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과 최질의 난-고려 8대 현종시
- 최초 발생한 무신의 난(1014년) 2018. 3. 14. 7:00 여요(거란과 고려 전쟁) 2차 전쟁 이후 복구 작업에 열중했던 현종에게 심각한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 강조의 정변 때문에 현종이 즉위했기에 즉위 초반에는 강조를 비롯한 서경 군벌들에게 눈치를 봐야 했고 요나라와 2차 전쟁 후에는 전공을 세운 장병들에 대한 보상과 포상 문제가 걸림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 후였기에 복구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고 나라의 재정이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한국사 최초 발생한 무신의 난이 발생하는데 이른바 김훈, 최질의 난이 그것입니다. 김훈, 최질의 난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서 문신, 무신 할 것 없이 신하들의 녹봉 주기에도 빠듯한 1014년이었습니다. 중추원 일직사 황보유의가 중추원사 장연우에게 건의해 무관과 군인들에게 나누어준 영업전을 문관들의 녹봉으로 전환해 지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쟁 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무관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1014년 11월, 여요 2차 전쟁 중 통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공으로 상장군이 된 김훈과 최질이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잡아 구타한 다음, 현종에게 달려가 영업전의 반환과 6품 이상의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임할 수 있도록 요구합니다. 물론 죄가 있어 보이는 영업전의 타용을 제외하고라도 무신이 문신을 구타하고 국왕에게 욕보이며 무리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당시 김훈은 삼수채 전투에서 학살에 가까운 죽음을 느끼며 도망친 고려군을 완항령에서 구해냄으로써 영웅이 된 인물이었고 최질 또한 삼수채에서 완패한 고려군을 수습하여 통주성에서 끈질기게 요에 저항하여 성을 사수한 영웅이었습니다. 병사들의 존경심을 한 몸에 받던 와중에 도를 넘어 권력을 탐한 것입니다. 무신들의 난에 당황한 현종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황보유의 등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또한, 무신들은 어사대와 삼사를 금오대와 도정서로 각각 개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벌어진 김훈, 최질의 난은 11월부터 1015년 3월까지 5개월간 국정을 농단하며 지속되었고 현종은 새로운 위기에 빠집니다. 김훈, 최질 등의 숙청 및 이자림(왕가도) 현종은 확실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사돈이 되고 덕종 때 정국을 주도했던 이자림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있던 전 화주방어사 이자림은 일직 김맹과 협의하여 현종에게 옛날 한 고조가 운몽으로 한신을 끌어내 제거한 고사를 전해줍니다. ▶비취색이 특징인 고려청자. 문벌귀족이 있었기에 부티나는 고려청자는 더욱 발달하게 됩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CC BY)de CalaisⓒWikimedia 김훈, 최질 등의 무신들을 한 곳에 유인하여 일망타진할 계획을 현종과 공유한 것입니다. 현종은 즉각 이자림을 서경유수판관에 제수한 다음 모의합니다. 김훈, 최질 등의 무신들과 대신들을 서경의 장락궁에서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이윽고 김훈을 비롯한 무관들이 대취하자 이자림은 서경군을 동원해 김훈, 최질, 이협, 최가정, 석방현, 이섬, 김정열, 효암, 임맹, 박성, 이상, 공문, 최구 등 19명을 붙잡아 처형해버립니다. 이로써 5개월 정도 지속되었던 무신들의 정권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현종은 귀양보낸 황보유의 등을 복직시켰고 이름이 바뀐 어사대와 삼사를 본래대로 돌려놓습니다. 현종은 무관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자림에게 왕씨 성을 하사했고 그는 왕가도로 이름을 바꿉니다. 변방 방어사를 하다가 현 국왕의 총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후 왕가도는 출세가도를 달리는데 개경의 나성을 축성한 공으로 검교태위 행이부상서 겸 태자소사 참지정사 상주국 개성현개국백 식읍 7,000호에 봉해집니다. 1030년에는 내사시랑 판삼사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덕종에게 딸을 출가시킴으로써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에 오르게 됩니다. 특히 왕가도는 현종 때보다는 덕종 때 정치색을 더욱 뚜렷이 내는데 자세한 내용은 덕종 때 살펴보겠습니다. 덕종이 빨리 죽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최초 무신의 난에 대한 평가 현종의 치세 기간 평가 중 흠이 있다면 무신들을 서경 장락궁에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몰살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잔혹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부분이 몹시 꺼림칙했는지 그때 반기를 든 무관들만 처벌했을 뿐 그들의 일가나 형제들에게는 오히려 관대한 조치를 취합니다. 전사한 장군들의 관직을 추증하였고 자손의 등용을 약속했으며, 여타 무관과 병사 1만 명에게 상을 내린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제2의 무신난이 발생하지 않게끔 조치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 관직 체계상 무신들은 문신들에 비해 홀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차별 또한 어쩔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성종부터 중시한 유교 사회가 문벌 귀족이 성장하는데 큰 역할이 되어 주었고 현종의 과한 무신들의 숙청에 힘입어 문벌 귀족이 더욱 발호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튼 1014년에 발생한 김훈, 최질의 난은 한국사 최초의 무신의 난으로 기록되었고 1170년(의종 24)에 일어난 무신 난의 선구가 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고려초기 8대현종] 김훈과 최질의 난 - 최초 발생한 무신의 난(1014년)|작성자양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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