대한 비답도 내시들에게 베끼게 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의 송파도서관에 세워진 일종의 미담 동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인조를 업고 피신한 나무꾼 서흔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서흔남은 <인조실록>에도 등장하는 실존 인물로 대장장이 나무꾼일을 하는 낮은 신분이였지만 포위된 상황에서 남한산성 외부의 근왕군과 연락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로로 양반이 되고 벼슬까지 제수받았다. 인조를 업고 직접 피신시켰다는 전설이 가장 유명하며 인조가 피난 당시 입던 곤룡포를 하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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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도서관의 서흔남 동상

8. 대중매체[편집]

병자호란이라는 사상 초유의 국치를 야기한 국왕이라는 불명예와 더불어 갖은 실정과 떨어지는 인간성까지 더하여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와 더불어 대한민국 매체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어떤 면에서는 연산군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왕조 임금 중 가장 대중매체에서 안 좋게 그려지는 임금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자세한 내용은 인조/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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