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암정感巖亭 이안면 무운로 959 (아천리 521-1) 1653년
성균 진사였던 홍약창은 원래 낙동 지방에 살고 있던 선비였다. 왜란이 발발하여 상주성이 무너진 후 의병장 이봉(李逢)을 도와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민헌(民獻)은 가족을 안전한 곳에 피하라 이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적진에 뛰어 들어 수많은 왜병을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니 그의 말이 주인의 의관을 물고 피난 중인 가족에게 전하고 말도 기진하여 쓰러졌다. 함창읍지의 충효록에 의하면 당시 세인들이 <만고의 충효지문이라> 칭찬하였다. 부자 순국 후 미망인으로 시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 며느리 진주유씨(晉州柳氏)만이 남았는데 때 마침 며느리 유씨가 유복자를 잉태하였는지라 고부간에 약속하기를 아들을 낳으며 살아서 잘 기르고 딸을 낳으면 3대의 여자 모두 자결하기로 하고 그날부터 큰 바위 밑에서 생남 기도를 지성으로 드렸더니 영험이 있어 아들을 낳았다. 이분이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홍씨들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세인들은 하늘과 땅이 감동하여 생남 하였다 하여 당시 동명 병현리를 감암이라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약창(洪約昌) 1535(중종 30)~1592(선조 25).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자는 도원(度遠)이며, 호는 구촌(龜村)이다.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다. 지조가 굳고 용감하였다. 경사를 두루 통달하여 사리에 밝았다. 또한 입이 무거워 남의 장단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문장이 고상하고 높아 당세에 명망이 높았다. 1568년(선조 1)에 문과 급제하여 성균 진사가 되었다. 58세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장 이봉(李逢)과 정경세와 더불어 의병에 참여하여 군기유사를 맡아 분전하다 순절하였다. 아들 민헌(民獻)이 소식을 듣고는 가족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키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어 수많은 왜적을 죽이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의 말이 의관을 물고 피난 중인 가족에게 전하고는 기진하여 죽었다 한다.
남양홍씨들 선조님이 대단하십니다.초등교과서에 나와야 하는 이야기인데 아마 알려지지 않아 그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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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양홍씨 - 홍약창의 감암정(感巖亭)1653년|작성자 허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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