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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야 고찰(상주시 함창읍)

문장대 2024. 1. 26. 21:39

김수로왕이 허황후와 건국한 가야국은 김해에 본거지를 두고 경상 남북도와 전라도 일부가 가야 땅이었고 그 세가 확장되면서 여러가야로 변하였고 마지막엔 경북 고령군에 대가야갸 유지되다가 신라에 합병되었다. 상주 함창에 존재하는 고령가야는 상주시 함창과  사벌국면 일대에 번성하여 3대의 왕이 상주 함창에서 고령가야로 칭하여 존속하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상주의 고령고야와  고령군의 고령가야는 엄연히 다르다.

가야연맹을 구성하는 여섯 가야 가운데 하나로 낙동강 상류지역인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 문경 지역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가야연맹()을 구성하는 육가야()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나라이다. 뚜렷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으며, 자세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기이편()의 ‘오가야()’ 조에 따르면,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와 그 가운데 하나에서 수로왕()이 태어나 가락국()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개의 알은 각 읍()으로 가서 다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수로왕의 금관가야()를 다섯 가야에 포함시킨 《본조사략()》의 내용을 비판하며 아라가야()·고령가야()·대가야()·성산가야()·소가야() 등 다섯 가야의 명칭과 위치를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령가야는 고려시대에 함녕()으로 불렸던 오늘날의 경상북도 상주시와 문경시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함녕군()의 옛 지명인 고령군()이 본래 고령가야였으나 신라가 이를 빼앗아 고동람군() 또는 고릉현()으로 부르다가 경덕왕() 때에 고령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령군은 고려 시대에는 함녕군()으로 불리다가 고려 현종 때에 함창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1906년 월경지 정리로 일부 지역이 문경으로 통합되었으며, 나머지 지역도 일제시대인 1914년에 상주군()으로 행정구역이 통합되었다.

한편, 이병도() 등의 역사학자는 경상북도 상주와 문경 지역은 일찍부터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서 가야의 영역으로 보기 어렵다며 고령가야가 경상남도 진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학설을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근거는 충분치 않다.

참조항목 가야, 상주시 역참조항목

고동람군, 고령 가야공원 유물군, 임나, 상주시의 연혁, 육가야, 전 고령가야왕릉

[네이버 지식백과] 고령가야 [古寧伽倻 / 古寧伽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 개요[편집]

고령가야(古寧伽倻)

삼국유사에 나오는 6가야 중 하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1] 문경시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다는 설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고령에 있었던 것은 가야가  아니라 대가야이다.

2. 상세[편집]
고령군(古寧郡)은 본래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으로 신라가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3]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서 지금은 함녕군(咸寧郡)이다. 속해있는 현은 셋이다.

 

삼국사기 권34 잡지 3편 지리지

 

아라가야는 지금의 함안이요, 고령가야(古寧伽耶)는 지금의 함녕(咸寧)이고, 대가야는 지금의 고령(高靈)이며, 성산가야는 지금의 경산이니,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이다.

 본조의 사략에 이르기를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1은 금관이요, 2는 고령(古寧)[4]이요, 3은 비화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 1편 오가야
본디 고령(古寧) 가야국(伽倻國)인데, 신라에서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을 만들었고, 경덕왕이 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쳤다. 고려 광종 15년 갑지에 함녕군(咸寧郡)으로 고쳤고, 현종 9년 무오에 상주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함창군(咸昌郡)으로 고쳤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함창현

고령가야는 삼국유사 6가야 구성국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일대로 전해지고 있다. 최소한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적인 인식이었는데, 함창읍 일대에 이를 뒷받침한다고 추정되는 여러 유적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조는 근대의 역사학계에서도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과거 일본의 역사학자인 나가 미치오(1851~1908)는 "고령가야는 휴인국과 소리가 비슷하다. 가야제국의 강역 밖에 있으며 가야산과 많이 멀다. 경상도 북서쪽에 치우쳐있어 신라와도 떨어져있다."라고 말하며 기존의 기록을 큰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인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학에 실증주의가 도입되면서 이런 전통적인 인식은 여러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함창은 일찍부터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가 되었던 지역이였고, 기타 가야계 소국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북쪽에 위치해있으며, 당장 함창 바로 남쪽에 진한계 국가인 사벌국이 존재했었다는 문제점이 제기된 것이다. 더불어 직접적으로 가야계통 문화와 연결되는 실증적인 유적과 유물이 전무하다는 점 역시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했다.[5]

때문에 엄밀히 따져보자면 고령가야가 위치했다는 함창은 가야계 소국이 아니라 진한계 소국이 자리잡고 있었다가 일찍이 신라에 병합당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고령가야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이병도 등의 역사학자는 고령가야의 '고령'이 진주시의 고지명인 '거열'과[6] 음이 비슷하다는 것과 가야제국 내 지리적 중요성 등의 이유를 들어 고령가야를 진주에 비정했다.[7] 즉, 다시 말하자면 함창 지역과는 별개로 '고령가야' 라는 가야 구성국이 진주에 존재했고 후대에 그 위치가 함창으로 잘못 비정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주시에는 엄연히 자타국과 그 이외의 가야계 국가들이 있었다는 점과[8] 비정의 근거가 미약하다는 점 등의 비판이 있기도 하다.[9] 다만 고령가야가 아예 가야계 소국인 자타국을 지칭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경우 모순점은 사라지게 되나 역시 근거가 미약한건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서 남익희, 김세기, 이영호 등의 현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상주에 있었다는 고령가야가 가야 구성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후대의 변형된 인식이란 설이 주목받고 있다. 이 주장의 경우 가야계 소국인 고령가야라는 것은 나말여초에 처음 등장한 관념적인 가상의 국가에 불과하며,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가 된다.[10]

앞서 언급되었던 실증주의적 근거들에 더하여, 고령가야의 '고령'이 한참 후대인 경덕왕대에 붙여진 이름이란 것이 이런 견해를 뒷받침한다. 즉, 함창 지역에 독립적인 소국이 존재했던 것은 맞지만 가야계 국가는 아니었고 신라에 병합당한 이후에 인식의 변화에 따라 '고령가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일단 아직까지는 정설이 없는데다가 이런저런 견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인지 현행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고령가야의 위치표기 자체를 하고있지 않다.

3. 가야계 국가인가?[편집]

고령가야에 관한 기록이 워낙 짧고 간략하기 때문에 결국 고고학을 통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고령 가야의 고분군이 있는 상주시 함창읍에 있는 오봉산 고분군은 경상북도, 상주시의 지원으로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에 의해 2021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일단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적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고령가야왕릉과 왕비릉 그리고 오봉산 고분군을 비롯한 물적 증거들이 여럿 산재해 있으므로, 후대에 고령가야라고 불린 어떤 독립소국이 상주시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 일대와 문경시에 걸쳐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다만 경상도 남부에 위치한 가야연맹과의 연관성은 발굴조사가 어느정도 끝난 다음에야 명확히 규명될 것이다.

앞서 언급되었던 주장으로 삼국사기 지리지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고령가야는 후대[11]의 인식에 기반하여 고려시대 문헌에 기록으로 남게 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고령가야 함창설이나 진주설보다 설득력은 있지만 이 역시 고고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최근에 진행된 오봉산 고분군의 발굴조사 성과 설명회가 열렸는데 6세기에 조성된 지역 최고 수장급 무덤이 발굴되는 성과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고령가야와 연관된 유물들은 출토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고분군 전체 중 일부만을 발굴한 것이므로 고령가야와 연관된 유물이 다음 발굴조사에서 드러날 수도 있다. #

4. 왕사[편집]

대수
재위기간
1대
고로왕 백진(古露王 白珍)
42~156
(115년)
2대
마종왕(摩宗王)
156~220
(65년)
3대
이현왕(利賢王)
220~254
(35년)
고령가야 왕가의 후손으로 알려진 함창 김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고로왕 백진[12]에서 시작해 이현왕을 끝으로 3대 215년만에 첨해 이사금에 의해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족보는 윤색과 과장, 조작 등의 왜곡이 심해 사료적 가치는 가장 낮게 여겨지지만 고령가야의 경우 워낙 기록이 적어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고로왕이 110년 재위한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아 그냥 넘어갑니다.

5. 관련 유적[편집]

  • 전 고령가야 태조왕릉 :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 위치해 있으며 고령가야의 태조가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무덤이다. 함창 김씨 족보에서 초대왕은 고로왕이기 때문에 '고로왕릉' 또는 왕비릉의 서편에 있어 '서릉' 이라고도 불린다. 선조 때인 1592년에 경상도관찰사 김수와 함창현감 이국필이 ‘고령국태조 가야왕릉’ 이라고 적힌 묘비를 발견하여 태조왕릉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전 고령가야 태조왕비릉 :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 위치해 있으며 고령가야의 태조의 왕비가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무덤이다. 태조왕릉의 동편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동릉' 이라고도 불린다. 일단 왕릉과 왕비릉 모두 삼국시대의 원형봉토분 양식이긴 하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다.
  • 오봉산 고분군 : 함창읍 신흥리에 위치해 있는 삼국시대의 무덤군이며, 약 700여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도굴당해서 훼손이 심각하다고 한다.[13] 현재는 유적보존 겸 도굴방지 차원의 발굴조사에 들어간 상태이다.
  • 왕도골 : 숭덕산의 밑인 이안리, 가장리의 경계에 위치하고 역곡리와 접해있는 지역으로 고령가야의 왕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근처에 이안천이 흐르며 '함창현지' 등의 문헌에선 '왕도동(王都洞)' 이라고도 부른다.
  • 남산고성 : 오봉산 자락에 있는 삼국시대의 포곡식 산성으로 고령가야의 왕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기타 구전으로 전해지는 지역들 #

다만 이러한 유적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나 구전에 지나지 않아 제대로된 발굴조사와 후속연구가 있기 전까진 무엇 하나 확실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현대 한국 역사학계에서 부정되는 기자 관련 유적이나 전승들도 평양 지역에 산재되어 있고 전구형왕릉의 사례나 발굴 결과 연대가 전혀 맞지않는 신라왕릉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후대에 덧붙여진 전승일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6. 여담[편집]

  • 한자는 '古寧伽耶'인데, 경상북도 고령군(高靈)과는 한자가 다르다. 하필 그 경북 고령에는 대가야(반파국)가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가야 이름 외울 때 헷갈리는 이름 중 하나다.
  • 후삼국시대의 상주에서도 일종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령가야가 아닌 사벌국의 부흥운동이었다. 후삼국시대에 상주에서 나타났다는 세력에 대해서는 후사벌국 문서 참조.
  • 6가야의 위치를 표기하고 있는 역사 지도들을 찾아보면 고령가야는 보통 진주시 상주시 둘 중 하나에 비정되어 있다. 위치에 대한 양측의 주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표기했기 때문인데 상주설을 따라가는 지도의 경우 가야의 영역이 북쪽으로 길게 뻗는 식으로 그려진다.
  • 일부 유사역사학 단체와 지지자들은 고령의 대가야와 구분한답시고 '고녕가야'라고 마음대로 고쳐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정식명칭은 엄연히 '고령가야'다.
  • 특이하게도 불교계 쪽에서 고령가야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이병도 식민사학자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같은 환빠들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거나 이덕일을 학술대회에 초청하는 등 사실상 환독에 오염되어 유사역사학의 길로 빠져버린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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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 · 기구와 단체 · 역사 인물

가야

고대에 낙동강 일대에 있었던 6개 나라의 연맹 왕국

요약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변한의 12개 작은 나라들을 통합해 세운 연맹 왕국이다.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상주의 고령가야 등 여섯 나라가 있었다.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었으며, 가야의 문화는 신라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시대
삼국 시대

목차

  1. 심화

풀이

고구려백제신라 등 3국이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갈 무렵 낙동강 중 · 하류 지역에서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자리를 잡아 갔다. 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통일된 국가 체계를 갖추지는 못한 채 ‘간’이라는 부족장들이 각각 자신의 영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신비한 일이 일어나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어느 날 부족의 간들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령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구지봉(옛 구수봉)에 가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하고 노래하며 춤을 추면 임금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간들이 예언대로 했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 상자가 내려왔다. 상자 안에는 여섯 개의 황금알이 있었는데, 그 알에서 여섯 명의 아이가 나와 각각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나라 이름은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였다. 이후 가야 왕국들은 서로 도우며 발전했다. 가야에서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기름진 평야를 바탕으로 벼농사가 발달했고,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해 중국과 왜(일본)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다. 발달한 문물을 왜에 전해주었는가 하면, 바다를 주름잡는 해상 강국이 되어 신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가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자, 가야는 차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가야는 통일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여전히 작은 나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힘이 약했던 것이다. 게다가 가야는 5세기에 백제,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결국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어 가야국은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① 가야는 한반도에서 가장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하는 나라였다. 솜씨 좋은 장인도 많아서 가야의 철기는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② 철을 제련해 만든 말갖춤으로 말을 장식한 가야의 병사. 한때 가야는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군사력이 강했지만, 통일 국가로 성장하지 못해 점점 약해졌다.

심화

가야는 통일 왕국을 세우지 못한 채 각각 신라로 흡수되었다. 먼저 흡수된 곳은 여섯 가야 가운데 가장 힘이 강했던 금관가야였다. 532년에 금관가야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한 뒤 차례차례 신라에 합쳐졌으며, 562년에 마지막으로 대가야가 흡수되면서 가야는 완전히 사라졌다. 신라는 가야 유민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왕족은 귀족으로 대접했다. 삼국 통일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도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가야금을 전한 우륵도 가야 출신이었다.

가야는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곳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정교한 솜씨뿐 아니라 동물이나 사람 모양의 독특한 가야 토기도 인기가 높았다.

관련이미지

가야 토기출처: 학습용어 개념사전

연관목차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 - 고대에 낙동강 일대에 있었던 6개 나라의 연맹 왕국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7번지에 위치한 왕릉으로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고령가야는 기원전 낙동강 일대인 함창, 문경, 가은 지방을 영역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로, <삼국유사>의 5가야조와 <삼국사기>의 고령군조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42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섯 가야 중 하나이며 상주 함창읍은 고령가야의 도읍이었다. 조선 선조 25년1592)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함창 현감 이국필 등이 묘 앞에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하여 가야왕릉임을 확인했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숙종 38년(1712) 왕명으로 묘비와 석양 등의 석물을 마련한 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묘역이 정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1971년 함창 도시계획 당시 보존구역으로 결정되고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상주시와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매년 10월 1일과 강생일인 3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